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별이 내리는 언덕(3권) (8/18)

제8장 별이 내리는 언덕

조금은 맥없이 움켜쥐었던 멱살이 풀어지면서 빅터의 브로치가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타닥!

하비는 소리가 나도 그쪽을 보지 않았지만 빅터는 그 소리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등줄기에 한기가 들었다.

‘이건 위험해.’

하비는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끔찍한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계속 자신을 파괴하는 중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 특유의 진한 절망이 하비에게서 느껴졌다. 하비의 정갈하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어스름한 체념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입고 있는 하얀 튜닉의 흰빛 때문인지 더욱 창백하고 섬뜩해 보였다.

빅터는 이 진득한 죽음의 맛을 누구보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해적선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통해 수많은 죽음의 유형을 보아왔다.

제일 최악은 지금의 하비처럼 사람이 아예 달라진 것처럼 자포자기하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굳건하던 사람이 희망을 빼앗기고 지킬 것조차 전부 사라지면 가장 빨리 죽음으로 뛰어들었다.

말없이 브로치를 주워 들고 다시 매달면서, 빅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비를 그 익숙한 어둠에 빼앗길까 봐.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 하나 있었다.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빅터가 하비의 뺨에 한 손을 올렸다. 두려운 것처럼 크게 움찔하는 하비의 모습에 상처받으면서도, 빅터는 손을 떼지 않았다.

“가져갈 생각 없어. 뭘 주고 싶은 생각은 있어도.”

전과 같은 말에도 하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빅터의 열렬한 시선을 피하며 냉정하게 말할 뿐이었다.

“……또 거짓만 늘어놓는군.”

짐작대로 하비는 이제 믿지 않았다. 차가운 불신이 눈빛에 어려 있었다.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작은 경계와 두려움을 확인하고 빅터는 차라리 안심했다.

‘아직은 괜찮아.’

마음이 완전히 죽어버린 사람은 두려움마저 사라진다. 그래서 빅터는 하비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빅터는 하비의 어깨를 꽉 쥐면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잘 들어.”

하비가 움찔거렸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세게 잡았다. 이제 와서 놓칠 수는 없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

빅터가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강한 말투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널 버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어깨를 아무리 거칠게 쥐어도, 하비는 끝까지 아프다는 소리 한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미약하게 찡그린 것을 보니 아픔을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말하지 않았다.

힘들고 아프다는 말은 제 말을 받아줄 만한, 혹은 믿을 만한 자에게나 하는 투정이다. 하비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빅터를 흘끗 내려다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재촉할 뿐이었다.

“뭘 하든, 빨리 끝내.”

그리 말하는 하비의 가슴팍이 불안정하게 오르내렸다. 하비는 빅터를 만지는 대신 이불을 있는 힘껏 잡았다. 뼈가 도드라진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하비는 더 이상 빅터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빅터는 예전처럼 멋대로 자신을 주무르고 있었다. 상대의 어디가 약한지, 어느 곳이 아픈 지점인지 잘 아는 남자였다. 반 로투스가 품어왔던 질투와 음심을 눈치채고, 그걸 이용할 만큼 영악한 사람이다.

하비는 씹어뱉듯 말했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평소처럼 원하는 대로 해.”

빅터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곤 하비의 어깨를 꽉 쥔 채로 탄탄한 가슴팍에 머리를 대었다. 예전의 하비였다면 빅터가 이러고 있으면 안 그런 척 쑥스럽게 손을 올려 머리칼이라도 만져봤을 텐데, 지금은 그의 행동과 말,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하비의 오해를 빨리 풀어주고 싶었다. 빅터는 고개를 숙인 채로 진실을 고하려 했다.

“그렇게 못 미덥나? 이제 내가 하는 말은 아무것도 안 들려? 반 로투스를 지시한 건 내가 아니라……!”

반의 이름이 나오자 하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널뛰었다. 가슴에 기대어 있는 빅터의 귓전에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강렬하게.

그래서 빅터는 말하다가 입을 도로 다물어 버렸다. 아직 반의 배신이 하비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그 이름을 말해봤자 하비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 해야…….’

이건 아무리 말해도 전혀 닿지 않을 듯했다.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같았다. 빅터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

몇 번의 대화 끝에 빅터는 확실히 알았다. 이제는 말도 소용이 없다. 여태껏 혀를 놀려 하비를 꾀었으니, 어떠한 말도 하비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하비의 가슴에 머리를 박은 채로 빅터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불안하게 뛰는 하비의 심장 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수많은 위협을 넘겨오면서 발달한 그 직감이 또 세차게 움직였다. 어릴 때부터 죽음의 위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최적화된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피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답이 나올 땐, 원망스러웠다.

빅터는 피하고 싶어도 그 답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당장 뒤돌아 이 방을 떠나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요구하는 대로 육체관계를 맺은 후에도, 하비는 그를 거부할 것이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인데도 그 차가운 거절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두렵기까지 했다. 다시는 안 본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도 없잖아.’

자신 때문에 저리된 것이면, 되돌릴 수 있는 것도 그였다.

우선 현실에서 붙들 것이 남아 있어야 한다. 하비가 자신을 믿게 하는 것이,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하비를 살리는 것이 먼저다. 자신의 마음이나 거절에 대한 공포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이제 말로 진심이 안 통한다면, 직접 부딪쳐 전할 것이다.

단단히 마음먹은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결심이 선 단호한 눈빛으로 그는 하비에게 천천히 말했다.

“알았어. 널 여기서 안을 거야. 네 말처럼 하려는 건 아니고, 내가 널…….”

감정이 울컥 올라와서 빅터의 말이 끊겼다. 하비의 어깨를 쥔 손이 떨려왔다. 진작 말하지 못한 게 한이 될 것 같다. 장식이 거의 없는 하얀 튜닉이 빅터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많이 좋아하니까, 네가 안 보이면 돌아버릴 만큼 생각하고 있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안으려는 거라고. 알겠나? 다른 이유는 없어.”

빅터의 절절한 말과 표정에 공허한 밤색 눈이 파르르 떨렸다. 밀려드는 빅터의 목소리에 반발하듯 하비가 고개를 옆으로 비꼈다.

예전 같으면 억지로 턱이라도 잡아서 자신을 보도록 할 테지만, 빅터는 그러지 않았다. 계속 끈기 있게 제 목소리를 내기만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떠나 있는 내내 네 생각만 했어.”

그래도 반응이 없다. 무감각한 하비의 눈동자를 보면서 빅터는 진심을 전하려 했다. 언제나 무거웠던 하비의 것에 비하면 그의 진심은 가볍기만 했다. 그토록 멍청했던 과거지만, 이젠 아니라는 걸 하비가 알아줬으면 했다. 티끌이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그 마음이 닿았으면 했다.

빅터는 떨림을 가라앉히고 하비의 침대 아래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제법 안정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하비를 올려다보았다.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마치 기사 서임 같은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빅터가 힘주어 말했다.

“맹세해.”

거짓말. 하비의 입술이 창백하게 질려 빅터를 밀어내려 했다. 따뜻하던 밤색 눈에는 거부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가 잘려 나가는 것 같아도, 빅터는 꿋꿋하게 이어 말했다. 몸을 일으켜 세워 하비의 귓가에 대고 빅터가 속삭였다.

“말을 못 믿겠으면, 다른 것으로 믿을 수 있게 하겠어.”

빅터는 한 손으로 하비의 목뒤를 넓게 잡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았다. 남은 한 손은 하비의 손을 깍지 끼어 꽉 잡았다. 하비는 긴장으로 손끝까지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빅터는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차가운 손에 체온을 전했다. 아무리 힘주어도 손이 떨어지지 않자 하비는 헐떡이며 말했다.

“이런 짓 하지 말고 바로 넣어.”

쓸데없는 전희는 생략하라는 의미였다. 알아들었지만 빅터는 아무 말 없이 허락을 구하듯 그대로 한참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작은 숨소리만 평온하게 흘렀다.

어느덧 하비가 더 이상 손을 빼려 하지도, 몸을 뒤로 물리려 하지도 않자 빅터는 천천히 움직였다.

이전과는 다른 관계를 쌓을 생각이었다. 모든 신경을 하비에게만 집중했다. 그를 위해서, 어떤 말을 들어도 천천히 다가갈 작정이었다.

빅터의 얼굴이 하비에게 다가갔다. 긴 속눈썹이 떨리고, 그 아래 먹구름처럼 흐려진 밤색 눈이 빅터를 가득 담고 있었다. 이 눈이 보고 싶어서 떨어져 있는 동안 허벅지 꼬집어가며 참았는데, 참담함만 남았다.

회한을 감춘 빅터가 고개를 틀어 반듯한 이마에 입 맞춘 뒤, 아래로 내려와 하비의 입술 위에 잠시 머물렀다.

‘아…….’

빅터는 속으로 탄식했다. 키스도 거부하고 있었다. 입술이 좀처럼 열리지 않아서 포기하고 미끄러져 내려가 여린 목 안쪽을 아프지 않게 빨았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하비의 눈이 작게 일그러졌다.

빅터는 하비의 반응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살폈다. 붉은 자국에 사과하듯 혀를 느릿하게 굴리자 하비가 흠칫거리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목을 길게 늘리자 희미하게 나던 알파 페로몬이 조금이나마 진해졌다. 성적인 자극에 육체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하비는 작은 자극만으로도 힘겨워했다. 몸이 여러 번 변하면서 더욱 예민해졌다. 느끼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처럼 빅터의 배를 손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힘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았다.

빅터는 하비의 허벅지를 길게 덮고 있던 이불을 치워 버리고 튜닉을 들췄다.

빅터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조인 복근에 얼굴을 묻고 하얀 살결 위로 이를 세우자 하비는 아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럼에도 낮은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까지는 가리지 못했다.

“흐으…….”

복근 주변을 서서히 배회하던 입술이 유두에 닿자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빅터가 그것을 입에 넣고 이로 가볍게 씹고, 혀로 굴렸다. 그의 입술이 떠나간 유두 끝은 피가 맺힌 것처럼 핏기가 몽우리 져 단단히 서 있었다.

붉은 자국이 새겨진 하비의 하얀 목에 점점 열기가 오르고, 맞잡은 맞은편 손에서 식은땀이 미끈대며 나왔다. 그래도 빅터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유두를 집요하게 괴롭힌 뒤에 가슴팍 바로 아래 발달한 근육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혀를 밀어 넣었다. 골처럼 파인 그곳을 질척하게 애무하자 하비는 허리를 연신 떨다가 얼굴을 덮었던 손을 반사적으로 내리고 아래를 보았다.

“그만……. 헉…….”

생소한 곳에 뜨겁고 축축한 것이 닿자 온몸에 간지러움과 닮은 쾌감이 번져 나갔다.

하비의 기분과 반응을 집요하게 살피던 빅터가 힐끔 눈을 더 아래로 두었다. 하비의 속옷 아래 갇힌 성기가 조금씩 부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읏…….”

작은 진동에도 간지러움을 느낄 만큼 하비는 쾌감에 약해졌다. 이번엔 빅터의 입술이 단단한 가슴팍에서 더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곳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거슬리는 속옷을 내리자 열기가 가득 찬 반쯤 발기한 성기가 드러났다.

하비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깨닫고 땀과 체온으로 미끈거리는 빅터의 한쪽 손을 있는 힘껏 억지로 떼어냈다. 평소와 달리 느릿하고 집요한 애무에 근질거리는 몸과 마음이 불편했다.

여전히 하비의 눈은 저 멀리 어딘가로 가 있고, 몸만 취하고 가라는 뜻이 확고해 보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뱉으며 하비가 부탁하듯 말했다.

“이제 됐어. 넣고 끝내.”

전희가 이토록 길었던 적이 없었다. 여태껏 해온 섹스는 빅터의 욕망에 충실했다. 하비는 그가 하는 대로 따라갔고, 묵묵히 그의 욕구에 휘둘려 주었다. 빅터가 워낙 잘해서 관계에서 늘 쾌감을 느끼긴 했어도, 하비의 열망은 언제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나 이제 빅터는 뭐가 되었든 하비가 숨겨놨던 바람과 욕망을 속속히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세세하게 알아내어 이번엔 자신이 다 맞춰주고 싶었다.

완고한 거절에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빅터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끝낼 생각 없고, 널 버릴 생각도 없다고. 주는 것만 받으라는 거, 그새 잊었나?”

하비가 성기 주변을 만지는 빅터의 손길에 퍼드덕 떨면서도 열기 오른 얼굴로 대꾸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이제 이런 지독한 관계는 끝내고 싶은데, 빅터는 전혀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비는 다 놓고 편해지고 싶었다. 스터스 가문이든, 반 로투스든, 언젠가 마음을 뜨겁게 달궈준다고 생각했던 이 남자든, 전부 잊고 어딘가로 가라앉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빅터를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게 조여오는 심장에 죄책감이 얹어지는 것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만해…….’

죽을 것같이 힘든 건 자신인데, 오히려 빅터가 상처받은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지금도 기만하려 들면서, 다정한 척, 일일이 신경 써주는 척, 가증스런 얼굴로 연인 놀음을 하고 있지 않나.

빅터는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주기는커녕, 믿었던 친구의 약한 마음을 이용해 타락시키고, 결국 배신하게 했다.

‘요즘 너와 몸정이 들었는지 그것까진 차마 못 지켜보겠다고 하더라고. 멀리 나가 있는 사이 터뜨리라고 특별히 지시하더군.’

배신한 친구의 목소리에 까마득히 어둠이 몰려들어 하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지러웠다. 그때의 참혹했던 기억이 밀려들었지만 간신히 버텼다.

반의 말대로, 몸정인지도 모른다. 육체의 일부를 섞은 만큼 남은 양심의 찌꺼기로 이러고 있는지도.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는 이성이 하비에게 경고했다.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내주었던 모든 것을 그 손으로 팽개치고 왔으면서. 이제 와서?

그때 빅터가 손을 뻗어 하비의 눈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흘러나오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그는 혼잡해 보이는 하비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즐겨.”

선언같이 말한 뒤, 빅터는 그대로 다른 손으로 발기한 하비의 기둥을 붙들고 허리를 숙였다. 뜨거운 용암에 삼켜지듯 하비의 성기가 빅터의 입안에 파묻혀 사라졌다. 까슬한 음모까지 닿은 입술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들끓던 잡념이 일시에 날아가고, 그 자리엔 믿지 못할 쾌감만이 남았다. 하비가 고개를 젖히며 참았던 신음을 뱉었다.

“흐읏……!”

이불을 꽉 쥐는 하비의 길고 단단한 손에 핏줄이 솟았다. 그걸 눈짓으로 힐끗 본 빅터가 기둥을 잡은 손에 악력을 실었다. 흡입하듯 하비의 성기를 강렬히 머금다가 혀끝으로 선단 위를 누르기도 하고, 혹은 기둥 겉을 핥기도 했다. 하비의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턱 끝이 부들거리다 온몸에서 힘이 빠질 때까지-

빅터의 눈과 귀는, 집요하게 하비만을 쫓았다.

온 신경이 하비의 반응에 갔다. 잘 느끼고 있는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척을 하는 건지.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비가 충분히 느끼고 자극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입술이 훑듯이 기둥을 지난 끝에 귀두를 물고 이로 살짝 긁었을 때 가장 큰 반응이 왔다. 열이 오른 얼굴로 하비가 빅터의 뒷머리를 쥐었다.

“적당히 하고…… 읏…… 그만……!”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하비의 상체가 크게 떨리고, 빅터가 물고 있는 성기가 요동쳤다. 빅터의 입이 그리 작은 편은 아닌데 하비의 성기가 꽤 커서 뻐근했다. 빅터 자신과 엮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다른 오메가와 관계를 가졌다면 상대가 기뻐했을 만한 크기였다.

생각하니 있지도 않은 상대에게 질투가 폭발했다. 이건 내 것이다. 빅터는 화가 나는 만큼 하비의 성기를 더 정성스럽게 애무하는 데 집중했다.

“허억…… 윽!”

하비가 허리를 비틀면서 갈비뼈에 자리 잡힌 근육이 연신 꿈틀거렸다. 한쪽 무릎이 세워지고 허벅지와 복부가 인내하느라 꽉 조였다.

반사적으로 하비가 아래를 보았다. 빅터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타액이 입질 속에서 부드러운 윤활유 역할을 하며 질척한 소리를 내서 더 외설스러웠다.

금발에 윤곽 뚜렷한 미남자가 정성스럽게 중심을 물고 빨 때마다 눈을 내리깔았다. 분명 보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되는 장면이었지만 하비는 혼란스러웠다. 빅터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먼저 저버린 건 그쪽이면서, 아쉬운 듯 구는 건 무슨 연유인지.

빅터의 입이 다시 한번 성기를 집어삼키고 기둥 아래를 혀로 굴리자 하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순간 하비는 빅터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 끝까지 성기를 입에 담았다. 아래로 몰려 있던 열기가 한순간에 위로 치솟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하비의 강건한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빅터의 머리를 잡은 손에도 힘이 실렸다. 붉은 기운이 온몸에 번지고, 하비는 경련이 오는 턱을 위로 휙 치켜들었다.

“헉…….”

뜨끈한 정액이 빅터의 입속으로 쏟아졌다. 입천장을 긁듯이 튀어 오른 성기가 울컥대며 많은 양의 정액을 흘렸다.

오랜 애무와 전희로 극락에 온 것 같은 사정감이 하비를 덮쳤다. 경직되었던 몸이 위아래로 쾌감이 전달되면서 서서히 떨려왔다. 저절로 오므라든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하비가 강렬한 고양감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빅터는 입속의 정액을 망설임 없이 삼켰다. 정말 미친 건지 비릿한 내음조차 사랑스러웠다.

사정 직후 찾아온 나른함에 늘어지던 하비가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뭐 하는 거야.”

그제야 빅터가 허리를 펴고 젖은 입술을 엄지로 눌렀다. 남은 정액까지 모두 삼켜 버린 빅터가 새삼 무엇이 놀랍냐는 듯 한가하게 물었다.

“좋았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하비는 말을 잃고 충격에 휩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든 걸 다 가진 남자다. 그런 자가 입으로 같은 알파의 성기를 물고, 애무하고, 심지어 극한의 쾌감을 이끌어낸 뒤 정액을 먹기까지 했다.

‘뭘 위해서?’

전에도 구멍을 핥는 짓을 해서 노예나 하는 거라며 기겁했던 일이 간신히 기억의 끄트머리 위로 올라왔다.

하비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도 빅터는 자신에게서 뭔가 더 끌어낼 것이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멀쩡한 귀족이 자존심을 버리고 다른 자의 정액을 삼키는 미친 짓을 해가면서 얻을 만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하비는 불현듯 떠오르는 가정에 창백해졌다. 빅터가 먼 출장을 떠나기 전에 각오처럼 말한 것이 생각났다.

‘나중에, 제대로 되돌려 줄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줘.’

‘설마…….’

돌려준다는 것이, 복수였나.

그의 복수는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을 잘게잘게 부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통을 주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빅터는 제대로 성공했다.

왜 마음을 주어서는.

속삭이던 그 말들이 전부 진심인 줄 알고, 가장 믿지 말아야 할 자에게 약점을, 빈틈을 보였다.

어리석기는.

“날 어디까지 떨어뜨릴 셈이지.”

하비는 처참하게 구겨진 얼굴로 빅터를 보았다. 이렇게 또 여지를 남기고, 진심이라고 착각할 만한 절절한 고백으로 사람을 흔들어놓은 뒤 다시 절망으로 빠뜨릴 생각인 듯했다. 몸에 남아 있던 기분 좋은 잔열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은근한 미소가 피어 있던 금발 미남자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또 저런 얼굴이다. 사람 헷갈리게 하는,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

하비가 빅터의 진갈색 더블릿을 꽉 쥐었다. 고개를 푹 숙인 하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으면 이제 더는 그만…….”

힘겹게 이어지는 하비의 말을 자르고 빅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꿍꿍이 같은 거 없어. 떨어뜨릴 마음도 없고.”

제발 믿어주기를 바라지만, 고개를 드는 하비의 눈에는 더욱 강한 불신만 가득했다. 빅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을 내던진 진심이 의심으로 되돌아올 때마다 끝없는 바닥으로 쓸려가는 것 같았다.

“정말, 없어.”

몇 번을 더 말하면 믿어줄까.

하비가 무너진 결정적인 원인이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빅터는 그게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해야 돼.’

몰려오는 지옥 같은 절망에, 빅터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자 드디어 결심이 겨우 섰다.

무거운 얼굴로 빅터는 입고 온 더블릿과 튜닉, 속옷을 차례차례 휙 벗어 던졌다. 돌처럼 단단한 체격 위로 수많은 흉터가 드러났다.

반사적으로 하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특히 팔에 난 길쭉한 흉터로. 상어에게 당했다던, 그 흉터다.

하비는 좋은 날이라 생각했던 짧은 휴가 때 빅터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생각했다. 빅터는 그때도 과거의 상처를 핥으며 복수할 생각만 다졌겠지.

하지만 하비는 도무지 저 흉터에서 눈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저걸 보면 마음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기가 막혔다.

빅터도 하비의 눈길이 자신의 몸에 박혀 있음을 깨달았다. 몸 전체에서 가장 크게 난 흉터 쪽이었다. 살이 찢겼다가 다시 붙은 흔적이었다. 빅터의 눈이 기대로 흔들렸다.

흉터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날, 생각하나?

잠시 생겼던 희망도 잠시, 하비는 다시 눈길을 피했다. 빅터는 한숨을 내쉬고 한쪽 눈 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참 어려웠다.

‘역시 안 되나.’

