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Happy together
하늘에서 눈발이 옅게 흩뿌려지더니 갑자기 폭설로 변했다.
빅터가 물끄러미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빛 눈썹에 작은 눈이 내려앉았다.
하비와 만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약혼반지가 결혼반지가 될 정도의 시간이었다.
빅터는 성대하게 하고 싶어 했지만 하비는 조촐하게 하고 싶어 했다.
결국 빅터가 결혼식 형식 일체를 하비에게 양보함으로써 수월하게 넘어갔다. 일 처리가 워낙 꼼꼼하여 하비가 준비하는 것이 더 낫기도 했다.
결혼식에는 일터의 동료들과 사용인들 정도만 모였다. 하비는 방계 친척들을 부르지 않았고, 빅터도 가족 중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서로가 가족이 되는 자리였고, 빈자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소박했지만 오히려 분위기는 활력이 넘쳤다.
피날레로 키스가 이어질 때, 뒤로 뺄 줄 알았던 하비가 적극적으로 나선 덕에 결혼식장은 더욱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새로운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국왕이 돌려준 별장 중 하나를 그들의 은밀한 장소로 지정하고 간혹 들르기로 한 것이다. 이때는 사용인도 대동하지 않고 두 사람만 함께 있었다.
빅터는 한가득 요리 재료를 들고 별장 문 앞에 섰다. 입에서 하얀 김이 길게 배어 나왔다.
‘곧 온다고 했으니 빨리 준비해 놔야겠어.’
빅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이런 게 행복인 건가 싶었다.
그 순간, 낯선 소리가 들려 빅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응?’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싶더니, 급하게 다가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빅터가 소리가 들린 쪽을 두리번댔다. 어두워서 거뭇한 인영은 보이지만 멀어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다.
빅터가 속으로 피식댔다.
‘벌써 온 건가. 근데 왜 이렇게 급히 와. 시간도 많은데.’
시간이 지나도 하비의 쑥스러움은 여전했지만, 가끔은 대범한 스킨십도 했다. 좋을 땐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마음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진전이었다.
‘더 빨리 보고 싶어서 서두르는 건가.’
이럴 때의 하비는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다가온 인영이 입을 연 순간, 빅터의 달콤한 상상이 와장창 깨졌다.
“빅터 베르텐 경, 맞나?”
이런. 빅터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마주친 적이 있는 남자였다.
살벌한 기세에 알파 페로몬이 더해져 공기를 얼렸다.
빅터가 뒤돌아서자 검은 머리에 짙은 남색 눈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예전 빅터가 남은 약을 넘겼던 윈스턴 경의 알파 연인, 마크 카멜 경이었다. 그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군.”
마크는 분노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를 바라보던 빅터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빨랐다.
빅터는 잠깐 고민했다. 이대로 맞아주고 끝낼까. 한 짓이 있어서, 한 대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마크가 빅터의 멱살을 세게 움켜쥐고 분노했다.
“데릭을 어디로 보낸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빅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와중에도 혹시 몰라 요리 재료를 멀찍이 두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 미친 약을 데릭에게 넘긴 것도 경이 한 짓이지? 도망가는 걸 도와준 것도 경이고. 맞지?”
침묵하던 빅터가 비웃음을 머금고 마크를 똑바로 응시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다. 윈스턴 경이 약을 먹고 어디론가 숨어버린 모양이었다.
빅터가 입을 열었다.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맞아. 약은 내가 줬어. 도망을 돕지는 못했지만. 그건 좀 아쉽군.”
마크가 사나운 개처럼 빅터를 죽일 듯이 보았다. 제법 살기가 충만했지만 빅터는 그것이 우습기만 했다.
‘아, 슬슬 짜증 나는데.’
빅터는 마크를 보고 있으면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못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만 주던, 바보 같은 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다.
데릭 윈스턴 경. 그는 약혼반지까지 주고받았으면서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날 것부터 걱정하는 연인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다 몰래 교제하던 것이 들키는 바람에 마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가문의 후계자 자리냐, 데릭 윈스턴 경이냐.
동시에 데릭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결국 데릭 윈스턴 경이 선택한 건 마크였지만, 마크 카멜 경이 선택한 것은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리고 얼마 뒤, 시름에 잠겼던 데릭 윈스턴 경은 홀연히 사라졌다.
