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Someday (11/18)

외전 1 Someday

빅터는 외교관 건물로 와서 하비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의 방문이 익숙해진 듯 외교관들의 인사도 자연스러웠다.

하비의 책상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보거나 사업 구상을 하고 있던 빅터가 대뜸 말을 걸었다.

“브로치 말이야.”

이로비나 섬 관계자가 보낸 서신을 훑고 있던 하비가 고개를 들었다.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흔들어 보이며 빅터가 말했다.

“옷을 입어야만 할 수가 있어서 다른 형태로 바꿀까 싶거든.”

매일 몸에서 떼어놓고 싶지가 않은데 한계가 있었다. 이를 몹시 안타까워한 빅터는 거침없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중간에 있는 보석만 추출해서 목걸이로 만들면 어떨까 해서.”

당사자인 하비는 오히려 의문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듯 보는 시선에 빅터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준 거니까 물어보는 거야.”

하비는 다시 서신으로 눈을 내렸다.

“괜찮아. 버린다는 것도 아니고, 형태만 변형시킨다는 건데.”

버린다는 선택지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빅터가 기겁했다.

“버리긴 누가 버려.”

그렇게 빅터의 목에 녹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달리게 되었다.

* * *

낮에 잠깐 시간을 내서 함께 외출을 했을 때였다.

금줄에 녹색 보석을 단 목걸이를 손으로 들어 올리며 빅터가 흥미로운 눈으로 말했다.

“이거 진짜 에메랄드라던데?”

브로치를 목걸이로 바꾸러 귀금속 가게에 드나들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비는 빅터가 자랑스럽게 내밀고 있는 목걸이를 당혹스러운 듯 보았다.

“그랬나? 몰랐는데…….”

하비가 목걸이를 사던 당시 상인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었다. 제값으로 사지 못했다는 생각에 하비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비가 다음에 그쪽으로 가면 상인에게 정확한 대금을 치러야겠다고 다짐하던 차에 빅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면 충분하니까 자꾸 귀금속 가게 쪽 기웃대지 마.”

정곡을 찔린 하비는 헛기침을 했다.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지?”

“가끔 브로치 쳐다보면서 눈살 찌푸리잖아. 그런 날은 꼭 귀금속 가게 앞에서 서성대고 있고.”

하비가 가게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가격표를 들여다보면서 눈으로 비교만 하다가 돌아선다고 몇 번이나 보고받았다.

분명 마음에 안 들어서 새로운 것을 사주려고 한 것이다.

미련 가득한 눈으로 끝까지 보기만 하다가 지나쳤을 하비가 생생했다.

하비는 현재 착실하게 빅터에게 돈을 갚아나가고 있는 중이라 큰 소비를 하려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빅터였다.

빅터는 목걸이를 잡아서 하비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깨끗하게 닦인 녹빛 보석이 햇살에 비쳐 반짝거렸다.

“아무튼, 나한테 진짜 에메랄드 목걸이를 준 셈이니까 다른 건 됐어. 이거면 만족해. 더 필요도 없어.”

빅터가 민망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는 하비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다른 건 좀 받고 싶네.”

하비가 작은 목소리로 빅터를 타박했다.

“어제도 새벽까지 했잖아.”

그것도 침대에 온몸이 녹아들 정도로 격렬하게 했다. 하비의 얼굴이 떨떠름해지고 귀가 달아올랐다.

그런 하비를 귀여운 듯 보던 빅터가 하비와 깍지를 끼면서 어깨를 더욱 가까이했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밝았지.”

하여간 말은 잘한다. 하비는 빅터의 열렬한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도 깍지를 낀 손은 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었지만 마음 가는 대로 했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힐끗 맞잡은 손을 내려다본 빅터가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흡족하게 말했다.

“‘그날’ 생각나네.”

“그날?”

빅터가 잡은 손을 들어 하비의 손등에 짧게 입 맞추었다.

“네가 속 시원하게 밝힌 날.”

하비는 흠칫하며 눈만 굴려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듣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일주일 전 하비는 공개적으로 나서서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의 일을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라힌 스터스의 실책으로 다쳐야 했던 사람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날 하비가 단상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빅터는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빅터는 식은땀이 나던 하비의 손바닥이 지금도 생생했다.

