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Nightmare
아름답고 건 치명적인 독이지. 독사, 독거미, 독버섯. 그런 것들이 화려한 이유야.
그것들은 가까이하는 자들을 불행하게 만든단다.
예쁜 꼬마야, 넌 앞으로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불행하게 만들겠구나.
* * *
빅터는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손으로 이마를 훔쳐내자 흥건한 땀이 묻어났다.
습관처럼 옆을 보니 누군가가 누웠던 흔적이 없고 싸늘했다. 하비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일이 바쁘다며 오지 않았다.
“재수 없게 아침부터…….”
짜증스러운 얼굴로 일어난 빅터가 협탁 위의 냉수를 들이켰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알프레드와 해적 수뇌부를 숙청할 때, 선장의 애인이자 왼팔이었던 여자부터 없앴다. 사람 다루는 실력은 물론이고 전투 능력도 좋아서 선장에게 매우 신뢰를 받고 있던 자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빅터를 믿지 않았다. 전적으로 빅터를 믿고 키우던 알프레드와는 달리, 그녀는 중요한 기술 같은 건 알려주지도 않았다.
‘이미 의심하고 있었지.’
심지어 눈치 빠르고 강단도 있어 끝까지 애먹였다. 빅터가 첫 러트를 희생할 정도까지 몰아붙인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그녀가 어린 빅터를 보며 가장 처음 했던 말이 꿈에서 나온 말이었다. 금발의 아름다운 녹안을 가진 어린 그의 턱을 잡고 위협하듯이 했던.
빅터는 그 새까만 눈동자가 자꾸만 생각났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늘 일진이 좋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지고야 말았다.
하비와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에 늦던 적이 없던 그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예감에 빅터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다.
총기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덕분에 커피하우스의 정보망은 다시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하비의 소재가 빠르게 들어왔다.
약속 장소인 분수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빅터가 눈썹을 꿈틀댔다.
“뭐? 은행에?”
“은행장과 이야기를 하고 계시더군요.”
빅터는 크게 당황하여 당장 은행으로 달려갔다. 하비 몰래 은행장과 거래한 것이 떠올라서였다. 마침 하비는 은행장의 집무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빅터가 모른 척 그냥 지나치려는 하비의 팔을 잡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건데?”
하비도 굳은 얼굴로 받아쳤다. 붙들린 빅터의 팔도 뿌리쳤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은행장이 다른 사람과 농담처럼 주고받는 것을 우연히 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하비는 향후 은행에서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 상의하러 잠깐 들른 참이었다.하비가 있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던 은행장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하비는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야 은행장을 놓아주었다.
단정하게 빚어진 얼굴에 화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동안 네게 갚겠다고 넣었던 예금들이 왜 다시 나한테 돌아오고 있었지?”
할 말이 없어진 빅터가 우물쭈물했다.
“그, 그건…….”
“거기다 더 가관인 건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하비는 실망한 얼굴로 당황한 빅터를 한참이나 보았다.
“언제나 이런 식이지. 속이고, 뒤에서 몰래 뭔갈 하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한숨지은 하비가 끓어오르는 마음을 삭였다. 빅터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스터스가 저택이 팔려 갈 것을 우려한 것일 테지. 그래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약속에 늦은 건 미안하다. 그런데 오늘은 같이 있을 기분이 아니라.”
빅터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계속 감정을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지켜보는 눈도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사람이 지나다니는 계단 위였다.
다음에 보자고 하며 그대로 지나치려던 하비의 팔을 빅터가 다시 붙들었다.
“잠깐.”
빅터는 하비가 더 이상 뿌리칠 수 없게 힘을 들였다. 옴짤달싹할 수 없이 강한 힘에 하비는 빅터를 노려보았다.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해. 네가 이럴 것 같아서…….”
“신경 써준 건 정말 고마운데, 이런 형식은 아니야.”
그나마 차곡차곡 갚아나가고 있다며 위안 삼고 있었는데. 빅터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순히 자존심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하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얼마나 못 미더웠으면 그랬을까.”
