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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검은 종소리 (7/18)

제7장 검은 종소리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뱉어낼 것처럼 우중충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며칠째 비를 내릴 시늉만 하고 있었다.

총괄 외교관이 출장을 가서, 외교관들이 모인 집무실에서는 수석 외교관인 하비 스터스와 몇몇 보좌 외교관만이 있었다.

외교부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하비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알았다. 언제나 한편을 차지하던 물건이 주머니에서 사라지고, 허전해진 것을.

빅터를 닮은 녹색 눈 보석이 박힌 황금 브로치. 그걸 건네주었다. 하비는 어느새 집중력을 잃고 빅터의 생각에 빠졌다.

‘그때 표정이 너무 안 좋았는데. 괜찮은가.’

브로치를 보았을 때 빅터의 얼굴은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 브로치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었을 때도, 그것을 건네줄 때도.

그저 걱정거리를 없애줄 요량으로 준 것이었는데, 빅터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았다.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속내를 감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굳이 파헤치지 않았다.

‘잘 가고 있을까.’

지금쯤 망망대해 위에서 정리하고 온다는 일을 구상하고 있겠지. 무슨 일인지 자세히는 알려주지 않고, 인생의 큰 축을 바꾸고 오는 일이라고만 언급해 주었다.

하비는 빈 주머니를 만지작대다가 허전함을 그에 대한 생각으로 달랬다. 빅터가 이곳에 없어서인지 자꾸 옛날 생각이 났다.

스터스가에 잘 보이려고 한 빅터의 할아버지, 레토 베르텐은 어린 빅터를 비롯한 손자, 손녀들을 스터스가가 주최하는 조촐한 클럽에 데려오곤 했다. 눈도장을 찍으려는 수작이 훤히 보였지만, 그런 사람들이야 널렸으니 하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이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빅터가 꾀병을 부리고, 괴팍한 장난을 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때도 빅터는 반항적인 녹색 눈에, 산만하기 그지없는 소년이었다. 호기심도 많았다. 순수한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악동에 가까웠다.

빅터는 하비의 주변을 집요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 장난’ 이후로는 쉽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라힌 스터스는 대외적인 웃음을 보이면서도 어린 하비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경고했다.

“저 천박한 상인 놈의 손자는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 저런 것과 어울리면 스터스가의 격이 떨어지니까. 혹여 병이라도 옮으면 어떡하냔 말이다.”

빅터가 하비에게 거짓을 동반한 큰 장난을 친 후에는, 어린 빅터를 보는 라힌 스터스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클럽에 오는 귀족들의 자제를 눈으로 훑으면서 라힌 스터스가 말했다.

“쓸만한 미동이 없더구나. 너에게 도움이 되는 아이여야 할 텐데, 그런 아이가 없어.”

왠지 빅터와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서 넌지시 그의 이름을 말해본 적도 있었지만, 라힌 스터스는 어림도 없다며 바로 기각했다.

어린 하비는 크게 실망했다.

‘그럴 거면 왜 내게 의사를 물어보시는 건지.’

일찍이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다른 형제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는 학대에 가까운 엄격한 교육을 강요했으며, 늙은 집사는 그런 라힌 스터스의 수족이었다.

이 너른 저택에서 하비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터스가의 백색 저택에서 파티가 열렸다. 검소한 것으로 알려진 라힌 스터스였기에 성대한 파티는 아니지만 꽤 괜찮은 자리였다. 선대이자 하비의 할아버지인 바론 스터스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파티였다.

그때 하비는 사람들에게 인사만 하고 몸이 안 좋다며 따로 방에 들어가 있었다. 실제 검술 수련을 빙자한 정신 교육을 호되게 받은 다음 날이라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기도 했다.

‘나머지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면 밖으로 나올 생각은 말거라.’

라힌 스터스의 엄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비는 욱신거리는 팔의 상처를 손으로 꾹 누르며 펜을 들었다. 그런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는 듯한, 바닥을 밟는 소리. 쥐는 아니었다.

끼익- 끼이익--

작은 발소리였지만 선명했다. 어린 하비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누구냐.”

문을 벌컥 열자 그 앞에는 금발에 장난스러운 녹색 눈을 한 앳된 소년이 서 있었다. 빅터 베르텐이었다.

“벌써 들켰네.”

멋쩍게 뒷머리를 만지며 그가 변명투로 말했다.

“저택이 너무 넓어서 길을 잃었어.”

한눈에 거짓말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넘어가 주었다. 하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고했다. 그나마 하비의 방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안쪽에 위치해서 다행이었다.

“여기 있으면 안 돼. 어른들이 아시면 그냥 안 넘어갈 거야.”

빅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하비의 방 안을 기웃댔다. 서적이 잔뜩 쌓인 정갈한 방이었으며, 검술 교본서 같은 것도 상당수 보였다. 어린아이의 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삭막했다.

“네가 재미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빅터는 그 방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하비의 일상을 짐작하는 것 같았다. 하비는 일찍부터 숨 막히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어른들의 세계를 더듬대고 살았다.

어린 빅터가 가엾다는 눈길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 동경 가득한 눈빛이었는데, 이질적인 것이 섞여들었다. 이상하게도, 하비는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사랑만 받는 귀족 도련님이면 뭐 해. 이런 따분하고 재미없는 생활이라니. 나라면 진작에 나가떨어졌을 거야.”

한참 투덜댄 빅터는 고민 없이 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밖으로 나갈래? 여긴 너무 숨 막혀. 파티도 재미없고.”

작고 그을린, 상처투성이인 손이었다. 야외에서 신나게 놀다가 긁힌 것 같았다. 활기차고 건강해 보였다.

이 손을 잡아도 될까.

어린 하비가 고민하던 끝에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도련님?”

늙은 집사의 목소리였다. 하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빅터를 보내지 않으면 더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하비는 잡으려던 손을 거두며 늙은 집사를 돌아보았다.

“곧 들어갈 거야. 이 아이는 길을 잃었으니 잘 안내해 줘.”

빅터는 눈만 동그랗게 뜨다가 아쉬운 듯 떠나는 하비의 하얀 손을 보았다. 잡을 수 있었는데.

“같이 나가기로 한 건?”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전엔 못 나가.”

발끈한 빅터가 항의하며 나섰다.

“그런 게 어딨……!”

늙은 집사의 사나운 눈초리가 쏘아졌다. 빅터는 그 기세에 눌려 떨떠름하게 말을 거두었다.

“……어. 아, 그래. 알았다고!”

그런데 얼핏 하비의 목 뒤로 시커먼 멍 자국이 보였다. 놀란 빅터가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하비는 이미 방문을 닫은 후였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 잠시만!”

닫은 방문 너머에서 빅터가 반항하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 집사는 빅터를 강제로 끌고 사라졌다.

문 바로 뒤에 선 하비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비는 하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지만, 자유를 맛보는 줄 알았다.

어린 하비가 피식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나하고 정말 안 어울려.”

그 뒤로 빅터가 해적에게 잡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뜻 모를 절망이 하비를 덮쳤다.

이제 자신을 이 저택에서 꺼내줄 자는 없을 것이다.

영원히.

* * *

한창 과거에 빠져 있던 중간, 하비는 밖에서 들리는 처연한 울음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디서?’

거리에서 여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비가 고개를 들어 창가를 보았다. 아이를 찾는 어미의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동안 벌써 몇 번째 듣는 곡소리인지. 하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전염병인가?”

하비의 옆에 서서 이로비나 섬에 대한 자료를 넘겨주던 남자가 대답해 주었다.

“그건 아닌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하비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자는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요즘 유행하는 소매가 짧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샘 바리스로, 하비를 오랫동안 가장 가까이서 보필했던 외교원이었다.

하비는 심각해진 얼굴로 사안을 짚었다.

“이렇게 사람이 모인 도시에서는 며칠이면 다 퍼져. 베르텐 경이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많은 인구가 밀접한 큰 도시에 전염병이 한 번 돌고 나면 궤멸하는 일이 잦았다. 상층부에서 무엇보다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안이었다.

시의원의 부재 동안 생긴 일은 결과적으로 자리를 비운 의원의 책임이다. 전염병 같은 큰일이 일어난다면 실각은 기본이고, 국왕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엄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

하비는 그걸 염려하고 있었다.

“어쨌든 걱정했던 일이 아니라니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하비를 본 샘이 빙긋 웃었다. 다음 자료를 넘겨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수석 외교관님은 많이 변하셨군요.”

서류를 보던 하비가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내가?”

늘 딱딱하기만 하다가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큰 시류에 의견을 맡기고 반대 의견이 있어도 삼키던 묵묵함도 깨어졌다.

원래 하비는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직언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온갖 반대와 상부의 강압적인 명령에 지치다 보니 서서히 제 목소리를 잃어갔다. 곧은 소리는 언제나 듣기에는 좋지 않으니까.

그런데 최근 들어 다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열정이 살아나 보였다.

샘이 흐뭇하게 말했다.

“역시 베르텐 경의 영향일까요?”

빅터의 이름에 결국 하비는 서류를 치워 버리고 샘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열정 하면 베르텐 경이죠. 이번 이로비나 섬 건도 베르텐 경이 밀어줬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니까요.”

“그건…….”

하비가 이마를 짚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나.”

어쩐지. 이로비나 섬을 노리는 슬루인 제국의 외교관이 몸 로비가 어쩌고, 정정당당하게 어쩌고를 연신 흘리더랬다.

빅터가 밀어줬다는 것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직접 손댄 것은 없지만 정보를 준 건 사실이니까.

샘은 하비가 소문에 대해 자세히 물어볼까 봐 서둘러 다음 안건을 이야기했다. 현재 이로비나 섬의 매입 성공이 코앞이었다.

“이로비나 섬을 사이에 두고 슬루인 제국 측에서 바짝 독이 올라 있어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로비나 섬 주변을 배회하던 해적은 갑자기 자취를 감춰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답니다. 묘한 녀석들이에요.”

“돈을 요구하는 건?”

“간혹 있긴 합니다만, 액수가 크지는 않습니다. 잔인하기로는 임페르 해적단 뺨친다던데, 막상 소문만 무성하지 목격자도 별로 없습니다.”

“그것도 이상하군.”

해적의 소지가 파악되어야 이로비나 섬을 성공적으로 매입하더라도 안전한 항로를 확보할 수 있다. 섬을 매입한들, 해적에게 방해받아 그곳에서 나오는 매장 자원을 본국으로 운반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비가 문득 떠오르는 이름에 대해 물었다. 슬루인 제국이란 말을 들으니 생각이 났다.

“참, 젤가는?”

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녀석, 경께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며 얼굴도 비치지 않으려 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난날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고, 하비는 아찔해졌다.

‘다 지난 것이긴 하지만…….’

젤가는 첩자 교육을 혹독히 받은 사람답게 정신력이 강하지만 하비에 한해서는 마음이 한없이 여렸다. 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하비가 굴욕당하는 것을 봐야 했다.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 뒤로 따로 만나서 달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도 젤가는 죄송하다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빅터를 저주하며 증오하는 말도 간간이 뱉었다.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던 중, 젤가는 어느 순간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연락도 뚝 끊겼다. 그를 생각하자 또 위가 살살 아파왔다.

미간을 잔뜩 구기며 배를 만지는 하비를 샘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또 아프세요?”

“금방 괜찮아져. 신경 쓰지 마.”

말은 그리했지만 하비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갈수록 통증의 강도가 거세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이쑤시개로 쑤시는 정도였지만, 점차 칼로 후비는 것처럼 날카롭고 큰 통증으로 변질되었다.

의사는 일에 신경을 너무 써서 위가 아픈 것이라 경고했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쓰고 살 수가 있는지.

결국 아플 때마다 하비는 처방받은 약을 한 웅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진통제가 포함된 약이었다.

약을 먹자 통증이 조금 가시는 듯했지만 이번엔 아랫배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이건 대체 뭘까. 속이 지나치게 메스꺼웠다.

왠지 모를 찜찜함을 안고 하비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날 밤, 내릴 듯 말 듯하던 구름이 닫았던 수문을 열었다.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쿠르르릉!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일대를 모두 먹을 것처럼 휩쓸었다. 바람도 거세게 불어 창문을 부술 기세로 뒤흔들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스터스가의 거대한 하얀 저택으로 어두운 색의 우비를 입은 남자가 찾아들었다.

하비를 보필하는 젊은 집사가 그를 응접실로 데려왔다. 젖은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려서, 집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른 사용인에게 흔적을 닦도록 지시했다.

우비를 벗어서 사용인에게 넘긴 그는 금발에 옅은 녹색 눈을 지닌 용모 단정한 청년이었다.

틀어박혀 자료를 보고 있던 하비가 소식을 듣고 응접실로 나오다 흠칫 놀랐다.

“젤가?”

확연히 깊어진 눈매에 마음고생이 엿보였다. 거뭇한 것이 눈 밑으로 늘어져 있고, 표정에는 무언가에 대한 집념이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미청년이었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젤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존경를 표한 뒤, 하비에게 고했다.

“스터스 경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둑한 눈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하비가 우선 그를 응접실 테이블에 앉혔다. 따뜻한 차를 내오라 지시한 하비는 젤가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보다 그동안 어디서 지낸 거지? 연락 한번 없더니.”

한기 때문에 하얗게 질렸던 젤가의 손끝과 부르튼 입술이 점점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하비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혈색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젤가는 머뭇대다가 겨우 답변했다.

“일이 많았습니다.”

말이 평소보다 짧았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비는 그가 제대로 운을 뗄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따뜻한 차가 한 잔 비워질 때쯤, 젤가가 본론을 말했다.

“입수한 정보가 좀 있는데, 알고 나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무슨 정보?”

“앞뒤 가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숨을 고른 젤가가 천천히 말했다.

“생각해 보니 하나는 경이 그다지 반길 만한 화제가 아니군요. 오히려 실망하실 수도 있고……. 듣는 것은 경께 맡기겠습니다. 듣고 싶지 않으시면, 안 들으셔도 됩니다.”

젤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하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들어야 할 것이라면 듣는다는 것이 하비의 원칙이었다.

“급한 것부터 듣지.”

젤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론을 꺼내 들었다.

“이로비나 섬은 시작일 뿐입니다.”

“무슨 말이지?”

“요즘 그 섬 근처에 출몰한다는 해적 말입니다. 슬루인 제국에서 고용한 해적입니다.”

하비가 쥔 찻잔이 흔들렸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젤가를 응시했다.

“그 해적들은 예전 임페르 해적단처럼 돈에 목숨 걸지도 않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비도 알았다. 해적이 돈에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그건 다른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슬루인 제국에서 탈출할 때쯤 제가 본 것도 있고……. 그놈들은 영해를 넓히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괜찮은 다음 식민지도 물색하고 있었고요.”

하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가장 가까이 인접한 우리나라가 거슬리겠어.”

“그겁니다. 그런데 우린 이미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여력이 없고, 군을 동원하기에도 마땅치 않죠. 우리 내부 사정도 훤히 알고 있으니, 해적으로 손쓰려 하는 걸 겁니다. 어차피 우리가 대대적인 해적 소탕 인력을 동원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해적을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면 그들이 알아서 방해를 해준다. 얼마나 편리한 체계인지.

