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완벽한 거짓
스터스가의 대문 앞에 달린 가스등이 점멸했다. 관계 후 그대로 마차에서 기절하다시피 자던 하비는 집 가까이 왔을 때쯤에 스스로 깨어났다.
따각대는 말발굽 소리가 일정하게 하비의 귓전을 울리고, 시선이 느껴졌다. 가물대는 눈을 치켜뜨니 그를 지켜보던 빅터가 피식 웃었다.
“귀소본능이라도 있는 건가. 정확하군.”
깨어난 하비가 눈을 깜박이며 빅터를 물끄러미 보았다. 다감한 목소리가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밤 그늘이 내려앉은 빅터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비는 습관처럼 주춤거렸다.
여태까지 빅터는 하비가 깨고 나면 차갑고 비정한 얼굴만 보였다. 차라리 하비가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같은, 그런 싸늘한 눈길을 주었다.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자는 것도 지켜본 모양이었다. 저런 애정 가득한 에메랄드빛 눈으로 말이다.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하비는 복잡한 속을 감춘 채 말했다. 술기운에 속이 거북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집 근처에선 잠이 깨더군.”
“좋은 습관이야.”
“좋은 습관?”
무심결에 되물은 하비에게 빅터가 웃음을 보였다. 하비는 왠지 뒷골이 서늘했다.
“술에 강한 걸 보니 앞으로 술자리는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려던 하비는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밖을 보았다.
“주인님?!”
집사는 잠도 안 자고 밖에서 하비를 기다리고 있다가 인기척에 얼른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오셨군요!”
반색하던 집사의 얼굴에 점점 먹구름이 끼었다.
“주인님, 또 늦으셨네…… 요……? 베르텐 경? 같이 오신 겁니까?”
당연한 듯 하비에게 붙어 있는 빅터를 그가 묘한 얼굴로 보았다. 빅터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같이 온 게 이상한가.”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여전히 빅터가 마음에 안 드는 집사는 ‘돌아가라’는 말로 인사 겸 축객령을 대신했다. 빅터는 언짢아하다가 이내 하비에게 마지막 밤 인사를 남겼다.
“다른 외교관들에겐 잘 말해뒀으니까 걱정 말고. 그럼 내일 로투스 경의 저택에 가기 전에 만나기로 하지. 함.께. 가.야. 하니까.”
빅터는 유독 ‘함께 간다’는 것을 집사 앞에서 강조했다. 자연스레 집사의 미간이 구겨졌다. 막 깨어나서 두 사람의 신경전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하비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빅터에게 맞인사를 했다.
“아아. 조심히 돌아가.”
이긴 것같이 으스대는 얼굴로 집사를 노려본 빅터가 마차 문을 닫도록 명했다.
“그러지.”
빅터가 돌아가는 것을 한참이나 말없이 지켜보는 하비에게 집사가 구시렁댔다.
“언제봐도 기분 나쁜 사람이라니까요. 괜찮으십니까? 또 안 좋은 소릴 들은 건 아니시겠지요?”
빅터를 만나고 오면 꼭 몸이 좋지 않거나 안색이 나빴던 것을 기억하고 집사가 캐물었다. 하비는 난감한 얼굴로 빅터를 두둔했다.
“괜찮아. 그리고 베르텐 경은 자네 생각만큼 그리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 나무라지 말게.”
하비를 뒤따라가던 집사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설마, 지금 베르텐 경 편을 드시는 겁니까? 예?”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당황한 하비가 대꾸했다. 목 아래까지 붉은 기운이 퍼져 있었다.
“그런 건 아니야. 단지 사람을 제대로 보란 말을 하고 싶을 뿐이지.”
“흐음…….”
