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오랜 시간 어긋나 굴러가던 톱니는, 이가 맞지 않아 서로를 파괴했다. 드디어 모든 톱니가 빠지고 원이 되어서야 비로소 편안하게 함께 있을 수 있었다.
* * *
하비는 아침을 당혹스러운 한숨으로 시작했다. 아직 빅터의 성기가 그대로 뒤에 박혀 있었다. 하비는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길고 두꺼운 팔을 천천히 내리고 엉덩이를 움직여 조심스럽게 성기를 빼내었다.
그러자 구멍 안에 있던 정액이 함께 나와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벅지에 흐르는 느낌은 둘째 치고, 묵직하고 뜨거운 성기가 구멍에서 밀려 나가면서 내벽이 한 번에 쓸렸다.
“읏…….”
하비는 숨 막히게 달아오르는 쾌감에 부르르 떨었다. 간밤에도 얼마나 정액을 들이부었는지 모른다. 사정을 한 횟수도 헷갈렸다. 절정은 사정 없이 느낀 것을 포함하면 아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간신히 일어나서 맨몸으로 거울 앞에 서자 부스스한 밤색 머리칼 아래 지친 하얀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넓은 어깨에 잘 자리 잡은 근육이 팔을 움직이자 힘이 들어갔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구멍 안에 남아 있던 정액이 또 흘렀다. 거울에 비친 하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하비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어버렸다.
“후우…….”
머리가 하얗게 빌 정도로의 거대한 쾌감에 도달해도 빅터는 결코 허릿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구멍에서 성기가 빠질 정도로 크게 튀어 올라 온몸을 붉히고 경련을 일으키면, 기어이 쫓아와 하비의 배를 찍어누르고 다시 성기를 박아 넣었다.
빅터는 허리를 더 세게 밀어붙이며 사정 봐주지 않고 쑤셔 넣기를 반복했다. 감당하기 힘든 굵은 성기가 안쪽을 박아대면 더 큰 쾌감이 밀려왔다. 안 그래도 예민해진 내벽 전체가 비벼지고 마찰되면서 죽을 것 같은 뜨거움이 하비의 온몸을 덮쳤다.
그러면 하비는 이불을 쥐어뜯으면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놀라운 비음이었다.
척추가 지릿거리는 강력한 쾌감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가려 하면 빅터가 아예 깎지를 껴버리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미 갔는데도 계속 쑤셔 박는 통에 금방 또 절정에 달하는 일도 잦았다.
하비는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고 벗어놓은 옷가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옷이나 빨리 입어야…….’
갑자기 아래로 급격히 피가 쏠리는 느낌에 하비가 반사적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낭패라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간밤의 격렬한 정사를 생각만 했을 뿐인데, 아래가 섰다. 그만큼 빅터와의 섹스는 자극적이었다.
그때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하비의 탄탄한 등 뒤에 맨살이 닿았다.
“다시 설 만큼 야한 상상을 한 건가?”
하비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넌 대체 왜 선 건데.”
엉덩이 사이로 닿는 성기가 벌써 흥분해 있었다. 아침 발기라기엔 너무 뜨겁고, 크고, 활기찼다.
빅터가 하비의 목뒤로 숨을 나른하게 내쉬면서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아직 목이 다 풀리지 않아 잠겨 있었다.
“네 뒤태가 너무 완벽해서.”
눈뜨자마자 보인 게 밤새 쏟은 정액을 허벅지 사이로 하얗게 흘리면서 걷는 하비의 뒷모습이었다. 보자마자 바로 반응해 버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야한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빅터의 일침에 뭐라 반박하려던 하비는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게 누가 그런 거 흘리면서 돌아다니랬나.”
빅터는 얌전해진 하비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양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위압적인 상박이 하비의 가슴을 옭아매었다. 하비의 귓가에 대고 빅터가 속삭였다.
“네가 갈 때 어떤지 알아?”
거울 속에서 하비와 눈이 마주치자 빅터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비가 민망한 얼굴로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자세로 빅터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다.
빅터는 피식 웃으며 차가운 공기에 바짝 선 하비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하비가 움찔움찔 떨면서 뜨거운 숨을 뱉었다.
“가슴팍이 빨개지면서 좀 부풀어 올라.”
빅터는 집요하게 유두를 꼬집다가 크게 비틀었다. 그러자 하비가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참고는 경련하듯 부들거렸다.
“여기가 갑자기 붉게 물들고.”
빅터가 근육이 발달해 볼록한 가슴팍을 손바닥 전체로 천천히 만졌다. 하비는 야릇한 느낌에 미간을 구겼다. 자꾸만 익숙한 신음이 튀어나오려 했다.
하비의 가슴골을 손가락으로 그으면서 빅터가 씨익 웃었다. 그가 얼굴을 내밀어 하비의 뺨에 입술을 누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턱이 뒤로 넘어가지.”
손을 아래로 내린 빅터가 한 손으로 하비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탄력 있고 하얀 살덩이가 터질 것처럼 손안에 들어찼다.
“허벅지가 떨리고…….”
빅터의 반대편 손은 앞으로 가서 발기한 선단을 엄지로 꾹 눌렀다. 벌써 쿠퍼액이 나오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번뜩거릴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하비를 몰아쳤다. 이번엔 못 참고 하비가 허리를 꺾었다.
“윽……!”
빅터가 하비를 따라 자신도 상체를 숙이면서 하비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목뒤, 귀, 거울에 비치는 하비의 가슴에도 희미하게 붉게 열이 올랐다.
쿠퍼액이 찔끔찔끔 나오는 선단을 더욱 세게 누르며 빅터가 낮게 속삭였다.
“마지막엔 여기서 물이 나와.”
“흐읏……. 그만…….”
이번엔 하비의 한쪽 발을 제 발로 누르면서 빅터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발가락도 엄청 움찔대지. 네 발가락이 꽤 길어서 접힐 때마다 발 전체 길이가 짧아지는 것 같다니까.”