빅터는 찢겨 나갈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단단히 결심을 다졌다.

‘이것밖에 없어.’

말은 믿지 않고, 행동은 보질 않고, 마음도 닫혀 있다. 진심은 닿지도 않는다.

방법이 없었다. 남은 수단은 이것뿐이었다. 최대한 하비가 원하는 대로 해주되 아프지 않게, 다정하게 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봐도 빅터는 꺼림칙했다.

‘이런 식으론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빅터는 이제부터 모험을 걸 생각이었다. 잘되면 최상의 시나리오지만, 안 되면 아마 앞으로 자신이 제대로 살 수 없으리라 예상했다.

그래도 해야 했다. 하비를 위해서라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를 찍어누르고, 빅터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하비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잘 기억해 둬. 기분 좋은 감각만 그 몸에 새겨 넣어. 이제 네가 아프거나 힘들 일은 없을 거니까.”

주문처럼 말한 빅터는 한 올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하비의 몸 위로 올라왔다.

삐걱-

침대가 건장한 성인 남자 둘의 무게에 작은 비명을 질렀다.

수상한 소리가 나면 하비의 집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빅터는 그가 하비의 상태와 관련해 몹시 예민해져 있으니 멱살을 잡고 끌어내는 만행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여겼다. 하비의 집사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취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럼에도 빅터는 감행했다.

침대 위로 체중을 싣고 메마른 하비의 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이 얼굴이 언제쯤 웃어줄까. 마음이 쓰렸지만, 빅터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도저히 못 믿겠으면 이렇게 해.”

숨 막히는 긴장으로 목울대가 일렁였지만, 빅터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다음은 정말로 뱉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이대로 두면 하비는 계속해서 자신을 파괴하다가, 끝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빅터의 녹색 눈이 뱀처럼 가늘게 늘어나고, 독해졌다.

“있는 힘껏 날 증오해.”

마주 보고 있는 하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난 환자한테도 욕정하는 쓰레기 새끼니까, 그래도 돼.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고.”

사실은 당장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지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다시 예전처럼 좋은 관계로 돌아가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안 될 것을 알고 있다. 어차피 하비에겐 닿지 않을 말들이다. 미련 갖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빅터는 불쑥불쑥 치미는 애원을 스스로 짓밟았다.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비의 정상화다. 현실로 머물게끔 붙들 만한 것이 없다면, 누군가를 미친 듯이 미워하는 힘이라도 필요하다.

빅터 자신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좋은 감정을 가졌던 하비를 오히려 미워하고 증오함으로써 끔찍한 시절을 버텼던 것처럼 말이다.

‘애정보다 증오의 힘이 더 강하다고 하잖아요. 주인님도 그래서 스터스 경에 대한 마음을 헷갈리셨던 게 분명해요.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빨리 정신 차리세요, 제발.’

언젠가 잔소리처럼 쏘아대던 레나의 말이 힌트가 되었다. 그의 말이 맞다. 앞으로도 계속 온몸으로 하비에게 진심을 전할 것이다. 끝까지 전해지지 않는다면, 격렬한 증오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 하비를 위한 길이다.

빅터는 아픔을 삼키고 하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에 대었다. 맨 살갗을 뚫고 나올 듯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심장에 대고 맹세하듯, 빅터가 눈가를 구겼다.

흉포해진 두 눈이 하비를 위한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널 아프게 한 새끼들은 다 죽여줄 테니까, 걱정 마.”

비록 그 대상이 자신일지라도. 하비가 정말로 원한다면 이 손에 칼을 쥐여 줄 생각도 있었다. 지난 일을 후회하며 하비의 손에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결말 같았다.

굳어버린 하비의 뺨에 짧게 키스를 한 빅터가 서서히 움직였다. 침대 헤드에 한 손을 짚고 하비와 성기를 위아래로 겹쳤다. 미끈거리는 식은땀으로 손이 몇 번 허탕을 쳤지만 결국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

차마 유산까지 한 몸에 대고 삽입까진 못 할 것 같아서 취한 차선이었다.

핏발 선 우성 알파의 성기가 비벼지자 하비는 엄청난 자극에 허우적댔다. 빅터의 것이 워낙 커서 위에서 누르는 것만으로도 열기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누르고, 비비고, 거기다 빅터의 손이 더해져 옆면을 꽉 쥐어 힘을 보태자 이불을 쥔 하비의 손도 절박해졌다.

묵직한 성기가 짓누르며 일으키는 거친 마찰에 결국 하비가 뜨거운 숨을 터뜨렸다.

“허윽……!”

사정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중심이 금방 단단해졌다. 침대 위로 양 무릎을 꿇고 있는 빅터의 굵은 허벅지도 터질 것처럼 부풀고, 흔들리는 등 근육은 팽팽해졌다. 빅터 아래에 있는 하비의 단단한 몸 또한 처연하게 떨리고, 하얀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빅터는 그 와중에도 하비의 몸 이곳저곳에 키스했다. 어깨와 쇄골, 단단한 복부, 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비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고개를 틀어 입술을 먹기도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하비의 입술은 황홀했다. 많이 상하고 껍질이 갈라진 곳도 있었지만 빅터는 그 상처를 핥듯이 부대꼈다.

빅터가 주는 쾌감에 헐떡이면서 하비는 끊임없이 같은 것을 생각했다. 머리를 후려치는 충격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난 이자를 미워해도 된다.

거부하는 것은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도 모자라 지금도 끝없이 거짓을 뱉는 이 끔찍한 거짓말쟁이에게, 원한과 증오를 퍼부어도 된다.

그런데 자꾸만 몸속으로 파고드는 이 한기는 뭐란 말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생각을 거부하는 사이 하비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또다시 어둠이 깃들었다.

하비의 눈에서는 이미 초점이 사라졌지만 빅터는 행위에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빅터의 이마에서 땀이 후드득 떨어져 하비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눈가에 맺혔다 내리는 그것은 눈물처럼 보였다. 의지를 잃은 밤색 눈은 본능적인 쾌감에 따라 맥없이 흔들렸다.

“헉…… 허억……”

성기를 붙잡아 흔드는 빅터의 손길이 더 거세지고 빨라지자 하비는 밀려드는 사정감에 입을 벌렸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그 간격을 빅터의 입술이 메꾸었다. 혀가 난잡하게 얽히고 신음은 타액과 함께 자꾸만 옆으로 새었다.

찌걱찌걱!

두 성기가 부대끼며 나는 음란한 소리가 질척대며 퍼지고, 간혹 부딪치는 음낭이 쿠퍼액으로 젖어 희게 빛났다. 아래에 짓눌려 있던 하비의 성기가 푸르르 떨리더니 쿠퍼액을 조금씩 뱉어냈다. 사정 직전인 듯 하비의 반응이 더욱 격렬해지고 온몸의 근육이 일시에 굳었다.

빅터도 미간을 일그러뜨리더니 짧게 신음을 뱉었다. 흉기 같은 빅터의 어깨가 성적인 긴장으로 꽉 조였다. 엄청난 절정이었다. 거의 동시에 사정했다.

“크윽……!”

하비의 복근 위로 두 사람분의 정액이 길게 튀었다. 한 번 배출한 하비의 것은 많이 묽어져 있었다. 빅터의 정액은 턱까지 튀기도 했다.

강제로 밀려 올라간 절정은 잔 떨림으로 남고, 이불을 쥔 하비의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빅터는 눈을 굴려 주변을 보았다. 어딘가 닦을 것이 있을 것이다. 의사가 두고 간 물통에 물수건이 몇 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빅터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물수건을 하나 쥐곤 먼저 하비의 배에 튄 정액들을 닦아냈다. 끊임없는 검술 훈련으로 쌓은 견고한 그 몸을 손수 구석구석 매만졌다. 그런 뒤 자신의 몸에 튄 잔여물도 닦았다.

물수건 하나를 더 쥐고 하비의 얼굴에 난 땀을 닦아주는데, 빅터는 이게 뭐라고 웃음이 났다.

누군가를 돌보는 느낌도 좋을 수 있다니. 귀찮고 힘겨운 것이 아니라 며칠, 아니, 평생을 할애해도 모자람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빅터가 흘끗 눈을 들어 하비의 반응을 확인하니 아무런 거부가 없었다. 그래도 순순히 몸을 맡기는 걸 보면, 어쩌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없던 희망이 조금 솟았다.

그런데 열기가 점점 빠져나가는 하비의 얼굴이 다시 무감각해졌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형처럼.

놀란 빅터가 물수건을 잠시 떼어두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비?”

하비는 눈으로 차가운 경멸을 보내고 있었다. 부탁이나 애원이 아닌, 명백한 혐오였다. 빅터의 손에서 물수건이 삐끗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놓치지 않고 잡은 빅터는 직감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건…….’

빅터는 이 격렬한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때 자신은 하비를 억지로 취하고, 하비는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반발했다. 지금은 그 시절보다 더 맹렬한 미움이 깃들어 있었다.

묵묵히 물수건을 내려둔 빅터는 그제야 알았다. 하비는 자신이 내민 패를 받아들였다. 온몸을 내던져 지핀 불씨를 증오로 맞바꾸어, 살기 위한 연료로 삼고 있었다.

빅터는 쓸쓸함을 속으로 삼켰다. 다행이다. 이제 그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입은 빅터는 물끄러미 하비가 준 브로치를 보았다. 그걸 떼어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이제 그는 이것을 달고 있을 자격이 없었다. 살점을 잘라 두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빅터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두고 간다. 나중에 돌려줘. 줄 생각이 생기면 그때.”

무언가 한계를 넘긴 듯, 잠시 열렸던 하비의 정신이 다시 닫혔다. 의식이 사라진 것 같은 저 무표정함에도 미련이 남아 마지막으로 돌아봤을 때, 하비는 여전히 증오로 일렁이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탁.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간 빅터는 문 앞에 서서 주르륵 주저앉았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식은땀으로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가 쓸쓸하게 웃었다.

좋은 결말 따윈 없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뿐이다. 하비는 이제 그에 대한 증오의 힘으로 이겨낼 것이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기뻐해야지. 원하던 거잖아.’

빅터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고장 난 것처럼 팔을 늘어뜨렸다. 왜 잘될 수도 있다는 헛된 기대를 한 건지.

“젠장…….”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예전처럼 쑥스러이 웃어주면 좋겠다. 그 웃음 가운데 들려주던 선량한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어쩌겠어. 이미 좋아하게 됐는데.’

그날의 고백이 선선하게 바람처럼 건너왔다. 좋은 기억 가운데 경멸의 시선이 교차되어 섞였다. 지금도 이 문 너머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찢겨 나갈 것 같아서 빅터는 한 손으로 제 가슴께를 마구 쥐어뜯었다. 때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와 그를 바닥 없는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하비는 이런 고통을 어떻게 견딘 걸까.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처절한 이 아픔을, 무슨 생각으로 버틴 걸까. 얼마나 아팠을까.

어떤 극적인 상황에서도 아까워서 흘리지 않았던 것이 빅터의 뺨을 타고 내렸다. 깊은 회한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고, 목이 갈라지는 것처럼 쓰려왔다.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지는 눈물을 그저 두면서, 빅터는 하비가 겪었을 아픔과 고통들을 생각했다. 그것들은 다시 돌아와 빅터의 마음을 거칠게 헤집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이 모든 걸 시작한 게 하필 자신이라서. 멈출 수 있을 때 멈추지 못해서. 제일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거짓으로 널 아프게 할 생각만 한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용서를 구하고 싶지만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런데 매달리고 싶다. 마음 약한 하비는 어쩌면 받아줄지도 모른다. 그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다 치워 버리고, 죽여 버리면 마음을 돌려줄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 빅터의 물기 젖은 눈이 광기로 번들댔다.

이리저리 갈라지는 정신 속에서 한 가닥 남은 이성이 그를 말렸다. 하비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잉 보복하는 것을 명예롭지 못한다 여긴다. 경멸과 혐오가 섞인 하비의 밤색 눈이 어딘가에서 빅터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두려워져서, 빅터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괴로워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기는 더 깊은 곳으로 빨려들듯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다 받아들일 테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하비의 집사가 복도 끝에서 말없이 빅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복잡한 심경이 어려 있었다.

* * *

“스터스 경은 잘 보고 오셨나요? 괜찮으신 건 맞죠?”

레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하비의 안부를 물어왔다. 저택으로 돌아온 빅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빅터의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레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가서 말은 나눠보셨어요?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얼핏 들었는데…….”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와. 방금도 이야기하고 온 거고.”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신 거죠?”

일말의 희망을 안고 레나가 눈을 빛냈다. 그런데 빅터의 대답이 영 이상했다.

“좋은 이야기라……. 글쎄.”

레나가 불길한 예감에 얼굴을 굳혔다. 빅터가 애매하게 말을 흐릴 땐 분명 찜찜한 것이 있다.

“무슨 이야길 하고 오셨는데요?”

줄기차게 거부만 당하다가 하비가 원하는 대로 몸의 대화를 잠깐 하고 온 게 다였다. 그나마 몸의 대화도, 끝난 직후 최악의 기분으로 끝났다. 의도한 것이긴 했지만 막상 당하니 온몸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빅터는 하비를 살리기 위한 연료를 부었다. 그걸 애정으로 바꾸든 증오로 치환하든 선택은 하비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전자를 택해주길 간절히 바랐는데, 하비는 후자를 택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가서 남은 불씨를 지펴야 할 텐데, 벌써 자신이 없었다.

잠깐 보인 반응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나약한 비명을 지르는데, 더 할 수 있을지.

믿었던 주인이 길게 침묵하자 레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설마, 아픈 분한테 무슨 짓 하신 건 아니시죠? 몸도, 마음도 다 아프신 분인데요. 아무리 바보 같은 주인님이라도 설마…….”

말이 없는 빅터를 보며 레나는 망연자실했다.

분명 뭔가 사고를 치고 왔다. 놀라서 더 물으려던 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빅터가 손을 들어 막았기 때문이었다.

빅터는 뭐라도 해야 이 미칠 듯한 공허함이 달래질 것 같았다. 하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에게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모조리 하나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 반 로투스에 대한 격렬한 분노였다.

빅터의 눈이 크게 일그러졌다.

“지금은 바빠. 다음에 이야기하지.”

힘없이 늘어져 있던 기세에 갑자기 불이 붙었다. 흉포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전에 없던 분노였다.

“이 야밤에 뭐 하시게요?”

빅터가 뒤돌아서며 스산한 얼굴로 레나를 보았다.

‘헉…….’

레나의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페로몬과 오랜만에 보는 주인의 광기였다. 덜덜 떨면서, 레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오메가임을 배려해서인지 금방 페로몬을 거두어들인 빅터가 짧게 말했다.

“사냥.”

하비를, 그리고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자를 끌어내릴 차례였다. 하비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반 로투스에게 진짜 지옥이 뭔지 보여줄 때다.

그때였다. 잠시 생각하던 레나가 얼굴을 손으로 한 번 훑어 내렸다. 그러곤 눈을 반짝 빛냈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레나가 허겁지겁 어딘가로 가더니 빅터에게 한 아름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빅터가 돌아온 레나를 보더니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건 뭐지?”

가면 투자회 때 썼던 검은 표범 가면과 눈이 뚫린 새까만 복면, 검은 가죽 장갑이었다. 급히 뛰어온 건지 레나가 헉헉대며 설명했다.

“더러운 짐승 피가 주인님께 튀면 안 되니까요. 머리칼에도 튀실까 봐 복면도 준비해 봤어요.”

말은 그리해도 레나는 그가 무슨 사냥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복면까지 살뜰히 챙긴 걸 보면 그러했다. 누군가에게 보이면 안 되는 사냥임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빅터는 의아한 얼굴로 레나를 보았다. 레나는 사람 사냥을 싫어했고, 빅터가 저지르는 잔인한 짓도 혐오하는 편이었다.

“내가 하는 ‘사냥’을 안 좋아했잖아. 갑자기 왜.”

레나가 창백하게 웃으며 빅터의 등을 떠밀었다.

“이번 사냥은 특별하니까요. 잘 다녀오세요, 주인님.”

빅터가 헛웃음을 지으며 레나가 준비한 것들을 챙겨서 나오는데, 따라붙는 벤과 진, 나스타도 비슷한 물품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너희도?”

벤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까만색 사냥개 가면을 쥐고 있었다.

“네. 레나가 다 챙겨줬습니다.”

“웬일이래. 나 이런 일에 그렇게 의욕적인 레나 처음 봤어.”

까만 고양이 가면을 쥔 나스타도 고개를 갸웃하고, 벤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냥개 가면을 들고 있는 진이 곁에서 대꾸했다.

“스터스 경이 관련된 걸 아는 거겠지.”

레나가 준비해 준 복면과 검은 표범 가면을 차례대로 쓰면서 빅터가 피식 웃었다.

“만족스러운 사냥이 되겠는걸.”

심지어 장갑마저 손에 꼭 맞았다.

* * *

반 로투스는 오늘도 몹시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하비가 사라지고 그에 대한 욕과 비방이 들려오는 것이 천국의 소리처럼 들렸다.

물론 처음 얼마간은 오랜 친구였던 하비에게 조금 죄책감도 들고,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어차피 욕먹어도 마땅한 스터스가였다. 자신이 손대지 않아도 누군가가 터뜨렸을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마저 들었다.

그 증거로 빅터가 돌아왔음에도 자신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온갖 사교 클럽에서 활개를 치고 다녀도 못 본 척했고, 딱히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연인에 대한 의무인 것처럼 하비의 무성한 소문을 수습해 주려는 정도의 성의만 보였다.

빅터의 귀환 이후 한껏 긴장했던 반은 그제야 안심했다.

‘역시 그놈도 하비를 이용한 거였어.’

빅터 또한 하비와 진실한 관계인 것처럼 공개적으로 연기를 한 것에 불과했다. 불쌍한 친구. 하비는 진심을 다했던 연인에게도 철저히 배신당한 것이다. 반은 그리 믿었다.

가면 투자회는 오늘도 성황이었다. 사회자인 반은 즐비한 귀족들을 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돈과 미인, 노예, 가면을 쓴 익명과 난잡한 섹스가 오가는 이 장소는 반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이제 방탕한 시간이 시작될 때다.

오늘은 매력적인 알파 귀족 여성이 유혹해 왔다. 반은 약으로 인해 오메가가 된 하비를 본 이후로, 이상하게 같은 알파를 안는 취미가 새로 생겼다. 누가 봐도 알파임에 분명한 금욕적인 얼굴이 붉게 젖어서 애액을 흘리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랫도리가 후끈거렸다.

그 때문인지 알파 ‘남성’에게 더욱 끌려서 까만 고양이 가면을 쓴 키 크고 늘씬한 알파 여성의 유혹을 뿌리쳤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건장한 체격의 알파 귀족 남자가 접근해 왔다. 얼핏 봐도 몸이 좋아 보이는 까만 사냥개 가면을 쓴 사내였다.

반은 가면을 썼음에도 이토록 자신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에 감동했다. 본인의 성적인 매력이 이리도 출중한지 오늘에야 알았다.

‘오늘은 나의 날인가.’

알파 귀족 사내는 반의 가슴에 은근히 손대며 포도주를 한 잔 건넸다. 얼결에 포도주를 마신 반에게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비좁은 곳보다는 더 멋진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좀 멀리 나가서 관계를 즐기고 싶다는 은근한 말에 반은 이성을 잃고 그를 따라나섰다. 어차피 투자회 행사는 다 끝났고, 뒤처리는 다른 자에게 맡겨도 되었다.

함께 밖으로 나가자 다소 어두운 길목 위에 마차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반은 홀리듯 거대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내부도 화려했다. 곳곳에 보란 듯이 보석이 박혀 있었고 쉽게 구하지 못하는 고급 원목 향이 가득했다. 돈 많은 귀족임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잘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압도적인 페로몬을 뿜는 검은 표범 가면의 사내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깜짝 놀란 반이 뭐라 대응하기도 전에, 검은 표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잘했어.”

“이, 이건 뭐…… 윽!”

당황한 반이 마차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갑자기 아득한 기운이 밀려들어 비틀거리고 말았다. 어지러웠다.

아까 사냥개 가면의 알파 귀족 사내가 내밀었던 포도주가 얼핏 떠올랐다.

‘거기 뭔갈 탄 거였나……!’

반은 고꾸라지다 마차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간신히 고개를 틀자 가물거리는 시야로 보이는 표범 가면 아래 아름다운 녹색 눈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쓰러지는 것도 추잡하군.”

“동의합니다.”

까만 사냥개 가면을 쓴 알파 사내가 혀를 찼다. 기억 날 듯 말 듯 한 목소리들을 가늠하다가 반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반이 다시 정신이 든 것은 몸이 차가운 어딘가를 쓸면서 통각이 생겨서였다.

한쪽 발목이 누군가에게 잡혀 질질 끌려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추웠다.

반쯤 떠진 시야로 주변을 살피자 황량한 벌판이었다. 발목을 잡혔다 느낀 것은 기분이 아니라 실제였다. 검은 가죽 장갑을 덧쓴 큰 손이 그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그의 발목을 잡고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는 두꺼운 팔은 보통 것이 아니었다.

반은 그제야 정신이 확 깨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누군지도 모를 자에게 잡힌 한쪽 발목도 지끈지끈 아파왔다.

계속 끌려가던 반이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너, 뭐야! 여긴 어디야! 아무도 없나?! 누구 없어?”

끌고 가던 자의 걸음이 멎었다. 반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그자를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보았다. 반을 향해 뒤돌아선 자는 검은 표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기절 직전에 마차에서 본 사람이었다.