거기까지는 빅터도 알고 있었다. 윈스턴 경이 사라질 이유는 충분해 보였다. 크나큰 배신감을 안고 혼자 떠났을 쓸쓸한 뒷모습이 연상되었다.
빅터가 일부러 더 잔인하게 진실을 짚었다. 카멜 경을 향한 존칭은 일체 없었다.
“너 같은 병신새끼는 한 번 뒤통수를 맞아봐야 정신 차리거든. 잃고 나서야 후회하지.”
물론 자신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또 다른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하비를 연상케 하는 윈스턴 경이 잘살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비슷한 상황인데다 너무 깊숙하게 공감했던 탓일까. 빅터는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나 알려줄까. 넌 이미 늦었어.”
“이 새끼가……!”
거친 욕설에도 짙은 녹색 눈이 진중해졌다.
“더 늦기 싫으면, 허리 빠지게 움직여. 그리고 윈스턴 경을 무조건 찾아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마크가 주먹을 날렸다. 하필 은색 반지가 반짝대고 있는 쪽이었다.
퍽!
한 대는 맞기로 결심했기에, 빅터의 얼굴이 옆으로 크게 반동했다. 윈스터 경에 대한 마음의 빚이었다.
즉시 입안이 터져서 빅터는 벌건 피를 뱉었다. 워낙 맷집이 좋아 이 정도는 사실 아픈 축에 끼지도 않았다. 다만 오랜만에 맞다 보니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또 누군가가 달려오더니 마크가 옆으로 휙 밀려났다. 빅터와 마찬가지로 입에서 피를 뿜으면서.
마크의 얼굴을 날려 버린 건 하비였다. 결혼반지가 끼워진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하비에게서 날 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항도 안 하는 사람을 때리다니. 드디어 미친 건가, 카멜 경?”
터진 입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마크가 침음성을 냈다.
“스터스 경…….”
이토록 분노하는 하비는 처음 보았기에 마크는 멍해졌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더라도 마크는 하비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침착한 분위기가 데릭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고, 평소 하비가 해온 일들에 대한 경외도 있어서였다.
하비는 싸늘한 얼굴로 물러난 마크를 노려보고 있고, 마크는 눈길을 돌려 빅터를 노려보는 형국이었다.
이 난장판에서, 빅터만이 묘한 얼굴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비는 빅터의 입가에 터진 피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르텐 경에게 당장 사과하게.”
“스터스 경.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마크가 음산하게 말했다.
“베르텐 경이 데릭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마크의 주먹이 다시 부들부들 떨렸다. 하비는 반사적으로 빅터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도 빅터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상한 약을 줘서 데릭을 오메가로 만들었어. 심지어 데릭은…….”
하비가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마크의 꽉 쥔 주먹에서 홀연히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아이를 임신했다고.”
깜짝 놀란 하비와 빅터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설마 윈스턴 경이 하비와 같은 절차를 밟은 건가. 그 끝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던 것을 아는 두 사람이기에, 표정도 밝지 않았다.
특히 빅터는 죄책감 어린 얼굴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약이 윈스턴 경에게 그리 잘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심지어 하비보다 더 잘 들은 것 같았다.
마크는 그 큰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진한 후회가 목소리에 잔뜩 묻어났다.
“그래놓고 감쪽같이 사라졌어.”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짙은 남색 눈은 지극히 공허해 보였다. 그곳에는 명예도, 가문의 위상도 없었다.
얼굴에서 손을 내린 마크가 허무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꺼져가는 작은 중얼거림이 하비와 빅터에게 꽂혀들었다.
“어디 간 거야, 데릭…….”
* * *
마크는 빅터가 윈스턴 경의 실종에 아무런 연관이 없음이 확실히 밝혀진 뒤에야 떠났다. 끝까지 빅터에게 사과하지는 않았다. 대신 하비에게만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별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길게 침묵했다. 잊고 있었던 일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빅터가 양손으로 까칠해진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윈스턴 경이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도 그 약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설마 그가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하비보다 더 안정적으로 임신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말이 없는 하비에게 빅터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찾아볼 테니까 넌 이제 신경 꺼. 윈스턴 경의 행방은 알아내는 대로 알려주지.”
묵묵히 듣고 있던 하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찾아내면, 바로 카멜 경에게 알릴 건가?”
빅터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게서 차가운 조소가 보였다.
“아니. 내가 왜 그딴 놈에게 알려. 우리만 알고 있어야지. 아주 애가 닳아 미칠 지경일 거다.”