하비가 제 성기를 움켜쥔 빅터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억지로 떼어냈다. 빅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하비는 미미하게 열기가 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하비는 깨끗한 물에 담겼던 양동이 속 물수건으로 급히 쿠퍼액을 닦아내고 새것을 꺼내 빅터에게 던졌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잡은 빅터가 제 손을 닦았다.
하비가 다른 곳을 쳐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 건 또 언제 다 본 거야.”
빅터가 얄미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너도 봤잖아. 내가 가는 거.”
하비는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못 들은 척하며 옷을 찾아 입었다. 그 모습을 보자 빅터가 장난스러운 기세를 더했다.
“내가 가는 모습은 어때?”
황급히 속옷을 입고 그 위로 덧입으려던 하비가 손길을 우뚝 멈췄다. 새벽까지 계속되던 거친 관계에서 사정 직전 빅터의 얼굴이…….
맑은 녹색 눈이 절정으로 이지러지고, 붉은 입술은 하비의 이름을 불렀다. 빅터의 몸 전체에 힘이 들어가고, 잘 짜인 복근이 움찔거렸다. 허벅지 안쪽 근육에도 경직이 오면, 구멍 안에 뜨거운 정액이 순식간에 들어찼다.
하비는 저도 모르게 빅터가 사정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어느새 다가온 빅터가 뚫어지게 그걸 지켜보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걸 노린 거였다. 저 철면피가.
하비가 이를 갈며 낮게 대꾸했다.
“안 봐서 모르겠는데.”
거짓말인 걸 다 안다는 눈으로 빅터가 피식 웃었다.
하비는 그의 눈을 피해 재빨리 옷을 꿰입었다. 오늘은 총괄 외교관이 제안한 자리에 처음 출근하는 날이었다.
하비의 능력을 아까워하며 민간인 자격으로 이로비나 섬 관련 일에 참여하라는 제안이었다. 제안이 아니라 거의 협박 및 애원에 가까웠지만.
하비는 대신 이로비나 섬 건만 끝나면 자신은 완전히 외교부 일에서 손 떼겠다고 밝혔다. 물론 총괄 외교관은 그러겠노라고 했지만 집착 가득한 눈길을 보니 쉽진 않을 것 같았다.
하비가 다가온 빅터를 손으로 밀었다. 여기서 빅터에게 더 휘둘리면 정말로 출근을 못 하게 될 거라는 불안에 휩싸였다.
“늦었어. 이제 그만해.”
“아직 시간 한참 남았잖아. 아니야?”
“1시간은 일찍 가야지.”
빅터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눈가를 찡그렸다.
“그렇게 일찍?”
왜 정해진 출근 시간을 두고 더 일찍 가야 한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된다. 과잉 노동이다.
빅터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후우. 조만간 외교부를 폭파해 버릴까…….”
작은 중얼거림으로도 하비는 불안해졌다. 빅터라면 정말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비가 뒤돌아보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그런 짓 했다간…….”
“걱정 마. 안 해. 농담도 함부로 못 하겠네.”
네 농담은 농담 같지 않게 들리니까 그런다는 말은 간신히 삼켰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하비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굳이 당 탈퇴까지 했어야 했나?”
“네가 굳이 외교관을 그만둔 것과 같은 거야.”
딱히 할 말이 없어진 하비가 조용해지자 빅터는 그를 흘끗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침대 위로 다시 몸을 던지고 양손을 뒤통수에 댄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 안 하고 뒹구는 게 이런 느낌이었군. 할 만한데.”
문득 빅터가 피식 웃었다.
“의외의 적성을 찾은 것 같아.”
그런데 꽤 냉정한 대답이 하비에게서 돌아왔다.
“적성은 침대에서 찾지 말고, 나가서 찾아.”
“오. 백수는 싫은 건가?”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도 있고.”
빅터는 하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리고는 안색을 바꿨다. 장난스럽던 아까와는 달리 꽤 차가워졌다.
하비는 빅터의 눈치를 살피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널 복권시키고 싶어 해. 다들 알아.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정말이었다. 시민들이 빅터를 다시 시의원으로 복권시키자고 성화였다. 해적을 소탕한 데다, 이로비나 섬을 취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인질들을 구했다.
임페르 해적단에 납치되었다가 아예 그곳에서 자리 잡고 해적질을 해서 상단을 꾸렸다는 이야기도, 소문을 몇 단계 거치면서 영웅담으로 변해 있었다.
‘임페르 해적이 베르텐 경에게 반해서 먼저 상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면서?’
‘역시 그 능력 어디 가나.’
‘국왕 폐하께서 너무하셨지. 정말 해적질을 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하셨을 텐데.’
‘나서서 직접 해적질을 한 게 아니면 전 재산 압류는 너무한 거 아닌가?’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사실 국왕도 이런 상황임을 알고 찜찜해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다시 돌려주거나 왕명을 물리기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 무시하고 있다고.
고작 10일도 안 된 사이 시 여론이 이렇게 바뀌었다. 덕분에 빅터의 저택을 압류하라는 왕명은 한 달로 더 늦춰졌다 사람들의 여론을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이렇게 아직도 빅터의 저택에서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물건이 너무 없는 게 흠이지만.’
하비가 가구만 남아 훤하게 빈 방을 휙 둘러보더니, 아무 말 없이 천장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빅터의 의중을 다시 떠보았다.
“베르텐가도 널 가문에서 제적시킨 걸 후회하고 있다잖아. 돌아가고 싶지 않나?”
빅터가 워낙 일을 잘 처리했고, 대리 가주 역할을 잘 소화한 것이 컸다. 빅터에 대한 소문이 긍정적으로 변하자 베르텐가 내부에서 점점 말이 나오고 있었다. 현 베르텐가의 가주가 건강도 별로 좋지 않았고, 대리로 둔 자는 일 처리가 썩 뛰어나지 못했기에 빅터의 빈자리가 유독 컸다.
그러나 빅터는 은근슬쩍 후회와 미안함을 비치는 베르텐가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방관했다. 전혀 돌아갈 의지가 없어 보였다.
역시나 빅터가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와서? 웃기고들 있어.”
“그래도 한번 생각은 해보는 게…….”