그의 가면은 눈만 간신히 드러난 형태였는데, 어딘지 익숙한 녹색 눈이 짙은 분노로 일렁였다. 검은 표범 가면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혀부터 잘라 버리기 전에, 닥쳐.”

이건 분명히 아는 목소리였다. 정신이 명료하게 들자 기억이 났다. 반은 얼얼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베르텐 경?”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검은 표범 가면은 대꾸 없이 반을 끌고 갔다. 목표는 저 앞에 있는 스산한 오두막집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소름 끼치는 풍경이었다. 자라다 만 누런 잡초들이 으스스 스산한 초겨울 바람에 떨렸다. 믿기지 않을 만큼 인적이 전혀 없었다.

스삭, 스삭---

잡초 사이를 헤치는 묵직한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고, 반은 두려운 눈으로 저를 끌고 가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등에 쓸리는 따가운 잡초들보다 무감정한 빅터의 눈빛이 더 소름 돋았다.

더 공포스러운 건 빅터가 체격이 큰 편인 자신을 한 손으로 끌고 가면서 무거운 기색조차 없는 것이었다.

빅터가 오두막을 열자 이미 세 명의 남녀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 명만 빼고 모두 아까 반을 유혹했던 자들이었다.

“나, 날 속였어……!”

제일 먼저 반을 유혹했던 알파 귀족 여성 나스타와 진, 벤이 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중 반에게 포도주를 먹였던 알파 귀족 사내, 진이 나서서 고했다.

“약은 준비해 뒀습니다.”

빅터가 끌고 온 반을 오두막 구석에 짐짝처럼 팽개쳤다.

쾅!

아파서 신음하는 반을 무시한 채 빅터가 전혀 흐트러짐 없이 고갯짓했다.

“저 돼지 새끼 앞에 놓아둬.”

진은 종이로 감쌌던 알약 두 개를 꺼내 각각 하나씩 반 앞에 두었다. 구석에 구겨진 반이 도망갈 기회만 노리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나한테 뭐, 뭘 하려고?! 난 로투스 가문의 차남이다!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당장 우리 가문이 너희를……! 커억! 꺽!”

옆에서 조용히 대기하던 벤이 무표정한 얼굴로 두서없이 떠드는 반의 얼굴과 복부를 차례로 걷어찼다. 바위에 얻어맞는 기분에 반은 피를 토하며 고개를 푹 꺾었다.

답답한 듯 복면과 가면을 벗은 검은 표범은 정말로 빅터 베르텐 경이었다. 금발과 함께 선명한 이목구비가 드러나고, 매력적인 녹색 눈이 길게 웃었다. 검은 가죽 장갑 끝을 잡아당겨 더욱 꽉 조인 빅터가 반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피에 젖은 얼굴로 반은 빅터가 왜 이러나 맹렬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반은 지금쯤 침상에 누워 있을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며 속으로 분노의 비명을 질렀다.

‘네가 끝까지……!’

하비 때문일 것이다. 빅터는 그를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발목을 잡는 하비의 존재에 반은 치를 떨었다.

반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며 그를 바라보는 빅터의 눈은 맹수의 것과 같았다.

빅터는 앞니가 부러져 나간 흉한 몰골로 덜덜 떠는 반에게 대화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의자 손잡이를 툭툭 느리게 두들겼다.

이번엔 진이 다가와 날이 넓고 완만하게 구부러진 단검을 양손으로 바쳤다. 오두막에 비쳐 들어오는 차가운 달빛이 단검의 넓은 면을 반짝 비췄다.

단검을 손에 들고 날을 이리저리 확인하듯 살피는 빅터의 얼굴은 흡사 악귀였다.

“하비한테 먹인 그 약, 처음엔 그걸 먹이고 널 오메가로 만들어 바스칸 감옥의 가장 하층 죄수들에게 돌릴 생각이었거든.”

반이 마른침을 삼키다 기절할 듯 놀랐다. 바스칸 감옥은 끔찍한 죄목의 죄수들이 수감되는 곳으로 악명 높았다. 거기다 최하단 층은 그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악랄한 죄수들이 수감된 곳이었다.

빅터는 자지러질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는 반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근데 혹시라도 즐기면 어쩌나 걱정이 들더라고. 너 같은 돼지 새끼는 그런 데서도 쾌감을 느낄 것 같거든.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어?”

나스타가 미간을 구기며 맞장구쳤다.

“생각만 해도 역겹네요.”

빅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관대한 척 말했다.

“일단 기회는 줘보려고.”

반의 앞에 놓인 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빅터가 잔인한 선택을 종용했다.

“여기 약 두 개가 있어. 하나는 네놈이 하비한테 먹인 그 빌어먹을 약이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수면제야. 자고 일어나면 발가락 몇 개와 귀, 손가락 두어 개는 날아가 있겠지만, 바스칸 감옥의 최하층 죄수들은 면할 수 있지.”

다 설명한 빅터가 앉은 채로 허리를 숙여 반을 재촉했다. 악마같이 비릿한 미소가 빅터의 입술에 걸렸다.

“무슨 약을 선택하게 될지는 네놈 운명에 달려 있지. 자, 선택해.”

빅터는 주머니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시각을 확인했다.

“빨리해. 괜히 시간 끌겠다는 개수작을 부리면 수면제고 뭐고 네가 의식이 있을 때 하나씩 절단 낼 테니까.”

빅터의 느른한 협박에 반이 잘게 떨리는 손을 뻗어 하나를 선택했다. 물 따윈 없지만 빅터의 말 없는 재촉에 우선 삼켰다. 목에 걸릴 것 같았지만 억지로 삼켰다.

네 쌍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반은 점점 몸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수면제……?”

하비가 먹었던 그 약은 아닌 것 같았다. 하비는 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고꾸라지며 괴로워했으니까. 오메가로 강제로 변하는 것은 초반에 내장이 다 타들어가는 것처럼 극도의 고통을 수반한다고 들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반을 모두가 싸늘한 눈길로 보았다. 그중 나스타가 다가와 갑자기 반의 머리칼을 콱 움켜쥐어 들더니 품에 있던 칼로 잘라냈다. 빠른 손길로 풍성한 머리칼 대부분을 쳐낸 나스타가 뒤로 물러났다.

볼품없이 드러난 맨머리를 빅터가 물끄러미 보았다. 안 그래도 못 봐줄 얼굴이었는데 더 지독한 몰골이 되었다.

그때 빅터가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설마 그딴 자비를 베풀었겠어? 로투스 경은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군그래.”

비웃듯 말한 빅터가 넓적한 단검을 들고 반의 앞에 서서 무릎을 굽혔다. 그는 시험 삼아 예리한 날로 반의 맨머리부터 이마까지 천천히 그어 내렸다.

“끄아아악!”

반은 그 작은 칼질에도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너무 아팠다. 몸이 이상했다. 피가 흘러내리는 감각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약이 아주 잘 들었다.

지켜보던 빅터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더니 벌써 동공이 풀린 반의 뺨을 칼날로 툭툭 쳤다. 마음에 안 들었다. 고작 이딴 아픔으로 정신이 나가다니.

하비는 더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했는데. 그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직 멀었다.

“네가 먹은 건 신경 하나하나가 예민해지고 고통이 극대화되는 약이야. 참고로 약 두 개가 다 그 성분이었어.”

애초에 속임수였고 선택의 여지 따윈 없었다. 굳이 거짓을 말한 건 희망을 줬다가 빼앗아 더 큰 절망을 주기 위해서였다. 친절히 설명을 마친 빅터가 이번엔 반의 손등 위로 단검을 내리꽂았다.

푸욱!

살이 갈라지고 분수처럼 붉은 피가 솟았다. 더 끔찍한 비명이 밤하늘을 찢었다.

빅터는 내리꽂은 단검에 더 힘을 실어 반에게 속삭였다.

“널 구해줄 놈은 아무도 없으니까, 돼지 새끼에 어울리는 비명이나 마음껏 질러. 하비라면 너 같은 새끼라도 구해줬겠지만.”

빅터의 팔뚝 위로 터질 듯 핏줄이 솟았다. 뜨거운 핏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갈라진 반의 손등 틈에서 꾸물꾸물 번져 나왔다. 그 피가 빅터의 까만 장갑에 스며들었다.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거든. 네놈이 놓은 그 개 같은 덫 때문에.”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픈 이름을 가슴속에 구겨 넣으며, 광기 어린 녹색 눈이 옆으로 가늘게 찢어졌다.

“자, 이제 시작하지.”

* * *

새벽에 하비를 진료하던 의사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번쩍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난데없는 방문객이 빅터임을 확인한 의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이야. 의원님이었습니까? 스터스 경의 집사가 방문을 허락해 주던가요?”

“나도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선히 보내주더군. 아무튼, 약속했던 선물.”

빅터는 작은 상자를 의사의 무릎 위로 가볍게 던졌다. 의사가 멀쩡한 한쪽 눈을 비비며 상자 안을 확인했다.

“갑자기 무슨 선물을…….”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의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피 묻은 사람의 눈알 하나가 들어 있었다. 신경 다발이 아직 붙어 있어, 살아 있는 그대로 적출한 듯한 섬뜩함이 번들댔다. 안 물어봐도 이게 ‘반 로투스’의 것임은 알 수 있었다.

빅터가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버려도 돼.”

기분 탓인지 빅터에게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혹여 하비가 이 무시무시한 걸 보기라도 할까 봐 의사는 얼른 상자 뚜껑을 닫았다. 한쪽 눈을 차지한 의안을 습관적으로 만지며 의사가 조용히 물었다.

“……이분은 무사합니까?”

빅터가 검은 가죽 장갑을 벗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무사하다면 무사하고. 네가 가서 일단 목숨은 붙여놔. 장소는 나스타가 알려줄 테니까.”

빅터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의사가 허리를 숙였다. 아직도 심장이 덜컹거렸다. 들고 있는 작은 상자는 아직 따뜻했다. 언제 봐도 두려운 남자였다.

“알겠습니다.”

허둥지둥 나가는 의사에게 빅터가 경고처럼 덧붙였다.

“참, 집사가 내가 붙여준 의사들은 쫓아냈다고 하던데. 잘 설득해 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대답을 대신한 의사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만 남자 빅터는 본능처럼 잠든 하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오늘이 완전히 지나기 전에 하비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서 피 묻은 몸을 씻어내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빅터는 아직 김이 솟는 따뜻한 물통에 손을 넣어 몇 번이고 씻어냈다. 아무리 씻어도 피비린내가 빠지질 않았다. 문득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럽혀진 지 오래였는데, 지금 와서 깨끗해지려고 하다니.

물기를 닦아낸 뒤 빅터는 하비의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하비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머뭇대던 빅터가 반듯한 이마를 가리고 있던 밤색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직 흉흉한 기세가 남아 있던 빅터에게서 살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널 아프게 한 새끼들은 전부 손봐준다고 했지. 제일 큰 벌레 하나를 처리 중이야. 조금만 참아.”

그는 잠든 자에게 진실 된 애정과 갈망이 섞인 눈길을 보냈다.

“다 끝나고 나면 한 번만 말해줘.”

옴폭 꺼진 메마른 뺨을 어루만지는 빅터의 손이 떨렸다. 그의 목소리도, 침몰하는 배처럼 까마득히 추락했다.

“잘했다고, 이제 네 옆에 있어도 된다고.”

사람을 갈아버리는 무자비한 손이 하비 앞에서는 두려움에 떠는 평범한 것에 불과했다. 그 커다란 흉기 같은 손이 오래도록 하비의 고요한 얼굴에 머물렀다.

* * *

그날 이후, 빅터가 지시 내린 것들이 차근차근 시행되었다. 막아놓았던 외교부 사람들의 업무 일지도 전달되었으며, 빅터의 소속 정보청 사람들이나 하비를 아끼는 자들이 보낸 정 가득한 편지들이 속속 스터스가 저택에 도착했다.

“이것들은 다 뭡니까?”

하비의 곁에 잔뜩 쌓인 종이와 선물, 꽃의 향연에 눈이 휘둥그레진 의사가 스터스가의 집사에게 물었다. 진땀 흘려가며 그것들을 분류하고 있던 집사가 불퉁하게 말했다.

“뭐긴 뭐예요. 베르텐 경이 또 뭔갈 하고 있는 거겠지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집사는 빅터의 노고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빅터는 하비의 집사에게 하비가 깨어나면 저것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해달라 전했다.

빅터는 하비가 현실에 미련을 가질 만한 것 중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스터스가에 보냈다.

하비는 무의식과 이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힘겨운 생에의 줄다리기를 했고, 상태는 여전히 오락가락했다. 그나마 빅터가 자신을 던진 결과로 아직 어둠 속에 영영 잠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 결과는 빅터의 예상보다 더 참담했다.

퇴근 후 집사의 허락으로 스터스가 저택에 들어온 빅터는 오자마자 하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 무언가를 가슴에 담지 않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듯 밤색 눈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하비는 지금 눈은 뜨고 있으나, 무의식을 헤매는 중이었다. 침대 위에 등을 받치고 앉아 있어도 대화할 만한 여지는 없었다. 하비의 닫힌 마음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심정으로 빅터는 주변 사물을 살폈다.

‘저건 잘해놨고…….’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잘 분류된 협탁은 누가 봐도 주인의 취향을 반영했다. 누가 하비 스터스의 가신 아니랄까 봐, 아주 질서정연하게 먼지 하나 없이 해놓았다.

만족스러워하던 빅터의 눈이 방 전체를 둘러보자 찌푸려졌다.

‘방은 언제 봐도 좁아. 답답하군. 확장 공사라도 해주고 싶지만 질색할 테고.’

하비가 제일 넓은 방은 손님맞이용으로 내놔서 정작 본인의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워낙 검소하게 사는 데다 지나치게 큰 방은 오히려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며 거부해 왔다.

소소한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다음 물어볼 것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빅터는 초조하게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건 해결되었나?”

하비의 집사는 몹시 곤란해 보였다. 요즘 그들의 공통적인 화제이자, 마음의 돌이었다. 말없이 집사가 고개를 내젓자 빅터는 침음을 냈다.

“또?”

“예. 전혀 드시질 않습니다. 몰래 먹이려 해도 어떻게든 눈치채시고…….”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는 거지, 아직도.”

긴 한숨을 내쉬며 빅터는 이마를 짚었다. 등을 받친 의자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인 스터스가처럼.

“약을 아예 먹지 않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빅터는 서양 의술에 능한 의사와 동양 쪽에 능한 뛰어난 의사 두 명을 데려왔다. 약재도 있는 대로 사 왔고, 최고의 환경에서 하비의 몸을 돌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간단한 시술 이외에는 하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비가 무의식중에도 약을 거부해서, 손쓸 방법이 없었다. 조금만 이상한 냄새가 나도 거부했고 간신히 먹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금방 토해냈다. 그러니 이제 억지로 먹여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집사를 포함한 모두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서 망설이던 차였다.

억지로 먹이려면 누군가가 하비의 몸을 강제로 속박하거나 묶어서, 그 틈에 입을 벌려 밀어 넣어야 한다. 약을 뱉지 못하도록 턱을 다물도록 붙드는 것도 해야 한다. 하비의 몸에 그런 식으로 손을 대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못 하면, 내가 해야지.”

그걸 다른 자에게 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놈이 하비를 강제로 만지는 것도 싫었다.

“어떻게 하시게요?”

빅터는 불안하게 묻는 집사의 물음을 무시하고 종이 더미 옆에 숨기듯 놓인 동그랗고 까만 것들을 보았다.

“저게 오늘 먹어야 했을 약인가?”

“예. 몸을 따뜻하게 하고 기력을 돋게 만드는 것이라 했습니다. 환이라고 하더군요.”

빅터가 보낸 의사 중 동양 의술에 해박한 자가 놓고 간 것이었다. 환자가 현재 너무 많이 지쳐 몸 자체의 기력을 끌어올리는 게 우선이라며 매일 먹게 하라고 했다. 탕약이라는 수상한 냄새가 나는 물약도 있었다.

하지만 하비가 도통 먹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약이 쌓이고만 있었다.

“같이 먹여도 되나?”

“예.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얼굴로 쌓여만 가는 약을 보고 있던 집사는 갑작스런 빅터의 말에 놀랐다.

“나가 있어. 다 끝나면 부를 테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는 물음도 쏙 들어갈 만큼 빅터의 기세가 흉흉했다.

“너무 오래 끄시면 노크하겠습니다.”

“그러든가.”

빅터는 집사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의 눈길은 오로지 하비에게만 박혀 있었다.

집사가 흘끔대면서 불안한 태도로 나가자 빅터는 하비의 의식 없는 멍한 얼굴을 보며 으르렁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소용없으니 헛짓하지 말라는 거지?”

빅터는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할 의지조차 없는 하비를 노려보았다. 녹색 눈이 진한 감정을 안고 이글거렸다.

“죽어가는 걸 손 놓고 지켜보라는 건가.”

마음이 달궈진 창으로 찔리는 것처럼 아프고 쓰라렸다. 잔인한 하비는 몇 번이나 같은 곳을 들쑤셨다. 차라리 날 선 증오를 쏟아내는 게 나았다. 가끔 멀리서나마 볼 수조차 없도록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빅터는 진주나 루비 같은 보석들이 잔잔하게 박힌 검은색 푸르푸앵을 의자 받침대에 벗어두었다. 금사가 새겨진 목까지 올라온 러플 칼라를 매만지고 팔목까지 내려오는 옷자락을 걷었다. 굵은 팔뚝에 시퍼런 힘줄이 솟아 있었다.

그는 침대 위로 올라 앉았다. 어림도 없다는 듯 금발 아래 두 눈이 끈끈한 집착과 오기로 번들댔다.

“나 혼자 남겨두고 가려고?”

빅터가 한 손으로 하비의 눈을 가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이마에 제 이마를 대었다. 살아 있는 자의 희미한 맥박이 느껴졌다. 생생한 삶의 증거에 매달리듯 빅터가 좋은 향이 나는 익숙한 살결에 이마를 문질렀다.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쓴 물을 빅터가 간신히 삼켰다. 여기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어떻게 견디고, 살아냈는데. 잠시 어리석었던 자에게 주는 결말이 이토록 잔인하다니.

원망이 들었지만 빅터는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뭘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한들, 하비가 겪었던 것보다는 못하다. 그는 믿었던 발치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주었던 마음을 배신으로 돌려받으며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대쪽같이 강인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만큼, 처절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빅터는 입술을 깨물고 피를 그렇게 많이 쏟았다던 하비의 아랫배를 살며시 만졌다. 지금은 단단한 근육의 감촉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비가 아파하며 쓰러질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다시 한번 무력감을 주었다.

들을지 모르겠지만 빅터는 하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하비가 작게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의식을 차린 것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좀 거칠어도 이해해 줘.”

일어난 빅터가 차갑게 식은 탕약이란 것을 먼저 가져왔다. 같이 먹여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탕약 안에 환을 떨어뜨렸다.

조심스럽게 하비의 입에 조금 흘려 넣어보려 했으나 약 냄새가 나는 걸 알자마자 바로 고개를 틀어버렸다.

이럴 줄 알고 있었기에, 빅터는 이번엔 망설임 없이 탕약과 환을 조금 제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곤 하비의 턱을 꽉 움켜쥐고 강제로 벌린 뒤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맞댔다. 내용물을 퍼붓는 것처럼 약을 전했다.

하비는 수상한 약 냄새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손을 올려도 빅터의 맞은편 손에 짓눌렸다. 나머지 손으로 빅터의 가슴을 후려쳐도 단단한 성벽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큿……!”

하비가 목으로 넘어오는 쓴맛에 발버둥 쳐도, 뱉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누워 있는 사이 완력이 많이 약해져서 당해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위에서 누르는 힘이었다.

결국 하비의 입가로 남은 탕약이 흘러 턱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발버둥 치던 하비가 가슴을 치던 손을 올려 빅터의 목을 움켜쥐고 꽉 조였다. 어서 입을 떼라는 경고였다.

남은 힘을 다 쥐어짠 것인지 손힘이 보통이 아니어서, 빅터조차 숨이 막혀 힘겹게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빅터는 입안의 약을 전부 흘려보낼 때까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간신히 넘어간 약물 때문에 하비의 목울대가 일렁이고, 빅터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떻게든 전부 밀어 넣었다.

대충 끝난 것 같자 빅터가 씁쓸한 약초 향이 가득한 하비의 입안을 마지막으로 길게 쓸었다. 뒤로 물러나는 빅터의 목에 붉은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하비가 제 목을 긁어 내리며 먹은 것을 어떻게든 토해내려 했다. 물론 그대로 내버려 둘 빅터가 아니었다. 빅터의 큰 손이 입술을 빈틈없이 덮고 있어서 나오려던 약물이 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한참을 몸으로 실랑이를 벌였다.

간신히 밀어 넣은 약이 몸에 흡수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린 빅터가 드디어 하비의 입술 위에서 손을 뗐다. 한차례 끝났다고 생각하자 빅터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갔다. 어떻게든 했다.

“하아…….”

침대 위는 난장판이었다. 약물이 튄 흔적이 너저분한 데다, 하비의 입술은 젖어 번들거리고, 얼굴엔 열이 올라 있었다.

한껏 전쟁을 치른 뒤 빅터는 물수건을 집어 들고 와 하비의 턱과 뺨을 닦아냈다.

하비는 이런 와중에도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불쾌한 침입자를 그 초점 없는 눈에 가만히 담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인지조차 못 하던 처음보다는 뭔가 쳐다보는 시선에 남다른 빛이 어려 있었다. 동물적인 경계와 미움이었다. 그 눈빛에 빅터는 또 가슴이 욱신거렸다.