하비는 지난 일을 모두 인정했다. 스터스가 인물로선 최초의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스터스가는 결코 잘못하지도 않고, 그럴 일도 만들지 않는다. 그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과할 일도 없었다.

스터스가 전체를 의심하며 비난하던 여론이 그나마 호의적으로 돌아선 것은 그날 하비의 진심 어린 태도 덕분이었다.

하비는 외교관 일선에서 물러나고, 당에서 자발적으로 탈퇴함으로써 책임을 다했다. 아예 귀족 사회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하비의 행보가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이끌어냈다.

얼마간은 과오를 인정한 것 때문에 스터스가의 오욕으로 불렸지만,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때 빅터가 하비의 손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물었다.

“근데 아직도 못 정했어?”

무얼 말하는지 눈치챈 하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한 얼굴이었지만 빅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합칠 때도 됐잖아.”

“흐음…….”

“집사가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지, 사실 너도 그놈 눈치 보느라 내 저택으로 오는 거 다 알아.”

“어쩔 수 없잖아.”

하비는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가 좋았다. 그래서 새로운 집에서 지내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도 하기 싫은 걸 빅터에게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깍지 낀 손가락 사이를 엄지로 지분거리는 빅터를 하비가 물끄러미 보았다.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거면, 중간 지점에 작은 건물을 하나 사지.”

이럴 줄 알았다. 하비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든 사는 걸로 결론짓지 마. 그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보는 걸로 하지.”

왜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는 건지. 예전처럼 서로의 저택을 왕래하면 충분할 일인데, 빅터는 매일 아침 함께 일어나고 싶다며 계속 일을 꾸몄다.

‘물론 나도 좋지만.’

하비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것과는 별개로, 빅터가 습관처럼 물 쓰듯 돈을 낭비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비는 진지하게 조언했다.

“사업이 언제까지 성공만 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러나 빅터는 태평하기만 했다.

“괜찮아. 당장 총기 사업이 망해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돈은 있어.”

물론 음지에 비자금처럼 꿍쳐둔 것이지만 굳이 하비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를 모르는 하비로서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왕실 국고로 재산이 차압당한 저번의 경우를 언급하며 하비가 말했다.

“언제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르는 게 돈이야. 평소에 아껴둬.”

빅터는 빙긋 웃었다.

“말만으로도 고맙지만.”

빅터가 하비의 귓불을 손으로 매만졌다. 움찔하는 모습에 흥이 나 얼굴도 가까이했다.

“내가 돈을 펑펑 쓰는 건 앞으로 무조건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 혹은…….”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가 하비의 귓가에 울렸다.

“너와 관련된 일에 한정되어서니 너무 걱정하지 마.”

하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예민한 귀에 뜨거운 입김이 닿자 등에 소름이 돋았다. 더욱 은밀해진 목소리에 하비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휙 살폈다.

“그것보다 네가 걱정해야 할 건 다른 걸 텐데?”

알게 모르게 이쪽을 주시하는 눈길들이 있었다. 하비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일제히 흩어졌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벌인 일 때문에 주목받는 처지인데 길거리에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하비는 민망한 얼굴로 빅터에게서 멀어져 헛기침을 했다.

“……산책이 너무 길어진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지.”

하비의 방어적인 태도에 빅터가 피식 웃었다.

“바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이왕 나온 김에 못 해본 것도 해보자고.”

“못 해본 것?”

빅터가 하비의 손을 잡은 팔을 앞으로 당겼다.

“같이 걸어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발 닿는 대로 가보는 거.”

빅터는 하비와 평범한 데이트를 해보고 싶었다. 둘 다 일정에 쫓기는 바쁜 인물인 탓에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긴 적도 드물었고, 시간을 잊은 채 뭔갈 함께 해본 적도 없었다.

빅터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시간 없어?”

고민하던 하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돌아다니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이다.

하비의 시선이 빅터의 반짝이는 목걸이에 닿았다.

“조금만이야.”

하비의 승낙이 떨어진 뒤,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의 손에는 즉석에서 갈아 만든 과일 주스가 들려 있었다. 무역으로 들여온 열대 과일이었다.