의심스럽게 바라본 집사가 오늘도 늙은 회계사를 보러 가는 하비의 등을 향해 대놓고 한숨지었다. 군식구가 늘어서 식비나 각종 생활비가 늘었다. 심지어 아픈 그를 위해 하비가 주치의까지 가까이 두고 있어서 의료비로 나가는 비용도 보통이 아니었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하비가 벌어 오는 공무원의 월급으로는 이 큰 저택을 운영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하비는 남들이 다 하는 투자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고, 때문에 큰 수입거리가 없었다. 작은 우편 사업에 투자를 한 적은 있지만 그것도 소소했다.
하비의 투자 원칙은 공공사업이 아닌 이상 투기성 강한 투자에 일부러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돈을 벌기가 힘들었다.
‘언젠가는 말씀을 드려야 할 텐데.’
걱정하던 집사는 새하얗게 굳은 하비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하비는 이중으로 해둔 비밀 방문을 열어둔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집사가 조심스럽게 하비를 불렀다.
“주인님?”
“……당장 의사 불러.”
그제야 놀라서 집사가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늙은 회계사가 입가에 거품을 물고 축 늘어져 있었다.
당장 침대에 엎어져 있는 그를 뒤집어서 심장박동과 호흡을 확인한 집사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하비는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가 멍한 눈으로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죽은 회계사를 보았다. 이 가엾은 자를 고문했던 자와 희희낙락 밤을 즐기고 온 날, 하필…….
죄책감으로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갑작스런 회계사의 사망. 이게 정말 우연일까. 설마, 빅터가 개입된 건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하비의 심장이 불온하게 두근거렸다. 몰려드는 두려운 상상을 간신히 밀어내고 하비가 핏발 선 눈으로 크게 소리쳤다.
“의사 불러, 빨리!”
집사가 허겁지겁 근처에 있을 주치의를 데리러 나갔다. 시체 특유의 썩은 내가 가득한 방 안에서 하비는 벽에 기대었다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늙은 회계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바짝 마른 육체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헛웃음이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자에게 빅터에 대한 이야기를 은근히 했다.
하비는 주저앉아 이마를 양손으로 감싸며 괴로워했다.
사람을 제대로 보라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자를? 그런 남자에게 고백받았다고 들떠서 고민했던 것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이런 결과가 있을 줄 정말 몰랐나.
이성이 배제된 곳에 혼란의 폭풍이 찾아들고, 그 뒤로는 분노가 잘게 일었다. 사람 마음을 쥐고 흔들어서 정신 못 차리게 한 사이 이런 일을 벌이다니.
불현듯 하비는 머리를 털고 눈을 빛냈다. 이럴수록 더욱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빅터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그래야 한다.
‘애초에 그럴 리 없어. 이성적으로 생각해. 조금 전까지 나와 함께 있었고, 굳이 이분을 죽일 이유가 없잖아.’
몸이 안 좋아 내버려 둬도 알아서 죽을 텐데, 뭣 하러 하비의 저택까지 일부러 잠입해서 죽이는 수고를 할까. 말도 안 된다.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빅터가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다.
‘그거면 됐어.’
그것만으로도 하비는 큰 위안을 얻었다.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부풀었던 가슴이 차차 가라앉았다.
아직 그를 미워할 이유가 하나밖에 없었다. 라힌 스터스의 일로 얽혔던 그 굴종의 시간들은 사과받았다.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여겼다.
다행이다. 하비가 시체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였다. 하비는 한심함을 느끼며 자책했다. 다른 것보다, 심지어 죽은 자보다 빅터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니.
이래서야 아버지와 똑같았다. 온갖 깨끗한 척은 다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다지도 이기적이다. 결국 자신의 감정이 우선인 것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자신을 부디 망자가 용서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해준 것도 없이 보내야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이나마 좋은 시간을 보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비가 푸석한 모습으로 죽어버린 늙은 회계사를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그사이 집사가 허겁지겁 주치의를 데려왔다. 시체를 보고 놀란 주치의가 그를 살펴보는 동안, 하비가 신음을 뱉었다.
“윽…….”
느닷없이 손이 저릿하고 아파와서 하비는 손목을 움켜쥐고 허리를 숙였다. 설상가상 숨도 쉬기가 힘들었다.