따끔거리는 목을 손으로 쓸면서 빅터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몇 번 더 남았어.”

빅터는 목을 조르며 움켜쥐던 하비의 손이 생생했다. 주먹이 닿은 가슴에는 멍이 든 것 같았지만 빅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맞는 게 마음의 짐이 그나마 덜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런 것보다 전에 비해 힘이 없는 것이 마음 아플 뿐이었다. 예전의 하비가 이랬으면, 아무리 그라도 큰 각오를 했어야 했으니까.

빅터가 남은 탕약을 들고 선언처럼 말했다.

“네가 아무리 목을 조르고 때려도 소용없어. 난 끝까지 할 거니까.”

이 탕약이 전부 그 몸속으로 흘러 들어갈 때까지, 이 전쟁을 몇 번이고 반복할 생각이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빠짐없이 찾아와 할 것이다.

다짐을 실천해 남은 탕약을 거덜 내고 나서야 겨우 이 지독한 과정이 끝났다.

빅터는 꿋꿋하게 물수건을 들어 하비의 얼굴을 닦아냈다. 땀범벅이 된 금발이 어지러이 엉켜 있고 옷도 엉망이었지만 정작 본인 행색은 신경 쓰지 않았다.

탕약에서 나는 약초 냄새가 가득한 얼굴을 꼼꼼하게 닦으며 빅터가 말을 걸었다.

“최근 구교와 신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국왕은 빅터 같은 신흥 귀족들을 신교로 편입시켜 구교인 기존 귀족들을 견제해 보겠다는 셈을 굴리고 있었다. 구교인 기존 귀족에는 스터스가나 로투스가가 포함되었다.

빅터는 국왕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했다. 하비의 이마를 닦던 손길이 멎었다.

“근데 난 그런 거 관심도 없어. 내 관심사는 딱 두 가지였거든.”

저음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돈, 그리고 너.”

경계심 가득한 밤색 눈에 마음이 금방 흔들릴 것 같았지만 빅터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정확히는 네 잘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은 거였지만. 그건 한때의 치기였고, 제대로 된 욕망도 아니었어. 너무 늦게 깨달아서 네가 이렇게 된 거지만…….”

빅터는 자신을 저주하고 욕했다. 제때 먹지 못해 야윈 얼굴에도 음심이, 욕정이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참지 못한 빅터가 하비의 입술에 짧게 키스한 뒤 젖은 튜닉 위로 드러난 몸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렇게 만져도 모자랐다. 하비가 직접 말해줬으면 좋겠다. 지난날의 고백을 다시 들려줬으면 했다.

무방비하게 쏟아지는 하비의 날 선 눈빛을 받으면서, 빅터는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함께 짧은 휴가를 가던 날, 마차 안에서 흔들리면서 누워 있던 하비의 허벅지는 극락이었다. 따뜻하고 단단하게 솟은 근육이 편했다. 자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만지며 쑥스러워하던 그 손길도 너무나 그리웠다.

“알아줬으면 좋겠어. 네가 없었으면 난 일찍이 죽었어. 돌아와서 떵떵거리는 것도, 지금 살아서 말할 수 있는 것도, 전부 네 덕이야.”

자꾸만 움찔대며 도망가려는 허벅지를 붙들면서 빅터가 중얼거렸다. 지금 마음을 다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비의 시원한 페로몬을 한껏 들이켜며 빅터는 하비의 다리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러니 네가 없어지면 나도 없는 거라고.”

엎드려 있느라 빅터는 하비의 눈에 점점 빛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빅터를 바라보는 밤색 눈에 붉은 손자국이 생긴 그의 목이 잔상처럼 맺혔다. 진하게 타오르던 증오에, 희미한 죄책감이 섞였다.

침대에 힘없이 늘어졌던 하비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다가 멈췄다. 하비의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빅터는 계속 하비에게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부탁이니까 잘 챙겨 먹고 빨리 건강해져. 그래야 날 미워할 힘도 생겨. 지금같이 누워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못 해.”

하비는 빅터의 모두 말을 듣고 있었다. 멀게만 느껴지던 빅터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웅웅대며 흐릿하게 들리던 것이 선명해졌다.

지끈.

하비가 또다시 몰려오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에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괴로움만 주는 이 남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론 끝도 없이 두려웠다. 손쓸 틈도 없이 잃어야 했던 것이 생각나서, 손끝이 저릴 정도로 힘들었다. 무언가 전해야 할 것이, 이 남자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사랑스러운 무엇이라고.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 온통 벌건 피가 하비의 눈앞을 차지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비는 먹었던 약을 토해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우욱!”

깜짝 놀란 빅터가 번쩍 상체를 일으켰다. 하비가 미간을 구기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서 빅터는 쩔쩔맸다. 대신 아프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더 고통스러웠다.

“왜 그래? 괜찮아?”

결국 빅터는 문을 박차고 나가 소리 질렀다.

“집사! 의사 불러와!”

하비는 허연 위액을 뱉고, 아까 먹었던 약까지 도로 토해내고 있었다. 이미 흡수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위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없을 때까지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심지어 다시 피를 토하기도 했다. 대기하고 있던 의사가 왔을 때는 탈진해서 쓰러진 채였다.

빅터는 참담한 심정으로 진정제와 진통제를 맞는 하비를 보았다. 방 안엔 탕약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가득했다.

* * *

반복되는 약 먹이기 전쟁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하비는 여전히 거부했고, 빅터가 온몸을 써서 제압한 후에야 겨우 상황이 종료되곤 했다.

의식이 있을 때는 어떤 방법을 써도 절대 먹지 않았기에 그나마 제정신이 아닐 때를 노려야 했다.

동방에서 온 명의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것은 아닌지, 정말 효과가 있긴 했다. 거기다 다른 의사도 합세해 악화된 하비의 위장을 보호하는 약도 함께 투여했다. 하비의 상태는 다행히 점점 호전되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반 로투스 경의 실종과도 맞물리는 시기였다. 세간에는 반 로투스 경이 술에 취해 다리 아래로 실족했을 거라는 예상이 떠돌았다. 그를 찾기 위해 인력이 동원되었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하비가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뜨는 날이 길어졌다.

우선, 빅터가 억지로 약을 먹이는 것이 효과가 있었다. 몸이 좋아지자 자연스럽게 의식이 돌아오는 시간도 길어졌다.

다음 결정적인 계기도 마찬가지로 빅터가 만들었다.

하비는 긴 잠을 잔 것 같았다. 기억해 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피해서.

지키지 못한 것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것들은 무의식중에서도 그를 쫓아왔다. 집요하게 찾아와 기어이 하비의 심장을 찢어놓았다. 셀 수도 없는 조각으로 찢겼다. 무수한 조각들은 다시 붙기도 전에 찬바람이 들어 얼어붙었다.

방으로 들어온 집사가 멍하게 창가만 보고 있는 하비를 보고 물었다.

“뭘 그렇게 매일 보시는 겁니까?”

하비가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것을 알지만 집사는 꾸준히 말을 걸었다. 의사가 시킨 것이기도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도 미쳐 버릴 것 같아서였다.

“하긴, 이곳이 풍경 보기엔 좋은 자리긴 하죠.”

집사는 씁쓸하게 자문자답했다. 목적 없는 하비의 눈빛이 그에겐 지독하게 어색했다.

당당한 느낌을 주던 눈은 이제 한없이 공허하기만 했다.

침대에 앉아 아침 해가 뜨고, 저녁해가 가라앉는 것을 보면서 하비는 시간을 잊었다. 사람도 잊었다.

그나마 그것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악감과 책임감으로부터 눈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다, 유일하게 하비의 심장이 제 기능을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전쟁과 같은 약 먹이기를 끝내고 나면 빅터는 하비의 집사와 마찬가지로 늘 말을 걸었다. 하비가 어떤 상태든 상관없이, 꾸준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미안해.”

또다. 지겹지도 않은지, 같은 목소리는 계속 하비의 의식을 두들겼다. 하지만 마냥 싫지 않아서 하비는 그걸 음악 소리처럼 생각했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정말 몰랐어.”

닫아놓은 의식 사이에서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조각나 얼어붙어 버렸던 것들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제 형태를 찾았다. 온전한 모양으로 심장이 뛰었다. 그 원동력이 원망이든, 분노든, 뭐든 상관없었다.

누구길래 자꾸 찾아와서 같은 말을 하는 걸까. 왜 꺼진 마음에 불씨를 지피는가.

“오늘은 그런 눈으로 보지 않네.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지? 의아했지만 하비는 말없이 그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다른 사람 시선을 무서워해 본 적 없었거든. 근데…….”

따뜻한 손이 하비의 눈가에 닿았다. 두려운 듯 그의 손길이 머뭇댔다.

“네 건 무섭다.”

“정신 들면 차라리 날 죽도록 때려. 그게 속 편할 것 같아.”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거야. 힘들 때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고 있었냐고. 그래야 변명이라도 하지.”

이내 자조적인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 변명 따윈 너한텐 너무 가볍겠지만.”

그는 하비에게 힘든 곳으로, 자꾸만 나오라고 재촉했다. 그대로 가라앉아 편해지고 싶은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침묵 속에 잠기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늦게 알아서 미안해. 밀어내도 좋으니까, 정신 차리고 날 제대로 봐줘.”

그런데 빅터의 목소리가, 그러지 못하게 자꾸만 막았다.

“혹시 걱정돼서 그런 거면 괜찮아.”

“너에 대해 잘 모르면서 떠드는 것들, 반 로투스 그 새끼까지 다 손봐줬어.”

언제나 자신감 가득하고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사람이었는데, 애원하고 있었다.

빅터는 하비의 손을 자신의 눈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제발……. 부탁이야.”

초점 없는 밤색 눈이 무심코 빅터에게로 향했다. 어느 것도 담지 않으려 하던 눈에 고개 숙인 금발의 미남자가 맺혔다.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간절한 바람이었다. 하비의 손을 잡은 빅터의 눈가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빅터의 낮은 목소리가 두려운 듯 떨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아.”

하비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빅터에게 잡힌 손에 뜨끈한 물기가 묻었다. 굳은살 가득한 손가락 사이로 빅터의 눈물이 흘렀다.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가 두어 번 더 이어졌다.

한 번만 다시 돌아봐 달라면서, 빅터는 차마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빅터가 떠난 뒤, 하비는 그 사이 말라 버린 자신의 손을 계속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그 눈물이 산산조각 나 얼어버린 것들을 아주 조금씩, 녹였다. 더디지만 확실하게.

빅터의 긴 기다림 끝에, 전환점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깨어 있는 것보다 무의식이 더 길던 하비의 시간이 변한 것이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창가를 바라보던 하비가 집사에게 물었다.

“지금이 언제지?”

“네?”

갑자기 말을 건 주인에게 화들짝 놀란 집사가 허둥댔다. 하비는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계절.”

그제야 알아들은 집사가 하비가 원하는 대답을 골라 해주었다.

“아직 가을 끝자락입니다.”

이렇게 추운데 아직 겨울이 아니라니. 이상했다. 창가 너머로 연무장이 보였다. 어릴 때부터 긴 시간을 보내왔던 장소였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그리도 나가기 싫었는데.’

어릴 때 겨울이 가까워지면, 침대 위 이불 속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기 싫었다. 그런데도 호랑이 같은 아버지의 꾸지람이 두렵기도 하고, 의무감으로 연무장에 나가곤 했다. 이제 습관이 되어버렸지만.

하비는 묘한 감상에 젖어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총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스터스가는 아직도 관습에 얽매어 기사도에 연연했다.

기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예전에 비하면 효용이 떨어진 건 사실이었다. 스터스가 사람들은 총을 쓰는 건 끝까지 배우지 않았다. 총을 비겁하다 생각해서였다. 예전처럼 기사가 가문의 이름을 밝히며 검을 드높이면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그의 목숨을 끊었다. 스터스가는 이를 정의가 아니라 여겨 배척해 버렸지만, 하비는 알고 있었다. 총은 비겁한 게 아니라 새로운 문물이며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을.

아래를 내려보던 하비의 눈이 길게 일그러졌다. 총을 생각하자 이것을 잘 다루던 빅터가 떠올라서였다.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을 완전히 지워내거나 슬그머니 들어와 함께 존재한다. 하비는 낡은 자신을 지워내는 사람이 빅터라고 생각했다. 함께 가는 선택지는 이제 없어 보이니까.

그때 집사가 버벅대면서 하비를 불렀다.

“좀 괜찮으십니까?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니, 됐어.”

하비의 시선이 연무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그는 무인이 아니라 문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검을 손에서 놓지 못한 건, 단순한 고집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미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이것마저 놓아버리면 자신마저 불필요한 존재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비는 자신의 모순에 실소가 나왔다. 손에 쥔 것 어느 하나 버리지도 못하면서 정작 버려지는 건 두렵다니. 아마 그의 모순을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빅터일 것이다.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그 잔인한 남자는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텐데.

‘지금 와선 다 소용없지.’

그저 하던 대로 살면 된다. 하비가 냉소했다. 언제부터 내게 기댈 곳이 있었나. 주어진 것 이상을 욕심내니 이런 꼴이 되는 것이다. 일상을 되찾고, 그런 뒤에는…….

마음을 다잡던 하비는 순간 들려오는 환청에 흠칫했다.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두려운 듯 떨리는 낮은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아.’

간신히 이어붙이던 의지가 흔들렸다. 하지만 하비는 머리를 흔들어 환청을 억지로 떼어냈다. 더는 싫었다. 그 배신자 때문에 매번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나약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비가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기미를 보이자 집사가 빠르게 달라붙어 부축했다.

“벌써 움직이시려고요?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하비는 꽤 단호하게 말했다.

“누워만 있으면 회복될 것도 안 돼.”

참혹한 일이 있은 뒤, 처음으로 보인 의지였다.

며칠 동안 하비는 몸을 움직이는 연습을 했고, 그 뒤로 연무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움직일 정도가 되자 하비는 확실히 전보다 좋아졌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가 몇 시간씩 집중했다. 물론 그러다가도 종종 의식을 차단하곤 했지만, 장족의 발전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비는 침대 밖으로 나가 검술 훈련을 하고, 검을 묶어놓은 연습용 허수아비와 가상 대련을 했다.

어릴 때부터 익혀온 검식과 검격을 재확인하기라도 하듯 신중하고 날카로운 태도였다. 물론 체력이 많이 떨어진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했지만.

챙! 채앵-!

집사의 언질을 받아 연무장에 들어온 빅터는 낯익은 검 부딪치는 소리에 안심했다. 하비와 가장 어울리는 소리였다.

팔짱을 끼고 비스듬하게 기대선 빅터는 땀 흘리며 장검을 부대끼는 하비를 지켜보았다. 비스듬하게 검날을 흘렸다가 내려치는 속도에 힘을 가하고 빼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올란시로 다시 돌아와서 처음 봤을 때도, 하비는 저런 모습으로 진지하게 검을 쓰고 있었다. 소드 클럽에서 누군가와 대련을 한 직후였다.

그때의 하비는 빅터를 보자 순간적으로 얼굴에 죄책감, 미안함 같은 것을 띄웠다.

하비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악수를 청했다. 이미 빅터의 얼굴을 알고 있는 듯 인사는 자연스러웠다.

‘경이 빅터 베르텐인가. 무사히 돌아와서 반갑고,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난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외교부에서 일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민 손을, 빅터는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맞잡았었다. 그러곤 꽉 잡아 은근히 자신 쪽으로 당겼다. 아픔으로 찌푸려진 밤색 눈을 보며 당시 빅터는 빈정대듯 말했다.

‘반겨줘서 고맙군. 앞으로 볼 일이 많을 거야, 스터스 경.’

빅터의 장담대로 ‘볼 일’이 그 후로 참 많았다. 안 좋은 일로 협박을 곁들여 얼굴 붉혀가며 하비를 괴롭히고, 또 힘들게 하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빅터가 쓰린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한참을 땀을 뽑고 움직인 후에야 하비는 검을 거두었다. 멀리서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하비가 문득 뒤돌아보자 빅터는 피할 새도 없이 시선이 노출되었다.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빅터를 본 하비의 얼굴이 즉각 일그러졌다.

하비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언제나 빅터를 오래 두지 않고 내보냈다. 같이 있기 거북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면 빅터는 군말 없이 따랐다. 종종 집사가 하비의 상태를 봐가며 빅터에게 먼저 연락을 해줄 때도 있었다. 주로 몸을 보하는 약을 먹일 때 필요해서 부른 것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빅터의 지난 고생을 알 리 없는 하비가 그를 노려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이 왜 내 저택에 있지? 누가 허락했나.”

성큼성큼 다가온 하비가 장검으로 빅터의 얼굴 바로 옆을 찍었다. 워낙 빠른 속도라 반응할 틈도 없었다.

콰악!

검날이 부르르 떨리며 박힌 곳 옆으로 나무껍질이 툭툭, 떨어졌다. 스친 검날에 빅터의 매끈한 뺨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놀란 기색도, 아픔조차 없었다. 하비가 검을 찍은 채 얼굴을 가까이하며 차갑게 말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린 한 장소에 있기엔 불쾌한 관계인 것 같은데.”

코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왔다. 늘 온화하고 다정하던 밤색 눈에 이토록 분노가 가득 찬 적은 드물었다.

하비는 씹어뱉듯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무슨 볼일이 남았지?”

빅터는 바로 옆에 검이 꽂혀 있는 건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무심한 시선은 오로지 하비에게만 닿아 있었다.

무성한 사철나무 잎 아래 통과된 햇빛이 빅터의 화려한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 와중에도 빅터는 가까워진 하비의 숨결과 혈기가 도는 입술에 눈이 갔다.

‘키스하고 싶네.’

잠깐 생각하던 빅터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이 저택에 사람이 너무 없어 보여서. 내 체온이나마 좀 보태려고 왔지.”

어이없다는 듯 하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사용인 몇이 최근에 또 그만두었다. 전부 빅터가 지시해 퍼뜨린 스터스가에 대한 소문과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뭐, 사람이 없어 보여서 온기를 보태려 왔다고?

이 뻔뻔함은 어디까지 계속될 참인지. 하비는 검자루에 힘을 더 실었다.

“또 수작질인가.”

자신의 속은 이미 다 타들어가 잿더미만 남았는데, 이 남자는 다 쥐고 있으면서 여유롭기만 했다.

낮은 목소리로 하비가 경고하듯 말했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어. 경의 같잖은 협박에 어울려 준 건, 내게 주어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남은 것이라 해봐야 고작 낡아빠진 스터스가의 명패, 고집스럽게 쥐고 있던 명예, 그런 것들이었다. 가끔은 탐탁지 않아도 자신에게 남은 책임이기에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바꿔 버렸다.

몸도, 마음도, 지녔던 신념까지 가진 모든 것을 내줬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한 건지, 아직도 욕망이 들끓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당장에라도 만지고 싶다는 것처럼, 뜨거운 갈망이 하비를 향했다.

하비는 빅터를 고요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제 지겨웠다. 제가 한 것의 성과를 보려는 것처럼 끝도 없이 찾아와 사람을 기만하는 행태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저 달갑지 않은 욕구가.

“왜 계속 미련이 남은 것처럼 구는 거지?”

뺨을 타고 흐르는 진득한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하비를 마주 보았다. 아니, 그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마음 어딘가가 잘게잘게 찢기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하비가 이 정도로 몸을 움직이고 현실을 움켜쥐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을 증오하는 힘 때문이니까.

이를 돕기 위해 빅터는 초조함을 감추고 여유로움을 가장했다.

“잊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난 가질 수 있는 걸 다 가져야 직성에 풀려. 아직 부족하고.”

이런 잔혹한 관계를 바라는 게 아니다. 다정한 시선이, 너의 사랑이 부족하다. 말해도 믿지 않을 테니, 그저 빅터는 속으로만 삼켰다.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하비는 꽉 쥐었던 검 손잡이에서 힘을 풀었다.

“아, 잠시 잊고 있었군. 경은 항상 누군가의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 즐기는 최악질이었는데.”

짧게 냉소한 하비가 찍었던 검을 빼냈다. 버석대며 나무껍질이 또 우수수 떨어졌다. 그는 허공에 한 번 검을 휘두른 뒤 검집에 단번에 꽂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하비는 한 걸음 물러서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보인 허점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재미있었나? 포기 못 하고 계속 오는 걸 보니 몇 배는 즐겼나 보군. 하긴, 그랬겠지.”

등에 닿았던 나무껍질을 손으로 털어내던 빅터가 다음 말에 화들짝 놀라 하비를 쳐다보았다.

“알파가 약 하나로 임신하는 대단한 희극을 봤을 테니.”

자조적인 말투도,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담담했기에 더 확실하게 꽂혔다. 흐려지는 빅터의 얼굴을 보며 하비는 그날의 회한을 천천히 쏟아냈다.

“돈 주고도 못 볼 명장면이었겠지만 아쉽겠어. 이미 끝났거든.”

하비가 한 손으로 자꾸만 무너지는 얼굴을 덮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 남자를 마주하면서 뱉는 것들이 너무 아팠다.

바보같이 믿었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말뿐인 사랑에 매달려서 심취했던 자신을,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을까.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빅터 베르텐 경은 원망할 대상이 아니었다. 속은 자신이 멍청했으니까.

하비는 빅터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눈을 내려 배를 가리켰다.

“이제 여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처참하게 구겨지는 빅터의 얼굴에 하비는 묘한 통쾌함과 이질감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얻는 기묘한 쾌감도 있었다. 이런 것에 상처받는 표정으로 슬퍼하는, 아니, 슬퍼하는 ‘척’하는 저 가식적인 녹색 눈에 이상한 자학심이 생겨났다.

