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 전처럼 많은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하비는 빅터와의 협업을 수락했다.
빅터가 했던 말대로, 그의 도움을 받아야 풀리는 문제기도 했으니까.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받지 않겠다 해버리기엔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사안이었다. 현 상황에서 빅터만큼 해적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뚜렷한 목표와 해야 할 일이 생기자 하비는 전처럼 의식 없이 멍해지는 일이 사라졌다. 완전히 어둠이 걷히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하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빅터가 억지로라도 먹인 보약과 하비 스스로 몸을 움직여 신체를 단련시켜 왔던 것도 빠른 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하비가 외교부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하지만 하비는 요란한 반응을 뒤로하고 빅터가 철저히 감춰둔 해적 관련 문건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당시 우르르 몰려온 외교관들이 긴장된 얼굴로 하비의 근황을 물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다시 나오시는 겁니까?’
‘그 일은 털어내신 거죠?’
여러 가지 걱정이 하비를 맞았다. 하비는 피식 웃으며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빛, 염려 섞인 눈빛들을 훑었다. 돌아올 곳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제 괜찮아. 며칠 뒤부터는 정상적으로 나올 테니 걱정 말고.’
하비의 확답에 외교관들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으으……. 그간 너무 힘들었어요. 스터스 경이 나오시질 않으니 총괄 외교관님이 어찌나 저희를 들볶으시는지.’
‘역시 수석 외교관님이 와주셔야 이곳이 잘 돌아간다니까요.’
너스레와 호들갑을 동반한 사람들의 반응에 하비는 고마움마저 느꼈다. 불편 없도록 배려해 주는 마음들도, 어두운 과거는 돌아보지 않도록 해주는 씀씀이도 모두.
그 뒤로 바로 빅터의 시의원 집무실이 있는 건물까지 온 것이다. 하비는 해적 건에 대해 자신에게 쉬쉬하는 분위기를 눈치챘다. 당분간은 빅터와 단둘만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여전하군.’
빅터의 의원 집무실에는 여전히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서류들이 보였다. 하비의 눈길에 빅터가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슬쩍 치우려 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검토하느라.”
어차피 이제 저 정도 어지러운 것은 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서 간단히 눈길을 돌리며 하비가 말했다.
“됐어. 그보다 놈들의 요구 사항은?”
“이번 일 책임자를 넘기고 이로비나 섬의 소유권도 함께 넘긴다. 다시는 손대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는 것이 최종 요구 사항.”
턱을 매만지며 하비가 중얼거렸다.
“이번 건은 당연히 슬루인 제국이 뒷배겠고…….”
빅터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놀란 눈을 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공적인 업무로 돌아가는 정보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던 빅터였다. 그래서 따로 운영하는 사적인 정보상을 마련해 둔 것이고, 돌아오자마자 귀족들의 뒷정보를 꿰고 있는 로투스가를 장악하려고 했다.
하비는 대답 대신 책상에 펼쳐놓은 지도의 어느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로비나 섬과 그들의 모국, 슬루인 제국이 연결된 해역이었다.
“이로비나 섬이 우리 수중에 들어오면 통행료를 내야 할 수도 있고, 여러모로 귀찮아지니까. 슬루인 제국 측에서는 막고 싶었겠지.”
자칫 무역 항로도 빙 둘러가야 하거나 꼬이는 수도 있었다. 최대한 그런 일은 없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 슬루인 제국 측의 입장이리란 것이 뻔히 추측되었다. 빅터도 하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자를 넘기는 건 여러모로 써먹으려고 그러는 거겠지. 네가 섬에 대한 지식이 많을 거라 판단했을 거고, 여차하면 다음 인질로서의 가치도 있고. 개새끼들.”
그런 뒤 용도가 다하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지도 모른다. 욕설이 섞인 살벌한 뒷말은 무시하고, 하비는 담담하게 물었다.
“제일 효율적인 방법은, 생각해 봤나?”
“방법? 간단해. 신생 해적인지 뭔지를 밀어버리면 돼.”
역시나 그다운 과격한 방법이다. 끈질긴 인내를 가지고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하는 하비의 방식과는 맞지 않았다. 하비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은 절대 군사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며.”
“내가 동원할 거야.”
역시나 간단한 대답이다. 너무 시원시원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하비는 황당해하는 얼굴로 문제점을 짚었다.
“시의원이 개인적으로 군사를 동원한다고? 국왕의 허가 이전에 의회의 허가조차 나지 않을 텐데.”
“긴급한 사안인데 밀어붙여 보지 뭐.”
“말처럼 쉽지 않을 텐데.”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어.”
자신감 넘치는 건 좋지만 하비가 걱정하는 건 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막대한 예산이 들어갈 텐데. 경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를 설득할 정도가 되려면…….”
하비의 걱정을 끊어내고 빅터가 씨익 미소 지었다.
“잊었나 본데 난 돈으로 의원직을 산 사람이야.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몇 달 전만 해도 빅터를 돈으로 의원직을 샀다며 경멸했던 입장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하비가 결국 가장 염려하던 점을 끄집어냈다.
“밀어붙이는 건 좋지만 계속 그런 식이면 당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건 알아둬.”
빅터가 속한 당인 홰그당은 무역을 근간으로 한 부로 성장한 신흥 귀족인 빅터 같은 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이었다. 종교는 주로 신교였으며, 그곳에서 빅터는 주목받는 인사였다.
반면 하비는 구교의 지지 세력이자 홰그당의 반대파인 토른당에서 밀던 인재였다. 지금은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기는 하지만, 한때는 그랬다.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도 어느덧 옛말이 된 지 오래였다. 하비의 가문인 스터스가가 후계도 없이 쇠퇴하고, 라힌 스터스의 불미스러운 일이 밝혀지면서 하비 스터스에 대한 당의 정치적인 지지는 완전히 끝장났다.
게다가 같은 알파인 빅터 베르텐과 공개 열애를 하면서 보수적인 구교 신자인 토른당의 의원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비는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당 활동조차 거의 하지 않았고, 의무적인 집회 참석만 간신히 하는 정도였다. 당 활동의 근원인 커피하우스에도 잘 가지 않고, 외교관 일에만 충실했다.
그에 비해 빅터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편이었기에 하비는 이를 지적하며 걱정한 것이었다.
기껏 걱정해 줬더니, 정작 당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평한 소리나 늘어놓았다.
“확실히 일거리는 줄어들겠군.”
하비는 딱딱한 얼굴로 대꾸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경의 파격적인 행보에 불쾌해하는 원로 의원이 많다는 건 알고 있겠지? 젊은 피라고 감싸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더욱이 이번 사안은 그들의 자제도 엮여 있고.”
“그게 뭐.”
본인의 입장은 생각지도 않고 가볍게 내뱉는 말에 하비가 답답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빅터는 책상 위로 깍지 낀 손을 얹고 하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당의 입장이니 국왕의 허가니 그딴 게 아니야.”
집요하고 끈끈한 시선이 하비에게 닿았다.
“네가 제 발로 걸어서 그 더러운 해적들 앞으로 갈까 봐 그게 제일 걱정돼.”
빅터가 내내 노심초사하고 있던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하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혼자 해적 소굴로 가겠다는 결정은, 하비가 정신적으로 가장 궁지에 몰려 있을 때 내린 판단이었다. 지금은 조금 여유도 생겼고, 무엇보다 끔찍한 과거라도 마주 볼 용기가 서고 있던 참이었다.
하나씩하나씩 떨어뜨린 절망의 조각들을 주워가다 보면 언젠가 완전한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때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서 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비의 대답에도 그리 안심되지 않는 듯 빅터는 연거푸 해적이 해달라는 대로 했을 때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해적 놈들은 볼일이 끝나면 그뿐, 네가 주로 해왔던 정당한 외교 같은 안전막이 전혀 없어. 약속도 깨면 그만이라고.”
하물며 국가 간에도 온갖 구실을 붙여 약속을 파기하고 제 나라의 이익에 맞춰 움직이는데, 규율 따위 없는 해적은 더할 것이다.
하비도 빅터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이런 쪽은 겪어본 자만이 아는 부분이 있었다. 좋은 협상을 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상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정보 탐색이다.
책상에 깔린 지도를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하비가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밤색 눈이 빅터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지?”
빅터는 피식 웃더니 날카로이 눈을 빛냈다.
“무조건 맞춰줄 생각 말고, 그놈들의 본성을 이용해야 하지.”
“어떤 본성?”
“그놈들이 슬루인 제국이 돈을 대주고 있기에 지금은 별 불만이 없어 보이지만, 과연 내심도 그럴까.”
지금은 고개를 납작 엎드리고 충성스러운 개 노릇을 하고 있지만 천성이 하이에나인 해적들이 언제까지 그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까. 빅터는 그 점에 주목했다.
“지금쯤 더 큰돈을 벌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할 거다.”
하비가 깜짝 놀라 팔짱도 풀고 벌떡 일어났다. 빅터의 집무실 책상을 양손으로 짚고 목소리를 낮췄다.
“설마, 돈을 미끼로 꾀어내겠다는 건가? 경의 개인 자산으로?”
빅터는 빙긋 웃고는 은근슬쩍 하비의 손을 잡았다.
“역시 바로 알아듣네. 대화가 참 편해. 다른 의원들도 네 반만 머리가 돌아가면 좋을 텐데.”
빅터가 의원들끼리의 집회 때마다 알아듣게 풀어서 말하기 힘들다면서 반쯤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하비는 빅터의 얼굴과 잡힌 손을 번갈아 물끄러미 보았다.
옅게 한숨 쉰 하비가 제법 냉정하게 손을 빼내고는 잉크병에 담긴 펜을 집어 들었다. 아쉬워하는 빅터의 눈길을 모른 척한 하비가 지도 위로 선을 그렸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 범위 내에 인질을 억류하고 있다고 짐작되는 지점이 있나?”
빅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비의 뒤로 다가왔다.
“잠시만, 실례.”
잠깐의 양해 끝에 하비의 옆에 서서 손을 뻗었다. 그러곤 펜을 쥔 하비의 손등 위를 따뜻하고 넓게 완전히 덮어버렸다. 별 상처 없이 단정한 하비의 손도 큰 편인데,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꺾인 부분도 있는 빅터의 손은 더 컸다.
흘끗 쳐다보는 하비의 시선을 흘린 빅터가 그의 손을 제 뜻대로 움직였다. 펜이 천천히 움직여 바다 가운데를 찍었다.
“아마 이쯤.”
펜을 움직이면서 빅터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하비의 손 사이를 문질렀다. 빅터는 하비가 흠칫 떠는 반응을 즐기며 이젠 대놓고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 통나무처럼 뻣뻣한 남자는 이런 은밀한 애무에 약하다.
“바다 한가운데처럼 보이지만…….”
빅터가 하비의 귓가에 입을 대고 계속 속삭이듯이 말했다.
“뱃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아주 작은 바위섬이 있어.”
귓불이 붉어진 것을 확인한 빅터가 입술을 떼고 하비를 마주 보고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칭찬해 달라는 듯 녹색 눈이 길게 휘었다. 점점 일그러지는 하비의 표정과 대비해 산뜻하기까지 했다.
“바로 여기일 거야.”
빅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강철 심장이라도 녹았을 천진한 미소였지만, 하비는 그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 이러는 나도…….’
빅터의 외모와 말이 빚어내는 화려함 이면에 어떤 잔혹함과 비열함이 있는지 뻔히 알면서, 가슴께가 뻐근하게 뛰었다. 정말 염치없는 심장이었다.
“정보는 감사히 받겠는데.”
하비는 불편한 태도로 빅터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한 걸음 멀어졌다.
“여기까지 해.”
이 거리가 적정선이었다. 씁쓸함이 빅터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하비는 이를 보면서도 묵묵한 침묵을 유지했다.
수면제를 먹이고 떠나려던 시도가 실패한 뒤, 빅터와 약속을 한 것이 있었다.
10번의 관계는 끝났지만, 이번 해적 건이 끝나기 전까지 서로 협력한다. 대신 다 끝나면 하비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물론 협력하는 동안 적정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추가적인 약조도 있었다. 하비는 그동안 어떠한 협박, 강제, 억지력라도 작용하는 순간 약속은 없는 것이라 제약을 달기도 했다.
빅터는 하비의 체온이 떠나간 빈손을 주먹 쥐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들었어.”
줄 묶인 늑대가 이런 느낌일까. 처량한 표정에 하비는 마음이 조금 약해지려 했지만 다잡았다. 언제까지 저 제멋대로인 태도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믿음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지켜보고 싶었다.
빅터는 변함없이 냉정한 얼굴을 지키고 있는 하비를 보며 억지로 입가를 끌어당겼다. 웃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밉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아무튼 그놈들이 슬루인 제국의 개로서만 움직여 주지는 않을 거다. 그게 내 요지야.”
그때 폰이 몸에 좋다는 이논 홍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빅터의 집무 대리인인 폰은 라힌 스터스의 일이 알려진 이후에도 변함없던 사람 중 하나였다.
사실 하비는 의외였다. 스터스가의 무용을 존경한 만큼 가장 실망할 것도 폰이라고 여겼는데, 그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사람인 양 하비를 대하는 태도에 한 점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날이 추워졌으니 차를 많이 드셔야 합니다.”
변함없는 그를 보며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자넨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가?”
그릇을 놓던 폰의 손이 흠칫했다. 제자리로 돌아가던 빅터조차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빅터가 대답 잘하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기도 전에, 폰이 담담하게 답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폰은 하비의 몫으로 찻잔을 놓고 뜨거운 찻물을 솜씨 좋게 부어주었다.
“다만, 저한테도 보는 눈이 있습니다. 명색이 시의원 집무 대리인이 소문에만 휘둘리면 안 될 말이죠. 저는 제가 직접 본 것만 믿고 판단할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비는 선선히 미소 짓곤 폰이 내려준 홍차를 조금씩 마셨다.
쏘아지는 빅터의 눈길을 의식한 폰이 식은땀이 축축한 뒷목을 쓸었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덧붙였다.
“물론 전부 시의원님의 가르침 덕이지만요.”
따갑던 빅터의 눈빛이 다소 너그러워졌다. 폰은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오랜 사회생활의 숙련도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폰을 보며 피식 웃은 하비가 문득 떠오른 것을 화제로 올렸다.
“참, 로투스가에서 이상한 말이 나오고 있던데.”
잠시 빅터의 움직임이 멎었지만 이내 화사한 미소로 받아쳤다.
“무슨 말?”
“가주가 이미 병사했는데 이를 숨기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던걸.”
“아아, 그렇겠지. 아직 가주 대리를 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주가 그리 골골댔으니.”
아무렇지 않게 차를 홀짝대고 있는 모양새가 왠지 홀가분해 보였다. 게다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기시감을 느낀 하비가 찻잔에서 입을 떼고 빅터를 지긋이 보았다. 반 로투스를 건드린 것도 빅터였으니 로투스가에 어떠한 다른 짓을 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비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빅터도 찻잔을 내려두고 어깨를 으쓱했다.
“왜? 내가 뭔갈 했을 것 같아서? 그럴 여력이 어디 있었겠어. 경을 돌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되던걸.”
결국 하비의 묵직한 시선을 못 이기고 빅터는 자수했다.
“아주 약간 뭔갈 하긴 했지.”
하비의 눈썹이 크게 찌푸려졌다.
“아주 약간?”
그럴 리가. 빅터의 ‘아주 약간’은 늘 믿을 것이 못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하비의 짐작이 맞았다.
빅터는 반 로투스를 오랜 시간에 걸쳐 충분히 밟고 고문을 한 뒤, 친히 그의 목덜미를 잡고 로투스가의 저택으로 갔다.
그러곤 병환으로 누워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 반 로투스를 던져주었다. 말 그대로 시체를 옮기는 것처럼 질질 끌고 와 방구석에 집어 던져 버렸다.
손을 탈탈 턴 빅터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위험에 빠진 로투스가의 차남을 내가 구해 왔다.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잘 간수하도록.”
반 로투스는 한쪽 눈이 없고 온몸에 타박상과 칼로 얇게 썰린 듯한 끔찍한 상처가 많았다. 심지어 손가락도 몇 개 없었고, 발가락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의 아버지는 침상에서 부들대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경악한 로투스가의 주치의가 당장 나가라며 난리를 피웠다. 로투스가를 호위하던 병력들조차 빅터가 데려온 자들에 의해 발이 묶인 채였다.
큰소리가 오가는 그 방 안에서, 빅터는 꼼짝도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버티고 서서는 더한 소리를 했다.
“이 지경이 된 걸 데려왔으니 당연히 답례비를 주어야지. 로투스가는 그 정도의 예의도 없는 건가?”
누가 봐도 반 로투스를 이리 만든 것은 빅터임이 훤했다. 그런데도 빅터는 뻔뻔하게 자신이 그를 구해 온 것이라 우겼다.
문제는 우기는 것도 힘 있는 자가 하니 진실이 된다는 점이었다.
“네 이놈! 해적의 손을 빌려 돈을 벌더니 하는 짓도 해적질이나 다름없구나! 더러운 녀석!”
로투스가의 늙은 가주는 분노하며 빅터를 손가락질했다. 그러다 제 화를 못 이겨 격렬하게 기침하다가 피를 토해냈다.
감정 하나 없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로투스가 사람들을 보던 빅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적과 일한 것보다 더한 짓을 하고 계시던데. 내게 그런 말 할 처지가 될는지.”
혀를 찬 빅터는 가주의 침상 앞에 있는 의자를 소리 내어 당겨 앉았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간 로투스가가 벌인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불법으로 노예 사업을 몰래 하고 있었잖아. 비승인된 노예 사업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거 모르나?”
늙은 로투스 가주의 얼굴에 큰 금이 갔다. 놀란 듯 입만 뻐끔대며 반박을 하려 했지만, 빅터는 틈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슬루인 제국으로 노예 사업을 확장하고 있던걸.”
“그, 그건 어떻게…….”
“심지어 우리 쪽 노예를 슬루인 제국에 유출시키고 있던데. 도저히 매국 행위까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당황하는 로투스가의 늙은 가주는 아예 얼굴이 칙칙해졌다. 그를 우습게 보던 눈빛이 일순 냉기를 머금고 날카로워졌다.
“그 건에 관련해 이미 의회 안건으로 올려놨어. 로투스가의 적법 행위에 대해 좋아할 의원들이 꽤 많을 거야.”
로투스가에게 정보를 책잡혀서 꼼짝 못 하고 있는 귀족이 많았다. 그런 만큼 로투스가의 몰락은 그들에게도 기회가 될 것이다.
정말 즐거운 듯이 빅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다음 집회가 기대되는군.”
먼지를 털어내는 듯 홀가분하게 일어난 빅터가 휙 뒤돌아 덧붙였다.
“아, 반 로투스 경을 구한 답례비는 본가로 보내지 말고, 내 저택으로 보내.”
방 안을 둘러본 빅터가 눈을 번뜩였다. 마침 좋은 것이 보였다.
“선금으로는 저걸 가져가지.”
반 로투스가 언제 제 아버지에게 바친 건지, 하비가 그의 생일 선물로 주었던 황금 거북이가 가주의 찬장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하비가 주었던 것임을 기억해 낸 빅터가 망설임 없이 황금 거북이를 손에 쥐었다.
빅터가 빙긋 웃으며 황금 거북이를 늙은 로투스가의 가주 앞에서 놀리듯 흔들었다.
“선금은 이걸로 충분하겠어. 그럼 이만.”
로투스가의 늙은 가주가 뱉는 저주의 말들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빅터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 더럽고 역겨운 집 안에 하비의 손길이 닿은 것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것이 싫었다. 그의 마음이 타락한 것에 닿아 있는 것은 자신 하나면 족했다.
로투스가에서 나와 돌아오던 길, 빅터는 다리 위에서 의외인 장면을 보았다. 한 거지 여인이 기웃대면서 사람들을 일일이 붙들고 있는 장면이었다.
“도와주세요……!”
성격 나쁜 귀족에게 걸리면 말발굽에 채일 텐데, 여인은 그조차 감수하고 구걸하고 있었다. 보통은 여인과 달리 얼굴을 보이지 않고 납작 엎드려 통 하나를 두고 그곳에 동전이 날아오기만을 얌전히 기다렸다.
‘저 아이 때문인가.’
빅터는 대번에 여인이 저러는 이유를 알았다. 비쩍 마르고 병들어 보이는 소년이 어미로 보이는 여인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돈 있어 보이는 자들에게 매달렸다.
“자비를……! 부디 자비를 베푸세요, 아이가 많이 아파요. 제발 약값이라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처절하게 아이를 살리려 애쓰는 그 모습에서, 빅터는 다른 것을 보았다. 마음이 이상하게 불편하고, 요동쳤다.
미천한 자조차도 배 아파 낳은 아이 때문에 목숨까지 내건다.
사산아 때문에 괴로워하던 하비가 떠올랐다. 그토록 강한 정신을 지녔던 하비 스터스가 한동안 망가질 정도로 힘들어했다. 물론 스터스가의 몰락과 믿었던 자들의 배신도 한몫했겠지만, 빅터가 봐온 그의 아픔은 아무리 봐도 사산아에 대한 것이 커 보였다.