하지만 하비는 피식 웃으며 조금 식은 찻물을 다시 입에 머금었다. 이렇게 훼방을 놓을수록, 더욱 불타올랐다.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로비나 섬의 영해까지 빼앗기면 하비의 나라는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로비나 섬은 중요한 거점이 될 것이다.

“들을수록 절대 포기할 수 없군.”

젤가는 예상한 듯 밝아진 얼굴로 헤헤 웃었다.

“역시, 그렇죠? 스터스 경답다니까요.”

“해적과 슬루인 제국이 내통하는 물증이 있나?”

“거기까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알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하비의 칭찬에 젤가는 쑥스러이 얼굴을 붉혔다. 어릴 때부터 봐서인가, 하비 앞의 젤가는 여전히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하비가 그를 보며 마주 웃더니 다음 건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다음 안건은?”

갑자기 젤가의 웃는 얼굴이 사라졌다. 그가 한참을 머뭇대더니 빤히 쳐다보는 하비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간신히 말했다.

“현 시의원이자 베르텐가의 차기 가주인 빅터 베르텐 경에 관한 내용입니다.”

찻잔을 집던 하비의 손이 멈칫거렸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하비를 피하듯 젤가는 다른 곳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현재 경의 연인이기도 하죠. 이건 제 사적인 감정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되도록 미루고 싶었습니다.”

빅터를 닮은, 아니, 완전히 다른 녹색 눈동자가 고요히 하비를 보았다. 빅터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는 데 반해, 젤가의 것은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눈 색깔도 빅터가 훨씬 진했다.

하비는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나 다른데, 빅터는 어떻게 브로치가 젤가의 것이라고 단정 지은 건지.

짧은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소중한 듯 브로치를 손에서 놓지 않던 빅터가 떠올랐다.

‘정말, 나 주는 거 맞지?’

몇 번이나 묻기도 했다. 첫 선물이 보잘것없어 민망했지만 빅터는 연신 웃으며 때가 탈까 차마 옷에 달지도 못했다.

하비는 그때를 생각하며 뜻 모를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괜찮을 것이다. 그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을 만반의 준비를 했다.

“……듣겠어.”

하비가 준비된 듯하자 젤가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최대한 감정은 내려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만요. 베르텐 경이 죽도록 밉지만, 저는 스터스 경이 상처받는 게 더 싫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도 서론이 긴지 모르겠다. 하비는 젤가가 시간을 끌수록 불안해졌다. 젤가는 망설임 끝에 천천히 말했다.

“혹시 최근 경의 저택에서 사람이 죽은 적이 있습니까.”

하비가 눈을 크게 치떴다. 가슴속에 무거운 것이 쿵, 내려앉았다.

“그건…… 어떻게……?”

하비는 고독하게 죽어갔던 늙은 회계사가 바로 떠올랐다. 젤가는 누군지는 모르는 듯했다.

“베르텐 경이 지시 내린 겁니다. 자연사로 위장하라는 명이었죠.”

하비가 이마를 짚으며 테이블만 하염없이 쏘아보았다. 아니라고 했다. 분명, 죽이지 않았다고.

‘혹시, 경이 죽인 건 아니겠지.’

‘그럴 이유가 없는 걸 가장 잘 알 텐데. 왜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거짓말을 한 건가.

깨닫는 순간 하비는 위가 미친 듯이 당겼다. 단순한 아픔을 넘어 격통이 일었다. 하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아픈 곳을 손으로 쥐어뜯었다. 식은땀이 후드득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젤가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스터스 경? 괜찮으세요?”

멀리서 보던 집사가 급히 뛰어왔다. 그는 하비가 자주 먹는 약통과 물을 내밀었다.

“또입니까?”

집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네는 알약을 하비가 떨리는 손으로 쥐었다. 물을 마시고 털어 넣는 것이 익숙해 보여서, 젤가는 그가 자주 이런다는 것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통증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강도는 더 높게, 주기는 자주.

하비는 할아버지도 같은 증상으로 평생 고생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순간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쿨럭!”

하비가 얼른 집사가 건넨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간혹 기침을 하긴 했지만, 이번은 평소와 달랐다. 뜨거운 것이 역류하는 것 같았다. 하얀 손수건에 붉은 것이 묻어 나왔다.

‘피?’

양이 많진 않지만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다. 하비는 빠르게 입술을 마저 닦은 뒤 피가 붉게 묻은 부위는 손으로 쥐어 숨겼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약이 빨리 듣는군.”

하비는 아무렇지 않게 피가 묻지 않은 나머지 부분으로 식은땀을 닦아냈다. 각혈을 했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눈앞에 있었다.

‘정말 네가 그분을 죽였다는 건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육체적인 통증은 점점 잦아들고 있었지만, 마음의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하…….”

이건 정말 아니길 바랐는데. 그 건만큼은 빅터가 아니었으면 했다. 믿고 있던 것들이, 그가 빅터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들이, 조금씩 어긋났다.

하지만 더 크게 흔들리기 전에 하비는 마음을 다잡았다. 실망하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납득 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그런 실마리조차 잡으려고 하는 자신이 비겁하고 한심해 보였지만 하비는 아직 빅터를 믿고 싶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믿지 못한다면, 이제 믿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간신히 통증이 진정되자 하비는 대화를 재개했다. 젤가가 오늘은 이만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렸다. 하지만 하비는 끝까지 듣겠다고 했다.

집사는 염려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시 멀찍이 떨어져 대기했다.

“왜 죽인 거지? 이유도 알고 있나?”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려던 젤가는 하비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털어놓았다.

“거기까진 잘 모르겠지만, 뭔가를 숨기려 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숨기려는 것?”

“증거 인멸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더 이상한 건 그걸 없앤 게…….”

아까보단 조금 가까이에서 대기 중인 집사를 흘끗대더니 젤가가 갑자기 소리를 확 낮추었다. 하비에게만 들리도록 말이다.

“경의 집사입니다. 저자가 어떤 종이를 태웠다고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튀어나오자 하비는 숨조차 멈추었다. 이젠 놀랄 힘도 없었다.

“……확실한가?”

“네. 믿을 만한 정보통에서 얻은 것이니까요.”

하비는 눈만 돌려 집사를 흘끗 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등을 세우고 정자세로 서 있었다. 하비의 시선을 느끼자 멀리서도 고개를 돌리고 지시할 것이 있는지 의향을 묻는 것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턱짓을 한 하비가 다시 젤가를 보았다. 젤가는 가까이했던 얼굴을 뒤로 물리며 안타까워했다. 이런 소식을 전하고 싶던 것이 아닌데 말이다.

하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늙은 회계사를 죽인 건 빅터지만, 그가 남긴 의지를 불태운 건 집사라. 둘 사이에 연결된 고리가 있는 것 같은데, 하비는 그게 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뭘 숨기려고?’

하비 스터스가 알아선 안 되는 것.

하비는 두 사람의 목적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둘 다 하비가 믿고, 그 믿음을 돌려주려는 사람들이란 것까지 생각이 미쳤다.

진실의 은폐.

아마도 하비를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것…….’

그게 뭘까.

늙은 회계사가 남긴 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집사가 태워 버린 그 종이.

하비는 회계사가 죽은 직후 장례식에 관해 논할 때 집사가 보인 반응을 기억했다.

‘주인님, 대체 저자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입니까? 전대에 수고를 한 사람은 맞지만 ‘그 일’에 일조한……!‘

‘그 일?’

늙은 회계사가 있던 장소의 서랍이 열려 있기도 했다. 거기서 꺼낸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겼던 하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것을 찾아 늙은 회계사가 죽었던 그 방에 다시 가볼 참이었다.

“좋은 정보 고맙다. 수고했어. 허기가 진다면 여기서 먹고 가도 좋고.”

“아뇨. 괜찮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경은 부디 건강을 잘 챙기세요.”

젤가가 부드럽게 거절하며 함께 일어났다. 뭔가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비도 그래 보였다.

“저…… 스터스 경.”

젤가는 어두운 눈으로 하비를 보았다. 그가 하비의 안색을 살피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베르텐 경을 너무 믿지 마세요.”

하비는 고개조차 끄덕일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것을 물을 뿐이었다.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지?”

이번에도 머뭇대던 젤가가 어렵사리 털어놓았다.

“반 로투스 경으로부터…… 였습니다.”

* * *

하비는 다음 날 아침, 외교부로 가기 전에 늙은 회계사를 묻은 곳에 먼저 들렀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하비의 손에 편지 한 장이 구겨진 채로 쥐어져 있었다.

오늘 아침에 하비에게 도착한 빅터의 편지였다. 하지만 도저히 지금 정신 상태로는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멀쩡할 수 있지.’

생각해 보면 빅터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여도 아무 감정도 없는, 잔인한 남자였다. 해적에 붙들리더니, 해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 거짓말을 어떻게…….’

하비가 편지를 꾸깃꾸깃 쥐었다. 그가 다정한 말들에 취해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동안, 빅터는 저택에 있던 회계사를 죽였다. 참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하비는 잠 한숨 이루지 못했다.

정보의 출처가 친우인 반 로투스 경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모르는 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하비는 심각한 얼굴로 걷다가 발길을 우뚝 멈췄다. 목적지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뭐야.”

있어야 할 장소에 팻말이 없었다. 가장 저렴한 지대에 묻어야 했기에 이름을 적은 작은 팻말이나마 꽂아뒀는데 그것조차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한 하비가 관리인을 불렀다. 꾀죄죄한 몰골의 수염 난 남자가 하품을 하며 불려왔다. 하비를 발견하곤 재빨리 품행을 단정히 하긴 했지만 술 냄새도 풀풀 풍겼다.

“여기 묻혀 있던 것은 이장했습니다.”

시체를 물건처럼 지칭하는 것에 불쾌해진 하비가 미간을 구겼다.

“어디로? 누가 한 거지?”

“시의원님이요. 저기로 옮겼을 겁니다.”

관리인이 손가락으로 가장 비싼 지대를 가리켰다.

본인이 죽여놓고, 그래도 일말의 죄책감은 들었나.

하비는 씁쓸하게 웃고는 이장했다는 장소로 걸어갔다. 꽤 걸어야 했다. 일반 시민 중에서는 부자들이나 묻히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비 온 뒤 쌀쌀한 날씨여서 사람은 적었다. 매일 관리하는 건지 비석 앞에는 물이 뿌려진 생생한 생화도 놓여 있었다. 작은 꽃잎으로 풍성한 노란 꽃이었다.

“여기 있었나. 모르는 사이 좋은 곳으로 옮겼어.”

하비는 그 앞에 앉아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 말을 건넸다. 비석도 질 좋은 암석이었다. 먼지 하나 없지만 괜히 손으로 쓸어보며 하비가 계속 말했다.

“용서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봐주지 않겠어?”

용서해 달라는 것이 자신을 지칭하는 건지, 빅터를 말하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여태 바쁘다는 핑계로 들여다보지 않다가 무덤이 옮겨진 것도 모르고, 이제 와서 살인자를 용서해 달라니. 가당치도 않다.

젖은 비석은 더없이 차가웠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비석을 더듬는 손길이 떨렸다.

하비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건 자기 위안이나 다름없었다.

살인자라도, 그래도, 같이 있고 싶은 것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비는 비석 앞에 조용히 앉았다. 지독한 갈등으로 속이 엉망이었다.

이미 정답을 안다. 빅터를 미워하고 싶어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차곡차곡 함께 쌓았던 시간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쳤다.

그동안 부대꼈던 단단한 살결만큼, 그에 대한 마음도 견고하게 쌓였다.

‘스터스 경. 나를 봐줘.’

‘이쪽이야, 하비.’

‘넌 인간이야. 빌어먹을 신이 아니라고. 그런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어. 더럽게도 살고, 때론 피도 묻히고 살아.’

‘고작 티끌 몇 개 때문에 무조건 끝내려고만 하지 마. 처음부터 완벽한 과정이란 없으니까.’

‘하비.’

정갈한 자세로 한참을 앉아 있던 하비가 빅터의 편지를 펼쳤다. 읽지도 않았던 편지가 지금 와서 조금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이름 모를 항구에서 보낸 편지였다.

[하비에게.

내가 편지를 쓰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옆에서 나스타가 비웃고 있지만 근신 2주 정도면 조용해질 테니 괜찮아. 레나 녀석과 또 떨어져야 한다고 입이 나와 있으니.

지금쯤 일을 하고 있겠지? 매입 관련 외교 법률이나 뭔가에 위배되는 게 없는지 샅샅이 살피고 있겠지만, 적당히 해. 요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니까.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가끔 기침하던 건 어때? 기침에는 배즙과 꿀물이 좋다더군. 준비시켜 놨으니까 곧 집무실로 갈 거야. 성실한 벤이 맡았으니 중간에 가로챌 일도 없을 테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벤에게 말해. 다 해결될 테니까. 너에 대한 일은 벤에게 모두 위임했어.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순조로워서 예상보다 빨리 끝날 것 같다. 그래야만 해. 꼭 그렇게 되도록 할 거야.

모든 게 끝나고 빨리 네 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벌써 보고 싶다.

건강히 잘 지내.

곧 보지.]

방금 전까지 화가 나 있었는데,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한때 스터스가에서 일했던 자를 죽인 남자다. 이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편지를 읽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왜 그랬어.’

편지에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하비가 그것을 도로 곱게 접어 가만히 이마에 대었다. 멀리서 빅터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날려오는 듯했다.

‘벌써 보고 싶다.’

열이 오르던 이마가 편지의 차가운 촉감에 시원해졌다. 그럴수록 하비는 메마른 눈가를 봉투에 비볐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뭔가를 내보내고 싶었다. 그의 속에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이 부유했다.

누군가에게 마음껏 마음을 내어 줄 수 있는 자유조차, 스터스가가 빼앗아 간 것 같았다. 하비의 눈가에 짙은 원망이 스몄다.

‘대체 왜.’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비는 익숙한 어지러움이 가실 때까지 비석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젤가가 떠날 때 마지막으로 던진 말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젤가는 정말로 하비를 걱정하고 있었다.

‘믿지 못할 자에게 경의 심장을 맡기지 마세요.’

젤가는 빅터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말로는 사적인 감정으로 그에 대해 파헤쳤다고는 하지만, 젤가가 감정적인 이유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님을 하비는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젤가도, 나에게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건가.’

집사도, 젤가도, 빅터도, 모두가 마지막까지 하비가 알지 않았으면 하는 것.

빅터가 떠나기 전에 의미심장하게 남긴 말이, 혹시 뭔가에 대한 전조는 아닐까.

‘나중에, 제대로 되돌려 줄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줘.’

제대로 돌려준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비는 허전한 주머니 속을 습관처럼 쥐면서 혼란에 빠졌다. 바로 반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망설임이 일었다.