집사가 회계사의 시체를 두고 하비에게 다시 달려왔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난 괜찮으니 그 사람이나 살펴봐.”
죽은 걸 알면서도 하비는 주치의를 회계사에게 보냈다. 간단히 늙은 회계사의 상태를 살핀 의사는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죽었습니다. 경직 상태를 보니 2~3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사인은 노환과 상처로 인한 후유증으로 보입니다. 우선 산 사람부터 봅시다.”
역시 빅터가 한 짓이 아니었다. 망자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안도감이 섞여 한결 복잡해진 얼굴로 하비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진지하게 하비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의사가 진찰을 마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정밀하게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안심시키듯 말한 주치의가 무서운 얼굴로 돌변해 경고조로 덧붙였다.
“그래도 스터스가 사람들 대대로 건강이 썩 좋지 않으니 조심하십시오. 라힌 스터스 의원님도 과도한 스트레스로 일찍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부디 몸조리 잘하십시오.”
세간에는 스터스가가 교차로의 악마와 거래해서 인재는 많지만 수명이 짧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하비는 의사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또 다른 현실적인 고민에 빠졌다.
* * *
그렇게 누군가의 목숨이 하잘것없이 사그라든 밤, 빅터는 사용인들을 모두 떼어두고는 어느 허름한 항구로 말을 타고 이동했다.
‘실망시키지 마.’
언젠가 하비가 했던 말이 갈고리처럼 그의 목을 조였다. 처연한 하비의 목소리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때 그 얼굴과 목소리가 마치 애처롭게 매달리는 것처럼 빅터의 심장을 녹이려 하고 있었다.
그는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럴수록 하비의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여전히 강하긴 하지만, 하비 스터스는 나날이 여린 틈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라힌 스터스와 엮여 육체를 갈취하고 조롱하던 초창기가 더욱 단단했다.
자신의 밑에 깔려 자신이 주는 쾌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비가 생각나자 빅터는 바로 아래가 묵직해졌다.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자조 섞인 비웃음을 지은 빅터가 달리는 말을 더욱 재촉했다.
항구에 들어서니 정박된 배들이 잔잔한 물결에 실려 삐걱대고 낡은 창고들이 곳곳에 보였다. 내일이면 출항할 큰 배도 있었는데, 얼기설기 돛대에 매달린 줄들이 달빛 아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평화로운 새벽의 항구였다. 그중 유독 큰 배에서 달을 구경하고 있던 한 남자가 빅터를 발견하곤 훌쩍 뛰어내렸다.
“늦었구나.”
빅터가 투레질하는 말을 달래며 근처에 매어놓았다.
“일이 좀 있었어.”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사내는 하비와 비슷한 체격에 희끗희끗한 수염을 지닌 자였다. 드러난 굵은 팔뚝, 건장한 체격, 누가 봐도 뱃사람이었다.
중년의 사내가 씨익 웃으며 빅터를 반겼다. 벤이 하비에게 언급한 적이 있는, 빅터의 비밀스러운 사업 파트너이자 동업자였다.
“그사이 잘 먹고 잘 지낸 것 같구나. 얼굴이 폈어.”
빅터가 냉소적으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 적개심이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영감보다야 오래 살아야지.”
빅터는 거대한 배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는 항구였지만 주변을 경계했다. 중년 사내가 빅터의 대꾸에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건방진 놈. 나 때문에 지금까지 목 붙이고 살아 있는 주제에.”
중년 사내는 어린 날 그를 잡았던 임페르 해적단의 수뇌부이자 선장의 오른팔이었다. 어린 날의 빅터가 살려달라 애원하며 매달렸던 그 남자는 이제 반대로 빅터의 오른팔이 되어 거대한 해양 상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빅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건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일부러 그 망할 새끼들 처형할 구실 찾으려고 날 미끼로 삼은 것 빼고는.”
빅터에게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 첫 러트 사건을 일컫는 말이었다. 빅터는 노골적인 적의를 비쳤다.