얇은 종이팩에 든 주스를 흔들며 빅터가 기쁜 듯 말했다.

“이거 괜찮은데?”

하비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생각보다 좋았다. 그동안 청결하지 못하다 생각해서 입도 대지 않았는데. 시큼하면서 달달한 과일 향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원래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먹는 것을 질색하고 걸어 다니며 먹는 것도 싫어했던 하비였다. 그럼에도 빅터가 너무 좋아해서 순순히 따라주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나쁘진 않군.’

하비의 눈이 희희낙락하는 빅터에게 향했다. 따사로운 햇살에 빅터의 머리가 금사처럼 반짝였다. 활력 있는 표정에 선명한 이목구비가 더해져 매력적으로 보였다. 나무 빨대를 물고 있는 도톰한 입술이 오물거렸다.

게다가 빅터가 목에 건 목걸이가 걸을 때마다 조금씩 튀어 올랐다. 진짜 에메랄드라던 보석이 영롱한 녹색빛을 반짝거렸다.

하비가 저도 모르게 그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빅터가 마침 고개를 하비 쪽으로 휙 돌렸다.

“맛있어?”

하비의 시선이 빠르게 옆으로 달아났다. 얼마 남지 않은 과일 주스를 마시던 하비가 기침을 했다. 급히 삼키느라 목에 걸려 버렸다.

겨우 기침이 멎은 뒤 하비가 간신히 말했다.

“그럭저럭.”

빅터가 속이 비치는 하비의 종이팩을 응시했다.

“그런 것치곤 벌써 다 먹었네. 하나 더?”

“괜찮아. 배불러.”

그런 하비를 물끄러미 보던 빅터가 미소 지었다. 녹색 눈이 한껏 즐거이 휘었다.

빅터는 손을 들어 사람들이 몰려 있는 광장을 가리켰다.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기예단이 있었다.

“이번엔 저길 가볼까?”

수많은 군중이 기예를 구경하고 있었다. 기예단은 불을 뿜기도 하고, 빠르게 공을 던지기도 했다. 아슬아슬하게 실수할 것 같다가도 성공시키는 곡예에 사람들의 박수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비가 이건 정말 난감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저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끼면 옷도 더럽혀지고 구겨진다. 거기다 생소한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는 느낌도 별로였다. 하비가 말꼬리를 흐렸다.

“으음…….”

빅터는 하비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왜? 싫어?”

괜찮다고 해야 할까. 하비가 잠깐 고민하던 사이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다른 곳으로 잡아끌었다. 전혀 미련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지 뭐.”

이리되니 하비는 조금 미안해졌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호기심이 가득했는데. 빅터의 손을 당겨 걸음을 멈춘 뒤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보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대답과 함께 빅터가 씨익 웃었다.

“아까 말했잖아. 같이 걸어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곳을 가보자고.”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도 하비는 빅터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었다.

“그러려면 ‘둘 다’ 마음에 들어야지. 그리고 저건 정말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당연한 소리 같은데 빅터의 입에서 나오니 특별하게만 들렸다. 방금 전에 본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하비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양보하느라 둘러대는 말일 테지.’

생각해 보니 빅터는 해적들 사이에서 크느라 한창 자랄 나이에 누렸어야 하는 것도 못 누렸다. 하비도 집안의 분위기에 눌려 제대로 못 누린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마음이 안 좋았다.

하비는 여기저기 날리는 흙먼지를 못 본 척하고 어느 장소든 가리라 단단히 결심했다.

둘 다 바쁜 사람이라 낮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특별한 경험을 해보겠는가.

‘이왕 같이 나온 거니까.’

그사이 잠시 고민하던 빅터의 입에서 하비를 위한 선택지가 나왔다. 최대한 장소의 깔끔함을 고려했다. 턱을 매만지며 빅터가 말했다.

“극장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군. 거긴 좌석도 따로 있고, 시설도 깨끗해.”

하비의 취향에 맞춘 적당한 권유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하비의 고민이 길어지고, 미간이 좁게 모여들었다.

그러다 하비가 문득 사람 많은 길거리를 둘러보았다. 멀리 다른 공연이 보였다. 귀족들을 위한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하는 이야기 무대였다.