젤가가 빅터와 관련한 정보를 얻은 출처가 반 로투스다. 어쩌면 반 로투스가 고의적으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젤가가 뛰어난 첩자라 해도, 로투스가의 정보가 그리 쉽게 나올 리 없으니까.

‘반……. 무슨 생각인 거야.’

예상 못 한 곳에서 튀어나온 반 로투스의 이름이 하비의 가슴을 불안하게 울렸다. 빅터의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그 이름이, 알 수 없는 연관성이 못내 찜찜했다.

언제 따로 자리를 만들어 단둘이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두려움이 앞섰다.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짐작이 되지 않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 *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벌써 5일이 지나 버렸다. 일에 치인 것도 컸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시간이 계속 흘러 외교부로 레나가 찾아왔다. 감색 모자를 쓰고 온 그는 모자를 벗고 하비에게 인사를 한 뒤 귀여운 얼굴을 드러냈다.

“스터스 경, 안녕하세요! 일은 다 끝나셨나요?”

언제 봐도 활기찬 사람이다. 다들 일에 치여서 칙칙했던 실내가 순간 밝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레나의 기운은 환했다.

남아서 잔업을 하고 있던 외교관들이 빙긋 웃었고, 하비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여긴 어쩐 일이지?”

헤헤거리며 웃던 레나가 곧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나스타가 없으니 심심해서……. 그 넓은 집에 나스타 없이 혼자 계속 있는 것도 할 짓이 못 되더라고요.”

빅터가 나스타를 장기 출장에 데려간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하비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이 가장 컸다. 어렴풋이 이유를 짐작하고 있던 하비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레나의 기분을 풀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곧 퇴근할 예정이었고, 아직 총괄 외교관이 복귀하지 않아 술자리도 없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함께 가지.”

“그래도 될까요? 그치만…… 바쁘실 텐데…….”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도 순수한 기쁨이 뽀얀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웃음 지은 하비는 레나를 데리고 근처에서 이름난 음식점에 갔다. 특이한 소스를 버무려서 숙성시킨 스테이크가 나오는 곳으로, 예약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물론 하비는 외교부 직원의 특권을 이용했지만. 그가 외교부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써보는 혜택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자 대번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하비가 앳되어 보이는 외모에 귀여운 인상을 한 오메가 남자와 함께 들어오자 온갖 상상을 하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이를 눈치챈 레나가 불만스럽게 볼을 퉁퉁 부풀렸다.

“참 나, 저는 의원님의 집사라고요. 베르텐가의 어엿한……!”

화를 내려던 레나는 괜찮다는 의미의 눈짓을 주는 하비 때문에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하비는 섣부른 대응은 더 큰 화를 부른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비의 만류에도 레나는 수군대는 사람들을 일일이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얼굴 기억해 뒀다가 다 이를 거야!’

툴툴대던 것도 잠시, 레나는 코스로 차려지는 음식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워했다. 레나는 식탁 위로 슬쩍 손을 올리다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는 하비를 보고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

“스터스 경은 안 드세요?”

“난 입맛이 없어서. 괜찮으니 먼저 들어.”

계속 눈치를 보던 레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테이크를 보며 침만 삼키다가 결국 먼저 손을 뻗었다. 한두 점씩 조금씩 떼어 먹던 레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제 몫의 스테이크를 금방 끝내 버렸다.

지켜보던 하비는 흐뭇한 얼굴로 자신의 몫까지 덜어주었다. 안 먹어도 배부른 게 이런 기분이구나 했다.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 레나와 지내는 것 같은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스터스가의 그 혹독한 교육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버렸지만.

금세 빵빵해진 배를 두들기며 식사를 마친 레나가 냉수를 입에 머금었다. 그는 이내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비가 많이 편해져서인 것도 있고, 요즘 스트레스가 극한에 다다른 탓도 있었다.

“하아……. 이렇게 멀리 떨어진 적은 없었는데, 너무 힘들어요. 벤도 요새 뭐 하는지 계속 바쁘고, 진은 다른 일로 멀리 갔고. 다른 사람들도 요새 다들 바빠서 대화할 짬도 없다니까요? 물론 저도 많이 바쁘지만…….”

하비는 짝과 떨어진 오메가가 이런 것인가 잠시 생각했다.

‘알파인 나스타와 각인 상대라고 했던가.’

힘들 만도 했다. 빅터가 돌아오면 앞으론 괜찮으니 레나에게 나스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주라고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도주가 들어가기 시작하자 레나는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술에 약한 듯하여 자제시켰지만 그사이 벌써 취해 버렸는지 레나가 딸꾹질을 했다.

“우리 주인님은 바보예요. 스터스 경이 안타까워요.”

주정 아닌 주정을 귀여운 듯 보던 하비가 가볍게 웃었다.

“어째서?”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주변 사람은 다 아는데!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들어먹지도 않고, 진짜 바보예요. 제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빅터에 대한 답답함을 성토하던 레나가 멈칫했다. 물끄러미 보는 하비의 시선에 조금 정신을 차린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물론 우리 주인님도 살기 위해서 그랬겠지만…….”

하비가 빅터를 미워하는 것도, 레나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빅터를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남은 소스까지 삭삭 긁어 먹은 레나가 어렵게 포크를 내려놓은 뒤 말했다.

“그런 거 있잖아요. 가장 큰 힘은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에서 나온다고요.”

서두가 긴 것은 어려운 것을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비는 묵묵히 레나를 기다려 주었고, 이에 용기를 얻은 그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스터스 경을 미워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야 힘든 현실을 버티기 더 좋을 테니까.”

듣고 있던 하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빅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애정을 증오로 착각했다고.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생각하다 보면 이 감정이 뭐가 뭔지도 헷갈리거든. 증오인지, 사랑인지.’

‘아마 그동안은 내가 착각했나 보지.’

사실 일찍이 레나가 하비를 괴롭히던 빅터를 설득하기 위해 해준 말이었지만, 이후 빅터는 오히려 그걸 역이용했다. 하비의 마음을 얻은 뒤 절망으로 밀어버리기 위해 레나의 말을 써먹은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하비는 레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빅터를 이해하려 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하비는 레나를 새삼스럽게 보며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 레나는 심리 공부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베르텐 경에게 아카데미 후원을 받고 있다고 했나?”

시간이 없어서 야간 수업만 잠깐 듣고 오는 것이 다지만, 그래도 레나한테는 큰 힘이 되었다. 아까까지 욕하던 것도 잊고, 레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빅터를 옹호했다.

“네. 주인님이 돈을 다 대주세요. 저는 열심히 집안일 하고, 공부만 하라고 하셨어요. 좋은 분이세요.”

부리는 아랫사람에게 이토록 신뢰를 받고 있는 자라면,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본인이 아끼는 자에 한해서지만.’

그가 죽였던 자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시 복잡해지는 하비의 심경을 모른 채 레나는 한동안 빅터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하비의 심각해진 표정을 보고 다시 슬슬 눈치를 보았다.

“스터스 경은 안 힘드세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하비가 흠칫거렸다.

“음? 뭐가.”

“그게, 저……. 주인님과 떨어져 있는 게 안 힘드시냐고요. 저는 나스타와 하루만 떨어져도 정말, 많이, 무지하게 힘들거든요.”

힐끗 하비의 눈을 본 레나가 양손을 내저었다.

“물론 두 분은 알파끼리시니 그런 본능적인 힘듦은 없겠지만요! 마음은 그러시지 않을까, 제 맘대로 억측을 해봤어요.”

레나가 주절주절 말을 뱉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정신없이 바쁜 하비를 보니 그런 말도 사치인 듯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하비의 입에서 떨어졌다.

“힘들어.”

“역시…… 어어? 네?”

한숨을 폭 내쉬던 레나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복기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비는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속에 쓸쓸함도, 분명 엿보였다.

하비가 스테이크와 함께 나왔던 포도주로 마른 목을 축였다. 그리고 레나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듯 다시 말했다.

“나도, 힘들어.”

그런 사람 심란하게 하는 편지나 보내고, 빨리 오겠다는 말을 전한 것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니까.

일로 온 정신을 다 옮김으로써 간신히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시시때때로 브로치가 있었던 허전한 주머니를 확인하고, 그것이 빅터에게 갔다는 것을 상기했다. 물건이 제 주인을 찾아간 것에 안도하면서도, 그가 저지른 악행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런데도 보고 싶다니.’

하비의 마음은 솔직하게 빅터를 지목하고 있었다. 네가 가야 할 곳은 저기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곳만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으니 초조하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 하비의 얼굴을 레나가 안쓰러운 듯 보았다. 묘한 동질감에 젖어 두 사람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나가 입술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냈다. 술기운이 조금 가신 얼굴이었다. 그가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공부를 시작한 건 저 스스로와 나스타를 치유하기 위함이 제일 컸지만요. 언젠가부턴 주인님도 낫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베르텐 경을……? 어디가 안 좋은 건가?”

하비가 놀라 묻자 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괜찮으세요. 주인님은 스터스 경을 만나고 나서부터 많이 좋아지셨어요. 원랜 불안정한 분이었거든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어요.”

언젠가 빅터의 사용인에게 지나가듯 잠깐 듣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하비는 숨을 죽이고 레나의 뒷말을 들었다.

“한창 심할 땐 환각도 보고, 환청도 듣고……. 불면증은 항상 있었고요. 물론 지금은 그런 증상도 말끔히 사라졌어요.”

걱정스럽게 찌푸려졌던 하비의 미간이 천천히 펴졌다.

“……다행이군.”

악몽을 자주 꾸는 것 같기는 했다. 짧은 휴가를 떠날 때도 마차 안에서 끙끙대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하비는 작게 한숨지었다. 하긴, 빅터가 겪은 것들은 조금 알았을 뿐인데도 어떻게 버텼는지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하비가 심란해하는 동안 마지막 코스 요리가 나왔다. 입가심을 할 수 있는 산뜻한 과일 샤베트와 달콤한 푸딩이었다.

하비는 제 몫을 레나에게 천천히 밀었다. 어차피 먹지 않는 것들이었다.

“감사합니다!”

한껏 좋아하던 레나가 하비를 눈짓하면서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경을 힘들게 한 걸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현재의 주인님을 봐주세요.”

주인님은 어쩔 수 없는 바보니까요. 그리 덧붙인 레나가 씨익 웃었다.

하비도 아까보다는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레나의 밝음이 옮겨 온 것인지, 마음속에서 불편하게 응어리졌던 것들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하던 것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하비는 확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 노력해 보지.”

하지만 하비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가 ‘노력해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한가득 물면서 레나가 행복하게 웃었다.

“저는 스터스 경이 정말로 좋아요!”

하비도 마주 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빅터가 돌아오면 물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괜찮을 것 같았다.

* * *

평화로운 항구였다. 줄이 얼기설기 매인 배들이 잔잔한 파돗결에 출렁이고, 상선들이 범선과 섞여 있었다.

배에서 물건을 내리지 않고 배 위에서 물품을 파는 상인도 많았는데, 빅터는 그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빅터의 금발이 빛을 받아 연신 반짝였다. 편한 상의에 단추 대신 녹색 보석이 크게 달린 황금빛 브로치가 인상적이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며 지치지도 않고 배 사이를 잘도 돌아다니는 빅터를 나스타가 열심히 뒤쫓았다.

“호오. 다음 투자는 제약 상회 쪽인 건가요, 주인님?”

빅터는 잔뜩 집중한 얼굴로 매대에 늘어져 있는 이름 모를 것들을 보고 있었다. 동양에서 건너온 것이라 하는데, 흙이 아직도 뿌리 끝에 붙어 있었다. ‘삼’이라는 것이라 들었다.

“무슨 말이야?”

“여기 올 때부터 계속 약재만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동양 쪽에서 건너온 약재들이 효능이 좋대서. 그 이상한 명의도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의술을 배웠다고 했고.”

알 수 없는 소릴 중얼거린 빅터가 좋은 생각이라며 나스타를 휙 돌아보았다.

“네 말대로 제약 상회도 나쁘지 않겠어. 아예 해상로를 뚫어놨으니 보급도 쉬울 테고. 아, 동인도 회사인지 뭔지를 만든다고 끼라고 하던데 지금이라도 이야길 해야 하나.”

안 그래도 운영하는 것이 많아 귀찮아서 거절했는데, 동양국과 직통 라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면 좋은 제안이다.

‘문제는 비율인데.’

빅터가 머릿속으로 돈을 굴리고 있는 사이 나스타가 출렁대는 갑판 위로 털썩 걸터앉았다.

“아오, 정말!”

나스타는 괴로워하며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찰랑대던 검은 머리는 금방 산발이 되었다. 벌게진 눈으로 그녀가 항의했다.

“그나저나 우리 언제 집으로 돌아가요! 미치겠네!”

레나를 보고 싶어서 저러는 것을 다 알기에 빅터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빅터가 대꾸도 않자 나스타는 음산하게 계속 중얼거렸다.

“이제 해산물이라면 도로 바다로 던져 버리고 싶다니까요. 흑흑, 레나가 해주는 산양 고기가 먹고 싶어…….”

나스타의 투덜거림을 자동으로 거르고 있던 빅터는 단어 하나에 꽂혀 멈칫했다.

짧은 휴가를 하루 다녀왔을 때 하비가 해산물을 못 먹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하비가 뒤적거리기만 하다 식사를 끝냈을 때, 빅터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제대로 못 먹는 것이 그토록 가슴 시린 일인지 그때야 알았다.

‘해산물이 역시 별로였나.’

끊임없이 약이 될 만한 걸 찾는 것도 스터스가의 짧은 수명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다.

본능에 가깝게 약재를 뒤지던 빅터는 순간 한숨을 크게 터뜨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서였다.

“하아…….”

맞은편에 있던 상인은 자신이 뭔가 실수한 줄 알고 움찔거렸지만 빅터는 아예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았다.

이쯤 되니 빅터는 정말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하비 스터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것일까.

아주 간단한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하비를 굴복시키려고 애쓰던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그가 정말로 사라졌을 때를 생각해 보았을 뿐이었다.

눈앞에서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언제나 진심만을 돌려주려 하는 남자가 다신 벗어나지 못할 절망에 빠져 자신을 증오한다면.

그러다가 상심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그건 빅터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이 진중해졌다.

‘내가 바라는 건…….’

그때였다. 바다의 갈매기가 날아와 빅터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날의 물새 같았다. 하비와 배 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느꼈던 뭉근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해적에게 떠밀려 상어한테 죽을 뻔한 것을 말하자 놀라면서도 미안해하는 얼굴, 씁쓸한 표정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또렷하게 보였다.

하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더 이상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앞장서서 하비를 짓밟았지만, 이제는 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가슴에 매달린 브로치가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요동치는 마음을, 믿어도 되는 건가.’

단순한 변덕은 아닐까. 변한 것을 믿어도 되나. 빅터가 고민하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빅터는 입을 열어 지시했다.

“여기 있는 약재들, 전부 사겠어.”

“예?! 엄청 비싼 건데요. 이걸 전부?”

빅터는 두 번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주저앉아 있던 나스타가 벌떡 일어나더니 크고 묵직한 주머니를 상인에게 던졌다.

