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거짓의 대가
빅터에게 불려온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열어젖힌 탄탄한 가슴팍에 청진기를 대어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의 심장은 평균적인 속도로 뛰었다. 동양에서 배워 온 맥을 짚는 방식으로도 어떠한 문제점 하나 짚어낼 수가 없었다.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옷을 여미며 빅터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아무 문제 없는 건가…….”
“어떤 증상이셨습니까?”
빅터에게 이 증상이 시작된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반 로투스 경의 생일 무렵부터 시작된 증상은 백방으로 원인을 알려 해도 알 수가 없었다. 하비에게는 알리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가끔 심장이 무리하게 뛰어. 수백 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도 잠깐이지만 느끼고 있고.”
의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예? 의원님은 우성 알파 아니십니까. 웬만한 질병 하나 없는 분이……. 그런 이상한 증세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넬 부른 거다. 명의라 하더니, 별것 아닌가 보군.”
도발적인 빅터의 말에 의사는 발끈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최근에 각인을 하셨습니까?”
놀란 빅터가 기가 막힌 얼굴로 의사를 보았다.
“뭐? 만나는 오메가도 없는데 무슨 각인을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알파라면 하나 있긴 하지만. 하비의 얼굴이 불쑥 떠올라 빅터는 떨떠름하게 말을 묻었다.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서 하신 거 아닐까요? 자꾸 심장이 문제라고 하시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만.”
“말해봐.”
쭈뼛쭈뼛 빅터의 눈치를 보던 의사가 허락되자 두서없이 말했다.
“각인 중에서도 ‘심장의 각인’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유 없이 심장이 아프거나 어딘가가 쑤시는 건 분명 그에 따른 효과로……. 심리적으로 묶이는 각인인데 물론 흔한 일은 아닙니다. 이상한 건 발현 조건이 오메가여야 가능한…….”
턱을 매만지며 온갖 가설을 뱉던 의사는 빅터의 압도적인 페로몬에 파랗게 질렸다. 그도 알파라 페로몬에 민감한 편이었다.
빅터가 살벌하게 대꾸했다.
“헛소릴 계속하는 걸 보니 돈 받기가 싫은 모양이지?”
아니라며 펄쩍 뛰는 명의에게 작은 보석 몇 개를 쥐여 보냈더니 금방 헤벌쭉하여 떠나갔다.
“돈값도 못 하는 놈.”
짜증이 난 빅터가 조금 더 자란 금색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밖을 보았다. 헛소리도 유분수지, 알파인 하비와 무슨 각인을 한다고. 생각만 해도 오한이 들었다. 심장의 각인이 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거부감이 드는 한편, 빅터는 심장이 느릿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또인가…….’
이따금 따뜻한 기류가 가슴 언저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하비를 생각하면 늘 이랬다.
몸도 좀 풀 겸 잡념을 없애려 정원으로 나서니 사용인들이 빙 모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있었다. 빅터가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또 모여서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 건지.’
빅터가 다가갔음에도 그들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모르는 듯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느 멍청한 인간이 언제 마음을 깨달을지에 대한 내기. 흐악!”
신나게 답해주던 나스타가 빅터임을 깨닫고 뒤로 화들짝 물러났다. 다른 이들도 머쓱하게 빅터를 맞았다.
“주인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무뚝뚝하게 대꾸한 빅터가 그들 위로 그늘을 드리우며 팔짱을 꼈다. 진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얼른 돌렸다.
“의사가 뭐라고 합니까?”
빅터가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듯 헛웃음만 지었다.
“헛소리나 지껄이다가 갔다. 돈 날렸어.”
불편한 얼굴을 한 빅터가 검지로 팔뚝을 일정하게 찍었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헛소리라 생각했기에 사용인들에게도 이야기했다.
“심장의 각인이니 어쩌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해대더군.”
진과 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빅터에게 물었다.
“심장의 각인?”
“그게 뭡니까?”
듣고 있던 나스타가 깔깔 웃었다. 그녀는 심장의 각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말도 안 돼! 스터스가의 그 돌덩어리와 주인님이? 푸핫! 무슨 그런 돌덩어리 아까운 소리를. 악!”
돌덩어리란 하비를 일컫는 말이었다. 돌처럼 답답한 사람이라며 나스타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나스타. 왜 주인인 내가 아니라 스터스 경이 아깝다는 건지 한번 들어볼까.”
빅터에게 귀를 잡혀 매운 눈물을 쏙 빼고 있는 나스타를 대신해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레나가 대답해 주었다.
“돈이야 물론 좀 없으시지만 벌면 되는 거고, 인망이나 품성이나 검술 실력으로 보나 스터스 경이 역시……. 헉!”
‘검술’은 요즘 빅터에게 있어 최대의 예민한 화두였기에 레나는 본인이 말해놓고 놀라 입을 가렸다. 레나가 눈치를 보자 역시 빅터의 눈썹이 힘차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간 내가 할 일을 너무 안 주었나 본데. 잘 알았으니 다들 일어나. 일을 재분배해 주겠다.”
모두의 안색이 일제히 핼쑥해졌다. 작은 불만이 쏟아졌지만 빅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행했다.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용인들을 내버려 둔 채 빅터가 한가한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 안은 잘 관리되어 여전히 푸릇하지만 밖은 벌써 낙엽이 져 얼룩덜룩한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소드 클럽에서 빅터가 하비에게 두들겨 맞지 않게 되기까지는 3달하고도 정확히 2주일이 더 걸렸다. 그 뒤로 하비의 검을 되받아 튕겨내기까지는 한 달이 더 소요되었다.
그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 * *
빅터가 하비의 검을 받은 것도 모자라 허공으로 높이 튕겨낸 날, 하비의 검이 바닥에 처박히고 빅터는 하비를 온몸으로 껴안았다. 땀범벅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하비에게서는 청량한 페로몬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 귀족들의 야유도, 휘파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온전히 하비 스터스를 얻게 되었다. 남은 의심 하나 없이 믿어줄 것이다. 그런 환희가 온통 그를 희열로 들뜨게 했다.
“그렇게 좋나?”
하비가 희미하게 웃더니 막무가내로 끌어안은 빅터를 밀어내지 않고 손으로 허리를 잡았다. 빅터는 그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뻐 날뛰고 있었다.
그간 겪었던 육체적 고통과 인내가 빅터의 마음을 쓰리게 저몄다. 일상 같은 근육통도 이제 안녕이다.
“당연하지. 이 지긋지긋한 짓도 이제 그만이니까.”
하비는 체격 차로 거의 눌리듯 강제로 안겼지만 아픈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그를 격려해 줄 뿐이었다.
“고생했어.”
짧은 한마디가 빅터의 마음을 찌르르 울렸다. 그간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원래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은 빅터에게 제일 쉬운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비 스터스만큼 얻기 어렵고 까다로운 자는 없었다. 그런 만큼 각별히 공을 들였다. 자신마저 속일 만큼 완벽한 거짓까지 구사하면서.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찜찜함은 대체 무엇일지.
빅터가 하비를 놓아주며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좀 믿는 건가?”
주변의 귀족들은 승부가 나자 뿔뿔이 흩어지고, 둘은 탈의실로 함께 가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하비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사실은 그 전부터도 믿고 있었어.”
빅터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뭐?”
보다 말끔해진 얼굴로 하비가 얼어붙은 빅터를 향해 말갛게 웃었다.
“날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경밖에 없을 거라면서.”
그건 하비를 가장 크게 흔들었던 말이었다. 오랜 시간 증오했든, 복수할 거라 이를 갈았든, 어쨌든 오랜 시간 누구보다 강렬하게 하비 스터스를 생각했던 사람은 빅터였다. 그건 사실이다.
라힌 스터스에 대한 원망으로 아들인 자신을 괴롭게 했지만, 그 마음이 이제 돌이켜 보니 애증이었다는 고백도 하비를 흔들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빅터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빅터는 저도 모르게 더듬대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비의 진솔한 눈빛이 제게 향하자 속마음을 모두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그, 그랬지.”
하비는 피식 웃으며 수건을 다시 들더니 목 언저리도 꼼꼼하게 닦았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그 뒤로 빅터는 이성을 좀 잃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으로 접근 금지를 암묵적으로 쳐놓고는 하비와 탈의실 욕실에서 뒹굴었다.
쓸데없이 페로몬을 왜 이렇게 꺼내 드냐는 하비의 질타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젖은 밤색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잡아당겨 입술을 먹듯 키스했다. 끈적한 땀은 이미 씻겨 내려갔고, 서로의 단단한 근육만 손바닥 아래 가득 만져졌다.
뜨겁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따갑게 빅터의 등을 때렸다. 수증기가 하얗게 솟았다.
천천히 입술을 내리면서 빅터는 하비의 하얀 목덜미를 보았다. 물고 싶다. 인내심이 금방 바닥났다. 하비의 살 내음에 취해서 빅터는 결국 충동적, 혹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세게 물었다.
격통에 하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읏.”
빅터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문 자국을 보았다. 선명한 잇자국이 나 있었다. 꼭 오메가에게 각인을 하려다 만 것 같은 이상한 잇자국이었다. 빅터가 변명하듯 말하려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나도 모르게……. 정말 미쳐가나.’
하비가 물린 곳을 만지작대더니 침묵하는 빅터를 마주 보았다. 이내 그가 빅터를 조용히 끌어당겼다. 낮은 목소리로 하비가 말했다.
“괜찮아.”
맞닿은 탄탄한 가슴에서 살갗 위로 뛰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그게 너무 다정해서, 빅터는 또 정신없이 하비를 취했다.
그 뒤로 빅터는 하비의 뒤로 쇠구슬을 넣으며 농락했던 그 장소에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맺었다.
* * *
“하아…….”
요즘따라 한숨이 부쩍 늘었다. 멍하게 정원의 푸릇함을 바라보던 빅터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하비의 마음을 오롯이 얻어냈으니 이제 어떤 식으로 그의 마음을 진창에 처박을지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리하면 하비는 아마 두 번 다시 일어나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썩 내키지 않았다. 자꾸만 주저했다. 그런 생각을 잠깐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을 죄 뽑히는 듯한 아픔이 찾아왔다.
‘지금도 그래.’
미간을 찡그리며 고통을 참은 빅터가 금방 원상 복귀되는 몸에 의문을 가졌다. 멀리서 데려온 명의라는 자가 아무렇게나 떠들었던 소리가 떠올랐지만, 머리를 휘휘 저어 몰아냈다.
차라리 신약을 만들어냈던 그 돌팔이 의사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요즘 신약으로 얽히지 않아서인지 그를 더 볼 일이 없었다. 더욱이 그 의사는 휴가를 떠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 채 훌쩍 떠난 것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빅터가 이를 갈았다. 이 상황에서도 하비가 ‘고생했다’며 등을 쓸어주던 감각만 생생했다. 빅터는 묘한 얼굴이 되어 턱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뭔가 당한 기분인데.”
하비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이상하게 집사가 큰마음 먹고 몰래 손댄 투자들이 다들 대박을 터뜨렸다. 하비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중을 나온 집사가 밝은 얼굴로 고했다.
“주인님! 성공입니다, 성공이에요!”
집사가 시험 삼아 작은 투자 몇 개를 해보겠다고 이야기한 게 있었는데, 생각보다 빠른 성공이었다. 함께 축하해 주면서 하비는 은근슬쩍 물었다.
“근데, 불법 투기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 하비는 늘 그것을 집사에게 강조했다.
“그럼, 정보는 대체 어디서……?”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들리던걸요.”
바로 그 점이 수상했다. 하비는 더욱 의심스럽게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집사를 추궁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흘리는 정보치고는 너무 정확해. 소문이 돌 텐데 그러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집사는 그제야 관자놀이를 긁으며 진실을 말했다.
“그게……. 제가 신문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하던걸요.”
하비의 밤색 눈동자가 찌그러졌다.
“자네에게만 들리도록?”
하지만 집사는 제 이야기와 성공에 취해서 하비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니까요. 작게 이야기해서 안 들리겠지 싶었는지 자기들끼리 어찌나 신나게 수다를 떠는지. 하지만 제가 다 듣고 있었습죠.”
집사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하비는 의심을 지우지 않았지만 집사의 기분을 굳이 망치고 싶지 않았다.
“운이 좋은 모양이군. 개인적으로 번 건 자네 거야. 이건 확실히 해두지.”
하비가 그리 말해도 충직한 스터스가의 집사는 탈탈 털어서 저택 운영비로 쓸 예정이었다. 그저 주인의 칭찬을 들어 좋은 집사가 빙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하비는 기뻐하는 집사를 뒤로하고 한숨지었다. 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 왠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날, 하비는 퇴근 직후 바로 빅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여전히 퇴근은커녕 밤을 샐 것 같은 기세로 일하는 빅터가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하비는 익숙해진 집무실 책상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내 집사를 너무 바보 취급은 하지 마. 이러다 틀린 정보도 신봉하면서 믿을 기세니까.”
서류에 증빙 사인을 하고 있던 빅터가 고개를 잠깐 들었다가 숙였다.
“무슨 소리지?”
“경이잖나. 커피하우스에서 일부러 내 집사에게 투자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게.”
“아, 들켰나?”
빅터는 뻔뻔하게 웃더니 손을 뻗어 다 식은 커피를 홀짝댔다.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무릎을 잡았던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리고는 하비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됐으니 여기까지만 해. 내 집사에게 더 수작 부리면 다음엔 두고만 보지는 않을 테니까.”
빅터의 미간이 슬그머니 좁아졌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선의로 시작한 일로 하비가 경고하는 것보다 집사를 두둔하며 감싸고 도는 것이 더 불쾌했다. 그러다 보니 절로 불퉁한 말이 튀어 나갔다.
“왜? 안전성 보장된 투자 목록만 말해주고 있었는데? 내 실력을 못 믿어?”
빅터의 못마땅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하비는 하고 싶었던 말이 목 아래로 쏙 들어갔다. 칭찬받고자 한 일인데 왜 힐난하냐는 듯한 억울함마저 느껴졌다. 확실히 고마운 일이긴 하다. 그래서 하비는 직설적인 화법은 접어두고 부드럽게 우회했다.