빅터가 흠칫하며 하비의 시선을 피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 것도 못 기다릴 정도로 신뢰를 주지 않았나.”
“…….”
“그런 내가 참을 수 없어서.”
하비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물론 빅터가 한 짓 자체만으로도 화가 났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걱정만 끼치는 자신이 한심했다.
“원래대로 돌려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건 알아서 해.”
빅터의 손에서 힘이 풀리고, 하비는 팔이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빅터는 군말 없이 수긍했다.
“알았어. 은행장에게 이야기해 두지.”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대로 떠나려던 하비가 뒤돌았다. 빅터는 비 맞은 짐승처럼 힘없이 계단 위에 서 있었다. 하비가 멈칫하더니 지긋이 입술을 물었다.
이대로 가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당분간 멀리 떠나야 할 일도 있었다.
늘 자신감 넘치던 남자가 자신과 엮이는 일에는 이성을 잃고 때론 처량하게 구는 것이 안쓰러웠다.
‘어쩔 수 없군.’
하비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
이어지는 하비의 말에 축 늘어졌던 빅터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정말 필요하면 도움을 구할 테니까.”
밝아지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하비는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하비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
* * *
“3주나?”
빅터는 충격받은 얼굴로 들고 있던 서류를 놓칠 뻔했다. 총기 사업 확장안에 대해 검토하던 중에 벤이 막 들어온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로비나 섬으로?”
“네. 스터스 경이 이로비나 섬에 직접 가서 마무리 지을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류를 내려둔 빅터가 황망한 얼굴로 반박했다.
“그래도 3주씩 가는 경우는 없었잖아.”
“말을 전하실 때 기분이 썩 안 좋아 보이시긴 했습니다만.”
벤이 빅터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곁에 있던 시계 장인 길드장이 혀를 끌끌 찼다. 빅터의 표정과 여태 얼핏 들었던 일들로 대강 사태를 짐작한 듯했다.
그사이 유부남이 된 길드장은 제법 눈치가 좋아졌다. 얼마 전에 은행 앞에서 빅터와 하비가 다투었다는 것도 어디선가 들어 알고 있었다.
길드장은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무조건 비십쇼.”
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빅터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두 사람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빅터는 짧은 한숨을 내뱉더니 별말 없이 넘어갔다.
저택에 돌아가서 소식을 전해 들은 레나의 반응도 비슷했다.
레나는 요즘 왕실로 빼앗긴 물품들을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목록들을 작성하던 그가 눈을 힐끔 들어 안절부절못하는 주인을 보았다.
“또 뭘 잘못하셨길래 스터스 경이 장거리 출장 신청을 해요? 웬만하면 자리 안 비우시는 분인데.”
“……무조건 내 잘못인 거냐.”
물품 항목을 적어 내리는 레나의 손길과 말투에는 거침이 없었다.
“당연하죠. 안 그런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어요?”
빅터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또 시기 놓치지 말고 사과하실 수 있을 때 얼른 사과하세요. 뭔진 몰라도요.”
“사과는 바로 했어. 받아주지 않아서 그렇지.”
퉁명스럽게 말하는 빅터를 레나가 흘끗 보았다.
“그럼 받아줄 때까지 하셔야죠.”
담담하게 말한 레나가 제 업무에 다시 집중했다. 빅터는 심란한 마음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된 것이 주변 사람 중 빅터의 편을 들어주는 이가 단 하나도 없었다. 은행 앞에서의 공방이 어떻게 소문이 난 것인지.
심지어 귀부인들의 은밀한 취미인 소설책이 한층 더 두꺼워지기도 하고 거래도 활발해졌다. 알파 연인끼리의 일상을 기록하거나 상상한 소소한 책 말이다.
그나마 빅터의 마음에 드는 것은 벤의 이성적인 조언이었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이번엔 직접 마중을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생각을 못 했다니. 빅터는 흡족한 얼굴로 벤의 아이디어를 칭찬했다.
