외전 1 IF: 하비가 오메가라면-해적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을 경우
악마든, 신이든, 뭐든 좋으니 시간을 돌려줬으면 했다.
어쩌면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그때로.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던 평온한 시간으로.
* * *
금발에 선명한 녹안을 지닌 미남자가 아침부터 술 냄새가 가득한 펍을 혼자 점거하고 있었다. 엎드린 채 머리를 비스듬하게 기댄 탓에 얼굴 전체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옆얼굴로 드러나는 높고 또렷한 이목구비와 모양 좋은 붉은 입술이 외모를 짐작게 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옆자리에 앉은 붉은 머리의 남자가 독한 시가 연기를 뿜자 그가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미끈하고 화려한 외모에 비해 어깨가 넓고 팔은 몹시 단단했다. 특유의 위압감 때문인지 흉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반대편 뺨에는 작은 흉터도 있어서 더욱 사나워 보였다.
금발의 미남자, 빅터 베르텐은 현재 몹시 심기가 불편했다. 어젯밤에 벌인 파티의 여파로 아직 머리가 지끈거렸고, 듣기 싫은 사람의 소식을 강제로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담뱃잎에 럼주를 희석시킨 것을 마시던 빅터는 믿기 힘들다는 듯 되물었다.
“그 녀석이 내 배를 탄다고?”
빅터의 사업 동료이자 유일한 귀족 친구인 레타 시잔스키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렇다고 들었네만.”
빅터가 말하는 ‘그 녀석’은 하비 스터스였다. 한때는 대귀족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는 하나 많은 이에게 존경받는 스터스 가문의 적자였다.
현 스터스가의 가주인 라힌 스터스가 오늘내일하고 있으니 적통인 하비 스터스가 차기 가주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벌써부터 파다했다.
문제는 빅터가 기존의 권위적인 귀족들과는 상성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베르텐가의 차기 가주였고, 돈을 주고 귀족이 된 그의 할아버지 레토 베르텐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다.
베르텐가의 사람들은 대대로 귀족에 대한 선망이 컸고, 모순적이게도 본능적인 혐오도 짙었다.
베르텐가가 아무리 부유해도 귀족들은 그들을 한 테두리의 사람이라 인정해 주질 않으니까.
빅터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쓴맛이 나는 니코틴 혼합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쓸며 그가 중얼거렸다.
“하비 스터스가 내 배에…….”
귀족들과 사업상 거래는 하지만 사적인 친분은 그다지 만들지 않았다.
물론 필요할 때는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러나 하비에게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목석같이 전통과 규율, 질서만 따져대는 그 뼛속 깊이 대귀족인 하비 스터스는 빅터가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상대였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자신이 정말로 천한 것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빅터가 시선을 느끼고 마주 보면 바로 고개를 돌려 버리기 일쑤였으니까. 눈빛이 닿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말이다.
“대체 왜? 내가 운영하는 건 쳐다도 안 볼 것 같이 굴더니.”
“그야 어쩔 수 없지. 지금 이스트 해를 건너는 배는 자네 것밖에 없잖나. 풍랑이 심하다고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판국에.”
“제기랄.”
남들이 배를 못 띄울 때 어떻게든 버티고 띄워서 좋은 물품을 공수해 오는 것이 빅터의 수법이었고, 그렇기에 상인들도 빅터를 신뢰했다.
더군다나 빅터는 솜씨 좋은 키잡이를 데리고 있는데, 그 사람의 노련한 배 몰이 덕분에 상품이 바다에 가라앉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빅터를 믿고 상당수의 상등품이 배에 실렸다.
급히 해협을 건너야 할 일이 있는 몇몇 귀족이나 상인들도 짐과 함께 배에 오르기로 했는데, 거기에 하비 스터스도 끼게 된 것이었다.
고요한 그 시선을 다시 볼 것을 생각하니 빅터는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빅터가 엎드려서 눈만 든 채로 물었다.
“이유가 뭐래?”
“건너가서 꼭 봐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던걸.”
평소 안정적인 것만 찾던 하비가 모험을 하는 것이 의외였다. 이 풍랑을 헤쳐서까지 만나고 싶은 사람인 건가.
‘나한테는 기분 나쁜 눈빛만 던져대면서.’
생각하자 빅터는 더 기분이 바닥을 쳤다.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꼭 봐야 할 사람이 누군데.”
소식을 알려준 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거기까진 모르지.”
* * *
출발할 때 불길하게 몰려들던 먹구름과 비바람은 항해가 시작된 지 반나절도 안 되어 거짓말처럼 말끔히 걷혔다. 덕분에 초행길인 귀족들은 한동안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대체 왜 저 고상한 도련님들이 이 험악한 날씨에도 기를 쓰고 바다를 건너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빅터는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해협 넘어 도착할 슬루인 제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노예 시장이 열리는데, 이번에 슬루인 황실에서 아끼던 오메가가 경매로 나온다는 소식이 있어서였다.
아끼던 오메가를 왜 갑자기 처분하듯 내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워낙 제국을 들썩였던 엄청난 미남이라고 소문이 나 있어 모두 어떻게든 그 노예를 잡아보려고 안달이었다.
“정말 더럽게 할 짓도 없는 놈들이군.”
“반박하고 싶지만 동의한다.”
레타 시잔스키도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빅터나 레타 시잔스키는 노예 사업은 관심 밖이었다. 위험부담도 크고, 어차피 건드려 봤자 슬루인 제국의 손바닥에서 못 벗어날 것이니까. 그들은 뱀의 머리보다는 용의 몸통을 노리는,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갑판 위에서 술을 까놓고 한가로이 노닥대던 빅터의 시야에 한 사람이 포착되었다. 그를 보며 빅터가 의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터스 경이 만나러 갈 사람이란 것도 설마, 그 노예는 아니겠지.”
레타 시잔스키가 술병째로 입에 대다 말고 피식 웃었다.
“스터스 경이? 글쎄다.”
빅터의 시선을 따라가던 레타 시잔스키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말이지.”
하비 스터스는 시끌벅적하게 어울려 노는 청년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바다만 보고 있었다. 출렁이는 배 위에서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짙은 푸른빛의 조끼를 입은 그는 허리선 위로 바짝 올라간 수대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더블릿 아래 길게 뻗은 다리가 얼핏 보기에도 굵고 탄탄해 보였다.
어깨도 넓은 편이고 체격이 좋아서 진작에 하비 스터스가 ‘오메가’라는 것을 모르는 자라면 틀림없이 알파로 오해했을 것이다. 얼굴도 일반적인 오메가에 비해 선이 굵고 알파다워서 더욱.
빅터는 갑판에 몸을 기대고 하비 쪽을 계속 흘끔거렸다.
‘오메가인 걸 매번 잊는단 말이지.’
하비 스터스와의 첫 만남부터 안 좋은 기억뿐이었다.
빅터가 그와 처음 만났던 건 막 사업을 시작하던 초창기 무렵이었다.
어린 시절 내내 사업가인 부모님을 따라 전 세계를 떠돈 빅터는 본국에서는 기반이 약했다.
베르텐가에서는 빅터의 능력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빅터는 인맥을 위해 귀족들의 사교 클럽에 참여하고 이곳저곳을 많이 다녔다.
하비와는 사냥 클럽에서 마주쳤는데 서로 쫓던 짐승이 겹쳤다. 그때 빅터는 일부러 사슴의 다리에만 약간 상처를 내서 천천히 모는 중이었는데, 하비가 사슴 등에 칼을 꽂아버렸다. 넓은 면적에 칼을 꽂아버리면 상품으로서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빅터는 울화통이 터졌다.
거기다 빅터는 하비의 체질을 사전에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풍기는 강한 이미지나 견고하고 커다란 체격을 알파의 것으로 오인했다.
오메가였으면 살살 봐가면서 양보할 생각도 있었는데, 같은 알파라 생각하니 빼앗긴 사냥감에 대해 본능적으로 투쟁심이 솟았다. 게다가 빅터는 알파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우성 알파였다.
사실 방금 전까지도 어떤 귀족 청년에게 모욕을 당해서 기분도 그다지 좋지 않은 탓도 있었다.
‘내가 먼저 쫓던 것이었는데. 그쪽이 칼을 대버리면 어떡해? 질 좋은 사슴 가죽에 벌써 흠집이 나버렸잖아. 책임질 텐가?’
당황한 듯하던 하비는 이내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쪽이라니. 처음 본 사이에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나는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이라고 한다네. 영식은 어디서 온 누구지?’
‘됐고, 이건 내 사냥감이니 내가 가져간다.’
통성명도 거부한 빅터가 사슴을 대뜸 둘러메려 할 때였다. 가죽은 됐으니 사슴 고기라도 얻을 생각이었는데 하비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혹시 빅터 베르텐 경인가?’
‘나를 어떻게 알고 있지?’
날카롭게 되묻자 하비는 자신이 빅터를 잡았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한 듯 얼른 손을 떼었다.
‘베르텐가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요즘 귀족들의 클럽에 다니면서 이런 문제에 대해 민감해진 빅터가 바로 싸늘하게 대꾸했다.
‘아아. 돈으로 작위를 산 비천한 가문이라고?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제 타격도 없군그래.’
사실 사업을 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이런 태도는 좋지 않았다. 알고 있는데도 왠지 저 우아해 보이는 귀족 청년이 몹시 마음에 안 들어서, 빅터는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자꾸 작아지고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말 하나하나에도 품위가 깃들어 진짜 귀족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방금 전 빅터를 거만한 자세로 깎아내리던 귀족 청년과는 완전히 다른 배려 있는 말투였지만, 왠지 그게 더 기분이 상했다. 특유의 청렴한 기백과 기품에 눌려 자신을 잃을 것 같아서.