“자, 여기.”

허겁지겁 주머니를 열어 확인해 본 상인이 깜짝 놀라 나스타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았다.

“헉! 이, 이게 다 금입니까?”

어쩐지 어젯밤 꿈에 비늘이 노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 했다. 나스타가 한쪽 눈을 찡긋하고 떠났다.

“응. 깨물어봐, 진짜야.”

사파이어 같은 보석도 섞여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하던 상인은 횡재했다며 금을 세게 깨물어보았다.

“악!”

진짜였다.

그런 식으로 근방의 약재를 쓸고 다니던 빅터는 부둣가에 있는 작고 초라한 집시의 점집을 보았다. 해적들이 워낙 이런 미신에 매달리다 보니 빅터도 그들에게 끌려가 강제로 본 적 있었다. 하지만 딱히 믿은 적은 없었다. 늘 심드렁하기만 했다.

빅터는 늘 자신을 믿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 신뢰하는 건 ‘돈의 힘’이 유일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알 수 없는 인력에 끌리듯, 빅터는 스스럼없이 낡은 점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스타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대기했다.

바닥까지 끌리는 가닥가닥 잘린 천을 들고 들어가니 낡은 외곽만큼 늙은 집시 하나가 앉아 있었다.

달랑 테이블 하나와 의자, 은은하게 밝히는 등불이 전부인 곳이었다. 바닥도 깨끗하지 못했지만, 빅터는 개의치 않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무엇 때문에 오신 건지요, 잘생긴 손님?”

말없이 빅터가 허리에 찬 작은 주머니 하나를 테이블로 던졌다. 꽤 묵직한 것을 확인한 늙은 집시는 클클 웃으며 멋대로 카드를 꺼냈다. 때 묻은 카드를 휙휙 섞어 펼치더니 늙은 집시가 알아서 해석했다.

“마음이 혼탁하시군요. 금전운을 물어보실 분은 아닌 것 같고…… 연애운은…… 이런. 최악이군요. 유감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점괘마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빅터가 골치 아픈 듯 미간을 구겼다. 그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물었다.

“……전혀 가망이 없나?”

“가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 선생님 하시기 나름입니다.”

돈을 던져주기 전보다 호칭이 훨씬 격상했다. 하지만 빅터는 불만이었다. 이래서 점 보러 오지 않는 거다. 누가 해도 다 할 수 있는 말만 늘어놓고 있으니까.

뭔가에 잠시 홀린 게 분명했다. 주절주절 그 뒤로 빅터의 개인 신상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다 추상적인 것들이고 유추할 수 있는 내용뿐이었다.

빅터는 찜찜한 마음을 안고 일어났다. 그런데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늙은 집시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살아 있는 건 변하는 거지요. 진실한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이미 죽은 게 변할 리 있겠습니까?”

뒤돌아선 빅터가 벼락 맞은 듯 흠칫 멈춰 섰다.

“선생님의 마음도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어서 변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마음이 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겁니다. 너무 혼란스러워할 것 없다, 이 말입니다.”

“뭐?”

놀란 빅터가 휙 돌아보자 늙은 집시는 이미 빅터는 안중에도 없고 받은 돈주머니만 희희낙락 살피고 있었다.

‘살아 있는 마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빅터는 집시의 말을 곱씹으며 낡은 천막을 걸어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스타가 졸졸 따라가며 빅터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폈다.

“주인님, 좋은 말 들었나 봐. 나도 저기 가봐도 돼요? 잘 보나?”

빅터는 피식대며 웃고 있었다. 뭔가를 내려놓은 듯, 몹시 홀가분해 보였다.

* * *

반은 초조하게 벽에 걸린 시계만 보았다. 병자의 기운이 가득한 방에서, 그의 아버지는 지금도 서서히 죽음의 늪에 발을 딛고 있었다.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하비를 떠올리며 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스터스가가 도시의 방패이자 기사의 현신 같은 존재라면, 로투스가는 기사의 두뇌와 갑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로투스가 사람들은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로 만족하지 못했다. 언제나 스터스가를 앞서길 바랐다.

‘그런데도 우린 한 번을 이길 수가 없었지.’

워낙 철저히 숨겨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스터스가에서는 하나같이 탈인간 범주의 뛰어난 자들만 배출되었으니까. 거기다가 도덕적인 흠 하나 보이지 않는 철두철미함도 겸비했다.

이 기이한 가문에 대해 반이 아는 건, 스터스가의 아이들이 어릴 때 원인 모르게 죽어나간다는 것이었다.

‘정말 악마와 계약이라도 한 거 아냐?’

수재 하나를 얻는 대가로 평범한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짓. 그 꺾일 줄 모르는 고개를 가진 스터스가 사람들이라면 완벽함을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쿨럭! 쿨럭! 켁!”

다 죽어가는 늙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반은 그제야 허리를 곧게 펴고 아버지를 살폈다. 하비 생각을 하느라 아버지의 침상 앞인 것을 잠시 잊었다.

곁에 있던 주치의가 서둘러 조치를 하고, 그의 병든 아버지는 힘겹게 허리를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는 것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발의 노인이 장성한 아들인 반을 보며 재촉하듯 물었다.

“아직 멀었느냐?”

반은 속으로 한숨 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아직 하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반은 하비의 연락을 신호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비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데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일말의 미안함은 남아 있기에 되도록 ‘그 시간’을 미루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반을 호되게 질책하며 나무랄 뿐이었다.

“시간이 없어! 내가 언제 갈지 모르는데, 그 전에 선수를 쳐야지. 아비의 숙원도 이루어주지 않을 셈이냐.”

“곧입니다. 준비는 다 해놨고, 혹시 모를 변수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빅터 베르텐 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알아본 바로는 일주일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노인은 다행이라는 듯 마른기침을 뱉었다.

“그래. 쓸데없이 훼방을 놓으면 안 되니까. 베르텐 경은 그 역겨운 관계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 설마, 스터스가의 그 애송이도?”

반은 빅터 이야기를 할 때 은은하게 달아오르던 하비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비는 진심인 것 같지만, 베르텐 경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거짓으로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반은 뒷말을 흐렸다. 하비를 보는 시선이 정말 연인을 보는 듯해서 반은 헷갈렸다. 빅터의 진정한 마음이 어디쯤 있는 건지, 단순히 하비를 쥐고 흔들기 위해 ‘척’을 하는 건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처음 빅터가 한 말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로투스 경도 원하는 바였지? 그 고고한 스터스가의 핏줄을 무릎 꿇리는 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거 말이야. 내가 도와주지.’

그런 의미에서 의기투합한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빅터의 수족이 되어 하비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것이었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빅터는 이상해졌고, 아예 로투스가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도 그만두었다. 발길을 뚝 끊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하비에 대해서 그만 캐내라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은 언제나 냉담한 빅터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역할극에 빠져 버린 건가. 멍청한 놈.’

그런 주제에 자신을, 로투스가를 지속적으로 모욕했다. 빅터는 로투스가를 완전히 장악하고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두진 않을 거야.’

우선 하비부터 꺾은 뒤, 그 잘난 척하는 남자까지 차례로 부술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준비를 차곡차곡 해왔다. 로투스가의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말이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집사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손에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저…….”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했다.

“스터스 경으로부터의 서신입니다.”

고민이 길었는지 예상보다 하비의 반응이 늦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그의 아버지도 반색했다. 반이 스터스가의 인장이 박힌 편지 봉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드디어 왔나.”

이제 시작이다. 신호탄은 쏘아졌다.

* * *

반에게 결국 연락을 취한 하비는 자리를 정리했다. 오늘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책상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하비가 샘을 돌아보며 물었다.

“참, 사전 조사 인원은 꾸렸나?”

이로비나 섬에 보낼 외교관 인력을 지칭했다. 섬에 대한 조사를 면밀히 하고, 매입 직전의 단계를 완수할 예정이었다. 슬루인 제국이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샘은 고개를 끄덕이며 완벽한 일정이 되었음을 알렸다.

“예. 해적이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바로 보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용병도 붙였습니다.”

“잘했군.”

“아, 술자리는 시간이 되십니까?”

총괄 외교관이 출장에서 돌아와 주관하는 술자리였다. 다른 외교관들은 하비가 참석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는 눈빛을 여기저기서 쏘아 보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비는 미안한 얼굴로 거절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 선약 상대가 바로 이자였다.

하비는 눈앞에서 술만 홀짝대는 오랜 친구를 물끄러미 보았다.

반 로투스 경.

그는 젤가에게 빅터에 관한 정보를 넘긴 사람이자, 귀족들의 정보 중심에 선 자이기도 했다. 반이 담배를 물다 말고 하비를 흘끗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하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앞자리에 놓인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묘한 맛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전 반이 이번에 새로 깐 외국의 질 좋은 포도주라고 설명했던 것을 기억하고 납득했다. 타국의 포도주는 가끔 그의 입맛에 맞지 않았으니까.

하비가 의아해하는 반을 보며 얼른 대답했다.

“아니. 단둘이서 마시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장소는 반 로투스 경의 저택이었다. 하비가 먼저 연락을 취하자 반은 기다렸다는 듯 로투스가의 저택으로 하비를 초대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하비는 섣불리 말이 나가질 않았다. 바싹 타는 목을 포도주로 축일 뿐, 생각조차 정리되지 않았다.

‘정말 반이 젤가에게 정보를 흘린 건가? 왜?’

오로지 그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데 비릿하게 웃던 반이 하비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선수를 쳤다.

“언제 연락하나 했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베르텐 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거겠지?”

깜짝 놀란 하비가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천천히 포도주가 찰랑대는 유리잔을 내려놓는 하비를 보며 반이 또 입을 열었다.

“젤가라는 놈이 저택으로 찾아갔을 테니까. 분명 베르텐 경에 대한 이야기도 했을 테고.”

반은 말없이 빤히 마주 보는 하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반의 얼굴엔 더 이상 자조적인 웃음도, 씁쓸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묘한 승리감만 가득할 뿐이었다.

“이유를 알고 싶어? 내가 왜 그랬는지.”

젤가를 홀리는 건 쉬웠다. 빅터에 대한 악감정으로 그를 파헤치는 과정에 미끼를 던져두면 알아서 물게 되어 있었다.

빅터에 대해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비에게 달려갈 것이라 생각했다. 반은 이미 젤가에 대한 것도 모든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처음에는 반은 빅터의 강압으로 하비의 뒤를 쫓으며 정보를 캤었다. 하지만 갈수록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집요하게 하비를 쫓았다.

언제부턴가 반은 진심으로 즐겼다. 하비가 무너질 만한 증거를 찾는 것이, 그 발판을 부술 것들이 찾을수록 나타나는 것이, 못내 즐거웠다.

그게 어린 날부터 지속되어 온 ‘열등감’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빅터의 비아냥이 아니라도, 이미…….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반은 마음속의 양심을 몰아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약속을 하나 받아냈다. 병중에 있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스터스가가 무너지는 꼴을 보여 드리면, 아들로 제대로 인정하겠다는 약조를 했다.

‘이번엔 반드시 그 고개만 뻣뻣한 놈들이 꺾이는 꼴을 봐야겠다. 할 수 있겠지?’

‘예, 아버지.’

반의 아버지도 라힌 스터스에게 짓눌린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대대로 라이벌 관계였지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지금의 하비와 그의 관계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하비의 얼굴을 보며 반은 통쾌함을 느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죄책감마저 증발하고, 하비에 대한 순수한 증오만 남았다.

‘너만 없었다면, 너만 사라지면, 나는 나로 남을 수 있다. 인정을 받을 수 있어.’

젤가와 하비의 관계는 입 무거운 악사들에게서 간신히 얻어냈다. 당시 가면 투자회에서 그들이 벌인 행각을 낱낱이 알고 기가 막혔다.

하비가 그런 짓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라니. 빅터가 쥔 협박의 증거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리하여 알아낸 사실은 아주 놀라웠다. 반 로투스를 희열에 차오르게 할, 엄청난 증거를 빅터가 쥐고 있었다. 그걸 진작 알지 못한 것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반은 혼란스러워하는 하비를 어두운 눈으로 가만히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비는 반의 배신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불안감에 흔들리는 눈빛을 보낼 뿐, 아직도 신뢰가 남아 있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미련한 남자다.

그런 친구에 대한 예의로서, 반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난 네 오랜 친구야. 널 배신하지 않아.”

하비의 눈이 매달리듯 그가 반에게 선물했던 황금 거북이를 보고 있었다. 반이 일부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 둔 것이다. 하비는 그것을 보고 조금 안심하는 듯했다.

그러나 반은 그런 하비를 그냥 두지 않았다. 드디어 적절한 순간이 왔다. 관계를 잘라내는 선고를 할 때였다. 반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목숨 귀한 줄은 알지.”

하비의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그는 핏기가 모조리 사라져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한 채 반문했다.

“그게 무슨……말이야.”

숨이 막혀서 말을 뱉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반은 고개를 내저으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무슨 말이긴. 베르텐 경이 이제 연극은 끝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말이지.”

하비는 그제야 로투스가가 귀족 정보의 결집소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빅터가 그런 곳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다는 것도.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네 아버지에 대한 일도, 이제 더 이상 묻어둘 수 없어. 미안하다.”

하비는 아까 전부터 몸이 뜨겁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는 설상가상 배 안쪽도 어딘가가 달아오르는 것처럼 쓰라렸다. 뭔가 이상했다.

하비가 의자 손잡이를 의지하듯 꽉 움켜쥐며 힘겹게 물었다.

“설마, 베르텐 경이 널 협박했다는…… 그런 말인가? 내 뒤를 캐라고?”

반은 안타깝고 미안한 얼굴을 지어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베르텐 경이 얼마나 협박에 능한지. 까딱하면 내 명줄이 날아갈 위기였다고. 널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지.”

하비는 벌떡 일어났다. 반동에 그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산산조각 난 유리가 도처에 널렸지만 하비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비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잘못 알고 있다기엔 이런 지시까지 받았는걸.”

반은 준비된 물건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종이에 곱게 싸인 것이었는데, 펼치니 그 안에서 익숙한 약이 튀어나왔다. 형질을 강제로 변화시키는 호르몬 교란제였다.

드디어 하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럴 리 없다. 절대로, 빅터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마음은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 있었지만, 냉철한 이성은 한 가지만을 지목하고 있었다.

빅터는 여태까지 널 속였어. 넌 속은 거야.

반은 하비의 불안에 쐐기를 박듯 선고했다.

“그럼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겠어?”

절망에 빠진 밤색 눈에 남아 있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반은 하비의 반응을 확인하며 지금쯤 어딘가 시궁창에서 얼굴을 박고 다 죽어갈 한 의사를 떠올렸다. 빅터의 의뢰로 신약을 제조한 의사였다.

빅터나 하비는 그가 휴가를 간 줄 알았지만, 사실 반에게 붙들려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을 때까지, 의사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반은 슬픈 눈빛으로 위장하며 하비에게 지어낸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전했다.

“멀리 출장을 떠나면 너에게 이걸 먹여서 효능을 확인해 보라고 했다고.”