“난 절대 안 돌아가.”
솔직히 이제 베르텐가가 망하든 말든 빅터는 그들의 존속 여부조차 상관이 없어졌다. 완전히 남이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허둥대다가 하루라도 빨리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직접 손대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편한가.
하비도 그런 마음을 엿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비도 본인이 싫다는데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주변에서도 많이들 권하니 한 번쯤은 제대로 이야기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비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가는 대로 해.”
하비가 더 설득할 줄 알았던 빅터가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복장을 완벽히 갖춘 하비가 뒤돌아 따라붙는 눈길을 마주 보았다.
밤색 눈이 자상하게 휘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람들 말은 이제 더 신경 쓰지 마.”
예전처럼 애정 가득한 목소리에 빅터의 심장이 또 미친 듯이 널뛰었다. 지금도 듣고 있지만 간혹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젯밤에도 원 없이 취했던 저 도톰한 입술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빅터가 이어 말하는 하비를 황홀한 얼굴로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게 너다우니까.”
심지어 이 다정하고 멋진 연인은 이해심조차 넓었다. 사려 깊게 생각하고, 오롯이 빅터를 위한 조언이나 말을 해주었다.
잠시 말없이 누워 있던 빅터가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옷을 주워 입었다.
하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디 나가려고?”
“같이 가게. 나도 갈 곳이 있어. 마침 외교부 건물과 방향이 같아.”
하비가 아는 척을 했다.
“아, 요즘 자주 가는 길드? 항상 좀 늦게 나가더니.”
“오늘은 약속이 일찍 잡혔어.”
그리 둘러댔지만 사실 조금이라도 더 하비와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 약속 따윈 없었다. 어차피 오늘 가면 그 재수 없는 길드장이 눈살만 찌푸릴 테니까.
열심히 옷을 꿰입느라 빅터는 몰랐다. 하비가 뒤돌아서면서 피식 웃는 것을.
‘핑계는.’
빅터가 요즘따라 매일 들르는 길드는 시계 장인들의 것이었다. 하비는 그가 따로 약속 없이 내키는 대로 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 *
빅터가 하려던 사업은 귀족들을 상대로 한 고급스러운 총기 장사였다. 그러려면 시계 장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들은 손기술이 좋아서 세밀한 부품을 만드는 정교한 작업도 곧잘 했다. 그렇기에 있는 자들의 고상한 안목을 만족시키려면 그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시계 장인들을 총관리하는 길드에서 완고하게 빅터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빅터의 태도나 제안이 너무 황당해서였다.
빅터는 벌써 일주일째 제집 드나들듯이 시계 장인 길드를 방문하고 있었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정말 놀러 오는 것처럼 당당하게 차를 요구하기도 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길드장은 빅터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은 언제 또 위로 올라설지 모른다.
“오늘 차는 좀 맛이 없군. 물 온도가 너무 낮은 것 아닌가?”
“……차 내리는 솜씨가 별로라 그럽니다.”
지금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빅터를 미래를 위한 보험이라 생각해 쫓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매일 방문하는 빅터를 보며 조용히 길드장 혼자 이를 갈 뿐이었다.
오늘도 이 금발의 미남자는 화려한 외모를 빛내며 다부진 손길로 준비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길드장의 일터에서 말이다.
그나마 빅터가 그동안 시계 장인들과 꾸준히 연락을 트고 관계를 좋게 해두어서 망정이지, 성정 괴팍한 길드장의 인내심에 슬슬 한계가 보였다.
시계 장인 길드장이 억지로 웃으며 빅터에게 물었다. 여러 번 들어 아는 내용이었지만,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였다.
“부싯돌은 황철석으로 한다고 하셨지요?”
빅터는 다른 나라에서 본 용병이 황철석으로 불꽃을 내서 담배를 피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권총 부싯돌로 할 만한 것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황철석을 부싯돌로 쓴다는 발상은 시계 장인 길드장에게도 매우 솔깃했다.
확실히 빅터가 가져온 사업 자체는 대물이긴 했다. 물꼬만 트이면 대박이 터질 것이다. 몇 가지 문제만 제하면 말이다.
“그래. 황철석 공급은 이로비나 섬에서 할 거라고 몇 번 말해.”
빅터는 이미 하비에게도 말을 해두었고, 하비가 이로비나 섬 관리자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거기선 무조건 수락이었다. 준보석에 속하는 황철석이지만 다른 보석만큼 크게 값어치 있지는 않았다. 그걸 이렇게 써먹어준다면 그들로서도 환영할 일이었으니까.
시계 장인 길드장이 헛기침을 했다.
“그것까진 좋다 칩시다. 그런데 말입니다.”
낯을 굳힌 길드장이 여유로운 빅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평생 독점 계약이요? 무슨 자신감입니까?”
결국 터졌다. 오래 참았다 했다. 속으로 웃은 빅터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빅터가 놀리듯 느긋하게 덧붙였다.
“판매 시 무조건 예약제로만 한다는 건 왜 빼먹어.”
신분 여하, 가진 것 여부에 상관없이 예약 선착순을 매긴다는 가정하였다. 취지는 좋았다.
너무 자신감이 넘쳐나는 태도라 자칫 솔깃할 뻔했지만 시계 장인 길드장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매일 들으니 이제 정말 세뇌가 될 것 같았다. 그나마 무기한 계약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은데, ‘평생 독점’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빅터와 관계가 틀어져도 다른 자와 물꼬를 틀 수조차 없는 조건 아닌가. 이 사업 귀재는 완벽한 소유를 원했다.
“하아……. 정말 곤란한 분이시네…….”
울그락불그락하던 길드장의 얼굴이 차차 가라앉았다.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그가 눈에 띄게 화색을 띠었다.
“우선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돌아가 주시죠. 곧 올 사람도 있어서요.”
“누구?”
“그, 그걸 제가 말해야 할 의무는 없지요.”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걸 보니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시계 장인 길드장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가 어지간히 좋은지 벌써 결혼식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아직 지속되고 있는 빅터의 정보 커피하우스에서 나온 정보였다. 유지할 돈이 없다며 해산하려고 했지만 다들 자발적으로 나선 탓에 소소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예전처럼 엄청난 정보를 모으지는 못하고 있지만.