그 사건은 중년 사내가 최종적으로 해적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남은 선장파를 숙청하기 위한 구실이 되었다.
빅터는 당시 첫 러트를 희생해서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조건은 해적선에서의 완전 해방. 결과적으로 그 일은 돈을 벌어다 주는 똑똑한 인재로 해적선에서 활약하던 빅터가 온전히 구속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귀족 청년들이 알고 있는 빅터의 신화적인 이야기는 일부 조작되었다. 사실 그가 이끄는 상단에는 임페르 해적이 섞여 있었다.
현 상단의 대표적인 리더는 빅터지만 실무 쪽에선 중년 사내가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임페르 해적단 사건의 피해자인 빅터의 사용인들도 알고 있지만 실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그러다 보니 상단 일로 마주칠 때 저택의 사용인들과 임페르 해적 출신인 사람들 사이에서 시비가 붙는 일도 종종 있었다.
중년 사내가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뱃사람은 작은 일로 구시렁대지 않는 법이지.”
빅터가 짧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그날의 고통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 일이 작은 일이라고? 영감이 직접 당해보지 그랬어.”
“내가 당하는 건 언제나 열외지.”
빅터는 느긋하게 말하는 중년 사내를 노려보았다. 비겁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근데 중요한 거라도 놔두고 왔나? 안절부절못하는 게 너답지 않은데.”
빅터가 멈칫하다가 유연하게 받아쳤다.
“내가? 설마.”
“그래. 네놈한테 제일 중한 건 돈이지. 그것 말고 뭐가 있어. 누가 돈으로 사기라도 쳤냐? 어떤 간 큰 놈이?”
강한 달빛이 배 그림자에 숨은 빅터를 비추며 화려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넓은 어깨에 달빛이 부서져 산산이 사라졌다. 높고 긴 코 아래 매력적인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
“그런 놈이 있었으면 애초에 산 채로 찢고 살 한 점 남기지 않고 갈아버렸겠지.”
빅터의 금발이 달빛과 합쳐져 지옥에서 막 기어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매혹으로 낚아채 놓고 그대로 씹어 삼킬 것 같은 잔혹함은 여전했다. 그에게선 언제나 피비린내가 났다.
중년 사내가 킬킬 음험하게 웃었다.
“그럼. 누가 키웠는데.”
“사기 치지 마. 나는 나 혼자 컸으니까.”
장난스럽던 태도를 바꾼 중년 사내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복수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 그렇게 소원이라더니.”
빅터는 동요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언제부터 내 일에 관심 뒀다고.”
“나도 늙으니 오지랖이 넓어졌거든. 말 돌리지 말고, 스터스가 골통은 제대로 족치고 있는 거겠지? 공개 열애라는 황당한 선택지도 그 복수의 연장선이냐?”
역시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난 유명한 일이 되긴 했지만,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느라 바빴을 텐데도 어지간한 소식은 그의 수중에 있었다.
빅터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런 셈이지.”
“대답이 미적지근한 게, 수상한데.”
“혼자 소설 쓰는 걸 보니 영감도 갈 때가 다 되었나 봐. 미리 명복을 빌어주지. 그간 정을 봐서 뒈지면 바다에 던져줄게.”
“오, 그것 참 감사한 이야기군.”
살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라. 이도 저도 아닌 게 젤 위험한 거, 네놈이 제일 잘 알잖아.”
“돈줄 끊길까 봐 초조한 건 알겠지만, 어울리지 않는 충고 하지 마.”
빅터가 비아냥댔지만 그는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피에는 피바람, 칼침 한 방엔 칼 난도질, 주먹엔 거기에 더해서 발길질. 잊지 마.”
돈 단위가 페르에서 기난으로 바뀔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악명을 떨치던 전설적인 임페르 해적단도 어느샌가 사라졌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많이 지워졌다.
그런데도 빅터는 이 중년 사내를 보고 있자면 아직까지 임페르 해적단의 까만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해적질 그만둔 지 오래됐으면서 그 망할 낡은 지침은 아직까지 건재한 건가?”