* * *
2주 뒤, 결국 빅터는 황철석 핑계를 대면서 이로비나 섬으로 향했다. 마침 총기 사업 확장 건도 얽혀 있기에 적당한 시기와 핑계였다.
바로 가기엔 그도 할 일이 많았고, 잠을 아껴가며 모든 일을 다 처리한 뒤 하비를 쫓아갔다.
빅터는 오자마자 하비의 행적을 알 곳부터 뒤졌다. 그런데 이로비나 섬에 도착해서도 하비를 만나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이로비나 섬을 총관리하는 청으로 왔는데, 그들은 빅터의 물음에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모릅니다. 워낙 잘 돌아다니시는 분이라……. 행선지를 말씀해 주시는 경우도 드물어서요.”
“정말인가? 확실해?”
빅터가 이로비나 섬의 관리들을 노려보며 재차 확인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의 예리한 감이 말하고 있었다.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 알고 있는데 말 안 해주는 건 아니냐고.”
관리들은 빅터의 날카로운 눈빛에 펄쩍 뛰었다. 얼핏 보아도 과한 반응이었다.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저희가 그런 걸 왜 숨기겠습니까.”
“맞습니다. 숨길 이유가 없지요.”
의심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던 빅터가 포기하고 차선책을 내놓았다.
“알았으니까, 그럼 스터스 경이 머무는 곳이나 알려줘.”
관리들은 서로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종이에 하비가 머무는 숙소와 주소를 적어주었다.
“이곳으로 가보십시오. 밤에는 돌아오실 테니까요.”
빅터는 종이를 휙 낚아채고는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까딱댔다.
“혹시 스터스 경에게 연락이 오면 나한테 먼저 알려줘.”
왔을 때처럼 바람처럼 나간 빅터의 뒷모습을 보며 이로비나 섬의 관리들은 서둘러 종이에 뭔가를 휘갈겼다. 그리고 발 빠른 사람을 어딘가로 보냈다. 다름 아닌 하비에게였다.
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던 하비는 관리들이 보낸 서신을 받고는 그 즉시 식사를 멈췄다. 입맛이 달아났다.
“빅터가 여길? 왜?”
아직 돌아가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다. 그사이 다른 할 일도 있고.
이로비나 섬의 관리들에게 미리 자신을 찾는 자가 있으면 연락해 달라 말을 해놔서 다행이었다. 눈치가 빠른 자들이라 빅터에게 바로 하비의 위치를 말해주지 않고 하비에게 먼저 빅터의 도착 소식을 알린 것이다.
‘곤란한데.’
그 성격에 한참 찾아다니다가 결국엔 자신이 머물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비는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빅터와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하기엔 불편한 것도 있고, 준비 못 한 것도 있었다. 빅터를 만나기 전에 해야 할 일 말이다.
하비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사람을 하나 불렀다. 이로비나 섬에서 하비와 관련된 자잘한 일을 도맡아 하는 자였다. 게다가 빅터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금발에 옅은 녹안을 지닌 미남자에게 하비가 말했다.
“내 짐을 다른 곳으로 옮겨주게.”
“어디로요?”
“원래 숙소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아무 곳이나 상관없어.”
어차피 외부 일정으로 계속 이동해 다녀야 해서, 잘만 하면 빅터와 마주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로비나 섬에서 때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 * *
“또? 그사이 옮긴 거야?”
텅 빈 방 앞에서 빅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앞머리를 넘겼다. 하비가 마음만 먹으면 이리 잘 도망 다닐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등골이 선득했다.
분명 하비는 자신이 온 것을 알고 있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잘 피해 다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숙소 주인을 스쳐 지나가며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 3일짼데.”
측근 없이 혼자 훌훌 와버린 것이 후회되었다. 여기서도 사람을 구할 수는 있지만 자신과 손발을 오래 맞춰온 나스타나 진, 벤, 레나처럼 실력 좋은 이들이 드물었다.