아이는 품었던 자에게 대체 어떤 존재일까.
기억을 송두리째 떨쳐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픈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하비의 마음을 알려면 이해해야 할 것 같은 깊은 감정이었다.
하비에 대한 감상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솟았다.
빅터는 한 번도 부모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부모는 기득권을 잃는 것이 두려워 자식이 해적에게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조차 가주인 레토 베르텐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로투스가의 늙은 가주처럼, 귀족 중에는 자식을 대리 용품 취급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랬는데…….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춘 빅터는 말 옆에 전리품처럼 달아두었던 주머니에서 황금 거북이를 꺼내 여인에게 던졌다.
“받아.”
얼결에 빅터가 던진 것을 받은 거지 여인이 허겁지겁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이를 지켜보던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뺏기지 말고, 잘 챙겨 가. 가장 가까운 금은방에 뛰어가되…….”
말하던 빅터가 멈칫했다. 거지 여인이 황금 거북이를 가져가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자칫 죽임당하고 뺏길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금은방 주인이 그녀를 신임하지 않고 훔친 것이라 여겨 치안대를 부를 위험도 있었다.
고민하던 빅터는 뒤에 있던 수하에게 고개를 돌려 명했다.
“나스타. 이 여자를 근처 금은방까지 데려가고 신원 확인도 같이 해줘.”
나스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토 달지 않고 빅터가 시키는 대로 잘 이행하겠다 답했다. 거지 여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빅터에게 허리가 닳도록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옆에 있던 아파 보이는 아이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빅터는 아무런 대꾸 없이 말을 다시 몰아나갔다.
‘이걸로 괜찮은 거겠지.’
사실 하비에게 되돌려 줄 생각이었는데, 이런 처리 방식이라면 하비도 크게 불만은 없을 것이다. 잘했다고 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빅터는 당분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또 가식으로 생각할 테니까.’
이제 하비에게는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생전 처음 베푼 작은 친절 따위로 생색내고 싶지도 않았다.
‘생전 처음?’
빅터는 순간 벼락같이 머리를 스치는 진실을 깨달았다.
연고도 없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대가 없이 줘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무슨 생각을 그리해.”
빅터가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하비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이미 폰은 집무실 밖으로 다른 볼일을 보러 간 지 오래였다. 하비가 다시 말했다.
“내 말, 듣고 있나?”
“어? 어. 듣고 있어.”
걱정스러움과 염려가 담긴 밤색 눈이 그윽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도 안 들은 것 같은데. 어디 안 좋은 건가?”
“……미안. 방금 뭐라고 했지?”
한숨을 내쉰 하비가 그사이 다 마신 찻잔을 치우고 지도를 가리켰다. 아까 빅터가 알려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작은 바위섬이었다.
“여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빅터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배의 규모와 숙련된 키잡이가 중요해. 배는 너무 작아도 안 되고, 너무 커도 안 돼. 암초도 있고 물살이 급격히 세지는 구간이 있거든. 거기만 뚫으면 순조롭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하비가 미간을 구겼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배편도 구해야 한다. 빅터에게서 신생 해적들과 거래할 돈을 빌린다 쳐도, 인질이 된 외교관 인력들을 안전하게 빼낼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빅터는 제국에서 대주는 뒷돈보다 더 큰돈이 있다는 말인가?’
빅터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면 틀림없이 있다는 소리지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개인이 끌어모을 수 있는 자산이 어디까지인지 가늠도 안 되었다.
물론 제국에서 아주 큰돈을 고작 해적에게 내놓았을 리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빅터의 자산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심지어 하비는 잘 모르는 지하 세계의 자금까지 합치면 더할 것이다.
하비는 빅터가 지닌 부가 ‘투자 능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오로지 살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 모든 능력을 끌어올려야 했을 것이다.
하비가 무심결에 중얼거리듯 물었다.
“투자를 시작한 게 임페르 해적단에서부터…… 라고 했나?”
아직 상념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빅터가 무심코 답했다.
“그랬지.”
눈을 떼지 않고 지도를 보던 빅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건 왜?”
힘들었을 것 같아서. 밑바닥에서 그 정도 거부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대가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차마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한 심정이 하비의 목구멍 안에서 맺혔다. 하비의 마음에 틈이 벌어질 기회만 엿보고 있는 이 늑대에게 쉽게 먹이를 줄 수는 없었다.
빅터와 거리를 두기로 한 것은 빅터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비가 혼자 가게 둘 수 없다며, 제 몸을 잘라낼 각오로 매달리던 진심 말이다.
그것 외에도 제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기 위함도 있었다.
하비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리 결심한 뒤로는 더 이상 정신이 나가는 일도 없었다. 목표가 뚜렷해지니 실행력이 더해지고, 감정에만 파묻혀 비극 속으로 도피하는 일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좀 더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선명해졌다.
하비의 안부를 걱정하던 빅터의 사용인들과도 최근 만나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특히 레나가 어찌나 기뻐하던지, 한 번 더 그 레스토랑에 데려가야겠다 생각할 정도였다.
하비는 말을 돌리며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아니. 그보다 실질적인 대안을 말해봐야 할 것 같은…….”
“미안하다.”
하비의 말허리를 끊고 불쑥 빅터의 목소리가 난입했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하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뭐?”
빅터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정작 제대로 물어본 적도 없는 것 같아서.”
직접 물어보기가 겁이 났다.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주한 현실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정신을 놓았는지.
지금도 두려웠지만 빅터는 용기를 내어 하비의 눈을 직시했다. 주먹을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지금 말할 수 있을 때 말하지 않으면, 계속 물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말이야. 가장 힘들었던 게 뭐였어? 너무 늦게 물어보는 것 같지만, 궁금해져서.”
하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할 말을 잃고 마른세수를 한 하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해진 거지?”
“알아야 했는데, 알려 하지 않았으니까.”
하비가 빅터의 진지해진 녹색 눈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더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거짓은 없었다.
빅터가 재차 입을 열었다.
“솔직히, 물어보는 게 무서웠거든.”
널 가장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걸 알아야만 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괜찮냐고만 물었다. 전혀 괜찮지 않은 것을 알면서 말이다.
빅터가 기껏 낸 용기란 하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 정도가 다였다. 하비의 정신을 유지한답시고 증오하라면서 부추기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괴로워했다. 감당 못 할 거면서 센 척하고 허세를 떨었다.
그런데 미움받는 것보다 이게 더 두려웠다.
빅터는 마른침을 삼키고 하비의 입술만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처분 선고를 앞둔 사형수 같았다.
하비는 본능적으로 이 대화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임을 알아챘다. 빅터의 집무실에서 생각지도 못한 난관을 맞았다.
말하기 싫었다. 하지만 빅터의 의지를 보니 이제는 자신도 자유로워질 차례인 듯했다. 털어놓고 나면 뭔가 후련해질지도 모른다.
‘자유로워져? 무엇이?’
생각 끝에 하비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까득, 소리가 나고 바다 위로 긴 줄이 생겼다. 굳게 다물렸던 하비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위장약을 계속 먹어서 그렇게 된 줄 알았어.”
하비가 말하는 ‘그렇게’가 유산, 즉 사산아를 낳은 것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빅터의 눈이 충격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뒤로도 어떤 약도 안 먹었고. 입도 대기 싫더군.”
하비는 원인을 자신에게 돌렸기에, 무의식중에 모든 약을 거부했다.
돌이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요인도 많았다. 약간의 우연과 필연이 겹쳐 생긴,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일상이 이어지면서, 하비는 조금씩 그날의 감정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빠르지는 않지만 천천히 심신을 회복시켰다.
이제는 안다. 상황상 어쩔 수 없었음을 인정하고, 자신만을 탓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하비가 손을 펼쳐 인근 해안이 표시된 지도를 접었다. 아직도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빅터를 보며 하비는 접은 지도를 손에 쥐었다.
“대답이 되었나?”
빅터의 눈이 더욱 진해지며 크게 일렁였다. 그가 지도를 쥔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빅터는 한 손을 뻗어 하비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었다.
“약을 안 먹은 게……. 그런 이유였다고.”
아직도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빅터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았다. 짐작은 했지만 하비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정말로 유산이었을 줄이야.
빅터는 혼란스러웠다. 알파의 몸으로 비정상적인 일을 겪어서? 강제로 겪어야 했던 고통에 화가 나서?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빅터는 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창살 같은 손가락 사이로 하비의 얼굴이 절반 가려 보였다. 하비는 조금 어두워 보였지만 다행히 자신을 좀먹는 감정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빅터가 침음성을 내며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까지…….”
하비는 약을 포기하고, 낫는 것을 체념하고, 자신을 스스로 벌주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빅터의 혼란을 다 안다는 얼굴로 하비는 지도를 가져가기 쉽도록 더 작게 접었다.
“시간은 많았으니 생각이란 걸 해봤어. 나도 왜 그랬는지 잘 몰랐거든.”
하비가 입술을 물었다. 울컥 올라온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구겨진 옷을 펴듯이 하비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점차 제자리를 찾았다.
“혼자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어렵게 뱉은 말은 빅터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하비의 말이 이어질수록 빅터의 얼굴은 아예 칙칙해지고, 또 다른 충격으로 물들었다.
“책임을 느꼈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아무것도 못 했지.”
빅터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묵직한 둔통이 찾아오고, 하비가 입술을 열 때마다 가슴이 수만 가지 형태로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저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아팠다. 하비에게선 허무함과 무력감만 느껴졌다.
침묵을 가르고, 하비가 다시 입을 뗐다.
“아까 미안하다고 했던가.”
“…….”
“나도, 미안하다. 몰랐어.”
공허한 미소가 하비의 입가에 맺혔다가 사라졌다.
“알았다면 더 신경 썼을 텐데.”
빅터는 숨이 턱턱 막혔다. 바다 아래 바다. 그 아래 끝도 없는 심해 속에 갇혀서 호흡도 못 하고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억지로라도 쥐어 짜내는 기분으로 빅터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아니. 그건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라…….”
그래도 막혔던 것이 그다지 뚫리는 것 같지 않았다. 하비에게 말을 걸수록, 그의 얼굴이 더 비참하게 구겨졌다.
“내가, 내가 그때 자리를 비워서…… 아니, 반 로투스를 방치한 내 잘못도 있고, 또…….”
하비가 고개를 내저으며 횡설수설 이어지는 빅터의 말을 끊었다.
“알고 있어.”
고저 없는 하비의 목소리가 잔잔한 노랫소리처럼 빅터의 귀로 흘러들어 왔다.
“가장 힘들었던 게 뭐였냐는 경의 물음에 답을 한 것뿐이야.”
하비의 허벅지를 꽉 붙들고 있던 빅터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하비는 집무실 창문으로 걸어가 창을 열고 답답한 공기를 날려 보냈다.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았다.
“과거를 이야기한 거고. 지금은 멀쩡히 몸 챙기고 약도 잘 먹고 있어.”
창틀 아래 깔린 먼지가 보였지만 하비는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자신만을 보고 있는 빅터를 향해서.
“물론 경이 잘못한 것도 분명 있지. 날 실망시켰으니까.”
‘실망’이라는 단어에 빅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실망이란 건 누군가를 믿고 있을 때 유지되는 감정이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면 실망도 없다. 그것을 주지시키듯 하비는 제법 냉정한 말투를 이어나갔다.
“근데, 이젠 됐어.”
마치 내게 넌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런 존재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렸다. 빅터는 숨을 몰아쉬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잠깐 잊었다.
빅터가 애원하는 듯 절실한 눈으로 하비를 좇았다. 하비는 예전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열었던 창문을 다시 닫고 있었다.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 하비가 뱉는 입김에 창에 하얀 김이 서렸다.
낮아진 실내 온도에 빅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핏기 없는 얼굴로 빅터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기회를 줄 수는 없는 거야?”
꼼꼼하게 창문을 여미고 있던 하비가 멈칫했다. 다시 한번 빅터의 낮은 목소리가 실내를 묵직하게 울렸다.
“내게 잘못을 빌 시간조차 주지 않을 생각인가?”
하비는 창을 완전히 닫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매달리는 것 같은 빅터의 목소리가 마음에 잔상처럼 맺혔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하비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결연한 의지가 새겨져 있었다. 잠깐 무너질 것처럼 흐트러졌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하비는 뒤돌아섰다. 감정적인 모습은 아주 찰나였다.
“그 이야긴 이제 넘어가지. 충분히 대답했고, 경도 잘 알아들은 것 같으니.”
하비 스터스는 한층 잔인해졌다. 빅터에게서 사과도 앗아 가고, 마음의 짐을 덜 기회도 주지 않았다. 가장 효율적으로 빅터의 마음을 적절하게 쳐내고, 잘라낼 뿐이었다. 사실 이러고 있는 하비의 마음도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빅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떠나려고 했던 그날, 아래로 쏟았던 피는 필사적으로 붙잡은 빅터의 피비린내에 덮였다. 그런 식으로, 그날의 짙은 피 냄새는 조금씩 옅어질 것이다.
후회 가득한 그 피 냄새가 빅터가 쏟은 피에 가려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그의 마음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비는 짐짓 표정을 엄하게 고치고 남은 안건을 올렸다.
“이제 계약서를 작성해야 돼.”
너덜거리는 가슴을 채 깁지도 못한 채 빅터는 몰아치는 하비의 사무적인 말을 받아야 했다.
“무슨 계약서?”
“개인 자산을 털어서 해적과 거래를 할 생각이라며. 공짜로 얻을 순 없지.”
빅터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하비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치고 들어오는 통에 정신도 차릴 수 없었다.
빅터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아예 양손으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한숨 소리가 길게 새어 나왔다.
“……내게 그 돈을 다 갚겠다?”
“당연히.”
“네가 평생을 벌어도 못 갚을 액수일 수도 있는데?”
이미 다 생각해 놓았기에, 하비는 망설임 없이 방안을 줄줄 읊었다.
“우선 월급 차압 방식을 생각해 보고, 혹시 다 갚기 전에 내가 죽을 것 같으면 스터스가 저택을 파는 조건으로 해. 어차피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니고.”
고개를 숙인 채 빅터가 꽉 억눌렸던 숨을 가까스로 토해냈다.
“하.”
빅터는 피폐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허탈하게 피식댔다.
“외교관, 그만둘 거라며. 무슨 월급 차압을 해.”
하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답했다.
“제안받은 자리가 있어.”
하비가 외교부에 이미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태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 하비의 능력을 아까워한 토른당 원로 의원 하나가 제안한 것이 있었다.
시라보 은행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거래처를 관리하는 일을 주겠다고 했다. 주로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하비에게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빅터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자리?”
“…….”
“아, 그래. 나는 알 바 없다 이건가.”
빅터는 복잡한 얼굴로 말없이 하비를 한참이나 보았다.
예전에 외교관들과 술자리를 함께했을 때, 시 재정으로 군대를 동원해 해적을 소탕해 주겠다고 한 것도 끝끝내 거절했던 하비였다. 그런 사람이 대가 없이 뭔가를 얻으려 할 리가 없었다.
‘알지만…….’
부디 빚진 것이 많은 자신에게선 그저 가져가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비에게 다 퍼주고 싶었다. 그것조차 못 하게 해서 더 답답했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손발을 구속한 기분이었다.
빅터가 쓸쓸하게 하비를 건너보았다.
“이거 알아?”
그의 입술이 힘겹게 비틀렸다.
“넌 정말 사람 돌게 하는 재주가 있어.”
빅터는 그새 까칠해진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어떤 것이든, 하비가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계약서는 어디서 작성할 거지? 여기서 바로?”
하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 저택에서. 가문의 인장이 있어야 하니까.”
* * *
하비가 내건 조건은 베르텐가의 유력한 차기 가주로서의 빅터와 스터스가와의 일대일 계약이었다.
가주 대리로서 일하고 있던 빅터는 집무실에 가주의 인장이 찍힌 빈 계약서가 상당수 있었다. 그것으로 알음알음 사적인 이익도 취하고, 필요한 것들을 계약할 때 써왔다.
‘이걸 설마 하비와 일할 때 쓰게 될 줄은…….’
빅터는 참담한 심정으로 계약서를 들고 스터스가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앞장서는 하비의 강건한 등을 쫓아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연무장도 지나치고 있었다.
빅터의 걸음이 느릿해지더니 눈길이 익숙한 나무에 꽂혔다. 유독 키가 큰 나무였다. 저것에 몸을 기대어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차가우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뜨겁기도 했다. 마음을 찌르는 고통에 온몸을 불살랐으므로.
그런데 눈에 익은 것은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저건……?’
빅터가 완전히 걸음을 멈추자 하비가 의아한 듯 뒤돌았다.
하얀 손수건이 여전히 나무 기둥에 달려 있었다. 하비의 손이 나무껍질에 다칠까 봐 묶어둔 것이었다.
빅터는 그날의 하비가 말하던 것들이 처절하게 떠올랐다.
‘내가 보인 허점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재미있었나? 포기 못 하고 계속 오는 걸 보니 몇 배는 즐겼나 보군. 하긴, 그랬겠지.’
‘알파가 약 하나로 임신하는 대단한 희극을 봤을 테니.’
‘이제 여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빅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저때 하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만 해도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하비의 시선도 그를 좇다가 움찔했다. 하비는 여전히 매달려 있는 손수건을 민망한 듯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쩐 일인지 당황스러워 보였다.
“곧 떼어낼 거다. 신경 쓰지 마.”
빅터가 피식 웃으며 농을 던졌다.
“빈말로도 돌려준다는 소린 안 하는군.”
“손수건 하나 정도야 경의 재산을 고려하면 우습잖나. 해적과 개인적으로 교섭 시도가 가능할 정도면서.”
“그렇긴 하지만.”
빅터는 나무줄기를 감싸고 있는 하얀 손수건을 주시했다. 자세히 보다 보니 조금씩 다른 것이 보였다. 녹색 눈이 뒤늦은 깨달음으로 서서히 커졌다.
분명 안 좋은 기억일 텐데 아직까지 떼어놓지 않은 손수건, 하비가 여태껏 말했던 것들. 분노 속에 가려졌던 감정들.
‘내게서…… 가져갈 것이 더 남았나?’
‘아직 더 남았어? 이번엔 뭘 가져갈 생각이지?’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간 대화에서 있었던 것들, 차마 눈치채지 못했던 진실들이 비로소 들어왔다.
하비가 말한 ‘가져갈 것’이란 것이, 설마…….
빅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일렁이며 긴장을 머금었다. 그는 더듬대며 말했다.
“지금은 물론 아니겠지만.”
“…….”
“혹시라도 말이야.”
빅터를 바라보는 하비의 시선에 점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의도하지 않은 일로, 그러니까……. ‘그 일’에 지금까지 괴로워할 정도로…….”
책임감을 느끼고, 형태도 완성되지 않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아픔으로 고통받을 정도로.
빅터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하지만 꼭 확인해야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낮은 목소리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날 사랑했던 건가?”
빅터는 하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비가 쏟았던 애정의 크기를, 이제야 마음으로 느꼈다.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린 지금 와서 말이다.
아주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하비의 표정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슬픈 것 같기도, 아니면 분노하는 것 같기도, 혹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수도 없는 감정들이 하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하비 스스로는 오랫동안 정의 내릴 수 없었던 감정을 빅터는 너무나 쉽게 물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쉬워 보였다. 후회하는 것도, 누군가를 붙드는 것도, 마음을 부대끼는 것도.
하비는 허무한 얼굴로 말했다.
“……그랬다면.”
가까스로 또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뭐가 달라지나?”
하비는 그날의 감정을 솔직히 인정했다. 사실을 아니라 할 수도 없었고, 굳이 지금 와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빅터는 말없이 하비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자조적인 미소가 입술 끝에 걸렸다. 무언가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아니.”
언제나 또렷하던 빅터의 녹색 눈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의원 집무실에서부터 하비의 발언으로 받았던 충격이 한 겹, 두 겹 쌓이더니 결국 속을 갈기갈기 헤집어놓았다.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후회? 그런 값싼 말로는 한참 부족했다. 빅터는 알 수만 있다면 지금의 이 지독하고 참담한 심정을 대체할 수 있는 단어를 알고 입 밖으로 뱉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막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악마든, 신이든, 뭐든 좋으니 시간을 돌려줬으면 했다.
어쩌면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그때로.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던 평온한 시간으로.
“난 아마 죽을 때까지 되새기겠지.”
빅터를 바라보던 하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할 틈도 없었다.
“일생에 단 한 번 있었던…….”
빅터의 한쪽 눈에서 조금씩 고이던 투명한 물이 길게 흘렀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누군가를 시궁창에 빠뜨리는 것도 너무나 쉬웠던 자의 눈물이었다.
날렵한 턱 끝에 맺혔던 물방울이 크기를 키워 기어이 떨어졌다.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왼쪽 눈에서만 눈물이 끝없이 내렸다.
“가장 값진 기회를 놓친걸.”
빅터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사라졌다 드러난 짙은 녹빛의 눈에 다시 물이 괴었다.