빅터가 피식 웃었다.
‘평범한 과일 가게 여자라고 했던가.’
매일 애인에게 질 좋은 과일을 공급받으면서 한 번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빅터가 못마땅하다는 증거였다.
“그럼, 이만 가볼까.”
빅터가 일어나려던 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부리나케 길드장이 뛰어가 문을 열어주었고,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여자 목소리도 들렸다.
그때였다.
“어? 황금 거북이다!”
작은 소년이 뛰어와 빅터의 다리에 매달렸다. 당황한 빅터가 아이에게 물었다.
“날 알아?”
소년이 배시시 웃으며 말하려던 때,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혹시…… 황금 거북이 나으리세요?”
빅터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대체 누구길래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꾸 거북이 타령을…….
‘아, 그 여자인가.’
밝은 표정으로 들어온 여자를 보고서야 빅터는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너무 달라져서 순간 못 알아봤다. 그때의 꾀죄죄한 몰골이 사라지고, 예쁘장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하비가 반 로투스에게 선물로 주었던 황금 거북이를 로투스가에서 빼앗아서 와놓고는, 아픈 아들을 둔 거지 여인에게 주었었다. 왠지 유산한 하비가 떠올라서 처음 베푼 낯선 친절이었다.
그녀가 발그스름하게 얼굴을 물들이고 시계 장인 길드장에게 활발하게 말했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던 그분이에요!”
그렇게 곧 결혼할 애인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려던 길드장의 계획은 박살 났다.
그녀는 빅터를 붙들고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황금 거북이를 판 돈으로 아이도 살렸고, 작은 과일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나으리 덕분에 사람답게 살고 있답니다.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드리고 싶었는데 누구신지 몰라서…….”
나스타가 보석상에게 신분 보증을 해줄 때 귓속말로 해서 굳이 빅터임을 알리지 않은 탓도 있었다.
평소에 그녀가 얼마나 칭찬을 했던지 길드장은 질투 어린 얼굴로 빅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으리가 여기까진 왜 오신 거죠?”
길드장이 크게 움찔했다. 올 것이 왔다. 그리고 빅터에겐 아주 확실한 기회였다.
씨익 미소 지은 빅터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기나긴 사연과 더불어 사업 내용까지 전부 공개되었고, 완전히 몰입해서 듣던 여인은 급기야 길드장을 원망했다.
“당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런 좋은 분이 좋은 취지로 사업을 하시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드리지는 못할망정…….”
빅터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야 했다. 여인이 쌀쌀맞은 얼굴로 길드장에게 말했다.
“정말 실망이에요. 당신이 이렇게 계산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서릿발 같은 여인의 말을 마지막으로 길드장은 울상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드디어 빅터가 고안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시계 장인 길드장이 울며 겨자 먹기로 보낸 공식 계약서가 빅터의 손에 들려 있었다.
빅터의 다른 사업들이 그랬듯, 이번에도 그의 사업은 단숨에 성공했다.
시계 장인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예술품에 가까운 권총은 곧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엄청난 가격임에도 예약자가 줄을 이었다.
빅터는 예약자의 이름을 전부 공개해, 누군가가 끼어들거나 물건을 빼가려고 협박할 수도 없게 했다. 따라서 예약자가 아닌데 빅터의 권총을 가지고 있으면 눈총을 받았다.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것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선물받은 것이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애초에 예약을 받을 때 선물용은 따로 기입을 해두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선물로 줄 수도 있겠지만, 겨우 구한 귀한 권총을 선뜻 누군가에게 주긴 힘들 것이었다. 당장 서로 가지려고 아우성인 분위기 속에서 말이다.
“베르텐가, 로투스가, 왕가에서 예약이 오면 반드시 바로 받지 말고 주신 명단을 확인하라고 하셨죠?”
이제 빅터와 제법 친해진 길드장이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빅터가 사과를 베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저 세 곳은 웬만하면 예약을 받지 말고 온갖 핑계를 대서라도 순서를 미루라고 해두었다.
“어차피 로투스가는 가세가 너무 기울어서 저희 제품을 살 만한 여력도 안 될 텐데요?”
“상관없어. 빌려서라도 사려는 멍청이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로투스가 역시 빅터의 경우처럼 왕실 군대가 와서 재산을 전부 국고로 가져갔다. 해적과의 해전 때, 반 로투스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본 여러 용병이 목격 증언담이 국왕에게 전해진 것이다.
로투스가의 가주가 몹시 분노했지만, 그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국왕이 배신한 것이다. 뒤통수를 맞고 진저리를 쳤을 로투스가의 가주가 생각나 빅터는 속이 시원해졌다.
‘베르텐가도 뭐, 하는 걸 보니 얼마 안 가겠고.’
벌이는 사업이 족족 다 망하거나 쪽박만 겨우 면할 정도였다. 그쪽은 알아서 자멸할 것이 훤히 보여 이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와삭!
사과가 잘 익어서 몹시 달았다. 먹던 사과를 손에 든 빅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몹시 산뜻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수고해.”
* * *
빅터의 사업이 대히트를 친 지 얼마 안 되어, 하비는 국왕이 직접 치하를 하겠다며 부른 독대 자리에 앉았다. 해적을 물리치고, 이로비나 섬을 얻은 데다, 해적이 슬루인 제국과 내통했다는 증거품을 가져왔다는 이유였다.
여러 사람 앞에서 치하해도 될 것을 굳이 독대를 명했다는 것은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비는 국왕과 마주 앉아 확실하게 입장을 밝혔다.
“전부 빅터가 한 일입니다.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택 압류는 무를까 싶네. 사유지도 몇 개는 돌려주기로 결정했어.”
하비가 깜짝 놀라 무릎을 쥐고 물었다.
“예? 정말이십니까?”
“그 정도 공을 세운 자의 위신도 생각해 줘야지. 그게 정의 아닌가.”