하비는 빅터가 이토록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
하비가 해명을 하려고 할 때 바람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 빅터는 갑자기 훅 들어온 하비의 페로몬에 깜짝 놀라 개처럼 킁킁댔다.
‘뭐야.’
하비를 보는 빅터의 시선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오메가였어? 알파가 아니라?’
당시 큰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이 일그러지던 하비의 그 얼굴이란.
진창 같았던 첫 만남 이후로 하비는 몇 년간 빅터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빅터는 승승장구해서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상인으로 거듭났고,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하니 자연스럽게 빅터의 곁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비만큼은 달랐다. 가끔 쳐다보는 시선에는 희미한 불쾌감이나 경멸만 섞여 있었다.
빅터는 어차피 그런 시선에 익숙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무시하고 싶어도 하비의 시선은 도무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다. 신경줄이 굵은 빅터라도 종종 와 닿는 그 정갈하고 묵묵한 눈빛은 거슬렸다. 그러다 마침내는 그 눈빛이 꿈에도 등장할 정도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싫은 인간인데 왜 자꾸 쳐다보냐고. 아예 안 보면 속 편할 텐데. 정말 이상한 놈이라니까.’
해풍에 날리는 밤색 머리칼 속에 가려진 옆얼굴에서 근심이 읽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빅터는 문득 궁금했지만 이내 생각을 지워냈다. 알아봤자 좋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빅터가 막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배가 기우뚱 흔들리더니 여기저기서 물건들이 굴러다녔다. 초행인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선원들은 아무렇지 않게 붙들 것을 잡았다.
빅터와 그의 친우 레타는 능숙하게 갑판 옆의 대를 잡고는 상황을 살폈다. 빅터가 날카로운 눈으로 배의 상태를 점검했다.
“마스트나 활대는 문제없어 보이고. 어이! 그쪽 선체는 제대로 보수한 거야?!”
“바로 하겠습니다, 선장님!”
암초 지대에 가까워지자 항해술이 좋은 키잡이라 할지라도 배가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본격적인 위험 지대에 도착하기도 전인데도 뱃멀미를 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우엑!”
“으으…….”
빅터는 갑판 여기저기에 쓰러진 귀족들을 보고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 해류에도 픽픽 쓰러지는 몰골들이란.
다른 사람들이 이 정도면 하비 스터스도 쓰러져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빅터는 고개를 돌렸다. 그 꼿꼿하던 남자가 바닥을 기는 모습이 어떨지 자못 기대되었다.
그러나 곧 의기양양하던 빅터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뭐야, 저건.’
빅터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하비는 별 타격 없이 선원들과 함께 쓰러진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뱃멀미도 전혀 없는 건가. 정말 약점이 없는 인간이다. 저 단정한 얼굴로 뱃전을 붙들고 구토를 하는 몰골이라도 보여줄 줄 알았건만. 저 상태면 웬만한 일에도 끄떡하지 않고 선상 생활을 잘해 나갈 수 있을 듯했다.
‘음? 아닌가.’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린다는 핑계로 하비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자 확실히 안색이 파리한 것이 보였다. 뱃멀미가 아예 없는 편은 아닌데,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련하기는.’
센 척하는 건지, 속없이 오지랖만 넓은 건지. 정말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속으로 혀를 찬 빅터는 그대로 하비를 스쳐 지나갔다.
‘또야.’
못 봤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비의 시선인 듯한 익숙한 느낌이 등 뒤에 한참이나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보나마나 보잘것없는 신분인 주제에 대성해서 이런 큰 범선의 선주인 것이 아니꼽겠지. 스터스가의 명문가에 대한 집착이나 우월감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기에 놀라울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하비 스터스도 타고난 신분에 목매는 다른 귀족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 여기니 빅터는 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시선이 더욱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갑판 너머 출렁이는 바다로 침을 뱉은 빅터가 막 하비 쪽을 돌아볼 때였다. 갑작스러운 페로몬이 코끝을 강렬하게 흔들고 사라졌다. 하비의 것이었다.
‘방금 뭐지.’
당황한 빅터가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알파 중 누구도 반응이 없었다.
마치 유혹하는 듯한, 묘하게 몸에 감기는 페로몬이었는데. 이걸 아무도 모른다고? 말도 안 된다. 아무래도 술이 덜 깼거나 뭔가에 홀린 것이 분명했다.
하비 스터스와 유혹이라니.
‘개가 들어도 웃을 조합이군.’
지나치게 안 어울려서 빅터는 실소만 나왔다.
* * *
선원들과 왁자지껄 호탕한 웃음이 떠도는 밤이었다. 전설의 괴물이라도 나올 법한 휘황하고 커다란 달빛 아래 술판이 벌어졌고, 몇몇 사람은 흥에 취해 갑판 위를 뛰어다녔다.
“꼼짝없이 이번에도 죽었구나 싶었는데 날씨가 좋아서 진짜 다행입니다.”
“그러니까요! 행운의 여신이 타고 있나?”
“뱃머리에 있으신 여신님이 드디어 일을 하시나 봅니다.”
“이런. 우리 여신님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말게. 귀한 분이시니까.”
웃고 떠들며 즐기던 선원들이 문득 누군가의 부재를 알고 두리번댔다. 빅터가 보이지 않았다.
“선장님은 또 어디로 가신 겁니까?!”
부선장인 레타 시잔스키가 씨익 웃으며 얼굴을 들었다.
“다 똑같은 알파 놈들인데 술맛이 나겠냐.”
“그래도 선장님 얼굴 보면 저흰 술맛이 나는뎁쇼.”
누군가가 잔뜩 술에 취해 호기를 부리자 다른 선원 하나가 두려운 눈길로 그를 말렸다.
“선장님한테 맞아봤어? 맞아보면 절대 그런 말 안 나올걸.”
“죽어. 진짜 죽어.”
다른 선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로 겁이 나는 듯 몸을 사리기까지 했다.
그때 농담을 했던 선원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우고 주변의 선원들이 일제히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아, 그래. 곧 뒈질 놈들만 모여서 술을 처마시고 있군.”
험악한 빅터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오자 선원들이 우르르 앞다투어 일어났다. 부선장인 레타 시잔스키만 손만 들어 인사를 하고는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선장님!”
“오셨습니까!”
대꾸 없이 착석한 빅터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취해 있는 선원들을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잠이 안 와서 갑판에 나와봤더니 어김없이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매일 보는 풍경이라 지나칠까 고민도 했지만, 기강 없이 흐트러진 선원들의 모습을 보니 영 신경이 쓰였다.
저쪽에서 자고 있을 누군가가 이 몰골을 본다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그걸 떠올리니 자존심이 상해서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괜히 분통이 터진 빅터가 화풀이를 하듯 선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러다 비상사태 터지면 누가 책임질 거지. 조금만 마셔. 오늘 새벽에 큰 바람이 올 조짐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이 이어지고 다시 술판이 이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며 점차 수위가 높아지니 빅터가 막 합류했을 때보다는 다소 과격하고 야한 농담도 등장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알파에게 맞는 건 작고 아담하게 한 품에 쏙 들어오는 덩치 아니겠습니까.”
“낭창한 허리를 보면 빨리 박고 싶어진다니까요.”
빅터는 선원들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혼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왜 여기서 하비 스터스가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오메가보다는 알파에 가까운 느낌의 남자였다. 실제로도 보통의 알파보다 훨씬 강해, 소드 클럽에서도 어지간한 알파는 하비에게 져서 뻗기 일쑤였다.
그는 선원들이 말하는 ‘낭창한 허리’와도 한참 먼 인물이었다. 여름에 클럽에서 벗은 상체를 본 적이 있는데, 굵고 튼튼한 허리에, 복근까지 깊게 갈라져 있는 판판한 가슴이 지금도 선명했다.
‘원래 기사 가문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안 어울리게 외교관 같은 걸 하고 있지만. 일한 지는 얼마 안 되었나.’
순간 퍼뜩 뇌리를 스치는 가정이 있었다.
‘아, 그래서 볼 사람이 있다고 한 거였나? 그 깔끔 떠는 성격에 고작 노예 하나 때문에 멍청한 경쟁에 뛰어든 건 아닐 테고.’
저도 모르게 하비에 대해 이것저것 떠올려 보던 빅터는 순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 당황했다. 하비가 배에 탄 정당한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보고 있지 않나. 이러면 하비 스터스는 다른 귀족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리고 빅터는 자신이 생각보다 하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장님?”
하비에 대한 잔상을 얼른 떨쳐 버리려고 빅터는 얼결에 되는대로 내뱉었다.
“……뭐, 보통은 그렇겠지.”
그때 저 멀리에서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감이 좋은 빅터가 고개를 휙 돌렸지만 이미 그곳에는 누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었다.
뱃멀미에 지친 누군가가 잠시 밤 산책을 나왔을지도 모른다. 일단 미심쩍음을 덮은 빅터는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누군가를 옹호하듯이 말했다.
“체격이 무슨 상관이야. 서로 기분만 좋으면 됐지.”
선원들이 저희들끼리 어깨를 치더니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낄낄댔다.
“선장님, 생각보다 낭만파시군요.”
빅터가 인상을 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어오른다, 또.”
방금 전 사라진 인기척이 계속 신경 쓰였다. 왠지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결국 빅터는 더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맛 떨어지니 가본다. 너희끼리 놀아.”
빅터는 조금 전에 사라진 기척이 있는 곳으로 다급히 가보았다. 역시나 그가 느낀 인기척이 사실이었는지, 키가 크고 체구가 큰 남자가 뱃전 쪽에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도 빅터는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보았다. 익히 알고 있는 페로몬이었으니까.
서 있는 곳이 낮과 똑같은 위치인 걸 보니 저 장소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참 이런 부분까지 하비 스터스다웠다.