하비는 떨어진 포도주를 황급히 살폈다. 어쩐지 익숙한 맛이 난다 했다. 빅터가 예전에 자주 먹였던 그 ‘신약’이었다.

하비가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지금 그걸…… 내 잔에 넣은 건가?”

반이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잠깐 흐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곧 걱정스러움으로 표정을 가리고 물었다.

“그래. 아무렇지 않나? 괜찮아?”

평소 같았다면 반의 수상함을 빨리 눈치챘을 것이다. 연이은 충격이 하비의 이성을 자꾸만 흐렸다.

‘그럴 리 없어…….’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미 그자는 이곳에 없는데.

하비는 비틀대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반의 집사에게 맡겼던 겉옷은 포기했다. 이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헉…… 헉…….”

벌써 아랫배에 이상한 신호가 꼬였다. 미칠 듯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배 속의 장기 어딘가가 타는 것처럼 아팠다. 몸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비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뜨거운 숨이 나오고, 반사적으로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너무 아파서 기절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이성을 차렸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그런데 몸은 이미 앞으로 기울어 바닥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퍽!

완전히 앞으로 쓰러진 하비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반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반은 망에 걸린 고기를 잡으러 가듯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곤 쓰러진 하비에게 고개를 숙이고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 아직 내 말 다 안 끝났는데.”

반은 순간 크게 휘청거렸다. 하비에게서 폭발적으로 나오는 페로몬 때문이었다. 숨을 못 쉴 만큼 강렬한 오메가 페로몬이었다. 알파를 미치게 하는, 자극적인 페로몬.

“이건…… 분명 기억에 있는…….”

반은 정신 없는 와중에도 어디서 이 페로몬을 맡았는지 기억했다. 하비가 몸이 안 좋았던 날, 그날따라 몹시 이상했던 하비를 간신히 이겼던 그날, 소드 클럽에서.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 반은 황당한 듯 웃었다.

“그때부터 이미 이 약을 쓰고 있었나. 하하! 대단해. 역시 베르텐 경이야.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하비가 쓰러지면서 열린 하얀 튜닉 안으로 맨살이 비쳐 보였다. 반은 이성을 잃은 눈으로 하비를 잡아 뒤집었다.

그러면서 목 주변을 장식한 섬세한 장신구가 후드득 떨어져 나가고, 하비의 탄탄한 상체가 훤하게 드러났다. 몸이 변하는 과정에서 예민해진 터라 판판한 근육이 잡힌 가슴 위로 유두가 서 있는 것도 보였다.

반은 헛숨을 삼켰다. 당장에라도 박고 싶은 매혹적인 페로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더 큰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게 안 설 줄 알았는데.’

반은 흘끗 아래를 보았다. 벌써 끝까지 발기해 팽팽해진 것이 보였다.

하비도 그의 눈길을 눈치챘다.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믿기지 않지만, 지금 오랜 친우는 자신을 강간할 생각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신물이 올라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하비는 몸이 변하는 과정에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배가 너무 아팠다.

하비는 결국 한 손으로 배를 감싸 안은 채 맥없이 반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딸려갔다.

“오늘 밤엔 더 큰 이벤트가 있어. 네 아버지, 라힌 스터스 전 의원이 저질렀던 그 비밀들이 석간신문에 모두 유포됐거든. 지금쯤 커피하우스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을걸?”

머리카락이 쥐어 잡혀 고개만 들린 하비에게 반이 허리를 굽혔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알아? 라힌 스터스한테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는 거.”

하비의 이마와 뺨에서 식은땀이 계속 흘러내렸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비는 직감했다. 지금 반이 말하고 있는 것이, 집사와 빅터, 젤가 등이 자신에게 끝까지 숨기려 했던 사실임을.

“임페르 해적이 인질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기 전날 새벽, 그놈들은 따로 네 아버지에게 접촉했어. 시 운영비에서 일정 돈만 떼어 주면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말이야.”

반이 즐거운 얼굴로 이어 말했다. 부들거리는 하비의 반응이 못내 짜릿했다.

“그런데 네 겁쟁이 아버지는 시 재정을 빼돌린 걸 들킬까 봐 마지막까지 협상을 거부했지. 그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아, 지금쯤 다 알고 있겠지만.”

언제나 도덕적이고 모두의 정의를 짊어진 것처럼 굴던 라힌 스터스가, 사실은 이러했다. 반은 목청 높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하비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사실 스터스가는 별것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하비는 늙은 회계사가 허튼소리를 못 하도록 죽이고, 편지를 태운 마음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서 어떻게든 뼈아픈 진실을 숨기려고 했던 자들의 마음을.

그들은 잘못되지 않았다. 잘못된 건, 스터스가의 망령이다. 그리고 그 피를 이어받은 주제에, 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자신이다.

하비는 눈만 겨우 들어 올려 파리해진 입술을 열었다.

“그것도…… 베르텐 경이 시킨 일인가?”

하비는 그제야 본인의 생일 파티에서 분노하던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빅터와 대화 후 이상할 정도로 화를 내던 반은 하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베르텐 경에게 협박당하거나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반 역시, 빅터에게 협박당하고 있었다. 하비의 눈에 깊은 절망이 깃들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명확한 정황이었다.

반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타까운 듯 목소리를 꾸며냈다.

“맞아. 나도 너 못지않게 꼼짝 못 할 뭔가를 베르텐 경에게 빚졌거든.”

말이 없는 하비를 보며 반은 신나게 떠들었다.

“요즘 너와 몸정이 들었는지 그것까진 차마 못 지켜보겠다고 하더라고. 멀리 나가 있는 사이 터뜨리라고 특별히 지시하더군.”

하비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카펫을 적셨다. 심장이 괴로움에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반은 고개를 내저으며 움켜쥔 하비의 머리칼을 더욱 잡아당겼다. 한쪽 무릎을 꿇은 반이 강제로 상체가 반쯤 일으켜진 하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아.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다 살기 위한 거야.”

“베르텐 경이…… 너한텐 어떤 협박을…… 했지?”

띄엄띄엄 하비의 말이 멀어졌다. 말을 하는 것조차 벅차 보였다. 귀찮았지만 반은 아무런 핑계나 갖다 붙였다.

“병중에 있는 우리 아버지.”

“죽이겠다고…… 했나?”

“그래. 그러니 너무 원망 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반은 한 손으로 하비를 누르고는 반쯤 너덜거리는 튜닉을 찢어버렸다. 그의 눈이 욕망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찌익-!

금사 자수가 놓인 정갈한 튜닉이 갈가리 찢기고, 드디어 하비의 어깨와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비가 여전히 한 손으로는 배를 누른 채 절박한 얼굴로 반의 팔을 잡았다.

“그만둬.”

하비의 뜨거운 숨소리가 더 자극적이었다. 반은 힘이 없는 하비의 팔을 가볍게 뿌리치고 튜닉을 더 열어젖혔다.

오랜 검 수련으로 꽉 짜인 단단한 근육이 나타나자 반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미 반쯤 이성이 나간 상태라 마지막 기회라는 하비의 말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눈길을 아래로 두자 애액으로 젖어가는 하의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반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잔뜩 나오니까 풀어줄 필요는 없겠지?”

반이 하비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에서 짓누른 채 손을 아래로 뻗었다.

하비는 이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한때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자가 뻗는 배신의 손길도, 깨진 유리잔에서 핏빛 포도주가 흘러내려 카펫을 붉게 적시는 것도.

그때 빅터의 목소리가 멀리서 날아와 하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비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만해.

‘라힌 스터스의 잘못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지. 경에게 묻지 말았어야 할 것까지 묻고 말았어. 진심으로 사과하지.’

똑바로 마주해 오던 그 아름다운 녹색 눈도.

‘무지했던 나를 용서해 주겠나?’

손가락에 키스하며 내려다보던 그 따뜻한 눈빛도.

모두 거짓이었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잿더미처럼 길게 휘날려 갔다.

하비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손을 뻗었다. 반짝이는 뭔가를 손에 쥐기 위해서.

막 반의 손이 하비의 가슴에 닿으려 할 때였다.

“크윽!”

하비의 한 손이 빠르게 반의 목을 짓눌렀다. 그의 손에 어느새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들려 있었다. 계속 말을 걸면서 시간을 번 것이다.

반이 놀라서 더듬댔다.

“어, 언제?”

유리 조각을 쥔 하비의 손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하비는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목표인 반의 목젖을 찌르면서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 로투스 경.”

반은 천둥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차갑게 분노하는 하비는 처음 봤다.

“경은 마지막 선을 넘었어.”

하비는 더 이상 친근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헐떡이는 건 여전했지만,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였다. 남은 집중력을 모조리 짜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협박으로 이 짓을 하고 있든 아니든, 하비는 반의 눈에서 다른 것을 읽었다. 순수한 기쁨이었다. 그건 남의 손으로 강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 로투스는 하비 스터스를 짓밟는 걸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넌 1등, 난 2등. 하하!’

‘됐어, 됐어. 어차피 내일이 되면 다~ 잊고, 하비 스터스 경의 좋은 친구로 돌아갈 텐데.’

친구가 배신하려던 것을, 이제야 알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증오하고 있었다는 것도.

반이 열등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것도 확실히 안 건 최근이지만, 사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믿었다. 친구니까. 반 로투스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감정으로 그 관계를 끊을 만큼 독한 자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반 로투스도, 빅터 베르텐까지 전부.

하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끔찍한 고통이 배 속을 휘저었지만 겨우 참았다.

하비가 이를 갈면서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경의 더러운 욕구를, 남 탓으로 정당화하지 마.”

기어이 반의 두꺼운 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가 움찔대며 하비의 하의로 가져가던 손을 순순히 올렸다. 파랗게 질려서 양손을 위로 올리고 굴욕적으로 말했다.

“내 뜻이 아니라고 했잖아. 미안해. 저 약 때문에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봐.”

하비는 대답하지 않고 간신히 일어나 반의 의자 뒤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던 녹빛 더블릿을 쥐었다. 찢겨 나간 튜닉 위로 더블릿을 걸치고는 문밖을 쳐다봤다.

‘저기까지 걸을 수 있을까.’

손이 덜덜 떨리고 자꾸만 허리가 꺾였지만 하비는 천천히, 가까스로 문 앞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다리 사이로 물밀 듯이 터져 나오는 애액 때문에 더 힘들었다. 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그제야 정신 차린 반이 허우적대며 하비를 쫓으려 했다.

“하비, 잠깐만……!”

하비가 힘겹게 뒤돌아보며 일갈했다.

“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마.”

그 이름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반 로투스는, 그 자격을 상실했다.

서슬 퍼런 목소리에 반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얼굴을 치켜든 그는 광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지금 나가서 어쩌려고? 밖에 힘센 알파들이 줄지어 있을 텐데. 차라리 나 하나만 감당하는 게 낫지 않겠어?”

하비가 입술을 깨물고 반을 노려보았다. 이미 다 생각해 두고 수를 써둔 것이다. 준비된 무대에 스스로 날아든 꼴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였다.

“스터스 경! 괜찮으십니까!”

문이 활짝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벤이었다. 밖에서는 꾸물대며 기어 다니는 남자들과 신음만 가득했다.

“여긴 어떻게……?”

벤이 데려온 수하들인지 처음 보는 덩치 큰 남자 몇 명이 쓰러져 꿈틀대는 알파들을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벤은 하비의 몰골을 살피더니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보다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더 몰려오고 있습니다.”

하비는 벤이 미리 준비해 둔 말을 타고 로투스의 저택을 탈출했다. 문지기는 전부 기절한 채 널브러져 있어서 방해할 자도 없었다.

얼추 로투스가의 저택 반경에서 많이 벗어난 듯싶자 두 사람은 속도를 줄였다. 하비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면서 한쪽 팔로 배를 움켜쥐었다.

“여기 일은 어떻게 안 거지?”

물어놓고 하비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당연히 알 것이다. 빅터가 시킨 일이니까. 그의 사용인이 모를 리가.

이제 눈앞이 흐릿했다. 칼바람으로 날아드는 한기에 몸도 움츠러들었다. 함께 말을 달리던 벤이 하비 쪽을 흘끗 보더니 대답해 주었다.

“갑자기 반 로투스 경이 건장한 알파들을 한꺼번에 데려가기에 확인해 봤습니다. 스터스 경이 그쪽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하비를 보며 벤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눈 돌린 사이에 반 로투스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다 본인의 불찰이라 여겼다.

‘주인님이 믿고 맡겼는데…….’

하비가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벤은 다른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그보다 신약을 만든 의사가 뒷골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휴가를 떠났던 것이 아니더군요.”

흐려지던 밤색 눈에 조금 눈빛이 돌아온다. 이를 확인한 벤이 계속 하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아주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아마 한쪽 눈은 영영 못 쓸 겁니다.”

아마 반이 저지른 짓일 것이다. 하지만 하비는 동시에 의심도 들었다. 이제 빅터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반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명령 내린 자는 빅터일 확률이 높아졌다.

하비가 입술을 차갑게 비틀더니 확인하듯 물었다.

“베르텐 경이 그런 건가?”

“예? 아닙니다! 주인님이 그런 걸 할 분이 …….”

벤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사실 그런 짓을 하고도 충분한 사람이니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필요하다면 아무렇지 않게 살인도 했다.

하비는 천천히 말을 몰면서 씹어뱉듯 말했다.

“증거 인멸을 위해서는 사람도 없애는 게, 베르텐 경의 방식 아니었나.”

그런 식으로 늙은 회계사도 없애 버렸으니까. 할 말이 없어진 벤은 결국 화제를 또 틀어버렸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하비가 피식 웃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걸 확인하려고 날 거기서 빼낸 건가.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보려고.”

“예?”

벤이 깜짝 놀라 서늘한 하비의 눈을 살폈다.

“그래도 정이 든 사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기는 좀 미안했나 보군.”

“스터스 경…….”

벤은 하비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대충 짐작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석간신문이 비치된 커피하우스를 기점으로 큰 충격이 휩쓸었기 때문이었다.

임페르 해적이 불고 온 피바람, 그 끔찍한 진상이 밝혀지다!

두 얼굴, 라힌 스터스 전 의원!

스터스가의 얼룩진 과거, 폭로되다!

당시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들이 대거 분노하고 있었다. 스터스가로 달려가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벤은 심각한 얼굴로 하비의 의중을 물었다.

“설마 주인님이 그랬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라힌 스터스 전 의원의 일을 폭로한 것도, 로투스 경의 저택에서 일어난 일도 전부…….”

벤은 따로 지시받은 것도 없었고, 빅터에게 오로지 하비를 잘 돌보라는 명만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시나리오는 예정에도 없었다.

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럼 누가 있겠어.”

“로투스 경이 단독으로 했을 겁니다.”

그 사실은 이미 반 로투스가 고백을 했기에 알고 있었다. 지시한 자가 누구인지도 똑똑히 들었다.

그러나 하비의 입에서는 무섭도록 덤덤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랬겠지. 배후엔 베르텐 경이 있을 테고.”