젖은 목소리로 띄엄띄엄 빅터가 말했다. 목이 꽉 잠겨 있었다.
“지독하게 후회하면서.”
놀란 눈으로 빅터를 보던 하비는 천천히 이를 악물었다. 여태 잘 참아왔는데, 도저히 인내하기 힘들었다. 빅터의 말을 들으면서 쥐었다 폈다 한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부에서 잔잔하게 끓던 무언가가 일시에 폭발했다.
하비가 빠른 걸음으로 빅터에게 접근하더니 빅터의 가슴께를 꽉 움켜쥐었다. 밤색 눈이 미친 듯이 일렁였다. 하비는 그간 참았던 울분을 쏟아냈다.
“그래. 후회해.”
옷깃을 가득 쥔 손에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갔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남색 푸르푸앵이 하비의 손 아래 구겨졌다. 으르렁대듯 얼굴을 가까이하고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죽을 때까지.”
하비는 반쯤 젖은 빅터의 얼굴을 가슴에 담았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얼굴만큼은 절대 못 지울 것 같다.
쥐었던 옷깃을 떨쳐놓으며 하비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그런 뒤엔, 기억해.”
“…….”
“절대 잊지 마.”
빅터에게서 몸을 떼어낸 하비가 시선을 돌렸다. 아닌 척했지만 늘 고요했던 밤색 눈에도 동요가 가득했다.
등 뒤로 애틋하고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쯤 올라온 물기를 삼키면서, 하비는 애써 평소처럼 말했다.
“서재가 있는 본관은 아직이야. 더 남았어.”
하지만 한번 일었던 마음의 파도는 쉽게 잠잠해지지 않았다.
서재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더는 대화하지 않았다. 익숙한 침묵이 감돌고,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차라리 이 묵직한 공기에 순순히 짓눌리는 쪽이 마음 편했다. 감정의 찌꺼기는 금방 사라지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겼다.
본관 안에 들어서자 집사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하비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총괄 외교관 소식을 듣고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 마나 억류된 외교관들 건에 관해 온 것일 테다. 급한 마음에 못 참고 달려왔겠지.
빅터를 돌아보며 하비가 말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빅터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꾸했다.
“천천히 와.”
하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빅터는 서재를 구경했다. 강렬하게 휘감았던 후회와 절망은 하비의 체취가 남은 서재 안에서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하비와 함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살피자 정말 많은 책이 있었다. 구하기도 힘든 희귀 판본이나 외국 서적이 즐비했다. 하비의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증명하듯 다양한 언어로 된 책들이 보였다. 빅터도 여러 나라 사람들과 문서 작업을 해본지라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빅터는 이래선 안 되는 건 알지만, 책상 서랍도 몇 개 열어보았다. 하비에게 속으로 미안함을 전하면서도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서재에서 이리 돌아다니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은근히 들뜬 것도 있었다.
책상 가장 아래 칸을 열었을 때였다. 빅터는 은빛으로 칠해진 얇은 책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일었다.
‘이건 뭐지?’
귀한 것인 듯 가죽으로 꽁꽁 싸매여 있었다. 칭칭 감긴 것을 벗겨내고 조심스럽게 열어서 펼치자 대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맹약서군.’
스터스가와 대대로 내려온 국왕들이 상호 간에 맺어온 충성 맹약서. 책으로 따로 보관을 했을 줄은 몰랐다.
빅터는 흥미로운 눈으로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아주 공들여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였다.
‘왜…….’
빅터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넘겨도, 또 넘겨도 찍어낸 듯 같은 필체가 반복되었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몇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똑같은 필체라니. 가주가 바뀌어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국왕에게 맹세하는 서약서가 한결같았다. 마치 찍어낸 듯이 누른 압력이나 글자의 간격, 모양, 꺾는 방식까지 동일했다.
그때였다.
“손버릇이 참 안 좋으시군요.”
집사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가 빅터를 발견한 것이다. 화들짝 놀란 빅터가 얼른 맹약서를 서랍 속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 조금만 보려다가 그만.”
한 소리 퍼부으려던 집사는 꾹꾹 눌러 참고 쟁반을 조용히 내려두었다.
“뭘 그렇게 보셨습니까?”
“좀 이상한 게 있어서.”
“뭐가요? 맹약서에 무슨 문제라도?”
빅터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문제……. 있었지.”
“예?”
빅터는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모든 가주의 글씨체가 똑같을 수 있는 거지? 그 오랜 시간 동안, 그게 말이 되나?”
“아아, 그거요…….”
집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빅터는 발동하는 직감을 믿고 집사를 캐물었다.
“알고 있는 게 있나? 말해줘. 궁금해 미칠 지경이니까.”
집사는 어린 시절 하비 스터스의 편지와 얽힌 일까지는 몰랐다. 그 일로 빅터가 더 분노했고, 어린 하비에게 우롱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빅터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조금 거리끼는 기색은 있었지만 말이다.
“주인님이 그다지 좋아할 만한 화제는 아닌 것 같지만…….”
집사가 가는 눈을 뜨고 빅터를 흘끔 노려보았다.
“알려 드리지 않아도 어차피 베르텐 경은 알아내겠지요. 우리 가엾은 주인님을 직접 쑤셔서라도요.”
지레 찔렸지만 빅터는 꼿꼿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며, 잘못은 비는 대상은 하비가 유일했으니까.
빅터가 집사의 불평은 모조리 무시하고 본론만 물었다.
“그래서 뭔데.”
“사실 스터스가의 필체는 대대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빅터가 아연한 눈길로 집사를 보았다. 필체가 같다고? 전부?
빅터의 놀람을 이해한다는 듯 집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야 스터스가 본연의 정신, 영혼이 계승되거든요. 초대 가주의 고결한 뜻을 이어받는다는 뜻이죠. 가주가 될 인재는 일찍부터 필체 훈련을 받습니다.”
“필체 훈련? 그건 또 뭐야.”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세상에 어느 가문에서 필체를 전부 똑같이 하는 훈련 따위를 어릴 때부터…….
황당한 듯 피식피식 웃던 빅터가 문득 얼굴을 굳히고 집사에게 되물었다.
“필체가 같다고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게 이어진다고? 그걸 정말로 믿은 건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집사가 빅터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하며 변명조로 말했다.
“그런 걸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빅터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얼어붙었다. 어린 날 스터스가의 저택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운 좋게 하비를 찾다가 겨우 찾아낼 수 있었는데, 하비와 대화 몇 번 하지 못하고 당대 스터스가의 집사에게 쫓겨났다.
‘그때 분명 하비 목에 멍이 있었는데.’
어딘가에 호되게 맞은 듯한 시커먼 멍을 그 여리고 하얀 목뒤에서 보았다. 스터스가의 도련님이 그런 멍을 달고 있을 리가 있겠는가. 당시엔 잘못 본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돌연 사나워진 빅터의 눈빛에 집사가 주춤했다.
“필체 훈련 같은 것도 받는데 말이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빅터의 목소리는 점점 음산해졌다.
“더한 것도 받았겠지?”
이건 의심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어린아이에게 필체를 강요하는 가문의 문화라면, 그건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나아가 다른 것들로 구속했을 테고, 목뒤의 작은 멍 따위는 일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 그건…….”
빅터는 당황스러워하는 집사의 반응에서 확증을 얻었다. 그저 잘나가는 귀족 도련님으로 곱게 자랐을 줄 알았는데, 하비는 생각보다 더한 역경과 고통을 겪은 모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비 스터스의 고생길은 끝이 없었다. 거기다 빅터 베르텐, 본인이 끼얹은 고행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빅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분노로 뜨끈해진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빌어먹을.’
하여간 라힌 스터스를 비롯해 하비를 제외한 스터스가 일체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괜찮나 싶으면 이렇게 시커멓게 썩은 부위를 드러낸다. 그 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문드러졌을 하비의 마음과 육체를 생각하니 빅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딴 가문 따위, 하루빨리 문을 닫게 하고 하비만 빼내고 싶었다. 하지만 제 가문 지키는 데 그리도 열성적이었던 자가 잘도 좋아하겠다 싶었다.
참을 수 없는 화로 홧홧하게 달아오른 빅터가 간신히 분기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러면 설마 하비가 맞는 일도 있었…….”
더 캐내려던 빅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지친 기색의 하비가 들어섰다.
“주인님!”
집사가 눈에 띄게 밝은 얼굴로 주인을 맞았다.
“오래 기다렸나? 이야기가 길어져서.”
하비는 말을 하다 말고 두 사람 간의 묘한 분위기에 의아해했다.
“왜들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집사가 허둥지둥 빈 쟁반을 챙겨 들고 외쳤다.
“아닙니다!”
곧이어 빅터에게서도 잔뜩 억눌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하비가 찜찜한 마음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지만 어떤 추가적인 말도 나오지 않았다. 쟁반을 든 집사는 재빨리 자리를 비웠고, 빅터는 어딘가 계속 불편한 기색이었다.
“정말 무슨 일 있었나 보군.”
“……후우.”
빅터는 대답 대신 열을 삭이는 것 같은 긴 한숨만 내쉬었다. 물어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기세였다.
하비는 금방 포기하고 다음 할 일을 떠올렸다. 가문의 인장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왜인지 빅터가 화가 난 듯해서 자꾸 곁눈질하게 되었다.
‘나중에 집사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하비가 헛기침을 하며 빅터의 주의를 돌렸다. 아까 빅터와의 사이에서 진하게 오갔던 감정들은 총괄 외교관을 만나고 오면서 가라앉았다.
이번에 억류된 외교관의 부모인 귀족들이 한꺼번에 찾아와서 곤란했다는 둥,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되겠냐는 애걸에 가까웠다. 총괄 외교관이 이토록 저자세를 보이는 것도 처음이라 하비는 그를 안심시켰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생각해 볼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빅터와 마무리를 지어야 할 건이 있었다. 아직도 불편한 얼굴로 앉지도 않고 서 있는 저 남자와 말이다.
하비는 차가 놓인 테이블에 앉으며 가문의 인장을 꺼내 들었다.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운 외관의 나무 곽에서 인장이 딸려 나왔다. 인장 아래 스터스가의 문양인 4등분 된 방패가 선명히 드러났다.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계약서를 작성해 볼까.”
* * *
“베르텐 경!”
몇 번 들어도 참 듣기 싫은 목소리다.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면서도 빅터는 상념에 빠진 척 잠깐 무시했다.
하비가 어린 시절 저 꼴 보기도 싫은 스터스가 저택에 갇혀 상상도 못 할 일을 겪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왜 더 빨리 알지 못했나. 알았다면 어떻게든 했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죄 없는 하비만 몰아세웠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쳐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괴감과 자책이 한없이 빅터를 갉아먹었다.
그러나 빅터는 자신에게도 제법 냉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상황 파악이 빨랐다.
‘아무 힘도 없었던 시절인데, 내가 할 수 있었을까.’
그나마 해적선에서 목숨을 걸고 실력을 키웠기에 망정이지, 자신조차 베르텐가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빅터 베르텐 의원!”
그제야 빅터가 귀를 후볐다. 의장이 부르고 있었다.
“……저 귀 뚫렸습니다. 소리 지르지 마시죠.”
모든 귀족의 눈이 빅터에게 향했다. 이곳은 의회 회합, 혹은 집회라 불리는 장소로, 귀한 암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각 테이블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검은색의 반지르르한 광택이 회의를 한층 엄숙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긴장감 가득한 회의장 내 공기를 의장의 목소리가 길게 울렸다.
“베르텐 경이 올린 로투스가의 안건 말일세. 불법 행위 및 비승인 노예 사업을 운영한 것에 관한 것은 국왕 폐하의 결정 권한으로 넘어갔네만. 다음으로 올린 안건은……. 대체 이게 뭔가?”
의장이 몹시 난감한 얼굴로 종이를 훑었다. 빅터는 앉은 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번 해적 사태를 시 재정을 끌어다 써서 해결 보겠다는 건가?”
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대편 테이블에서 쾅 소리가 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샌 의원 하나가 벌떡 일어나 빅터를 노려보았다. 나이에 비해 몹시 정정해 보였다.
“이런 고얀! 기고만장한 것도 정도가 있지! 공적인 재정을 제 돈 쓰듯 해버리다니!”
그의 외침에 힘을 얻은 건지 옆에서 다른 의원도 자리를 떨쳤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홰그당의 정치인이었다.
“베르텐 의원의 재산을 당장 환수하여 전수 조사해야 합니다! 라힌 스터스처럼 뭔가 구린 것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평소 빅터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빅터를 마주 보았다. 어떤 말을 나오든 하등 표정 변화가 없던 빅터는 스터스가의 이름이 나오자 휙 변했다.
냉정한 얼굴 가운데 비웃음을 머금고 빅터가 반박했다.
“지금 라힌 스터스 전 의원의 이름을 꺼내는 건 지나친 비약 아닙니까? 오찬을 제대로 못 드셔서 노망이 나신 건 아니신지.”
빅터를 공격한 자가 노기를 띠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 건방진 놈이……!”
의장이 한숨을 내쉬며 의사봉을 여러 차례 두들겼다.
“자자. 조용히들 해요, 조용히!”
빅터를 대놓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이번엔 서로서로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다른 자를 비난했다. 당 내에서도 작게 분열된 파가 있었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 물고 뜯었다. 수프 그릇을 사이에 둔 개떼라면 딱 이런 모양새일 것이다.
빅터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싸움터가 된 회의장을 둘러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진정들 하시고. 제 이야기 다 안 끝났습니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주목시키기에 충분했다. 묘한 이끌림이 빅터의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빅터가 제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언제 시 재정을 끌어 쓴다고 했습니까.”
의장이 어리둥절해서 들고 있던 회의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여기엔 분명 올란시를 대표로 올란시의 재정을 걸고 해적과 교섭한다고 되어 있네만.”
“명목상입니다. 그 정도로 해두어야 해적 놈들이 관심을 가질 테니까요.”
의장은 놀림당한다고 생각했는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하게.”
기다렸다는 듯 빅터가 차근차근 준비해 온 의견을 귀족들 앞에서 풀어놓았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회의장 내를 넉넉히 울렸다.
“제 사유재산이 올란시 전체 재정과 맞먹는 규모라는 걸, 저 무지한 해적 놈들이 한 번에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입니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기함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빅터의 의도를 눈치챈 것이다.
“거참.”
“허어.”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혀를 차는 사람, 수염을 근엄하게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긴 자, 혹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빅터를 의심스럽게 보는 자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빅터는 서두르지 않고 당 의원들을 설득해 나갔다.
“국가에 속하는 공공 자산을 인질 교섭 시에 쓸 수 없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도적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에 속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라힌 스터스 전 의원이 내세웠던 공칙이었다. 빅터는 이 법칙이 아주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빙긋 웃으며 빅터가 폭탄을 터뜨렸다.
“그럼 개인 자산으로 하면 아무 문제 없지 않겠습니까.”
일견 산뜻하게까지 들리는 빅터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장은 또 한번 대혼란이 휩쓸었다. 다시 시끌시끌해진 회의장은 의장이 몇 번이나 중재하고 의사봉을 내려친 후에야 진정되었다.
빅터가 여러 가지 감정과 눈빛이 뒤섞인 회의장을 찬찬히 둘러보고는 그들의 마지막 염려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당도 탈퇴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더 불거지는 목소리는 없었다. 비열한 비겁자들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빅터는 입매를 비틀었다.
“우선은 억류된 인질들을 구하는 게 먼저니까 말입니다.”
빅터의 결연한 의지에 웅성거림도 잦아들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색하게 웃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빅터의 발언은 파급력이 컸다.
빅터는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눈으로 회의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개인 자산을 물 쓰듯 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 문제 지역이 내 구역이 아니라는 안심, 사안에 대한 방관, 무관심, 혹은 빅터의 자산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 등등.
익숙한 작태지만 새삼 구역질이 났다. 그가 납치당했던 과거에도 이들은 같은 행태를 보였을 것이다. 빅터가 냉소했다.
‘벌레 같은 놈들.’
하비가 보고 싶어졌다. 그 남자가 회의장에 있으면 공기가 훨씬 맑아질 텐데.
그러나 그 마음과는 별개로, 빅터는 익숙한 가면을 다시 쓰고 귀족들을 대했다. 이곳은 한 치만 삐끗해도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전장이다. 알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계속 하비만 떠올랐다.
‘이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그 시각, 하비는 불편한 마음으로 외교부의 한적한 쉼터에 앉아 있었다. 걷기 좋게 조성된 작은 공원으로, 잘 심긴 나무와 꽃, 풀들이 정돈되어 마음에 안정이 오는 곳이었다.
그는 빅터가 돌아간 뒤, 집사를 추궁해 둘 사이의 일을 들었다. 그 뒤로 빅터가 집사로부터 알아낸 진실이 내내 마음에 걸려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는 스터스가의 필체가 전부 같다는 것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하비는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어.’
빅터는 이미 과거 해적선에 전달되었던, 인질들을 농락하는 편지에 대해 눈감기로 했다. 나중엔 자신이 했다고 해두긴 했지만 빅터는 하비가 한 것으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다만 알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의심하는 정도였다.
하비가 골치 아픈 듯 구겨진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 또 경멸하려나.’
스터스가가 아주 우습게 보일 것이다. 빅터는 전통과 사상에 대한 집착을 원래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고리타분한 미친 짓이라 여겼겠지.
그나마 외교관을 해서 많은 것을 보고 외국에도 가본 하비는 이전의 스터스가 가주들에 비해 넓은 식견을 가진 편이었다. 그럼에도 집착에 가까운 스터스가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빅터가 이걸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한 순간 하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말도 안 되는 희망을 또…….’
빅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미신이나 관습에 얽매이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다니. 하비는 자신이 아무래도 과거를 거울삼아 교훈을 얻는 유형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일을 겪고도 헛된 망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때, 멀리서 복색을 제대로 갖춘 남자 하나가 긴장 어린 기색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새로 온 외교관이었다.
하비가 벤치에 기대었던 등을 곧추세우고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그가 몹시 쑥스러워했다. 하비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처음이라 더 긴장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꽤 용기 내어 접근했다.
“여기 법 조항이 헷갈려서요. 책을 찾아봐도 사례가 좀…….”
“어디 봐.”
하비는 신참 외교관이 가지고 온 종이를 뚫어지게 보더니 그에게서 펜을 건네받았다. 끝이 말라가는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힘을 주어 눌렀다. 무엇이 문제인지 대번에 파악한 하비가 옅게 미소 지었다.
“책을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실질 사례가 일부 누락되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땐 외교 국가 간의 실사례에만 집착하지 말고 각 국가의 현행법을 살펴.”
“그리고요?”
하비가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찍었다. 머리를 쓰라는 뜻이었다.
“현행법을 토대로 추론을 해야지. 각 국가의 문화도 자세히 알아야 하고, 민족성 같은 것도 알아두면 좋지. 단순하게 사례에만 접근하면 가끔 함정에 빠지거든.”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하면 너무 복잡하지 않나요? 시간도 없는데…….”
신입이 상사인 하비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흔히 할 법한 고민이었다. 하비도 이해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이 신입 외교관에게는 큰 발전이 없을 터였다.
하비는 귀찮아하지 않고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도 아끼지 않고 덧붙였다.
“이전 실사례를 참고해서 바로 끝내 버리면 편하긴 하지만, 직접 찾고 수고를 들일수록 더 좋은 방법이 나올 거다.”
온화하지만 강한 말투로 하비가 엄하게 말했다.
“외교는 국가 간의 또 다른 전쟁이야. 이기려면 상대를 더 잘 알고 있어야지.”
신입 외교관이 눈을 반짝이며 하비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수고해.”
들뜬 얼굴로 뒤돌아 사라지는 신입 외교관을 하비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늘 그렇지만, 새로 출발하는 자의 패기와 설렘, 열정은 곁에 있는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음?”
하비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신참 외교관의 뒤로 거대한 실루엣을 보았다. 커다란 키와 체격을 지닌 사내가 설렁설렁 걸어오고 있었다. 목표는 뚜렷해 보였다.
그자가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안 하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는 경비병이나 보안병이 전혀 없었다.
‘외부인인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곳에서 볼 만한 옷차림새는 아니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오는 모양이 뱃사람이나 한량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 대충 걸친 셔츠나 베스트, 서민 바지인 캐속은 꽤 질 좋은 것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그가 다가오면서 중얼거렸다.
“이기려면 상대를 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라.”
온전히 하비 앞에 선 사내가 히죽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불한당 같은 느낌이 더 강해졌다. 삐딱한 걸음걸이에 턱엔 정돈되지 않은 희끗희끗한 수염이 이리저리 나 있었다.
“거 좋은 말을 들었수다, 스터스 경.”
하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날 알고 있나?‘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만 듣고 있으려니 발이 근질근질해서. 그래서 찾아와 봤지.”
건장한 사내가 햇빛을 가리고 하비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빅터 그놈이 댁만 엮이면 어찌나 시끄럽게 굴던지. 안 하던 짓도 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것도 양보할 정도라니까.”