빅터는 하비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바다를 함께 보았다. 흠칫거리면서도 하비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미 하비도 빅터임을 알고 있었다.
한참 말없이 나란히 서서 조용히 오르내리는 바닷물만 바라보다가, 빅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 허세는 다 끝난 건가?”
그제야 하비도 빅터 쪽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하비의 입술의 윤곽만 뿌옇게 보였다.
“무슨…….”
“뱃멀미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거지? 낮에도 상태가 썩 안 좋아 보이던데.”
하비는 대답 없이 침묵했다. 달빛만으로는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 빅터는 그가 어떤 표정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만큼은 느껴졌다.
새벽에 큰 바람이 닥칠 거라는 빅터의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기에, 벌써부터 조금씩 해풍이 거세지고 있었다. 돛이 펄럭이기 시작하고, 달이 새까만 구름에 점점 가려졌다.
그때 하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보고 있었나?”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빅터는 당황했다. 지켜보고 있었냐고 묻는 것 같아서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헤맸다. 하루 종일 하비를 보고 있었던 게 정말로 사실이었으니까. 자각도 못 한 채로 계속.
수상한 자문이 빅터의 속을 맴돌았다.
왜 계속 하비 스터스를 보고 있었지? 그렇게 질색하면서.
그러나 빅터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능숙한 사업가답게 곧장 노련한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나는 이 범선의 선장이야. 모든 걸 눈에 넣어둘 필요가 있다고. 안 보는 것 같아도 상황은 다 파악하고 있어.”
특별히 너만 본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듯 빅터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평소처럼 무시할 줄 알았는데, 하비는 또 한참 뜸을 들이다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군.”
마치 실망한 것처럼 들려서 빅터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루 종일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그때였다.
또 시작되었다. 은근하게 감겨오는 하비의 페로몬 말이다. 은은하게 밀려오는 하비 스터스의 페로몬이 기분 좋게 빅터의 후각을 사로잡았다. 시원한 물향이 빅터를 야릇하게 훑고 지나갔다. 집중하지 않으면 도저히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미약했지만 빅터는 촉이 좋은 남자였다.
‘이번엔 확인해 봐야겠어.’
빅터는 이번에는 반드시 진실을 알아야겠다 마음먹었다. 혼자 착각하는 것인지 아닌지.
“그런데,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오늘 밤은 무슨 변덕인지 나와 어울려 주는군.”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했다.
그러나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 무색하게 하비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하비가 아주 생소한 얘길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심지어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내가? 경을 싫어한다고?”
아주 긴 침묵 끝에 하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오히려 당황한 빅터가 버벅댔다.
“그야…….”
무수히 많은 이유가 빅터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말을 걸라 치면 무시한 채 그냥 지나갈 때도 있었고, 늘 자신에게 따라붙는 하비의 시선이 경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결정적으로 첫 만남이 안 좋았던 데다, 그가 생각해도 무례했다는 자각이 있었기에 하비가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 지레 믿어버린 탓도 있었다.
빅터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멈칫하는 사이, 하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날 싫어하는 건 경일 텐데.”
“뭐?”
하비가 바다 쪽을 다시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볼 때마다 표정이 안 좋았잖나.”
뭔가 크나큰 오해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말이 계속 엇갈렸다. 갑자기 억울해진 빅터가 하비에게 바싹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잠깐. 나를 보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건 그쪽이었잖아. 말은 똑바로 하자고.”
아무리 캄캄한 어둠 속이라지만 얼굴이 거의 붙자 하비의 얼굴이 보일락 말락 했다. 어둠에 익은 빅터의 눈에 하비가 조금씩 들어왔다.
하비는 머뭇대면서 천천히 입을 열고 있었다.
“그럼……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답답해진 빅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라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그건.”
그때, 먹구름에 가려 있던 달이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노랗게 쏟아지는 빛 속에서 하비의 표정도 환히 밝혀졌다.
빅터는 완전히 드러난 하비의 얼굴을 멍하게 응시했다. 윤곽이 뚜렷한 밤색 머리 미남의 얼굴이…….
‘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한 눈으로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휘이이이잉--
갑자기 배가 크게 요동치며 바람이 요란하게 불어왔다. 이제 시작인 모양이었다.
배가 기우뚱 흔들리는 바람에 갑판 위의 물건들이 조금씩 굴러다녔지만 멀리 있는 선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빅터도 익숙하게 자세를 똑바로 잡았는데, 하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얼른 뭔가를 붙들긴 했는데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힘겨워했다. 뱃멀미였다.
“욱…….”
하비가 바다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슬아슬해 보여서, 빅터는 저도 모르게 하비의 허리를 붙들어주었다. 역시 웬만한 알파 못지않은 두껍고 튼튼한 허리였다. 옷 아래로도 느껴질 정도로 단단했다.
빅터에게 붙들리자 하비는 눈에 띌 정도로 크게 흠칫했다. 괴로워 보이는 얼굴로 하비가 뒤돌아보더니 빅터를 말렸다.
“괜찮으니 놓아도 돼.”
“승선객이 떨어지면 우리 배 평판도 떨어져. 어서 하던 거나 해.”
빅터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하비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먹은 게 하나도 없는지 게워내도 아무것도 없었다. 위액만 나오는 걸 보며 빅터가 혀를 찼다.
“여태 안 쓰러진 게 용하군.”
한참이나 헛구역질을 한 하비가 갑판 위로 스르륵 쓰러지듯 앉았다. 빅터는 힘들어 보이는 그에게 갑자기 스멀스멀 동정심이 솟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친절을 베풀어야겠다 생각한 것은.
“잠시만 이쪽으로.”
빅터는 다급히 하비를 잡아끌어 선장실로 향했다. 하비가 속을 달래며 아늑하고 정리가 잘 된 선장실을 둘러보는 사이, 빅터는 병 몇 개를 뒤졌다.
“여기 있군.”
빅터가 뭔가를 챙겨 하비의 손에 들려주었다. 작은 유리병 안에 뭔가가 찰랑대고 있었다.
빅터가 내어 준 의자에 앉아 하비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건 뭐지?”
“멀미에 좋은 약 같은 거야. 선원 중에도 몸 안 좋으면 멀미하는 것들이 나오니까, 배에서 상비하고 있거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있는 거라 민망해진 빅터가 주절주절 내뱉고는 하비의 얼굴을 살폈다. 하비의 하얀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과 떨떠름한 기색이 함께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싫은 건가.
친절을 베풀었다가 괜히 빈정만 상한 빅터가 싸늘하게 손을 내밀었다.
“먹기 싫으면 돌려주고.”
빅터가 도로 뺏을 기세자 하비는 얼른 통을 제 품으로 가까이 당겼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게, 천천히 받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그 온도 차이가 재미있어서 빅터가 피식 웃자 하비의 얼굴이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경이 챙겨줄 거라 생각도 못 해서 그만.”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피부색이 더 하얬다. 색이 변하는 것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워낙 여기저기 쏘다니는 데다 바다 위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제법 그을린 빅터 자신과는 많이 달랐다.
만지고 싶을 만큼 부드럽고 깨끗해 보이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빅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챙겨준 게 아니라 내 배에서 시체 치우기 싫어서 그런 거다. 멋대로 오해하지 마.”
멋쩍어져서 대충 대꾸했더니 하비가 옅게 웃었다.
“고맙다. 잘 마시지.”
빅터는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간 잘 몰랐는데 웃을 때마다 눈이 휘면서 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것이 꽤 매력적이었다.
두근.
빅터는 순간 제 심장이 미약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끼고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저 재수 없는 귀족 놈이 한 번 웃어줬다고 이러는 건가.
드디어 미친 거냐, 빅터 베르텐.
“쿨럭!”
약을 마시자마자 하비가 기침을 하다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준 것을 뱉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배려에 빅터는 박수를 쳐주었다.
“오. 용케 뱉지는 않네. 처음 마시면 다들 뱉던데.”
하비가 입가를 닦으며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게 약이라고?”
“어떤 섬의 원주민들이 럼주와 섞어서 이렇게 해 먹더라고. 만병통치약이래서 그때부터 잘 쓰고 있지.”
그다지 신뢰 가지 않는다는 얼굴의 하비에게 빅터가 유쾌하게 말했다.
“뭐, 우리 배의 의사 선생께서는 매일 마시면 니코틴 중독으로 골로 간다고 하긴 했지만.”
“……한 번이면 족하군. 더 마시고 싶지는 않아.”
“하하!”
진심으로 질린다는 솔직한 하비의 토로에 빅터가 크게 웃었다.
하비 스터스와 이렇게 터놓고 일상 같은 이야기를 해보는 날이 오다니. 빅터는 얼떨떨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내친김에 지난 일도 슬쩍 끄집어내며 화해도 시도해 보았다. 분위기가 좋을 때 하비와 관계를 풀고, 그의 사업에도 도움이 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비즈니스’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무례를 사과하지. 꼼짝없이 알파인 줄 알았거든. 오메가 페로몬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야.”
사냥감인 사슴을 놓고 벌였던 사건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했는데 침묵하던 하비가 갑자기 다른 말을 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역시 경도 작고 아담한 오메가가 좋은 건가?”
빅터가 멈칫하고는 이상한 듯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한 건데.”
“보통은 그리 생각하니까. 경도 그런가 해서.”
“아아.”
역시 아까 전에 선원들과 나눈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빅터는 난감해하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별 신경 안 써. 몸집이 작든, 크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음, 오히려 큰 쪽이 훨씬 낫지 않나?”
말하다 보니 생각해 볼수록 정말로 그런 것 같아서 빅터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몸이 클수록 안을 맛도 날 것 같고.”