국왕은 인자한 얼굴로 큰 것을 베푼다는 양 말했다. 하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빅터 대신 기뻐하며 주먹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좋은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사람들도 폐하의 온정과 정의를 이해할 겁니다.”
감사 인사와 함께 하비의 치하가 이어지자 국왕은 헛기침을 연발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세를 몰아 국왕이 슬쩍 하비의 눈치를 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저……. 요즘 경의 연인이 한다는 사업 말일세.”
굳이 ‘연인’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을 보면 그걸 이용해 부탁할 것이 있다는 뜻. 하비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하비는 정확히 짚어서 되물었다.
“예. 빅터가 하는 총기 사업 말씀이십니까?”
빅터에게 한 일 때문에 국왕은 그와 관련된 화제를 올리는 것을 몹시 껄끄러워했다. 누가 봐도 빅터의 재산이 탐나 빼앗은 것이 보였다. 다들 눈과 입은 있으나 뒤탈이 날까 쉬쉬하고 있었다.
국왕이 슬쩍 눈만 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너머로 하비를 보았다. 칼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강건함과 대쪽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예약이 너무 밀렸던데. 혹시 내 것도 하나 가능한가 해서.”
이러려고 독대를 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 진짜 국왕의 목적이었다. 왕자들도 쉽게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을 일찍이 보았고, 자신만은 당연히 국왕이니 어떻게 되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보는 눈도 많고, 빅터가 내세운 원칙도 있으니 직접 말하기엔 뭣했다. 빅터의 연인인 하비를 통해 비밀리에 얻고자 함이었는데, 하비도 이를 눈치챘다.
하비의 얼굴에 먹구름 같은 어두운 기운이 어렸다.
“죄송합니다만,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폐하는 원칙을 지키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신분 여하, 가진 것 여하에 상관없이 선착 예약순으로만 판매된다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안 되겠냐는 말이 쏙 들어가는 엄정한 목소리였다. 하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설마 언제나 솔선수범하시는 공명정대한 폐하께서 원칙을 깨는 일을 하시지는 않겠지요.”
하비의 반듯한 말에 국왕은 몹시 찔리는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불편해 보이는 국왕을 보며 하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 그러시다면.”
하비는 얼마 전에 빅터가 죽으려는 줄 알고 붙드느라 살아 있는 게 국왕에게 복수하는 길이라는 불경한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심지어 속으로 국왕의 처분을 공평하지 않다며 불평을 가지기도 했지 않은가.
대대로 국왕과 맺었던 맹약서가 떠오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하비는 자신의 순서를 포기하고 국왕에게 넘기는 것으로 잠시나마 잃었던 충심을 지키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
하비는 정말 아까웠지만 충심 하나로 국왕에게 말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표정까지는 차마 숨기지 못했다.
“1,018번은 제 것입니다. 사실 저도 예약해 놨습니다.”
다들 가지고 있기에 가지고 싶다는 심리는 아니었다. 그저 빅터가 고심해서 시작한 사업이고, 그의 고생과 손길이 닿은 것을 꼭 가지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웠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면서 바빴던 탓에 빅터의 자랑스러운 성과를 미리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일부 있었다.
“정신이 없어 늦게 예약한 바람에 순서가 많이 밀렸습니다만, 지금도 주문이 밀리고 있을 테니 제 예약표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럼 좀 더 빨리 받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정말 유감이지만 오로지 국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넘긴다는 표정이 너무 절실히 보였다. 거기다 하비는 진심인 듯 지나치게 진지하기까지 했다.
국왕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하비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괜찮네.”
평소 표정 변화 없던 하비에게 크나큰 상실감이 엿보여서 차마 덥석 받을 수가 없었다. 받았다간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았다. 이리 충성심 많고 점잖은 사람에게 괜히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국왕은 입가를 파들거리면서 억지로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직접 예약할 테니 신경 쓰지 말게.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어.”
결국 국왕이 요즘 대유행인 빅터의 권총을 소지하는 날은 또 미뤄졌다. 심지어 아주 멀어 보였다. 하비의 말대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에도 성황리에 예약이 이뤄지고 있었으니까.
국왕과의 독대가 끝나고, 돌아온 하비가 이 일을 빅터에게 이야기했다. 심각한 얼굴로 말하길래 내심 긴장했던 빅터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미묘해졌다.
당시 국왕이 지었을 구겨진 얼굴과 지극히 충심 가득했을 하비의 진지한 얼굴이 머릿속에서 어렵지 않게 대비되었다.
조금 뒤, 하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웃지?”
빅터는 허리가 끊어져라 웃다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 욕심 많은 국왕이 차마 자신에게는 민망해서 직접 말 못 하고, 하비를 슬그머니 찔러 다른 자들보다 빨리 얻으려 한 모양이었다. 하비가 자신의 연인이니 금방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역시 하비 스터스였다. 그는 강적이었다. 정공법으로 국왕의 청탁을 확실히 물리쳤다. 심지어 의도치 않은 심리적 공격 효과까지 획득했다.
“그 얼굴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빅터는 탁자를 손으로 내려치며 웃다 이제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하비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떨떠름하게 물러났을 국왕의 표정이 선했다. 눈가에 조금 흐른 눈물을 닦아내며 빅터가 말했다.
“뭐, 조금 불쌍하긴 한가.”
하비의 정공법에 먼저 처절하게 당한 기억이 있어서, 빅터는 썩 남 일 같지 않았다. 상대방은 흑심을 품고 대하는데, 하비는 너무 선뜻 진심으로 대해 버리니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하비는 빅터나 국왕처럼 머리를 굴리고 셈을 해서 상대를 계산하여 움직이는 유형에겐 오히려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쨌든 저택은 지켰네. 한시름 돌리겠어. 고마워.”
새로 집을 옮기는 데 들 금액이 상당히 부담이었는데, 여유 자금이 생겼다.
생각할수록 국왕의 일그러진 표정이 자꾸만 상상이 되어서 빅터의 웃음이 쉽게 멎지 않았다. 빅터가 실컷 웃게 놔두고 하비는 맞은편에서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턱을 괴고 차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물끄러미 보았다.