빅터의 이름이 언급되자 하비의 기세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사내도 같은 알파라서 하비가 뿜어내는 페로몬 자체는 미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비에게서 나오는 강렬한 투지나 칼로 벼린 듯한 견고한 의지가 전해졌다.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누구길래 함부로 경어도 없이 귀족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거지?”
역시 빅터의 말대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씨익 웃은 중년 사내는 하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오랜만에 대화할 기분이 나는 자다. 하비에 대한 중년 사내의 평가였다.
“동업자라고 해야 하나. 그 비슷한 거지. 한배를 타는, 아니, 탔던 사이?”
“베르텐 경의 동업자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말했잖아. 고매하신 스터스 경의 얼굴이 궁금해서 와봤다고.”
의문의 중년 사내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하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자를 노려보았다. 빅터처럼 험한 상처가 여기저기 많이 난 얼굴이었다. 살아온 세월에서 응축된 경험과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비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주름 진 얼굴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고작 내 얼굴이나 보겠다고 외교부 건물 안까지 들어오는 수고를 들였다니. 더 의심스러운걸.”
중년 사내가 벤치 뒤로 팔을 걸치며 피식 웃었다. 하비는 찌푸리는 얼굴조차 우아했다. 남자답게 생긴 외모지만 화려한 빅터와는 다른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반할 만했다.
결국 이럴 거면서 매일 복수한다 노래를 불렀던 건지. 속으로 빅터에게 혀를 차며 중년 사내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표정과는 반대로 감탄사 같은 말이 흘러나갔다.
“듣던 대로 경계심 강한 미인이로고.”
하비가 헛웃음을 지었다. 미인? 자신은 전혀 미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되는대로 막 뱉는 사람인 것 같았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의를 제기할 만한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하비 본인은 한 번도 자신을 미인상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이없다는 시선을 아낌없이 보내는 하비를 보던 중년 사내가 팔을 풀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실은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었지만-”
그가 수염을 손등으로 거칠게 훑더니 그는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사업 이야기를 하려고 왔지.”
“사업?”’
“빅터 놈이 내게도 꽤 큰 판돈을 걸었거든.”
무슨 말이냐는 듯 하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신생 해적 놈들을 싹 갈아주면 좋겠다면서, 군 지원비를 내놓았어.”
하비는 벤치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벌떡 앞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군…… 지원비?”
무릎 부근의 바짓단을 꽉 쥐는 하비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빅터가 마지막 부탁이라며 찾아온 날이 아직도 선했다.
‘거슬리는 그 신생 해적 놈들, 다 쓸어줘. 비율도 전부 몰아주지.’
중년 사내에게는 이런 소탕이 재밌는 일이었다. 근질거리는 몸을 푸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어 사내는 한동안 빤히 빅터의 얼굴만 들여다봤다. 빅터는 진심인 듯했다.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것을 돈이 부족하다고 여겨서 그런 줄 알고, 빅터가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돈독 오른 영감이라면서 욕지기를 뱉기도 했다.
‘왜, 모자란 것 같아? 그걸로 용병 고용비과 무기, 배 구입은 충분할 거다. 참고로 스웬 용병이 제일 실력 좋아.’
중년 사내가 이윽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도 솜씨 좋지만, 해전을 잘하는 용병은 따로 있지. 친구들을 좀 모아봐야겠군. 고맙게 받으마.’
‘남는 건 가져. 수고비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한테 들러붙지 말라는 경고 겸.’
중구난방으로 난 턱수염을 쓸던 중년 사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날 다 주면 네놈은 어떻게 살려고?’
‘방법이 있겠지.’
빅터가 대수롭지 않게 이어 말했다.
‘없어도 할 수 없고.’
중년 사내는 하비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과 빅터와 함께 고안한 작전을 설명했다. 문득 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나 같은 양아치한테 곱게 키워온 상단을 전부 넘기다니. 절대 그 자식다운 발상이 아니란 말이지.”
“뭐?”
하비의 밤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빅터가 상단을 넘겼다고? 동업자라는 이 사람에게?
중년 사내가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하비를 한참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려는 듯, 오래.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중년 사내가 말했다.
“경은 빅터가 그 상단을 키우기까지 몇 년을 쓴 줄 알아?”
“…….”
“무려 12년이야. 나와 사업 구상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세면 17년. 그놈이 살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을 썼지.”
중년 사내가 피식피식 웃었다.
“그리 공들이고 평생을 바쳐온 것을 넘긴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욕심 많은 녀석이?”
해적과 교섭하는 돈은 상단에서 번 돈을 개인 계좌로 넣어둔 것으로 일부 충당했다.
사실 중년 사내가 보기에 빅터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원래도 정상은 아닌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역대급 미친 짓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새로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하비가 무릎에 올려진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정말이란 말인가. 빅터는 이미 많은 자산을 지불했다. 이건 필요 이상의 선의였다. 너무 넘쳐서, 선의가 아니라 기만으로 느껴질 만큼의.
해달라고 한 적도 없고, 이리되도록 바란 적도 없었다.
‘왜 그런 거야. 넌 무슨 생각인 거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이 들어간 하비의 주먹을 중년 사내가 흘끔 내려다보았다.
“뭐, 여기까지 와보니까 조금은 알 것 같네.”
씨익 웃은 중년 사내가 하비에게 악수를 청하듯 한 손을 내밀었다.
“곧 내가 고용한 용병과 함께 작전 들어갈 텐데, 그때 다시 봅시다.”
하지만 하비는 악수를 받지 않았다. 중년 사내가 주먹을 풀 생각도 없이 미동 없는 하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허공에 뜬 빈손을 아무렇지 않게 치웠다. 중년 사내는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을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키운 자식 같은 놈이 말이지.”
“…….”
“그쪽에게 많이 빠져 있는 것 같거든.”
여전히 말이 없는 하비에게 중년 사내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모자란 녀석이지만 잘 부탁해.”
고개는 숙이지 않았지만 무게가 있는 목소리였다. 처음과 같은 가벼운 태도로, 중년 사내는 외교부 건물을 홀연히 떠났다.
* * *
오늘 약속 장소는 다시 빅터의 의원 집무실이었다. 보통 하비는 탁 트인 넓은 공간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했기에 그의 일터는 둘만 대화하기엔 썩 좋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폰은 두 사람이 대화를 매끄럽게 할 수 있도록 다과를 준비한 뒤 조용히 사라졌다.
어쩐지 둘 다 많이 화가 나 보였다. 특히 빅터는 끔찍한 얼굴이었다. 실제 잠을 아예 못 잤다. 괜찮아 보이는 건 우성 알파의 체력 덕분이었다.
하비도 평소보다 얼굴에 열이 몰려 있었다.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었다.
차가 식어갈 때쯤, 드디어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말이 동시에 나와 겹쳤다.
“왜 말 안 했어.”
“왜 말 안 했지?”
바로 침묵이 찾아왔다. 하비가 집무실 책상 위로 양손을 올리며 먼저 말했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빅터가 이를 악물고는 밀려오는 분노를 삼켰다.
“말해.”
외교부까지 찾아왔던 그 이상한 남자를 떠올리면서 하비가 말했다.
“낮에 경의 동업자라는 사람이 찾아왔어.”
빅터에게 동업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순간 빅터가 말하려던 것도 잊고 입을 벌렸다. 좀처럼 자신의 일에 참견하지는 않던 사람이었는데.
“찾아갔다고? 설마, 그 영감이? 외교부까지?”
빅터는 믿을 수 없었지만, 하비가 뱉는 말을 보면 전부 사실이었다. 하비는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옮겼으니까. 빅터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만 빼고 말이다.
딱딱한 얼굴로 하비가 따져들었다.
“경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계약서가 다 무슨 소용이야.”
하비가 일어나서 책상을 짚고 빅터에게 몸을 기울였다.
“동업자라는 사람에게 상단을 통째로 넘겼다며. 당장 철회해.”
빅터가 짜증이 나는 듯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그 영감이 재미가 들렸나……. 찾아가지 말라니까. 농담인 줄 알았더니.”
하비는 그 말에 더욱 기가 막힌 표정을 했다. 동업자가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도록 미리 손을 써두기까지 했다니.
이건 엄연히 월권이었다. 또 아무것도 모르고 빅터가 깔아놓은 길 위에서 구를 뻔했다. 그 길이 몹시 편한 길이든, 혹은 험난한 길이든 빅터가 지어놓은 것이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왜 넌 항상 제멋대로 날 휘두르려 하는 거지.’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조목조목 사실관계를 짚고, 감정은 최대한 억누르려 노력했다.
“이번 건은 외교부 전체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시작한 일이기도 해.”
참으려 했지만 결국 하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결국 내 일인데, 경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거지?”
그 상단은 동업자가 말한 대로 빅터가 평생을 공들여 키운 것이었다. 빅터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하비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빅터에게 돈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하비는 빅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당시 빅터의 대답을 듣고 하비는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그깟 돈이 뭐 그리 소중하나?’
하비에게 돈은 그저 수단이었다. 필요하긴 하지만, 절실하지는 않은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빅터는 달랐다.
‘그깟 돈 때문에 목숨을 여러 번 구했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거든.’
‘돈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만이 날 인간으로 있게 하고, 나를 살게 해.’
빅터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 꽤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었다. 그런 소중한 것을 소모하게 하다니, 마음이 불편했다.
하비는 굳은 얼굴로 제안했다.
“이럴 거면 계약서 다시 써. 안 그래도 저택 운영비가 너무 들어서 작은 곳으로 옮길까 생각 중이었는데……. 차라리 잘됐군.”
스터스가 저택을 팔아 빚을 갚겠다는 말이었다. 빅터의 독단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저택을 지키려던 하비의 집착을 생각하면 엄청난 선택이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빅터의 눈이 길게 일그러졌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이었다.
“……뭐라고?”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던 가운데, 빅터가 하비의 차가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똑똑히 들으라는 듯 빅터는 한 자 한 자 강조했다.
“난 절대 철회 안 해. 상단은 이미 넘겼어. 그리고 계약서는 다시 안 써. 이것도 이미 끝난 일이야.”
하비가 화가 난 얼굴로 빅터를 불렀다. 타협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독단에 신물이 났다.
“베르텐 경!”
빅터는 길게 숨을 들이쉬어 머리를 식혔다. 극도로 차분하지만 폭발 직전의 무언가가 아슬아슬하게 빅터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왔다.
“넌 대체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뭐?”
“내가 너의 뭐냐고.”
생각지도 못한 간결한 물음이 하비를 관통했다. 빅터 베르텐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한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하비가 금방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빅터는 선수를 쳤다.
“자칫 네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서 그랬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진심을 토해낸 빅터가 입술을 짓씹었다. 혹여나 일이 잘못되어 닥칠 하비의 죽음을 가정해 봤을 때, 그 이후로는 자신의 삶도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깜깜했다.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막혔다. 단 일 분도 숨 쉴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 그랬다. 이 갑갑한 숨을, 인생을 조금이라도 트일 수 있다면…….
빅터는 녹빛 눈동자를 번뜩였다.
“상단? 그딴 거 몇 개라도 더 팔 수 있어.”
“왜 그런…….”
탕!
빅터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듯이 기대어 잡고 벌떡 일어났다. 왜냐는 물음조차 열이 받았다.
왜냐니. 어떻게 왜냐고 물을 수가 있지?
“정말 모르겠어?”
그는 비통해 고개를 숙였다. 왜 이렇게 몰라주는지, 머리에 뜨거운 열이 쏠렸다.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심정으로 빅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제일 우선이니까!”
빅터는 얼굴을 들어 하비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마주 본 하비의 눈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마구 뒤흔들리고 있었다. 저 얼굴이다. 감출 수 없는 하비의 혼란이 기꺼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가 되는 것보다, 어떤 식으로든 하비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빅터가 문득 자조했다. 그러면 뭐 하나. 마음은 전혀 전해지지도 않는데.
허무하게 비어버린 웃음을 짧게 뱉은 빅터가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 짜냈다.
“사랑한다고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는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 죄책감,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빅터를 덮쳤다. 여기서 결판을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빅터는 미친 사람처럼 옆구리에 찼던 짧은 단도를 풀어 검집에서 뽑았다.
놀라는 하비를 비웃듯 보면서 빅터가 그 단검을 책상 위로 꽂았다.
팍!
나무껍질이 튀었다. 검 손잡이를 힘껏 부여잡은 빅터의 손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왔다.
빅터가 앞으로 몸을 내밀어 하비에게 잔인하게 말했다. 녹색 눈 속에 광기가 새겨져 수런댔다.
“못 믿겠으면 팔 하나라도 잘라서 믿게 해줘? 그러면 좀 믿어주려나?”
빅터는 목울대에 일렁이는 쓴 물을 삼켰다. 그러라면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게 속 시원할 것 같았다. 팔 하나 희생해서 진심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그깟 팔 따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하비는 절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빅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맹세는 잔인하리만큼 직설적이고, 마음을 후벼 팠다.
상단을 왜 팔았고, 왜 자신을 과하게 도우려는 건지. 하비의 목구멍으로 치솟던 의문과 물음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미 답은 나왔다. 빅터에게서 수차례 보았던 깊은 후회, 회한, 그리고 고백.
빅터의 솔직한 감정과 목소리가 회오리치며 한 방향을 향해서 뻗어나갔다. 그건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이 높은 벽을 뛰어넘고, 두꺼운 담장을 허물어 하비에게도 닿았다.
드디어, 무너진 담장 사이에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
허물어진 틈에서 빛이 비틀대며 새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는지 가느다란 빛은 희미했다.
그래도 좋았다. 당장에라도 꺼질 것 같은 얼굴에서 하비는 오히려 희망을 보았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던 사람이 가장 큰 돈줄인 상단을 버렸다. 하비가 받아주지 않아 좌절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쫓았다. 절망하면서도 끝없이 갈망했다.
하비는 자신에 대한 빅터의 갈증을 원했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심장은 계속 피를 흘렸다. 너무 많이 흘렸다. 과다 출혈로 지친 탓에 빅터의 마음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던 걸지도 몰랐다.
한동안 잠잠하던 위통이 다시금 찾아와서, 하비가 가까스로 말했다.
“칼부터 치워. 그러면 조금 믿어볼 테니까.”
빅터는 단검의 손잡이에서 손만 떼어냈다. 검날이 시퍼런 서슬을 보이면서 여전히 살벌하게 꽂혀 있었다.
“조금이라도 믿어줄 생각이면, 이번엔 내 말부터 들어.”
빅터는 밤중에 떠오른 생각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스터스가의 필체가 모두 같다.
하비는 처음에 그 편지를 모른다고 했다. 나중엔 말을 바꾸긴 했지만, 진실이 아닌 듯했고.
게다가 그 당시에는 라힌 스터스가 살아 있었다. 빅터는 등줄기에 한기가 서렸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망할 편지.”
모두를 비웃고, 살고 싶은 자들의 마음을 짓밟았던 무례한 편지를 말했다. 하비의 얼굴에도 긴장이 맺혔다. 하비는 가슴 안쪽이 쓰라렸다.
그 반응을 눈여겨보며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쓴 거 아니었지?”
하비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하비가 쓴 것이 아님은 둘 모두 알지만 일부러 꺼내지 않은, 그저 하비를 괴롭히기 위한 핑계가 되었던 물건. 지금 나와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금이 가는 밤색 눈을 직시하며 빅터는 음산하게 말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라힌 스터스 전 의원, 네 그 개 같은 아버지가 쓴 거, 맞지?”
‘개 같은’이라는 과격한 수식어에 하비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긍정으로 알아들은 빅터가 드디어 폭발했다.
“너는 왜. 왜……! 진작에 말했으면 됐잖아. 그때 더 괴롭게 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비는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하하. 그래. 넌 빌어먹을 그 스터스가에 아주 뼈를 묻은 사람이니까. 절대 말할 리 없었겠지.”
하비는 제 가문의 오점이 될 일을 주절주절 떠들 사람이 아니다. 빅터는 정말 궁금한 듯 필사적으로 물었다.
“하나 묻자. 라힌 스터스가 널 사칭하면서까지 편지를 보낸 이유가 뭐였어?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거든.”
하비가 숨죽였다. 여기까지 빅터에게 말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감출 생각은 없었다. 다 폭로된 지 오래다. 지금 와서 더 가릴 것이 있나.
결국 하비는 씁쓸하게 진실을 고했다.
“나만은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고 깨끗해야 하니까.”
“완벽? 깨끗?”
들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빅터가 단어를 되뇌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비는 어쩌면 그가 조금은 알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미련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상황상 어쩔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이해를 바랐다.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리 말하는 하비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가문을 이어받을 가주가 될 사람이라서. 스터스가의 가주는 도덕적인 결점이 있으면 안 되니까.”
그런 자존심과 고고함이 스터스가를 지탱해 왔다. 당시 라힌 스터스는 너무 먼 길을 갔다. 그래서 제 손을 더럽히더라도, 후대에 이어질 자신의 아들만은 깨끗하기를 바랐다.
풀어서 설명했는데도, 빅터는 전혀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렁이던 분노의 불길이 거세질 뿐이었다. 가까스로 이해하는 척만 했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은 이유지만, 어쨌든 알겠어.”
교차로의 악마와 거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까지 버리지 못했던 지독한 고집. 빅터는 자신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지만, 미신에 현혹되는 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오로지 하비를 위해서였다. 저리도 이해받길 바라는 얼굴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몰아세우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처참하게 구겨진 몰골로 빅터가 물었다. 다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대체 스터스가에서 어떤 삶을 산 거야?”
그리 묻는 빅터의 핏기 없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비의 텅 빈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다짐하듯이 빅터가 말했다.
“내가 이건 꼭 알아야겠어서.”
하비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죽지 못해 살았다. 그저 해야 할 일만 하나씩 처리하면서, 그리 살았다. 어느덧 가문을 지키는 화석이 되어버렸고, 마음은 어디론가 날려가 버린 채 몸만 남았다.
그랬는데, 눈앞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이 남자가 돌아오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하비에게는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울릴 정도의 큰 변화였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심어둔 자에게 하나쯤의 환상은 남겨두고 싶었기에.
행복하게 산 귀족 도련님이라는, 그런 당당함과 기대 정도는 빅터에게 남겨두고 싶었다.
하비는 눈매를 일그러뜨리고 입술을 씹었다. 피 맛이 났다.
‘나도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잖아.’
그런데도 빅터는 독니를 세우고 제 성정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건 빅터에게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하비가 속으로 갈등하고 쉽게 운을 떼지 못하자 빅터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여전히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어릴 때 스터스가의 저택에서 널 찾아냈던 날. 기억해?”
물론 기억하고 있다. 하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라는 것이 지독하게 안 어울렸던 자신의 참담함도, 그와 반대로 몹시 자유분방하게 보였던 건방진 소년의 모습도.
하마터면 함께 그 손을 잡고 나갈 뻔했던 것까지 전부 기억했다. 집사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충동에 휩쓸려 그랬을 것이다.
빅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얼굴로 물었다. 차라리 아니기를,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날 내가 봤던 게 정말이었나? 목에 있던 그 멍 자국.”
하비가 움찔했다. 멍 자국? 그런 건 언제 본 거지?
하비가 입도 떼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사이, 빅터가 쉬지 않고 몰아쳤다.
“매타작이라도 당했던 거였어? 누구한테?”
물으면서도 빅터는 동시에 답을 알고 있었다. 누구한테기는. 명색이 스터스가의 하나뿐인 도련님에게 손찌검을 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밖에 없다.
빅터는 무덤을 다시 파서 그 역겨운 시체를 꺼내 난도질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고 여기까지 왔다. 참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누가 뭐라든 상관없지만, 하비가 상처받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묵묵히 있던 하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빅터에게 남겨둘 환상은 더 이상 없었다.
모조리 깨부수는 심정으로, 하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건 검술 훈련 때 내가 잘못해서 맞은 거였어. 그날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기도 했고.”
빅터는 비웃음을 머금고 냉소했다.
“검술 훈련? 필체 훈련 같은 그 비정상적인 것 말인가?”
하비가 무거운 얼굴로 변명처럼 말했다. 비웃음이 마음 아팠다.
“경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그래도 내겐 그게 현실이었어.”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비현실에 가까운 현실. 버거워도 이겨내야 하는 책임의 무게. 자신을 짓누르던 크고 무거운 방패를 나중엔 오히려 지켜야 하는 이상한 현실이었다.
할 말을 잃은 빅터가 한 손으로 괴로운 얼굴을 덮었다.
그랬던 건가. 역시, 그랬다. 하비 스터스는 철저히 무죄다. 거기다 그 또한 불행한 삶을 살았다.
“네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믿고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빅터는 원망하듯 말했다.
“너는 잘살았어야 해. 왜 그러지 못했던 건데?”
해적선에서 하루하루를 복수심으로 연명했다. 그 더러운 정치가 놈의 아들은 자신을 배신하고, 잘 먹고 잘살고 있을 텐데. 왜 자신은 이런 비참한 곳에서 죽어가야 하는 건지.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는 것도 모른 채 복수에 온몸을 맡겼다. 뜨겁게 칼날을 갈면서 심장에 날카로운 끝을 박을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가장 힘들었던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해왔던 건지.