그러다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오메가인 하비를 앞에 두고 품평하듯 말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좋았던 분위기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지 않나.
“혹시 이것도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과하지.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야.”
사과가 잘 먹힌 모양인지 하비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심지어 들뜬 것 같기도 해서 빅터는 영문도 모르고 다행이라 여겼다. 막상 하비와 대화를 해보니 썩 괜찮은 사람이라 다시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아졌다.
‘생각보다 표정 변화도 풍부하고. 그렇게 안 봤는데.’
빅터가 하비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고 있을 무렵, 하비의 속에서도 큰 파도가 일고 있었다.
역시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빅터 베르텐은 더욱 매력적이었다.
빅터가 웃을 때마다 하비의 밤색 눈동자가 그의 입술을 담았다. 호선을 그리며 호탕하게 웃는 모양새가 언제 봐도 보기 좋았다.
누가 봐도 눈이 가는 화려한 외모, 그에 반하는 괴물 같은 체격, 재치있는 입담 등은 언제나 사람을 끌었다. 주어진 일만 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하비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라 더욱 끌렸다.
하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더 욕심내서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가 괜히 다시 적이 되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빅터가 자신을 배려해서 체격 같은 건 상관없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솔직히 이대로는 그의 마음에 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알파에게 맞는 건 작고 아담하게 한 품에 쏙 들어오는 덩치 아니겠습니까.’
‘낭창한 허리를 보면 빨리 박고 싶어진다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선장님?’
속이 너무 좋지 않아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우연히 엿듣게 된 말이었다. 빅터의 대답이 궁금해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뭐, 보통은 그렇겠지.’
그러나 역시 빅터도 다른 알파들과 같았다. 실망하여 뒷말은 더 듣고 싶지 않아 자리를 떠버렸는데, 지금의 빅터는 민망한 얼굴로 다른 말을 던지고 있었다.
하긴, 말을 걸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얼결에 마주쳤던 첫 만남 때도 그러했다.
‘뭐야. 오메가였어? 알파가 아니라?’
당황한 그 얼굴을 보며 하비가 느꼈던 건 짙은 패배감이었다. 호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어지는 노골적인 적대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알고 있어.’
그저 생각해서 해준 말이라는 것을. 그러나 아는데도 자꾸 기대가 되었다. 친절하게 대해줄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더 있다간 정말로 빅터에게 마음을 고백하거나 속내를 들킬 것 같아 하비는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제부터 조금씩 안면을 터가며 천천히 가까워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최악은 아니니 되었다.
하비가 그리 생각하며 일어나려 할 때였다.
쿵.
몸 안쪽이 간질거린다 싶었는데, 갑자기 참기 힘든 거대한 격랑이 몸속으로 뜨겁게 밀려들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페로몬 조절이 되지 않았다.
‘설마.’
당황한 하비가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놀란 빅터도 얼결에 함께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들어가 보지. 이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잠시만.”
빅터가 떠나려는 하비의 팔을 붙잡았다. 하비가 놀라 뿌리치려고 했지만 빅터의 완력이 너무 강해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빅터의 표정이 싸하게 식었다.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정말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아까 내가 준 것 때문인가?”
그게 아니었다. 하비는 말도 못 하고 숨만 몰아쉬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히트 사이클이 왔다.
입을 틀어막으며 하비는 폭발하는 페로몬을 억지로 갈무리하려 애썼다.
‘지금……? 아직 많이 남았을 텐데.’
하비는 당황한 와중에도 애써 참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세게 몰려오는 히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빅터의 체취나 목소리, 숨결까지 전부 소름 끼치도록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우성 알파가 바로 옆에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하비는 당장에라도 매달릴 것 같아 초인적인 정신력을 동원해 자제했다.
빅터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멀어져야 한다. 안 그러면 실수할 것이다. 이제 겨우 조금 가까워졌는데 이 일로 완전히 끝낼 수는 없었다. 하비는 필사적으로 빅터를 밀쳐냈다.
“괜찮으니까 이거 놔.”
“뭐가 괜찮아? 열이 펄펄 끓는데. 안 되겠어. 선상 의사한테 한번 가보…….”
빅터가 손을 빼내는 와중에 그의 손가락 끝이 하비의 손바닥을 긁으면서 빠져나갔다. 그 작은 자극만으로도 하비는 온몸에 전류가 통하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읏……!”
몸을 꼬면서 하비가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오메가 페로몬이 폭발적으로 번져 나갔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이건…….”
빅터가 하비를 일으켜 세우려다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보았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이었다. 길거리에서도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터져 쓰러지는 오메가들을 본 적이 있었기에 처음 보는 장면이 아닌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방 안에서 히트 사이클이 터진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강한 페로몬이었다.
“으으…….”
하비의 신음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빅터가 얼른 문 앞으로 뛰어가 문을 잠갔다. 혹시라도 페로몬을 맡고 이성이 나간 알파들이 문을 뜯으려 할지도 몰라서였다.
급한 대로 문틈으로 페로몬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치하고 향유고래에게서 채취한 향수도 뿌려보았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잠깐 맡은 것만으로도 바로 이성을 잃을 것 같은 엄청난 페로몬이었다. 벌써 빅터의 아래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알파의 본능을 부추기고 있었다.
‘왜 이러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빅터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러면 정말 하비를 덮칠 것 같아서였다. 그런 불상사만은 막고 싶었다.
그 하비 스터스와 섹스를 한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었고, 그건 정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욕구는 충실해서 자꾸만 하비의 페로몬에게 이끌렸다.
‘젠장. 나도 위험한데.’
하비를 부축하듯 안으면서 빅터는 최대한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스터스 경, 정신 차려. …… 미치겠네.”
거의 의식이 없어서 힘없이 몸이 미끄러지길래 빅터는 결국 숨을 참는 수고를 해가며 하비를 들어 침대 위로 옮겼다. 하비가 크기는 하지만 빅터의 체격은 더 커서 그나마 가능했다.
“후우. 이제 이걸 어쩐다…….”
옮기느라 잠깐 닿았을 때도 하비의 몸이 무의식중에 움찔움찔 떨렸다. 히트 사이클인 몸이 알파인 빅터에게 반응한 것이었다. 식은땀에 젖어서 축축한 밤색 머리칼 사이로 눈이 흐릿하게 뜨였다. 초점이 없어서 제정신이 아닌 것이 여실히 보였다.
“뜨거워…….”
호흡도 고르지 않고 들쑥날쑥했다. 그가 몸을 꼬면서 조금이라도 이성을 차리려는 듯 손톱으로 이불을 긁었다. 헉헉대면서 하비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욕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말을 걸지 말았어야…….”
옆에서 상태를 지켜보던 빅터는 하비의 중얼거림에 당혹스러워했다.
“뭐라는 거야.”
빅터는 선장실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죽을상을 한 채 초유의 인내심을 동원 중이었다. 잠깐 나간 사이 페로몬이 흘러나가서 다른 알파들이 꼬일 것 같아서였다.
빅터는 확률상 드문 우성 알파였고, 우성 알파는 보통의 알파에 비해 본능적인 자제심이 강한 편이었다.
금방 본능에 휩쓸리는 일반 알파였다면 자극적인 페로몬에 바로 무너졌을 것이다.
배 안에 알파가 많은 편인데, 그 많은 알파가 벌레처럼 꼬여서 정신 못 차리고 하비를 범할지도 몰랐다. 이런 한정적인 공간에서는 특히 막기가 힘들었으니까.
거기다 이 정도 페로몬을 바로 쐬면 돌변한 알파들이 선장의 명령이고 뭐고 눈이 뒤집혀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배 위는 항상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주기적으로 힘으로든 위압감으로든 눌러줘야 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민하던 빅터는 순간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 웃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녀석 걱정을 해주고 있는 거지?’
그 와중에도 하비는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비가 몸을 비꼴 때마다 더욱 강렬한 페로몬이 방 안에 흩뿌려졌다.
‘돌겠네. 이거 어떻게 된 녀석이야.’
살다 살다 이런 폭발적인 히트 사이클은 또 처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참았거나, 풀어주지 않았을 때에야 가능한 규모였다.
보통 귀족들은 러트나 히트가 왔을 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몸이 깨끗하고 정결한 상대를 따로 두곤 했다. 한 가문에서 지정한 최고급 창부들도 따로 있었고, 그땐 난교든 뭐든 온갖 더러운 짓이 가능했다. 교제하는 연인이 있더라도 이때만큼은 눈감아주는 것이 귀족가의 성문화였다.
빅터는 신분의 사다리를 타고 빠르게 올라온 자들 앞에서는 온갖 고상한 척을 다 하면서 뒤에서는 노예 사업이나 난교 파티 같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귀족들의 모순을 비웃어왔다.
하비도 어차피 그런 부류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헉…… 으윽…….”
하비의 목덜미와 숨결에서 흘러나오는 오메가 페로몬에 질식할 것 같았다. 빅터가 필사적으로 본능을 억누르며 하비에게 물었다.
“그동안 얼마나 참은 거야? 히트 상대는 있었고? 혹시 배에 같이 탔나? 불러와 줘?”
힘겨워하던 하비가 간신히 흐릿하게 눈을 뜨고는 말했다.
“그런 거 없어.”
“뭐?”
“한 번도, 없었어.”
빅터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스터스가 지정도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없었다고?”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 윽…….”
그러고 보니 그의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만 간간이 간다고 들었지, 하비가 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말인가 보군.’
하비는 뭔가를 필사적으로 참는 눈치였다. 힘겨워하면서도 빅터에게서 어떻게든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너도 싫겠지.’