“경의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라…….”
하지만 말하다 말고 눈치를 보니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납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하비는 한숨 쉬며 솔직하게 말했다.
“궁핍한 재정에 도움을 주고 싶은 건 알겠지만 이래선 내 마음이 불편해.”
빅터가 종이를 뒤적거렸다. 그 손에 하비의 시선이 향했다. 유독 길고 단단한 빅터의 손이 서류를 절반 이상 가리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고 말면 그쪽 집사 얼굴은 훨씬 펼 텐데 말지.”
최근에도 저 손이 행한 많은 것이 떠올라서 하비의 목이 붉어졌다. 그러나 하비는 슬쩍 다른 것을 보며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내가 갚을 수 있는 도움만 받겠어. 그 이상은 내 능력으로 역부족이니 받지 않을 생각이고.”
“안 갚아도 돼.”
하지만 하비는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빅터가 좋은 생각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잉크병에 펜을 꽂아둔 빅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 신경 쓰이면 다른 걸로 갚으면 어때?”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비가 맞은편에서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빅터가 저런 빙글대는 얼굴로 말할 때는 반드시 뭔가가 있었다.
“스터스 경의 시간.”
“……내…… 시간?”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하비가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래도 빅터는 꿋꿋했다.
“요즘 너무 바쁘잖아. 만나려면 대기 번호표라도 받아 적어야 할 처지라고.”
하비는 아직 쓰레기 섬으로 불리던 이로비나 섬을 매입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다른 국가와 영해가 얽힌 곳이기도 해서 까다로웠다. 빅터의 경고대로 그 섬을 매입하려던 다른 곳과도 경쟁이 붙었다. 게다가 그 해역을 지나다니는 신생 해적단 때문에 고려할 것이 몇 배로 늘어났다.
‘그건 그렇다 치고.’
더 문제인 건 빅터와 공식 연인이 된 하비에게 잘 보여 투자 정보를 얻으려 하는 자들도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사실 하비는 그런 자들을 피해 여기로 도망왔다. 그들은 너무 집요해서 하비가 외교부에 있으면 온갖 핑계를 대서 어떻게든 찾아왔다.
‘이곳은 이 철면피가 워낙 철벽 방어를 해서 오지 않고 있지만.’
하비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빅터의 집무실을 휘둘러보며 대꾸했다.
“대체 누구 이야길 하는 거지? 지금도 내가 먼저 퇴근해서 경의 집무실에 와 있는데.”
빅터도 하비의 지적이 사실이기에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최근 일이 많은 건 하비도 마찬가지지만, 여러 가지를 겸하고 있는 빅터의 일이 훨씬 많았다. 체력이 괴물 같은 우성 알파라 버티는 것이지, 보통의 베타나 오메가였다면 진즉에 나가떨어져 침상 신세였을 것이다.
창가로 쌀쌀한 바람이 들어왔다. 빅터는 활짝 열린 투명한 창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내 쪽 사정은 집 나간 가주가 돌아오면 조금 나아질 거야. 망할 색골 영감이 그 지역 오메가들을 모두 임신시키고 올 기세라. 요새는 병이 나서 골골대고 있다고 하니 돌아오겠지.”
빅터는 본인 가문의 가주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평판과 폭언을 쏟아부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며 이를 가는 빅터를 하비가 물끄러미 보았다. 오늘의 마지막 햇살이 빅터의 옆얼굴로 쏟아졌다. 붉은빛으로 얼룩진 얼굴 옆으로 긴 그림자가 졌다. 녹색 눈에 비친 석양이 보석처럼 빛났다. 언제 봐도 음영이 뚜렷한, 사내다우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때도…….’
빅터가 관계 중에 알파임을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목을 문다거나, 마킹 혹은 각인을 하려고 했던 것은 하비도 알았다. 그래놓고 스스로 놀라는 빅터가 새삼스러웠다.
빅터가 정신을 놓을 정도로 자신에게 빠져들었다는 것에 하비는 충만함을 느끼면서도 마음이 쓰렸다.
최근 빅터는 무심결에 행동해놓고 당황스러워하는 일이 잦았다. 본능을 거스르고 같은 형질과 관계를 가지려니 당연했다.
오메가와 사귀었다면 이런 일은 없을 텐데. 하비는 가슴 안이 선뜩했다.
그때마다 하비는 당황한 빅터를 말없이 끌어당겼다. 혼란스러워하는 빅터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끝끝내 놓지 않는 빅터는 지금 어떤 심정일지 입맛이 썼다.
멀쩡한 척하지만 하비는 자신이 이미 어린 시절 극심한 스터스가 특유의 교육으로 어딘가가 망가진 지 오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첫 러트를 지옥 속에서 치러낸 빅터도 마찬가지. 어쩌면 빅터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비는 가끔 생각했다. 이 관계는 어느 한 사람이 비틀린 과거에서 제대로 벗어난 순간 깨어질 얇은 얼음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지금은 즐거우니까.’
하비는 무거운 마음을 떨쳐냈다. 그러곤 일부러 가볍게 빅터가 잊고 있는 사실을 짚어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가주가 병환으로 돌아오는 거면 일이 전혀 줄어들 것 같지 않은데?”
하비가 냉정한 현실을 꼬집자 빅터가 뼈아픈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하긴, 더 시키고도 남을 인간이지.”
남은 사람도 별로 없고 가세가 기울어 버린 스터스가에 비해 베르텐가는 사람이 넘쳐나는 만큼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였다. 하비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빅터를 위로하는 겸 쓸쓸한 소회를 담아 말했다.
“그만큼 할 일이 많다는 건 가문이 부흥했다는 증거기도 하지. 물길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지 않겠나.”
빅터는 뜨끔하여 하비의 표정을 살폈다. 티를 내고 있지는 않지만 아픈 기색이 보였다. 빅터는 자신이 스터스가를 인질 잡아 하비를 위협했던 것도, 현재도 하비를 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빅터는 꽤 진심이 되어 하비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니 모른 척 이번만 눈 감고 나한테서 투자 정보를 뜯어내라고. 그럼 스터스가도 금방 예전처럼 돌아갈 테니.”
빅터에게서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귀족들이 지척에 널렸다. 그러나 하비는 빅터의 바로 옆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위치가 되었음에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비가 조금 이상했다. 그가 차가운 얼굴로 평소와 달리 말했다.
“예전처럼……. 그렇게 될까.”
이미 스터스가는 이정표를 잃었다. 본래 가졌던 가문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빛이 바래었다. 타락한 것이다.
염소수염 사내가 스터스가의 과거 재무 상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가지고 온 것이 일주일 전쯤이었다. 과거의 단면을 안 순간, 하비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여긴 어떻게……?”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하비의 정체를 직감했는지, 혹은 따로 알아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명확한 건 염소수염 사내가 하비의 집무실로 직접 찾아와 알아본 내역을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석상처럼 굳은 하비의 얼굴을 보며 염소수염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동안 몰라뵙고 무례하게 대했지 뭡니까, 스터스 경. 이제야 제대로 인사 올립니다.”
처음 한 번만 귀족을 향한 예를 갖춘 그가 짧은 수염을 긴장한 듯 잡아당겼다. 그러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하비에게 고했다. 보고서를 공손하게 올린 손길에 비해 말투는 거칠었다.
“귀족으로서 의뢰한 게 아니니 평소대로 대할 거야. 모, 목을 칠 거면 치든가.”
말은 대담하게 하고 있지만 내심 떨고 있다는 것이 다 보였다. 하비가 피식 웃었다.
“그럴 생각 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잔뜩 긴장했다가 몸가짐을 재정비한 염소수염이 다시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모두 거짓이야. 내역 전부, 다 조작된 거라니까?”
역시 그런 거였나. 하비는 잔잔히 침묵했다.
말이 없는 하비를 향해 염소수염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스터스가의 당시 재산은 다 불법 투기로 날려먹었더라고? 하필 꽝인 품목에 올인했나 보던데.”
여기까지는 하비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뒤는 아니었다.
“그걸 전부 사회 환원으로 베푼 양 꾸며놨더라니까?”
하비의 얼굴에 더욱 낮은 그림자가 깔리고, 염소수염은 비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있는 것들은 다 똑같아. 스터스가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 가득한 얼굴로 염소수염이 떠난 뒤, 하비는 그가 작성한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마음을 후벼 파는 소리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각오한 일이잖아.’
사람들은 진실을 알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스터스가는 투명한 관리를 위해 대대로 저택의 모든 지출비와 수익을 내부에서 상세히 기록해 왔다. 가주 개인의 씀씀이까지도.
하비가 들고 있는 재무 관련 보고서는 현 집사의 아버지인 윗대 집사가 작성한 것으로, 당시 스터스가의 모든 재무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뭉텅이로 돈이 나간 건 임페르 해적단 사건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투자를 잘못하여 상당한 돈을 날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 돈은 어디서 들어온 거지? 설마.’
투자로 돈을 날린 직후에 갑자기 들어온 수익이 있었다. 해적단 사건 직전에 알 수 없는 출처에서 큰돈이 들어온 것이다.
하비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이 돈이 아마, 시 재정에서 빼돌린 돈일 것이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내부인이자 가업을 물려받은 집사가 알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그래서 하비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사를 추궁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전부 솔직히 말해. 이 돈이 어디서 온 건지, 들은 게 있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집사에게 하비가 한숨짓듯 말했다. 역시 집사는 아는 듯했다.
“시 재정에서 몰래 빼돌린 거겠지.”
집사는 얼어붙은 얼굴로 귀신처럼 하비를 마주 보았다. 그의 주인도 다 알고 있는지 그다지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들킬까 봐 해적 인질 사태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신 거고. 맞나?”
이미 빅터에게 다 들어서 처음부터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 대한 사후 처리와 책임은 다하려 한 줄 알았다. 하비가 분노로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인님…….”
하비는 늙은 회계사를 장례 치러주려 했을 때, 집사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자네가 ‘그 일’에 연관된 자라며 장례 치러주는 것조차 꺼리던 것도 이런 이유였겠지.”
늙은 회계사는 임페르 해적 사건 이후로도 거짓된 장부를 작성하는 데 크게 일조했을 터였다.
심란한 얼굴인 집사에게는 더 캐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도 당시에는 어렸고, 알았더라도 흐름을 바꿀 힘이 없었을 것이다. 괜한 화풀이는 하기 싫어서 하비는 곧장 방에 틀어박혔다.
괴롭게 머리를 감싸며 하비가 아픈 숨을 뱉었다.
“그렇게 들키기 싫었으면 차라리 장부라도 철저히 조작하시지…….”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나가고 들어간 금액 내역 자체는 너무 솔직하게 작성해 놨다. 출처만 거짓으로 작성한 것이다.
결국, 라힌 스터스는 끝까지 비겁했다. 속죄는 할 생각도 없었고, 죽기 직전까지도 그럴싸한 선한 명목으로 죄를 덮는 데만 골몰했다. 덮는다고 덮어질 것이 아닌데도.
하비는 그날 밤, 속을 달래려 혼자 독한 술을 몇 병이나 비웠다.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눈앞에 닥친 확고한 진실이 썼다. 이미 하얀 저택은 어둡게 물든 지 오래였다. 그가 인식하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본래의 의미를 잃은 곳에 미래가 있을 수 있나. 그저 돈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빅터는 그늘로 가득한 하비의 얼굴에 이상을 감지하고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나?”
이게 문제였다. 짧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빅터에게 너무 의지하게 되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걱정이나 염려를 담기만 해도 가슴속의 고철 덩어리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쓸모없다 여겼던 심장이 제 모습을 찾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말 없는 하비를 가만히 살피던 빅터가 점차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설마 알파의 긍지 따위를 입에 담은 놈이 또 있었어?”
“아니.”
정말로 달려가 있지도 않은 누군가를 족칠 기세라 하비가 얼른 대답했다.
전에 어떤 늙은 귀족 하나가 하비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적이 있었다. 알파로서의 긍지를 잃은 몰락한 가문이라 멸시했지만 당시 하비는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빅터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풍비박산을 냈다. 해당 가문을 탈탈 털어 온갖 비리를 폭로하고, 거짓 투자 정보로 가세를 기울게 했다.
다들 말은 안 해도 빅터가 한 짓임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하비를 모욕한 늙은 귀족이 한밤중에 모르는 자에게 당해 사흘 밤낮을 사경을 헤매며 앓아누운 일도, 사람들은 빅터가 한 것이라 여겼다.
하비도 그런 흉흉한 소문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정말 아니니까 혹시 애먼 사람 잡아서 인생 망치지 마.”
썩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다. 빅터는 눈을 가늘게 접고 물었다.
“그럼 뭔데? 말하지 않으면 애먼 사람 잡아서 인생 망치게 할 테니까.”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하비는 적절한 말로 둘러대었다. 빨리 저 의혹을 풀어주지 않으면 정말 다른 사람을 잡을 기세였다.
“요즘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그제야 빅터는 수긍했다. 그 일이라면, 이해가 갔다.
“아아, 그 쓰레기 섬 매입 건? 일이 많긴 할 테지. 국왕의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 건 나도 유감이야.”
하비는 아쉬움 가득한 빅터의 표정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패전국의 상황이라, 국왕은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군을 움직이는 것에 몹시 민감했다. 그래서 빅터의 설득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대신 빅터가 사적으로 해적 소탕 건을 도와준다 했지만 하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됐어. 애써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
빅터가 여전히 아쉬움과 집착이 끈끈하게 남아 있는 눈길을 하비에게 보냈다.
“내가 제대로 해냈다면 감사 인사 이상의 것을 받았겠지?”
빅터가 일어나는 것을 본 하비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미리 말해두지만, 여긴 경의 집무실이야.”
“잠깐 상상했더니 아래가 불끈거려서 말이지.”
하비가 짧게 말했다.
“가라앉혀.”
바로 말허리를 잘린 빅터가 혀를 찼다.
“가차 없군.”
“일하는 공간과 욕구를 푸는 공간 정도는 분리하는 게 어때.”