기이하게 일그러진 밤색 눈에 평생 억눌러 왔던 케케묵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별로 기억에도 없는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 목소리, 나직한 자장가, 기댈 만한 것들은 언제나 빨리 그를 떠나갔다. 혹독한 매질과 질책하는 높은 목소리, 잘못한 것들만 남았다.

지금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조금 마음을 기댔다고 무참한 꼴을 당해야 했다.

항상 묻고 싶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하비가 비명 지르듯 뱉었다.

“어떻게 이걸 쏟아냈는지 말해줘? 그것까지 말해줘야 여기서 나갈 생각인……!”

아, 이건 못 참겠다. 아찔해진 빅터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비의 손을 치워 버리고 충동적으로 키스했다. 더 이상 저 말을 못 하게 막아버렸다. 도저히 계속 연기할 자신이 없었다. 마음이 뜨거운 용암 속에 떨어져 자글자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비의 팔을 부러질 것처럼 꽉 움켜쥔 빅터가 격렬하게 입술을 부대끼고 뜨거운 혀를 자신의 혀로 강하게 옭아맸다. 반발하듯 하비의 혀가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단단히 얽었다.

“흐…… 읏.”

타액이 새어 흘렀다. 하비는 뒷머리를 움켜쥐고 숨 막히게 키스하는 빅터의 기세에 점점 뒤로 밀리다 나무에 부딪치고야 멈췄다.

쿵!

사철 푸른 뾰족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머리로 쌓였다. 그럼에도 혀가 몇 번이나 뒤엉키고, 섹스하는 것처럼 야하게 달라붙어 왔다.

행위가 거듭될수록 하비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속에 잠깐 품었던 독기마저 빅터가 죄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빅터와 턱이 부딪치고 그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입술은 더 깊이 파묻혔다. 더 파고들 곳이 없는데도, 어떻게든 안을 침범하려는 것처럼.

“그흐…… 만……!”

잠깐 틈이 생겼을 때 하비가 붙들린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우성 알파와의 힘의 격차가 이런 것인가, 처음 느꼈다. 이런 식으로 찍어누르는 것에 큰 저항감이 생긴 하비가 주먹을 쥐어 빅터의 복부를 후려쳤다.

하필 저번에 맞아 멍이 든 곳을 때렸던지라 빅터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하비가 맨 허리의 검집이 복부를 찔러왔지만 그가 내뱉는 말들이 그것보다 더 심장을 깊게 찔러 들어왔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겨우 입을 뗀 빅터가 숨을 몰아쉬는 하비를 안타까이 보았다. 빅터는 하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머리에 붙은 뾰족한 사철 잎을 떼어냈다. 손가락을 찌르는 따가운 가시가 전혀 아프지 않고 달가웠다. 빅터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 갈 테니까 그런 말…….”

하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언제나 자신감 가득하던 이 오만한 자의 눈에 고통이 가득 어리고,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 마. 안 해도 돼.”

비가 올 것처럼 찌푸린 하늘 아래, 빅터도 구름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하비의 머리에 붙은 남은 사철 잎도 떼어낸 빅터는 그것들을 꽉 쥐었다. 단단한 가시에 찔린 손에서 피가 조금 흘렀다. 뺨에서 나던 피는 이미 응고되어 굳었지만 새로운 피가 생겨났다.

혼자서 하혈하며 괴로워했을 하비를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그를 비참하게 만든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빅터는 까맣게 죽어버린 밤색 눈에 대고 맹세했다.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빅터가 마음속으로 하비에게 속삭였다. 날 밀어내려고 너까지 파괴하진 마. 나한테만 화내고 욕해. 그 끔찍한 일, 다신 떠올리지도 마.

입술을 지그시 깨문 빅터는 하비를 등지고 뒤돌아섰다. 이렇게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니, 한동안 아예 하비를 보지 않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돕는 길 같았다. 비록 보지 않고 견딜 자신은 없지만.

그런데 믿을 수 없는 말이 하비의 목소리를 빌려 전해왔다.

“3번, 아니, 5번.”

빅터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그의 숨소리조차 멎었다. 지금 들려오는 말들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확했다.

“그 정도면 되겠나? 아무래도 내 몸이 목적인 것 같으니.”

하비가 제안하는 것은 농밀한 만남의 횟수였다.

이토록 눈물겨운 연기까지 할 정도로 빅터가 가지고 싶은 무엇. 하비는 그게 자신의 육신, 혹은 다른 무엇임을 알았다. 그래서 제안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지만 이미 그의 입은 원하는 바를 뱉고 있었다.

하비는 말하면서도 속으로 멈칫했다. 혹시 빅터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 주고 싶은 건가. 상처 주고 싶어서?

그건 아니었다. 상처를 주고 싶었다면 더 많은 확실한 방법들이 있었다. 저주를 퍼붓거나 이 모든 악몽이 네 탓이라고 하면 되었다. 작은 거부에도 힘들어하는 빅터를 여러 번 보았으니까.

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럼 이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마치 계속 빅터와 만날 수 있는 이유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게 끝이야.’

하비는 솟아오르는 의문과 혼란을 찍어눌렀다. 이건 관계를 끝내기 위한 초석이다. 괜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그리 자신을 다잡았다.

빅터와 하는 마지막 협상이었다. 그가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으리란 것도, 하비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다 끝나면 다신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내게 접근하지도 마.”

심호흡을 한 빅터가 다시 뒤돌아섰다. 손안을 가득 메운 가시 잎을 던지며 그는 평상심을 간신히 쥐어짰다.

이건 무조건 잡아야 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빅터는 일부러 입술을 삐뚜름하게 세웠다. 평소처럼 보여야 한다.

“겨우? 10번은 되어야지.”

감히 자신에게 협상할 자격은 될까. 하비가 무엇을 말하든, 그는 받아들여야 했다. 이런 기회라도 있는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또 벌컥 욕심이 생겼다. 횟수를 늘려서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 더 욕심부려 보기로 했다.

“원하는 걸 들어줄 테니까,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슬며시 구겨지는 하비의 눈을 살핀 빅터가 본심을 말했다.

“약 잘 챙겨 먹어. 내가 주는 거라고 버리지 말고.”

이상한 조건에 하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빅터의 태도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달라서 혼돈이 왔다.

빅터는 하비가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비열한 이미지에 맞춰 다시 이야기했다. 그래야 하비가 들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써먹는 미소를 어렵사리 띠며 빅터가 입에 발린 거짓말을 했다. 자신을 깎아가며 던지는 거짓은 뱉는 동시에 빅터를 숨 막히도록 갉아먹었다. 그의 영혼까지도.

“경이 건강해야 나도 즐거움이 있지 않겠어? 내가 아무리 악질이라도 허약한 사람 괴롭히는 취미는 없거든.”

그리 덧붙이자 하비가 안심하는 것이 보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빅터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처럼 굴 때마다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설레는 것처럼 반응하는 제 심장을 저버리고 싶었으니까.

하비는 주변을 잠깐 살폈다. 허락 없이 이곳을 출입하는 사용인은 집사밖에 없었지만, 그는 부르지 않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혼자 수련하는 것을 좋아하고, 집중하던 것을 방해받기 싫어하는 하비의 성미 탓이었다.

몸을 단단히 감쌌던 두툼한 모직 대련복을 벗어 던지며 하비가 쏘듯이 말했다.

“지금 해. 땀 냄새가 나서 좀 역겹겠지만, 빨리 끝내고 싶거든.”

도무지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망가진 것 같은 하비를 볼수록 빅터는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보는 것도 고통이었다. 하지만 제가 치러야 할 대가임을 알고 있었다.

빅터가 얼어붙은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다행히도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위기에서 구했던 입술은 지금도 그를 구제해 주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고맙게 받아들이지.”

하비를 나무 앞에 세워두고 빅터는 뒤돌라 말했다. 그가 자신의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넉넉히 타액을 묻히고는 하비의 반바지를 잡아 내렸다. 속옷까지 한꺼번에 벗어 던지는데 하비는 순순하게 협조했다. 기분 탓인지 구멍이 움찔대는 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빅터가 봉긋하게 솟은 탄력 있는 하얀 엉덩이 사이로 입을 내렸다. 마른 입술을 부대끼고 혀를 밀어 넣자 하비가 놀라 흠칫거리긴 했지만 소리를 내진 않았다.

빅터는 혀로 구멍 사이를 벌리면서 생각했다.

‘좋은 냄새…….’

검술 수련 전에 어찌나 열심히 씻은 건지 아직도 향긋한 입욕제 향이 가득했다. 집사에게 한 번 씻을 때 지나칠 정도로 오래 씻는다고 듣기는 했다. 질척하게 젖은 구멍에서 간신히 입을 떼자 희미한 알파 페로몬이 빅터의 코끝에 달라붙었다.

넣는다는 말 없이 이번엔 빅터의 손가락이 천천히 주름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하비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미처 다물기 전에 소리가 새어 나갔다.

“읏…….”

오랜만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뻑뻑했다. 성급하게 달려들던 손짓이 아파하자 자신을 자제하려는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우습게도, 배려하는 모양새였다.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비가 고개만 돌려 말했다.

“찢어져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해.”

빅터가 대답없이 손가락을 구부려 내벽을 긁었다. 그는 하비가 어느 곳을 느끼는지, 좋아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깊은 곳을 꾸욱 누르자 부르르 떨리는 몸이 손가락을 통해 느껴졌다. 뜨거운데다 구멍이 너무 좁아서 손가락이 잘릴 것같이 조여들었다. 여린 점막을 자극하자 젖은 소리가 났다.

빅터는 당장에라도 박고 싶은 것을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는 동안은 내 마음이야. 내 뜻대로 하지 말라는 조건은 걸지 않았잖아?”

하비도 그 뒤로 한마디 말 없이 침묵했다. 그 대신 빅터가 주는 감각에만 온몸을 맡겼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신음을 버텼다.

빅터의 손이 구멍 안 이곳저곳을 들쑤실 때마다 머릿속에 차츰 열이 올랐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빅터 베르텐, 그의 존재처럼 말이다.

내벽이 마를 만하면 빅터는 손을 꺼내 다시 타액을 묻히고 구멍을 넓히려는 시도를 했다.

하비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은 시점일 때, 드디어 두꺼운 귀두가 천천히 구멍 속으로 들어왔다. 움켜쥔 나무껍질이 하비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허억…….”

날카로운 신음이 닫힌 하비의 입술을 열고 튀어 나갔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막막한 두께와 압박감이었다.

푸욱-!

고작 귀두 끄트머리가 들어오는데도 찢어질 것처럼 통증이 몰려왔다. 우성 알파의 발기한 성기는 몇 번을 받아도 상상 그 이상이었다.

간신히 구멍에 파고든 큰 귀두가 모습을 감추고, 기둥의 시작 부분에서 진입을 멈췄다. 성난 성기가 혈관을 세우고 불끈거렸다.

“이것도 벗지?”

길게 늘어져 치렁대는 튜닉을 만지작대던 빅터가 고개를 숙여 튜닉에 입을 맞췄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장면을 보던 하비는 한 번에 벗어 옆으로 던졌다. 빅터의 입술이 닿은 옷을 꺼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 작은 동작에도 심장이 욱신거렸지만 빅터는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손 벗겨지겠어.’

빅터는 삽입한 성기를 잠시 빼내었다. 그러자 하비가 크게 요동쳤다. 그의 반응을 눈여겨보며 빅터는 옆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하얀 손수건을 줍곤 빠르게 손을 움직여 나무줄기에 단단히 묶었다.

하비의 손을 그 위에 얹은 빅터는 그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땀이 흐르는 단단하고 굵은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고 핥으니 하비가 간지러운 듯 몸을 떨었다.

빅터는 하비의 입속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저었다. 입안에서 긴 손가락이 돌아다닐 때마다 뜨거운 혀와 얽혀 질척대는 야한 소리를 동반했다. 그런 식으로 타액을 묻힌 검지를 집어넣어 구멍 사이를 벌리자 하비가 부들부들 떨며 허리를 젖혔다.

빅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라 너무 안 들어가는걸.”

손가락을 빼내고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빅터는 힘들어하는 하비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잘 단련된 가슴에 바짝 선 유두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솟아 있는 그것은 이미 단단했다.

하는 김에 탄탄한 가슴을 전체적으로 꽉 쥐었다가 놓자 낯익은 짜릿한 느낌에 하비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홱 꺾었다. 얇게 칼로 저미는 듯한 쾌감이 순식간에 넓게 퍼졌다.

“흣…….”

희미하기만 하던 하비의 알파 페로몬이 순간 폭주하듯 거세졌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허리를 들썩여 삽입하기 좋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빅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하비가 자신의 것을 받아들이는 광경을 감상했다. 푸들대는 굵은 허벅지가 벌어지고 하얗고 탄력 있는 엉덩이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볼기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손수건을 잡은 하비의 손을 겹쳐 잡은 빅터의 손에 땀이 맺혀 미끈거렸다.

“으…….”

무심결에 하비는 빅터의 손등 위에 이마를 대고 젖은 숨을 토해냈다.

빅터에겐 손등 위로 전해지는 하비의 숨결마저 야릇했다.

빅터가 다시 눈만 굴려 아래를 보니 거의 다 들어간 성기를 구멍이 열심히 물고 있었다. 안은 뻑뻑한 만큼 조임이 엄청났다.

‘젠장…….’

아래에 피가 쏠려 더 묵직해졌다. 온몸이 벌게져 땀 흘리면서도 묵묵히 성기를 받아들이는 하비의 모습이 눈이 돌아갈 만큼 음란했다. 하비가 최대한 안 아프게 하려고 별수를 다 쓰고 있는데, 당장 박고 흔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돌겠네.’

빅터는 마지막 조금 남은 굵은 기둥은 허리를 밀쳐 쑤셔 버렸다.

퍽!

하비가 헛숨을 뱉으며 온몸에 힘을 넣었다. 구멍도 잘릴 것처럼 거세게 조여들어서 하마터면 바로 사정할 뻔했다. 미간을 조인 빅터가 하비의 동그랗고 작은 귀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다 들어갔어.”

빅터는 금방 움직이지 않고 자꾸만 움찔대는 내벽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한 손으로 하비의 배를 만지작대니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얼핏 들었다.

귀 뒤쪽과 목덜미, 어깨에 쪼듯이 키스를 하며 빅터가 물었다. 옅게 땀 냄새가 났지만 이마저도 좋았다.

“괜찮아?”

하비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문 채 고개를 숙였다. 열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몸과는 달리 여전히 냉담한 반응이었다. 솔직한 신체만큼 입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지만 그건 지금의 빅터에겐 너무 큰 욕심이었다.

천천히 빼냈다가 다시 천천히 쑤셔 넣자 하비의 단단한 복부가 들썩거렸다. 잘 짜인 어깨가 잘게 진동을 일으키며 다른 무언가를 원했다.

하비는 입술을 달싹대다가 다시 꽉 다물었다. 안을 쑤시는 성기가 너무 느리게 삽입되었다 나오자 마른 내벽이 모조리 딸려 나올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런 것 말고, 더 깊숙한 곳을 빠르게 찍어 눌러줬으면 했다.

하지만 빅터는 하비가 삽입에 익숙해질 때까지 엉덩이를 움켜쥐고 천천히 밀어 넣을 뿐이었다.

하비가 원하는 건 이런 조심스럽고 배려 깊은 섹스가 아니었다. 그저 흔들고, 욕구를 배출한 뒤 이 엉망진창인 관계가 하나라도 더 빨리 끝났으면 했다.

“읏…….”

하비는 신음을 참으면서 땀이 흐르는 뜨거운 몸을 비틀었다. 미처 닿지 못한 욕구로 괴로웠다. 빅터와 이런 육체적인 유예 기간을 굳이 두고 마는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왜…….’

관계를 끊으려면 아예 단단히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빅터의 출입을 완전히 허가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었다.

마음 한편에 남은 미련이 분명 존재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비를 괴롭혔다. 차마 밀어낼 수도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한 크기로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작은 미련은 빅터가 하는 말에 아직도 일일이 반응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하비의 속을 음울하게 떠돌았다.

그의 상념을 가르고 빅터의 성기가 다시 느릿하게 구멍 안을 찍었다.

“윽……!”

하비가 빅터의 한 손으로 팔을 움켜쥐고 헐떡였다. 단단한 팔뚝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하비는 무언의 애원을 보탰다.

빅터는 흠칫 하비가 잡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만하라는 것이나 빼달라는 청이 아니었다. 미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잡아당기고 있었다.

절제되었던 욕망이 한껏 터져 나와 빅터의 수려한 얼굴이 이지러졌다.

“아플까 봐 참았는데…….”

퍼억!

끝까지 한 번에 박아 넣은 구멍에 경련이 일고, 하비의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렸다. 빅터가 엉덩이를 잡아 더 한껏 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인내심을 너무 시험하는 거 아닌가?”

구멍 안의 내벽이 붉게 타오르듯 벌름거렸다. 빅터는 길게 눈을 일그러뜨렸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안은 미치도록 좋았다.

“헉…….”

가장 깊은 곳까지 처박은 성기가 아까완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거칠고,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출입할 때마다 구멍 주위로 거품이 일어 부글거리고, 내벽도 점점 젖어들었다. 앞뒤로 드나드는 성기가 드러났다가 사라질 때면 하비의 몸에서 이는 떨림이 더욱 격렬해졌다.

퍽! 푸욱! 퍼억-!

움직임이 너무 거세어 계속 앞으로 밀려나던 하비는 나무 위를 감은 손수건 위를 양손으로 붙들어야 했다.

차라리 이런 난폭한 것이 좋았다. 빅터의 배려는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불편했다. 함부로 다뤄지고, 난장으로 구르는 것이 자신과 빅터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그런데 자꾸만 묘한 감상과 느낌이 끼어들었다. 빅터는 하비가 느끼는 곳만을 집중적으로, 깊게 짓찧었다. 그가 주는 쾌감에서 달아나려고 해도 끝까지 쫓아왔다. 구멍 속에 박히는 굵은 성기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끈질기게 하비의 쾌감을 돋우었다. 가끔은 굵은 귀두가 쾌락점 위를 뭉근하게 짓누르기도 하고, 날을 세워 미친 듯이 쑤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하비는 온몸이 녹을 것 같은 열기에 잔뜩 흐트러졌다. 허리가 앞으로 꺾이고, 둔부가 덜덜 떨렸다. 좁은 구멍으로 거세게 밀어 넣는 빅터의 움직임이 제 모든 것을 다 삼킬 것 같았다.

“읏……!”

거기다 가슴 위를 집요하게 만지고 민감하게 만드는 손길에도 느끼기 시작했다. 갈색 유륜은 어느새 색이 진해지고 퉁퉁 부어 있었다.

가장 느끼는 깊은 곳을 견딜 수 없는 속도로 쑤셔 박히자 결국 하비는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신음을 쏟아냈다. 너무 느껴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아……! 윽, 큿, 으읏……!”

빅터가 허리를 거칠게 놀리다 하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조금 묻어나는 물기를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짠맛이 났다. 빅터가 깊이 파묻은 채 하비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헉…….”

퍽!

쾌락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허리와 허벅지의 울림이 빅터의 몸으로도 전해졌다. 점점 발기하는 하비의 성기를 한 손으로 훑으며 빅터가 후욱, 뜨거운 숨을 뱉었다.

“울어줘. 넌 너무 참기만 하잖아.”

이런 작은 숨결에도 하비의 목과 어깨는 자극을 받아 움찔댔다.

이상했다. 거칠지만 몸 안을 헤집어 어떻게든 쾌감을 이끌어내려는 수고도, 걱정스러운 말투도, 자신을 잘 아는 듯한 빅터의 다정한 말도, 자꾸만 하비의 신경을 건드렸다.

질긴 나무껍질 위로 감은 하얀 손수건이 하비의 흐린 시야로 들어왔다. 손이 거친 나무껍질에 다치지 않게 빅터가 감아준 것이었다.

생각하기 싫은 것들이 지친 하비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반발해 봐도, 몸속을 어지럽히는 열처럼 끝끝내 하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비는 빅터를 보지 않았다.

이렇게 진득하게 달라붙더라도, 언젠가 그의 마음은 또 떠날 것이다.

빅터의 진심은 하비에겐 까마득한 절벽 위 흔들다리와 같았다. 언제 떨어질지 모를, 불안정한 것을 믿을 수는 없었다. 이미 바닥이라고 생각한 이곳에서 다시 밀려나 떨어지면, 그 아래는 무엇일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하비의 의식은 무의식중에라도 빅터의 진입을 거부했다.

퍽!

“크읏…….”

방심한 사이 치고 들어온 것이 하비의 쾌락점을 꾸욱 눌렀다. 이미 찔끔찔끔 쿠퍼액이 나오고 있던 하비의 성기가 묽은 액을 쏟아냈다. 한 번 갔지만, 기절할 것같이 자극적인 큰 사정감은 그러고도 한참 뒤에 다시금 찾아왔다.

“으윽, ……흣!”

하비는 사정하지 않는데도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저릿한 쾌감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온몸을 뒤덮는 강렬한 쾌감과 경직되는 근육에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절정에 달한 순간 하비의 호흡이 멈추고, 빅터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손톱이 깊숙이 단단한 팔에 박혀들었지만 빅터는 조금의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비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내벽을 강하게 조였다. 빅터도 이번엔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옆으로 더 잡아 벌리며 크게 박아 넣었다. 구멍 안으로 뜨거운 정이 번지고 빅터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읏…….”

하비가 간 뒤에도 몇 번이나 더 박던 성기는 정액을 넘치도록 쏟아내고 나서야 간신히 멈췄다.