씁쓸하게 하비를 보던 빅터가 구석으로 가서 앉아버렸다. 하비의 히트가 끝날 때까지 우선은 방 안에서 버텨볼 생각이었다. 그는 무릎을 감싼 양팔에 머리를 파묻고 얼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땀이 줄줄 흘러 목덜미 뒤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도 계속 움찔거리고 몸이 자꾸 하비가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는데. 젠장.’
슬슬 한계가 와서 몸이라도 스스로 묶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하비의 낮은 신음이 점점 더 커지고, 페로몬이 후벼 파는 것처럼 짙어졌다. 찌걱대는 물소리까지 생생히 전해졌다. 혼자 자위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빅터는 정말 딱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 도저히 안 되겠다.’
고개를 숙인 채 빅터는 하의를 벗었다. 혼자라도 빼놔야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미 끝까지 발기한 우성 알파의 페니스는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빅터는 그간 자신이 성욕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그간 딱히 러트가 심하지 않아서 운동이나 다른 일을 하면 금방 잊힐 정도로 간단히 지나가는 쪽이어서였다. 그는 문득 어처구니가 없어 자조했다.
‘성욕이 없기는.’
이토록 격렬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멀리서 하비의 뜨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삐그덕대는 침대 소리마저 야하게 들렸다.
빅터는 건실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커다란 페니스를 내려다보며 자괴감에 빠졌다.
‘하비 스터스를 상대로 이걸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나도 다 살았어.’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그는 본능에 충실하게 페니스를 잡고 세게 훑듯이 흔들었다. 어쩐지 하비의 신음이 들릴 때마다 흥분의 범위가 더 커졌다. 부정하면서도 하비의 숨소리 하나하나가 귀에 생생하게 꽂혀서 미칠 것 같았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눈을 들어 하비가 혼자 하는 것을 감상하고 싶은데, 봤다간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서 간신히 인내하는 중이었다. 소리만으로 하비의 행동을 짐작하며 빅터도 점점 속도를 높여갔다.
“헉. 허억…… 윽!”
거의 절정에 도달했을 무렵, 빅터는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손등 위를 덮는 것을 보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하비가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들킨 것이 민망해진 빅터가 괜히 큰소리를 내었다.
“이제 좀 괜찮나? 걸을 만은 한가 보지?”
하비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빅터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뭐 하려는……!”
빅터의 손을 강제로 치워 버린 하비가 엎드리더니 입술을 내려 단단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입에 담았다. 깜짝 놀란 빅터가 이를 떼어내려 했으나 하비는 요지부동이었다. 혹여 다칠까 봐 힘을 다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감안해도 하비의 체력은 대단했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 진짜 오메가 맞아?’
의문스러워하던 빅터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뜨겁고 축축한 입속에 페니스가 담기자 천국이 펼쳐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온 신경이 아래로 쏠렸다. 빠는 힘이 보통이 아니라 그저 물고만 있는데도 가버릴 것 같았다.
“윽…….”
빅터의 것을 욱여넣은 입이 터질 것처럼 불룩했다. 절반도 못 넣을 만큼 커다란 우성 알파의 페니스인데도, 하비는 고집스럽게 물고 있으려 했다. 숨이 막혀서 컥컥대면서도 끝까지 버티자 결국 빅터가 힘을 써서 그의 얼굴을 밀어내야 했다.
그러나 곧 밀려난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하비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빅터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하비를 제압했다.
쿵!
빅터가 하비의 두 팔을 바닥에 밀어 꽉 눌렀다. 버둥거리는 것을 잡고 버티고 있었지만 자칫하다가 팔이 부러지기라도 할까 봐 힘을 더 주지도 못하고 쩔쩔매었다. 아무리 하비가 오메가치고 힘이 좋아도 우성 알파를 이길 수는 없었다.
빅터가 흐릿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하비를 마주 보았다. 관자놀이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흘러내려 하비의 뺨에 떨어졌다.
“정신 좀 차려보시지. 좋아하지도 않은 인간한테 박히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그러자 갑자기 하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단련된 팔근육이 꿈틀대면서 핏줄이 터질 듯이 튀어나왔다. 마치 빅터의 말을 부정하는 것처럼 격렬한 반응이었다. 덩달아 이를 제압하는 빅터의 팔도 볼륨이 커지고 힘줄이 꿈틀댔다.
“다치니까 힘 빼. 아, 젠장!”
이러다가 정말 부러지겠다는 생각에 빅터는 얼결에 팔을 놓아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하비가 빅터를 붙들고 바닥에 패대기쳤다. 붙드는 반동에 몸이 넘어가 버려서 빅터의 등이 바닥에 거세게 부딪혔다.
쿠웅!
아까보다 더 큰 묵직한 타음이 들렸다. 하비는 만족스러운 듯 희미하게 웃더니 그대로 빅터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러곤 손을 뒤로 뻗어 더듬더듬 뭔가를 찾았다.
이제 정말 안 되겠다 생각한 빅터가 아예 하비를 묶어두려고 결심할 때였다.
하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좋아해.”
어떻게든 하비를 멈추려고 하던 빅터는 일시에 행동을 멈췄다. 잘못 들었나 의심되어 하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걸 들은 것 같은데.
“방금 뭐라고…….”
하비가 야릇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평소의 정갈한 그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흐트러진 태도였다.
“좋아하니까.”
하비는 풀린 눈으로 어서 넣어달라는 듯 엉덩이 사이로 빅터의 페니스를 비벼댔다.
“빨리 박아줘.”
엄청난 자극에 빅터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비의 페로몬이 강렬해질수록 빅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충격적인 고백을 되새기면서 빅터가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무슨 소리지? 정말인가?’
그저 본능 때문에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더 흥분되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하비 스터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그게 가능한 이야기였던가.
하지만 이 신뢰 없는 고백 하나만으로도 빅터의 페니스가 꿈틀대며 크기를 더 키워갔다. 어서 저 뜨겁고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은 오메가의 구멍에 제 몸을 넣고 싶다고 안달이었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를 악문 빅터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이거, 네 의지야. 기억이 안 나도 기억해 둬.”
초점 없는 밤색 눈동자에 대고 으르렁대듯 말한 빅터가 결국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도저히 침대까지 갈 여유도 없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빅터가 페니스를 잡고 미끈대는 하비의 둔부로 밀어 넣었다. 조금 더듬대긴 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오메가의 뒷물이 새어 나오는 구멍을 찾았다.
‘여긴가.’
거의 쑤셔 박듯이 넣었는데도 원래부터 잘 맞춰왔던 사이인 양 구멍이 꿈틀대며 빅터의 것을 받아들였다.
푸욱!
한 번에 끝까지 박는 건 무리인 것 같아 절반만 넣었는데도 하비가 부르르 떨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크읏……!”
하비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한참이나 몸을 떨어댔다. 그러다 조금 진정되자 앉은 채로 굵은 허벅지를 접고 빅터의 몸에 매달렸다.
하비는 모든 게 서툴렀다. 어떻게 섹스를 하는 건지도 모르는데, 그저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듯했다.
빅터가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눈을 번들댔다.
‘정말 처음인가 보군. 내가 할 소린 아니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하비의 팔을 잡아 올려 자신의 어깨를 붙들도록 한 빅터가 허리를 추어올렸다. 걸리적거리는 더블릿을 벗어 던지고 온전히 하비에게 집중했다.
퍼억!
이번에는 사정 안 봐주고 끝까지 올려 박았다. 좁은 구멍 속에 비상식적으로 큰 빅터의 페니스가 자취를 감추고 밑동만 간신히 보였다.
“흐으읏…….”
하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준 빅터가 다정하게, 하지만 광기 어린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울면 어떡하나.”
빅터의 목소리만으로도 하비는 흠칫흠칫 경련을 일으켰다. 오메가의 뒷물이 허벅지를 흠뻑 적실 정도로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이를 본 빅터가 기분 좋게 말했다.
“넣었을 뿐인데 질질 흘릴 정도로 좋은 건가. 응? 말해봐.”
“아윽! 읏……!”
박을 때마다 빅터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서 부풀어 올랐다. 흉기 같은 어깨도 볼륨이 커지고 있었다. 하비의 두터운 허리를 붙들고 더욱 세게 쳐올리면서 빅터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 히트가 지나가겠어? 더 허리를 놀려야지. 방금 전까지 기세 좋게 덮치던 건 어디 갔어.”
페니스로 뜨거운 배 속을 휘젓자 하비의 신음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미처 다물지 못한 하비의 입가에서 타액이 주르륵 흐르고 빅터의 등 뒤로 넘어간 팔에 힘이 들어갔다. 빅터의 머리를 감싸 안은 그 팔은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다.
멀쩡할 때의 그는 어땠더라. 빅터는 새삼 평소의 하비와 비교하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덤덤하게 대화나 주고받던 사이에서 구멍을 박는 사이까지 왔다니. 현실감이 없었다.
빅터는 하비의 일상적인 말투나 담담한 목소리가 낮은 신음에 섞여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 경이 챙겨줄 거라 생각도 못 해서 그만.’
상념을 뚫고 하비의 목소리가 불쑥 파고들었다. 흥분하여 젖은 목소리가 질척대는 물소리에 섞여 난입했다.
“좋아……. 윽, 흣…….”
정말 믿어도 되는 말인가.
빅터는 본래 의심이 많은 성정이었다. 갑작스러운 하비의 고백은 그의 의심을 키우기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백은 빅터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그를 들뜨게 했다. 생소한 감정으로 속이 울렁거리고 벅찼다. 이 간질거리는 모순이 달갑지 않아서 빅터는 허릿짓을 하면서도 그를 경계했다.
‘미친 거냐.’
단순히 히트에 정신이 나가서 뱉는 본능적인 구애일지도 모르는데. 빅터는 잠시 들떴던 마음을 억지로 떨쳐내었다. 그저 본성에 충실한 말을 진심으로 생각한 자신이 한심해졌다.