이미 빅터의 생각을 안 듯 하비는 조용히 물었다.
“윈스턴 경을 도와줄 생각인 거지?”
“그럴 거야. 미안한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그 사람은 꼭 도와줬으면 해.”
“윈스턴 경과 전에 만난 적 있나?”
하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이야기 못 해본 사이긴 하지만.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었지.”
빅터는 그건 너일 거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간신히 삼켰다. 그리고 하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윈스턴 경과 하비는 고집스러운 부분이 비슷했다.
다만 외교관을 해서 세상 물정에 어둡지 않은 하비에 비해, 윈스턴 경은 갇힌 세계의 규칙밖에 모르는 순진한 자였다.
그런 사람이 이 추운 겨울에 사라졌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임신까지 하고서. 갑작스레 변한 몸이 정상일 리도 없었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빅터가 불쑥 말했다.
“근데 약을 준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네.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경솔하게 그 위험한 약을 다른 사람에게 줬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하비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비가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도 아니까.”
하비가 쓸쓸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가슴이 저릿해지고, 진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만약 내가 알파가 아니었다면. 오메가여서 이 사람과 함께할 결실을 일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비도 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이 아슬아슬한 관계가 깨어지면, 빅터는 다른 오메가와 연을 맺을 것이다.
그런데도 옆자리를 내어 주기 싫었다. 차라리 오메가가 되어 그 자리를 꿰차고 싶었다. 추악한 욕심임을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윈스턴 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버림받는 처지였으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계획을 감행했을 테다. 절박한 마음으로, 그 사람과의 인연을 지키기 위해서.
밖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창문이 뒤흔들릴 정도로 강풍이었다.
하비는 또렷이 기억했다. 그때도, 가장 지독했던 아픔을 겪었을 때도 터무니없이 추웠다. 손끝이 전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고작 가을 끝물인 계절임에도 뼛속 깊이 한기가 들었다.
하비가 입을 열었다.
“그 심정, 잘 알겠어서.”
“…….”
둘 사이에 먹먹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건 깰 수 없는 절대적인 고요처럼 느껴졌다.
빅터가 일어나더니 하비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숙이고 하비의 정수리에 깊이 키스했다.
여전히 청량하지만 희미한 알파 페로몬이 밀려들었다. 빅터는 보이는 곳마다 천천히 키스했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하비의 몸에서 조금씩 열이 피었다.
빅터가 하비를 세게 끌어안으면서 물었다.
“이제 괜찮은 거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랬다. 빅터는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아련해지는 밤색 눈을 보고 있으면 지독한 후회로 미칠 것 같았다. 과거의 자신을 두들겨 패서라도 정신 차리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래 묵혀뒀던 불편한 화제가 부상한 건 둘째 치고, 빅터는 하비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마음이 너무 찢어질 듯 아팠다. 부디 그가 고통스러울 만한 일은 기억 속에서 모조리 사라지길 바랄 뿐이었다.
하비는 피식 웃으며 빅터의 팔을 손으로 잡았다. 아예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하비를 붙들고 있었다.
그 매달리는 듯한 절실함이 하비의 마음 깊은 곳까지 비처럼 스며들었다. 고마웠다.
오히려 하비가 그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인데.”
거짓말임을 알기에 빅터는 하비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지난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 무덤처럼 묻혀 있을 뿐.
문득 하비가 뒤돌아보며 빅터의 턱을 매만졌다.
터진 입술에는 차마 손대지 못하고 하비는 미간을 좁혔다.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났다.
“카멜 경에게 맞은 데는 좀 어때.”
“이 정도야 뭐.”
“손이 매운 것 같았는데.”
빅터는 각자 반지를 낀 주먹이 오가던 그림 같은 광경을 떠올렸다. 같은 반지라도 그곳에 담긴 마음이, 그 무게가 다르다. 어느 쪽이 더 강한지는 안 봐도 알았다.
빅터가 피식 웃으며 하비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네 주먹보다는 훨씬 약하니까 걱정하지 마.”
하비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꼭 나한테 맞아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그제야 웃음이 돌아온 빅터가 여유롭게 말했다.
“정확히는 네 검에 맞아봤지. 네 검에 그렇게 많이 맞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걸?”
그건 사실이었다. 하비의 성격상 빅터가 아닌 다른 이에게 쓸데없이 검술을 펼칠 이유가 없으니까.