천천히 뱉어낸 정액 사이를 가르고 쑤셔대는 빅터의 것은 아직 온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결합된 밀부 사이로 눅눅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이리 사정했는데도 빅터의 흉흉한 성기는 흥분한 채 부피조차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숨이 죽고 있는 하비의 것을 손으로 잡아 자극을 주며 빅터가 귓등에 속삭였다.

“나머지는 안에 들어가서 해도 될까?”

말은 그리하면서 빅터는 조금씩 허리를 밀어 넣고 있었다. 꿈틀대는 귀두가 예민해진 내벽을 쓸고 지나가는 움직임에 하비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비의 턱에 맺혔던 땀이 떨어져 점점이 땅 위를 진하게 적시고, 가랑이 사이를 흐르던 끈적대는 정액은 무릎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빅터가 하비의 턱을 잡아 돌려 키스했다. 혀가 엉키면서 다리도 얽히고, 결합은 더욱 깊어졌다. 잠깐 벌린 입 사이로 뜨거운 숨이 오갔다가 엉겨 붙기를 반복했다. 이 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절절한 입맞춤이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날아와 땀을 식히며 등을 차갑게 스쳤다. 그러나 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하비는 나뭇등걸에 매여 있는 하얀 손수건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입속으로 밀려드는 빅터의 숨을 제 것과 교환했다. 손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가슴 어딘가가 여전히 따끔거렸다.

* * *

하비가 정신을 놓고 멍해졌을 때가 급격히 줄었다고는 하지만, 가끔은 찾아왔다. 그럴 때면 빅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럴 땐 혼자서 하고 싶던 말들을 늘어놓았다.

솔직하게, 그동안 격렬하게 변해왔던 심경들을 읊었다. 배신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바뀌었다고. 반 로투스가 벌인 짓은 절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힘없이 늘어진 하비의 손을 잡아 제 이마에 대면서 빅터는 괴롭게 중얼거렸다.

“네게 힘든 일은, 나한테도 힘들어. 제발 그것만은 알아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의지 없는 밤색 눈은 그런 빅터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하비의 손가락이 가끔 움직여 엎드려서 자고 있는 빅터의 얼굴에 다가가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결코 닿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하비가 정신을 차린 날은 여지없이 섹스를 했다. 침대에서 뒹굴거나, 저번처럼 사람 없는 야외에서 몸을 섞거나, 아니면 하비의 서재에서 일을 치르기도 했다.

빅터는 목마른 사람처럼 하비의 몸을 취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를 그의 신뢰를 갈구했다.

하비가 빅터에게 뒤를 박히면서 붙든 작은 책장에서 우수수 책이 떨어지고,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빅터가 온몸으로 사수해서 하비는 멀쩡했지만 빅터는 손이 조금 다쳤다.

그럼에도 하비의 집사에게 3일 방문 금지령을 받기도 했다. 빅터는 억울해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관계하기로 약속한 횟수가 줄어들수록, 의식 없는 하비에게 하는 빅터의 혼잣말은 더욱 길어졌다. 초조함이 묻어나고, 더욱 애절해졌다.

하지만 빅터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비에게 깊게 인이 박인 슬픔과 고통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그 슬픔의 근원이 정확히 어디에 가 있는지 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한 번이 남았을 때였다.

세상은 늘 그렇듯, 그들에게 온전한 휴식을 허가하지 않았다.

외교부에 날아온 한 통의 투서로 올란시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힌 것이다.

하비 스터스의 이름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 들불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를 모른 척하며 빅터는 꾸준히 외교부의 일들을 하비의 저택으로 옮겨주었다.

단 하나의 사건만 제외하고.

투서가 온 당일, 아직 사람들이 사태를 모를 때였다. 그날 총괄 외교관이 빅터의 의원 집무실에 들렀다.

의외의 방문에 빅터는 그를 친절하게 맞이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비의 상사니까 적당한 예의를 차렸다.

‘온 이유는 알겠지만.’

일견 친절해 보이던 빅터의 얼굴에 살기가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의 마음은 조금도 모른 채 총괄 외교관은 두리번대며 다소 정신없어 보이는 의원실을 둘러보더니 슬슬 본론을 말했다.

“스터스 경의 저택에 매일 들른다고 들었소만.”

맞이용으로 내놓은 뜨거운 차를 불어 마시던 빅터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찻잔을 만지작대며 총괄 외교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은 것 같습니까?”

그걸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씁쓸하게 미소 지은 빅터가 대충 둘러댔다.

“그럭저럭. 회복 중입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신지?”

사실 그의 정보망으로부터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말하기 곤란한 사안일 것이다.

빅터의 예상대로 총괄 외교관은 한참 머뭇대더니 차 손잡이를 손끝으로 툭툭 찍었다.

“사실 스터스 경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일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전하기가 좀…….”

외면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는 시점이 왔다. 빅터는 경직된 미소를 보여 총괄 외교관에게 불편하다는 걸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로비나 섬에 사전 조사 차 보냈던 외교부 사람들이 해적에게 붙들렸다는 것 말입니까?”

빅터의 선방에 총괄 외교관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순순히 털어놓았다.

“벌써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달칵.

빅터는 찻잔을 내려두어 총괄 외교관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날이 선 녹색 눈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총괄 외교관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글쎄, 빠를 이야기가 있나. 잘 모르겠는데.”

존대를 하던 말투가 음습해지고, 목소리도 한껏 낮아졌다.

“설마 나더러 스터스 경을 해적들에게 떠미는 짓을 대신 해달라는 건 아닐 테고.”

냉정한 눈길 속에 조소가 담겼다. 하비를 꾸준히 돌보고 있는 것이 빅터라는 것은 세간이 다 알고 있었다. 다소 무리한 부탁임을 알면서도 총괄 외교관이 빅터에게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 그건…….”

총괄 외교관은 더듬대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시인했다.

“그래도 어쩝니까. 스터스 경이 아니면 안 된다는데. 나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젊은 외교관들의 생명이 그들 손에…….”

붙들린 외교관들은 대부분이 고위 귀족 출신이다. 해적들도 그것을 노렸을 가능성이 컸다. 인질 중에 평민 출신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때문에 귀한 자제를 인질로 잡힌 외교관들의 귀족 가문이 들고일어날 기세였고, 총괄 외교관은 그들에게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을 터였다.

임페르 해적 때도 그랬고, 빅터는 현 시의원인 자신 또한 인질로 잡힌 귀족들에게 곧 모종의 압력을 받게 될 것임을 알았다. 라힌 스터스가 겪었을 그 일을, 자신도 비슷한 형태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빅터는 속으로 한숨지었다.

‘정말 개 같은 운명이군.’

그보다 눈앞에 닥친 이 사람부터 처리해야 했다. 빅터는 당장에라도 이 비겁한 남자에게 뜨거운 찻물을 부어버리고 쫓아내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대접한 차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직 김이 올라오는 차를 흘끗 내려다본 빅터가 흉흉한 기세로 말했다.

“그렇다고 아픈 사람을 사지로 모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하비를 어디까지 몰아야 만족할 건지, 세상은 왜 이리도 잔인한지 빅터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의 손발을 자르고, 마음까지 뽑아낸 뒤에는 이제 텅 비어버린 사람을 기어이 제물 삼으려 하고 있다.

“사지로 모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절대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니까요.”

당황하여 손을 흔드는 총괄 외교관을 빅터가 한심한 듯 보았다. 혀를 차며 빅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예?”

멍하게 되묻는 총괄 외교관의 살집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빅터가 비웃음을 띄웠다.

“해적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지. 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잊었습니까.”

어린 시절을 해적선에서 강제로 보내야 했던 빅터이니만큼 해적의 생리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는 해적? 그런 건 없다. 해적은 해적일 뿐이다.

간혹 세간에 의리를 지키는 해적이 종종 있다며 포장되어 떠돌긴 하지만, 그런 사례는 어디까지나 해적의 이해득실에 맞기 때문에 생긴 이례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이번 신생 해적들은 슬루인 제국을 등에 업은 것이 정황상 확실했다. 하비를 보내주고 앞으로 그들의 모국이 이로비나 섬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납치한 외교관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만 봐도 그러했다.

이런 말을 뱉는 총괄 외교관의 속도 그리 편치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빅터는 그의 죄책감을 덜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찻잔을 으스러질 듯 쥐면서 빅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해적들이 정말로 약속을 지킨다 하더라도 내가 스터스 경을 보낼 일은 없습니다.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시죠.”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비에게 아무 일이 없도록 지켜줄 것이다. 빅터는 그리 다짐했다.

그래서 하비에게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둘만 있을 수 있는 좋은 곳으로, 그곳에 가서 색다른 추억을 쌓으면 뭐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 빅터의 마지막 묘수였다.

혹여 하비에게 신생 해적단에게 납치당한 외교관들의 일이 흘러들어 갈까 봐 걱정돼서인 것도 있었다.

스터스가의 집사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어 절대로 그 일이 하비에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두었다. 스터스가 저택으로 전달하던 외교부 문서에서도 그 일과 관련된 자료들은 모조리 빼두었다.

그리하여, 집사의 허락하에 무조건적인 하비의 안전을 조건으로 여행은 시작되었다.

마차로 이동하는 것은 저번과 같았지만, 저번처럼 빅터가 하비의 허벅지를 베고 자는 일은 없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따로 떨어져서 멀찍이 앉은 채 빅터는 가져온 일들을 처리했고, 하비는 말없이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기만 했다.

빅터가 서류를 읽던 눈을 올려 하비의 옆모습을 보았다. 비스듬하게 보이는 마르고 날카로워진 턱선으로 붉은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밤색 머리칼이 노을을 한껏 받아 물들었다.

마차가 덜컹댈 때마다 조금씩 들어오는 바람에 하비의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날렸다. 건장한 체격은 여전했지만 전에 비해서는 근육이 조금 빠졌다. 그나마 최근 들어 다시 검을 휘둘러 몸을 단련시키고 있기에 활력이 붙은 편이었다.

빅터는 서류를 더욱 꽉 쥐었다. 자칫 손이 나가 하비의 저 마른 턱을 부여잡고 키스할 것 같아서였다. 분출되지 못한 뜨거운 열이 계속 몸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억누르느라 힘들었다.

제 몸의 일부인 듯 가깝게 느껴졌던 때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하비 스터스는 어느샌가 견고하게 마음의 성문을 내리고 절대 열어주는 법이 없었다. 충격 요법이라도 동원해 부수고 들어가려면 가능은 하지만 그랬다간 이제 조금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하비의 정신이 정말로 망가질 것이다.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고 누가 말했나. 하비는 착실히 이를 지키고 있었다. 괴로운 건 단단히 걸어 잠근 마음의 벽 앞에서 천년만년 기다리고 있는 자뿐이다. 빅터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역시 힘드네.’

힘들 자격이 없다는 건 안다. 그럼에도 뭐라도 하비에게 부대끼고, 의미 없는 빈말이라도 섞고 싶었다.

대화를 시도해 볼까. 지금은 하비가 정신이 든 상태라 가능했다. 찬 바람이 열린 창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어서 빅터는 창을 닫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준비했던 말을 던지면서.

“춥지 않아?”

밖만 하염없이 보고 있던 밤색 눈이 창문을 닫으려던 빅터의 손을 보았다. 저번에 넘어진 책장 때문에 하비 대신 다친 손가락이 작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전혀.”

역시, 받아치고 오갈 수 있는 대화의 형태를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할 말이 없어진 빅터는 한숨을 쉬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런데 스치듯 지나친 하비의 손이 뜨거웠다. 자리에 앉으려던 빅터가 흠칫하며 그 손을 돌아보았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단조로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신경 쓰지 마.”

내 몸 상태는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선언하는 듯한 냉정한 말투였다. 빅터가 어떤 노력을 해도 하비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행위였다. 빅터의 말과 행동들은 조금도 하비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의미가 되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갔다.

빅터는 말없이 마차 내부의 수납 공간에서 담요를 꺼내 하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하비는 여전히 어떠한 말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창가를 보는 눈길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헛기침을 한 빅터가 다른 주제를 입에 올렸다. 불편한 공기를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고 싶었기에.

외교부에서 온 안건이나 문서들이 하비의 방에서 여전히 방치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빅터가 슬쩍 물었다.

“외교부에서 진행하던 일,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잘하고 있겠지.”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결과를 보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없어도 거긴 잘 돌아가. 실력 있는 사람도 많고.”

무덤덤하게 이어지는 대답에 빅터가 울컥했다. 이로비나 섬의 매입 건에 하비가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비가 저처럼 모든 것을 버린 것처럼 구는 것이 안쓰럽고, 그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더욱 괴로웠다.

‘그 일만 모르면 돼.’

이제 하비를 현실에 매어놓을 만한 것은 외교부 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기껏 튀어나오는 것은 이런 원망 섞인 어조였다.

“도망치는 거야?”

말해놓고, 빅터는 후회했다. 그제야 하비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밤색 눈이 빅터를 담고 있었다.

“도망이라.”

몇 번이나 같은 단어를 외던 하비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 대답이 듣고 싶나?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두지.”

아직도 뭔가를 붙들려는 희망도, 마음조차 보이지 않았다. 냉소와 함께 흘러나온 말에 빅터는 포기하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 일은 절대 모르게 할 거지만, 나중에 하비가 알기라도 하면…….’

해적들이 외교관 인질들을 정말로 죽이면 어떻게 될 것인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하비는 펄쩍 뛰면서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빅터를 원망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돌아봐 주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빅터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총괄 외교관이 특별히 하비가 괜찮아지면 꼭 이야기해 달라고 했던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말하면 하비가 분명 관심을 보이고 신경 쓸 중대 사안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앞뒤 안 가리고 정말 가겠지.’

빅터의 정보망에도 이미 신생 해적단 뒤에 슬루인 제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딱히 관심 두지 않았었는데 이 건이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빅터가 이를 갈았다.

‘그 개새끼들을 진작에 잡았어야 했는데.’

책임자인 하비가 오지 않으면 누가 관여하든 협상하지 않겠다고 하는 섬 관리자가 원인이었다.

이로비나 섬의 관리자는 해적을 낀 슬루인 제국과 하비의 모국이 자신들의 섬을 두고 싸우는 건 별 관심 없었다.

다만, 섬의 관리자는 하비가 섬의 세세한 사정에도 밝고, 섬을 사더라도 섬 고유의 문화를 최대한 보존하고 장려하겠다는 입장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섬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데 하비를 끼지 않고서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뻗댄 것이다.

해적 측은 하비의 모국이 이로비나 섬의 매입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대신해 하비가 직접 협상을 도와주면 외교관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물론 뒷배인 슬루인 제국이 지시한 사항임은 분명했다.

이로비나 섬의 실질적 소유자는 도미니크 국이다. 비록 재정난에 시달리긴 하지만 무시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도미니크 국의 눈치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슬루인 제국조차 해적을 앞세워도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상황이 어떻든, 안 돼.’

대상이 무엇이든, 이제 그에게서 하비를 빼앗아 갈 수 없다. 설령 국왕이 명한대도 거부할 자신이 있었다. 여차하면 데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해 버리면 되니까.

빅터는 하비의 어깨에서 담요가 스르륵 내려가자 잡아서 다시 올려주었다. 단단하게 덮은 뒤 무감정해 보이는 하비의 밤색 눈을 마주 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절대로 보내지 않을 거야.”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담요를 쥔 하비의 손이 조금 떨렸다. 신생 해적과 인질이 된 외교관들의 사안을 전혀 모를 텐데도, 하비는 왠지 불안해 보였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지, 혹은 단순한 추위 때문인지, 어딘가가 또 아픈 건지. 여러 가지 생각이 빅터의 머릿속에서 섞였다가 파도 쓸리듯 사라져 갔다. 그게 뭐든 더 이상 하비를 괴롭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커다란 마차가 덜컹대며 두 사람을 싣고 목적지로 조용히 이동했다. 드디어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자 하비가 드물게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디지?”

모처럼 찾아온 대화의 기회에 반색하며 빅터는 기꺼이 답했다.

“별이 떨어지는 언덕.”

무슨 말이냐는 듯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빅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어. 우스갯소리로 부부 싸움 끝에 도달한다고 하는 곳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하비의 미간이 좁아지자 빅터는 다시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화해와 용서. 이 언덕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관계에 평화가 찾아온다고 하더라고.”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라서 별칭이 붙은 것일 테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미처 다 갈지 못한 언덕에 누런 갈대숲이 굽이치고, 다른 쪽엔 구역별로 나뉜 튤립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꽃들이 투자용인데다 워낙 비싼 몸값이니만큼 공들여 관리한 태가 났다. 쉽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도 쳐져 있었다.

이곳도 빅터의 사유지 중 하나였다. 오늘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이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두었다.

빅터는 하비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며 별장 안으로 그를 들였다.

“추우니까 이제 바깥에 오래 있으면 안 돼.”

아늑한 규모의 별장 내부로 들어가니 벽난로가 있었다. 빅터가 손수 쪼개 온 장작을 집어넣자 남은 불씨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아직 난로를 피울 날씨는 아니지만 하비의 몸을 생각해서 피운 것이었다. 정작 빅터는 더워서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지만 아무 내색 않았다. 대신 옷을 얇게 입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사용인이 있었지만 모두 직접 했다.

“이런 걸 어찌 손수 하십니까.”

“걸레는 제, 제가 빨겠습니다.”

“그건 이리 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용인들에게 빅터가 명했다.

“너흰 있는 게 더 불편하니 거주 지역으로 돌아가.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필요하면 부르겠어.”

빅터는 별장 앞에 있는 작은 사용인의 집에 연락책인 단 한 명만 남겨두고 전부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사이 하비는 난로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빅터가 덮어줬던 담요를 쥐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고요한 밤색 눈에 담겨 일렁였다.

빅터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허벅지에 옆얼굴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하비의 차가운 손끝을 잡아서 온기를 전달하면서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릴 때 널 보면 늘 궁금했어.”

흘끗 빅터가 눈을 들어 하비의 반응을 살폈지만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편한 대로 계속 이야기했다. 어차피 하비의 상태가 안 좋아진 이후로는 같이 있어도 혼자인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았다. 이런 분위기는 익숙해졌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뭘 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욕심이 났어.”

점점 따뜻해지는 손을 꽉 잡으며 빅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날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주면 좋겠다고.”

사람 많은 장소에서 무리하게 아픈 척 꾀병을 부려서 사람 놀라게 하고, 스터스가에 꾸역꾸역 빌미를 잡아 찾아가선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려고 기웃댔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관심은 점점 동경이 되고, 어느샌가 집착이 되었다.

하비가 알고 지내는, 혹은 그를 동경하는 여러 사람 중 하나가 되기 싫었다. 유일무이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해야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내 어릴 적 꿈은 사실 의원 같은 게 아니었어. 신대륙 개척자가 되고 싶었지. 지구 반대편까지 다 보고 온 최초의 사람이 되긴 이미 물 건너갔지만…….”

빅터의 증조할아버지 시대 즈음일 때, 이미 마젤란이 인류 최초로 목숨을 걸고 지구를 한 바퀴 바닷길로 횡단했다. 그래서 빅터가 어릴 때부터 존경하던 위인도 그자였고, 특별해지려면 그만큼의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르텐가를 무너뜨리고 나서 새 가문을 세우면 문양은 어떤 것으로 할지도 상상했다. 마젤란의 살아남은 부하 대표가 국왕에게 부여받은 것처럼, 지구 모양으로 할까 같은 패기 어린 고민도 했다.

빅터는 이어 말하면서 하비의 말라가는 손가락을 문질거렸다.

“정치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뭐, 반쯤은 이룬 건가. 해양 상단을 꾸려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으니까.”

비록 상단의 상당수는 임페르 해적 출신이긴 했지만 말이다.

살아남아 성공해서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빅터의 집념이 해적들 사이에서도 먹혔다. 다행히 그에겐 상황에 적절한 재능이 넘쳤고, 해적들과도 이해가 잘 맞아떨어졌다.

오늘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던 빅터가 허탈한 얼굴로 일어났다. 하비는 대화를 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분명 의식이 또렷하고 눈동자도 선명한데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닿지 않는 절대적인 마음의 벽이란 아직 버거웠다.

“좀 늦긴 했지만 저녁 식사부터 해야겠어.”

사용인이 준비해 주었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엔 빅터가 모든 것을 전부 했다. 해적선에서 생존해야 했던 경험으로 웬만한 요리는 할 줄 알았고, 솜씨도 꽤 있었다. 상단 일로 바빠진 이후로는 안 하긴 했지만 차근차근 요리를 준비하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기다리는 동안 하비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 주방 쪽을 응시했다. 오늘은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았다. 무의식을 헤매지도 않고, 현실만을 보았다.

저곳에 빅터가 있다. 하비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하면서.

하비가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그 안에 든 작은 물건을 꽉 쥐었다. 식은땀이 조금 배어 나왔다.

아무 말 없던 하비는 몸을 일으켜 연신 불길이 치솟는 주방으로 갔다. 멀리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음식 재료가 널려 있고, 식기들도 다양했다. 빅터의 뒷모습만 보였는데 워낙 분주해서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뒤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걷어붙인 하얀 러플 블라우스에 붉은 소스가 튀어 있기도 했다. 단단하고 건장한 팔이 요리 도구를 들 때마다 볼륨이 커졌다.

가끔 보이는 옆얼굴은 사람 하나 죽일 것같이 사납던 기세는 전혀 없고, 오로지 음식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집중만 가득했다.