하비가 보이는 곳을 향해 턱짓했고, 빅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저런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워낙 여러 부류의 사람이 한데 섞여 관람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분위기는 아니고 시장판 같은 느낌이었다.

당황한 빅터가 하비의 얼굴과 소박한 무대를 번갈아 보았다.

“저길? 정말인가?”

빅터 자신이야 어떤 환경에서든 적응할 수 있고 결벽증이 전혀 없지만, 하비는 달랐다. 옷에 묻은 먼지도 질색하는 사람이 저렇게 사람이 바글대는 좌석에 앉아서 보겠다고?

‘최근엔 좀 느슨해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하비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의자 사이의 간격도 너무 좁고, 시설도 길거리에 급히 세운 것이라 몹시 조악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만들어내는 온갖 소음과 먼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하비는 정말 괜찮은 건지 의심스럽게 보는 빅터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여기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궁금하기도 하고.”

빅터는 말없이 물끄러미 하비의 얼굴만 들여다봤다. 뜨끔한 하비가 되물었다.

“못 믿나?”

“아니. 그건 아닌데.”

한숨을 내쉰 빅터가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너는 안 괜찮은 것도 괜찮다고 해버리는 게 너무 많아서. 내가 알아서 판단해야 하거든.”

예리한 녀석. 하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안 믿어줄까 싶어 눈에 힘을 주니 아예 빅터가 하비의 목뒤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곤 속삭였다.

“곤란한 부분에만 솔직하고 말이야.”

하비의 잔잔한 밤색 눈을 응시하던 빅터가 목을 놓아주고 고개를 들었다.

“가보고 별로면 바로 뜨지. 혹시 불편한데 참고 있지 마. 꼭 이야기해 줘.”

“알았어.”

빅터는 하비에게서 확실하게 대답을 받아낸 뒤에야 움직였다.

하비로서는 생소한 길거리 연극이었다. 연극은 항상 잘 꾸며진 극장에서만 봐왔다.

야외 공연장은 의자도 다닥다닥 가까이 붙어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팔에 다른 사람의 몸이 걸렸다. 하비는 당연히 불편했지만 전혀 티 내지 않고 착석했다. 물론 앉기 전 의자 위를 손수건으로 닦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에 반해 손으로 대충 먼지를 훑어낸 빅터는 털썩 앉았다. 그가 팔걸이에 팔을 얹자 하비와 팔이 맞닿았다.

둘 다 체격이 좋은 탓에 떼는 둥 마는 둥 한 의자 간격이 의미 없어지고, 거의 찰싹 붙어 있다시피 한 꼴이 되었다.

하비가 붙은 팔과 어깨를 의식하자 빅터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아예 그에게 기댔다.

하비는 안 그래도 은근히 시선이 몰려서 낯 뜨거웠는데 빅터가 손장난을 치려 했다. 예민한 하비의 가슴 위로 크고 거칠거칠한 손이 스쳤다.

고의 다분한 손짓에 결국 하비는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나름대로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핑계를 대면서.

“무거워.”

하비의 반응이 재밌는지 피식 웃긴 했지만 빅터는 손장난을 그만두었다. 요즘 빅터는 하비의 기분을 봐가며 도를 지나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곧 시작하려는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하비가 빅터에게 물었다.

“전에 본 적 있나?”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본 적은 없고. 지나가다 얼핏 본 적은 있지.”

“지나가다가?”

이상한 뉘앙스에 하비가 되묻자 빅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끔 도시에 정박해서 돌아다녔거든. 물론 감시가 항상 붙었지만.”

몸 좋은 떡대 해적 몇 명이 항상 빅터를 감시하고 따라다녔다.

빅터가 어릴 때는 한두 명이었지만 그의 체격이 점점 좋아지자 여러 명이 붙었다. 자칫 감시역을 제압하고 도망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었다.

빅터의 과거는 언제 들어도 우울해지고 미안해졌다. 하비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힘들게 살았군.”

“너만 하겠어. 지금 생각해도 살 떨리는데.”

매일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살아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비가 왜 자신도 아닌 네가 살 떨리냐는 눈빛을 보내자 빅터는 싸늘한 눈으로 말했다.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절대 라힌 스터스를 용서할 생각 없어.”