“좋아한다고? 어디서 그런 진짜 같은 거짓말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빅터는 차갑게 웃었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유분수지.”
쳐올릴 때마다 하비는 신음을 흘리며 속절없이 흔들렸다. 하비의 넓은 어깨를 내려보며 빅터는 어둡게 눈을 빛냈다.
“네가 만나러 가는 사람은 따로 있잖아. 이런 위험한 히트조차 감수할 만큼.”
퍼억! 퍽!
“윽, 읏! 으응……!”
빅터의 허릿짓이 빨라지자 신음도 높아졌다. 빅터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하비의 어깨로 굴러떨어졌다. 어깨에서 복근으로 흘러내리던 땀방울은 잔뜩 발기한 하비의 페니스 밑동까지 적셨다.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야한 남자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모습에 빅터는 아랫도리가 더욱 달아올랐다.
빅터는 하비의 단단한 가슴에 솟은 유두를 손가락으로 꼬집는 동시에 허리를 거세게 쳐올렸다.
퍽!
찰팍대는 물소리가 짙어지면서 하비는 눈을 부릅떴다. 격렬한 고양감에 전신이 떨려왔다.
빅터가 하비의 목에 짐승처럼 잇자국을 내며 굵은 목뒤를 어루만졌다. 다정한 손길과는 다른 음산한 목소리였다.
“아니면 박아주면 누구나 다 좋은 건가?”
그때 헐떡이던 하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순간만큼은 힘겨워하면서도 확실하게 의사를 표했다. 아무나 좋은 게 아니라, 너만 좋다는 걸로 보여서 빅터는 밀려오는 아찔한 환희에 전율했다. 믿기지 않는 거대한 소유욕이 하비를 향했다. 이 남자를 온전히 차지하고 싶어졌다.
빅터는 괜히 확인하듯이 몇 번이나 되물었다.
“누군지 말을 해줘야 알지. 내가 박아주면 좋은 거지? 설마, 다른 사람?”
아닌 걸 알면서 빅터는 괜히 모질게 굴었다. 지금 이 미친 듯이 날뛰는 분노가 질투인 걸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간 얼굴에 대고 빅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비는 여전히 눈물이 잔뜩 괴어서 아래로는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좋아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더욱 흥분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든 빅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들을 때마다 진짜인 것 같단 말이지.’
타액이 번들대는 하비의 얼굴이나 턱에 말라붙은 눈물, 그사이 한 번 사정한 덕에 미끈대는 상체까지. 지금의 그는 심장에 몹시 유해한 모습이었다. 이런 걸 다른 놈들이 봤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참을 수 없어서 거세게 올려쳤더니 하비는 죽을 것처럼 힘들어했다. 그러면서도 쾌감을 따라 빅터의 몸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빅터는 제 것을 모두 품은 하비의 배를 손으로 쓸면서 하비가 느끼는 곳을 더욱 깊게 찔렀다.
“읏, 윽!”
어느 순간 하비의 허벅지가 푸드덕 떨린다 싶더니 빅터의 엉덩이 가까이 붙어 있는 발가락이 휙 오므라들었다. 앞을 만져준 것도 아닌데 뒤를 박은 것만으로 절정에 오른 것이다.
빅터의 복근 위에 정액이 튀고 하비는 한참이나 더 경련을 일으켰다. 어깨나 다리가 계속 움찔대며 떨려왔다. 순식간에 좁아진 구멍에 빅터도 사정할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이윽고 하비가 숨을 몰아쉬며 빅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아직 히트의 열기는 가시지 않아 예민한 몸은 은근하게 아래를 비비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또 빅터의 페니스는 구멍 안에서 커지고 있었다. 페니스를 쥐어 짜내려는 것처럼 구멍이 오물거려서 빅터는 헛웃음을 지었다.
‘금방 끝나진 않겠군.’
그런데 하비와의 남은 시간이 기대가 되는 건 또 무슨 심정인 건지. 빅터는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충동적으로 하비의 턱을 잡고 입술을 붙여 혀를 집어넣었다. 축 늘어져 있던 하비는 빅터의 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하비의 손이 자연스럽게 빅터의 목뒤를 움켜잡았고 혀가 입술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얽혔다.
한참이나 키스가 이어지다 숨이 막힌다 싶을 때쯤 빅터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빅터는 가슴 안쪽이 묘하게 간질대는 것을 드디어 인정했다.
멍한 밤색 눈동자를 보며 빅터가 피식 웃었다.
“조금 믿어보고 싶어졌는데, 그 좋아한다는 말.”
빅터가 사정의 여운에 잠겨 있는 하비를 안아서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렸다. 버둥대는 그의 승모근에 입술을 묻어 제압하면서, 빅터가 눈만 흘끗 올려 시선을 마주치고 말했다.
“나머지는 침대에 가서 하자고. 제대로 해줄 테니까.”
* * *
레타 시잔스키는 아침부터 하품을 하며 급히 끌려왔다. 눈뜨자마자 빅터가 거의 멱살잡이로 그를 깨우더니 심각한 얼굴로 선장실까지 데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꾸조차 없이 거칠게 걸어가는 빅터를 보며 레타 시잔스키는 엉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그토록 깨기 힘들어하는 아침잠이 단숨에 달아나는 기적을 맛보았다.
“호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선장실의 침대에서 잠이 든 하비와 떨떠름한 얼굴의 빅터를 번갈아 보았다. 멀리서 조타수가 보이는 위치였는데 커튼을 모조리 쳐놓은 것이, 안 봐도 훤했다. 게다가 방을 열자마자 뒤엉킨 두 사람분의 페로몬이 코를 찔러댔다.
“했네, 했어.”
빅터가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길게 훑어내렸다.
“좀 닥쳐. 나도 미치겠으니까.”
“어쩌다가 했냐? 영원히 앙숙처럼 지낼 것처럼 굴더니.”
친우의 눈이 게슴츠레 늘어나는 것을 보고 빅터가 찔린 얼굴을 했다.
그나마 새벽에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페로몬이 잔류하지 않고 금방 날아가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파고도 높아서 선원들 외에는 다들 얌전히 일찍 잠들었고 선원들은 원래 빅터의 선장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간혹 청소하는 선원이 오긴 했는데, 어젯밤에는 빅터가 미리 오지 말라고 말해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불시의 사고가 있었지.”
“뭔데. 이름만 꺼내도 질색하던 사람과 한 방에 뒹굴 수 있는 사건이란 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레타는 턱을 만지작대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니까, 스터스 경은 처음이라는 거지?”
“따지자면 나도 처음이지.”
“네가?”
헛웃음 짓던 레타 시잔스키가 불쑥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빅터는 러트가 올 때마다 그냥 간지러운 정도라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던 특이 체질이었다. 확실히 빅터의 러트는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같은 알파가 봐도 혹하는 비율 좋고 아름다운 얼굴이나 몸만 봐서는 오메가를 여럿 끼고 살았을 법한 문란한 인상이었지만, 의외로 빅터는 그런 쪽으로는 산뜻한 편이었다. 그저 관심 자체가 없었다.
“아, 맞다. 그랬지. 우성 알파 주제에 그따위로 몸을 쓸 거면 날 달라고 했던 기억이…….”
가차 없이 레타의 말을 자른 빅터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무튼, 상황이 곤란해졌어.”
“했으면 한 거지. 곤란할 것까지야.”
빅터가 심란한 얼굴로 자고 있는 하비를 돌아보았다.
“아직 안 끝났어.”
“뭐가?”
“스터스 경의 히트 사이클. 지금은 잠깐 기절한 거고.”
“뭐?! 이 지경까지 했는데 아직?”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레타가 어깨를 내놓고 곤히 잠들어 있는 하비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 정도 페로몬이면 반나절이면 끝나야 정상 아닌가.”
레타 시잔스키가 심각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하체를 가리켰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 약간 남은 페로몬만으로도 좆이 설 정도거든.”
“빨리 죽여. 기분 나쁜 새끼.”
빅터가 정말로 부푼 친우의 아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질색했다. 그의 반응을 즐기며 레타 시잔스키가 흥미롭다는 듯 히죽거렸다.
“아, 혹시 너 혼자선 힘드니까 나도 같이 끼워주겠다는 그런 재밌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우성 알파의 체력도 별 볼 일 없다며 농을 던지던 레타는 빅터가 한 손을 덮고 낮게 웃자 흠칫했다. 빅터의 웃음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예상대로 흘러나오는 빅터의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어렸다.
“끼워줘? 너를?”
손을 치운 순간 흉포함으로 번들대는 빅터의 눈이 드러났다. 녹색 눈이 길게 찢어져서 뱀처럼 표독해지고, 독을 품은 것처럼 일렁였다.
레타 시잔스키는 처음으로 동업자가 두렵게 느껴졌다. 압도적인 기운에 짓눌려서 말도 못 하고 신음만 흘렸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강제로 목을 졸리는 것 같았다.
빅터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네가 내 걸 건드리겠다고?”
이토록 진노한 빅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친근한 사이라도 빅터는 선이 확실했다. 다른 이라면 선을 넘는 즉시 쳐내는 빅터가 그래도 레타는 봐주는 편이었는데, 그건 워낙 레타가 아슬아슬한 선을 잘 유지해서였다. 지금이 바로 그 선에 간신히 걸쳐진 때였다.
레타 시잔스키는 현재 빅터의 인내심이 마지막임을 알고 마른침을 삼켰다. 묵직한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갔다.
눈치 없이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갔으면 정말 무슨 사달이 나도 났을 것이다. 빅터 베르텐은 남들이 아는 만큼 그저 수완만 좋은 사업가가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해하는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게 무슨 일이냐.’
당장에라도 찢겨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레타는 더듬더듬 사과했다.