아쉬운 듯 말하는 빅터에게 하비가 일침을 가했다. 그럼에도 빅터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하긴 하비는 여태껏 뭐든 간에 빅터가 바로 포기하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빅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과 욕구를 풀 수 있는 공간이 합쳐진 게 가장 완벽한 공간 아니었나? 모든 알파가 꿈꾸는 이상이지.”
저번에도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남에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하비가 역시 딱딱하게 대꾸했다.
“난 아니니 그 이상 같지도 않은 이상에서 빼주길 바라네.”
한 치의 틈도 없는 하비의 공방에 빅터는 어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기적절하게 문이 달칵 열리고, 빅터의 비서 겸 대리인인 폰이 돌아왔다.
하비는 빅터의 지분거림을 피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키스라도 하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심장 언저리가 묵직하게 달아올랐다.
피곤과 왠지 모를 한이 서린 얼굴로 들어오던 폰이 하비를 보고 활짝 반색했다.
“스터스 경! 또 오셨군요. 따뜻한 차라도 한잔 내드릴까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손을 꼬는 그를 하비가 따뜻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래주면 고맙지. 매번 잘 마시고 있어.”
빅터가 불만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차는커녕 물도 먼저 주지 않는 놈이.”
콧노래까지 부르며 등을 보이는 폰을 빅터가 힘껏 노려보았다.
하비는 익숙해진 작은 평화에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빅터의 뒷모습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제법 자란 빅터의 금발이 이제 목 아래로 꽤 길게 뻗었다.
적으로 두면 피곤하고 위험한 자이지만, 제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철저히 지킨다. 그게 하비가 본 빅터 베르텐의 진면목이었다.
빅터는 그동안 착실하게 하비의 검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을 갈고닦아 하비의 검을, 그의 무게를 이겨냈다.
빅터의 진심을 보기 위한 관문이라고 해두었지만 사실 하비는 그가 중간에 때려치울 줄 알았다. 개인적으로 연습까지 해가며 철저하게 대비해 맞받아칠 줄은, 그 정도로 악쓰고 오기를 부릴 줄은 몰랐다.
‘원래도 검술에 재능이 있었으니 가능했지만.’
하비는 고개를 내려 양손을 보았다. 손에서 느껴지던 떨림과 뜨거움이 여전히 생생했다. 빅터의 검이 자신의 것을 쳐내고 온전히 제 무게를 실어 맞닿아온 순간이.
묵직하게 짓누르던 하비의 검을 빅터가 날려 버린 순간, 홀가분함만 남았다.
그때 비로소 하비는 해방감을 느꼈다. 빅터에 대한 불편한 감상과 끝끝내 남아 있던 해묵은 감정들도 하비의 검에 묶여 함께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이런 날이 오기를 가장 바란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로, 하비는 기뻤다. 날 듯이 좋아하는 빅터보다 어쩌면 더.
빅터가 지겹도록 그를 감싸고 있는 견고한 벽을 부수고 가장 내밀한 곳까지 걸어 들어와 주길 바랐다.
가까이 있는 지금도,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제 중증이었다. 폰이 없었다면, 이곳이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면, 그대로 모른 척 빅터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이다.
생각에 잠겼던 하비는 불퉁하게 이어지는 빅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2주일 정도, 길면 한 달을 상단 일 때문에 멀리 나가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나.”
갑자기 예정에 없던 일정을 말하자 하비가 혼란스러워했다. 2주일? 길면 한 달? 까마득한 숫자였다. 하비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는 내색 않고 일부러 느긋하게 되물었다. 빅터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뭐가?”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하비의 말간 눈빛에 빅터는 이유 없이 울컥했다.
“경과 내가 그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안 돌아올 것도 아니고, 늦어도 한 달 뒤에는 돌아오잖아.”
빅터는 집무실 책상에 한쪽 턱을 괴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아…… 그래. 뭐, 바라지도 않았지만.”
갑작스런 일정에 깜짝 놀라거나 서운하다는 시늉이라도 보고 싶었건만. 하비는 바늘 하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로 아주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드는 섭섭함에 빅터는 흠칫 놀랐다.
‘난 대체 뭘 원한 거지?’
하비를 속이는 것에 너무 몰입한 건가. 요즘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를 걱정하는 말도, 좋아하는 척 기대는 말들도 이제 진심인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야겠어.’
빅터는 하비와 떨어져 멀리 가는 김에 머리를 식히고 이 오락가락하는 감정도 죄 정리하고 올 심산이었다.
집사 레나가 굳이 곁에서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제 하비에 대한 마음을 인정할 때가 오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무한한 애‘정’이든, 한 끗 차이인 애‘증’이든, 그 단어 사이를 다리 놓고 있는 건 분명 하비에 대한 ‘호감’이었다.
빅터가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단 하나였다.
‘여태 한 짓이 있는데…….’
돌아와서 하비에게 했던 행동들이 빅터의 머릿속에서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신약을 먹여 형질을 바꾸면서까지 고통을 주던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메가가 되는 과정에서 시키던 굴욕적인 행위들도, 채찍을 휘두르던 감촉도 여전히 손안에 남아 있었다. 저 단단한 남자가 맞으면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으려 애쓰던 것까지.
신약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하비를 억지로 안은 것도 수 번이다.
그런 하비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즐기기까지 했다. 심지어 지금도 그의 진심을 기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마음을 인정해 버리면 빅터는 스스로 지옥으로 굴러떨어지는 꼴이었다. 오랫동안 하비를 힘들게 했던 것을,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아냐, 아직은. 그저 내 연기에 내가 속아 넘어간 것일 뿐이지.’
얼마나 거짓을 완벽하게 연기하면 스스로 헷갈릴 정도인지. 빅터는 자신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매번 혼란을 넘겼다. 감당 못 할 후환이 두려워서, 그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계속 뒤로 미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후회 같은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만, 하비와 지내고 싶었다.
때마침 돌아온 폰이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녹색 물이 가득한 차를 가져왔다. 폰은 둘 사이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빅터의 말에 굳이 설명을 덧붙였다.
“요약하자면 앞으로 한 달‘이나’ 떨어져 지내야 하는데 섭섭하거나 아쉽지 않냐고 묻는 거죠. 더 나아가면 나는 그리울 건데 너는 내가 그립지 않을 거냐는 함축이…… 히익!”
빅터의 살기가 무섭도록 꽂혀들었다. 베타라 페로몬은 느끼지 못하지만 사람 여럿 죽일 것 같은 저 살벌한 기운만큼은 확실히 느꼈다.
“실컷 지껄였으면 꺼져.”
“퇴근하겠습니다!”
눈치를 보던 폰이 후다닥 사라졌다. 사라진 뒷모습을 지긋이 노려보는 빅터를 하비가 불렀다.
“언제 출발하는 거지?”
폰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 하비를 맞았다. 빅터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3일 뒤.”
“빠르군.”
3일이 빠르다는 건 하비도 섭섭하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그리 보기엔 하비는 너무 무덤덤해 보였다. 여전히 중요한 데서는 감정을 잘 숨겼다.
하비에게만 꽂혀 있던 빅터의 시선이 흔들렸다.
‘뭘 신경 쓰고 있는 건지.’
빅터는 이런 것에 연연하는 자신이 더욱 알 수 없어졌다. 마음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비는 종종 그에게 생긴 틈을 잘 아는 사람처럼 파고들곤 했다. 모르고 하는 것일 텐데도 가끔은 허를 찔렀다.
‘그게 저 남자의 무서운 점이지만.’
남은 서류들을 정리하며 빅터가 퇴근할 준비를 시작했다.
“3일이면 넉넉히 시간이 있는 편이야. 다음 날 바로 출발해야 할 때도 있거든.”
하비는 여전히 어수선한 빅터의 집무 책상을 눈으로 훑었다. 끄트머리에 먼지도 좀 보였다. 늘 보는 풍경이지만, 정말이지 정리정돈이 안 된다. 하지만 안 본 척 아무렇지 않게 하비가 말했다.
“그런가.”
흠칫한 빅터가 새삼스럽게 책상에 붙은 먼지를 소매로 슬그머니 닦아내는 동안, 하비는 빅터의 일정들을 머릿속에 확실히 저장해 두었다. 빅터는 상단 일도 겸하다 보니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일도 생긴다고.
뜨거운 찻물이 조금씩 입안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차는 입속에서 서서히 식었다. 하비는 벌써부터 쓸쓸한 기분이었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대로 속내를 드러내면 빅터가 오만하게 콧대를 높일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빅터가 식은 커피에 뜨거운 물을 추가하며 물었다.
“그 전에 하루 정도 온전히 시간을 낼 수 있겠어?”
하비는 제발 휴가라도 가라며 사정하던 다른 외교부 직원을 떠올렸다. 너무 쉬지 않는다며 건강을 걱정하던 다른 사람들도 연달아 생각났다.
“낼 수는 있을 것 같아. 근데 뭘 하려고?”
뭘 하려는지 물었지만 다른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도 제대로 못 먹나?”
하비의 식욕 부진이 벌써 3달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말라가는 하비의 몸을 걱정하는 추세였다. 워낙 체격이 있었던지라 그래도 건장해 보이지만, 원래 모습보다는 많이 야위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갑자기 당기는 음식들도 생기고 있고.”
간밤에는 시큼한 과일이 당겼다. 금방 구할 수 없는 과일이라 참고 말았지만. 얼버무리는 하비에게 빅터가 눈을 빛냈다.
“그래? 뭐가 먹고 싶은데?”
하비는 제대로 된 용건이 나오지 않자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됐고. 고작 뭔가 먹기 위해서 하루를 비우는 건 비생산적이야.”
“먹는 것도 포함해서, 다른 것도 열심히 먹어야지.”
빅터가 빙글거리며 말하는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하비는 얼굴을 붉혔다. 말을 말자. 더 이상 말하면 휘말릴 것 같아서 차라리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포기를 모르는 빅터 베르텐은 재차 물었다.
“그래서, 뭐가 먹고 싶다고?”
* * *
하루지만 긴 휴가가 될 것 같았다. 집사는 빅터와 함께 간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진 듯했지만 하비 앞에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집사가 마중 나온 빅터의 마차 앞에서 입을 삐죽거리며 하비를 배웅했다.
“그래도 요즘은 좀 괜찮아지신 듯하여 보내 드리는 겁니다.”
이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다. 몇 달 전만 해도 하비는 빅터와 만나고 온 날에는 항상 엉망진창이었다. 열이 오르기도 예사고, 사실 하비에게는 말을 않고 있었지만 신체에 남은 크고 작은 멍을 본 적도 있었다.
뭔지는 잘 몰라도 빅터에게 지독한 짓을 당하고 왔음이 분명했다. 자존심 강한 하비가 말 한마디 못 하는 걸 보면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그리 여겨 집사는 그간 침묵해 왔다.
그랬는데, 눈엣가시인 빅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하비를 연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하던 하비도 어느덧 빅터의 변화에 익숙해지고, 이제는 제 울타리 안으로 완전히 들인 것이 집사의 눈에도 보였다.
‘이제 정말 괜찮으신 건가?’
울적하게 배웅하는 집사를 놀리듯 빅터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보내주는 만큼 당연히 즐겁게 지내고 올 테니 걱정 말도록.”
방금 전까지 보내준다던 집사는 기분이 나빠진 얼굴로 하비에게 투덜댔다.
“……정말. 주인님, 꼭 가셔야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처리해 주셔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은데요.”
빅터와 하비의 집사,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물론 빅터가 훨씬 여유 있었다.
하비는 한숨 쉬며 두 사람을 말렸다.
“경은 부디 적당히 놀려. 자네는 베르텐 경의 말을 너무 귀담아듣지 말고.”
“왜 저런 분과 사귀시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빅터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귀족에게 막말하는 집사를 왜 내치지 않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어차피 진짜 귀족도 아니면서. 차마 여기까지는 말 못 한 채 집사는 하비를 배웅하며 눈물겨워했다.
사실 하비의 집사가 빅터에게 이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스터스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뿐 아니라 사용인에게 관대한 빅터의 성정 덕이 컸다. 빅터의 그런 성향 때문에 빅터를 격의 없이 대하는 사용인이 많았고, 하비도 그걸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하비는 별말 없이 웃더니 불퉁하게 있는 빅터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빅터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하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이러고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마차가 덜컹거리고 출발했다. 익숙한 페로몬이 빅터의 후각에 가득 잡혔다. 언제 맡아도 기분 좋은 청량한 향이었다.
“그것보다 다른 걸 걱정해야 하지 않겠어?”
언제부턴가 하비와 함께 있으면 자제가 안 되었다. 신약을 먹고 오메가가 된 것도 아닌데, 곁에 있을 때마다 그를 취하고 싶었다. 점점 중증이 되었다.
빅터는 경계의 눈길을 보내는 하비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하비의 페로몬을 들이켜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잠이 몰려들었다. 혹시 수면 방향제라도 섞은 건가 의심될 만큼 마음이 풀렸다.
“농담이고. 다른 짓 안 할 테니까…….”
움찔거리며 피하는 하비를 빅터가 강한 힘으로 잡아 눌렀다. 손아귀 힘과는 달리 빅터의 녹안은 힘없이 가물거렸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
아무리 체력이 강철이라도 한계를 초월한 업무량을 소화하고 왔다. 억지로 휴가를 만드느라 잠을 아예 못 잤다. 빅터는 그 이전에도 계속 과한 업무에 시달렸고, 늘 잠이 부족했다.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하비의 어깨에 기댄 빅터는 금방 잠이 들었다. 팔짱을 끼고 앉은 채로 새근거리며 자버리는 빅터에게 하비가 황당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벌써?’
그러나 놀람도 잠시, 하비의 밤색 눈이 작게 휘었다.
어깨를 누르고 있는 빅터의 머리가 마차의 진동에 슬슬 떨어지려 해서였다. 반사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준 하비가 아예 조심스럽게 빅터를 눕히고 허벅지로 머리를 받쳤다.