하비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이 자신의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라힌 스터스에 대한 빅터의 분노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듯했다.

“널 만나게 해준 건 고맙긴 하지만, 그게 다야. 편지 건도 그렇고 쓸데없는 짓을 해서 괜히 오해하게 했잖아.”

빠각.

빅터가 쥔 의자 손잡이에 금이 갔다. 하비는 숨죽여 그의 말을 들었다. 어쩐지 계속 듣고 있다 보니 빅터가 라힌 스터스에 대해 진정으로 화난 이유는 그의 인생을 진창에 박은 것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빅터는 잔뜩 찌푸려진 눈으로 하비가 아닌 무대 위를 보았다.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사람들이 리허설을 했다.

빅터가 보고 있는 곳은 배우들이 리허설 중인 무대가 아니라 그 너머 스터스가 사람들이 묻혀 있을 장소였다.

희미한 분노가 낮은 목소리에 묻어났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게 숨겼고. 아무도 몰랐다는 건 그만큼 은밀하게 했다는 증거겠지. 미친 새끼.”

어릴 때 하비는 학대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치고 또래답지 않게 성숙해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는 그런 부분조차 귀족의 혈통 때문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누구도 스터스가의 귀한 자손이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백색 저택의 사람들은 날 때부터 잘나게 태어난 줄 아니까.

빅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난 죽을 때까지 네 아버지를 저주할 거야. 이미 죽은 놈이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열 받아.”

빅터가 자신의 아버지를 함부로 말하고 욕되게 하고 있지만 하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빅터는 경멸할 자격이 있었다.

하비가 흘끔 아래를 보았다. 빅터의 손이 하비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붙들고 있었다.

빅터 본인이 당한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정작 그가 분노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하비 자신이었다. 하비는 그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기뻤다. 꽁꽁 숨겨놨던 과거를 알고 대신 분노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는 것에, 그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하비가 들릴락 말락 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다.”

눈은 빅터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전달하는 의미는 확실했다. 하비의 손목에서 격렬하게 맥이 뛰었다. 빅터는 그것이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

“고마우면-”

빅터가 하비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키스해 줘.”

대번에 하비의 귀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초리가 등 뒤로 따갑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비는 겨우 대답했다.

“돌아가서.”

안 해준다는 말은 없다. 씨익 웃은 빅터가 한술 더 떠 물었다.

“누구 집으로 갈 건데?”

하비의 시선이 빅터를 피해 무대로 옮겨 갔다. 리허설이 끝나고 본무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끝나고 나서 생각해.”

하비가 그 즉시 잡혔던 손목을 떨구길래 아쉬워하던 빅터는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비가 손을 더 내려 빅터의 손을 마주 잡은 것이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단단하게 박인 굳은살이 거칠게 느껴졌다. 매끈거리는 약혼반지의 촉감도 함께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하비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빅터의 입가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큰일 났네.’

아무래도 무대에 집중하기는 글렀다.

* * *

길거리 연극은 막장 이야기 위주였다. 자극적인 소재로 채워져서 지루할 요소가 없었지만 하비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재미있었다. 여기저기서 즐겁게 웃는 소리와 관객과 어우러지는 배우들의 넉살에 휩쓸려 하비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계속 미소 지었다.

배우들이 관객 중 몇 명을 지목해서 무대에 올릴 때 빅터가 걸리기도 했다. 빅터는 즉석에서 같이 연기 호흡을 맞춰줘야 했다.

하비는 당혹스러워하던 빅터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황하던 것도 잠시, 빅터는 무대에 올라서자 마치 본래 그 극단에 속했던 사람처럼 여유롭게 배역을 잘 소화했다. 배우들이 반쯤은 진심으로 극단 영입을 권할 정도였다.

연극이 모두 끝나고, 빅터가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하비에게 물었다.

“좋았나?”

하비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관객들의 열기와 배우들의 열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활기였다.

“그럭저럭.”

하비의 ‘그럭저럭’이 좋다는 의미임을 아는 빅터는 흐뭇해했다. 빅터는 다음에 이런 기회를 또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다행이군.”