빅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꾹꾹 눌러 담았던 한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 나왔다.
“그래서 더 네가 미웠어. 편하게 누워서 놀고, 먹고, 자고, 가끔 필요한 일이 생기면 놀 듯이 처리하고. 그리 잘산 줄 알았어.”
이제 손까지 덜덜 떨렸다. 자신이 저지른 짓들이 역으로 돌아와 빅터를 난도질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더라고? 내가 완전 헛다리를 짚은 거였어. 내가 어젯밤에 그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데, 어떤 심정이었을 것 같아?”
하비는 아무 말 없이 빅터를 지켜봐 주었다. 그가 끝까지 말을 맺을 수 있도록, 묵묵하게.
“그것도 모르고 난, 나는…….”
마음껏 증오했다. 나는 이리 힘들게 사는데 너는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그 미련한 생각에 그 모든 복수를 시행했는데.
정말로 하비 스터스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죄가 있었다면 태어날 가문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과 병신같은 빅터 자신을 사랑한 죄밖에 없었다.
빅터가 쓰러지듯 자리에 다시 앉았다. 우는 것 같았지만 실제 눈물은 없었다. 빅터는 스스로 눈물 흘릴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끝내 버리지 못했던 자존심, 자만, 드높은 오만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모래성처럼 쌓였던 허황된 것들이었다. 하비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었다.
“왜 넌 매번…….”
힘없는 목소리였다.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빅터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여전히 곧은 시선을 가진 남자를 눈에 담았다.
“더 비참한 건 뭔지 알아?”
“…….”
“난 내가 잘못한 일에도 널 이렇게 원망하는데, 넌 날 원망하지 않아.”
심지어 원망할 기회를 주었을 때도 속 시원하게 원망하지 않았다. 거부하고 밀어내기만 했을 뿐이었다. 저주를 퍼붓거나, 폭력을 휘둘러 상처를 주거나, 그런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정도를 지켰다. 그게 더 미칠 것 같았다.
하비 스터스는 거울이었다. 그 앞에 서면 자신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고, 추악한 속내까지 투명하게 나타났다.
쌓인 울분을 터뜨리며 빅터는 하비 대신 울부짖었다.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망가진 하비의 모습이 왜 지금 선명해지는지.
“정신이 나갈 정도로 힘든데도! 그런데도 끝까지…….”
빅터는 이제 두려웠다.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져야 이 단단한 방패 같은 거울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과연, 올 수는 있나.
빅터는 한계까지 몰려서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빅터가 하비의 피와 얼룩으로 더럽혀졌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악귀처럼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빅터가 씹어뱉듯 말했다.
“대체 어디까지 날 시궁창에 처넣을 생각인 거야.”
하비를 원망할수록 돌아오는 건 더한 자괴감뿐이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쓰레기였나, 인간말종이었나, 수거도 못 할 짐승이었나, 온갖 생각이 그를 좀먹었다. 한없이 높았던 자존심이 하비 앞에서는 곤두박질쳤다.
빅터가 비척비척 일어나 하비의 옆으로 걸어갔다.
쿵!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비의 밤색 눈이 커졌다. 빅터는 무릎을 바닥에 붙인 채 주먹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이제 용서해 달라고도 하지 않겠어. 그냥…….”
처연하게 고개를 들어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만 있게 해줘.”
내용은 애걸이었지만, 눈빛은 달랐다. 굶주린 시선이었다. 마음을 얻는 건 체념했지만, 어떻게든 곁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엿보였다.
빅터가 입을 열 때마다 하비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뭐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하비는 당황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빅터를 붙들었다.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빅터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마어마한 힘과 고집이었다.
“누가 보기 전에 일어나.”
“들어올 사람 없어.”
“내가 불편해. 이러지 마.”
빅터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전에 수면제를 먹고도 피 흘리며 좀처럼 의식을 잃지 않았던 것처럼, 강렬한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광기를 닮은 그 지독한 집착은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도 묻어나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하비는 숨이 막혔다.
“허락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압도감과는 다른 절실함에 하비가 욱신거리는 가슴을 붙들었다. 고삐 풀린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빅터가 괴로워하며 힘들어하는 원인이 오로지 하비 스터스, 그 자신이었다.
그 사실에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펐다.
용서 같은 쉬운 단어는 이제 자신과 빅터 사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하비도 빅터 앞에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올려다보는 그 녹색 눈이 마음에 박혀들었다.
이 눈빛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정해진 단 하나만 쫓을 것 같은, 집요한 늑대의 눈이었다.
하비는 떨리는 손을 뻗어 빅터의 눈가를 만져보았다. 에메랄드빛을 닮은 눈은 여전히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같이 아슬아슬했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그는 그저 이 관계가 강처럼 조용히 흘러갔으면 했다. 흐르다 바다를 만나면 그 일부가 되는 것처럼, 바다를 만나 한데 섞이는 운명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다시 섞일 때였다.
눈가를 매만지는 하비의 손길에 처연하던 빅터의 눈빛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일주일 후에 작전이 시행되면, 체력이 많이 소모될 거다. 잘 쉬어둬야지.”
하비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만 뱉었다. 그러자 희망으로 잠깐 빛을 쬐었던 녹색 눈이 금방 식었다.
빅터가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이던 사람이 말이다.
말을 할수록, 하비의 목소리에도 점점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는데.”
한숨을 길게 내쉰 하비가 빅터의 일그러진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러 펴주었다.
“네가 언제 가라고, 떨어지라고 한다고 말을 듣던 사람이었나?”
“……어?”
“원래대로만 해. 평소처럼 뻔뻔하게 굴어.”
손에 닿는 빅터의 피부가 전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흔적이었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저렸다.
하비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안 하던 짓 하는 걸 보니 더 꼴사납거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빅터가 말간 녹색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을 보니 하비는 짧은 웃음이 나오다가도, 방금 전의 절박하던 얼굴이 떠올라 진지해졌다.
내가 너의 무엇이냐고 묻던 빅터의 슬픈 외침이 다시 한번 멀리서 몰려왔다. 하비는 그 절규에 속으로 대꾸했다.
‘무엇이기는.’
하비는 자신의 삶을 여러 번 스쳐 지나간 빅터를 그때마다 다른 것으로 정의 내렸다.
처음엔 좀 특이한 아이일 뿐이었다. 그 뒤엔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렸고, 나중엔 목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무뢰배들에게서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섞인 날카로운 가시 말이다.
그러다 가시는 하비의 마음까지 꿰뚫었다. 심장에 뿌리내리고 자라 어느덧 영혼까지 옥죄었다. 배신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을 만큼, 그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지닌 괘씸한 가시였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비는 홀가분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나한테 주고 간 물건도,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가져가. 내겐 필요 없는 거니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흔들리는 시선에 대고, 하비가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꼭 가져가. 잊지 말고.”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위통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어차피 빅터가 들이붓듯이 스터스가 저택으로 보낸 온갖 약과 건강 관련 제품, 아예 팀으로 꾸려진 전담 의사 세 명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위통도 신경이 아주 예민할 상황이 생기거나 극도의 한계가 아니면 생기지 않았다.
하비는 깜박거리는 녹빛의 눈을 마주 보며 상기시켰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저번에 와서 내 방에 놓고 간 물건 말이야.”
드디어 상황 파악이 끝난 건지 빅터가 마른침을 삼키며 확인했다.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화색이 돌았다.
“그 말은…….”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빅터가 말했다. 목소리가 아직 잠겨 있었다.
“이제 기대해도, 되는…… 건가?”
늘 자신감 넘치던 얼굴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이 아슬아슬했다. 매번 죽상으로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던 차였다. 저 처참한 몰골을 보니 더 선을 그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모든 걸 잃은 지금, 남은 건 이제 이 사람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놓지 않는, 끝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이 가엾은 남자 말이다.
하비의 눈에도 희미한 애정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일렁였다.
대답 대신 하비는 빅터의 얼굴을 맴돌던 손을 내려 팔을 움켜쥐었다. 빅터를 강제로 위로 끌어 올리면서 자신도 허리를 펴 일어났다.
“일단 일어나. 어서.”
빅터가 워낙 체급이 큰 편이라 쉽게 누군가의 손에 몸이 움직일 사람이 아닌데도, 어느 정도 하비의 손에 딸려 올라갔다. 하비의 힘도 만만치 않아서였다. 그러나 온전히 일어나는 건 빅터의 의지로 해야 했다.
빅터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의 일어났을 때, 빅터가 하비의 팔을 반대로 휙 잡아당겼다. 허리 뒤에 책상을 두고, 한 손으로는 책상 위를 짚어 균형을 잡은 채였다.
“뭐…….”
당황한 하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빅터는 그대로 하비의 입술을 노렸다.
빅터는 균형을 잃고 자신 쪽으로 쏠린 몸을 받으면서 키스했다. 조금 거친 듯 적당히 도톰한 입술이 예전처럼 감미로웠다.
몇 대 맞을 각오를 한 것인데, 하비는 움찔하다가 그대로 순순히 허락했다. 쥐었던 하비의 주먹이 천천히 펴졌다.
조심스럽게 입술만 맞대고 있던 빅터가 혀를 내밀어 더욱 질척하게 얽으려 할 때야 하비는 뒤로 떨어졌다.
이제야 조금 믿긴다는 듯 빅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이네.”
확인하는 방법도 꼭 빅터다웠다. 금세 붉어진 입술로 하비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믿어달라고 할 땐 언제고, 막상 허락하니 겁나나? 감당 안 돼?”
평소대로 돌아온 빅터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맡겨만 주면, 뭐든 감당할게.”
“말은 잘하지.”
하비는 혀를 찼다. 여러 가지 의미로 저 혀 놀림에 속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장갑을 내던져 결투를 신청해도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하비의 눈이 제법 힘차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빅터의 등을 좇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걸음조차 가벼워 보였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거의 죽어가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걸 보니 마음이 풀어지고 만다.
용서해 줄 수 없냐고 비친 눈물과 처절하게 무릎을 꿇고 비는 애원에, 그동안 수없이 보인 진심에, 결국 넘어가고야 말았다.
하비는 어쩔 수 없는 자신에게 한숨지었다. 왜 이리도 이 남자 앞에서는 물러지는 건지. 제 마음이지만 참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시기적절하게 폰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 * *
폰이 안내한 손님은 빅터의 동업자이자 하비의 외교부 건물에도 찾아온 적이 있는 중년 사내였다. 그의 이름을 이제야 처음 들은 하비가 심각한 얼굴로 웃음을 참았다. 실례라고 생각해서였다.
중년 사내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거, 그냥 웃지? 참는 게 더 기분 더러워.”
“알프레드라니. 언제 들어도 이 순간이 제일 짜릿하더라.”
결국 빅터가 맞은편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알프레드는 보통 집사에게 붙이는 이름이었다. 순종과 복종의 이미지가 강했기에, 한때 이름을 날린 해적선의 우두머리에게는 몹시 어색했다.
끝까지 웃음을 꾸욱 누르는 하비를 보며 빅터가 동의를 구했다.
“너무 안 어울리지 않아?”
웃는 빅터를 무시한 채 중년 사내, 알프레드는 하비에게 말했다.
“알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스터스 경.”
“이제 와서 멋있는 척하지 마. 이미 늦었어.”
역시나 빅터를 무시한 알프레드가 하비를 향해 본론을 끄집어냈다.
“그럼 사업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하비가 지도를 펼치면서 본격적인 작전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알프레드가 먼저 핵심을 짚었다.
“병력은 둘로 나누어 하나는 해적과 직접 교섭, 하나는 억류된 인질을 구출한다. 간단하겐 이렇게였던가.”
이번엔 빅터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인질 구출 쪽에 병력을 더 많이 몰아야 해. 그게 목적이니까.”
옳은 말이기도 해서 하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교섭 장소인 세비니아 만보다 인질을 억류한 이로비나 섬 근처 바위섬에 해적이 더 많다고 들었으니까.
그런데 알프레드는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유를 몰라 그를 잠시 눈에 담던 하비가 빅터를 향해 물었다.
“그럼 병력은 인질 교섭 쪽에 더 싣는 걸로 하고. 뭘로 교섭하는 거지? 금화? 금괴?”
“금화는 위조하기가 좀 곤란하니 금괴로 할 생각이야.”
처음 듣는 소리에 하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위조? 정말로 넘길 생각이 아니었던 건가?”
하비는 설마 그만한 돈이 없는데 거짓말한 거냐는 눈빛을 쏘았다. 빅터는 발끈했다.
“물론 내게 돈은 있어. 그래서 시 전체 재정만큼의 돈을 넘기겠다고 해놓은 거고.”
당 회합 때도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니 정보가 신생 해적들에게도 흘러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빅터가 확실히 그만한 재정이 있고, 자신들에게 그 돈을 넘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빅터는 그 믿음을 이용했다. 감히 하비가 제 발로 자신을 떠나게 수를 쓴 놈들이니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놈들한테 돈까지 얌전히 던져준다고? 어림도 없지.’
신생 해적과는 끝장을 봐야 속이 풀리고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빅터가 잔인하게 웃었다.
“설마 내가 그 돈을 진짜 해적에게 넘길 거라고 생각했나? 돈은 미끼야. 신생 해적에게 정말로 거액의 돈을 넘기면 어떻게 될 것 같아?”
하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 봐도 훤했다. 신생 해적은 시 재정급 부를 거머쥐게 되고, 그러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느낌상 그들은 임페르 해적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 같았으니까.
금으로 무기와 화포가 상향되면, 신생 해적의 전투력만 높여주는 꼴이다. 그건 더한 폭력으로 돌아가겠지.
하비의 우려대로였다. 빅터는 진중한 눈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놈들은 임페르 해적단과는 달라. 임페르 해적단은 애초부터 돈만 가지면 끝인 놈들이었지만, 지금 이놈들은 돈만이 목표가 아니더라고.”
실제로 빅터와 알프레드 무리는 상단을 정식으로 꾸린 뒤엔 약탈을 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살상도 엄격하게 금했다. 임페르 해적단이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물론 부득이하게 필요한 경우에는 숨겨진 폭력성을 드러냈지만.
하비가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면?”
“덩치를 키워서 입지 괜찮은 나라 하나를 먹고, 그걸 중심으로 식민지 건설을 하려고 해.”
빅터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하비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판에 끼겠다는 건가.”
“그렇지.”
잘나가는 국가들이나 하는 ‘땅따먹기’ 게임에 출사표를 던지겠다는 소리였다. 꽤 배포가 큰 해적들이었다. 하필 걸려도 이런 놈들에게 걸리다니. 하비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위조는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하지? 보통 놈들이 아니라면 확인을 아주 제대로 할 텐데.”
빅터가 대답했다.
“진짜 금처럼 무게를 맞춰야 하니……. 납을 이용해서 형태는 똑같이 만들고, 겉에 금을 칠하는 거지.”
“그래 봐야 잘라보면 바로 들통날 텐데? 확인도 안 해보고 받을 리가.”
등을 뒤로 젖히고 팔짱을 끼고 있던 알프레드가 입을 열었다.
“위에는 진짜 금괴로 배치해 놔야지. 아래에 까는 건 가짜 금괴가 될 거고.”
미간을 좁히며 생각하던 하비가 또 다른 문제점을 지적했다.
“무게가 문제가 될 텐데. 배가 해면 아래 가라앉은 정도만 유심히 봐도 무게 정도는 금방 가늠해.”
대답은 역시 빅터가 했다.
“그래서 가짜 금괴 안에는 특별한 걸 넣을 예정이야. 그걸로 무게를 맞춰야지.”
“뭘 넣을 생각인데.”
빅터는 하비의 눈길을 슬쩍 피하더니 얼른 다른 주제로 말을 바꾸었다.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끝까지 속일 수는 없겠지. 재수 없으면 바로 들킬 수도 있고. 운도 필요해.”
“진짜 금괴의 비율은 어느 정도로 할 거지?”
하비의 물음에 알프레드가 말했다.
“30%. 많으면 40%.”
“꽤 많군. 그 정도면 바로 들키진 않겠어.”
다음 안건은 무기와 전력에 대한 것이었다.
“배에 장착될 포는?”
“우리 쪽은 신식 곡사포를 배치해 놨어. 장거리도 가능하지. 탄도가 휘니까 잘 쓰는 애들로 두고.”
이번엔 눈을 감고 있던 중년 사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놈들은 슬루인 제국이 준 화포인데, 구형이야. 무거워서 기동 속도도 떨어지고 발사도 느려.”
하비가 팔짱을 끼고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 중년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구형 화포 같은 것들은 슬루인 제국이 제공한 건가? 왜 신형을 주지 않았지?”
중년 사내가 눈을 뜨고는 느물거리며 말했다.
“잘 짖는 얌전한 개로 키워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건 제국 놈들도 알겠지. 자기를 물어뜯을 수도 있는 개한테 좋은 무기를 줄 수 없는 노릇이고. 안 그래?”
빅터가 기분 나쁜 얼굴로 끼어들어 비아냥댔다.
“아. 그래서 영감이 상단을 만들기 직전까지 내게 무기 하나 안 쥐여 줬던 거였군?”
“개 취급당한 건 기분 안 나쁘고? 고작 그딴 게 기분 나쁘냐?”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을 말린 하비가 다시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 빅터는 헛기침을 하고 양측의 전력을 비교했다.
“범선은 양쪽 다 갈레온선으로 동일. 차이 나는 건 화력과 인력 정도인데, 용병을 급하게 끌어모으느라 그리 많이 모으진 못했어.”
갈레온선은 애초에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신식 전선이었다. 그래도 제국 측에서 배는 좋은 것을 준 것을 보면 만약에 있을 신생 해적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그때 빅터가 진지한 얼굴로 하비에게 말했다.
“넌 붙들린 외교관 인질들을 구하는 쪽으로 가.”
하비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해적들이 원하는 교섭 대상은 나인데? 그게 무슨 소리지?”
“붙들린 인질들 얼굴을 아는 건 같은 외교관인 너 정도잖아. 직접 보고 구해내라고. 그 자식들이 인질을 빼앗길 걸 예상 못 할 것도 아니고, 엉뚱한 놈들을 넣어놨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렇게까지 했을 것 같진 않지만 빅터는 하비가 그쪽으로 가길 바랐다. 하비가 안 간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보낼 생각이었다.
들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해서 하비는 떨떠름했지만 승낙했다.
“그럼 해적과 직접 교섭 때 내 역할을 누가 하는 거지? 눈을 속이려면 비슷한 체격이어야 할 텐데.”
대답은 빅터에게서 금방 나왔다.
“나.”
알프레드는 대놓고 한숨을 쉬고, 하비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두 사람을 설득할 생각인지 빅터의 말이 더욱 교묘해지고 빨라졌다.
“다른 놈에게 맡기면 조금만 말을 섞어도 금방 들킬 거야. 인질을 구할 동안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야지. 그러려면 이번 사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내가 하는 게 나아. 이로비나 섬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으니까.”
하비는 할 말을 잃고 빅터를 물끄러미 보았다.
“혹시라도 내 얼굴이나 경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다면? 아니란 게 금방 들통나면?”
“그건 운에 맡겨야지. 최대한 너와 비슷하게 변장할 거야.”
“……정말 어이없는 발상이군.”
걱정스러운 두 사람의 눈길에 빅터는 변명하듯 말했다.
“난 끌려가 주는 척하고 적당히 때를 봐서 탈출하겠어. 탈출할 때 신호를 보낼 테니 그때 바로 포를 쏴.”
“어떤 신호?”
“금괴를 싣고 간 범선에 붉은 깃발을 올릴 거야.”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하비는 입술을 짓씹었다.
“깃발을 올린 뒤에 탈출을 어떻게 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어야지.”
그런 뒤 헤엄쳐서 아군의 배까지 건너오겠다는 계획이었다. 너무 무모했다.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위험한 계획에 하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
“없어. 현재로썬 이게 가장 좋은 대책이야.”
그 뒤로 하비가 몇 번이나 반대했지만 빅터의 의지는 확고했다. 알프레드는 포기한 듯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긴 시간의 회의 끝에 결론이 났다. 빅터의 말대로 하비는 인질을 구하는 쪽에 섞이기로 했고, 빅터는 하비 대신 해적과 교섭하는 쪽에 섰다.
* * *
작전 일의 날이 밝았다. 빅터는 나오려는 사용인들을 막았다. 위험한 전투라는 증거였다. 그나마 필사적으로 우기는 벤만 하비 쪽에 붙여두었다. 저번에 하비 일을 아직도 마음에 걸려 하던지라,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항구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한 뒤 배에 올랐다. 벤이 제 주인에게 결연한 얼굴로 다짐하듯 말했다.
“이번엔 반드시 제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맡긴다.”
빅터가 믿는다며 벤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런데 벤이 머뭇대다가 말했다.
“저…… 오기 직전에 커피하우스에 들렀는데 말입니다.”
빅터가 키우는 정보를 취급하는 곳을 일컬었다.
“뭔가 들은 게 있어?”
“로투스가의 가주가 국왕 폐하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그건 원래 국왕이 따로 만나서 심문하기로 한 거잖아.”