벤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하비의 표정이 너무 확고해 보여서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하비의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였다. 지금도 하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늘 단정한 말을 하던 입술은 하얗게 부르터서 갈라졌다.

벤은 앞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빅터가 돌아왔을 때 이 모든 일을 알면 어떻게 될지 눈앞이 캄캄했다.

“스터스가 저택에 가까워지면 엄호하겠습니다.”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하비가 공허한 눈으로 벤을 보았다.

“엄호?”

벤은 순간 하비가 죽은 사람인 것처럼 보여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런 표정이 없다. 감정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지금쯤 사람들이 몰려와 있을…….”

사람들의 노한 함성이 벤의 말을 갈랐다. 횃불을 든 자도 있었고, 대다수는 어둠에 물든 저택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분노한 사람들이 외쳤다.

“잘도 우릴 속였겠다!”

“퉤! 이 더러운 사기꾼!”

“로열 가드? 웃기고 있네! 언제부터 우릴 지켰다고! 제 잇속 차리기 바쁜 놈들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벤은 당황해서 날아오는 돌을 피했다. 갈 곳을 잃었던 응집된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듯했다. 당시 사건과 전혀 관련 없던 자들까지 분노에 동화되어 자신의 화를 분출하고 있었다.

각자가 간직한 분노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를 건너다녔고, 배출될 적당한 곳을 찾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때 날아오는 돌을 피하지도 않고 묵묵히 말 위에 앉아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하비가 문득 냉소했다. 고요하지만 늘 온화한 빛이 서리던 밤색 눈 속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하비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사라지는 건가.”

하비의 이마를 비낀 돌이 긴 핏줄기를 남겼다. 점점 하비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가자 벤이 하비의 등을 떠밀었다.

“스터스 경, 얼른 들어가십시오.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하비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태에 놀라서 달아나려는 말을 두고 하비는 아예 말 등에서 내렸다.

“스터스 경이다!”

누군가가 하비를 알아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던졌다. 물, 계란, 돌, 뭉친 천 쪼가리 등 온갖 것이 날아왔다.

퍽!

하비는 맞아서 몸이 흔들려도 계속 걸었다. 이마가 찢겨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피가 눈앞을 가려 온통 벌겋게 물들었다. 그래도 걸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위태로운 걸음걸이, 그 사이로 강렬하게 번지는 페로몬에 몇몇 사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비 스터스는 알파였다. 절대 그에게서 날 리 없는 페로몬이 넘실대며 좌중으로 퍼졌다.

“이거 오메가 페로몬 아닌가?”

“살면서 이렇게 박고 싶은 향은 처음 맡아봤어…….”

홀린 듯 다가오는 사람들 사이로 집사가 뛰쳐들었다. 그 뒤로는 벤이 뛰어와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주인님! 어서요!”

“스터스 경! 빨리!”

안에서 떨며 하비만을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하비를 보고는 질겁한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날아드는 돌 사이로 뛰쳐든 집사가 하비를 데리고 저택 안까지 무사히 들어갔다.

벤은 하비가 들어간 걸 확인하자마자 위협적으로 뒤돌았다. 움찔하는 사람들 사이로, 벤이 데려왔던 건장한 사내들이 말을 몰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잘 들어. 지금부터 날조된 정보로 스터스 경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들은, 재판소에 다 잡아 넘기겠다.”

말을 몰고 온 여러 명의 남자가 벤 앞에 앞다투어 멈춰 섰다. 위협적으로 보이는 덩치들에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벤이 사납게 웃었다.

“그러니 뭘 던지든, 마음대로 해.”

잠시 자리를 비운 주인을 대신해서, 그는 하비 스터스를 반드시 지켜야 했다.

* * *

집사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피곤하실 텐데 뜨거운 물로 고단한 몸을 달래는 게 어떻겠냐는 말만 했다.

쏟아지는 뜨거운 물 속에 피와 이물질이 엉겨 서서히 번졌다. 하수구로 천천히 고이는 그것들이 더러워 보였다.

하비는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하수구 주변을 흘끗 내려다보다가 거울을 보았다. 뿌연 수증기가 끼었지만 손으로 몇 번 문지르자 얼굴이 나타났다.

곧게 뻗은 쇄골 위로 탄력 있는 어깨가, 그 위로 핏기 하나 없는 하얗고 마른 얼굴이 보였다. 젖은 갈색 머리칼이 또렷한 이목구비를 조금 가리고 있었다. 체격은 여전히 건장해 보이지만, 하비는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속은 다 망가졌다는 것을.

밖과 온도 차가 심한지 금방 수증기가 차서 거울이 뿌옇게 변했다. 하비의 얼굴이 다시 사라졌다.

언젠가 라힌 스터스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도시를 지키는 방패, 로열 가드. 뜻 높고 정의로운 기사 가문.

지독하게 강조되어 온 것이 힘들어, 하비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그때가 7살이었다.

‘이렇게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사는데, 제가 얻는 건 무엇인가요? 우리 가문은 대체, 사람들로부터 무얼 받는 건가요?’

아버지로부터 답이 돌아왔다. 언제나 같았다.

‘존경, 칭송, 명예.’

하비가 악을 쓰듯 되물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존경하지 않고, 칭송하지 않으며, 명예롭지 않다고 손가락질하면 어떻게 되나요?’

절대 그리될 일이 없다는 오만한 얼굴로 라힌 스터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되면 우리 가문은 존재 의미가 없다. 사라지는 거지.’

아버지는 이리될 줄, 정말로 몰랐던 걸까.

하비가 공허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믿었던 친구도, 사람들도, 심지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유일한 사람조차 그를 배신했다.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다시 손을 내밀어 뿌연 거울을 닦아냈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남자가 조금 이상했다. 입술 아래로 붉은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하비는 울컥 뜨거운 것을 토해냈다.

“컥!”

단순한 기침이 아니었다. 자꾸만 속에서 무언가 울컥울컥 역류했다. 하비는 기어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물을 뱉어냈다.

발아래 조그맣게 핏물이 모이고 있었다. 몇 번이나 핏물을 뱉어내고서야 역류하던 것이 멈추었다. 만성 위염이 악화되어 각혈까지 간 것이었다.

선대 스터스가 사람들처럼,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비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변이가 멈춘 줄 알았던 몸속이 다시 꿈틀댔다.

‘뭐지?’

이상할 정도로 속이 거세게 뒤틀렸다. 마치 이물질을 몸에서 뱉어내려는 것처럼, 발악을 했다.

하비가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꺾은 순간, 아랫배에서 맴돌던 뜨끈한 기운이 아래로 내려갔다.

주르륵! 철퍽!

묘한 소리가 났다. 마치 배 속에서 뭔가가 나와서 바닥에 충돌한 듯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하비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바닥이 온통 피바다였다. 입으로 뱉은 피는 상대도 안 되는 엄청난 양의 피가 강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완전히 멈춰 버린 머리였지만, 한 가지 사실은 간신히 알았다.

지금, 하혈을 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리고 피 웅덩이 속에, 이상한 것이 잠겨 있었다.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에 떠내려갈까 봐 하비는 무릎을 꿇고 허겁지겁 ‘그것’을 건져냈다. 양손을 붙여 오므린 위에 피투성이인 정체 모를 ‘그것’을 올려놓고 가만히 보았다.

희뿌연 시선 속에서 형체가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그건 마치 사람이 되다 만 듯한 모양이었다. 검지 길이만 한 크기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건…….”

‘그것’은 하비의 손 위에서 빠르게 식어갔다. 하비는 얼른 손을 닫아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조치했다. 배 속이 찢길 것처럼 아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뭔진 몰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성적인 생각 따위는 하나도 들지 않았다. 본능으로만 행동했다. 평소의 하비답지 않은 태도였다.

미끈대는 핏물 위에서 하비는 피 묻은 손으로 ‘그것’이 식지 않도록 하려 애썼다.

그는 샤워기의 물줄기 아래에서 등을 길게 구부렸다. 등으로 뜨거운 물줄기를 받으며 하비는 석고상처럼 단단히 굳어버렸다.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진, 차가워지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지? 갑자기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하얀 수증기가 탕 안 가득 번졌다.

하비가 너무 나오지 않아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간 집사는 깜짝 놀랐다. 온통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게다가 그의 주인은 무릎을 굽히고 앉은 자세로 꼼짝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이었다. 뭔가를 손으로 둥글게 감싸고 끌어안은 채로.

“주인님, 거기서 뭐 하시는…… 주인님?!”

하비는 그 자세 그대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집사가 놀라 소리치며 하비를 흔들었다. 정신을 완전히 놓았음에도 그 손만은 절대로 풀리지 않았다.

의사가 도착해서 확인하려 할 때도, 풀기가 쉽지 않았을 정도로.

‘존경, 칭송, 명예.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저는 그저…… 사랑받고 싶어요, 아버지.’

* * *

“헉.”

빅터가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앉아 있는다는 것이 또 졸았다. 빨리 끝내려고 열을 올리다 보니 또 잠이 부족해진 탓이었다. 빅터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비면서 목을 풀려고 헛기침을 했다.

“아, 기분 이상하네.”

빅터는 목을 이리저리 풀면서도 묘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류에 물품 목록을 적고 있던 검은 머리의 나스타가 고개를 휙 들었다.

“왜요, 주인님? 뭐가 이상한데?”

“그런 게 있어.”

빅터는 대충 대답하며 떨어진 곳에서 작업 중인 늙은 해적을 불렀다.

“아무래도 더 빨리 진행해야겠어. 영감, 아직 인수인계 덜 끝났어? 빨리빨리 좀 해.”

늙은 해적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한 번만 더 재촉하면 네 목숨도 빨리빨리 보내주는 수가 있어.”

“별로 위협적이지도 않으니까 닥치고 빨리해.”

평소처럼 농담으로 받아치던 빅터가 아니었다. 그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눈치챈 늙은 해적이 혀를 찼다.

“왜 그렇게 안달이냐? 두고 온 놈이 걱정돼?”

또 그걸로 놀려먹을 것 같아서 빅터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비율은 왜 또 멋대로 바꾼 거야? 고정하기로 했잖아.”

“그사이 시간이 흘렀잖냐. 시간이 곧 돈이지.”

“하! 제멋대로군.”

빅터가 지금 하는 일은 해적들과 완전히 결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임페르 해적단을 차근차근 점령하고, 수뇌부를 일부 숙청한 두 사람은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물론 기반은 늙은 해적이 마련해 준 것이고, 빅터는 이를 밑천으로 크게 불렸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하비와 얽힌 일도 있고, 해적에게 반감을 가지는 고용인들 덕에 슬슬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50%. 그 이상은 요구하지 마. 절대 안 돼.”

단호한 빅터의 말에도 늙은 해적은 능글맞게 웃었다.

“세상에 ‘절대’라는 게 어딨어. 60%.”

“미쳤어? 여태까지 다 내가 번 건데, 그걸 60%나 가져가겠다고? 완전 날강도네.”

어이없어하는 빅터를 두고 늙은 해적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요즘 들어 늙어서 귀가 잘 안 들린다는 핑계였다.

“융통성 없는 해적이라 그런다. 그래서, 60%로 하겠다고?”

“내가 언제……! 후우, 알았어. 60%로 하지.”

“좋아. 그럼 70%.”

“……이건 새로운 방식의 결투 신청인가?”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시간은 계속 지연되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 빅터가 항복하고, 늙은 해적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해 주기로 하고서야 긴긴 협상이 끝이 났다.

이 결과엔 늙은 해적도 내심 놀랐다.

“웬일이냐. 평소 같으면 절대 먹히지 않았을 건데.”

“몰라. 난 지금 급해.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인내심이 떨어져 가는 급한 눈길이 출렁대는 바다로 쏘아졌다. 빅터는 이 기묘한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는 건가?’

하비에게 현재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꿈에도 모른 채, 빅터는 초조한 마음으로 바다 위를 유랑했다.

그 뒤 일주일이 흘러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빅터는 보고를 받고 아연해졌다.

올란시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하비 스터스와 그 가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어딜 가나 하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였다는 둥, 라힌 스터스의 피를 이어받아 사람 속이는 데 도가 텄다는 둥, 온갖 괴소문이 떠돌았다.

의원실로 가장 먼저 돌아온 빅터가 싸늘한 눈으로 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업무 대리인인 폰조차 빅터의 눈치를 보더니, 밀린 일에 대한 언급 없이 자리를 비워주었다.

“우선 소문 뒷수습부터 해.”

“하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라앉혀. 헛소리하는 놈들 혀를 죄 뽑든지, 자르든지 해.”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잔인한 주인이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벤은 이를 알기에 숨을 삼키고 지금도 하비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있을 사람들을 애도했다.

벤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빅터는 더 큰일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하비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상세히 말해봐.”

벤은 난감한 얼굴로 하비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 반 로투스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빅터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엄청난 살기였다.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내가 소문을 퍼뜨리라고 했다는 거지. 하비한테.”

“네.”

벤은 어두운 눈으로 긍정했다. 하비와 마지막으로 대화했을 때 단단히 오해한 것을 보면 확실했다. 빅터를 의심하고, 반 로투스 경을 그의 하수 정도로 여기는 듯했으니까.

벤의 말이 이어질수록 빅터가 쥐고 있는 손잡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으스러질 듯 손잡이를 쥐고 있는 길고 거친 손 위로 핏줄이 솟아 있었다.

빅터의 분기가 하늘을 찔렀다.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느라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길게 자란 빅터의 앞머리 사이에서 녹색 눈이 가늘게 늘어지며 흉포한 빛을 띠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 망할 신약을 먹이고 덮치려 했고.”

흐트러지고 찢겼던 하비의 하얀 튜닉을 떠올리며 벤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빅터 아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벤이지만, 그가 이토록 격렬한 분노를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럴 것 같아 페로몬에 예민한 알파인 진은 밖으로 내보냈는데도, 문 앞에서 힘겨워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베타인 벤임에도 지금 우성 알파인 빅터가 내뿜는 페로몬에 분노가 더해진 것은 알았다.

이러다 큰 사달이 날 것 같아 벤은 얼른 사족을 붙였다.

“허나, 워낙 스터스 경의 무용이 출중하여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벤이 하비의 실력을 강조하며 절대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고했다. 그래도 빅터의 기세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페로몬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오싹한 한기가 벤의 등줄기를 날카로이 스몄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아슬아슬한 격정이 빅터의 녹색 눈에 드러나 있었다. 핏발마저 섰다. 하지만 빅터는 넘칠 것 같은 감정을 터뜨리지 않았다. 차곡차곡 모아 한 번에 폭발시키려는 것처럼 오히려 냉정해졌다.

빅터가 확인하듯 하나하나 사실관계를 짚어나갔다.

“전부 내가 시켰다는 식으로 얼버무렸고.”

“네.”

“그 몸으로 저택에 돌아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오메가라는 헛소리를 하는 거고.”

“……네.”

총체적 난국이었다. 빅터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빅터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물었다. 다음이 가장 중요한 확인이었다.