“아, 알았어. 미안하다. 농담이었어.”
어렵게 했던 말을 철회하자 빅터의 눈에서 힘이 풀리고 서서히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목덜미를 찢어놓을 것 같던 무시무시한 페로몬의 압력도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평소보다 냉담한 태도였다.
“미친 소리 집어치우고, 잘 들어.”
레타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빅터는 지시를 내렸다.
“중간에 나가기 힘드니까, 앞으로 범선과 관련된 결정은 부선장인 네가 다 처리해. 이 상태론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리고 이 주변으로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 베타만 통과시켜. 알파나 오메가는 절대 안 돼.”
페로몬을 인식 못 하는 베타만 용인한다는 소리였다. 레타는 아직 완전한 아침이 오지 않아 어둑한 바깥을 흘끗 보았다.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 어깨가 조금씩 떨려왔다.
‘목이 뜯기는 줄 알았네.’
동업자로 같이 알고 지낸 지 벌써 7년이나 다 되어가는데, 빅터의 새로운 모습을 하나 엿보았다. 흥미롭지만 더 캐었다간 죽지는 않아도 몸 어디 하나가 부러질 것 같았다.
부선장 레타 시잔스키는 온순한 양이 되어 선뜻 대답했다.
“선장님 분부대로 해야지.”
* * *
하비는 뜨거운 격류에 몸을 맡긴 채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빅터와 대화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몸속이 지나치게 뜨거워지더니 뭔가에 삼켜졌다. 그 뒤로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말끔하게 그 기억만 도려내져서 떠올려 보려 해도 단편적인 것들만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주로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개처럼 박히던 격렬한 기억이었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관계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꿈이라고만 치부했다. 꿈치고는 지나치게 생생한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얼마나 지난 거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조금 뱉어보자 목이 다 쉰 데다 목구멍도 잔뜩 부어 있었다.
하비가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방 안을 살피자 해협이나 섬들이 세부적으로 잘 그려진 커다란 지도, 망원경, 쓰다만 일지 같은 것들이 책상 위로 보였다.
날짜가 보이는 걸 보면 항해일지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거칠고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했지만 역동적이고 힘이 있어서 묘하게 신뢰가 가는 필체였다.
하비는 그 필체만 보고도 누가 쓴 것인지, 이 방이 누구의 것인지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빅터 베르텐 경…….’
그러면 이 방은 설마.
깜짝 놀란 하비가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려 할 때였다.
주르륵.
그는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와 생경한 느낌에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이게 대체 뭐지?
심지어 아래를 보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위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하나밖에 없었다.
히트 사이클이 갑자기 터진 것까지는 기억했다. 밀폐된 방 안에서 그것도 우성 알파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면 남은 건…….
“움직이지 마.”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하비는 모든 것을 알았다. 드디어 일을 쳤다는 것을.
“아직 다 못 빼냈으니까, 거기 누워 있어.”
빅터가 선장실 안쪽에 있는 욕실에서 젖은 수건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는 침대맡에 앉더니 굳어 있는 하비를 보고 혀를 찼다.
“히트 사이클이 코앞이면 얌전히 저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기어 나와서 나까지 휘말리게 만들어?”
솔직히 스스로의 반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비와의 섹스에 탐닉했다. 하지만 빅터는 티 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더 화를 냈다. 10대 소년도 아니고 한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이성과 자제심을 잃고 날뛴 것이 부끄럽기도 했으니까.
말을 하면서도 빅터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하비의 몸 곳곳에 말라붙은 정액을 닦아냈다.
“무슨 생각으로 온 거지? 내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될 뻔했는지 알고는 있나?”
다행히 빅터와 단둘이 있을 때 히트가 터졌고, 장소가 방 안이어서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 만약 벌건 대낮에 탁 트인 갑판 위에서 히트 사이클이 왔다면 이성을 잃은 알파들에게 돌려졌을 것이다. 선원들도 모두 체격이 좋고 성격이 거친 편에, 대부분 알파였으니까.
하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긴 했지만 확실히 빅터의 말대로 히트 사이클의 발동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이번 사태는 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하비는 차마 빅터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끝난 건가.’
빅터가 겨우 마음을 열어가는 중이었는데, 경거망동한 탓에 모든 걸 망쳐 버렸다. 기억을 잃을 정도로 강렬한 히트였으니 자신이 어떤 짓을 했을지도 모르고, 어떤 무례한 망발을 뱉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절망한 하비는 몸을 닦아내는 손길에 움찔대면서도 변명처럼 말했다.
“……원래는 기간이 많이 남았다.”
“뭐?”
“이렇게 일찍 주기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나도 이유를 모르겠군.”
잠잠해진 빅터는 말이 없었다. 평소의 빅터 베르텐이라면 언성을 높이거나 날카로운 말을 던져댔을 텐데, 침묵이 길어지니 하비는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하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불쾌했을 테니 사과하지. 다시는 이럴 일 없을 거니까. 추잡한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네.”
진중하게 사과하면서도 하비의 눈에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스스로 한 말에 상처받은 것이다.
빅터는 그것을 빠짐없이 보았다.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하비 스터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걸 알고 나니 더 속이 쓰렸다.
그는 사소한 말 하나에도 성실히, 진심을 담는다.
‘내가 덮쳤는지 본인이 매달렸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됐든 정신을 잃은 사람을 두고 자제 못 한 채 이성이 무너진 쪽은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하비는 정신이 들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빅터는 손안에 든 수건을 터질 것처럼 쥐었다.
‘빌어먹을.’
하비는 알까. 저 태도가 자신을 더 저열하게 보이게 한다는 것을. 하비 스터스의 앞에 서기만 하면 언제나 빅터는 비천한 무엇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하비가 싫었다. 귀족 위에 서겠다며 돈을 쥐고 권력을 얻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비는 그의 아래에서 깔리고 신음을 흘려도 결국 꼿꼿하고 우아한 대귀족 그대로였다.
자신을 잃는 건 언제나 빅터 베르텐, 그였다.
빅터의 손에서 뚝뚝 흐르던 물기가 멎었다. 정신을 차린 빅터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어느덧 말라 버린 수건에 물을 더 적셔 오려고 하자 하비가 거절했다.
“아니. 내 방으로 돌아가서 마무리하지.”
하비는 힘겹게 일어나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갈하게 걸어둔 옷가지를 손수 챙겨 입었다. 장검까지 제대로 차고 나서 하비는 빅터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빅터는 침묵하고 있었다.
머뭇대던 하비가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그건 사고였어. 그리 생각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닥만 보고 있는 빅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시는 빅터와 말을 섞고 함께 지내는 일은 없겠지.
등을 보인 채 하비는 씁쓸하게 말했다.
“벌어진 건 돌이킬 수 없지만, 사죄는 꼭 하고 싶으니 나중에 스터스가로 따로 연락하고.”
사죄의 표시로 소소한 보답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짧은 헛웃음이 들려왔다. 놀란 하비가 뒤돌아보자 빅터의 손에 들린 수건이 저 멀리 패대기쳐져서 나뒹굴고 있었다.
“가만 보니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어.”
하비가 매력적이라 생각했던 그의 깊은 녹안이 분노로 짙게 일렁였다.
“사고라고 생각하라고? 그럼 끝인가? 참 마음 편하게 사는군그래.”
성큼성큼 다가간 빅터가 하비의 팔을 낚아챘다. 그리고 보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잡아서 도로 방 안 한가운데로 끌고 왔다.
하비를 강제로 침대 위에 앉혀 버린 빅터는 그 아래 대충 아무렇게나 앉았다.
위를 올려다보며 빅터가 길게 한숨지었다.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이 목석같은 남자가 알아들을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차라리 뻔뻔하게 나와. 그쪽이 나한텐 더 마음 편하거든.”
상황이 예상과는 달리 돌아가자 하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싫지 않았나?”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빅터가 불쑥 언성을 높였다. 하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빅터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휘말린 건 사실이지만 싫다고 한 적은 없어. 생각보다 좋았고.”
좋은 걸 넘어서 그냥 이대로 하비와 이 짓만 하며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미친 생각까지 했다.
‘좋았다’는 평에 하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쑥스러우면서도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보며 빅터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스터스 경. 혹시 말인데.”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하비의 시선은 평소처럼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빅터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다가 냅다 질렀다.
“나를 좋아하나?”
하비의 얼굴이 굳어버리고 몸도 통나무처럼 뻣뻣해졌다. 놀라서 말을 잃은 채 충격받은 눈으로 빅터를 마주 보던 하비가 이윽고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수대에 걸린 장검만 만지작대는 하비를 보며 빅터는 확신했다.
하비 스터스는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마저 나왔다. 대체 왜 몰랐을까.
“대체 언제부터?”
하비는 금방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머릿속을 정리하며 빅터에게 할 말을 차근차근 고른 뒤, 드디어 오래 간직해 온 속내를 풀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시기를 가늠해 보며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꽤 되었지.”
역시 간간이 느껴지는 지긋한 시선과 미약하게 몸을 휘감고 사라지곤 하던 그 페로몬이 거짓이 아니었다. 빅터는 그걸 경멸이나 혐오로 생각한 자신이 더 끔찍해졌다. 하비의 순수한 의도를 왜곡하고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밀어낸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빅터는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하비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경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으니까.”
“그건 내가 할 소리……!”
울컥해서 따져들던 빅터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빅터는 성질을 죽이려 애썼다.
“후우. 아니다. 다 지나간 거, 지금이라도 오해를 풀었으니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제 성질대로 했을 텐데, 이상하게 하비에게는 함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고상하고 우아한 귀족 흉내는 못 내지만 적어도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망설이던 빅터가 드디어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꺼내 들었다. 하비에게서 꼭 확인하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그럼 하나만 더 묻지.”