빅터가 낱낱이 밝힌 로투스가의 비리를, 국왕은 따로 직접 가주를 만나 확인하고자 했다. 예정되었던 일이기에 빅터는 벤의 걱정스러운 의아하게 얼굴을 보았다.
“그렇긴 한데…… 독대했기에, 들을 만한 귀도 따로 없었고……. 무슨 말이 오갔을지 몰라서 말입니다.”
“우선은 신경 쓰지 마. 정 찜찜하면 그 일은 다녀와서 바로 확인해 볼 테니까.”
항구가 어느덧 배로 가득 찼다. 빅터가 벤과 이야기하는 사이 하비도 도착했다. 빅터를 발견한 하비가 그에게 다가가려다 멈칫하고는 못 본 척 뒤돌아섰다. 빅터는 벤과 이야기하느라 미처 하비를 보지 못한 듯했다.
각자 다른 배를 타야 하기에 올라야 할 배도 달랐다. 알프레드가 동원한 용병들이 와글와글 시끄럽게 소음을 내고 있었다.
빅터는 금괴를 실은 상선에 올라야 했다. 전투선인 튼튼한 갈레온선이 아니라 그것보다 작은 일반 상선이었다. 하비가 탈 갈레온선은 인질을 구할 배였다.
그간 무시해 왔던 돈의 힘이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다니.
가득한 배와 병력을 본 하비는 새삼 감탄했다. 하비 혼자였다면 어림도 없을 전개를 한순간에 이루어냈다.
병력이 모이는 것도 금방이었다. 빅터는 더 모으지 못했다고 속상해했지만, 하비는 사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 구한 것도 대단한 것임을 알았다.
그때였다. 언제 온 건지 빅터가 불쑥 나타나 상념에 빠진 하비를 붙들었다.
“왜 말도 안 하고 가려고 해.”
팔을 붙들린 하비는 내심 뜨끔했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금방 자신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못 봤어.”
“못 보긴. 아까 오려다가 도망가는 걸 봤는데.”
도망이라는 말에 하비가 눈썹을 찌푸렸다.
“……바빠 보여서.”
이 무서운 남자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모양이었다. 빅터는 걱정스럽게 이마를 구기며 말했다.
“이로비나 섬에 도착하고 나면, 화승총을 특별히 조심해. 철갑 아머도 확실히 챙기고.”
철갑은 이로비나 섬에 상륙하는 자들, 실크 재질로 만든 아머는 해적선에 올라야 하는 용병들에게 각자 배급되었다.
빅터는 그것을 한 명도 빠짐없이 돌렸다. 혹여 인력 손실이 나서 작전이 실패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정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고개만 끄덕인 하비가 먼저 승선하려다 반대쪽으로 가는 빅터를 붙들어 세웠다. 그러곤 아까부터 입속에 맴돌던 걱정을 뱉었다.
“쓸데없이 다치지 마.”
짧은 말에 많은 의미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빅터가 이내 씨익 웃었다.
“너도.”
하비의 시선이 한참이나 그에게 머물렀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계속 가슴에 멀미처럼 일렁였다.
‘괜찮겠지.’
하비는 자신을 다독이며 먼저 고개를 돌려 배 위로 올라갔다.
하비의 뒷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던 빅터가 벤을 불러 은밀하게 명했다.
“하비한테 함부로 하는 놈이 있다면 명부에 올려. 일 끝나고 처리할 테니까.”
“물론입니다.”
벤에게서는 ‘알겠습니다’도 아닌 ‘물론입니다’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해전에 능한 용병이란, 대부분 중년 사내와 연관이 있던 해적들이었다. 유명한 해적은 아니었어도 크고 작은 해적단에 있었던 자들이었다. 척 보기에도 험악해 보이는 사내들이 우글우글했다.
통솔하는 건 중년 사내였지만 그와 함께 일하게 된 하비는 심란한 표정이었다.
“이번에 함께 일하게 된 분이신가?”
“곱상한 게, 손도끼질 몇 번 보면 울면서 도망갈 것 같은데?”
“으하하핫!”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용병 겸 전직 해적들을 보니 하비는 마치 자신도 해적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친 욕설과 사람을 앞에 두고 지껄이는 저급한 소리에 하비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힐 무렵이었다. 벤이 참다못해 으르렁대며 검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하비가 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괜히 함께 일해야 할 용병과 부딪쳐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그때 알프레드가 언제 온 건지 대신 앞으로 나섰다.
“그만들 하지.”
알프레드가 유들거리며 전직 해적들에게 경고했다.
“말조심해. 이래 봬도 꽤 험하게 살아온 분이거든.”
그는 고개를 휙 돌려 엄지로 하비를 가리켰다.
“그리고 빅터가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이니, 뭐 알아서 생각하고 처신해.”
빅터의 이름에 전직 해적들이 웅성대더니 기어이 잠잠해졌다. 싸한 분위기였다. 정적을 깨고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가 하나둘 이어졌다.
“그 또라이 새끼한테 잘못 보일 이윤 없지.”
“맞아. 괜히 칼침 맞고 뒈지지나 말자고.”
“칼이면 다행이게? 돈이 썩어나는 놈이니 총 한 정당 사람 하나씩으로 아낌없이 쏴주겠지.”
“그래서 우리 할 일이 뭐라고 했지?”
삽시간에 평정된 전직 해적 무리를 보니 하비는 또 한번 심란해졌다. 빅터는 평소에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녔길래 해적에게까지 평가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한숨과 함께 작전이 시작되었으나 하비는 금세 긴장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막상 작전에 들어가자 뭔가 이상했다. 물살이 거센 구간을 넘을 때 조금 위험할 뻔한 것을 빼고는 너무 순조로웠다.
모든 게, 너무 쉬웠다.
타앙! 탕!
멀리서 화승총이 불을 뿜고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화승총 자체가 많지는 않은 듯했다. 발사되는 속도도 느렸다. 재수 없게 머리를 맞아 즉사하는 용병들 말고는 수적으로 우세한지라 큰 인력 손실 없이도 몰아칠 수 있었다.
먼저 화승총끼리의 전투가 벌어졌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근접전이 되었다. 앞에 나서서 위험천만하게 뛰어들던 하비도 이마와 뺨에 화약탄이 스쳐 지나간 자국이 생겼다. 그나마 벤이 더 앞서서 뛴 덕에 부상이 덜했다.
언덕에 올라 목적지에 도착하자, 하비는 화승총을 거두고 칼을 휘두르려는 해적 하나를 찔러 바닥에 내리꽂았다. 용병들이 뒤따라 해적들에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쿵! 타다닥!
긴 화승총과 칼이 바닥이 나뒹굴고, 어깨를 꿰뚫린 해적이 살려달라 빌었다. 하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인질들은 어디에 있지? 살고 싶으면 말해. 치료는 해줄 테니까.”
“지…… 지하 2층 제일 구석 자리요!”
하비가 검끝을 빼내고는 치료 가능한 사람을 불러주었다. 그러곤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하 감옥 2층으로!”
사람의 숨을 완전히 끊지 않고 움직임을 제압하는 정도에만 그쳤지만, 그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에 하비를 무시하던 용병들의 눈에 서서히 이채가 일었다.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가 바뀌든 말든 하비는 제 눈앞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끝없이 내달려 인질들이 억류된 장소까지 향했다. 다행히 모두들 무사했다.
“수석 외교관님!”
“오실 줄 알았어요……!”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심각한 고문을 당한 흔적도 없어 보였다. 감격하며 끌어안고 우는 외교관들을 달래준 하비는 그들이 진정되자 밖으로 나갔다. 바닷바람이 길게 불었다. 하비는 해적들을 처리하고 있던 알프레드를 붙들었다.
하비가 그를 노려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이쪽에 잔존 병력이 별로 없다는 거.”
희끗희끗 흰머리가 섞인 검은 머리가 해풍에 어지러이 휘날렸다. 알프레드는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가볍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그런데 왜 날 여기로 보내고 용병을 더 많이……. 설마, 베르텐 경이 시킨 건가?”
알프레드가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미련한 녀석. 그렇게 말렸는데, 들어 처먹질 않더라니까.”
하비의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키고 있던 벤이 물었다. 그의 얼굴도 하비와 비슷했다.
“그럼 주인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빨리 가봐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데요.”
하비는 오기 직전 그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선명했다.
‘쓸데없이 다치지 마.’
‘너도.’
왠지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비는 초조한 얼굴로 중년 사내를 다그쳤다.
“베르텐 경이 하려고 하는 게 정확히 뭐지?”
알프레드가 곤란한 듯 다른 곳을 보다가 벤의 지긋한 시선이 합세하자 순순히 털어놓았다.
“가짜 금괴 안에 폭약 가루가 들었어.”
하비는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뭐?”
“그 미친놈은 그걸로 전부 날려 버릴 생각이야.”
아주 작정을 했다. 빅터는 제대로 미쳤다. 그건 알프레드도 같은 생각이었다.
알프레드는 자신에게만 언질을 주면서 비밀 유지를 당부했던 빅터를 떠올리며 한숨지었다.
‘그 새끼들이 다시는 하비를 바다 한가운데로 부르는 일 따윈 없게 해주겠어.’
‘……요약해서, 오로지 스터스 경 때문에 이 미친 짓을 한다 이 말이냐?’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빅터가 한심한 눈으로 알프레드를 보았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 폭약으로는 다 못 죽일 테니 잔당은 쫓아서 완전히 없애 버려.’
이쪽에 생각보다 병력이 없었으니, 빅터가 있는 곳은 훨씬 많을 것이다. 하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가봐야겠어. 베르텐 경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해.”
“서두르지 마. 나도 여기만 정리되면 바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어이! 다시 배 띄워!”
구시렁거리는 전직 해적 용병들을 앞세운 그들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 빅터가 하비로 위장하여 교섭하고 있을 세비니아 만으로.
* * *
한편, 빅터는 밤색 머리칼의 가발을 쓰고 최대한 하비의 말투를 흉내 내어 교섭하고 있었다.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는 이유로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서 금방 들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빅터는 다른 이유로 곤혹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빅터가 난감함을 감추고 체격이 크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에게 물었다.
“아직 확인이 덜 끝났나?”
“기다려.”
신생 해적은 금괴 확인을 꽤 정밀하고 꼼꼼하게 진행했다. 몇 번 찔러보고 말 것이라 생각했는데, 구석구석 꺼내어 확인했다.
몇 겹으로 진짜 금괴를 쌓아놔서 망정이지, 허술하게 했으면 금방 들켰을 것이다. 여러 번 금괴를 갈라보거나 찔러보던 해적 무리가 빅터가 있는 곳에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빅터는 눈을 돌려 상황을 살폈다. 이곳은 본선에 쇠사슬을 연결해 바짝 붙여놓은 금괴를 가득 실은 일반 상선 위였다.
영민한 녹색 눈이 옆으로 옮겨 갔다. 해적의 본선은 우두머리가 진두지휘 중이었다. 본선에선 화승총인 아쿼버스를 든 자들이 처형할 것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빅터는 그들이 총을 쓰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쏘기 애매하도록 최대한 해적과 온몸으로 엉겨 붙어 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빅터가 있는 상선에는 대머리 부관이 내려와서 감시의 눈을 빛내고 있었다. 주변에서 칼을 쥔 해적들이 잡담을 하며 떠들었다.
“피스톨 가게에 괜찮은 게 들어왔다며?”
“근데 정교하지가 않아. 좀 더 잘 빠진 것이 나와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무식한 손으로 잘빠진 거 잡아서 뭐 하게? 귀족 놈들에게나 어울리겠지.”
어쨌든 아직까지는 상황이 괜찮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던 빅터는 해적 부관의 허리춤에서 귀해 보이는 단검을 발견했다.
‘음?’
손잡이가 보석으로 치장된 것으로, 그냥 봐도 고가의 물건이었다. 그게 뭔지 눈여겨보던 중, 대머리 부관이 말했다.
“이제 밀린 이야기를 좀 해보지.”
부관은 베타였는데 우성 알파인 빅터와 체격이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체구였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단검을 빼어 든 부관이 손잡이로 빅터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마스크가 날아가고, 가발도 그 충격으로 조금 벗겨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빅터가 갑판 위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터진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빅터는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노려보는 빅터 앞에 허리를 숙인 대머리 부관이 비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스터스 경이 오지 않고 우리 시의원님이 오셨는지 말이야.”
빅터의 눈매가 길게 늘어졌다. 빅터는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어쩐지 쉽다 했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주위를 경계하고 대답도 건성이라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였다.
“오. 알고 있었어?”
빅터가 맞는 것을 본 용병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신생 해적들이 그들을 제압한 뒤였다. 작전의 지휘관 격인 빅터가 붙들린데다 워낙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다들 미처 반항도 못 하고 고스란히 당했다.
빅터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들켰다. 계획이 이토록 빨리 어긋날 줄은 몰랐다.
대머리 부관은 허리를 숙여 빅터의 머리칼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말해. 진짜 스터스 경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끝까지 빅터가 입을 다물자 대머리 부관은 빅터를 갑판으로 내던졌다. 신생 해적들이 몰려와 빅터의 머리를 갑판에 박게 하고 실크 아머를 벗겼다. 그러곤 팔과 발목을 튼튼한 밧줄로 묶었다.
팔이 뒤로 꺾인 채 완벽히 묶인 빅터가 머리를 굴렸다.
‘역시 너무 무리했나.’
하비 쪽에 몰아서 보낸 것이 독이었다. 이쪽에 해적들이 더 많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하비에게 더 보낸 것이다.
‘알고 나면 화내겠지.’
불같이 화를 낼, 아니, 차갑게 분노할 하비가 떠올라 입맛이 썼다. 그래도 이것이 마음 편했다. 하비가 다치거나 불의의 사고를 겪을까 봐 불안에 떠는 것보다 자신이 위험해지는 쪽이 훨씬 나았으니까.
빅터는 시간을 벌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다. 아직 인질을 구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조금 떨어진 이로비나 섬에서 특별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스터스 경이 아니란 걸.”
그때 우두머리 뒤에서 어떤 남자가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빅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많이 보던 얼굴이어서였다. 한쪽 눈에 까만 안대를 한 사내였다.
“내가 말했으니까. 베르텐 경.”
반시체로 저택에 누워만 있을 줄 알았던 남자. 반 로투스였다. 그러고 보니 슬루인 제국과 몰래 노예 사업까지 한다더니, 여기까지 진출한 모양이었다. 빅터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놀라운데. 경에게 이 정도의 의지란 게 있을 줄은 몰랐어.”
“나도 놀랐어. 하비인 줄 알았더니 베르텐 경이 왔을 줄은 몰랐거든.”
빅터는 서서히 뜨거운 분노가 들끓었다. 여기에 하비가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차갑게 눈을 가라앉히고 빅터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부터 대답 잘해야 할 거야. 하비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지?”
반 로투스는 비웃더니 웃음기를 싹 거두고는 비틀대면서도 앞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려고 했어.”
그가 대머리에게 화려한 단검을 건네받았다. 그러곤 쩔뚝거리며 다가와 빅터에게 던져 버렸다.
퍼억!
갑판 위로 칼날이 꽂혀 부르르 떨었다. 빅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서슬 퍼런 단검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 손잡이 끝에 슬루인 제국의 황실 문양이 있었다. 작은 태양 모양이었다. 제국이 뒤를 봐주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품이었다. 제국은 황실의 물건을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으니까.
빅터의 눈이 다시 반에게 돌아갔다. 반은 복수에 취한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경이 나에게 했던 그대로를 전부 돌려주려고 했지.”
“…….”
“손가락, 발가락을 몇 개씩 자르고, 살갗을 얇게 저며서 포를 뜨려고 했어. 눈알도 하나 뽑고 말이지. 아, 하나론 부족하겠어. 공평하게 두 쪽 다 뽑아야 하지 않겠나?”
반이 실성한 얼굴로 히죽 웃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영영 빛을 못 보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어. 죽지 않고 일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였는데.”
빅터는 하나하나 반이 하는 말을 새겨들었다. 빠짐없이, 모두 다 그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돌아가면 로투스가의 뿌리를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받은 건 배로 돌려줘야 직성에 풀렸다.
밧줄에 묶인 굵은 빅터의 팔뚝에 힘이 들어가더니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말했다. 그의 페로몬이 스멀스멀 갑판 전체로 뻗어 나갔다.
“하비를 봐서 살려줬더니. 뚫린 입으로 못 하는 말이 없군그래.”
비록 묶여 있어도 빅터가 여전히 무섭긴 한지 반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제 경이 그리될 거니 너무 화내지 마.”
반이 눈치를 주자 대머리가 슬쩍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도 알파인지라 우성 알파가 내뿜는 페로몬이 몹시 불편했다. 눈가를 찌푸린 채 묶인 빅터를 발로 걷어찼다. 가장 여린 배 안쪽을 노려서 찬 덕에 빅터가 헛숨을 내쉬었다.
“쿨럭!”
대머리 부관이 다시 한번 다리를 뒤로 물리고 거세게 걷어차려던 찰나, 빅터가 온몸에 힘을 줘서 갑판 위를 굴렀다. 그대로 대머리의 다리를 날려 버렸다.
콰앙!
대머리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자 빅터가 벌떡 일어나 꽂힌 단검 앞으로 다가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손이 칼날에 베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밧줄을 끊었다. 발목을 묶은 것도 금방 풀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황한 반이 신생 해적들에게 명했다.
“자, 잡아!”
빅터와 함께 온 용병들이 저항을 시작했고, 갑판 위는 싸움터가 되었다. 해적 본선에서도 칼을 든 해적들이 뛰어 내려와 난입했다.
난장판이 된 갑판 위를 헤치고 빅터는 도망가는 반 로투스를 먼저 붙들었다.
“이거 놔!”
빅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반의 옆구리를 찼다. 저항하던 반은 덜덜 떨며 금방 힘을 잃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빅터는 늘어진 반 로투스를 질질 끌고 금괴가 쌓인 곳까지 걸어갔다.
“넌 마지막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어.”
“이봐! 나를 구해!”
반이 발악하며 발버둥 쳤지만 다들 전투 중이라 바빠서 그를 구해줄 사람이 없었다. 빅터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단조롭게 말했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하비의 눈을 뭐 어쩐다고? 살갗을 저며서 포를 떠?”
빅터는 다가오던 해적의 칼을 피하면서 반을 방패로 삼았다.
“살려줘, 빨리 나를……! 크악!”
해적의 칼에 가슴을 찔린 반이 지독한 통증에 입을 뻐끔댔다. 멀리서 해적들의 외침이 건너왔다.
“저것들이……!”
“잡아!”
본선에서 보고 있던 해적들은 빅터의 예상대로였다. 동료가 다칠까 봐 화승총을 함부로 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 돈이 목적이 아니라, 이후 나라를 세울 심산이라 인력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쿠당탕!
그사이 빅터가 금괴가 쌓인 곳으로 순조롭게 와서 반을 집어 던졌다.
“오늘부로 그딴 생각 자체를 아예 못 하게 될 거야. 네 머리는 이제 하비의 이름조차 담지 못할 거다.”
빅터는 싸늘한 얼굴로 금괴 더미를 보았다. 저 속에 폭약을 담은 가짜 금괴가 쌓여 있다. 속을 비운 납 속에 성능 좋은 화약 가루를 가득 메운 것이다.
빅터가 용병 하나에게 눈짓을 해 갑판 아래 빈공간에 숨겨놓았던 붉은 깃발을 세우게 했다. 깃발이 서자 용병들이 일제히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이제 곧 암초 위에서 망원경으로 살피던 정찰병이 준비된 신호를 전달할 것이다.
빅터가 외쳤다.
“모두 지시한 대로!”
싸우던 용병들이 즉각 멈추었다. 다들 실크 아머를 벗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해적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일부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 정찰하는 자에게 소리쳐 묻기도 했다. 하지만 경황이 없어 차분히 상황을 알아볼 여유는 없었다.
조금 후에 천지를 흔들 만한 큰 대포 소리가 들렸다.
퍼엉-! 펑!
큰 암초 뒤에 숨겨 대기시켰던 갈레온선에서 곡선을 그리며 대포가 날아오고 있었다. 멀리 해적 본선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본선으로 돌아와! 응전한다!”
상황을 확인한 빅터는 그 역시 바다로 뛰어들려고 했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됐다. 언제 화약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었다.
하지만 빅터의 행동을 막는 자가 있었다. 누군가 빅터를 잡아 세웠다. 빅터가 돌아보기 전에 옆구리에 칼날이 박혔다.
푹!
다행히 빅터가 기민하게 피했기에 아주 깊게 찌르지는 못했다. 칼을 박은 자는 대머리였다.
“아직 나랑 이야기가 덜 끝났잖아.”
빅터는 대머리를 노려보며 찔린 칼날을 잡아 서서히 뽑았다. 통증이 몰려왔지만 이 악물고 참으며 다른 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은 대머리의 손을 덮었다.
빅터는 그대로 검 손잡이를 아래로 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대머리 부관이 당황했다.
“뭐, 뭐야.”
대머리와 힘 싸움이 벌어졌다. 이미 칼자국이 있던 빅터의 손바닥에 다시 피가 흘렀다.