하비는 뜨끔한 얼굴로 다른 소리를 꺼냈다. 그 일로 빅터를 꽤 오래 골탕 먹였던 과거가 생각나서였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려는 시도가 훌륭하게 먹혔다.
“윈스턴 경은 왜 하필 카멜 경과…….”
하비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음습하고 권력만 좇는 남자와 올곧고 순진한 윈스턴 경은 몹시 어울리지 않았다. 윈스턴 경이 마크 카멜의 뭘 보고 빠진 건지도 의문이었다.
하비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듣고 있던 빅터가 속으로 웃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질 텐데.’
하비가 빅터와 결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평소 빅터의 성정이나 해적과의 연관성을 아는 사람들이 지금 하비가 말한 것과 비슷한 소리들을 해댔다.
빅터가 슬쩍 허리를 일으켜 혼돈의 현장에서도 착실하게 챙겨 온 요리 재료들을 뒤졌다. 다행히 다들 무사했다.
아직도 마크 카멜의 어떤 점을 보고 윈스턴 경이 빠져 버렸는지를 생각하는 하비에게 빅터가 멀찍이서 말했다.
“뭔가 끌리는 게 있었겠지.”
터진 입술이 따끔해서 빅터는 그곳을 손바닥으로 대충 비볐다.
빅터가 음산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놈에겐 어떻게 돌려준다…….’
빅터는 벌써부터 복수의 계획을 차곡차곡 세웠다. 윈스턴 경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빅터는 이 핏값을 마크에게 몇 배로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빅터 베르텐이 아니었다.
요리 재료를 주방에 놓고 온 빅터가 돌아오자 하비가 그 말을 곱씹었다.
“뭔가 끌리는 것…….”
습관처럼 끌어안고 키스하는 빅터에게 하비가 물었다.
“그런 게 나한테도 있었나?”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그 이끌림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의심할 것 없는 명백한 진실이었다. 절절한 진심이 배어 있었다.
하비는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일어났다.
“오늘은 나도 돕겠어.”
빅터가 난감한 얼굴로 최대한 말을 돌렸다. 안타깝게도 하비는 요리를 정말 못했다. 그냥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기본적인 감각조차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빅터는 계속 돕겠다는 하비를 말렸다.
“힘들 텐데 그냥 있어.”
내일이 결혼기념일 1주년이었다. 하비가 선물은 됐다고 몇 번이나 강조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직접 준비한 조촐한 저녁 식사. 그것이면 충분했다.
빅터는 그사이 하비 몰래 짧은 편지도 준비했다. 식사가 끝나면 와인을 마실 때 와인잔 밑에 슬쩍 둘 생각이었다. 하비가 그걸 발견하고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마워.
내 옆에 계속 있어줘서.
가족이 되어줘서, 고마워.
* * *
윈스턴 경이 돌아왔다. 거기에는 마크 카멜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빅터의 말을 듣고 난 뒤 뭔가 생각한 것이 있었는지, 그는 그토록 집착하던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신 막대한 자금을 가문으로부터 지원받기로 했다.
마크 카멜은 그 돈을 데릭 윈스턴에게 모두 쏟아부었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둘만 있을 작은 별장도 구입했다.
둘 사이에는 아기가 생겼고, 사람들에게는 입양한 것이라 둘러대었다. 신약은 이미 사라졌지만 혹시라도 무분별하게 제조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하비는 은행으로 출근하던 길에 익숙한 얼굴들을 보고 가던 길을 멈췄다.
은행 건물 앞에서 윈스턴 경과 카멜 경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은행에 볼일이 있어 온 모양이었다. 거기다 두 사람은 하비에게 따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뭔가를 챙겨 오기까지 했다. 아기는 사용인에게 맡기고 온 것인지 없었다.
카멜 경의 입가는 터져서 흉이 있었는데, 빅터의 작품이었다. 물론 하비는 모르게 한 것이었다.
“내가 들게. 이리 줘. 무겁잖아.”
“이 정돈 나도 들 수 있다니까?”
하비는 은행에서 두 사람을 마주치면 따뜻한 차와 달달한 쿠키를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쿠키는 빅터가 하비를 위해 특별히 직접 만든 것이었고 맛도 훌륭했다.
표정이 밝아 보이는 윈스턴 경과 카멜 경을 스쳐 지나가며, 하비는 즐거이 미소 지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