빅터를 보며 늘 생각하지만 그는 소리 내서 웃는 것이 몹시 자연스러워 보였다. 저리 호탕하게 웃을 때마다 하비는 사로잡힌 것처럼 빅터를 가만히 관찰했다. 입술이 옆으로 크게 벌어지면서 보조개가 생기고, 매력적인 녹색 눈도 길게 늘어나 눈꺼풀에 거의 감춰졌다.
‘웃는 것도 조각처럼 웃는군.’
광장에 있는 아름다운 피에트 남신상이 웃는다면 딱 저런 느낌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정작 하비 자신은 다른 사람 눈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웃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이 남자 덕분에 자유를 얻었다. 그렇다고 지킬 것에 대한 책임감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더는 그 책임이 마음의 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산다는 게 벅차다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다.
빅터 특유의 활력과 표현의 풍부함 덕에 같이 있으면 그것들이 옮아 오는 것 같았다. 죽은 것같이 지내던 심장이 생명을 얻고 하비의 내부에서 속 시끄럽게 굴었다.
‘좀 많이 시끄럽긴 하지만.’
이제 그런 것조차 익숙해졌다. 고요함이 오히려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빤히 보며 같이 웃고 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치자 하비는 흠칫했다. 턱에서 손을 떼고 소식을 전한 것뿐이라며 머쓱하게 말했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고마울 게 뭐 있어.”
고개를 숙이고 민망한 듯 찻잔을 만지작대던 하비는 턱에 닿는 손길에 눈을 들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 턱을 부드럽게 쥐고 하비의 얼굴을 당겼다. 맞은편에서 팔을 뻗은 빅터의 얼굴에 열이 올라 있었다.
“몰랐나? 신사업이 성공한 것도 네 덕이고, 여태 내가 잘된 것도 다 네 덕인데.”
하비는 턱을 들린 채로 눈만 내려 대꾸했다.
“또 너무 간다.”
“정말이라니까?”
황금 거북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하비에게 이미 해주었다. 빅터는 정말로 모든 일이 그 덕분이라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도자기 같은 하비의 피부를 쓸면서 빅터가 씨익 웃었다.
“너는 내 인생의 뮤즈야.”
빅터는 턱을 손가락으로 지분대는 것만으로도 흠칫거리는 하비를 놓아주었다. 그가 차를 홀짝대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뮤즈를 티타임에 덮칠 순 없지.”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 하비는 괜히 주변을 눈짓으로 훑었다. 스터스가 저택에 빅터와 있으면 아직도 빅터를 불편해하는 집사 때문에 주로 이쪽으로 왔는데, 빅터의 사용인들과도 꽤 친근해져서 문제였다.
빅터가 둘만 있을 땐 사용인을 전혀 들이지 않으려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종종 빅터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민망한 상황을 만들어서, 대응이 안 되었다.
빅터가 눈을 굴리는 하비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둘 사이에는 작은 다과용 탁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네가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많이 참는다고.”
하비가 무슨 뜻이냐고 눈짓으로 묻자 빅터는 한 손으로 제 눈가를 찍어서 내렸다.
“이렇게- 눈이 반달이 돼서 웃고 있을 때.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지 모르지?”
하비의 딱딱하고 칼 같은 느낌 때문에 평소에는 외모를 판단하기보다 분위기를 먼저 보게 되는데, 일단 미소 짓게 되면 그제야 얼굴이 보였다.
눈꼬리가 내려가면서 나이답지 않게 근엄함마저 있는 얼굴이 휙 어려진다. 매사 굳어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동안으로 변하면서 편안함이 느껴지고, 좀 더 다가가기 친숙해졌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선 콧날이나 깊게 파인 밤색 눈, 매끈한 하얀 피부나 적당히 부푼 입술, 그 모든 게 섬세하게 조합된 이목구비가 그제야 보이는 것이다.
하비가 웃을 때마다 넋 놓고 보게 되는 이유였다.
빅터가 꽤 진지한 태도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데 가서 함부로 웃지 마.”
하비는 빅터가 또 농담하는 줄 알고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하는 건지.
하비가 별 감흥 없이 받아들이자 빅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단코 진심인데 몰라주는 것이 안타까웠다.
“참, 돌려주겠다고 한 사유지가 어떤 건지 들었어?”
곧 왕명이 내려오겠지만 빅터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하비는 국왕에게 들은 대로 읊었다. 몇 군데를 들은 빅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지막 양심을 내주었군.”
꽤 괜찮은 사유지들을 다시 내주었다. 나름대로 빅터와 화해를 하려고 생색을 낸 것이다. 총기 사업이 번창하고 다른 사업도 연달아 성공시키면 더 노골적으로 슬금슬금 하나씩 더 내어 줄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다는 양 말이다.
그 시커먼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빅터가 속으로 국왕을 비웃었다.
그때 하비가 작은 편의용 화기에 데워진 새카맣고 큰 주전자를 가져왔다. 주전자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벌써 겨울의 중턱이다.
찻잔에 차를 새로 따르고 빅터의 것에도 따라주었다. 찻잔이 식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비는 돌아오다가 은행에 들렀던 일이 떠올라서 입을 열었다.
“아, 매달 들어오는 금화 대부분은 네 계좌로 돌려놨어.”
은행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결국 이런 목적이었다. 빅터가 눈썹을 찌푸리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정말 안 그래도 된다니까. 끝까지 이럴 거야?”
그러나 하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평생에 걸쳐서라도 갚겠다고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보다 월급도 깎였으면서 언제 다 갚아?”
정식 외교관이 아니라 민간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이라, 지급되는 돈도 줄었다. 슬쩍 구겨지는 하비의 미간을 보더니 빅터가 급히 덧붙였다.
“절대 무시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나 혼자 했으면 못 했을 일이었어. 그걸 도와줬는데 당연히 받은 만큼 갚아야지.”
칼같이 확고한 논리와 철학이었다. 마음먹으면 반드시 하고 마는 하비의 성격을 알기에 빅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다른 것도 따로 만들어놓았지만.’