빅터는 한 번도 깨지 않고 그대로 잘 잤다. 금발이 하비의 허벅지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졌고, 높게 오른 코가 마차의 흐름에 따라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팔짱도 풀지 않고 그대로였다. 고른 숨소리와 평화로운 눈매에 평안이 섞여 있었다.
빅터의 사용인들이 알면 기함할 광경이었다. 빅터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있는 앞에서 자지 않았다. 살기 위한 긴장 속에서 자란 시간들은 그를 강인하게도 만들었지만, 사람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다.
하비는 눈을 감고 잠든 빅터를 내려다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정말 피곤했나 보다.
그는 빅터의 반듯한 이마 위로 어지러이 흩어진 금발을 손으로 쓸어서 넘겼다. 미움이 말라 희석되자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건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정말 알파라도 괜찮은 건가.’
빅터를 겨우 믿을 수 있게 되자 다음에 찾아온 건 알파끼리의 교제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었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는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언젠가 빅터는 대를 이을 자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멀쩡한 알파가, 그것도 ‘우성’ 알파가 오메가를 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비가 낮게 실소했다.
‘난 이제 포기하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스터스가를 잇겠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꾸준히 들어오던 혼담도 빅터와의 관계를 공인한 이후로는 뚝 끊겼다. 하비를 지지하는 쪽은 보수파가 대부분이어서, 알파끼리의 관계를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눈치 빠른 귀족들이 스터스가의 부실한 재정 상태를 슬금슬금 알게 되었다. 이제 이런 망해가는 가문에 오겠다는 오메가도 없을뿐더러, 만약 온다고 해도 2세에게 스터스가의 극악한 교육 방침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영광이라 생각했던 스터스가는 오욕으로 얼룩져 있었고, 그 정신조차 무너진 지 오래였다.
사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하비는 이제 다른 누군가를 들이는 것 자체가 망설여졌다. 허벅지에서 달게 자고 있는 이 사람 때문에.
하지만 그와 빅터는 처지가 달랐다. 부흥하고 있는 베르텐가를 위해 빅터가 오메가를 구할 때가 되면 그를 막을 자신도, 구실도 없었다.
이별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하비의 마음속에 불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비는 시선을 들어 창을 보았다. 열어놓은 창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씨다. 선선한 바람도 마차 안으로 시원하게 들어와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음…….”
그때 빅터가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인상을 쓰고는 뒤척이며 하비의 단단한 복부에 이마를 묻었다. 무의식중에 파고든 것 같았다. 하비는 무거운 생각을 금방 떨쳐냈다. 날도 좋은데, 좋은 생각만 하자.
너른 마차 안에서 기분 좋은 향이 났다. 빅터에게서 나오는 걸 보니 그의 페로몬인 모양이었다. 빅터의 페로몬은 거친 풀 향이 났다. 더없이 향긋하고, 의지가 되는 향이었다. 없으면 가끔 불안한 생각마저 드는…….
순간 하비가 머리를 흔들었다. 알파가 같은 알파의 페로몬을 ‘좋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없으면 불안하기까지 하다니.
하비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게 과연 정상인 건지.’
조금 머리를 굴렸을 뿐인데 벌써 피곤이 몰려왔다.
휴가를 내려고 무리한 것은 하비도 마찬가지였다. 소화력도 떨어지고 가끔 위가 심하게 메슥대는 걸 봐서 스트레스성 위염일 것이다.
‘또 졸리는군.’
일정하게 흔들리는 마차의 리듬이 꼭 자장가같이 느껴졌다. 하비는 요즘따라 잠이 너무 늘었다. 앉아서도 졸고, 서서도 가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나마 빅터와 함께 있으면 좀 덜했다.
‘안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잠깐 이래도 되나 생각했지만 하비는 이내 정신을 놓고 까마득한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잘 자던 하비는 꿈 말미에 눈썹을 찌푸렸다.
빅터가 나왔다. 그는 몇 달 전에 하비를 힘들게 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비가 지독하게 내렸다. 하비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빗줄기 아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듯한 붉은 핏물이 하비의 발을 붙잡듯이 발치에 질척하게 고였다.
하비는 꿈속의 시간대가 어느 때인지 알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하비를 덮치던 알파들을 빅터가 모조리 죽였던 그때였다.
빅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잔인한 얼굴로 비를 맞으며 서 있었고, 많이 낯설었다. 꿈속에서 하비는 의지를 잃고 꿈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빅터를 마주 보며 하비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를 짓밟는 게 그렇게……. 그렇게 재미있는 건가.’
하비는 자신을 잃은 것 같았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비의 입술이 또 비통한 말들을 쏟아냈다. 잊고 있었던 끔찍한 감정들이 하비의 가슴을 채찍처럼 휘갈겼다.
‘내가, 하나하나 무너지는 게 그리도 즐거운 거냐고.’
빅터가 비열하게 웃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하비에게 비수로 날아왔다.
‘그러려고 이 수고를 들이고 있는 건데.’
다정한 말을 뱉던 저 입술이 어떻게 저토록 잔악해질 수 있는 건지. 하비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와서 억울해?’
하비는 눈을 번쩍 떴다. 꿈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과거였다. 분명 몇 개월 전만 해도 빅터가 실제로 던지던 말이었고, 지난 일 중 일부였다.
선득한 마음에 하비는 눈을 뜨자마자 빅터를 찾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혹시 꿈이 진실이고, 다정한 빅터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다행히 그는 아직도 하비의 허벅지 위에서 잘 자고 있었다. 빅터를 보는 순간, 하비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듯 안심이 되었다.
꿈속에서 몹시도 차가웠던 빅터가 아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른 숨만 내쉬는 중이었다.
꿈인 걸 알지만, 하비는 괜히 가슴 안쪽이 지끈거렸다.
널 괴롭히기 위해 수고를 들이고 있다고. 지금 와서 당한 것이 억울하냐고 반문하던 빅터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 등이 서늘했다.
빅터의 눈이 움찔하더니 꿈적꿈적 눈꺼풀이 움직였다.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녹색 눈이 제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아 눈빛이 흐릿했다.
빅터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눈으로 물끄러미 하비를 올려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잔 건가?”
그것도 하비의 허벅지에서!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심지어 너무 편안하게 잤기에 할 말이 없었다.
하비는 아까 꾼 꿈 때문인지 어두운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본 빅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러는 거지.
“설마.”
빅터가 진지하게 입을 열수록 하비는 더욱 긴장해서 그의 시선을 따랐다. 빅터의 눈이 하비의 허벅지로 향했는데, 마침 그곳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물론 빅터가 자면서 악몽 때문에 흘린 식은땀이었다.
그걸 모르는 빅터가 아니길 바란다는 듯 암울하게 물었다.
“침 흘리고 잔 건 아니겠지?”
무슨 말을 하나 했다. 심각하게 말하는 빅터를 보니 하비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꿈의 여파로 저조했던 기분이 급격히 상승했다.
빅터는 진지한 사과와 고백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 전과는 달리 진심으로 하비를 위해주고 있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꿈 따위는, 잊어야 할 것이다. 하비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한편, 웃음을 참느라 외면하는 하비를 보며 빅터는 확신했다.
‘제길…….’
아무래도 하비의 허벅지에 스며든 저 둥근 자국이 침일 것이라고.
* * *
뜨겁게 이글대는 햇빛이 환한 시야를 제공했다. 휴가에 걸맞는 맑고 쾌청한 오후였다.
빅터는 마차 안에서 오늘도 악몽을 꿨지만 하비의 페로몬 때문인지 금방 벗어났다. 덕분에 수면의 질도 훌륭했고, 몸이 아주 가뿐한 상태였다. 이렇게 기분도, 몸도, 정신까지 상쾌한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런 제 몸 상태를 설명하면서 밀어붙이는 빅터를, 하비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타박 주었다.
“그래서. 고마움을 이렇게 갚는 건가?”
마차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되어 바깥 구경을 좀 하나 했더니 어느새 이 꼴이다.
하비는 포도밭 초입에 있는 커다란 돌담과 빅터의 큰 체격 사이에 갇혀 있었다. 묘한 꿈 때문에 식었던 하비의 등이 돌담의 열기로 금세 뜨끈해졌다.
빅터의 금발이 사락사락 하비의 뺨에 닿았다. 예민한 귓가를 물기도 했다. 장난치듯 낮은 목소리로 빅터가 속삭였다.
“내 식으로 갚는 거지.”
빅터를 무시한 하비가 눈짓으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푸릇한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최상급 포도가 재배되어 특등급 와인을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말은 안 했어도 하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로방스 지역의 포도밭은 또 언제 사둔 건지.’
대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전쟁이라 알려진 어느 국가 간 전쟁도, 알고 보면 질 좋은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떠도는 판국이었다.
어쨌든 이런 곳에서 일을 치를 수는 없었다.
그때 어딜 보냐는 것처럼 빅터의 손이 하비의 턱을 당겼다. 강렬한 녹안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빅터가 여러 번의 키스로 조금 부어오른 하비의 입술을 보며 말했다.
“내키지 않는 것 같은데.”
그새 다가와 가슴을 지분대는 손길에 하비가 굳은 얼굴로 지적했다. 이 와중에도 하비의 몸은 충실히 빅터의 손길에 반응하여 뜨거워지고 있었다.
“당연하지. 여긴 야외니까. 다 트인 데다 한낮이지.”
저 멀리 바다처럼 펼쳐진 거대한 강도 보였다. 대형 화물 마차를 위한 길도 포도밭 사이를 가로질렀다.
빅터가 하비의 턱에 입술을 미끄러뜨리듯 내리고는 턱 끝을 잘근잘근 물듯이 핥았다. 하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향하고, 드러난 목젖이 일렁였다. 눈이 햇살에 노출되어 하비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밀어내면 끝인데, 신체는 이미 취한 것처럼 빅터의 애무에 흐늘거렸다. 눈을 감으니 조목조목 반박하는 빅터의 저음만 들렸다.
“야외고 다 트인 곳이지만 내 사유지야. 주변에 민가도 없고, 이곳에서 사는 사용인들은 다 물렸어. 한낮인 건 조금 문제가 되는군.”
잠시 고개를 뒤로 물린 빅터가 하비를 가만히 눈에 담더니, 정말로 곤란한 것처럼 눈가를 찡그렸다.
“너무 잘 보여서 곤란해.”
색욕 가득한 우성 알파의 목소리에 하비는 오늘 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상했다.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하비의 걱정은 점점 현실이 되었다. 아래에서 뜨겁게 찌르는 것이 커지고 있었다.
빅터가 중얼거리며 하비의 갈색 슬래시를 밀어 올렸다. 그러곤 슬래시 사이로 드러난 하얀 속옷을 탐스럽게 보았다.
“이런 날씨에 밖에서 뒹구는 것도 꽤 좋은걸.”
시원한 바람이 푸른 포도밭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더운 햇살도 바람에 밀려 날아가는 듯했다.
빅터는 바람에 섞인 하비의 아찔한 페로몬에 취했다. 그가 몽롱한 눈으로 하얀 속옷 위로 빳빳하게 솟은 하비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희롱했다. 이미 꼿꼿하게 선 유륜은 흰색 속옷 탓에 밑에서 야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비가 가슴에서 짜릿하게 밀려오는 쾌감에 이를 물었다. 하지만 신음은 숨겨지지 않고 새어 나갔다.
“읏…….”
빅터는 은은하게 나는 하비의 살 내음에 미칠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몰두하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하비를 추락시키고 난 후에는 이 느낌을 계속 그리워할 것 같았다.
‘그런 날이 정말 올까…….’
심란해하는 빅터를 앞에 두고, 하비도 심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오메가가 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빅터의 페로몬에 휩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등 뒤를 받치고 있는 돌담에 자꾸만 허리가 닿고, 아래에도 뜨겁게 열기가 몰리기 시작했다.
키스할 것처럼 두 사람의 입술이 거의 맞닿았을 때, 멀리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흠!”
놀란 하비는 빅터를 거세게 밀쳐냈다. 빅터의 손길에 위로 한껏 말려 올라갔던 하비의 슬래시가 커튼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실례합니다만.”
진이 마차를 놓고 돌아온 것이다. 그는 오늘의 유일한 사용인이었다. 진은 용건만 전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바로 뒤돌아섰다.
“점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아, 고맙네.”
하비는 못마땅해하는 빅터를 내버려 두고 진의 뒤를 쫓았다. 빠르게 걷는 하비의 얼굴 위로 민망함이 떠올라 있었다.
포도밭 옆에 질 좋은 포도밭에서 바로 숙성시킨 고급스러운 특급의 포도주와 칠면조, 해산물 요리, 바다를 건너온 이국적인 음식들이 즐비해 있었다.
하비의 시선이 난감하게 음식 몇 개를 지목했다.
“이건……. 못 먹겠는데.”
모든 음식을 다 잘 먹던 하비였다. 그런데 요즘은 유독 비린내가 심한 것들에 손대지를 못했다. 결국 해산물은 전부 테이블에서 치워졌다. 하비가 미안한 얼굴로 진에게 말했다.
“열심히 준비한 것일 텐데, 미안하게 됐어.”
진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릇을 치웠다. 진의 뺨에 난 작은 흉터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상관없습니다. 남은 건 제가 먹을 테니까요. 참고로 전 해산물을 정말 좋아합니다.”
없어서 못 먹는다며 장난스럽게 덧붙인 진이 나갔다.
빅터가 은식기를 들어 올리며 남은 해산물이 더 없나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속이 계속 안 좋다더니, 아직도 그런가?”
“가끔. 이제 괜찮은 것 같으니 더 골라낼 필요 없어.”
괜찮다고 말리는데도 빅터는 아랑곳 않았다. 그는 팔까지 걷어붙이며 열정적으로 뒤적거렸다.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잖아.”
진심으로 걱정하며 남은 해산물마저 다 골라내는 빅터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하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생각해 버렸다.
‘아마 이후에 맞을 오메가 부인에게도 잘할 테지.’
생각한 순간 하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큰일 났군.’
빅터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주어야 한다는 가정만으로도 이토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르는 사이 마음이 이렇게까지 커져 버렸다.