“그래서, 그 새낀 지금 어딨지? 벌써 도망간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멀쩡한 얼굴로 온갖 사교 클럽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하비는 진창에 박아두고, 저는 신나게 놀러 다니고 있다라.

빅터가 쥐고 있던 의자 손잡이가 기어이 부서져 나갔다. 반은 하비 스터스가 빅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걸 알면 감히 그딴 짓을 저지르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빅터가 어두운 눈으로 말했다.

“로투스 경에게 딱 하나는 고맙군.”

스산하게 들리는 저음이었다.

“곱게 죽일까 봐 걱정됐는데. 직접 손을 쓸 수 있게 해줘서.”

빅터는 반 로투스가 도망가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시하라 일렀다. 우선은 하비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 길로 빅터는 스터스가 저택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집사가 난관이었다.

“절대 안 됩니다. 주인님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빅터가 황당한 듯 웃더니 날카롭게 되물었다.

“내가 보면 안정이 안 된다는 소린가, 지금?”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경이 의뢰해 만든 그 괴물 같은 신약 때문에…….”

집사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빅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비의 집사가 그 약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이상한 예감에 빅터가 재촉했다.

“로투스 경이 하비에게 신약을 먹였다는 것까진 알고 있어. 그 뒤로 어떻게 되었지?”

벤은 하비에 대한 소문을 수습하러 다니느라 스터스가 저택의 상황에 꼼꼼히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집사가 워낙 완고하게 외부인을 막아서 쉽게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그때 얼굴에 자잘한 상처가 많고 한쪽 눈이 묘하게 번들대는 남자가 집사의 뒤에서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한쪽 눈이 의안이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원님.”

빅터가 의뢰한 신약을 제조했던 의사였다. 반 로투스에게 끌려가 반죽음당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기에, 빅터는 삐딱하게 말했다.

“아주 먼 휴가를 다녀왔나 보군. 잘 지냈나. 눈이 아주 멋진데.”

빈말로도 걱정하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그 성정을 잘 알고 있기에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의사는 이어지는 빅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게 멋진 눈을 준 놈은 조만간 손봐줄 생각이다. 그리 알아.”

요컨대 대신 복수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의사가 설핏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더욱 감사드립니다.”

짧게 주고받은 뒤, 의사는 빅터를 안으로 들였다.

“여기서 할 이야긴 아닙니다. 들어가시죠.”

빅터는 초조한 얼굴로 하비가 있을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하비부터 봐야겠어. 멀쩡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

의사가 단호하게 빅터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스터스 경께서는 아주 무탈하시니까요.”

“아까부터 자꾸 왜 날 배제하는 거지?”

죽을 뻔하더니 없던 용기가 샘솟는 모양이었다. 전처럼 빅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인가.’

의사는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분노에 가려 두려움조차 잊은 모양새였다. 거기다 짙은 슬픔마저 보였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빅터는 침묵했다. 의사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묵묵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의사가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스터스가 저택으로 뛰어왔을 때, 정말 제가 헛것을 본 줄 알았습니다.”

올 것이 왔다. 빅터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물었다.

“뭘 봤는데.”

“제가 만든 그 무서운 약이…… 설마 스터스 경에게 쓰일 줄은 몰랐고, 그 부작용으로 그리되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의사는 한참을 횡설수설하더니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털어놓았다.

“정말로 알파가 오메가가 되어 임신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결코 하비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빅터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언제나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녹색 눈에 경악이 가득했다.

“방금 뭐라고…… 임신? 그게 가능해?”

의사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빅터를 보았다.

“신약의 부작용은 가늠이 안 된다고,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실제로 스터스 경은 그 약이 잘 받는 체질인지 히트 사이클까지 왔다고요. 예고된 재난이었습니다.”

임신도 믿기지 않는데, 의사가 뱉는 다음 말이 더 믿기지 않았다. 임신이라고 말해놓고, ‘재난’이라고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왜?

정답은 머지않아 의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산아였습니다. 4개월을 넘긴 것 같더군요.”

빅터의 눈이 크게 휘청댔다.

“……뭐.”

빅터가 무너지듯이 자리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 말도 안 된다. 하비가 임신한 것도 겨우 믿을까 말까인데, 이어서 쏟아지는 말들은 더 잔혹했다.

“유산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애초에 불안정한 아기집에 멀쩡한 아이가 생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임신이 된 것만 해도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부작용 때문에 몸은 변했는데, 페로몬은 알파로 유지되고 있던 기형적인 상태였습니다.”

체내에 페로몬샘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비는 그 기능이 비정상이라고 했다. 몸의 상태에 따라 변해야 하는데 변한 호르몬에도 반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빅터는 차마 말도 못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하비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 상상을 넘어섰다. 속이 울렁대면서 역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것도 모르고 보고 싶다는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잘 있을 거라고 혼자 위안 삼았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빅터를 보며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충격이 더 큰 듯했다. 그래도 그는 차분하게 말을 끝까지 매듭지었다.

“지금은 ‘알파’로 다시 되돌린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원래 체질과 다른 형질은 몸에 무리가 가니까…….”

반 로투스가 약을 세게 쓰는 바람에 페로몬샘이 강제로 자극을 받아 기능을 하긴 했지만, 현재는 거의 망가진 상태였다.

다시 알파로 돌아왔다고 해도 페로몬이 너무 미약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수준이었다. 의사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이제 한 번만 더 그 신약을 쓰면, 스터스 경은 정말 돌아가실 겁니다. 내장이 너무 상했어요.”

의사가 말하는 바는 이랬다. 이미 죽은 아이를 몸에 얼마간 품고 있었을 거라고. 아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그 되다 만 인간 형체를 어설픈 아기집에 품고 있다가 외부 충격으로 인해 쏟아냈을 거라고 말이다.

“원인은 많습니다. 스터스 경이 자주 복용했다는 약 때문일 수도 있고, 억지로 드셔야 했던 그 신약 때문일 수도, 혹은 이번에 퍼진 스터스가에 얽힌 괴소문 때문일 수도 있죠. 심리적 충격과 물리적 충격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거기다 반 로투스 경의 배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떠오르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

입을 가리고 듣기만 하던 빅터가 손을 떼어냈다.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져 있었다.

“지금 원인을 따질 때인가? 하비는. 지금 어딨어. 괜찮은 건 맞아?”

“괜찮으시긴 합니다만…….”

의사는 슬쩍 빅터의 눈을 피했다. 그 행동에 빅터는 더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의사의 멱살을 잡고 음산하게 말했다.

“괜찮은지 아닌지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안내해.”

의사는 집사에게 눈짓을 했고, 한숨지은 집사가 빅터를 안내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하비의 방 안에는 정말로 하비가 있었다. 그는 너른 침대 위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자는 중이었다. 몸에서 피를 많이 쏟은지라 혈색이 전에 비해 썩 좋지 않았다. 의사의 말대로 알파 페로몬도 너무 미약했다.

돌에 맞은 듯한 흔적도 얼굴 곳곳에 보였다. 그걸 보자 빅터는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사람들이 던진 돌일 것이다.

하비의 비밀을 지키지 못했다. 다른 자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내 잘못이야.’

터뜨린 건 반 로투스 경이지만, 애초에 증거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그 아버지가 저지른 타락의 증거를 쥐고 하비를 마음껏 뒤흔들었다. 괴로워하는 과정을 즐기기도 했다. 그랬던 과거가 지금 와서 빅터의 속을 까맣게 갉아먹었다.

그 모진 고통마저 다 참아내던 사람이었다. 고고한 자존심마저 굽히고, 매번 굴욕을 당하면서도 비밀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했다.

그런 하비가 이리되었으면, 한계를 넘은 것이다.

빅터는 침대맡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삐걱 소리가 나는 것조차 거슬렸다. 하비가 오랜만에 맛보는 고요한 침묵을 깨는 것 같아서.

빅터가 한참 머뭇대다가 하비의 하얀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동안 만지고 싶은 것도 죽을 힘을 다해 참아왔는데, 돌아와서 만져보는 피부가 너무 까슬했다. 속이 망가지는 기분이었다.

“돌아왔어. 빨리 오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하비의 얼굴이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참혹한 광경에 감정이 격앙되었다. 이를 악물고 빅터가 마지막 막을 뱉었다.

“결국 늦었네.”

빅터의 손가락이 이마까지 침범하자 하비가 잠결에도 간지러움에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하비의 흐릿한 시야로 금발에 녹안을 한 미남자가 들어왔다.

누군지는 알겠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머리가 사고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빅터는 하비의 상태를 보느라 말이 없고, 하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상대를 살피며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그중 먼저 움직인 건 하비였다.

하비가 갑자기 흠칫 놀라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제 손안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눈이 힘겨운 듯 파르르 떨렸다.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집사와 의사는 못 보겠다는 듯 하나같이 눈길을 돌려 버렸다.

빅터가 이상한 듯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하비가 왜 이러는 거지?”

집사는 차마 말 못 하겠다며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 남은 의사는 대답을 요구하는 빅터를 난감한 얼굴로 빤히 보았다.

의사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괴었다. 놀란 건 빅터였다.

“깨어나시고는 계속 저러십니다. 발견 당시에 손에 죽은 아기를 담고 있었는데, 너무 꽉 담고 있어서 손을 펴기도 힘들었습니다. 의식도 없는 상태였는데도…….”

밀려드는 어지러움에 빅터가 이마를 짚었다. 이건 너무 잔인했다.

“……찾고 있는 거군.”

눈을 보니 알겠다. 하비는 전과 확연히 달랐다. 인지는 하지만, 사고는 할 수 없다. 몸이 거듭된 충격으로부터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완전히 사고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의사는 총기가 사라진 눈으로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는 하비를 안타깝게 보았다.

“가끔 대화를 할 정도로 정신이 돌아오시지만, 짧습니다. 얼마 못 가요. 시간이 지나면 더 좋아지겠지만…….”

의사는 이제 모든 것은 하비의 의지에 달렸다고 전했다.

빅터가 침통해하며 하비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비가 움찔대면서 손을 빼려는 행동을 하며 빅터를 거부했다. 분명 눈에 초점이 없는데도, 빅터에게 닿지 않으려 했다.

빅터는 내쳐진 손을 멍하게 보았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그가 망연자실하게 하비를 보았다.

“왜……?”

마음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비는 한 번도, 그를 보지 않았다. 아예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가끔 의사나 집사를 의미 없는 눈으로 보았지만, 빅터가 있는 쪽은 아예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다.

무의식으로도 그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빅터를 피하는 건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참혹한 심정으로 하비의 방 밖으로 나오자 집사는 빅터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 할 일만 할 뿐이었다.

빅터가 결국 그를 붙들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의 처리는 어떻게 했지? 묻었나?”

하비가 낳은 사산아를 말했다. 알아들은 집사는 울컥한 얼굴로 따져들었다. 참았던 분노가 일시에 폭발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고작 묻는 게 그런 겁니까? 혹시 그게 후환이라도 될 것 같아서요?”

사실 불에 태워 버렸다. 묻으면 하비가 나중에라도 정신이 들어 파볼 것 같아 남겨두기가 두려웠다. 집사는 그 모습을 보면 자신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지켜온 주인인데.

사용인들이 하나둘 다 떠나도 그만은 끝까지 남아 있던 것은, 하비의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힌 스터스와 한 몸이었던 늙은 집사가 현 집사의 아버지였다. 그는 어린 하비가 당하던 것들을 알면서 모른 척해왔다. 자신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라 여겼으니까.

집사 자리를 물려받은 뒤론 남에게 앓는 소리 한번 하지 않는 가엾은 주인을 평생 보필하는 걸로 그 죄책감을 메우려 했다.

그만큼 그에겐 하비의 행복이 최우선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이 난봉꾼 귀족 하나가 다 망쳐 버린 것이다.

집사가 말이 없는 빅터를 향해 이글거리는 시선을 던졌다.

“제겐 주인님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베르텐 경이 과거에 주인님께 어떤 끔찍한 짓을 했든, 그래도 지금은 주인님이 마음을 주신 분이니 바로 쫓아내지는 않으려 노력했습니다만……. 도저히 못 참겠군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집사가 바깥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주십시오.”

* * *

빅터는 씁쓸한 얼굴로 하얀 저택을 뒤돌아보았다. 혹시 집사가 그 끔찍한 것을 묻기라도 했다면, 손수 불태울 작정으로 물은 것이었다. 하비가 아파할 만한 흔적 하나 남겨두기 싫었다.

‘분명 그 성격이면 끝까지 찾아서 확인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갈가리 찢겼다.

이제 겨우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왔는데, 만회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다니. 용서를 구할 상대는 이미 그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너무 늦은 것이다.

잠깐이나마 하비를 만졌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빅터는 깨달았다. 이건 본능적인 상실감이었다.

‘그래서였나…….’

임신한 것이 4개월 전이라면, 대충 짐작이 갔다. 그때부터 더욱 혼란스러워졌으니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오메가를 두고 배신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었다. 굳이 심장의 각인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가진 오메가를 아프게 하는 모든 행위는 상대 알파에게 고통을 주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조차 고통이었다. 온통 하비 생각으로만 점철되었던 지난 2주가 떠올랐다. 물만 마셔도, 같이 먹었던 음식을 봐도, 무얼 하든 작은 하나하나가 전부 하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비의 몸을 좋게 할 약재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 것도 그 일환이었다.

빅터는 하비에게 일이 생겼을 시점부터 극도로 불안했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자신의 오메가가 아프면 알파 역시 불안을 느낀다는 사례도 학계에 보고된 적이 있었다.

또 심장이 쓰렸다. 가슴을 문지르며 빅터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심란해하는 빅터에게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던 진이 다가와 물었다. 그의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희미한 분노가 일렁였다.

“반 로투스 경은 어찌 처리할까요.”

빅터의 저택도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레나는 넋 놓고 울고, 레나가 우는 걸 본 나스타는 당장 반 로투스를 족치러 가겠다며 이를 갈았으며, 뒤늦게 안 진은 이런 상태였다. 그 와중에 다들 하비의 집사가 오지 못하게 막아서 발만 구르고 있었다.

진이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제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제가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빅터가 힘없이 웃었다.

“벤도 어제 와서 그러던데. 지원자가 너무 많군.”

벤의 상태가 제일 안 좋았다. 자신이 미리 막지 못했다며 괴로워했다. 그만큼 반 로투스에 대한 반감도 극에 달했다.

어느새 자신의 사용인들이 하비의 일에 이렇게 열을 올리게 된 것일까. 빅터는 입맛이 썼다. 분명 몇몇은 초반엔 자신과 함께 하비를 증오하는 데 앞장섰을 텐데, 지금은 문병을 못 가서 단체로 앓는 지경이었다.

‘유산까지 했다는 걸 알면 더 난리가 나겠지만.’

빅터가 허탈하게 하비가 있는 곳을 보았다. 유산이라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생각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았다.

빅터는 이제 그 일은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다른 자가 알아서는 안 된다.

빅터는 까칠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치겠네…….’