언제나 하비보다 한발 늦었다. 사람을 아주 많이 사서 정보원으로 풀면 금방 잡을 수는 있겠지만 빅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랬다간 한 달이 뭐야. 몇 년은 못 볼지도.’
빅터도 본인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기에 괜히 하비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찾아내서 제대로 사과하고,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며칠이나 늘어지자 슬슬 빅터도 열이 올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 힘으로 하비를 잡아볼 거라는 오기도 생겼다. 돈을 쓰지 않고, 사람도 쓰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감으로 말이다. 그편이 나중에 하비를 만났을 때 훨씬 떳떳할 것이다.
하비가 묵었던 숙소를 나오는 빅터의 눈에 결연한 의지와 독기가 깃들었다.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게 해주지.’
빅터는 하비의 행선지부터 정확히 파악하기로 했다. 굳이 사람을 풀지 않아도 며칠간 하비가 다닌 길을 조사하면 어느 정도 추측이 되었다.
아무리 뚜렷한 목적지 없이 다닌다 할지라도 중첩되는 곳은 늘 나왔다.
커피하우스에 들른 빅터가 옆에 커피를 하나 놓고 열 받은 얼굴로 테이블에 지도를 펼쳤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빅터는 하비가 거쳐 갔던 숙소를 모조리 표시하고, 하비가 다녔으리라 예상되는 길목까지 빠짐없이 체크했다. 그러다 보니 짐작되는 몇 군데가 나왔다.
‘광산에도 한 번 들렀고, 여길 자주 가는군.’
이로비나 섬의 원주민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 그곳에 하비의 발길이 잦았다.
관청에 들른 것은 초반 몇 번 이외에 없었다. 몇 곳 돌아다니다가 정 못 찾으면 원주민 마을에 자리 잡고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빅터가 턱을 쓰다듬고는 곧바로 지도를 접었다. 돌아다닌 길을 보면 하비는 섬의 생태나 사람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조사하고 있었다.
‘현장 조사는 아랫사람에게 맡기면 될 텐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실함이 오히려 하비의 발목을 붙들게 될 것이다. 그런 점이 또 하비다워서, 빅터는 피식 웃고는 우선은 하비가 다녔던 장소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비의 행적에 대해 사람들에게 묻다 보니 빅터는 여러 가지를 듣게 되었다.
“스터스 경요? 어제 왔다가 가셨죠. 팁을 너무 두둑히 주셔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요.”
“그저께 오셔서 저희 일을 돕다가 가셨습니다만.”
“오늘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가셨습니다. 극구 말렸는데 땔감도 같이 준비했죠.”
“저희 가게 점원이 실수로 스터스 경에게 차를 쏟고 찻잔도 깼는데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안 다쳤냐고만 물으시고요.”
정작 하비의 다음 행적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었지만 하비가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알았다. 이로비나 섬의 사람들이 하비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빅터는 이런 상황이 기꺼우면서도 동시에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하비를 혼자만 독점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게 만드는 것이 화나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당장 본국에만 돌아가도 외교부나 은행에서 하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젠장 할.’
벌써 석양이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빅터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장소는 하비가 다녀간 지 몇 시간도 안 되었다. 점점 약이 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빅터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오늘은 반나절 차이로 놓친 건가.”
그래도 따라잡기까지 간격이 줄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이 잘못한 걸 알면서도 쉬이 잡혀주지 않는 하비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잡히기만 해봐. 이 고생은 몇 배로 받아내겠어.’
그리하여 빅터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이로비나 섬의 원주민 마을이었다. 작정하고 며칠 죽치고 앉아 있으면 한 번쯤은 하비가 들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빅터는 아예 원주민 마을 초입에 있는 작은 숙소에 자리를 잡고 하비를 기다렸다.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 빅터는 그곳 촌장을 불렀다.
하비가 오면 반드시 자신에게 알리게 한 빅터는 그에게서 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촌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스터스 경이 섬에 오시자마자 누군가를 찾고 다니시는 걸 봤습니다.”