알파에게는 오메가, 오메가에게는 알파. 이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수순이다.
‘오메가라…….’
더는 비린내가 나지 않는데도 한숨만 나오고, 아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식욕이 사라져 버린 하비가 포도주로 입을 헹구는데, 건너편에서 보고 있던 빅터가 수저를 놓았다.
“또 입맛이 없나?”
“천천히 먹으려고. 먼저 들고 있어.”
하비의 속도 모르고 빅터는 진의 음식 솜씨가 전보다 줄었느니 하며 속상해했다. 과장이 아니라, 빅터는 정말로 속상했다.
‘왜 이렇게 못 먹는 거지?’
누군가가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는 일로 화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하비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자신을 억누르고 있지 않은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빅터를 눈치챈 하비가 한숨을 쉬며 그를 편하게 해주려 했다.
“음식은 훌륭해. 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라, 이해해 줘.”
“의사라도 불러줘? 아, 아니다. 명의라고 불러놨더니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던데 도움도 안 되겠군.”
심장의 각인이라는 둥, 이상한 소리만 해대던 명의가 떠오르자 빅터는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반대로, 하비의 얼굴에는 환희가 떠올랐다. 그 방법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아예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상이 아니야.’
드디어 속 어딘가가 고장 난 것은 아닌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하비의 머릿속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어떤 발상’이 쉬이 떠나지 않았다.
고민하던 하비가 은근슬쩍 떠보듯 빅터에게 물었다.
“의사 하니까 떠오른 건데, 그 사람은 잘 지내나?”
“누구?”
“체질을 바꾸는 특이한 약을 개발했다던, 그 의사.”
“아…….”
빅터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이제 더 이상 하비와 이런 화제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 의사가 끼면 하비와의 불편한 과거가 당연한 듯 떠올랐다. 하비를 죽일 것처럼 괴롭히던 지난 일들이 빅터의 가슴을 찔렀다.
물론 지금은 더 큰 상처를 주기 위해 몇 달 동안 공을 들이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계속 썩 내키지 않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안 되지. 안 돼.’
생각이 얼굴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얼른 표정을 고친 빅터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멀리 휴가라도 간 모양이던데. 나도 연락이 닿지 않아. 그런데 그놈은 왜?”
하비는 입맛이 조금 돌아 칠면조 고기를 먹기 좋게 잘랐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별 뜻 없었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우울해 보이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하비를 빅터가 수상한 듯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 * *
식사 이후에는 바다같이 너른 강에서 선선히 물놀이를 즐겼다. 배를 타고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푸른 물결이 잔잔한 강 위를 유랑했다.
진이 노를 저었고, 두 사람은 서서 반짝거리는 물결을 감상했다.
신기한 듯 수면 위로 비치는 거대한 물고기를 바라보던 하비는 웃음기 머금은 빅터의 경고에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악어가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조심하고. 코를 물릴지도 몰라.”
그런 걸 왜 이제 말하냐는 눈빛을 보내며 하비가 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걱정 마. 팔이나 다리를 잃더라도 반드시 구해줄 테니까.”
빅터가 무심하게 말했다.
“상어와도 싸워봤는데, 악어 정도야.”
놀란 건 하비였다.
“상어?”
“해적 놈들이 상어 우리에 차서 집어넣은 적이 있었거든. 작살도 하나 주긴 했지만.”
도대체 빅터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건가. 하비는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졌다.
“……용케 살아남았군.”
“조금만 더 늦었어도 까딱 죽을 뻔했지. 먼저 눈을 찌르고 안심했는데, 입을 꿰뚫기 직전에 놈이 발작을 해서.”
빅터가 팔을 보여주었다. 전신을 덮은 흉터 중에 유독 길게 난 상처가 보였다. 상어에게 물렸던 흔적이었다. 다행히 깊게 물린 것이 아니라 스친 수준이었는데도 이 정도였다.
“신경이 끊어진 줄 알았는데 유능한 의사가 고쳐줬어.”
상어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먹잇감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눈 공격은 크게 소용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며 빅터가 멋쩍게 덧붙였다.
그러다 들린 하비의 사과에 빅터가 멈칫했다.
“미안하다.”
하비가 씁쓸하게 말했다. 빅터처럼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지만, 정말로 상어 밥이 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비는 다시 한번 마음이 알싸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빅터는 굳은 얼굴로 하비의 사과를 거절했다. 이러려고 과거 일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었다. 하비가 이런 일로 상심하는 걸 보는 것도 싫었다.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날 상어 우리로 밀어 넣은 건 해적 놈들이지, 경이 아니야. 괜한 일로 사과하지 마. 사과받은 쪽도 찜찜해지니까.”
빅터 스스로 말해놓고 왜 이렇게까지 말해주는 건지 회의감이 들 무렵이었다. 밝게 웃는 하비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싹 개운해졌다. 풀어진 얼굴을 보니 빅터도 괜히 들떴다. 역시, 말해주길 잘한 것 같다.
그때 커다란 물새 몇 마리가 날아와 빅터의 손에 달라붙었다. 물고기에게 주려고 쥐었던 먹이를 빼앗으려 달려든 것이다.
새들이 날카로운 부리로 손가락 사이를 쿡쿡 쑤시자 빅터가 인상을 쓰면서 말 못 하는 새들에게 타박을 주었다.
“이 녀석들이.”
혀를 차면서도 빅터는 물새들을 쫓아 보내지 않고 손을 펴서 먹이를 나누어 주었다. 구시렁대면서도 사용인에게 친근한 빅터의 평소의 모습과도 같았다.
첨벙!
커다란 주홍빛 물고기 한 마리가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배가 잔잔하게 흔들리고, 물 위로 반사되는 환한 빛이 빅터의 얼굴에 닿아 산산이 부서졌다. 금발과 한낮의 태양빛은 너무 잘 어울렸다.
하비는 또 심장이 널뛰었다. 하비는 물끄러미 빅터의 옆얼굴을 보았다. 어느새 진이 함께 있다는 것도 잊었다. 수면이 흔들릴 때마다 하비의 시선도 흔들렸다.
마음이, 미약하게 고동치는 심장과 함께 수런수런 들떴다가 가라앉았다. 오롯이 눈앞의 이 사람 때문에.
너무 빤히 보고 있었는지 먹이를 다 나누어 주고 손을 탈탈 털던 빅터가 하비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새 부리에 쪼여 손에서 피도 조금 나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왜? 할 말 있나?”
“……아무것도 아니야.”
빅터가 피식 웃으며 피가 나오다가 만 손등을 소탈하게 옷에 문질렀다.
“싱겁긴.”
그런 뒤에도 하비의 눈은 한참이나 빅터에게 머물렀다. 아까 전 마차에서 꾸었던 과거의 잔인한 빅터를 지워내기라도 하듯이.
뱃놀이를 파한 뒤 두 사람은 진이 미리 준비해 둔 말로 실컷 포도밭 사이를 달리기도 하고, 저녁 거리를 위한 짐승 사냥도 했다.
빅터가 워낙 총을 잘 쏘아서 사슴 한 마리와 토끼 두어 마리, 큰 새 두 마리가 금방 잡혔다. 식사로는 충분한 양이라 두 사람은 금세 사냥을 중지했다.
따라온 진이 짐승들을 화물용 마차에 싣는 동안 하비가 감탄 어린 말을 던졌다.
“검은 잘 못 쓰더니 사격 솜씨는 좋군.”
빅터가 으스대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당연하지. 내 전공은 검이 아니라 총이라고.”
“이제 검도 잘 쓰게 되었으니 둘 다 수준급이겠는걸.”
“아아. 누구 덕분에.”
원망도 얼핏 섞인 빅터의 말투에 하비가 웃었다. 그때 빅터의 흑마가 묘한 소리를 내더니 하비의 말에 가까이 붙었다. 빅터의 말은 애정 어린 고갯짓으로 하비의 말 갈기에 머리를 묻었다.
푸르릉!
하비의 말에게 행하는 친근한 애정 표시에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보았다. 그러더니 씨익 악동처럼 웃었다.
“말 따위에게 질 수 없지.”
말고삐를 한 손으로 당기더니 빅터가 반대편 손으로 하비의 상체를 잡아당겼다.
“뭐…….”
하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빅터의 입술이 맞닿았다.
말 위에서 갑자기 끌어당겨진지라 반동 때문에 키스도 거칠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금 어긋났던 입술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점차 질척하게 혀가 얽혀들었다.
히힝!
하비의 말도 수줍은 듯 소리를 내더니 빅터의 말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덕분에 빅터의 손은 하비의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은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빅터의 입술이 잡아먹을 것처럼 하비의 입술을 덮고 달려들었다.
늘 망설이기만 하던 하비도 적극적으로 빅터의 팔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고는 적극적으로 입을 벌리고 혀를 얽었다. 놀란 듯하던 빅터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틀었다. 코가 부딪치던 것도 빅터가 고개를 틀면서 부대낌이 줄었다.
입술이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키스가 진해졌다. 말고삐를 쥔 하비의 한 손에 힘이 들어가고, 둘은 돌담 앞에서 다 하지 못했던 키스를 마저 이어나갔다.
“허어.”
멀리서 화물 마차에 짐승들을 단단히 고정시키던 진이 그 광경을 흘끗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빠져나갔다. 진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좋은 분위기가 계속되길 바라면서.
* * *
저녁 식사는 하비가 꽤 잘 먹어서 흐뭇한 빅터의 미소와 함께 끝이 났다.
씻고 너른 침대에 누우려던 빅터는 생각을 바꾸어 하비와 함께 야외로 나갔다.
‘이곳 야경이 끝내주니까.’
이대로 보내기엔 아까웠다.
어두컴컴해진 밤이었다. 낮에 불던 바람은 더욱 시원해져서 이제 한기마저 머금었다. 낮에 보던 풍광과는 사뭇 달랐다.
곳곳에 불이 켜진 포도밭에서 바람 때문에 잎들이 부딪쳐 나는 선선한 소리가 나고, 초승달이 뜬 밤하늘엔 은하수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별 무리가 근처의 바다 같은 강처럼 교교하게 흘러갔다.
눈을 굴려 전체적인 풍광을 담은 하비가 솔직한 소감을 말했다.
“생각한 것보단 괜찮은데.”
빅터는 김빠진 얼굴로 투덜댔다.
“이왕이면 그냥 좋다고 해줘.”
풀 위에 길게 깔아놓은 자리에 누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토록 평화로운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바쁘기만 했던 일상에서 이럴 일은 극도로 드물었다.
하비는 머리를 자리에 댄 채 반듯하게 누웠고, 그에 반해 빅터는 대충 한량처럼 누워 한 팔로 머리를 받쳤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하비가 불쑥 말했다.
“경의 페로몬 말인데.”
“응?”
“지금은 잘 나지 않는군.”
빅터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지?”
“풀 향과 닮았거든. 지금은 풀이 많아서인지 섞여서 잘 나지 않아.”
빅터는 어색하게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만졌다.
“그래? 난 내 페로몬에 대해 잘 몰라. 다른 사람한테 물어본 적도 없고.”
잠시 생각하던 빅터가 하비의 페로몬에 대해 답례처럼 이야기해 주었다.
“시원한 물 향.”
이번엔 하비가 빅터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뭐?”
“그게 경의 페로몬이라고.”
어쨌든 서로의 페로몬이 역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페로몬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는 것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페로몬이 후각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불쾌한 페로몬일까 봐 내심 걱정했던 것이다.
‘나는 아니었는데.’
‘난 아니었지만.’
동시에 생각하던 빅터와 하비는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각자 서로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
빅터는 하비의 말간 얼굴을 뚫어질 듯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경부터.”
하비는 멋쩍으면서도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좋은 곳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이런 여유를 가져본 게 얼마만인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빅터가 충고했다.
“그러니까 이젠 즐기고 살아. 일에 매여 살아봐야 남는 게 뭐 있어.”
이번엔 하비가 빅터를 물끄러미 보았다. 각종 클럽에서도 활발하게 활약하는 빅터에 반해 하비는 적정선까지만 활동했다. 필요한 만큼만 해낼 뿐이었다. 대외 활동을 빠짐없이 소화하는 빅터를 떠올리며 하비가 혀를 내둘렀다.
“전부터 말했지만, 그게 나한테 할 소린가? 경이 더 심해.”
빅터가 피식 웃더니 별들이 무수히 박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바른 길을 나아간 지도자들이 오른다는 별의 전당. 이미 자신은 저곳에 오르기는 글렀다. 옳지 않은 피를 너무 많이 묻혔고, 손은 이미 더럽혀졌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죽은 후의 일 따위, 어차피 알지도 못하니까.
빅터가 한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손바닥을 빤히 보았다. 피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하비 때문에 잡았던 검이 만든 굳은살만 잔뜩 박여 있었다.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난 너와 일하는 목적이 달라.”
하비 같은 성실한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꼬박꼬박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가며 대화하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너’에 하비는 움찔했다. 예전에 빅터에게 한창 괴롭힘당할 때나 듣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비는 그에 대해 별말 않은 채 미간을 조이며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
“일하는 목적?”
“그래. 따로 있지. 그걸 위해서 돌아왔으니까.”
얼결에 진심이 묻어 나왔다. 빅터의 목소리에 희미한 경멸이 배어 나왔고, 하비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뭘 위해서?”
빅터는 대답을 선뜻 하지 못했다. 하비의 눈을 피해 다시 하늘을 보았고, 지켜보던 하비도 더 묻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짧게 흘렀다.
하비의 눈이 슬쩍 빅터에게 닿았다. 목에 붙은 셔츠를 붙잡아 펴는 빅터의 손이 답답해 보였다. 이 좁은 곳은 그와 맞지 않아 보였다. 올란시도, 어쩌면 이 남자에게는 작을지도 모른다. 평생 이곳에 뼈를 묻을 생각만 해왔던 하비로서는 걸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하비는 빅터가 언제든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바람처럼 보였다.
싸한 밤바람이 포도밭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서로 부딪치는 포도 잎사귀 소리가 서늘했다.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목적이 끝나면…… 경은 어떻게 되는 거지?”