이후에도 두 사람은 광대가 하는 쇼를 보거나, 다트를 던져서 맞추면 상품을 주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빅터가 다트 실력이 너무 좋아 그곳 상품을 쓸다시피 했다. 울상인 주인을 보던 하비가 그저 재미로 한 것이니 상품은 되었다고 한 덕에 상품은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그리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 들어섰다. 하비가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해. 마무리할 것도 있고.”

사실 지금 시각이면 돌아가 봤자 이미 늦었다. 두고 나온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지라 하비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 다만 일정에 여유가 생긴 것을 알면 빅터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요즘은 예전만큼 못 했으니.’

욕구불만에 시달리던 우성 알파가 연인에게 원할 만한 상황은 단 한 가지였다.

못 했던 만큼 더욱 격렬하겠지.

하비는 상상만 해도 온몸이 뜨거워지고 벌써 빅터에게 전신 애무를 받는 기분이 들어서 오싹했다.

하비가 습관처럼 빅터의 옆모습을 흘끗 보았다. 그러자 좀 전부터 말이 없던 빅터가 문득 한쪽 입가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빅터가 갑자기 좁은 골목 안으로 하비를 끌어당겼다. 휙 소리가 날 정도로 성급했다.

차갑고 단단한 벽에 하비의 손이 빅터의 손에 얽혀 고정되었다.

당황하던 하비가 고요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빅터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왜……?”

빅터가 고개를 숙이더니 하비의 목에 입술을 맞췄다.

“아까부터 계속 내 얼굴 훔쳐보고 있었잖아.”

여린 살점을 빨아들이는 입술의 감각에 하비가 흠칫거렸다. 하비가 약한 곳 중 하나였다.

“누가 훔쳐봤다고…….”

하비는 눈을 슬쩍 다른 곳으로 돌리며 항의했다. 맞는 말이지만 막상 지적당하니 쑥스러웠다.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한 거였다니.

빅터는 피식 웃더니 말없이 애무에 전념했다.

꼼꼼하게 옭아맨 손이 점점 부들부들 떨렸다. 굳은살이 밴 단단하고 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간지러우면서 참을 수 없는 감각이 아지랑이처럼 하비의 몸 곳곳에 피어올랐다.

빅터가 손에 힘을 줄 때마다 반지가 손가락을 꽉 옥죄는 감각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하비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읏…….”

빅터가 혀와 입술을 써서 목 안쪽을 공략하다 눈만 흘끗 위로 올렸다.

“이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나?”

하비는 움찔거리다 주변을 살폈다. 어둑한 거리에 붉은 밤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올려다보기도 힘들던 한낮의 눈부심이 어느덧 울긋불긋한 색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시간을 잊고 지내보고 싶었다는 빅터의 말이 실현되었다. 정말,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를 정도로 즐거웠다.

‘그래도 이건 좀.’

하비가 목을 애무하는 빅터의 뒤통수를 난감한 얼굴로 내려다보다 한숨지었다. 차가운 벽돌 벽이 등 뒤에 닿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무도 없어.”

빅터의 얼굴이 슬슬 위로 올라왔다. 녹색 눈이 옆으로 길게 늘어났다.

“아까 못 받은 걸 받고 싶은데.”

하비가 불길한 예감에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여기선 안……!”

고개가 비스듬하게 틀어지며 입술을 막는 키스에 하비의 말이 끊겼다.

빅터가 숨 막히게 혀를 얽었다. 난잡하게 혀가 얽히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면서 삽입하듯 키스가 이어졌다.

어차피 여기서 끊지 못한다는 것을 안 하비는 빠르게 포기했다. 아예 한 팔을 빅터의 어깨에 걸치고 자신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둘의 코가 부딪쳤다. 강건한 턱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키스를 깊게 이어갔다. 뱀의 교미처럼 혀가 엉키면서 야한 소리가 났다.

하비는 눈을 감았다. 타액으로 젖은 부드러운 입술이 마찰했다.

때맞춰 빅터의 무릎이 다리에 닿고 혀처럼 얽혀들자 하비가 경계하듯 주춤거렸다.

입을 뗀 빅터가 몽롱한 눈으로 말했다.

“걱정 마. 끝까지 안 해.”