잠깐 얼굴을 보고 오는 길인데도, 또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하비의 원래 모습이 그리웠다.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온몸을 다해 진심으로 마음을 돌려주던 사람이. 저런 무기력한 모습은 하비와 어울리지 않았다.

빅터는 그가 금방 좋아질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리 믿고 싶었다. 거부당해도 좋으니, 그저 그가 본래 모습만 되찾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비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어.”

“그럼 계속 감시만 합니까? 다음 타깃은 주인님인데도 말입니다.”

분한 얼굴로 묻는 진을 빅터가 달랬다. 그들은 반이 다음엔 빅터를 건드릴 것이라는 것을, 이미 따로 마련해 둔 정보망으로 다 알고 있었다.

로투스가는 어느 정도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 살려둘 의미가 없어졌다.

빅터는 로투스가가 있을 방향을 흘끗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실컷 즐기라고 해. 이승에서 벌이는 마지막 파티가 될 테니까.”

심상치 않은 빅터의 말에 진이 진지하게 물었다.

“방법은 생각해 놓으셨습니까?”

“물론.”

온갖 방법을 다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방안을 찾아냈다.

“가장 즐거울 때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어.”

빅터가 손목을 이리저리 만지며 잔인하게 웃었다.

“감히 내 것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빅터는 마차를 타고 커피하우스에 들렀다. 빅터가 오롯이 소유한 가장 큰 커피하우스가 있는데, 그곳에 새로 꾸린 정보꾼과 인력들이 있었다. 그들이 반 로투스의 계획을 알아낸 일등 공신들이었다.

빅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빨간 머리 소녀가 고개를 홱 들며 그를 반겼다. 티나라는 아이였다.

“의원님! 오셨어요?”

친구의 말에 다정한 눈에 갈색 머리를 가진 여자아이, 로지가 반색했다.

“뭐? 의원님 오셨어?!”

여기저기서 바쁜 와중에도 고개를 내밀어 빅터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편한 복장에 격식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빅터가 내부를 둘러보며 티나와 로지에게 물었다.

“일은 잘 진척되고 있나?”

티나가 씨익 웃었다.

“당연하죠. 지금쯤 그 멍청한 자식은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을걸요.”

두 사람은 커피하우스에 몰래 남장을 하고 들어왔다가 빅터의 눈에 띄어 정보상 일을 하게 된 여자아이들이었다.

빅터의 눈썰미대로 머리도, 배포도 좋았다. 조금만 가르쳐도 열을 알고 잘 숙지하는 데다 성격도 좋아서 기존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갈색 머리의 로지가 싸늘하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우리가 깔아놓은 패인 줄도 모르고, 바보 같은 사람.”

게다가 입도 꽤 걸었다. 온화한 로지조차. 맞장구치며 티나가 냉소했다.

“도대체 스터스 경은 그런 놈을 어떻게 친구로 뒀던 건지 의문이라니까요.”

다들 자세한 것은 몰라도 반 로투스가 하비를 배신했다는 정황은 알고 있었다.

힐끔 빅터의 눈치를 본 로지가 조심스럽게 다른 것을 말했다. 빅터가 하비와 관련된 주제는 예민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의원님이 정말 해적과 일했다는 건 저희도 놀라웠지만…….”

하필 반이 빅터를 손보려고 했던 건은, 이번에 빅터가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온 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임페르 해적의 잔당과 손을 완전히 끊고 작별하고 왔는데 설마 반 로투스가 그걸 꼬투리 잡아 신문에 퍼뜨릴 계획을 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반의 계획은 대충 이러했다.

올란시의 시의원, 빅터 베르텐 경은 혼자 자수성가한 것이 아니라, 해적과 손을 잡고 피 묻은 돈을 벌어왔다. 시민을 속이고, 국왕을 농락했다. 해적질로 돈을 번 빅터 베르텐 경은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로 몰고 갈 생각인 듯했다.

티나가 깔깔 웃으며 반의 야심을 비웃었다.

“설마 해적들을 다 정리하고 오신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깨끗하게 손 씻고 전부 정리하고 온 마당이었다. 실질적인 증거는 없어졌다. 반 로투스는 빅터의 긴 출장이 해적과의 결별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남은 증거는 이제 하나뿐인데, 사실 그것마저 빅터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증거란 빅터가 임페르 해적단과 함께 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임페르 해적에 잡혔다가 운 좋게 탈출한 사람이었는데, 목격자로 나서서 로투스가를 도울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이미 돈과 약간의 협박으로 매수해 놨다.

빅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놈은 내가 의원직에 별 관심 없다는 걸 모르니까. ”

심지어 그가 베르텐가를 쫄딱 망하게 해도 아무 생각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손 덜 가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판이다.

시의원도 빅터에겐 가진 돈의 위력을 확인할 수단, 좀 더 효율적으로 자금을 굴리기 위한 위치에 불과했다. 물론 뒤탈이 없도록 열과 성을 다해 일하긴 하지만, 빅터의 속내를 뼛속까지 귀족인 자들이 알 리도, 이해할 리도 없었다.

명예와 가진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한 자들이니까.

‘내가 하비처럼 그런 걸로 타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 어리석은 놈.’

빅터는 생각할수록 더욱 괘씸하고 화가 났다. 하비를 무너뜨린 걸로 자신감을 얻어, 같은 방식으로 그 더러운 손을 뻗어오다니.

그때 웃고 있던 티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빅터에게 말했다.

“아, 맞다. 의원님. 스터스 경에 관한 일 말인데요.”

하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은근히 미소 짓고 있던 빅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금기어나 다름없는 화제에 당황한 로지가 티나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티나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벤 오빠 너무 혼내진 마시라고요. 그 오빠 진짜 열심히 했는데…… 하필 의원님 건이 같이 걸리는 바람에 스터스 경의 일까지 전부 신경 쓰지 못했나 보더라고요.”

로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심하게 자책하고 있던데 옆에서 보기 안타까워서…….”

빅터는 염려하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도 알아. 걱정하지 마.”

빅터의 반응을 살피며 긴장했던 로지가 괜찮은 듯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스터스 경은 좀 어떤가요?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한 달간 일도 못 한다는 말이 있던데.”

외교부 측에서 하비의 공석은 한 달 정도라고 이야기를 낸 것 같은데, 빅터는 몹시 못마땅했다.

“고작 한 달? 평생 못 하게 해야지.”

로지와 티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안 그래도 평소에 총괄 외교관의 뒤치다꺼리나 다른 외교관이 친 사고에 대한 뒷수습, 그 외 많은 것을 감당하느라 몸이 더 축나고 있었는데.

저번에도 몸이 안 좋은 하비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일거리를 자문하던 총괄 외교관이 떠올라 빅터가 이를 갈았다.

물론 하비가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빅터는 더 이상 하비가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하비가 정신이 들고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지면, 스터스가의 빈곤한 재정 문제도 밀어붙여 대신 해결할 생각이었다. 아니면 세상 물정에 좀 어두운 것 같은 순진한 스터스가의 집사를 꼬드기든가.

“아무튼 다른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해.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으니 가보겠어.”

“네! 맡겨주세요!”

“조심히 가세요, 의원님! 스터스 경께 안부 전해주세요!”

여기저기서 하비의 안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편지처럼 날아왔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스터스가의 어둠을 하비에게 대입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정보를 다루는 만큼 하비가 어떤 사람인지 비교적 냉정하게 지켜봐 왔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의 사태를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빅터가 하비에 대한 염려를 보내는 자신의 사람들을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하비가 알았으면 좋겠는데.’

돌 던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마음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서서 대기하고 있던 진이 마차에 올라타는 빅터에게 물었다.

“스터스가 저택에서 말입니다. 아깐 쫓겨나신 겁니까?”

예상보다 스터스가 저택에서 빨리 나오는 것을 보고 짐작한 듯했다. 빅터가 씁쓸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지은 죄가 많다 보니. 뒷말이 쓴 물과 함께 삼켜졌지만 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스터스 경의 집사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너무 완고해서 그동안 주인님 외엔 아무도 못 들어갔습니다.”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집사가 그리 필사적인 이유를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집사의 행동은 혹시라도 주인에게 해가 갈 만한 모든 요인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빅터가 당연하지 않냐는 말투로 말했다.

“스터스가의 집사라 그렇겠지.”

완고하고 고집 세기로는 수많은 가문 중에 최고니까 말이다.

대번에 납득간다며 진이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군요.”

그토록 싫어했던 위선적인 이름인데, 이제 와선 그 고집이 그리 싫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남들은 지키기 힘든 가치들을 고지식하게 지켜온 것이니까.

사람들의 신뢰가 무너진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스터스가의 정신을 인정하는 것은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인 빅터와 그의 사용인들이었다.

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빅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스터스 경이 자주 갔던 맛집 아십니까?”

뜬금없는 소리에 빅터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들자 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레나가 스터스 경이 맛있는 걸 사주셨다고 자랑을 그리 했는데, 위치를 도통 알려주질 않아서 약이 오르던 참이었습니다.”

모른다며 고개를 내젓던 빅터가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약 오르는데.”

같이 웃은 진이 차가워진 날씨에 하얀 입김을 불면서 스터스가 저택이 있을 곳을 돌아보았다.

“스터스 경이 빨리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가장 원하는 것이 빅터임을 알았다. 그래서 주인의 긴 침묵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베르텐가의 문양을 박은 마차가 천천히 길가를 흘러갔다.

그 뒤를 종소리가 뒤따르듯 따라붙었다. 죽은 아이를 찾는 부모의 울음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서로 손을 맞잡은 부모의 손에 작고 검은 종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 * *

모든 것이 흐릿했다. 기억을 못 하는 건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건지조차 불투명했다.

하비는 의식이 몇 번 들었을 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의사에게 물었다. 하비의 상태를 고려한 것인지 자세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정황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기형적인 몸 구조로 아이를 갖고, 사산아를 낳고, 유산했다. 가까스로 다시 알파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제 다시는 오메가가 되어선 안 되고, 될 일도 없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빅터가 신약을 전량 폐기하라 명했기 때문이었다. 빅터의 명이 없었어도 목숨 걸고 그 지긋지긋한 신약을 없애려고 했던 의사는 당장 제조법이 적힌 종이마저 모조리 파쇄했다.

마지막으로 빅터가 가져간 단 하나의 신약을 제외하고는, 페로몬 교란제 신약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런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하비를 의사가 안타까이 보았다.

어차피 지금 말해줘도 하비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신을 놓고 멍해졌다. 그러다 잠깐 의식이 깨어나면 같은 것을 묻고, 현실을 인정하는 듯하다가 또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그만의 방식으로 잔인한 현실을 이겨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의사는 뜨끈해지는 눈가를 문지르면서 하비에게 진심으로 조언했다.

“이제 나쁜 기억은 모두 잊으시고 좋은 것만 생각하세요.”

하비가 인형처럼 의사의 뒷말을 따라 했다.

“좋은 것…….”

그런 게 아직 남아 있나. 내게 남아 있는 게 뭐가 있지?

텅 빈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하비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밖에서 우뚝 멈춰 섰던 커다란 기척은 서서히 속도를 붙여 하비에게 다가왔다. 의사가 하비에게 다가오는 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의원님, 오셨습니까.”

인사에 대한 대꾸 없이 홀린 듯 다가온 빅터가 하비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주 희미해진 하비의 페로몬이 코끝을 간질였다.

익숙한 밤색 머리칼 위로 얼굴을 대자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기분 좋은 시원한 페로몬과 함께 하비 특유의 체향도 섞여 났다. 이 온기와 체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빅터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갖 물음이 그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정신 들었어? 좀 괜찮아? 이제 안 아파?

반 로투스에게 지시한 건 내가 아니야. 처음엔 내가 어리석어서 잠깐 나쁜 짓을 했는데, 이젠 아니야. 내가 비밀을 유포한 것도 아니고, 배신할 생각은……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정신 차렸어.

미안해. 정말……미안하다.

여러 번 청해 하비의 집사에게 허락을 받고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이번에도 자는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의사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이성을 잃고 말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고, 오로지 저 사람을 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안고 있는데도 더 갈증이 났다.

“흠! 흠!”

지켜보던 의사가 헛기침으로 빅터를 일깨웠다. 환자라서 조심히 대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팔에 힘을 풀긴 했지만, 살이 많이 내린 하비의 몸에 온 신경이 쏠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안겨 있는 내내 하비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비의 단단한 어깨가 원인 모를 이유로 진동하고, 몸 전체가 잘게 떨리는 것도 느껴졌다.

빅터는 그제야 팔을 완전히 풀고 하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흉터는 많이 사라졌지만, 안색은 더 안 좋아 보였다.

그 와중에 많이 말라서 수척해진 얼굴에 속이 타들어갔다. 턱선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전보다 푹 꺼진 것 같은 밤색 눈에는…….

빅터가 아연한 얼굴로 반문했다.

“설마, 내가 무서운 거야?”

그간 하비에게서 잘 보지 못했던 감정이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빅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둘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줘.”

눈치 빠른 의사가 자리를 비워주었다. 빅터는 말을 잃은 채 하비의 반응을 살폈다. 하비가 자신을 두려워한다.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은 하비의 마른 입술에서 천천히 어떤 말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 들으려 더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자 하비가 흠칫 뒤로 물러났다. 피하는 것이 확실했다.

처음엔 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았지만, 기침 몇 번 이후로는 또렷해졌다. 물을 주려 하자 하비는 그 손길마저 거부했다.

하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바는 이러했다.

“내게서…… 가져갈 것이 더 남았나?”

하비는 계속되는 무의식 속에서 빅터가 예전에 했던 말들을 다시 들었다. 그가 했던 잔인한 말들이 되풀이되었다.

전부 예정된 것이었는데 바보처럼 몰랐다. 당장 빅터가 뱉는 달콤한 말에 취해서 어느덧 잊고 있었다.

‘스터스가의 가주를 임신시킬 수 있다면 내게도 영광이지.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고.’

분명 예전에 그리 말한 적도 있었다. 오메가가 된 것도 모른 채 임신한 것도, 죽은 아이를 낳게 된 것도, 빅터의 예정대로였을 것이다.

이제 잃을 것도 없다. 하비가 쉰 목소리로 간신히 토해내듯 말했다.

“이제 더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하면서 하비의 목소리에도, 손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두려움에 섞인 다른 감정도 보였다.

자조, 포기, 절망.

이불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리던 손이 벌컥 빅터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 힘조차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빅터는 말없이 당겨 갔다. 하비의 이어지는 말이 가슴을 후려쳐서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비는 절규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 끝없는 아득함에 빅터는 변명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아직 더 남았어? 이번엔 뭘 가져갈 생각이지?”

하비는 더 이상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젠 빅터가 하비의 신랄한 말투를 이기지 못하고 그를 마주 보지 못했다. 그가 뱉는 말 하나하나가 빅터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러다 하비가 자신의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차갑게 뱉었다.

“아. 이 몸뚱이가 남았군.”

자조적으로 비틀린 하비의 입술에서 더욱 건조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필요 없으니 가져가. 원하는 만큼 취한 뒤에 버려.”

하비가 경악으로 물든 빅터의 녹색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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