빅터가 눈을 감은 채 답했다.
“글쎄. 아직 생각 중이야.”
하비의 눈이 어두워졌다. 작은 불안이 그의 마음속에서 술렁거렸다.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인가?”
빅터는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하비를 보았다. 속내를 정확히 짚였다. 하마터면 어떻게 알았냐고 반문할 뻔했다.
모든 것을 끝내고 나면, 홀가분하게 이 도시를 버리고 상업적 기반을 쌓아둔 다른 나라에 갈 예정이었다. 최초의 계획은, 그랬다.
빅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하비는 보지 못할 밤바람만큼이나 서늘한 눈빛이 스쳤다. 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엔 다정함만이 남았다.
“설마.”
하비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빅터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올란시의 의원이고, 가주 대리야. 그리고 하는 일이 끝나더라도 또 다른 자리가 있지.”
그가 하비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살살 쓸었다. 이 반듯한 남자는 눈썹까지 가지런했다. 기분 좋은 얼굴로 빅터의 손길을 받던 하비가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자리? 하는 게 더 있었나?”
말 대신 지긋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어떤 의미인지, 하비는 금방 깨달았다. 턱 끝부터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하비가 말뜻을 알아차리자 맞닿아오던 녹색 눈동자가 휘었다.
“이제 알겠어? 떠날 이유가 없다고.”
이곳엔 네가 있으니까. 빅터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빅터의 등 뒤에 걸린 달이 너무 밝았다. 고작 초승달인데도.
하비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크게 부풀었다. 이것은 희망이다. 잘못 말하면 한계까지 부풀어 버린 그것이 훌쩍 떠나가기라도 할까 봐 하비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내가, 경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될 수 있는 건가.”
하비의 눈가에서 이마로 진출한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빅터의 가슴이 또 거세게 조여들었다. 그 순진한 물음에 이상할 정도로 온몸이 저릿해졌다.
하비가 눈치채기 전에 빅터의 손가락은 다시 부드럽게 이마를 우회했다. 그 손길에 애틋함이 더해졌다. 빅터가 목소리를 더욱 은밀히 낮추며 하비와 점점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게 아니면 왜 여기까지 와서 같은 알파를 붙들고 있겠어.”
빅터의 주변에 널린 것이 어떻게든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오메가 귀족들이다. 그들을 떠올리며 하비는 묘한 승리감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오메가를 상대로 질투를 하다니, 최악이군.’
이런 추잡한 생각을 할 수가. 하비는 믿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이 생겨났다. 그건 작은 악마처럼 가슴의 빈틈을 비집고 올라와 빅터를 혼자 차지하라고 외쳤다.
‘무엇으로?’
하비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빅터의 코가 거의 닿을 정도로 근접했다.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닿았다. 얼굴을 만지던 손은 언제 떠나갔을까. 간질거리던 숨소리가 어느 순간 뜨거워졌다. 빅터의 녹색 안광이 흥분으로 번들댔다.
“지금도 안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낮게 속삭이던 빅터가 다음 순간 밑으로 훅 떨어졌다.
빅터의 눈이 커졌다. 하비의 한 손이 그의 뺨을 잡아당긴 것이다. 이미 굳은살을 넘어 세월 속에서 딱딱해진 거친 하비의 손바닥이 빅터의 뺨을 쓸었다. 한 치의 머뭇댐 없이 입술로 혀가 파고들었다. 뜨거움이 한데 얽혀서 야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체중이 기울어 빅터는 저도 모르게 한 팔로 땅을 짚었다. 귓가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스쳐 지나가고, 초승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 사위가 캄캄해졌다.
빅터의 머리에 경종이 울렸다. 처음으로 하비가 먼저 키스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빅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 ‘그때’다. 빅터는 늙은 해적에게 호언장담했던 자신의 목소리가 선선히 떠올랐다.
‘내 칼은 충분히 날카롭고, 그 사람 심장에 박을 적시만 찾고 있어. 곧 때가 올 거야.’
‘스터스 경이 날 가장 믿을 때 꽂아줘야지.’
서툴지만 꽤 직설적으로 쏟아지는 키스는 하비의 성품과도 닮았다. 입술을 비스듬히 맞대면서 빅터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 기나긴 키스가 끝나고 나면, 잔인하게 말하는 거다. 이 모든 건 다 쇼였고, 널 무너뜨리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그간 했던 달콤한 말들은 전부 기만이었고, 사실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충격으로 일그러질 밤색 눈이 선명했다.
쿵, 쿵, 쿵.
빅터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과거의 임페르 해적선에 갇혀 있던 작은 아이가 복수의 말을 뱉었다.
-오늘은 하비 스터스를 추락시키기에 최고의 날이야. 그는 끔찍한 라힌 스터스의 분신이잖아. 내가 아팠던 만큼 아프게 해줘. 내가 지옥에 있는 동안 혼자만 잘살았던, 저 단단한 심장을 부숴 버려.
오랫동안 곱씹어왔던 염원이었다. 그 오랜 한이 이끄는 대로 빅터는 말하려 했다.
그때, 하비가 입을 떼고 빅터의 가슴팍을 조금 밀어냈다. 얼결에 떠밀린 빅터가 상기된 하비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동안 하비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빅터의 낯에 복잡한 속내가 드러나 있었다. 그걸 보자 하비는 반대로 조금 머리가 정리되었다.
스터스가 사람들은 혹독한 교육으로 일찍이 욕망을 거세당한다. 그리하여 오로지 스터스에 알맞은 사람으로 남게 된다.
하비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차라리 이런 건 영영 거세당한 채로 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욕망은, 상대의 꿈까지 묶어버리니까.
하비는 앉아서 잔열을 가라앉힌 뒤 빅터와 마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목적한 걸 이루면, 하고 싶었던 걸 해.”
“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빅터는 허겁지겁 하비의 표정을 읽었다. 희미하게 별장에서 나오는 불빛을 붙들고 살폈지만 애써 말하는 흔적조차 없이 말끔했다.
설마, 속내를 알아차린 건가. 그리 단언하기에는 석연찮았다. 빅터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하비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도 차분했다.
“대신 그 전에는……. 나와 어울려 주겠어?”
하비는 그 말을 웃으면서 했다. 날카로운 것이 심장을 찢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참았다.
“무슨 말을 하는……!”
말을 하다 말고 우연히 밑을 내려다본 빅터는 그제야 알았다. 하비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손톱이 바닥을 두껍게 깐 털 러그를 꽉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인내하고 있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자신을 사랑한다. 빅터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구속하지 않고 오롯이 상대가 바라는 대로 살도록 놓아준다.
“넌 어떻게…….”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빅터가 간신히 쥐어짜듯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없나? 그건 어떻게 되는 건데?”
분명 키스할 때까지만 해도 하비는 그와 같은 욕망에 들끓는 눈이었다. 옆에 있어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미련이 사라지고 선선함만 남았다.
하비가 답했다.
“내가 아는 건, 바람은 바람으로 둬야 한다는 거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희망도 여전히 제자리에 두었다. 다만 꺼내지 않았을 뿐.
하비는 아까 빅터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금빛 눈썹을, 이마를 덧그렸다.
하비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강인한 눈빛이었다.
“욕심내서 그걸 억지로 붙잡아두면, 그건 더 이상 바람이 아니게 되니까.”
빅터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로선 감당하기 벅찰 만큼의 무한한 신뢰였다. 무거운 진심이 또 한번 그를 옥죄었다.
이 정도의 신뢰와 애정을 어디서 받아보았을까.
‘한 번도 없었지.’
가족도 그를 버렸다. 빅터의 부모님도 결국 할아버지인 레토 베르텐에게 안락한 생활을 박탈당할까 봐 자식을 포기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성공하고 나서는 그의 재력과 힘, 혹은 잘생긴 몸을 갈망한 자들만 나방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하비는 아니었다. 선심으로 돈을 줘도 거부하고, 원하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없었다.
빅터는 벼락같이 깨달았다.
하비 스터스가 사라지면, 자신은 혼자가 된다.
사심 없이 그를 아껴주던 유일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싫든 좋든 고목처럼 얽힌 과거의 흔적도 모조리.
구름 뒤에 가렸던 초승달이 서서히 나왔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빛이 흩뿌려지고 하비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빅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한기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심장이 다시 조이듯이 아파왔다.
방금 내가 뭘 하려고 했지.
이런 사람에게, 케케묵은 녹슨 칼을 꽂으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은 억누르고 상대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이런 다정한 사람에게 말이다. 그에게 온전한 애정을 쏟아주고 있는 사람인데, 뭘 그리 차곡차곡 그가 서 있는 발판을 없앨 궁리나 하고 있었는지.
자각하고 나니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급기야 입을 틀어막은 빅터에게 하비가 놀라 물었다.
“왜 그러지?”
“하…….”
입에서 손을 뗀 빅터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벌써 다 잊은 건가?”
방금 전까지도 널 배신하려 했다. 까딱하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갈 뻔했다.
빅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어떤 식으로 괴롭히고, 힘들게 했는지.”
그런 사람을 너는 어떻게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빅터를, 하비는 말없이 끌어안았다. 움찔하는 것도 잠시, 빅터는 금세 얌전해졌다.
빅터는 해적에 납치되기 전, 하비 앞에서 쓰러지는 시늉을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도 어린 하비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꼭 안아주었다. 치기 어린 장난 따위에도 그토록 진지하게 성심을 보였다.
하비가 그를 끌어안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잊은 건 아니야. 가끔 생각하면 화가 날 때도 있고.”
“그런데 왜?”
“어쩌겠어.”
하비의 고백이 쑥스러운 듯 천천히 이어졌다.
“이미 좋아하게 됐는데.”
하비의 단단한 팔에 열이 오르고, 불안해 보이는 빅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빅터의 속에서 고집처럼 남아 있던 마지막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임페르 해적단의 깃발도 꺾여서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스터스가에 대한 적의로만 살던 그 독기 품은 어린 소년까지.
그 자리를 뜨겁게 메우는 건 다름 아닌 ‘후회’였다.
빅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코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최후의 마지노선에 닿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인정하기 싫었다. 자신이 저지른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뜨거운 것이 빅터의 가슴속에서 왈칵 치솟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하비의 등을 마주 껴안았다.
왜 몰랐을까. 하비가 없으면 곤란해지는 건, 오히려 빅터 자신이었다.
하비가 빅터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그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래도 경이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서는 아직 미안하게 생각해. 이곳이 싫겠지. 다 끝날 때까지만, 조금만 참아.”
하비는 빅터가 어떤 목적이 있어 돌아왔다는 걸 알았고, 그 일이 끝나면 원래 떠날 생각이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보내주기로 했다.
빅터는 올란시에 끔찍한 기억과 분노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한편, 빅터는 하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겪어야 했던 일…….’
거친 해적 안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하비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서였다.
그건 단순히 증오가 아니었다. 언젠가 하비를 꾀면서 빅터 자신이 가볍게 뱉은 말처럼 애정에 기반한 것임을, 이제 알고 말았다.
너무 뒤늦은 이날에.
빅터는 으득 이를 갈았다.
미칠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하비를 다시 만났던 그 첫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의 미래와, 현재뿐이었다.
빅터는 하비의 뺨에 키스하며 제 표정을 숨겼다.
“나중에, 제대로 되돌려 줄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줘.”
먼 출장을 다녀오는 동안 혼란스러움을 정리할 짬이 날 것이다. 빅터는 그리하기로 결정했다. 해적의 잔당과 모든 것을 청산하면서, 하비와 얽혔던 왜곡된 감정까지 정리하고 올 작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비에게 했던 짓으로 스스로 고통받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 눈이 어두워 저지른 본인의 탓이니까.
빅터는 하비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러곤 잠긴 목소리로, 하지만 장난기를 가득 담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 전에, 나와 어울려 주겠어?”
하비의 밤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맑게 웃음 지었다.
그 뒤로 언제 옷이 벗겨졌는지, 혹은 스스로 벗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길게 누워 한데 엉겨 키스하는 사이, 빅터는 자연스럽게 하비의 뒷구멍을 손가락으로 조금씩 쑤셨다. 잘 잡힌 근육 때문에 봉긋하게 솟아 있는 하비의 어깨가 떨렸다.
“흐으…….”
하비가 낮은 신음을 내며 움찔거렸다. 키스를 하던 중 소리를 내느라 잠깐 벌어진 틈에 성긴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반응을 즐기며 빅터가 다시 한번 메마른 구멍 안을 들쑤시려 할 때였다.
이상한 게 있었다. 빅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젖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예전처럼 비웃는 게 아닌,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목소리였다. 흥건하지는 않았지만, 하비의 안은 이미 충분히 젖어 뻑뻑하지 않았다. 빅터는 진이 미리 준비해 둔 바구니 속을 훑었다. 저 안에 얼핏 향료도 보였는데 쓸 일이 없어졌다.
‘눈치 빠른 놈.’
잠깐 머리 좋은 자신의 사용인을 칭찬하던 빅터는 별것 아닌 것으로 넘겼다. 알파끼리라도 관계를 오래 지속하다 보면 몸이 적응을 해서 약간의 분비물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을 얼핏 들었기 때문이었다.
빅터가 집게처럼 만든 손으로 유륜을 비틀고 꼬집어 올릴 때마다 하비는 어쩔 줄 모르고 부르르 떨었다. 어릴 때부터 검으로 단련된 단단한 허벅지와 허리가 잘게 떨리면서도 차근차근 열이 올랐다.
빅터는 하비가 뱉는 신음에 아픔이 섞이진 않았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눈으로 연신 하비의 얼굴을 살피기도 했다.
빅터의 긴 손가락이 하비의 뒤를 마음껏 유린했다. 벌써 음란하게 젖은 소리가 났다.
찌걱찌걱!
흥분한 하비의 눈도, 뒤도 충분히 젖은 것을 확인하자 빅터가 상체를 일으켰다. 편한 자세로 해줄 생각이었다.
하비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리면서 빅터는 짐승처럼 다리 안쪽을 길게 핥았다. 기분 좋은 체향이 났다. 녹색 눈이 가늘게 늘어나며 유혹하듯 휘었다.