대번에 빅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다툰 뒤에 섬까지 와서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니. 촌장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빅터의 상상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났다.
“찾고 있었다고? 그게 누군데?”
“금발에 예쁘장한 청년이었습니다만.”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빅터가 보기에도 외모가 반반하던 금발의 미청년, 젤가였다. 마지막으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젤가는 이로비나 섬으로 왔다.
빅터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설마 그놈 때문에 여길 고집한 건가?’
빅터가 이로비나 섬에 온 것은 하비도 인지하고 있는 듯했으니,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찔려서 피해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빅터는 말 등에 올라타며 상념을 정리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지.’
머리를 크게 흔들어 떨쳐내려 했지만 한번 불이 붙은 상상은 커져만 갔다.
빅터는 애써 불온하게 뻗어나가는 상상을 죽였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에메랄드가 박힌 금목걸이를 꽉 쥐었다.
‘저번에도 이러다가 실수했잖아. 앞서가지 말자.’
젤가와 엮였을 때 엉뚱한 오해만 하지 않았더라면 하비를 괴롭게 하지도 않고, 브로치를 더 빨리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뒷모습이 하비와 몹시 닮은 남자가 보였다. 머리칼 색이나 체격마저 비슷했다. 빅터는 본능처럼 그 남자를 쫓아갔다.
“하비……?”
남자가 천천히 뒤돌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빅터는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는 듯했다. 하지만 뒤돌아선 남자는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하고 안경도 끼고 있었다.
“누구세요?”
심지어 알파도 아닌 오메가였다. 빅터는 흠칫 놀라며 남자를 놓아주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형질 구분조차 못 했을까.
“실례했습니다. 아는 사람인 줄 알아서.”
짧게 사과한 빅터를 남자가 위아래로 훑었다. 장신에, 체격 좋고, 눈이 돌아갈 정도로 잘생긴 금발의 우성 알파가 거대한 흑마를 타고 있었다.
“조심하쇼. 흠흠.”
왠지 남자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지만 빅터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러나 몇 걸음 안 가 말고삐를 당겨 우뚝 멈춰섰다.
‘이건…….’
잘 알고 있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어디선가 흘러들어 왔다. 방금 지나친 남자의 것은 아니었다. 빅터가 고개를 휙 돌려 그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말을 달렸다.
‘마을 입구 쪽인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웃대고 있는 금발 남자가 보였다. 왜소한 체격이지만 무시 못 할 기세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정찰하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던 그는 곧 빅터를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어쩐지 좀 전부터 익숙하고 강렬한 알파 페로몬이 느껴진다 했다.
젤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다시 만나 뵙는군요, 베르텐 경.”
빅터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대번에 사나워졌다.
“다시 내 눈앞에 보이면 가만 안 둔다고 했을 텐데.”
“저는 열심히 피해 다녔습니다. 섬까지 찾아온 건 경이죠.”
예전에 비하면 많이 밝아지고 자신감이 붙은 젤가였다. 빅터는 아니꼬워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비는? 오자마자 찾으러 다닌 사람이 너 아니었나.”
침묵하던 젤가가 난감한 듯 웃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젤가는 하비와 빅터 사이에 일어났던 많은 일을 짐작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때문에 빅터가 하비를 봐서라도 자신을 결코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이 난폭한 남자는 하비와 관련되는 일에는 이성을 잃거나, 혹은 절절맸다.
빅터도 젤가가 뭘 믿고 저리 뻗대는 것인지를 정확히 꿰뚫었다. 안 그래도 곱지 않던 심사가 더욱 크게 뒤틀렸다.
‘이것 봐라.’
젤가보다 훨씬 짙은 녹색 눈에 살기가 머물렀다.
“기고만장한 건 거기까지 해. 더 안 봐줘.”
살벌한 경고에 젤가는 자라처럼 목을 수그렸다. 하비를 믿고 조금 나서긴 했지만 솔직히 빅터가 아직 무서웠다. 하비가 부탁한 것만 아니었다면 다시는 이 남자와 엮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젤가는 마지막 오기로 빅터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따라오십시오. 스터스 경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부탁받은 것도 끝냈으니, 젤가는 이제 빅터를 하비에게 인도해도 괜찮을 것이라 판단했다.