빅터는 하비에게 받은 돈이 나중에 어떤 구실로든 다시 돌아가게끔 하는 기금을 만들었다. 은행장과 몰래 한 거래였다. 나중에 들키면 또 죽어라 혼나겠지만 스터스가 저택이 팔리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빅터가 저질러 놓은 것들과 그 속내를 모르는 하비는 담담한 얼굴로 빅터를 달래듯 말했다.
“다음에 은행 일을 시작하면 더 빨리 갚을 수 있을 거야.”
확실히 은행 쪽이 외교관보다 월급이 훨씬 높긴 했다. 하비는 이로비나 섬 건만 끝나면 다른 의원이 제안한 은행 일을 해볼 생각이었다.
돈이란 것을 직접 다루고 운용하는 곳에 몸을 던져보면, 빅터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직한 마음이었다.
여러 번 겪어보니 돈이란 게 그리 악독하지는 않았다. 가진 사람과 쓰임새가 문제지, 제대로 쓰기만 한다면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빅터가 이번 사업에서 번 돈으로 각종 약자를 위한 사회시설 같은 곳에 후원을 하는데, 그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빅터는 하비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알았으니까 제발 무리하지는 마. 의사들이 뭐래? 괜찮대?”
빅터가 현재 제일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혹여 하비가 돈을 갚는다 어쩐다 하며 괜히 무리라도 하여 건강이 상할까 봐.
하비도 그의 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안심시키려 했다.
“많이 좋아졌다고 했어. 그리고 의사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하비의 얼굴을 빅터가 잠시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더니 팔을 뻗어 하비의 손을 잡았다.
사실 할 말이 있어서 때를 재고 있었다. 전보다는 많이 따뜻해졌지만 아직 손끝에 냉기가 남아 있어서 빅터는 마음이 아팠다.
“근데 그건 왜 물어봐.”
어두운 얼굴로 빅터가 말했다.
“그 신약, 남은 게 있냐고 물어봤다면서.”
하비가 뜨끔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알았다. 고작 이틀 전에 의사를 붙들고 물어봤을 뿐인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빅터는 침묵하며 하비의 손을 만지작대기만 했다. 차마 화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이 화제에 대해서는 마음이 헤지고 닳았다는 것에 가까웠다.
고민하는 듯하던 빅터가 속으로 몇 번이나 말을 정리해서 감정에 치우지지 않은, 정제된 말을 했다.
“분명 들었잖아. 넌 그거 한 번만 더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
“이미 속이 다 망가져서 안 된다고 했다고. 지금은 절대 안정만 취해야 해.”
솔직히 일하는 것도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하는 게 의욕도 나고, 정서에도 좋다는 의사의 말이 있어서였다.
“어차피 내가 싹 다 폐기해 버렸으니까 다신 찾지 마. 이 세상에 형질을 바꾸는 약은 없는 거라고 생각해. 뒷골목에 풀린 비슷한 것들은 부작용이 더 심하고, 제대로 된 것들도 아니야.”
포기하지 않고 하비는 차분하게 물었다.
“따로 챙긴 여분이 몇 개 있다며.”
빅터가 아찔해진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것도 다 말해준 거냐. 비밀이라고 분명 말했는데. 입 가벼운 자식.”
하비가 너무 절실하게 물어봐서 의사는 더 비밀 엄수를 하지 못하고 털어놓았다. 그도 하비에게는 유독 약했다. 간접적이긴 하지만 약을 만들어 하비를 괴롭힌 데 일조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 그랬다.
하비는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정말 있는 건가?”
빅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없어. 그건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한테 넘겼거든.”
알파끼리인 연인 중에 진심으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자가 있었다. 임신할 확률도 극히 낮은 데다 죽을 수도 있다고 몇 번이나 미리 경고를 했는데도 우겨서 가져갔다.
윈스턴 경이라고, 하비와 빅터가 사교계에서 떠들썩해지기 직전에 알파 연인으로 유명했던 귀족 청년이었다. 스터스가만큼 윈스턴가도 완고하고 구교를 믿는 가문이었는데, 가풍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남자였다.
윈스턴 경은 뒷골목에서 어떤 의사가 형질을 바꾸는 약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빅터에게까지 찾아왔다. 의사에게 먼저 찾아가서 끈질기게 물어, 빅터에게까지 흘러온 것이었다.
처음엔 결코 줄 생각이 없었는데, 제발 달라고 애원을 해서 못 이기고 줘버렸다.
하필 반듯하고 정 많아 보이는 윈스턴 경의 얼굴에서 하비가 비쳤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졌다.
‘나도 중증이라니까.’
어디서든 하비가 연상되면 질긴 마음이 흐늘흐늘해졌다. 아마 의사도 윈스턴 경에게서 하비와 비슷한 모습을 보아서 못 이기고 말해주었을 가능성이 컸다.
빅터가 양손을 펴 보이며 진짜임을 여러 번 강조했다. 칼자국이 여러 번 난 흉터가 하얀 손바닥에 몇 가닥 그어져 있었다.
“이제 진짜 없어.”
아무리 살펴봐도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하비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런가.”
급격히 어둠이 지는 얼굴을 보자 빅터의 마음이 술렁댔다. 가슴속이 아프게 찌르르 울렸다. 웃게만 해주겠다고 다짐했는데, 가끔 그가 과거에 저지른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하비를 좀먹는 모양이었다.
역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빅터는 애써 밝음을 꾸미며 하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외출을 제안했다.
“이러지 말고 나가서 뭐라도 먹을까?”
하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빅터의 가슴에 있는 녹색 보석을 안은 금빛 브로치에 가 있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저걸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역시 더 좋은 걸 사줬어야 했다.
하비는 빅터의 말대로 이제 신약을 포기하고, 다음 월급 때 브로치나 새로운 걸 찾아보자고 다짐했다. 어차피 물어본 것도, 정말로 복용하려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 한 가닥 남은 서글픈 미련에 가까웠으므로.
다시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차가운 현실이지만, 하비는 차곡차곡 접어 서서히 잊을 수 있는 곳으로 밀어 넣었다. 언젠가는 이 차가움도, 일상의 따뜻함에 가려질 것이다.