하비의 얼굴에 대번에 화르륵 불길이 붙었다. 야외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하지만 부끄러운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잠깐.”
빅터의 애무로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하비가 같이 몸을 일으켰다. 빅터는 얼결에 잡았던 하비의 허벅지를 놓아주었다.
“이번엔 오래 나가잖아.”
“그래서?”
얼떨떨하게 되묻는 빅터의 가슴팍을 하비가 밀었다. 맨살에 닿은 하비의 까슬한 손바닥에 오한이 들어 빅터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누웠다. 오늘 밤은 하비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해줄 생각이었는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밤하늘 위 샛노란 초승달이 빅터의 눈에 담겼다.
붉게 타는 것 같은 귓불을 보이면서 하비가 빅터 위로 올라갔다. 양팔을 짚고 아래를 본 하비는 민망한 듯했지만 꿋꿋하게 말했다.
“저번에 이런 자세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아서.”
빅터가 물끄러미 하비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의 역광이 그늘져 하비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심장 부근을 도려내는 것처럼 쓰라렸다.
‘경과 내가 그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의원실에서 볼멘소리로 했던 그 작은 투덜거림을 여태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그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는데.’
하비는 빅터가 했던 말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 있었다. 스쳐 가듯 뱉은 말까지. 지금까지 쌓은 시간 동안 하비와 공유했던 것들이 빅터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제 슬슬 두렵기 시작했다. 이런 자를 속여왔던 것에 대한 대가는 얼마나 클지.
이제 와서 널 벼랑으로 밀 생각이었고, 달콤한 말들로 속여왔다는 건 절대 말할 수가 없었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다.
말이 없는 빅터를 보며 하비가 슬쩍 무안한 얼굴을 했다.
‘역시 너무 갔나.’
언젠가 빅터와 격의 없이 나누었던 대화 중에 체위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하비는 질겁하며 입에 담기도 싫어했지만, 빅터가 그런 하비를 놀리듯 좋아하는 체위를 줄줄 읊은 것이다.
그게 생각나서 없는 용기도 짜내어서 행동해 본 건데, 반응이 없으니 부끄러움이 두 배가 되었다. 아까 전부터 묘하게 말수가 적어지고 어두워진 빅터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는데, 안 하던 행동이라 역시.
“……싫은 건가?”
놀란 빅터가 일어나려는 하비를 황급히 붙들었다.
“아니. 너무 좋아서 그런 거였어.”
“혹시 무거울 것 같아서 그런 거면 안 하는 걸로…….”
빅터는 냉큼 말허리를 잘랐다.
“전혀. 내 몸을 봐. 이 정돈 괜찮아.”
상처투성이지만 두툼하고 하비보다 전체적으로 큰 체격이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났다. 몸 곳곳에 찔린 상처나 날카로운 것에 벤 것 같은 흉터가 자잘하게 보였다. 하비는 저도 모르게 흉터에 눈길을 빼앗겼다. 빅터가 눈치채고는 손으로 큰 흉터 부위를 가렸다.
“몸의 상처를 보라는 건 아니었고.”
겨우 눈을 떼어낸 하비가 말했다.
“정말이지?”
“하여간 의심 많다니까.”
빅터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비를 끌어당겨 배 위로 올렸다.
묵직한 근육이 느껴졌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빅터의 장담대로 그는 하비보다 체격이 좋았고, 우성 알파 특유의 강철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어지러움조차 느끼지 않는 몸이었으니까. 하비가 작정하고 휘두른 검술만 예외였다.
“됐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어.”
미심쩍게 보던 하비도 인정했다. 보통 체격 좋은 성인 남자가 배 위로 올라가면 짧게 헛숨이라도 내쉬어야 할 텐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빅터가 자신의 배 위에서 발기한 하비의 성기를 보며 기분 좋은 듯 말했다.
“벌써 흥분한 거야?”
하비는 빅터의 웃는 얼굴을 외면하며 뒤를 보았다. 엉덩이를 찌르는 존재감을 느끼니 조금 후회가 들었다.
‘괜한 짓을 한 건가.’
이건, 커도 너무 컸다. 바로 넣을 수 있을까. 지금 와서 돌이킬 수 없음을 알기에 하비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조용히 반박할 뿐이었다.
“그건 경도 마찬가지 같은데.”
피식 웃은 빅터가 흥분이 섞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넣어봐. 다치지 않게.”
이걸 직접 넣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 하비는 몽둥이같이 굵고 비현실적으로 큰 빅터의 성기를 손으로 잡았다. 한 손에 잡기 버거울 정도로 크고 굉장히 뜨거웠다. 손바닥에 맺힌 땀 때문에 자꾸만 미끈거렸지만 잘 벌어진 구멍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하비의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참으려 해도 짧은 신음이 튀어 나갔다.
“읏!”
저항하는 구멍 안 주름을 뭉툭하면서도 단단한 살덩어리가 밀어 열었다. 허공에 떠 있는 하비의 두꺼운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비의 눈은 차마 아래를 보지 못하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곧게 파인 하비의 가슴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빅터의 배 위로 떨어졌다.
지켜보던 빅터가 도와주려는지 상체를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하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결국 빅터가 한숨지으며 도로 누웠다. 저 고집은 못 말린다.
“서두르지 마. 시간은 많아.”
꾸역꾸역 절반쯤 넣었을까. 다 넣지 못한 대신 하비는 조금 몸을 움직였다. 손으로 빅터의 단단한 복근을 짚고 위아래로 엉덩이를 움직이는 동안, 하비의 팔도 구멍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부들거렸다.
“으…….”
하비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자꾸만 깨물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목울대가 긴장으로 일렁였다.
그러자 다시 반쯤 상체를 일으킨 빅터가 다물린 하비의 입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열었다. 짭짤한 맛이 났다. 입속을 휘젓는 빅터의 손가락도 구멍을 꿰뚫고 있는 그것처럼 굵고, 길고, 단단했다.
빅터가 눈웃음 지으며 하비의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입술 물지도 말고.”
하비는 흔들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보며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여태까지 들었던 어떤 빅터의 목소리보다 진중했다.
뭔가가 그의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킨 걸까. 부디 좋은 방향이길 바라면서 하비는 다시 꿈틀거리는 빅터의 성기를 품었다.
“하아…… 윽, 큽……!”
하비가 허리를 조금씩 움직이자 말라가던 뒷물이 다시 새어 나와 구멍을 적시더니 내부에 박힌 빅터의 것까지 함께 적셨다. 외설적인 소리가 포도밭의 바람 소리에 섞여 날아갔다.
찌걱, 찌걱!
입속에 박힌 빅터의 손가락 때문에 신음과 버무려진 타액이 길게 묻어 나왔다. 하비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조금 고였다. 뒤를 꿰뚫는 것이 절반밖에 안 되는데도 버거웠다.
푹! 푸욱!
하얗고 탄탄한 하비의 몸과 이어진 기둥으로 애액이 흘러내렸다. 하비가 하얗고 볼륨 있는 엉덩이를 내릴 때마다 꽉 짜인 허벅지가 조였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시선은 빅터를 보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는 빅터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의 녹색 눈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하비가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이걸론 한참 부족했다.
‘돌아버리겠네.’
빅터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당장에라도 허리를 쳐올려 끝까지 박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에게 갚아나가야 할 마음의 짐이 있으니까.
욕구를 억누른 빅터가 하비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고는 가슴을 만졌다. 손이 가자 바로 갈색 유두가 빳빳하게 날을 세웠다. 빅터는 묘하게 초조한 마음도 들었다.
‘왜 보지 않는 거야.’
수치 때문에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빅터는 저 고집스러운 얼굴을 제대로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통통해진 그것을 꽉 잡아 늘리자 하비가 날카로운 쾌감에 놀라 허리를 숙였다. 그 바람에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녹색 눈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스터스 경. 나를 봐줘.”
당당하게 요구해도 될 텐데, 왠지 그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하비는 이상함에 빅터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도, 찢어질 것 같은 구멍의 고통도 어느덧 잊었다.
사사삭--
그때 포도밭에서 작은 짐승 때문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빅터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하비의 목뒤를 잡고 끌어당기며 다시 한번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마를 맞대고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쪽이야, 하비.”
하비의 눈 속에 잔잔한 파도가 쳤다. 빅터에게 불린 이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갓 태어난 기분이었다. 더 듣고 싶었다. 친구인 반 로투스에게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로지 그에게 속한 듯한 즐거운 착각에 빠졌다.
이를 눈치챈 빅터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하비.”
그는 하비의 가슴에 손바닥을 펴서 얹었다. 큰 진동이 단단한 근육 너머로 전해졌다. 고동치듯 하비의 심장이 힘차게 응답했다.
고작 이름 불러주는 정도로 이렇게 기뻐하는데. 빅터는 괴로웠다.
‘난 대체 무슨 생각을…….’
이 손으로 저 기쁜 얼굴을 없앨 궁리만 하고 있었다니.
하비가 사라지고 나면 가장 힘들 사람은 그 자신이면서, 견딜 자신도 없으면서 분풀이 같은 단편적인 복수에만 눈이 멀었다. 아니, 아예 눈 가리고 차마 제 마음을 돌아볼 용기도 내지 못했다.
‘제기랄.’
심장이 박살 난다는 게 이런 기분일 것이다. 왠지 계속 말하다가는 무너질 것 같아서 빅터는 입술부터 밀어붙였다. 하비와 이마가 거의 닿은 채로 고개를 틀어 깊게 키스했다.
높게 솟은 콧날이 창과 방패처럼 서로 부딪쳤다. 중간에 조금씩 벌어지는 입속으로 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달려들었다. 입 사이로 틈이 생길 때 하비가 힘겹게 숨을 뱉었다. 너무 격렬했다.
“흐으…….”
힘들게 빅터의 성기를 품고 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남은 기둥까지 수월하게 구멍으로 들어갔다. 하비는 그것도 모를 정도로 몰입했다. 하비의 턱 끝에 맺혔던 둥근 물방울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땀인지 생리적인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하비는 아까 전 빅터가 갑자기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을 때를 기억했다.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리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아팠다. 빅터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알고 싶지만 묻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입을 뗀 빅터가 하비의 팔을 잡고 미소 지었다.
“잘했어. 이제 움직여도 돼.”
그제야 하비는 빅터의 성기가 끝까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배꼽 안까지 묵직하게 차지한 성기에 하비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빅터가 하비의 허리를 꽉 잡았다. 힘이 들어가자 빅터의 두꺼운 팔에 힘줄이 생겼다.
“처음 한 번만 도와주지.”
날렵하면서도 알알이 근육이 박힌 허리가 강제로 들렸다가 사정없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퍽!
거세게 치고 들어오는 거대한 기둥이 끝까지 박혔다. 하비는 머릿속을 하얗게 메우는 쾌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온몸이 단풍처럼 붉게 물들었다. 바닥을 짚은 무릎에도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진한 쾌락에 하비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허억……!”
짙어지는 하비의 밤색 눈동자를 보며 빅터는 만족한 듯 웃었다.
“몇 번 움직이다 보면 적응될 거야.”
하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아까보다는 대범한 몸짓이었다.
퍼억! 푹! 퍽!
기둥을 품고 위로 솟구쳤다가 체중을 실어 떨어뜨렸다. 찔끔거리며 나오던 뒷물이 점점 양을 늘려 사방으로 튀었다. 하비의 머릿속에 쾌감을 직접 꽂아 넣는 것처럼 뜨거운 열이 번졌다.
그럴 때마다 빅터의 그림 같은 얼굴에도 일그러지며 열이 올랐다. 하비도 이를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저 위아래로 움직이는 단조로운 행동이었지만 빅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고양감이 만족으로 변해 하비는 달아오른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내 쾌감의 한계를 넘어 다시 눈가가 크게 일그러졌다.
“윽, 흐읏, 아……!”
빅터에게서 자신과 같은 흥분을 발견하자 참았던 신음이 막무가내로 터져 나갔다. 하비는 오메가처럼 뒤를 뚫리며 울부짖고 뒷물을 흘렸다.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온통 벌건 쾌감만이 차지했다.
하비의 얼굴을 살피던 빅터가 욕지거리를 뱉더니 하비를 뒤로 밀었다. 이성을 잃은 얼굴이었다. 그대로 등이 닿도록 하비를 눕힌 빅터가 본격적으로 구멍에 마음껏 처박았다.
퍽! 퍼억! 퍽!
젖은 소리가 요란하게 밤공기를 갈랐다. 아까와는 압도적으로 다른 소리였다. 하비의 큰 체격이 러그 위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격렬하게 흔들렸다. 등이 연신 쏠렸지만 푹신한 털 위라 상처를 내지는 않았다.
버겁게 밀고 들어오는 빅터의 성기가 난폭한 기세로 배 속을 꿰뚫었다. 그 와중에도 하비가 잘 느끼는 곳을 정확하게 파악해 찌르는 통에 하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헉, 아, 으윽…… 아!”
입을 모으고 벌릴 때마다 신음이 작아졌다가 커졌다. 이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하비는 휘몰아치는 쾌감에 덜덜 떨었다. 단단한 하비의 턱이 자연스럽게 들리고 그 위로 빅터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섹스보다 더 야한 혀 놀림이 파고들었다.
“으응…… 읏, 윽, 으븝……!”
신음이 높아질수록 빅터는 하비의 길고 탄탄한 다리를 양옆으로 더 찢었다. 그러곤 잔뜩 발기해 흉흉한 성기를 그 사이로 거세게 밀어 넣었다. 무서운 기세로 나오던 애액이 바깥으로 마구 튀어 나갔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하비는 한 손으로 짧은 러그 털을 쥐어뜯었다. 빅터에게 박히는 곳에서 불이 붙고, 그 불길이 몸으로, 머릿속으로 옮겨붙는 것 같았다. 머리가 뜨거워 빙빙 돌았다.
하비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견디기 힘든 극한의 쾌락이었다.
“크흣, 아, 아윽!, 흐으……!”