그때 하비가 손을 뻗어 빅터의 목걸이를 만지작댔다. 차가운 금속이 체온을 입어 달아올라 있었다. 빅터의 눈동자 색을 닮은 에메랄드가 하비를 향해 빛을 뿌렸다. 내려앉는 저녁의 색이 반사되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하비는 영롱한 빛을 내는 보석을 손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돌출된 녹색 보석에 입 맞추었다.

깊이 생각하고 산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빅터처럼 ‘진짜 보석’이 되어 돌아왔다.

만났을 뿐인데 필연이 되었다. 이 보석이 돌아온 길이 빅터와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때 행인 하나가 두 사람이 서 있는 좁은 골목 옆을 휙 지나갔다. 하비는 못 봤지만 빅터는 기척을 느꼈기에 그쪽을 무심코 보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행인을 확인하던 빅터는 목이 당겨져서 다시 앞을 보았다. 하비가 목걸이를 당긴 것이었다. 마치 그쪽은 보지 말고 이쪽만 보라는 듯, 강한 힘이었다.

하비가 빅터를 흘끔 올려다보며 체온으로 데워진 에메랄드에 다시 입 맞췄다. 이번엔 더욱 진한 입맞춤이었다. 금빛 목걸이 체인이 팽팽해졌다.

고요한 밤색 눈에 다른 곳을 볼 여유가 있냐는 물음이 가득했다. 빅터는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어떤 깨달음이 빅터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

빅터가 고개를 숙여 하비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부르르 떠는 반응을 즐기며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걸 하고 있는 게 좋아?”

그래서 계속 흘끔대면서 봤던 건가.

하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애틋한 눈길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갔다.

빅터는 자제하기 위해 온갖 인내심을 끌어올려야 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알까.

‘돌겠네.’

빅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빅터는 지금 당장 박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하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관심 없는 척하더니,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흠칫하긴 했지만 당연하다는 얼굴로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너에게 준 소중한 첫 선물인데. 뒷말은 삼켰지만 빅터는 알아들은 듯했다. 하비의 얼굴에 은은한 열기가 돌았다.

빅터가 하비의 뺨을 양손으로 잡고 손끝으로 비볐다. 굳은살 때문에 거칠거칠한 감각에 하비가 눈가를 기분 좋게 찡그렸다.

단단해서 손끝으로 누르면 근육에 튕겨 나오는 몸에 비해 하비의 뺨은 누르면 제법 잘 들어갔다.

대체 어쩌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밖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지.

“곤란할 때만 솔직해진다니까. 집까지 어떻게 참으라고.”

고문이 따로 없다며 한숨을 내쉰 빅터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선가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잘 훈련된 말이 매여 있는 전용 마차가 곧 이곳으로 도착할 것이다.

빅터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꼭 외교부로 돌아가야 해?”

이 분위기가 끊기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최근 들어 둘 다 일에 치이느라 침대에서 제대로 된 몸의 대화를 한 지가 좀 되었다. 빅터의 눈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고민하던 하비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질퍽한 키스를 연이어 했더니 정신이 혼미해진 탓도 있으리라. 그리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사실은…… 안 돌아가도 돼. 늦어서 다른 사람이 처리했을 테니까.”

빅터의 눈이 묘하게 휘었다.

“아깐 거짓말했던 건가?”

하비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미안하…….”

하비가 뱉는 사과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빅터의 들뜬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마차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하지?”

어리둥절한 하비를 보며 빅터가 씨익 웃었다.

“알고 있었어. 정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면 넌 시계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갔겠지.”

그런데 가지 않고 묵묵히 빅터의 변덕에 휘둘려 주었다.

하비는 할 말이 없어져 침묵했다. 어쩌면 자신을 빅터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딘가에서 달려오는 커다란 마차를 보며 빅터가 활기차게 말했다.

“서로 순번 바꿔가면서 지금처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네.”

하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마차의 방향을 정확히 짚어주었다.

“오늘은 내 집으로 가지.”

멀리서부터 은은한 빛이 전해졌다. 밤을 맞아 가스등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차갑게 가라앉던 어둠이 빛에 잠식되어 조금씩 사라졌다.

선물 같은 하루가 또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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