젤가가 빅터를 데려간 곳은 원주민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한 작은 광산이었다.
말에서 내린 빅터가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휙휙 둘러봤다.
“여긴 어디지?”
“와보시면 압니다.”
이 광산은 인체에 좋은 물질이 나와 건강을 유지하도록 돕는다는 희귀 광물이 나는 곳이었다. 하얗고 은은한 광물의 빛이 광산 동굴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젤가가 목소리를 높이고 손을 흔들었다.
“스터스 경! 베르텐 경을 모셔 왔습니다.”
광산 동굴 구석에서 원주민 하나와 뭔갈 이야기 나누고 있던 하비가 깜짝 놀라 튀어나왔다. 하비는 우두커니 서 있는 빅터를 바로 발견했다.
빅터는 하비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미간을 좁혔다.
사과부터? 아니, 왜 도망 다녔냐고 물어야 하나?
하비는 여러 고민으로 심란해진 빅터를 평소와 똑같이 대했다.
“왔나? 빨리 찾았군.”
예상보다 빠르긴 했지만 그래도 준비는 되었다. 하비는 젤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며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수고했어.”
혼란스러워하던 빅터는 지금의 상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하비의 곁에 있는 남자는 채취용 도구들을 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건데?”
“광물 채취.”
여전히 이해 안 간다는 얼굴로 빅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비는 부연 설명했다.
“광물로 뭔갈 만들어보려고 했지.”
이로비나 섬의 원주민들이 대대로 이 광물로 팔찌를 만들어 차고 다니는 것을 하비는 여러 번 보았다.
그 효능에 대해 듣고 나서 생각한 것이 ‘빅터에게도 주고 싶다’였다.
건강 염려증이 있는 건가 생각될 정도로 하비의 건강을 챙기는 빅터였다. 그런데 정작 그가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않는 게 하비는 내내 신경 쓰였다.
‘생일 당일에 줘야 의미가 있겠지.’
차질없이 일을 진행하기 위해 하비는 과정까지 비밀에 부쳤다. 섬세하게 광물을 가공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려고 젤가를 통하기도 했다.
이미 팔찌는 완성은 되었지만 추가적으로 덧붙일 광석은 없을까 하여 광산 동굴을 주기적으로 찾던 중이었다.
그사이 눈치를 보던 젤가는 슬쩍 동굴을 빠져나갔다. 불똥이 튀는 것이 싫어서였다. 자칫 하비에게까지 영향이 갈까 봐.
이제 확실히 알았지만, 빅터 베르텐은 질투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자였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까지 동원한 살기를 떠올리자 젤가는 새삼 공포가 스몄다.
‘스터스 경은 대체 왜 저런 남자와…….’
한 사람의 의문을 뒤로하고, 하비는 빅터를 불렀다.
“곧 생일이잖아. 뭘 해줄까 생각하다가 이게 떠올라서.”
생일? 빅터의 멍한 눈길을 보고 하비는 혹여 또 오해할까 싶어 다시 입을 열었다.
“젤가가 솜씨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줬어. 멋진 실력이더군.”
“과찬이십니다.”
수공예 업자로 보이는 남자와 하비가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다 빅터가 조용히 물었다.
“생일이라고? 누구 생일?”
설마 다른 사람인가 경계했지만 이번에도 하비의 대답은 빨랐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마저 섞여 있었다.
“당연히 네 생일이지. 미리 준비했다가 당일에 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다시 멍해지는 얼굴을 보니 확실했다. 본인의 생일조차 잊고 있었다니. 하비는 미리 챙긴 것이 다행이라고 거듭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팔찌 크기나 확인하기로 했다.
“이리 와. 와서 맞는지 봐.”
분명 찾아내면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빅터는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하비가 시키는 대로 걸어가 얌전하게 한 손을 내밀기만 했다.