번뜩번뜩 하비의 눈앞에 벼락이 쳤다. 부풀어 오른 하비의 성기에서 정액이 흘렀다. 사정한 것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옆으로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가 허공에서 요동쳤다. 힘겨운 나머지 빅터의 등에 다리를 감자 삽입이 더 깊어졌다. 하비가 애원하듯 말했다.
“천천히…… 그만……!”
너무 격렬한 섹스에 하비의 손바닥이 밀어낼 것처럼 빅터의 가슴팍에 닿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손은 곧 빅터의 너른 등으로 옮겨 가 긴 손톱자국을 냈다. 단정하게 정리한 손톱이라 상처는 내지 못하고 붉은 흔적만 남겼다.
한창 박히던 중간, 돌연 큰 한기가 하비를 찾아왔다. 하비가 눈을 부릅뜨고 부르르 떨었다. 한기는 몰아치듯이 그의 허리부터 빠르게 올라와 온몸을 잠식했다. 밤색 눈이 눈물로 젖었다.
“큿……!”
감당하기 힘든 드라이 오르가슴이었다. 몸 전체가 벌벌 떨리고 자칫 기절할 것 같았다. 허벅지와 허리 곳곳에도 붉은 열기가 오를 정도였다. 어느새 하비의 손에서 러그 털이 한 줌 뜯겨 나갔다.
빅터도 한차례 떨더니 붉어진 얼굴로 정액을 토해냈다. 많은 양의 묽은 정액이 하비의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퍼억!
빅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박고는 깊숙이 쑤셔 넣었다. 정액이 안으로 흡수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빅터가 하비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대면서 나른한 숨을 뱉었다. 만족감과 후회가 교차되었다.
“하아…….”
빅터는 정신을 놓았던 것이 내심 한탄스러웠다. 오늘은 정말 부드럽게 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만드니까.’
빅터는 괜히 하비 탓을 하며 열이 오른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하비의 뺨에 키스했다. 이제 이 사람을 놓아두고 먼 곳엘 가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새삼 힘들었다.
‘어떻게 버티지.’
멀어지는 상상만 해도 심장이 크게 조여들었다. 빅터는 숨을 고르고 있는 하비의 옆에 털썩 누웠다. 멀리 팽개쳐진 담요를 가져와 하비의 몸 위로 덮어주며 빅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나?”
“……그래.”
간신히 대답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지친 목소리였다. 팔로 뜨거운 눈가를 누르고 있는 하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뿌듯한 만족감이 있었다.
하비는 빅터에게 좋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럴 여유도, 체면도 없었다.
섹스로 누군가를 안정시켜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다니. 멋진 일이었다.
빅터는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지만 하비는 그의 심경이 어떤지 얼추 느끼고 있었다. 다만 말없이 맞춰줄 뿐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빅터가 갑자기 괴로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빅터가 하비의 속내를 짚기라도 한 듯 먼저 물어왔다.
“좋았어?”
하비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토록 정신없이 휩쓸린 섹스는 오랜만이었다. 빅터는 안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나만 미친 줄 알았잖아.”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불이 붙었던 시간이 지나가자 그 사이를 점차 평온함이 메웠다. 그리고 생각과 사유가 흘러들었다.
무너져 가는 백색 성을 바로잡으려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그것을 위해 제 몸 하나 아끼지 않는 남자. 그리고 모든 걸 없애 버리고 새로 짓기 위해 돌아온 남자.
잃지 않으려 하는 자와, 파괴하려 하는 자. 상반된 관계였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를 아니까.
원래는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빅터는 왜인지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원래 계획이 뭐였는지 알아?”
고요한 눈빛이 물었다. 빅터는 팔로 하비를 감싸 안고 그의 반듯한 이마에 입맞춤했다. 입술이 머물다가 사라진 자리를 하비가 가만히 매만졌다. 가슴속이 따스한 뭔가로 채워졌다.
옅은 미소가 그려지는 하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빅터가 말했다.
“베르텐가의 성을 이어받으면 가장 질 나쁜 방법으로 버릴 생각이었어. 가문의 명패를 진창에 패대기치고, 나만의 왕국을 따로 건설할 계획이었지.”
사실 그 위에 스터스가의 명패까지 덤으로 얹어 패대기칠 생각이었지만, 그 계획은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
빅터의 유년 시절을 처참하게 유린했던 주범 라힌 스터스, 그의 아들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
마음을 일찍 깨달았다면 거기서 멈췄을 것이다. 번뜩이는 직감이 만들어낸 황금 같은 기회가 주어졌었고, 만회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무려 3달이 넘도록.
하지만 멍청하게도 자신의 상태를 자각 못 했다는 이유로 그 아까운 시간을 날려 버렸다.
하비는 왜인지 다시 우울해지는 빅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피식 웃었다. 머리 뒤로 깔린 빅터의 단단하고 굵은 팔이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정말 경다운 발상이군.”
영광으로 듣겠다며 웃은 빅터가 다시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이제 와서 버리라고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무엇을 버리라는 것인지 하비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빅터에게는 하비가 새로 밀려올 조류에 금방이라도 쓸려 가버릴 모래 방패처럼 보였다. 빅터의 짐작처럼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버리지 못하니까 끌어안고 내 대에서 끊을 생각이다. 내가 죽고 나면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하비는 가문의 풍속처럼 내려왔던 요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일찍 죽었다. 다 지나치게 혹독한, 사람의 수명까지 깎아먹는 스터스가 전통의 교육 방식 때문이었다.
더는 물려주기 싫었다. 자신의 삶조차 챙기지 못한 채 명예에만 기대어 사는 것이 끔찍했다. 여태 하비 자신조차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차마 가문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도 버릴 자신이 없었다. 대신 언제부턴가는 서서히, 스스로 가라앉도록 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하비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가문이 명맥을 잇지 못하도록.
가문의 현재는 지키되, 미래는 손을 놓는 쪽을 택한 것이다. 빅터와 부대끼면서 점점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하비의 상념을 깬 것은 화가 난 듯한 빅터의 목소리였다.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경.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하비는 아무 말 없이 잠잠하게 빅터의 말을 들었다. 빅터가 말하려는 게 이것이 다가 아님을 직감해서였다.
빅터가 낮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넌 인간이야. 빌어먹을 신이 아니라고. 그런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어. 더럽게도 살고, 때론 피도 묻히고 살아.”
현실적이면서도 다정한 조언이 이어졌다.
“고작 티끌 몇 개 때문에 무조건 끝내려고만 하지 마. 처음부터 완벽한 과정이란 없으니까.”
빅터는 지금 순간, 그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스터스가에 묻은 티끌 정도는, 제대로 해명하면 다들 눈감아줄 거라고. 그동안 로열 가드가 한 일이 얼만데.”
지옥 같은 임페르 해적선에서의 과거가 티끌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직접 겪은 본인의 입에서 말이다.
빅터는 진상 발표 후 사람들이 하비에게 던질 돌을 잠깐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조용히 묻을 사람도 있겠지만, 더 괘씸하게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도시를 수호하는 방패 가문으로서 기능하며 대대로 명문 기사를 배출해 온 스터스가였다. 그만큼 그들의 위선을 가장 증오한 것이 빅터 본인이었다.
빅터에겐 스터스가에 대한 또 다른 의혹도 존재했다. 도덕적 결벽성을 위시하여 그들이 저질렀을 과오가 과연, 라힌 스터스밖에 없을까? 선대를 뒤져보면 더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빅터는 이를 철저히 함구했다. 오로지 하비를 위해서였다.
그런 의혹을 하비가 알았다간, 모든 믿음이 깨진 그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테니까.
“……그런가.”
하비가 허탈하게 웃었다. 빅터의 말에는 힘이 있고,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하비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빅터의 원동력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실제로 빅터의 말은 하비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빚은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날이 반드시 온다. 그때 지금 빅터의 말이 든든한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
하비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물새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맙다.”
그런데 빅터는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하비의 옆모습을 보았다.
“앞으로 나한텐 고맙단 소린 금지야.”
“왜?”
빅터가 쓰린 얼굴로 하비의 손가락을 잡고 짧게 키스했다.
“미안할 일이 많아서. 고맙단 말을 들으면 내가 더 힘들어.”
또 알지 못할 소리를 한다. 고개를 갸웃하는 하비를 보며 빅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작게 빛나던 별이 길게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또 누군가의 생명이 져버린 걸까.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비가 말했다.
“무사히 다녀와. 정리하겠다는 것도 잘 마무리하고.”
빅터는 슬쩍 불안한 눈길을 던졌다. 이럴 땐 하비의 위치나 외모가 조금만 덜했으면 하는 원망이 들었다. 그는 너무 잘났으니까.
빅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올 테니 한눈팔지 말고 기다려. 지분대는 놈이 있으면 바로 벤이나 나스타에게 넘겨.”
진지한 걱정에 하비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쓸데없는 걱정 말라며 대꾸하려던 하비는 멈칫하더니 잠깐 생각했다. 그러곤 옷을 대충 걸치듯 입었다.
“어디 가?”
“가지고 올 것이 있어서.”
근처에 있는 별장으로 빠르게 걸어간 하비가 놓고 온 겉옷, 푸르푸앵을 이 잡듯 뒤졌다.
곧 주머니 속에서 녹색 보석을 간직한 황금 브로치가 튀어나왔다. 목 주변의 작은 프릴 칼라를 어색하게 쓰다듬던 하비는 그것을 들고 빅터에게 돌아갔다.
대체 뭘 들고 오려는지 기웃대던 빅터는 하비의 손에 들린 브로치를 보고 입을 벌렸다.
“이거, 설마…….”
진실을 말할 때가 되었다. 하비는 당시엔 자존심과 당혹감이 버무려진 탓에 빅터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중요한 친구의 생일 선물보다 우선해서 눈에 들어온 게 빅터와 꼭 닮은 이 브로치였노라고.
“사실은 우연찮게 시장에서 발견한 건데, 경이 생각나더군. 얼결에 산 거야. 젤가 때문에 산 게 아니었어.”
하비가 우연을 거듭 강조하며 솔직하게 말하자 빅터는 할 말을 잃고 건네받은 브로치를 한참이나 보았다. 무척이나 심란해졌다.
뚫어질 것처럼 브로치를 보던 빅터가 그것을 꽉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모르고 하비에게 한 짓이 뭐였는지, 지금도 생생했다.
하비는 멋쩍게 한숨짓는 빅터를 보았다. 돈이 넘쳐나는 빅터이니 고작 몇 푼짜리 브로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민망함에 금방 얼굴이 뜨거워졌다.
“마음에 안 드나? 하긴, 비싼 건 아니었으니까.”
빅터는 버려도 된다는 하비의 뒷말에 펄쩍 뛰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몇 번이나 말을 반복하던 빅터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어딘가로 점이 되어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미안하고, 허탈했다. 뭔가에 눈멀었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당시 하비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면서 그딴 유치한 투기를 부렸을 리가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 자신은 이미 하비를 마음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빅터는 그리 짐작했다.
그가 어느새 체온으로 따뜻해진 브로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르는 것도 죄라고 했지.”
“뭐?”
“아무튼, 알았어. 이게 그 젤가라는 놈 때문에 산 게 아니란 말이지.”
괜히 준 건가. 하비는 조금 후회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자꾸 하길래 위안이 될까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준 것이다. 그런데 빅터는 위안 삼기는커녕 더욱 괴로워 보였다.
떨떠름했지만 하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 나 때문에…… 산 거였다고.”
빅터는 다시 울컥 올라오는 신물에 말을 하다 말고 브로치를 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칠 것 같았다.
하비에게 한 짓들이 곱절이 되어 돌아왔다. 이런 사람에게 굴욕을 주고, 그가 아끼는 사람 앞에서 그런 수모를 주었다. 몸 어딘가를 칼로 파내는 것처럼 쓰렸다.
빅터는 손으로 얼굴을 반쪽 덮은 채 말했다. 음울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왜 몰랐을까. 받을 필요 없는 원망까지 전부 제 탓이라며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땐 차마 몰랐다.
뒤늦은 후회가 그의 속을 찢을 것처럼 되돌아왔다. 마치 저주처럼 돌아온 죄책감은 빅터를 더욱 괴롭게 했다.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사과받으려고 준 건 아니야.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까.”
하비는 이 물건을 주려던 사람에게 넘길 때를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아주 값싼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썩 비싼 것도 아닌 브로치였다.
빅터가 과연 만족할까.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도 들었다. 가진 것이 차고 넘치는 사람에게는 이 소박한 물건이 마음에 와닿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젤가를 향한 빅터의 그 열렬한 질투와 분노를 생각하면, 역시 이 물건의 처분이 어찌 되든 진실을 밝히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하비는 자신의 마음이 정확히 어디에 가 있는지를 알리고 싶었다. 당분간 얼굴을 못 볼 테니 지니고 다니면서 자신을 떠올릴 만한 증표를 주고 싶은 쑥스러운 마음도 일부 있었다.
“다만 오해는 풀고 싶었어.”
빅터는 깔끔하게 말하는 하비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참으로 변함없는 사람이다. 한결같이 진실만 말하고, 정도를 걷고자 한다.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새까만 속내를 가지고 돌아온 자신이, 과연. 숨이 막혔다.
빅터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힘을 주어 말했다.
“처음 받은 선물이네.”
이 브로치를 볼 때마다 하비에게 한 짓을 떠올릴 것이다. 빅터는 하비가 자신을 떠올려 샀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그 사실 자체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내색 않고 웃었다. 지금 하비의 얼굴이 걱정스러워 보이니까. 저 말끔한 밤색 눈이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요동쳤다.
“잘 간직하겠어. 고마워.”
빅터가 웃음을 되찾자 하비가 그제야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속으로만 간직할 것을 브로치에 대한 이야기를 괜히 한 건가 하고 자책하는 것도 다 보였다.
브로치를 높이 던졌다가 받으며 빅터가 씨익 웃었다. 아마 긴긴 출장 동안 마음이 많이 아플 것 같다. 그래도 웃었다.
“돌아올 때 나도 답례 선물을 가지고 오지.”
자신이 웃어야, 하비도 웃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