조금씩 힘의 우세가 빅터에게로 기울고, 검끝이 대머리 부관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검 손잡이를 아래로 눌러 방향을 바꾼 것이다.
창백해진 얼굴로 빅터가 비웃었다.
“난 할 이야기 없어.”
빅터가 그대로 검을 완전히 뒤집더니 대머리의 복부를 깊게 찍었다.
“큿!”
대머리가 피를 흘리며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사이 빅터는 옆구리에 찬 검집까지 통째로 뽑았다. 찔렀던 부위에서 단검을 뽑자 대머리의 배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대머리 부관은 출혈 부위를 손으로 막으며 괴로워했다.
“크악!”
빅터는 검집으로 단검을 밀어 넣어 꽉 쥔 뒤,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로 뒤로 엄청난 포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퍼엉! 펑!
연쇄적으로 배가 터져 나갔다. 가짜 금괴에 있던 화약들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콰아앙!
바닷속으로도 진동이 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었다. 해수면이 크게 진동하고 물결이 거세게 파도쳤다. 바다 위로 큰 원을 그리며 폭발이 넓게 퍼져 나갔다.
콰앙-!
다시 한번 폭발음이 울렸다. 신생 해적의 본선도 바로 근처에 있었고 금괴를 실은 배와 쇠사슬로 연결해 놨기에 저 폭발에 휘말렸을 것이다.
몸속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피를 느끼며, 빅터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을 잃지 않으려 했다. 바닷물이 닿는 상처 부위가 격렬하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준비된 곳까지 헤엄쳐 가야 했다.
‘젠장…….’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평소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손에 쥔 단검에도 힘을 주었다.
이걸 들고 가면 하비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슬루인 제국이 신생 해적에게 돈을 주어 움직였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단검의 상세한 무늬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적단 두목이 이런 모양의 단검을 차고 다녔다는 것 자체는 목격자가 많았다. 이로비나 섬과의 거래에서 슬루인 제국을 명목상으로 제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뒤로 밀리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해류도 더 거센 것 같았다.
‘안 되는데…….’
빅터는 숨이 부족해져서 머리를 간신히 해면 위로 내밀어보았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멀리 왔다.
금괴를 실었던 배는 산산조각 나 있고, 배 파편과 해적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저 속에 반 로투스도 있을 것이다. 형체도 못 남기고 폭사했을지도 모르고. 비참한 최후였다.
해적단 본선도 피해를 크게 입은 채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그 뒤를 빅터가 동원한 갈레온선이 쫓는 중이었다.
빅터가 말한 대로 이 악물고 뿌리째 뽑으려 달리고 있었다. 다 잡으면 임금을 두 배로 주겠다는 말에 돈독이 오른 것이다. 빅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잘하고 있네.’
대포 소리가 요란할 정도로 서로 쏴대고 있는데 한눈에 봐도 신생 해적 쪽이 불리해 보였다. 구형 화포는 비거리도 짧고, 화력도 신형에 비해 약했다. 직선으로 쏘아지는 구형에 비해 신형은 곡사포로 멀리까지 갔다.
놈들은 얼마 안 가 빅터가 고용한 용병들에게 붙들릴 것이다. 아니면 그 전에 그대로 분해되어 바닷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아도 좋았다.
‘어?’
그때 빅터가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 멀리 갑판에 서서 망원경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누군가를 절실하게 찾고 있는 듯했다. 빅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눈치를 채고 바로 왔을 것이다. 돌아가면 잔소리를 크게 들을지도 모른다. 망원경으로 빅터를 발견한 건지 배가 움직였다.
힘들여 헤엄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려니, 어느덧 배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배가 거의 붙자 갑판 위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던 남자가 망원경을 떨어뜨렸다. 빅터를 발견하자마자 남자의 곁에 있던 벤이 얼른 사다리를 내렸다.
망원경을 떨어뜨린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빅터는 뭐라고 외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저 남자가 하비인 건 알겠는데, 그 외에는 다 불투명했다.
삐이이이---
빅터의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폭약이 터진 게 영향을 준 듯했다.
빅터는 하비가 무슨 말을 외치는지 알고 싶었다.
욕을 하고 있을까. 속였다고 화내고 있지는 않을까. 작전은 제대로 잘된 건가. 이곳까지 온 걸 보면 확실히 잘되었겠지.
하비 스터스, 그는 자신과 연계되면 참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준다. 지금은 몹시 분노한 상태다.
빅터는 왠지 멍했다. 바닷속도 따뜻하고, 이대로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하비의 목소리가 귀에 박혀들었다. 허공에 멈췄던 모든 소리가 일시에 귓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올라와. 당장!”
불안한 얼굴로 하비가 외치고 있었다.
“빅터!”
처음으로 불리는 이름이었다. 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준다면 좋을 텐데, 철없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을 스쳤다. 실제 들으니까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로 좋았다.
빅터를 살피던 하비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다친 건가? 피가…….”
그러고 보니 옆구리에 칼을 맞았다. 아직도 피가 바닷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러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안색이 달라진 하비가 겉옷을 훌훌 벗었다. 자신이 가겠다며 말리는 벤의 말도 듣지 않았다.
하비는 경고하듯이 빅터에게 말했다.
“기다려. 안 올라올 거면, 내가 갈 테니까.”
정말로 바다로 뛰어들 기세였다. 빅터는 어렴풋이 하비가 헤엄을 못 친다는 것을 떠올렸다.
“거기 있어. 헤엄도 못 치면서, 무슨.”
빅터가 머뭇거리던 자신을 비웃었다. 아직도 두려움이 남았던 걸지도 모른다.
하비가 정말 마음을 돌려준 걸까. 올라가면 다시 차가워지는 건 아닐까. 전날 밤, 그런 악몽을 실제로 꾸기도 했다. 선뜻 하비에게로 가기가 망설여졌던 이유였다.
그제야 빅터는 내려진 사다리를 잡고 천천히 올라갔다. 시체를 뜯어먹다 여기까지 쫓아온 상어가 아슬아슬하게 물러났다.
사다리 끝부분에 다 왔을 때 하비가 손을 내밀었다. 단단하고 다부진 손이었다. 빅터는 그 손을 잡고 올라섰다.
“다른 놈들은?”
말 없는 하비를 대신해 눈치 빠르게 벤이 대답했다.
“이미 다 건너왔습니다. 실종자가 두 명 있긴 하지만요.”
“계속 찾아봐. 못 찾으면 가족에게 약속한 보상금 지급해 주고.”
위험한 작전이라 빅터 쪽의 용병들에게는 두 배의 액수가 지급되기로 되어 있었다. 사망이나 실종 시 걸린 보상금도 컸다. 다행히 바로 한 사람이 더 귀환했고, 이후 나머지 한 사람만 실종 처리되었다.
벤이 응급치료가 가능한 자를 부른 덕분에 빅터는 그제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급히 알코올로 소독한 뒤 출혈 부위를 틀어막고 붕대를 감았다.
하비는 일련의 상황을 보며 자칫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빅터였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찔해졌다. 거기다 빅터의 입을 통해 급박했던 돌발 상황에 대해 들었을 때는 하비의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처음 들을 땐 하얗게 질렸다가 지금은 무섭도록 무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본 빅터는 하비의 눈치를 보았다. 그를 속이고 무모한 작전을 진행했다. 당연히 화가 날 만했다. 주변 사람들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하비에게서 희미한 분노가 느껴져서였다.
빅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 이야기를 했다간 저것보다 더했겠지.’
빅터는 반 로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말했다. 하비가 알면 어떤 심정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후 로투스가에서도 반의 행적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적당히 사고사 처리를 할 것이다. 이제 반의 이름이 하비에게 흘러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치료를 받던 빅터가 침묵을 깨고 한 팔을 불쑥 올렸다. 하비에게 잊지 말고 제일 먼저 이야기해 주려고 했다. 중요한 증거품이 될 단검을 내밀었다. 조금 머리가 어질거리고 시야가 흐릿했지만 아직 견딜 만했다.
“이건 슬루인 제국이 해적에 관여했다는 증거야. 본국에 가지고 돌아가면 유용할 거다.”
하비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물끄러미 빅터를 보았다.
극악한 환경에서 헤엄쳐 오면서도 이것만은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단검의 문양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 칼날을 맨손으로 쥐기라도 한 건지 다른 손에서는 붉은 피가 철철 흘렀다.
하비는 눈시울이 시큰거리고 가슴속이 울컥 달아올랐다.
이곳까지 오면서 얼마나 지옥이었는지 모른다. 온갖 불길한 상상이 실체인 것처럼 덮쳐와서 내내 불안에 떨었다. 빅터가 미처 뛰어내리지 못해 폭발에 휘말리거나, 잘못되어 해적에게 당하는 장면들이 시시때때로 떠올랐다.
그런데 피를 흘리면서도 먼저 내미는 게 자신에게 유용할 증거품이라니.
내내 하비는 가슴이 꽉 차다 못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이 무식하리만큼 직진밖에 모르는 남자는 태평하게 이런 것이나 내밀고 있다.
하비는 눈을 일그러뜨리더니 간신히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넌 왜 그렇게 항상 제멋대로야.”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적재적소에 필요한 손을 내밀었다.
‘밖으로 나갈래? 여긴 너무 숨 막혀. 파티도 재미없고.’
햇빛에 그을린, 상처투성이인 작은 손이 예전처럼 자신을 향해 곧게 뻗어지고 있었다. 작은 나뭇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덧 깊게 뿌리 내린 거대한 나무의 것처럼 굵고 단단해졌다.
그 손 위로, 피와 바닷물에 푹 절어서도 본연의 기세와 열정은 죽지 않는 소년 같은 눈은 여전했다.
빅터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적에게는 끝없이 잔인한 녹색 눈이 길게 웃었다. 따스함이 가득했다.
“받으라니까.”
하비는 빅터가 목숨 걸고 가져온 증거품을 천천히 받았다. 작게 새겨진 제국의 문양을 본 하비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쌓였던 분노가 어이없도록 쉽게 흩어졌다.
“내가 얼마나…….”
알프레드에게 가짜 금괴 안에 든 것이 화약이라는 걸 듣고는 더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사전에 말하지 않았을 것임도 알았다.
마음 같아선 속인 것에 대해서 따져들거나 화내고 싶었는데, 그럴 마음조차 사라졌다. 빅터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하비는 선전포고를 했다.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하지.”
빅터가 피식 웃었다.
“너와 하는 이야기라면 기꺼이.”
* * *
항구에 도착한 뒤, 벤은 커피하우스에 가서 이것저것 보고하고 할 일을 해야겠다며 먼저 사라졌다.
빅터는 벤에게 로투스가에 관해 모조리 알아내라고 따로 지시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전면전을 할 생각이었다.
당장은 느긋하게 하비와 시간을 즐길 생각이었는데, 할 이야기가 있다던 하비가 다른 일정을 입에 올렸다.
“난 정직 처리를 해야 해서. 외교부에 다녀와야 해.”
빅터가 눈매를 찌푸렸다. 고집스러운 건 여전하다.
“꼭 그만둬야겠어?”
“약속했으니까.”
“누구와? 네가 하지도 않은 일로 널 비난하고 욕보였던 사람들?”
예상했던 빅터의 싸늘한 반응에 하비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경도 마찬가지였잖아.”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알았어.”
결국 빅터는 한숨을 내쉬며 하비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구출해 온 억류된 외교관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외교부에 보고도 해야 했다. 아직 하비가 할 일이 많았다.
“그 전에 잠깐 저택에 들러서 가져올 것도 있고.”
하비는 생각하다가 미소 지었다. 드디어 돌려주는구나. 온전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당시 빅터의 억눌린 목소리가 지금도 뇌리에 선명했다.
‘이건 두고 간다. 나중에 돌려줘. 줄 생각이 생기면 그때.’
하비는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부단히 애쓰던, 그럼에도 뭔가 서투르던 빅터의 지난 행동들이 떠올랐다. 입은 자신을 증오하라느니, 싫어해도 된다느니 했지만 눈을 보면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실어 보냈던 것도 생생했다.
빅터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게 서투르고 어설펐다. 사람들 앞에서 군림하며 적을 혓바닥 위로 올려 가지고 노는 것도 곧잘 했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선 풋풋한 모습마저 보이곤 했다. 어설픈 질투까지 포함해서.
하비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빅터는 하비를 스터스가 저택까지 마차로 데려다주었다. 배웅 나온 집사와 들어가려던 하비를 빅터가 아쉬운 얼굴로 슬쩍 붙들었다.
“아까 나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저택으로 들어가던 하비가 멈칫하더니 뒤돌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있지. 다녀와서 해.”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저 표정을 보니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빅터는 일말의 기대감마저 생겼다.
그런데 하비를 보내고 났더니 밀렸던 통증이 몰려왔다. 하비와 함께 있을 때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들떠서 상처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윽…….”
날카로운 칼날을 맨손으로 쥐느라 또다시 생긴 상처가 욱신거렸다.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반복된 일이라 다 낫기도 전에 손바닥이 갈라졌다.
‘그나마 두 번 다 왼손이라 다행인가.’
단검으로 찔렸던 옆구리도 터진 건지 출혈이 생겼다. 빅터는 너덜거리는 몸을 이끌고 간신히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돌아가자마자 낯선 풍광이 보였다. 빅터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저택 앞에 서 있었다. 게다가 왕실의 것으로 보이는 짐마차 뒤로 왕실 군대가 바삐 움직였다.
마차에서 급히 내린 빅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구르는 사용인들을 먼저 보았다. 그들은 병사들을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왕실 근위대가 여긴 왜……?’
현 국왕의 근위대였다. 빅터가 빠르게 눈을 굴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책임자를 찾아냈다. 저쪽에서 지시하고 있는 부대장이 보였다. 병사들이 왔다 갔다 하며 값나가 보이는 물건들을 빼내 거대한 짐마차에 실었다.
빅터는 그에게 다가가 상황을 물었다.
“무슨 일이지?”
“베르텐 경이십니까.”
바로 알아본 부대장이 주먹을 가슴에 대고 간단한 예를 취한 뒤, 국왕의 전언을 전달했다.
“국왕 폐하의 명입니다. 오늘부로 베르텐 경의 의원직을 박탈하고, 전 재산을 압류합니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간 그가 이곳에서 해온 것들이 얼마며, 바친 것들이 얼마나 되고, 심어놓은 새로운 문물이 수십 개인데.
빅터는 노기를 참지 않고 드러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그의 분노를 타고 공기를 매섭게 찢었다.
“이유는? 아무리 폐하라도 내게 이럴 권리가 없을 텐데.”
근처에 있던 병사 중 일부가 신음하며 허리를 굽혔다. 물건을 놓치는 경우도 생겼다.
부대장은 베타였기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언제 대해도 빅터 특유의 위압감이나 살기는 힘들었다.
전장에서 구른 그조차도 이럴진대, 펜대나 잡던 문인들은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빅터의 위압감에 대해 이야기가 떠도는 이유를, 그도 이제야 알았다.
‘해적이라…….’
부대장이 허리를 펴고 이어 말했다.
“경의 소유로 된 상단이 해적질로 쌓아 올린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무고한 시민의 피로 질서를 어지럽히고, 생명을 빼앗은 돈으로 부를 쌓은 경의 행위를 부당하다 여기셨습니다. 이제 질서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 경의 재산을 왕실 국고로 압류하는 바…….”
빅터는 화난 목소리로 부대장의 말허리를 단숨에 끊었다.
“개소리하고 있네. 질서? 뭘 다시 바로 잡아? 그냥 내 것이 탐나서 그렇다고 해.”
“베르텐 경! 국왕 폐하를 모독하는 겁니까?”
국왕인 이나시우스 2세는 탐욕이 많은 자였다.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해상 무역으로 부를 얻은 빅터 같은 신흥 귀족에게 손을 내민 것도 같은 이치였다.
최근 전쟁에서 패해 막심한 손해를 입었던 차에 보기 좋은 먹잇감이 걸린 것이다.
빅터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어르고 달래는 것도 귀찮았는데, 마침 좋은 기회겠다 싶었겠지.”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경의 마음은 이해하니 소정의 폭언은 못 들은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빅터는 냉소했다.
“배려, 아주 고맙군그래.”
“이왕 베푸는 김에 조금 더 베풀겠습니다. 폐하의 은총이라 생각하십시오. 저택도 원래는 바로 압류지만, 10일 정도 여유를 드릴 테니까.”
“하. 그사이 다른 살 곳을 알아보라?”
“드릴 수 있는 기한은 그 정도뿐입니다.”
빅터가 확신하는 말투로 물었다.
“로투스가의 가주, 그 다 죽어가던 놈이 찌른 거지?”
침묵하던 부대장이 곧 딱 잘라 말했다.
“제보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빅터는 잠시의 머뭇거림을 보았고, 로투스가의 가주가 배후에 있음을 확신했다.
로투스가의 가주는 가문의 비리를 밝히는 자리에서 국왕에게 역으로 제안했을 것이다. 국왕의 욕심을 꿰뚫고, 그에게 빅터의 재산을 전부 가질 수 있다고 꾀었을 테다. 노련한 수완가의 발상이었다. 여기까지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빅터가 낮게 이를 갈았다.
“죽기 전에 발악을 했군. 나름 효과적이었어.”
부대장이 빅터의 눈을 회피하더니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럼.”
그때 나스타와 레나, 진이 빅터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다들 사색이었다.
“주인님!”
“어떡해요. 왕실 근위대가 와서…….”
“다 가져가는데, 이걸 어떡하죠? 저택도 압류한다고 합니다.”
아직 생각이 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빅터는 안절부절못하는 사용인들에게 되도록 차분하게 말했다.
“다 들었어. 호들갑 떨지 마.”
그때였다. 어디선가 갈색 말을 몰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빅터도 언젠가 본가에서 본 적이 있는 사용인이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그 남자가 빅터를 찾아다녔다.
“베르텐 경 있습니까!”
빅터가 그를 불러세웠다. 이 시점에 왜 본가에서 사람이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있어. 난 왜 찾아.”
“가주님이 직접 내리신 서지입니다. 받아보시죠.”
베르텐가의 가주는 현재 다른 지방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빅터는 정확히 언제 돌아온다는 언질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당황한 빅터가 가문의 독수리 문양이 박힌 서지와 가져온 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 영감이? 언제 돌아왔어?”
빅터의 불경한 발언은 익숙한 듯 사용인은 조금 미간을 찌푸린 것 말고는 비교적 담담하게 대답했다. 현 베르텐가의 가주는 실력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빅터의 가벼운 말투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으니까.
“어제 도착하셨습니다.”
“왜 나한테 미리 연락을……. 뭐야, 이건.”
서지를 읽는 빅터의 눈이 서서히 커지다가,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일그러졌다. 빅터 베르텐의 가주 대리 자리를 다른 자가 대신한다는 서지였다. 빅터의 등 뒤로 여전히 병사들이 물건을 가지고 저택을 드나들었다.
황당한 얼굴로 서지를 읽은 빅터가 그 서지를 구겨서 휙 내버렸다. 가주의 서지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보고도 못 본 척, 본가의 서지를 전달한 사용인이 빅터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런 소식으로 찾아뵙게 되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마지막 인사 올리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베르텐 본가에서 온 사용인은 그대로 말을 휙 타고 떠나 버렸다.
분위기가 더 싸늘하게 식었다. 국왕의 명에 이어 베르텐 본가에서의 서지라니. 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 뭔데 그래요?”
레나는 빅터가 버린 서지를 주워서 펼쳐 들었다. 앞부분은 눈으로 읽다가 뒷부분은 부들부들 떨며 소리 내어 읽었다.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해적을 이용해 거짓된 부를 쌓은 일에 큰 실망을 느꼈다. 베르텐가의 명성에도 치명적인 해를 끼친 빅터 베르텐을, 오늘부터 베르텐가에서…… 제한다?”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숨소리조차 멎고 조용해졌다. 어느새 레나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다.
“다들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주인님을! 그동안 얼마나 모두를 위해 일하셨는데……!”
빅터의 숨은 의도가 어떠했든, 그가 뼈 빠지게 일한 건 사실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과도한 업무를 처리하고, 대리 가주 노릇도 착실히 해왔다.
이번에도 빅터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다. 버린 사람 치는 모양새였다.
여기에도 로투스가가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빅터가 베르텐가의 정식 가주가 되면, 회생의 기회조차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테니까.
사용인들이 망연자실하게 주인인 빅터의 입만 쳐다보았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빅터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생각 정리를 끝냈기 때문이었다.
“뭘 어떡해. 얼른 들어가서 병사들 모르게 물건 챙겨 나와.”
“예?!”
국왕이 상단까지 앗아 간다 명했지만, 이미 그건 알프레드의 소유였다. 알프레드는 타국인이었으므로 빼앗아 갈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저택과 곳곳에 사둔 사유지들, 본국의 은행에 저축해 둔 금인데, 그건 어쩔 수 없이 저 욕심 많은 국왕에게 넘겨야 할 판이다.
‘다른 나라 은행에 넣어둔 것이 있는 게 다행인 건가.’