“그럭저럭 맞군. 다행이야.”
손목에 채워주는 손길과 목소리가 다정했다.
“몸에 좋은 거니 늘 차고 다니도록 해.”
그리 무겁지 않은 광물 팔찌가 빅터의 손목에서 하얗게 빛났다. 미리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장인의 손에 가공되어 모양 좋게 동그랗게 깎인 하얀 광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빅터는 순간 하비가 평범하게 오메가와 결혼했다면 얼마나 좋은 연인이 되었을까 상상해 버렸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차가운 분노와 미칠 듯한 질투가 동시에 들끓었다. 있지도 않은 상대에 대한 공허한 질투임에도 실체를 가지고 빅터를 압박했다.
기분 좋은 압력이 손목에서 느껴졌다. 빅터가 물끄러미 팔목을 들어 보았다.
‘이래서 피해 다닌 거였나.’
선물을 준비하기도 전에 들킬까 봐, 하비는 열심히도 그에게서 빠져나갔다. 온몸의 신경을 들끓게 하던 뜨거운 분노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분노가 빠져나간 자리엔 감동과 환희가 채워졌다.
어느덧 빅터는 마음이 들떠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하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드는 걸 넘어서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야.”
하비는 그 말을 허풍이라고 믿는 것 같았지만 빅터는 진심이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연인이라고, 목소리 높여 떠벌리고 싶었다.
문득 빅터가 하비의 빈 손목을 보고 물었다.
“네 거는?”
“선물용으로 만든 건데 내가 할 필요가 없지.”
건강에 좋은 것이라면 하비도 함께 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 중에 하비와 같은 모양의 물건이 늘어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빅터가 수공예 업자를 보며 얼른 말했다.
“똑같은 걸로 하나 더 만들어. 돈은 얼마든 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동굴을 나온 두 사람은 각자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나란히 말을 몰면서 빅터가 하비를 흘끗 보았다.
“은행 건 때문에 나한테 화나서 피하는 줄 알았어.”
“물론 며칠 정돈 화가 났었지. 근데 네가 원래 그런 성향인 줄 모르던 것도 아니고.”
하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에는 언제나 양면이 존재한다. 빅터의 장점이라고 보는 자유분방함과 드높은 자신감이, 때론 자기중심적인 배려로 이어진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제 딴에는 하비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물론 알아도 화가 나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하비는 이를 명확하게 말했다. 다른 오해가 없도록, 강하지만 부드러운 말투였다.
“난 그런 식의 배려는 원치 않아. 다시는 그러지 마.”
빅터는 냉큼 화해의 기회를 잡았다. 뼈아픈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 앞으론 조심하지.”
그저 뱉는 소리가 아닌, 신중한 태도와 말투였다. 하비는 빅터가 이렇게 말을 하면 정말 지킨다는 것을 알기에 더 언급하지 않았다.
빅터는 결코 잊지 않았다. 그것이 호의든, 복수든, 애정이든, 그 어떤 형태든 말이다. 이기적인 자신 때문에 하비가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었는지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틈이 날 때마다 하비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여러 번 말해도 닳기는커녕, 말을 할수록 의미가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
빅터가 말을 멈추더니 하비에게 말했다.
“더 잘할게. 네가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웃을 수 있도록.”
함께 보낸 시간들이 하비에게 행복한 순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건 빅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비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빅터를 보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하비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런 소릴 대낮에 잘도 말하는군.”
“내가 원래 좀 낯짝이 두꺼워.”
뻔뻔하게 말하는 것이 오늘도 빅터다웠다. 피식 웃던 하비는 진지하게 표정을 고쳤다. 이 말을 제일 먼저 했어야 했는데, 늦어버렸다.
“좀 이른 것 같지만.”
하비가 빅터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심을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빅터는 처음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하비 스터스라서,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더 길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오해로 점철되었던 긴 추격이 끝이 났다.
오랜만에 찾아왔던 악몽은, 빅터에게 그림자도 비추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