하비가 사용인을 불러 괜찮은 곳을 수소문하려던 빅터를 말렸다.
“내가 괜찮은 곳을 알아.”
* * *
예전에 레나를 데려갔던 레스토랑이었다. 스테이크가 끝내준다던 레나의 자랑을 여러 번 듣고 배가 아팠는데, 하비가 데려올 때까지 참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것저것 종류대로 시킨 빅터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여긴 스테이크 말고 다른 것도 유명하더라고.”
들떠 있는 빅터를 보니 레나와 이야기했던 것들이 떠올라 하비가 잠시지만 옅게 미소 지었다.
“각인된 알파와 오메가가 떨어지면 잠시라도 괴롭다고 하던데.”
“내가 알던 돌팔이 의사가 심장의 각인이니 뭐니 나불대던 적이 있었는데 말이지.”
시기를 생각하면 하비가 임신을 해서 오메가였던 때이니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빅터는 턱을 매만지며 그때를 회상했다.
“솔직히 말하면 떨어져 있을 때 정말…….”
지금 떠올려도 속이 답답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른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옆에서 계속 돌아가자고 떼쓰는 나스타를 따라서 나도 가고 싶었다니까.”
상단을 일부 분할해서 알프레드에게 넘겨줘야 했던 중대한 일만 아니라면 당장 돌아왔을 것이다. 빅터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정말 심장의 각인인지도 몰라.”
가만히 듣고 있던 하비가 반박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심장의 각인이 흔한 것도 아니고, 어설픈 오메가가 되었던 때였는데 가당키나 하냐는 합당한 의심이었다. 속으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하비는 딱딱한 이론만 내세웠다. 쑥스러워서인 탓도 있었다.
빅터는 대답 없이 푸릇한 채소 한 장과 토마토, 샐러드 속 고기 한 점을 야무지게 찍어서 하비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기습적인 행동에도 완전히 입에 넣은 것을 확인하자 빅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면 뭐 어때.”
하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얌전하게 받아먹는 걸 보며 빅터는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한테 그런 게 큰 의미 있어?”
기분 좋은 동의가 하비의 입술에 선선히 번져 나갔다. 중요한 건 심장이 언제 뛰고, 누구를 봤을 때 반응하냐는 것이니까.
“돌려받은 사유지 중에 최근에 갔던 곳들, 조만간 가자.”
빅터의 권유에 하비도 당연한 듯 답했다.
“그러지.”
그 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시켰던 메뉴가 나왔다. 군침 도는 윤기 오른 스테이크와 랍스터, 특별한 방식으로 구운 치킨, 귀한 육수와 신선한 야채를 잔뜩 품은 왕실 요리 등이 즐비했다.
그중 주방장이 직접 내온 오늘의 특별식도 있었는데, 빅터가 고안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권총이 주방장의 허리춤에서 반짝대며 보였다.
저도 모르게 하비가 그 권총을 빤히 쳐다보자 주방장은 으스대며 사라졌다. 몇몇 사람의 부러운 시선도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빅터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미리 이야기했으면 내가 길드에서 제일 잘 빠진 총으로 따로 빼놨을 텐데.”
“아니. 그건 기다렸다가 내 순서가 되면 내 손으로 직접 받을 거야.”
새치기는 용납 안 된다는 완고함에 빅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남자의 고집을 누가 말리나.
“그럴 것 같아서 안 가져왔어. 대신 다른 걸 가져왔지.”
마법처럼 빅터의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가 나왔다. 레스토랑이 문을 닫을까 봐 둘 다 서둘러 나오느라 못 봤는데, 언제 챙긴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비는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간신히 말했다.
“이게…… 뭔데.”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자랑스럽게 손으로 가리키며 빅터가 피식 웃었다.
“답례야. 답답하다고 생각되면 안 받아도 돼.”
구속으로 느껴져서 싫으면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빅터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래도 괜찮으면 오른손에 받아줘.”
하비의 손가락에 딱 맞춘 단순한 문양의 은반지였다. 레스토랑의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그것을 내밀며 빅터가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마음의 준비가 되면 사람들 앞에서 그걸 왼손에 껴줘.”
그 순간이 바로 약혼반지가 결혼반지로 변하는 때였다. 하비도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상자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반지가 나오는 순간, 하비의 심장도 크게 튀어 올랐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청혼을 같은 알파, 그것도 일찍이 죽은 줄 알았던 남자에게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빅터와 겪었던 수많은 일이 하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울고, 웃고, 아프고, 기쁘고, 때론 죽을 만큼 슬펐던 기억들은 하나로 응축되어 하비의 가슴속에 맺혔다.
수많은 감정이 얽힌 물감들은 자화상처럼 또렷하게 자리 잡았다. 하비는 그 그림이 어떤 표정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여유롭게 말하긴 했지만 빅터는 대답을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식은땀마저 났다.
밀려오는 감정들을 말아 쥐며 하비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멀리 출장 가 있을 때 말이야.”
혼자만 쌓았던 마음을 조금씩 빅터에게 돌려주었다.
“살면서 기다리는 게 가장 힘든 순간이었어.”
영영 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고작 몇 주 기다리는 건데도 매 순간 영혼이 갉아먹히는 것 같았다. 하비의 입술에 진동이 오는 것처럼 떨렸다.
“기다리는 게…… 그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
어느새 빅터의 손이 다가와 하비의 뺨을 문지르고 있었다. 상처 많은 커다란 손에 작은 물기가 묻어났다.
“네 시간을 줘.”
빅터가 준 반지를 손에 꽉 쥐고 하비는 힘주어 말했다.
“그럼 받을게.”
마음속에 맺힌 감정의 자화상은,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것도 기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 * *
파괴되고 부서진 곳에서 난 상처가 아물면, 이젠 서로에게 맞춰진 톱니가 새로이 날 터였다. 그때가 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톱니가 다시 맞물리며 조금 잡음이 일고 시끄러운 날이 오더라도, 함께하는 인생이 시작되는 건 변함없을 것이므로.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