도축용 나이프로 능숙하게 돼지고기를 썰어서 팬에 넣고 휙 들어 올리던 찰나, 빅터가 하비가 서 있는 쪽으로 눈을 향했다. 시선을 느껴서였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빅터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요리에 정신을 쏟았다. 하비가 여기까지 올 리가 없다. 그의 앞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잘못 느꼈겠지.’

그 틈에 하비는 한숨 돌리고 있었다. 기지를 발휘해 몸을 재빨리 벽 안쪽으로 틀었기에 망정이지, 들킬 뻔했다. 별것 아닌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고기가 잘 익는 맛있는 냄새가 주방에서 새어 나왔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들어가서 당당하게 봐도 상관없는데, 몰래 훔쳐보는 듯한 모양새가 영 어색했다. 하비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걸 빅터가 알았다면 농담조로 한마디 했을 것이다.

독이라도 넣으려는 것 같았냐고.

하비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왜 이리 모순된 짓만 일삼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하비는 자신에게 말했다. 제 마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뭔가가 그의 시야를 흐리고 있을 뿐. 도피해 봤자 어차피 갈 곳도 없는데 계속 한자리만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아예 정신을 놓고 그 싫은 기억으로부터 발을 빼버렸다. 하비는 자신이 이리 나약한지 몰랐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알고 있잖아.’

사실 반 로투스와 그 일이 있고 나서, 빅터가 보인 행동들은 일관적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누가 봐도 헌신적인 행위들만 하고 있었다. 위협적일 만한 것은 일절 없었고, 오히려 하비에게 접근하는 위험 요소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전부 제거해 왔다.

골치 아픈 듯 하비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을 알리지도 않고.’

아무리 하비의 눈과 귀를 막아도 전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집사가 단속했지만 스터스가 저택의 사용인들이나 바깥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까지 전부 강제할 수는 없었다.

이로비나 섬에 보냈던 외교 인력들이 신생 해적에게 붙들려 인질이 되었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요구 사항으로 자신이 지목되었다는 것도, 이를 알리지 않으려 빅터와 집사가 무한정 노력해 왔다는 것도.

빅터가 마차에서 했던 말도, 그래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절대로 보내지 않을 거야.’

진심일 것이다. 평소처럼 아름다운 녹색 눈에 거짓이라곤 한 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비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담요를 쥐었다.

‘또 나를 속이려는 수작일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외면해 왔던 진실과 대면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결정을 해야 한다. 아끼던 사람들이 헛되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끊임없이 온몸으로 부딪쳐 오며 진심을 해명하려 하는 빅터와도, 결말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아직 마음이 서질 않았다. 마지막 한 번의 관계가 끝나면 정말 끊어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잃게 한 사람에게 또 기회를 주고 싶다는 알량한 마음이 하비를 주저하게 했다.

‘그래도 도저히 못 믿겠으면 이렇게 해.’

‘있는 힘껏 날 증오해.’

‘난 환자한테도 욕정하는 쓰레기 새끼니까, 그래도 돼.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고.’

기껏 상대가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빌미와 이유마저 주었건만. 어째서 그럴 수 없는 건지, 하비는 미치도록 답답했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조차 돌아돌아 자신에게 돌아왔다.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건 자신의 마음 박힌 감정 때문이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그 작고 순수한 감정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박혀 변형되지도 않았다.

하비는 자리로 돌아가서 편안한 흔들의자에 앉아봤지만 이번엔 벽난로에서 나오는 열기가 불편했다.

주방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그 뜨거움을 닮아서였을까. 빅터가 은근히 미소마저 띠어가며 피워내던 그 불길 말이다. 속 어딘가가 당기는 것처럼 비틀렸다.

‘괴로워…….’

하비는 허리를 숙여 답답한 속을 게워내려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간혹 토해내던 피도, 흔한 위액조차도.

빅터가 꾸준히 보낸 그 약들이 효과가 있었다. 10번의 관계에 빅터가 내건 조건들은 약을 제대로 먹어라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조건이었다.

‘약해진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빅터 베르텐 경이 어떤 자인가. 상대가 아파서 쓰러지고 다 죽어가도 그가 점찍은 희생양은 반드시 끝장을 보는 사람이었다. 봐주는 것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보였다. 하비가 속으로 의문을 가졌다.

‘왜 약이 먹기 싫었던 거지.’

곰곰이 떠올려 보려던 때, 거부하는 것처럼 몸이 불쾌하게 가라앉았다. 경고 같았다. 떠올리지 말라는, 기억의 경고.

무의식의 영역이 다시 넓어지고, 하비의 눈앞에 환각이 보였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사방이 막힌 곳이었다. 바닥에 피가 가득했다. 뜨겁고 붉은 것이 작은 것과 섞여 끈적하게 흘렀다.

이건 뭘까.

하비가 더 깊이 파고들려던 찰나, 빅터가 주방에서 나와 그를 불렀다.

“다 됐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안 좋나?”

하비는 고개를 내젓고는 계속 달라붙는 환각을 날려 보냈다. 가끔 이미 알고 있는 기억들조차 자신을 희롱하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가림막을 쳤다. 그러다 보니 분명 잊은 건 아닌데, 마치 잊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비는 한 몸 같은 흔들의자를 버리고 준비된 테이블로 향했다. 완성된 테이블에는 온갖 고기와 채소, 과일이 가득했다. 제법 모양 좋게 꾸민 것도 많았다. 푸릇한 야채를 품에 안은 고기라든가. 그런데 고의로 뺀 듯 딱 한 가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비의 시선과 생각을 알아챈 빅터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며 고백했다.

“해산물은 안 좋아했던 것 같아서.”

드물게 하비의 입이 열렸다.

“원래는 좋아해. 아마 그땐…….”

하비는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임신 중이어서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가 차마 나오지 않아서.

그 생각을 한 순간, 하비는 자신의 의식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자꾸만 무의식이 그때의 기억을 흐릿하게 지우려 했다. 쓴웃음이 났다.

‘이것 때문이었나.’

빅터도 알아들은 듯 씁쓸하게 표정을 숨겼다. 언제 들어도 고통스러운 과거였다. 빅터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터질 듯이 쥐어서 치밀어 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흘려보냈다.

슬픔을 감추고 빅터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다른 주제를 꺼냈다.

“내가 준비한 요리를 먹는 게 무식한 해적 놈들 말곤 네가 처음인 건 알아?”

하비는 묵묵히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화려하게 차려진 테이블에도 식욕이 돋질 않았다. 그건 빅터도 마찬가지였다. 암묵적인 룰처럼 둘 사이에서 주고받지 않기로 정해진 주제가 튀어나온 탓이었다.

그때 하비가 고개를 들고 잘 익혀진 돼지고기 한 점을 찍어 솜씨 좋게 만든 소스에 찍었다. 맛을 보더니 그는 짧게 말했다.

“솜씨 좋네.”

하비는 다른 음식을 한 번 더 맛보았다. 기대도 안 했던지라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빅터에게 그간 마음 깊은 곳에 구겨놓았던 진심을 단편적으로나마 전했다. 입안에 남은 소스는 막 넣었을 땐 알싸했지만 끝 맛은 달달했다.

“고마워.”

엉망진창으로 삐걱대며 이어지는 이 아슬아슬한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 끝은 당사자가 정해야 한다.

그래서 하비는 선택하기로 했다. 그가 정하지 않으면, 이 관계는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망가뜨려서야 멈출 것이다.

하비의 속을 알지 못한 채, 빅터는 어딘지 먹먹한 얼굴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

그 뒤로 하비는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긴 여운이 따랐다. 식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빈 그릇은 대충 치워두고 향긋한 청결제로 각자 입을 헹구었다.

따닥!

마른 장작이 불길에 휩싸이고, 테이블 옆으로 따뜻한 불꽃이 일렁였다. 벌써 밤이 깊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튤립들도 검은 장막에 가려 모두 똑같은 색처럼 보였다.

이윽고 질 좋은 포도주를 꺼내 온 빅터가 빈 잔을 내밀었다.

“한잔하겠어?”

하비는 빅터 모르게 품 안에 챙겨둔, 미리 준비해 온 것을 재차 확인했다. 고민 끝에 가져온 것이었다. 수락의 의미로 하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숙성된 치즈 덩어리와 포도주가 나란히 놓였다. 코르크 마개를 능숙하게 딴 빅터가 라벨이 붙은 포도주 병을 하비 쪽으로 돌리고, 하비 몫의 호리호리한 잔을 들어 올렸다.

빅터의 행동을 지켜보던 하비가 문득 기습처럼 물었다.

“반은 어떻게 된 거지?”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던 손이 흠칫했다. 그러나 빅터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보통을 가장했다.

“그놈은…… 글쎄.”

모른다고도, 안다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대답이었다.

“경이 한 짓 아닌가?”

일정량 포도주가 찬 잔을 빅터에게서 건네받은 하비가 오랜 시간을 입어 그윽해진 향을 음미했다. 빅터는 하비를 힐끔대면서 제 몫의 잔에도 포도주를 채워 넣었다. 따르면서도 눈은 계속 하비에게 쏠려 있었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건데.”

하비가 포도주 잔을 흔들자 밑동에 찬 핏빛 같은 포도주가 맑게 찰랑댔다. 알면서 물은 것이었다.

“사실은 얼마 전에 반이 날 찾아왔었어.”

행방불명은 로투스가가 내건 성명이었다.

반 로투스는 생환했다. 심지어 하비를 찾아올 정도의 정신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멀쩡하다고도 볼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로투스가는 반 로투스의 상태를 불문에 부쳤다.

빅터는 말없이 하비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반이 과연 어디까지 발악을 했을지도 알고 싶었다.

“만신창이가 됐더군. 정신도 그다지 온건해 보이지 않았고.”

하비의 잔에 자신의 잔을 짧게 갖다 댄 뒤 빅터가 한 번에 포도주를 들이켜 버렸다. 목이 탔다.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데.”

하비가 조용히 말했다.

“살려달라고 했어.”

빅터가 코웃음을 치더니 남은 술을 잔에 따랐다. 반 로투스를 굳이 살려둔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그게 전부야?”

“아니.”

하비는 반쯤 실성해서 산발이 된 몰골로 찾아와 엎드려 빌던 옛 친구를 떠올렸다. 한쪽 눈이 없었고, 아직 의안조차 맞추지 못해서 텅 비어 있는 끔찍한 얼굴이었다. 여기저기 칼에 베인 상처와 두들겨 맞은 듯한 흔적들도 있었다.

반은 울면서 하비가 원한다면 발이라도 핥겠다며 비천하게 굴었다.

그때 하비의 심정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냉정에 가까웠다. 처음 봤을 때 조금 놀랐던 건 예상보다 더 참혹한 모습 때문이었지, 어떠한 인간적인 안타까움도 없었다.

그때의 반 로투스가 애걸한 건 자신의 안위와 목숨이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려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되어서까지 버리지 못한 일말의 자존심이 빌고 있는 반 로투스의 한쪽 눈알에 번들대고 있었다. 입으로는 잘못을 고하지만, 눈빛은 그의 진심을 보이고 있었다.

너만 없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이 될 리가 없었다고.

원망과 원한이 섞인 눈으로 하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든 또 돌아설 수 있는 자의 비겁함도 여전했다.

이제는 명확히 보였다. 그토록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나서야, 모든 것을 잃고서야 보였다. 바보같이.

하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도 했어.”

“그리고 또?”

하비가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며 그게 반이 내뱉은 전부임을 알았다. 빅터는 사나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그게 다라니.”

당장에라도 다시 반 로투스에게 달려가 숨을 끊어놓으려는 것처럼 보여서 하비는 만류했다. 그날 반과 약속한 것도 있었다.

“이제 그만해도 돼.”

반은 앞으로 스터스가의 그림자도 밟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비 자신을 한 번 도와주면 절대 빅터가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반은 겁에 질렸으면서도 하비가 내건 약속을 긴가민가하며 받아들였다.

‘정말 그것만 해주면 되는 거야? 정말이지?’

‘약속은 반드시 지켜. 걱정 마.’

‘그런데 왜……. 도망가려고?’

누구한테서, 무엇에게서, 라는 말은 굳이 묻지 않았다. 하지만 하비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러면 안 되나?’

반이 제 손으로 흉측해진 얼굴을 덮으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하. 아니. 처음으로 네가 인간처럼 보여서. 그 얼굴, 조금 더 일찍 내게 보여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끝은 역시나 원망이었다. 옛 친구의 치기 어린 불평을 더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하비는 용건이 끝난 뒤 즉시 자리를 떠났다.

반과의 그 약속이, 하비를 이 장소까지 이끌었다. 이를 알 리 없는 빅터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고? 아직 멀었…….”

“더 이상 경의 손을 더럽히지 말란 소리다.”

단호하게 떨어진 하비의 말에 빅터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시선에 하비는 나머지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 반 로투스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연거푸 한 번에 끝내 버리는 빅터완 달리 하비는 아주 조금씩 마셨다. 극소량의 향긋한 포도주가 입안에서 잔향을 남기고 사라졌다. 하비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의미 없는 것에 아무 기대도 걸지 않아. 관심도 없고.”

빅터는 눈을 좁히고 하비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를 가늠했다. 신경에 자꾸만 잡히는 작은 신호가 점점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기대로 차오르는 마음을 굳이 감추지 않고 빅터는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 희망을 좀 가져도 되는 말이야?”

저녁 식사를 할 때부터 하비의 마음이 미묘하게 풀어진 것을 느꼈다. 물었다가 아니라고 딱 자르고, 다시 예전처럼 냉랭한 모습으로 돌아갈까 봐 초조해지긴 했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하비가 유리잔을 만지작댔다. 지문이 하얗게 묻어났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빅터가 말하는 허망된 것처럼.

“우리 사이에 희망이란 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잔에서 손을 떼며 하비가 빅터의 눈을 마주 보았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녹색 눈동자가 그를 가득 담고 있었다.

“경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런 거겠지.”

한때 같은 형질끼리는 안 된다는, 그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서까지 통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끌림이 더 운명적으로 느껴지고, 서로 부딪쳤던 것들조차 뜨거운 감정으로 미화되었다.

빅터가 필사적으로 진심을 욱여넣으려 할 때마다 좋았던 기억들이 생생해졌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운 기억도 함께 부상했다.

자신을 봐달라는 저 간절한 눈빛에 금방이라도 또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지만 단단히 다잡았다. 빅터라면 어떻게든 막아설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못 해.’

하비는 부글거리며 달아오르는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더욱 감정을 절제했다. 지금부터는 신중해야 했다.

눈치 빠른 빅터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평소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그의 경계심을 풀어놓기 위해 아주 조금씩, 마음의 울타리를 일부러 열어두었다.

하비가 마시다 만 포도주잔을 옆으로 치웠다. 술기운이 평소보다 빨리 돌아서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홀린 듯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빅터에게 하비는 상체를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지막 한 번, 여기서 바로 하겠어?”

빅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향긋한 포도주 냄새가 하비의 체향과 페로몬과 뒤섞여 더욱 자극적이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마음도 가까워진 것 같았다.

호칭은 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조금 보이는 것만으로도 빅터는 충분히 기뻤다. 역시 멀리 온 것이 잘한 선택이다 싶었다.

하지만 빅터는 기뻐하면서도 멈칫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원래라면 좋아하며 덥석 물었을 기회였다. 하지만 날카로운 예감의 기척이 빅터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한 번이라는 변수도 있었다.

아직 그릇이 놓인 테이블을 물끄러미 보면서 빅터가 되물었다.

“……여기서?”

망설이던 빅터가 조심스럽게 하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엎었다. 뿌리치지 않자 깍지를 끼고 엄지로 농밀하게 쓰다듬었다. 하비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밀도가 짙어진 눈이 뚜렷한 성욕을 담고 있었다.

그때 깍지 낀 손가락 사이를 엄지로 매만지고 있던 빅터가 미간을 구겼다.

“손이 너무 빨리 식어. 원래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빅터는 하비의 손을 잡은 채로 들어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 상태로 눈만 흘끗 올리고 말했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금방 차가워지잖아.”

하비는 순간 심장이 까마득히 추락하는 줄 알았다.

식는다. 차가워진다.

빅터가 안타까이 말하는 그 말들이, 가슴 안쪽에서 봉인해 두었던 것들을 짓눌렀다. 울컥대는 감정이 올라와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하비는 역류하는 신물을 간신히 삼켰다. 왠지 눈가가 뜨끈했다.

‘지금은 안 돼. 참아.’

얼굴을 숙여 빅터가 표정을 보지 못하게 한 뒤 하비는 잡힌 손을 자신 쪽으로 거세게 끌어당겼다. 빅터가 당겨올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하비가 조용히 읊조렸다.

“상관없어.”

손이야 어떻든, 빨리 이곳에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빅터는 묘한 눈으로 하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비록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하비의 깊고 진한 감정들이 전해졌다.

‘이게 뭘까…….’

이토록 적극적이라니, 현재의 하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어서 더 불안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하비가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마지막 관계는 이곳에서 할 생각 아니었나. 장소가 무슨 상관이야.”

그게 테이블이든, 바람이 횡횡한 들판이든, 몸을 가눌 수만 있는 곳이라면 상관없지 않냐고 하비가 덧붙였다.

잠시 말이 없던 빅터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

이번엔 하비 쪽에서 말이 없어졌다.

“이만 솔직해져. 내가 그런 것처럼, 너도 결국 날 끊어낼 수 없잖아. 모를 줄 알았어?”

하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심으로 빅터와 끝내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몸을 섞을 구실조차 주지 않아야 했다. 반 로투스에게는 일말의 여지없이 마지막을 선고했건만, 빅터에겐 그러지 못했다.

그 마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제는 안다. 더 이상 어쩌지 못한다는 것도.

빅터는 못 참겠다는 듯 테이블 반대편으로 아예 건너갔다. 하비의 옆에 앉은 뒤 빅터가 심란하게 굳은 단정한 얼굴을 손으로 덮어 어루만졌다.

“관계 10번에 영원히 얼굴도 비치지 말라니. 그 말 할 때 네 얼굴이 어땠는지 알아?”

입술을 지그시 깨문 빅터는 이목구비 선명한 하비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어릴 때 해적선에서 밤마다 죽도록 그렸던 처연한 밤색 눈과 곧고 짙은 눈썹, 길게 뻗은 우아한 콧대, 그 모두가 하나하나 소중하게 별처럼 가슴에 박혀들었다. 하비는 어딘지 숙연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훑는 것처럼 하비의 뺨을 쓰다듬은 빅터가 하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뜨거운 열이 전해졌다. 맥이 뛰고 있었다. 가슴속의 박동보다 더 빨리.

“정말로 독하게 끊어낼 거면 날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했어야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나? 누군가의 약점이나 허점은 그게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바로 눈치챈다고.”

지금도, 하비는 뭔가 이상했다. 평소처럼 굴고는 있지만 숨길 수 없는 미묘한 균열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빅터는 우선은 모른 척해주었다.

대신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비가 어떤 말을 하든, 무슨 반응을 보이든, 부디 알아주었으면 했다.

빅터가 하비의 이마에 마주 대었던 제 이마를 걷어내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날 때려죽여도 좋으니까 한 번만 믿어줘.”

에메랄드를 닮은 그 선명한 녹색 눈이 길게 휘었다.

“사랑해.”

마주 보고 있던 밤색 눈이 크게 뜨이고, 파르르 떨렸다. 빅터는 그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하비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곧이어 뱉는 말은 빅터가 가진 뼈아픈 한이었다. 그가 미끈한 눈썹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후회해.”

빅터의 인생에서 가장 솔직한 시간이었다. 언제나 무거워 하비에게 기울었던 진심의 추가 처음으로 빅터에게 기울었다.

“그날, 네가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하비는 온몸으로 던지는 빅터의 묵직한 진심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턱까지 차오르던 해묵은 감정들이 드디어 터져 나올 때를 고르고 있었다. 단단히 세워둔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가슴속에서 한계까지 도달한 슬픔이 파도쳤다.

왜 하필 지금이지.

왜 지금.

왜.

하비와 다르게 고른 숨을 고르게 뱉던 빅터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갔다. 부드럽게, 하지만 집요할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비는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마음이 너무 절실해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아서.

어느새 빅터는 하비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당겨 더욱 깊은 키스를 유도했다.

혀가 난잡하게 엉키고, 뱀들의 교미처럼 야하게 얽혀들었다. 입을 뗄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붉은 살점이 서로를 더 취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입술 옆으로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끼익!

빅터가 한 팔로 하비의 의자를 잡아당겨 가슴팍을 단단히 붙였다. 단련된 상박이 서로 부딪치면서 은밀한 소리를 냈다. 입술의 연결이 깊어질수록 하체로도 반응이 갔다. 서서히 중심이 부풀었다.

이윽고 아쉬운 듯 천천히 입술을 뗀 빅터가 부풀어 오른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모자랐다. 눈앞의 남자에게 더 깊이 닿고 싶다고 그의 육체가 꿈틀대며 주인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걸로도 안 되겠나?”

하비는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축축한 타액이 묻어났다. 누구의 것인지도 몰랐다.

이미 버거웠다. 한계였다. 더 이상 이 위험한 남자를 가까이하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몸이 달아올라 다음을 부추기고 있었다.

가슴을 전부 태워 버릴 것처럼 강렬한 열기가 감돌았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었다.

하지만 하비는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품 안에 가져온 것이 껄끄럽게 머릿속 신경을 긁어댔다.

“나는…….”

몇 번이나 달싹대던 하비의 입술이 결국 일자로 다물렸다. 말할 수 없다. 조금 후면 기다리던 끝을 볼 수 있다. 그 전까지는 쉽게 속내를 털어놓으면 안 되었다.