긴장한 탓에 빅터의 목울대가 길게 일렁였다.
“설마 경도 그 노예를 잡으러 가는 건가?”
“노예? 어떤 노예를 말하는 건지.”
이 배에 탄 귀족 대부분의 목표이자 슬루인 제국에서 내놓은 그 노예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하비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밀이라서 다 말은 못 해주겠지만, 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서둘러 온 거다. 노예…… 라면 맞긴 하군.”
“구해야 할 사람?”
“본국 사람인데 사정이 있어 슬루인 제국에 있었지. 그런데 이번에 임무를 들키는 바람에……. 노예 시장 쪽에서 경매로 넘어가게 생겼다기에 급히 가보는 중이었지.”
제국의 황가에서 아끼던 노예가 갑자기 처분된다고 하여 이상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빅터는 직감적으로 하비가 말하는 노예가 그 노예임을 눈치챘다.
“서둘러 돈은 구해 왔지만 이걸로 될지 모르겠군. 총괄 외교관님이 지원비를 줄이셔서.”
하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빅터는 스터스가의 재정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인기 많은 노예를 사기에는 한참 모자랄 것을 눈치챘다.
하비는 오로지 그 노예를 구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는 중이었을 테다.
‘그 총괄 외교관이 지원비를 줄였다면 구하지 말고 뒈지는 대로 두라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하비는 포기하지 않고 스터스가의 개인 자산까지 긁어서, 심지어 히트가 가까이 다가온 시기에도 아랑곳 않고 바다까지 건너가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배에서 먼저 히트가 터져서 빅터와 보내지 않았더라면, 타국의 으슥한 길거리 어딘가에서 이런 격렬한 히트 사이클을 보낼 수도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던 것을 보면 분명 위험천만한 히트가 되었을 터였다.
빅터로서는 이해도 가지 않고,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하비가 차라리 자신이 있는 배를 골라잡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출항 당시 날씨가 좋아서 다른 배라도 탔으면 그대로 배 안에서 알파들에게…….
빅터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가정만 했을 뿐인데도 미친 듯이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 좋은 것도 정도껏이지.’
이대로 놔두면 하비는 손도 쓰지 못한 채 단명할 것이 확실해 보였다. 어제도 자신의 몸도 안 좋으면서 다른 사람들부터 챙겼다.
위태로워 보여서 이대로 둘 수가 없다 생각한 빅터는 한 가지 제안했다. 하비를 붙잡을 방법이었다.
“노예 구출 건은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부탁 하나만 들어줘.”
“무슨 부탁?”
“앞으로 히트 때마다 나한테 와.”
하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이해하지 못해 눈만 크게 떴다. 밤색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변하는 것을 보고 빅터가 피식 웃었다.
“나한테 오라고. 다른 놈한테 가지 말고.”
침대 위로 올라간 빅터가 일부러 상체를 붙였다. 알파 페로몬을 흘리며 유혹하듯 그의 단단한 어깨를 감쌌다. 빅터는 머리 하나 정도의 키 차이가 참 적당하다 여겨졌다.
“꼭 히트뿐만 아니라 가끔 몸이 동할 때도 괜찮고. 나도 경에게만 내 러트를 허할 거야. 어때?”
빅터가 은밀하게 건넨 고백이었다. 과연 수락할 것인가. 그의 심장이 또 고장 난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었다.
사실 히트 사이클 주기뿐만 아니라 다른 날도 함께 보내자는 속뜻이 담겨 있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하비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하지.”
정식으로 교제하자는 이야기였는데 하비는 못 알아들은 듯했다. 다른 건 잘 알아들으면서 이런 쪽은 둔한 하비였다. 빅터는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으로 갈 길이 멀군.’
시커먼 속도 모르고 순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또 마음이 동해서, 빅터가 손을 뻗어 하비의 뺨을 잡았다. 그대로 입술을 대어 가볍게 키스를 한 뒤 물러서자 하비가 깜짝 놀라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당황하는 하비에게 빅터가 씨익 웃었다.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빅터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계약 성립의 의미.”
“……아. 그런 거였나.”
하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오해를 사과했다. 그걸 보니 빅터는 그를 눕혀놓고 이런 짓 저런 짓을 다 해보고 싶은 불같은 욕구가 솟았다.
‘벌써부터 이러다니. 나도 제정신이 아니야.’
이성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했다. 우성 알파로서의 자존심이 흔들렸다. 자제심만은 최고라고 여겼건만.
이 덩치 큰 오메가가 귀엽다고 느껴지다니. 정말 자신은 미친 것이 분명했다. 빅터는 왜 이렇게 그에게 마음이 동하는지 시간을 두고 보면서 천천히 알아갈 생각이었다.
‘우선 확실히 해둘까.’
며칠 동안 계속된 관계 탓인지 이제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쉽게 가는지도 알게 된 사이다. 그런 사람이 혼자 타국을 돌아다니는 게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빅터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극도의 소유욕을 간신히 눌렀다.
“하선할 때 바로 가지 마.”
물끄러미 시선으로 묻는 하비에게 빅터는 당연한 듯 말했다.
“목적지까지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가는 도중 다른 놈이 꼬일까 봐 걱정이 돼서였는데, 그걸 무엇으로 착각한 건지 하비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지 않아도 돼. 바쁠 텐데.”
물론 바쁘다. 하지만 바쁜 것보다 이 일이 훨씬 더 중했다. 빅터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핑계를 댔다.
“한가하다 못해 시간이 남아도니 걱정 말고.”
못 미덥게 보던 하비가 마지못해 승낙하자 빅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 가득 띄웠다. 그가 침대 위의 하비 옆에 은근슬쩍 앉았다. 손가락 끝이 닿자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멀리 달아나려는 것을 빅터가 꽉 쥐었다.
흔들리는 밤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빅터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럼, 대충 이야기는 다 되었으니.”
언제나 은은하게 감싸던 하비의 시원한 페로몬이 빅터의 코끝을 간지럽게 어지럽혔다.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제 의지를 피력하는 하비의 성격 같았다.
이걸 몰랐다니, 바보같이.
빅터의 한쪽 입가가 스스럼없이 올라갔다.
“히트는 끝났지만.”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어 하비의 입술을 머금으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히트인 것처럼 해보자고.”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서서히 몸을 감싸자 하비의 얼굴에도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김 같은 것이 몸속에 스며들고, 안쪽에서부터 흥분이 차올랐다. 어쩔 수 없이 빅터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 같았다.
하비는 문득 과거에 빅터를 봤던 날을 떠올렸다.
흥청망청하는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새벽에 가까운 시각, 고단한 몸을 달래기 위해 잠깐 들어갔던 곳에서 보았던 광경이었다.
대체 몇 병일지도 모를 빈 술병들이 한 테이블에 널려 있었고, 그걸 마신 듯한 장본인은 멀쩡한 얼굴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마를 덮은 윤기 나는 금발에 보기 좋게 살짝 그을린 건강한 피부색이 자유분방해 보였다. 웃을 때마다 보이는 자신감 때문인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압감조차 있었다.
한눈에도 인기 많을 법한 미남이었다. 그는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독한 술을 붓고 있었지만 손 떨림조차 전혀 없었다.
엄청난 주당이라 생각하며 지켜보던 중, 금발의 남자가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하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목소리도 남자의 외모와 걸맞게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빅터 베르텐 경이군.’
그를 항구에서 본 적이 있었다. 바삐 오가던 선원들을 한 손으로 지휘하고, 물건들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힘 있는 상인들과 배짱 있는 거래를 하던 남자.
당시 같이 있던 귀족 청년들이 베르텐가의 천출이라며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하비는 왠지 멍하게 그를 보았었다. 하비에게는 없는 자유분방함과 갇히지 않은 자 특유의 여유로움과 자신감이 가득한 모습에 눈길이 절로 갔었다.
‘……그래서, 잘난 척하는 귀족 나부랭이들을 전부 내 발아래 꿇릴 생각이지.’
‘꿈도 야무지네. 애써봐라.’
‘스터스가의 그 애송이는 아니겠지?’
자신이 거론되자 흠칫한 하비가 다른 곳을 보았다. 들켜도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려고.
그러는 중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뭐가.’
‘그놈은 뭔가 다를지도 몰라. 뭔가가.’
반대편에 있던 친구가 반박했다.
‘멀리서 본 게 다면서 다른 게 뭔지 어떻게 알아.’
‘정원사를 볼 때조차 깔보는 눈빛이 아니었다니까. 그 더러운 귀족 놈 중에 유일하게.’
빅터는 손안에 남은 술을 마무리하고는 힘있게 말했다.
‘그러니까 뭔가 다를 거라고.’
자신에 대해 좋은 평을 해주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단지…….
하비의 목이 길게 일렁였다. 툭 튀어나온 울대가 파도처럼 요동쳤다.
저 반짝이는 것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저도 모르게 시선이 계속 갔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짧은 시각이었지만 의아한 듯 보이던 빅터가 피식 웃어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비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쿵, 쿵, 쿵.
어떤 누구를 봐도 한 번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던 심장이, 그제야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하게 날뛰었다.
사냥 클럽에서 오해가 생긴 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때는 이렇게 되리라 생각도 못 했건만, 빅터에게 마음을 들키고 나자 허무할 정도로 빨리 가까워졌다. 한 번 거절당한 줄 알고도 마음을 놓지 못했는데.
하비는 손을 더욱 꽉 쥐어오는 빅터의 손길에 미소 지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시작은 거칠었지만, 이렇게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안으로 파고든 빅터의 커다란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래.”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빅터의 금발이 어지러이 반짝거렸다. 하비는 초원을 보는 것 같은 녹빛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뜨거운 열망이 보였다.
하선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