그것까지는 추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빅터의 어두운 돈이 존재했다. 암시장에서 융통되는 자금을 따로 빼돌려 두었다. 그 자금이 상당한 수준이라, 사실 이 정도면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는 있다. 사업 물건만 제대로 있다면 말이다.
빅터는 이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아진 사용인들에게 미소 지었다.
“너희라면 좋은 게 어디 있는지 위치도 잘 알 테고.”
“네?”
“그게 무슨…….”
빅터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몹시 홀가분해 보였다. 그가 붕대 감은 손으로 더블릿을 탈탈 털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동안 내 밑에서 고생 많았다. 이렇게 된 건 재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더 고생할 필요 없어.”
하비의 일에 완전히 몰두하느라 더 큰 그림을 못 봤다. 그사이 그의 적은 남은 힘을 끌어모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복수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빅터의 실책이었다.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게 이곳의 생리였다. 알고 있었는데, 대처를 못 했다. 그의 시선이 한동안 한곳에만 머물러 미리 막을 수 있는 작은 신호를 놓쳤다.
빅터의 사용인들이 울상이 되어 빅터를 보았다.
“주인님…….”
“각자 갈 길 가고, 이번 달 치 봉급은 챙겨 갈 저택의 물건으로 대신하지.”
다들 무슨 의미인지 금방 와닿지 않아 멍청한 표정이었다가 울컥했다. 나스타, 레나, 진, 다른 사용인들이 앞다투어 따져들었다.
“우리가 가긴 어딜 가!”
“끝까지 같이 갈 거라고요.”
“괜찮은 자리에 있는 적당한 주택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옮기시죠.”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될 겁니다.”
여기저기서 결연한 말들이 나왔지만, 빅터는 어두운 얼굴로 피식 웃기만 했다. 그 마음들이 고맙기도 했지만, 이토록 따르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감이 들어서였다.
그토록 스터스가를 지키려 들었던 하비의 마음이 이제 와서 조금, 이해되었다.
사랑에 눈멀어 별러왔던 복수를 미뤘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봐오고 걸어온 세계는 언제나 잔인했다. 방심하면 등 뒤로 거침없이 칼을 찔러왔다. 그런 세계인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양지에 드러난 것들은 국왕의 수중으로 모두 들어갔다. 아직 음지에 남은 돈이 많긴 하지만, 실패는 실패였다. 이건 빅터의 가장 큰 실책으로 기록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다지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패했다는 충격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다만 아쉬운 건 있었다.
‘이제 좀 제대로 잘해주고 싶었는데.’
가진 사유지를 돌면서 여행도 다니고, 아픈 것도 다 낫게 해주고 싶었다.
빅터가 허탈하게 웃었다. 너무 웃겼다.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었다.
참으로 더러운 세상이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쓸데없이 공평하기까지 했다. 가져가도 좋은데, 그게 왜 하필 지금이냔 말이다.
빅터는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레나가 걱정스럽게 다가섰다가 차마 빅터를 붙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주인님…….”
빅터는 미친 사람처럼 끅끅대며 웃었다. 그 웃음에 광기마저 보였다.
언젠가 임페르 해적선 안에서 어린 빅터는 보이지 않는 신과 내기를 했다. 어차피 아무리 빌어도 신의 가호 같은 것은 없었다. 하비가 보낸 편지에서 신을 찾았지만, 그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내기라도 해야 했다. 들어줄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지만, 이런 실없는 것이라도 걸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기의 내용은 이랬다. 만약 자신이 끝까지 살아남아 하비를 만난다면 당신이 한 번 이긴 것이라고. 그 뒤로 하비에 대한 복수가 성공하고, 자신을 버린 것들을 차례차례 쓸어버리면 자신이 이긴 것이라 선포했다.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빅터가 욕지기를 뱉었다.
“하. 이번엔 완전히 졌네. 빌어먹을 놈.”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는 그의 눈을 가려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가려 사랑하는 이를 괴롭게 했다. 겨우 만회할 기회가 오자, 이번엔 그가 쌓은 황금을 상당수 허공에 날려 버렸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손과 발을 잘라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비에 대한 복수는 반도 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를 더욱 지옥으로 이끌었으며, 결국 이 꼴이 되었다. 그 어리석음은 빅터에게 더한 상처만 남겼다.
터져 나오던 빅터의 웃음이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하비를 힘들게 했던 벌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건지도.’
그리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 편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달게 받아들여야지.
빅터는 머리를 흔들어 달려드는 잡다한 생각들을 날려 보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외국의 은행에 있는 돈은 가져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음지의 돈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적당히, 잘 빼내야 했다. 한꺼번에 꺼내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까. 국왕에게 자산을 거의 차압당했는데 평소처럼 돈을 쓰고 다니면 모양새가 이상해졌다.
하비는 자신이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빅터는 하비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었다.
떳떳한 양지의 돈이 많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하비를 위해서 멀리서 데려온 저명한 의사들을 유지하고, 비싼 약값을 댈 수 있다. 그러려면 빨리 새로운 사업으로 자리 잡는 것이 중요했다. 의심 많은 국왕에게 책잡힐 위험성은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당분간은 몸 사려야겠군.’
빅터는 자신이 지금 하는 모든 노력이 스터스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짧은 수명의 숙명을 피하고, 하비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이라 보고 있었다. 실제로 매우 효과가 있었다. 당장 하비를 괴롭게 하던 위통도 거의 사라지지 않았는가.
‘어떻게 해야…….’
빅터의 정신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머릿속에서 어지러운 상념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한 가지 생각만 하기 힘들었다.
그런 빅터를 스쳐 지나가며 왕실 병사들이 저들끼리 잡담을 했다. 이번 신상 머스킷이 어떻다는 둥, 누군가가 관리를 잘 못 해 화약고가 터졌다는 둥, 무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도 모르게 가만히 듣고 있던 빅터는 눈을 빛냈다. 평소에도 사람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어두는 것은 어릴 때부터 습관이었다. 소탕한 신생 해적들이 하던 대화가 번뜩 떠올랐다.
‘피스톨 가게에 괜찮은 게 들어왔다며?’
‘근데 정교하지가 않아. 좀 더 잘 빠진 것이 나와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무식한 손으로 잘빠진 거 잡아서 뭐 하게? 귀족 놈들에게나 어울리겠지.’
어떤 아이디어가 빅터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밑그림 그려졌다.
‘혹시 그것이라면.’
심호흡을 크게 한 빅터는 천천히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 가세요?!”
“주인님!”
빅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섬뜩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너흰 따라오지 마.”
빅터는 저택에 들어가더니 권총 한 자루를 들고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 * *
타악!
하비의 손에 쥐여 있던 펜이 힘없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뭐? 베르텐 경이?”
외교부에서 잔업을 처리하고, 인질 구출 건과 관련한 보고서를 쓰고 있던 하비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예! 국왕 폐하로부터 시의원 박탈에, 전 재산 압류에, 저택까지 넘어가게 생겼답니다!”
“거기다 베르텐가로부터도 버림받았고요. 가엾은 분…….”
빅터가 인질 구출을 위해 애쓴 것을 알고 있는 외교부 직원들은 하나같이 안됐다며 혀를 찼다.
하비는 본능적으로 휙 고개를 돌려 빅터가 있을 방향을 보았다. 유리창 너머에는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새들만 보였다. 하늘이 붉게 저물고 있었다.
하비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이 처분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 뭔가 불의가 개입되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불의 말이다.
빅터가 그간 얼마나 악을 쓰며 쌓아 올린 견고한 황금성이었는데. 온갖 울분을 이겨내고 복수심 하나에 매달려 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했던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거기다 가문에서 퇴출이라니. 이게 무슨…….’
하비가 털썩 주저앉으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하비와 빅터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외교부 직원들이 눈치를 보았다.
“안 가보세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하비가 쓰다 만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다시 앉은 하비가 펜대를 쥐었다.
“……할 일이 아직 남았잖아.”
하비는 입술을 꾹 물고 더욱 집중하려 했다. 빨리 끝내야겠다. 그런데 마음을 다잡으려 할수록 빅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걱정이 되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외교부 직원들이 두 팔을 걷고 나섰다.
“이럴 때가 아니시잖아요! 얼른 가보세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 정도는 믿어주실 수 있잖아요. 어서요!”
고민하던 하비는 굳은 얼굴로 외교관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럼 이번만 맡길 테니, 고생해. 고맙다.”
“맡겨만 주십시오!”
“베르텐 경은 우리 외교부의 은인이신걸요.”
“빨리 가시죠!”
외교관들의 응원을 받으며 하비가 외교부 건물 밖으로 말을 타고 뛰쳐나왔다.
곧장 빅터의 사유 저택으로 갔지만 참담하고 황량했다. 북적대던 저택은 생기가 하나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 많던 사병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문지기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가 하비를 저택 응접실로 안내했다.
몇몇 사용인과 함께 앉아 있던 레나가 하비를 발견하고 일어났다.
“스터스 경! 오셨어요?”
레나는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였다. 당연했다. 하비는 입술을 깨물고 불안을 삼켰다.
“괜찮나? 어떻게 된 거지? 베르텐 경은? 남은 치료는 제대로 한 건가?”
평소의 하비답지 않게 급한 듯 빠른 말투였다. 이제 베르텐 경이 아니지만, 하비는 아직 귀족의 경어를 붙였다.
그때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익숙한 얼굴이 응접실로 등장했다. 하비의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을 때 내내 스터스가에 머물렀던 의사였다. 의사는 손을 탈탈 털며 혀를 내둘렀다.
“그분은 제가 급한 대로 손봐 드리고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체력 좋으신 건 여전하시더군요.”
그제야 정신 차리고 둘러보니 다른 익숙한 사용인들이 여럿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레나가 하비의 눈치를 살폈다. 빅터가 입단속을 시킨 모양이었다.
“그게…… 저…….”
“나한텐 말해도 괜찮아.”
하비가 타이르자 머뭇대던 레나가 이실직고했다.
“주인님이 총 한 자루만 가지고 방에 틀어박히셔서, 다들 걱정하고 있던 차였어요.”
“……총을 가지고?”
하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걸로 뭘 하려는지 몰라도 좋은 의도 같지는 않았다. 대체 무얼 하려고 권총을 가져간 것인지.
또 레나가 울 것 같은 얼굴이라 하비는 우선 그를 다독였다.
“내가 가볼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있어.”
하비는 값어치 나가는 가구나 물품들이 다 빠지고 텅텅 빈 빅터의 저택 안을 불안한 마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빅터가 주로 업무를 보는 개인 집무실 문 앞에 서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직 총소리는 안 났어.’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하비는 자신을 안심시킨 뒤 노크를 했다. 그러자 평소보다 날이 선 빅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말랬잖아.”
“나야.”
방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갈까 고민하던 차, 빅터가 방 안에서 말했다.
“들어와.”
하비가 서둘러 들어가자 레나의 말대로 총을 쥔 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빅터가 바로 보였다. 그는 개인 집무실의 책상 근처에 있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 손은 붕대를 감고 있고, 벗은 상체에는 옆구리에서 어깨까지 이어지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빅터는 무덤덤한 얼굴로 하비를 잠깐 쳐다보더니 다시 권총을 살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여기까진 왜? 바쁜 거 아니었어?”
막상 얼굴을 보니 하비는 머리가 백지가 되었다.
“소식 들었어.”
어떻게 말해야 위로가 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갑자기 하루 만에 모든 걸 다 잃은 사람에게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혼돈뿐인 머릿속을 뒤져 간신히 꺼낸 말이 고작 이것이었다.
“……괜찮나?”
빅터가 총을 쥐고 살피면서 하비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글쎄, 괜찮은 건가? 잘 모르겠어.”
그러곤 흘끔 하비 쪽을 본 빅터가 총을 잠시 내려두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빅터는 진지한 얼굴로 하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빅터의 드넓게 펼쳐진 단단한 맨어깨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근육으로 빠짐없이 둘러싸인 복부도 마찬가지였다. 붕대가 감긴 곳 외에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상처투성이 육체보다 눈빛이 더 아파 보였다. 빅터가 눈가를 길게 찡그렸다.
“넌 나 때문에 다 잃었는데, 나만 다 쥐고 있는 건 불공평하잖아?”
빈 웃음을 지으며 빅터가 놓았던 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마치 방아쇠를 당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본 하비가 달려들어 아예 총을 잡아채려 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빅터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다 뒤로 넘어갔다.
출렁!
하비는 빅터를 몸으로 짓누르고는 총을 들고 있는 그의 팔목을 꽉 붙들고 놓지 않았다. 손에서 권총을 잡아 빼내려고 노력하면서 하비가 절실하게 말했다.
“이러지 마.”
“뭘?”
빅터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비를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하비는 완력으로 총을 빅터의 손에서 완전히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예 권총을 손이 닿지 않도록 멀리 던져 치워두었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를 지켜보던 빅터가 뭔가 깨달은 듯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내게 남은 게 없는데 무슨 의미로 살라는 거지? 더 살고 싶지도 않아.”
잠깐 생각하던 하비가 간결하게 답했다.
“복수해야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빅터였다.
“어?”
“네 가문은 두 번이나 널 버렸어. 국왕 폐하도 마찬가지지.”
“…….”
“끝까지 살아남아서 잘되는 게 가문에 대한, 국왕 폐하에 대한 복수야. 알겠나?”
멍하게 하비를 올려다보던 빅터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난 이제 복수라면 지긋지긋한 사람인데.”
이제 그런 것으로는 자신을 살게 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빅터가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권총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공평하려면 역시 내가 없어지는 게…….”
하비는 다시 빅터의 팔을 잡아 눌렀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다른 것을 생각했다.
빅터를 이 세상에 붙들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뭘까. 문득 좋은 생각이 스쳤다. 정신적으로 몰리다 보니 하비는 평소라면 절대 제정신으로 못할 행동과 말을 생각해 냈다.
하비는 빅터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빅터가 놀란 눈으로 하비가 꺼내 든 것을 보았다. 자신의 눈 색을 닮았다던 영롱한 녹색빛을 내는 브로치였다. 하비가 아직 빅터를 완전히 믿지 못하던 와중에도 무의식중에 사버린 그 물건이었다.
하비가 직접 훈장처럼 브로치를 빅터의 가슴에 대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있잖아.”
하비는 서툰 몸짓으로 빅터의 심장에 브로치를 박아 넣을 것처럼 꾸욱 눌렀다. 빅터가 죽을 힘을 다해 꽉 쥐고 왔던 제국의 증거품이 그의 손바닥에 새겨졌듯이, 브로치의 흔적이 맨살에 닿아 자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비가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상상도 못 한 입술이 고스란히 부대끼자, 빅터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건 예상도 못 한 전개였다.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혀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제대로 된 것이었다. 빅터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고, 그 사이로 하비의 것이 더욱 거칠게 난입했다.
뒤늦게 정신 차린 빅터가 적극적으로 반응하려 했지만 하비의 입술은 이미 떠난 뒤였다.
저지른 짓에 대한 감정 때문에 하비의 눈과 입술이 조금 붉어졌다. 열기가 오른 얼굴로 하비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좀 지겨울 수도 있지만.”
하비가 각오가 가득한 얼굴을 하곤 빅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뜨거운 숨이 닿았다.
“안 지겹게 해줄 테니까.”
붕대 감긴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빅터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너무 벅차서 말도 안 나온다는 표현이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일 테다. 지나치게 행복해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뭐야. 지금 그걸 유혹이라고 하는 건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빅터는 계속 바보 같은 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빅터가 눈을 덮었던 손을 치우고는 여전히 걱정과 염려를 가득 담은 밤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어설픈 유혹에도 넘어가는 나도 나지만…….’
하비의 턱을 끌어당기면서 빅터가 옅게 미소 지었다.
“다 얻은 것 같네. 고마워.”
그럼에도 하비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이제 오해를 풀어줄 시간이었다. 빅터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쩌나.”
결국 빅터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난 절대 죽을 생각 없거든.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
어리둥절해하는 순진한 밤색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간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뭘 오해한 거야. 총으로 내 머리라도 쏠 줄 알았나? 안에 화약도 없어.”
아니었던 건가. 멍하니 있던 하비가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로 항변했다.
“다들 걱정하고 있길래.”
“하여간 다들 걱정만 많아서. 아, 벤의 걱정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군. 로투스 가주가 이상하다고 미리 언질을 줬는데.”
충만하게 웃고 있는 녹빛의 눈을 마주 보며 하비가 말했다.
“걱정 많이 했어.”
“내 사용인들은 항상 걱정이 많…….”
“아니, 내가.”
단호하게 말한 하비가 빅터의 가슴에 얼굴을 내렸다. 의사가 감아준 새 붕대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걱정했다고.”
의사 말론 피가 나든지 말든지 바닷물을 뒤집어쓴 게 찜찜하다는 이유로 오자마자 씻고 봤다는 빅터였다. 상처 부위를 피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겠다고 했는데 바로 거절하며 그대로 샤워실로 직행했다고 했다.
‘하비가 해주는 거라면 모를까.’
빅터의 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며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것이 생각나 하비가 피식 웃었다. 하긴, 곧 죽으려는 자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죽을 생각을 하는 줄 알고 정말 놀랐다.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이 남자가 사라진 인생은, 생각만으로도 허전하고 끔찍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겠지. 잠시나마 함께했던 좋은 기억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기분 탓인지 체온이 올라가는 듯했다. 오랜만에 살갗이 닿아서인지 몸이 닿은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묘한 기운이 맴돌았다.
차마 얼굴을 들 용기가 안 났지만, 하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빅터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정말로 궁금한 게 아니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혹시 할 이야기라는 게 이런 거였나?”
하비가 귀를 붉혔다. 방금 저지른 짓이 새삼 다시 떠올라 점점 목까지 선명하게 물들었다.
“시끄러워.”
“좋아서 하는 소린데.”
하비가 올라탄 자세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빅터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근데 환자한테 이래도 돼?”
“그 몸으로 먼 거리를 헤엄쳐서 온 사람이 할 소린 아니군.”
하비는 꽤 냉소적으로 사실을 꼬집었다. 빅터가 멋대로 위험한 짓을 한 것이 생각나자 슬쩍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정말 걱정된 건지 내려가려 하자, 빅터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농담이었어.”
굳은 얼굴로 하비가 말했다.
“난 진심이야.”
빅터가 입을 다물었다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넌 언제나 그랬지.”
빅터는 정말 내려가려는 하비를 다시 끌어당겨 올렸다. 심장 부근에 눌렀던 브로치가 덜컥대며 굴러떨어졌다. 얼른 잡아 손에 쥔 빅터가 하비를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 이름 다시 불러줄 수 있어?”
멈칫하던 하비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성을 뺀 온전한 이름을 말했다. 여러 번, 확실히 들으라는 듯이.
빅터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죽음이 가까워질 때마다 필사적으로 버텼던 것들이, 맹독으로 이겨냈던 혹독한 나날들이 다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
어릴 때 당돌하게 신에게 내건 내기에서는 비록 졌지만, 결론적으로는 별로 손해 본 것이 없는 장사였다.
빅터가 하비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높은 코가 거슬리지 않게 부딪치고, 언제 닿아도 기분 좋은 입술에 다시 한번 제 입술을 깊게 파묻었다.
깨고 나면 흩어지는 꿈 같은 것이 아니면 좋겠다. 빅터는 왠지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잠겼다.
“사랑해.”
몇 번이고 허공에 메아리쳤던 그 말이, 돌아돌아 제 주인에게 돌아갔다. 하비가 선선히 미소 지었다. 그의 마음에도 안정적인 순풍이 불었다. 상황을 오해해 저지른 조금 전의 부끄러운 일만 아니라면 말이다.
“……알고 있어.”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되살아난 하비의 웃음이 대신 대답했다.
빅터는 하비를 끌어안고 하얗지만 단단한 목덜미에 입 맞추며 안도했다. 끝없어 보이던 지옥 속에서도 포기 않고 지금껏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빈 곳이 이제야 빈틈없이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비가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총은 왜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지?”
이번엔 빅터가 몸을 굴려 하비를 아래로 깔았다. 양팔로 침대를 짚어 상체를 지탱하고는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복수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눈앞에 있는 남자를 위해서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눈에 흥분을 가득 담은 채 빅터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지금은 좀 급해져서.”
하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하비의 단단한 양팔이 빅터의 상처 가득한 맨 등에 감겨 빅터를 끌어당겼다.
하비의 희미한 알파 페로몬이 살 내음과 섞여 저릿저릿한 자극을 주었다. 여전히 시원하고 기분 좋은 페로몬이었다. 빅터는 하비의 풀어진 더블릿 사이로 손을 넣으며 예민한 귓불을 물었다. 움찔거리는 작은 반응조차 자극적이었다.
문득 하비가 동그란 흔적이 남은 빅터의 탄탄한 가슴에 입 맞추며 말했다.
“나도 그래.”
“응?”
처음으로 뱉는 고백이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하비는 처음으로, 밝고 환한 웃음을 보였다. 늘 짐처럼 얹혀 있던 것들이 모조리 사라진 듯한, 홀가분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