묵묵히 기다리던 빅터는 실망한 기색을 숨기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꼭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야. 부담 갖지 마.”

하비가 흔들린 것을 본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돌려준 브로치와 함께 전해줘. 빅터가 낮게 덧붙였다.

하비는 빅터가 두고 간 물건을 떠올렸다. 그것을 줄 때 눈에 띄게 좋아하던 빅터의 얼굴과 질투한 자신을 한심해하던 모습, 원래 네 것이라 하자 다시 소년처럼 웃던 미소가 교차되었다. 하비의 가슴이 홧홧한 통증으로 지끈거렸다.

빅터는 쓸쓸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끝까지 안 돌려줘도 원망하지 않을게.”

하비는 그 나직한 속삭임에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빅터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아까완 다르게 덮치듯 빅터에게 키스했다. 빅터는 놀라서 눈을 치떴다.

“하비?”

하비가 빅터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고 입술을 겹치다 미끄러지자 이번엔 아래로 내려와 단단한 턱 끝을 핥았다.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두려웠다.

또 거짓일까 봐.

믿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하면서 하비는 더욱 가라앉아 왔다. 이제는 그 지옥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때다.

촛불이 흔들거리면서 두 사람의 실루엣을 길게 창문에 비춰냈다. 하비는 입고 온 청남색 더블릿을 벗어 던지고 튜닉마저 탈의했다. 빅터도 급한 손길로 상의를 벗어 던지면서 맨몸으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 역시 안에 들어가서 하는 게…….”

빅터가 별장 안쪽의 방 중 가장 큰 침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하비는 그가 다른 곳을 보지 못하도록 턱을 꽉 움켜쥐어 자신 쪽으로 돌렸다. 입술을 가까이 붙이면서 하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기서 해. 못 기다려.”

과감한 하비의 말에 빅터는 순간 침묵했다. 금방 눈에 불이 붙는 것을 보며 하비는 빅터의 앞에 놓인 포도주에 몰래 작고 하얀 알약을 떨어뜨렸다.

미리 준비해 온 것이었다. 워낙 재빨리 넣은 데다 하비의 얼굴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빅터는 미처 보지 못했다.

약은 포도주 안에서 빠르게 풀렸고, 넣은 흔적조차 금방 없어졌다. 하비는 빅터가 눈치채기 전에 약을 넣지 않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빅터에게 건배를 위해 내밀었다. 눈을 크게 뜨는 그를 보며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왕 취해서 안기는 쪽이 마음 편할 것 같아서.”

피식 웃은 빅터는 하비와 잔을 맞대었다. 유혹할 때는 언제고, 다시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생각하면서.

빅터가 아까처럼 한 번에 포도주를 들이켰다. 고상하고 우아한 척하던 시의원 빅터 베르텐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적에 가까운 모습에 하비는 이것이 그의 본질과 좀 더 맞닿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닦은 빅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하비의 목을 잡았다.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목덜미를 옅게 물고 귓등에 입술을 붙인 채 낮게 속삭였다.

“지금 멈추라고 하면 정말 미칠지도 몰라.”

약한 살을 깨물리자 움찔하면서도 하비는 완전히 비워 버린 빅터의 빈 유리잔을 주목했다.

눈을 돌려 다시 빅터를 바라보면서, 하비가 관계를 재촉했다.

“멈추지 마.”

주변에 불씨가 꺼질 때마다 넣는 향유가 담긴 호리병이 있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빅터는 다급히 이를 잡고 뚜껑을 열었다. 독한 향유 냄새가 났지만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빅터가 테이블 앞에 뒤돌아서 있는 하비의 어깨를 움켜쥐고 구멍 사이로 향유를 들이부었다. 만지기 좋게 볼륨 있는 엉덩이가 움찔대고 그 사이로 향유가 줄줄 흘렀다. 가랑이와 회음부 사이로도 투명한 물이 실뱀처럼 가늘게 내렸다.

퍼억! 쨍그랑!

하비가 테이블로 거칠게 밀린 탓에 저 멀리 그릇이 밀려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의 단단한 팔에 부딪쳐 식기도 몇 개 떨어졌다.

요란한 소음이 가득하건만, 하비에겐 빅터의 거칠게 흥분된 숨소리만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이제 곧,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빅터는 떨어진 잔해들을 흘끗 보고 하비의 단단한 어깨 근육을 손으로 쓸었다.

“끝나고 내가 치울 테니까 신경 꺼.”

손가락에 닿는 감촉에 욕정이 솟았다. 빅터는 허리를 숙여 옴폭하게 파인 날개뼈 부근을 혀로 길게 쓸었다. 하비 특유의 옅은 알파 페로몬조차 달았다. 하비가 움찔대며 차가운 테이블 위로 뺨을 기대었다.

“읏…….”

빅터의 손이 평소처럼 구멍을 넓히려 아래로 향했다. 그러나 막 손가락을 집어넣던 다급한 손길이 멈칫했다.

갑자기 빅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혹스러운 듯 그의 눈이 일그러졌다. 미친 듯이 흔들거리는 시야를 떨쳐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게, 뭐…….”

빅터는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머리를 마구 뒤흔들다, 하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말도 안 된다. 이런 시점에서 느닷없이 잠이 온다고?

‘설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등만 보이고 있는 하비에게, 빅터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한테 뭘 먹인 거야.”

하비는 말이 없었다. 이건 도저히 인간적인 힘으로 참을 수 있는 잠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정신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빅터가 눈을 부릅뜨고 하비의 단단한 등을 노려보았다. 가만히 있던 등이 몹시 흔들렸다. 점점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빅터는 하비의 어깨에 자국이 생기도록 꽉 쥐었다. 하얀 피부에 새겨지는 붉은 자국을 보니 직전 먹은 적포도주가 생각났다.

거기다 약을 탄 게 분명했다.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잡고 뒤흔들고 있는 사이 말이다.

‘제기랄.’

이걸 노린 거였나. 마음을 연 것처럼 보인 것도, 적극적으로 군 것도, 전부.

빅터는 방심한 자신을 비웃었다. 그 틈을 노려 목적을 이룬 하비도.

‘하. 대단해, 정말.’

지금도 미동 하나 없이 엎드려 있는 하비를 보며 빅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비가 굳이 정신을 잃게 하는 약을 먹이는 이유는? 자신을 죽이려고? 그것보다 더 미칠 것 같은 이유일 것 같았다. 그 하비 스터스라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가정이 하나 있었다. 빅터는 경악했다. 그건 정말로 안 된다.

“헉…….”

빅터는 악으로 버텼지만 점점 하비를 붙든 손에서 힘이 빠졌다. 정신을 차리려 할수록 더 극심한 잠이 몰려왔다.

‘안 돼. 정신 차려야…….’

순간 빅터의 눈에 반짝이는 뭔가가 들어왔다. 작은 그것을 반대편 손에 집은 순간, 하비가 조용히 뒤돌더니 어깨에 얹힌 빅터의 한 손을 잡아 내렸다.

빅터는 손을 늘어뜨리고 결국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는 빅터에게 하비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평범한 수면제니까 걱정하지 마. 좀 독한 것이긴 하지만.”

웬만한 사람이면 진작에 쓰러졌을 텐데, 역시 우성 알파라 그런지 약효가 도는 게 느린 편이었다. 아니면 그 빅터 베르텐이라 수면제조차 더디게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테니까.”

빅터가 가물거리는 의식을 억지로 붙들었다. 눈을 뜨려고 애쓰면서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뭐가…… 끝난다는 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떠날 기회가 전혀 없을 것 같았거든.”

하비가 웃옷에서 손수건을 꺼내 뒤를 닦고는, 떨어진 옷들을 하나하나 주워 다시 입었다. 견고한 갑주를 걸치듯 가지런하게 옷매무새를 정비한 그가 상체를 숙여 빅터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올려다보는 녹색 눈이 애처로웠다.

“네가 진심인 건 알았어. 하지만 우린 너무 많은 걸 잃었지. 이 관계에서 남은 건 상처뿐이고.”

참고 참았던 말들이 이제야 나왔다. 빅터의 고백에 터졌던 감정의 둑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냉정하지는 않았지만, 관조하는 태도였다.

하비는 빅터의 부드러운 황금빛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미안하다.”

가물대며 감기는 녹색 눈이 원망을 가득 담고 있었다. 반 로투스의 것과는 사뭇 다른 원망이었다.

증오도, 질투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진득한 ‘애정’이었다.

하비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빅터의 눈가를 손으로 길게 매만졌다.

이것을 그리도 갖고 싶었는데. 진실로 얻고 싶었던 것을 이제야 받게 되었는데.

하비는 자조했다. 입맛이 썼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할 생각이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그런 것조차 없으면 숨 쉬는 것조차 죄악감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

그 어떤 것도 지키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떠나가는 것을 붙들 수도 없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믿어줬던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었다.

하비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가운데서도 외교부 사람들만큼은 끝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빅터의 저택 사용인들도,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도.

그들의 믿음에 보답하고 나서야 살아 있다는 감각이 들 것 같았다.

더욱이 이로비나 섬 매입 건은 하비가 주도한 것이고, 붙들린 사람들도 그가 직접 보낸 인력이었다. 큰 책임감이 느껴졌다.

하비는 빅터의 목을 한 손으로 쓸 듯이 만졌다.

“이로비나 섬으로 갈 거다. 이걸 끝내고 나면 좀 자유로워질 것 같거든. 이 일이 끝나면 외교관도 그만둘 거야.”

쓸쓸한 여운이 하비의 목소리를 뒤따랐다.

“그만둘 목숨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

속삭이듯이 빅터의 귓가에 대고 말한 하비가 상체를 일으켰다.

“잘 지내.”

하비가 뒤를 돌아보려던 때, 빅터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크게 튀었다. 하비는 빅터의 눈이 초점을 되찾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손에서는 믿을 수 없는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펫을 흠뻑 적실 정도로 많은 출혈이었다.

빅터가 식은땀을 흘리며 비스듬하게 웃었다.

“시발……. 가긴 어딜 가.”

어느샌가 빅터의 손에 치즈를 자르는 용도로 쓰이는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 칼날을 꽉 쥐어서 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였다.

빅터는 한 손에선 피를 미친 듯이 흘리면서, 다른 손으론 하비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통각으로 멀어지는 잠을 쫓으려는 것이었다.

당황한 하비가 칼을 빼내려고 할수록 빅터는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피가 나오는 속도가 빨라지자, 다급해진 하비는 빅터를 설득하려 했다.

“손 잘려. 놔.”

하지만 빅터는 요지부동이었다. 도무지 저 큰 손에서 작은 나이프를 빼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빅터는 창백해진 얼굴로도 협박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가면…… 더한 걸 자를 거야.”

혀도 깨물었는지 입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빅터가 눈을 부릅뜨면서 하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너무 강한 힘이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넌 못 가.”

지독한 저음이 하비를 영혼까지 옭아매었다. 발이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그딴 짓 절대 못 해.”

빅터는 보다 또렷해진 눈빛으로 하비를 응시했다.

“혹시라도 돌아오면, 네가 볼 건 내 시체일 거야.”

옷깃을 잡아당기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하비는 더 가지 못하고 빅터가 앉은 의자 아래로 주저앉아 버렸다.

쿠당탕!

그 바람에 빅터도 의자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두 사람이 한데 엉켰다. 빅터는 하비를 아래로 깔고 근성으로 버텼다.

수면제를 준 사람이 이를 안다면 미친놈이라며 기겁할 노릇이었다. 덩치 큰 동물에게도 먹히는 수면제였다.

경고하는 목소리가 하비의 귓전을 살벌하게 두들겼다. 빅터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오로지 피를 흘리는 통각으로 말을 듣지 않는 육체를 이겨내며 빅터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일어나려는 하비를 다시 잡아 넘어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쿵!

하비가 못 가게 온몸으로 짓눌러 버린 뒤, 빅터는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 했다.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이겨냈다.

“네가 간다고 해서 일이 전부 해결되지도 않아.”

그는 하비에게 닿길 바라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해적의 생리는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내가 도와줄게. 같이해. 혼자 하지 마.”

하비는 몸도 가누지 못해야 할 사람이 자신을 아래에 깐 것보다, 옷에까지 스며드는 엄청난 양의 벌건 핏물에 더 놀랐다.

“피가 너무 나잖아. 이러다 진짜 죽어.”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빅터가 하비의 멱살을 잡아당겨 깊이 키스했다.

“으읏…….”

혀를 깨물어서 나온 비릿한 피 맛이 하비의 입안에서도 맴돌았다. 몽롱한 눈으로 하비를 내려다보며 빅터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상관없어. 네 위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

그 순간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빅터가 하비의 위로 와르르 무너졌다. 무거운 몸으로 짓누르고 있으니 빠져나가기도 힘들었다.

겨우 빅터를 밀어내고 일어나는데, 이번엔 빅터의 멀쩡한 손이 더블릿 아래의 튜닉을 세게 쥐고 있어서 갈 수가 없었다. 기절한 채로도 상상 이상의 힘이라 도무지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칼날을 쥐고 있는 다른 편 손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대체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가늠도 안 되었다.

‘옷이야 자르면 되지만.’

여기서 빅터를 두고 떠나면 과다 출혈로 죽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불러서 의료 조치를 해야 했다.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빅터의 장담대로, 이대로 떠나면 그는 제가 한 말을 지킬 것이다. 혹시라도 돌아왔을 때 차가워진 빅터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실핏줄이 터져 벌게진 눈으로 하비는 잠시 의식이 없어진 빅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빅터의 한 손에선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입술에도 혈색이 사라지고 있었다.

왜 이 지경이 되어서도 보내주지 않는 건지. 미칠 것 같았다. 하비가 중얼거렸다.

“이제 제발……. 날 내버려 둬.”

그때 무의식중에 움찔대던 빅터가 빈손으로 하비의 손을 잡았다. 특히 차가운 손끝 쪽을 꽉 말아 쥐었다. 불쑥 조금 전에 빅터가 했던 말들이 생명력을 얻고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손이 너무 빨리 식어. 원래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금방 차가워지잖아.’

‘사랑해.’

다정한 그 목소리에 울컥,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것들이 무너졌다.

어떻게 해도 녹지 않았던, 꽁꽁 얼어붙었던 가슴 깊은 곳이 빅터의 고백에 뜨겁게 녹았다. 그의 목소리가 가슴속을 잠갔던 뭔가를 일시에 해제시켰다. 응어리졌던 것이 녹아서 흘러내리고, 그것은 하비의 눈가에도 맺혔다.

빅터를 보면 괴롭고, 떠나고 싶었던 이유. 하비의 마음이 병들어가기 시작한 절대적인 계기.

스터스가가 무너진 것보다, 믿었던 옛 친구가 배신한 것보다,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 크고 중요한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곧 죽어도 자신을 놓지 않고 있는, 빅터 베르텐. 이 남자 때문이었다.

하비는 그제야 계속 회피하던 장면과 마주 보았다. 빅터의 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핏물처럼, 그때도 그랬다. 하혈과 함께 쏟아져 나오던 작은 생명체는, 너무 빨리 식었다.

그래서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명은 하비의 손을 떠나 멀리 달아났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가슴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만큼.

하비는 빅터가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류하는 뜨거운 덩어리가 목에 매달렸다.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금방 차가워졌다. 손에 있었던 그 너무나 작고 연약하던 생명은, 빅터에게 보여주기도 전에 너무나 빨리 차가워졌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빅터에 대한 분노로 승화되었고, 미움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감정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하비의 마음에 박혀 있었다.

빅터를 보면 숨이 막혔다. 사산아를 볼 때 느꼈던 참담함과 비참함, 아픔이 개미 떼처럼 까맣게 심장으로 몰려들었다. 빅터는 처음부터 자신을 배신하기 위해 판을 짰다는 것도 자꾸만 떠올랐다.

그럼에도 미약하게 뻗어 나가는 실낱같은 희망이 지긋지긋했다. 그런 것들이 몇 배로 하비를 고통스럽게 했다.

한번 터진 뜨거움은 하비의 눈가에서 멎지 않고 흘렀다. 몸에 이런 것이 있었나. 존재조차 몰랐던 작은 웅덩이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것은 때를 만나 일제히 바깥으로 향했다.

하비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짓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차마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그의 속을 엉망으로 할퀴었다. 목에 내내 걸려 있기만 하던 뜨거운 덩어리가 드디어 터져 버렸다.

하비의 얼굴이 괴로운 듯 크게 일그러졌다. 투명한 물이 찡그린 밤색 눈에 가득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멎지 않고, 계속.

피 맺힌 입술도 차마 뱉지 못한 오열로 구겨졌다. 마주하기 두려워 파묻어두었던 진실이, 간단한 빅터의 말 몇 마디에 풀려나와 도로 가슴을 후려쳤다.

그 뒤로 그 작은 생명이 어떻게 됐는지 차마 묻지도 못했다. 차가운 땅속에 있을까, 재가 되어 사라졌을까. 때늦은 미안함과 후회가 가슴을 쳤다.

이 순간에도 의식을 깨우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금발의 미남자에게, 하비는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우리의 결실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못 지켰어. 내가…….

‘약을 계속 먹는 바람에.’

하비는 사산의 원인이 위가 아파서 먹었던 그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후로도 약을 먹는 데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굳이 약이 아니더라도, 그 일을 빚어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작은 깨달음 사이로 눈물이 쏟아지는 비처럼 그치지 않고 내렸다. 턱까지 적시다가 맺힌 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얼굴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차가운 눈물에, 빅터는 초인적인 의지로 간신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눈물로 얼룩진 하비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왜.”

빅터는 더듬대며 억지로 손을 움직였다. 당황한 나머지 의식을 깨우려 날카로운 나이프를 쥐고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툭.

그 탓에 하비가 어떻게 해도 떼어낼 수 없었던, 세게 움켜쥐고 있던 나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 묻은 손이 하비의 눈가를 매만졌다. 미끈대는 피가 하비의 눈물에 섞여 붉은 자국을 만들어냈다. 하얀 뺨을 가르고 붉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빅터가 잠긴 목소리로 계속해서 물기가 맺히는 하비의 눈가를 피묻은 손으로 닦아냈다. 닦아도, 닦아내도 멈추지 않았다.

“왜 울어.”

하비 스터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빅터는 하비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아팠다.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선득한 아픔이었다.

다시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띄엄띄엄 간격이 멀어졌지만, 빅터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갔다.

“해적 새끼든…… 반 로투스…… 놈이든, 다 죽여줄 테니까, ……울지 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어이가 없어서 하비가 일그러진 얼굴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찌푸린 눈 탓에 괴었던 눈물이 더 크게 쏟아졌다. 빅터의 손에서 나는 피 냄새가 짙게 코끝을 스쳤다.

하비가 절대로 떠날 수 없게, 그리고 더 이상 울지 않기를 바라며 빅터는 완전히 의식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비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 * *

마중을 나온 남자가 걱정스러운 듯 뒤를 자꾸만 힐끔댔다. 반 로투스가 몰래 보내준 뱃길에 밝은 자였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늦을 텐데.’

반은 하비에게 이로비나 섬으로 갈 배를 빌려주기로 했다. 빅터를 설득해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도록 해주겠다고 하비가 약속했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였다. 물론 ‘빅터 몰래 은밀히 준비할 것’이 하비가 내건 조건이었다.

하염없이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저 멀리서 달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체격 있는 사내가 하나 보였다. 풍기는 페로몬을 보아 알파였다.

“오셨습니……. 어?”

기다리던 남자가 아니었다. 하비 스터스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내였다. 왠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며 하비 대신 온 자가 입을 열었다.

“기다려도 소용없을 겁니다.”

“예?”

“스터스 경은 오지 못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진이 사나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스터스 경은 이로비나 섬으로 가지 않을 거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 * *

돌아온 빅터는 손에 거대한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럼에도 표정은 밝았다. 처음 상처에 놀랐던 빅터의 사용인들은 곧 일상처럼 치부하며 주인의 상처에는 관심을 끊었다. 대신 다른 것에 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집사 레나가 한 손에 붕대를 감은 빅터를 졸졸 쫓아가며 물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스터스 경이 드디어 용서해 주던가요?”

“아니.”

단호한 대답에 레나에게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 푼수 같은 웃음은 뭐예요. 빨리 가서 잘못했다고 계속 비세요. 스터스 경은 은근 마음이 약해서 받아줄지도 모르니까.”

바보 같다면서 힐난하는 건방진 집사에게 빅터는 피식 웃어줄 뿐이었다.

마침 같은 시각, 하비도 저택에 돌아와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인님. 여기 먼지가……!”

먼지가 쌓인 창가를 본 집사가 호들갑을 떨며 청소하려 했다. 하지만 하비는 손을 뻗어 이를 막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내버려 둬.”

“예? 하지만…….”

결벽증이 극심한 하비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집사를 내버려 둔 채 하비는 창틀에 앉은 작은 먼지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결국 떠나지 못했다. 완전히 의식을 놓을 때까지 끊임없이 빅터가 해주었던 말들 때문에. 절대로 놓지 않던 그 손 때문에.

‘뭐가 어떻게 됐든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욕하려면 날 욕하라고. 왜 자꾸 너만 짊어지려고 해.’

‘죄 많은 나도 멀쩡하게 고개 빳빳이 들고 사는데, 왜 네가…….’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하비가 고개를 들어 밝게 햇살이 쏟아지는 창을 보았다. 오늘따라 날이 좋다.

“아, 그보다 내일부터 외교부로 출근할 테니 준비해 주겠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쩍 벌리는 집사를 향해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끝내야 할 일이 있거든.”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고 있었다.

“어떤 사람과 함께 끝내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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