“당연하지. 우리 상단의 최우선 지침인데. 나는 상단의 최대 주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만 않으면 돼. 어릴 때나 지금이나 믿고 있는 건 돈 냄새 잘 맡는 네 코와 냉정한 판단력이니까.”
빅터는 감정이 없는 눈으로 중년 사내를 마주 보았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공생 관계로 지금껏 이어져 온, 악연이자 필연이었다.
“특이 사항 없으면 이만.”
빅터가 미련 없이 가려 하자 중년 사내가 다시 붙들었다.
“참, 신생 해적단 하나가 설치고 다니던데. 멀리서 온 놈들 같고, 하는 짓이 우리보다 더해.”
“임페르 해적단보다 더한 해적단이 있을 수 있나? 방해될 정도면 대충 치워.”
중년 사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 깜냥은 안 되어 보여서 일단은 두고 보는 중.”
빅터는 순간 하비가 고민하던 것이 떠올랐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 나갔다.
“그 해적 놈들, 확실히 처리 가능해?”
“왜. 앞으로 할 일에 방해가 되나?”
차마 하비에게 필요한 일이란 말은 나가지 않았다. 사실 빅터는 왜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에 나서는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하비 스터스의 일 아닌가.
결국 핑계 댈 것이 없던 그가 얼버무렸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가 친근한 손길로 빅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년일 때와 확연히 다른 단단한 골격이 그의 손 아래 느껴졌다.
“뭐 아무튼. 복수도 칼날과 같아서 낡으면 무뎌지기도 하는 법이지. 예리하게 계속 갈지 않으면 자칫 쥐고 있으니만 못한 게 된다고.”
그 손을 벌레 치우듯 툭 털어내며 빅터가 사납게 입가를 올렸다. 조금 자란 금발 아래 녹색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내 칼은 충분히 날카롭고, 그 사람 심장에 박을 적시만 찾고 있어. 곧 때가 올 거야.”
빅터가 먼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하비가 자신을 믿고 있다. 점점 마음을 열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지금쯤 그는 늙은 회계사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진 채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하비가 자신을 침실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품이라 느낄 때 실행할 것이다.
빅터는 결의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스터스 경이 날 가장 믿을 때 꽂아줘야지.”
사내가 더 볼일이 없는 듯하자 빅터는 바로 항구를 떠났다. 타고 온 말 등에 훌쩍 올라타 떠나는 모습 뒤로 먼지가 작게 일었다.
그가 떠난 뒤 중년 사내는 피식 웃었다.
“어린놈.”
빅터는 하비의 이름에 담을 때 자신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듯했다.
다시 배 위로 올라간 중년 사내가 달빛을 보며 갑판에 길게 누웠다. 어설픈 고뇌와 낡아빠진 증오, 그보다 더 큰 애정이 스쳐 지나갔던 걸 왜 모를까.
문득 그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변명 한번 요란하네.”
* * *
반 로투스 경의 생일에는 많은 귀족이 참석했다. 그중엔 하비와 빅터의 관계에 호기심을 보내는 귀족도 많았다.
“그래서, 두 분이 어떻게 만났다고요?”
반짝이는 여러 쌍의 눈이 모였다. 기시감을 느끼며 하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외교관의 모임에서도 같은 상황을 겪었던 것 같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원흉인 빅터를 찾았지만 그는 인기인임을 방증하듯 한자리에 있지를 못했다.
물론 하비도 그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모두의 화제가 한곳에 귀결된 만큼 불편한 가시방석이었다. 그사이 빅터는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이젠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일부러 곤란한 표정을 띄운 하비가 귀족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관심을 끊어냈다.
“사적인 질문은 다음에 해주십시오. 오늘은 로투스 경의 생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근데 오늘의 주인공도 어딜 갔는지 통 보이지 않습니다?”
“아까 전에 베르텐 경과 함께 야외로 나가던걸요?”
어디선가 날아온 말에 하비가 지긋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함께 말입니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반은 전부터 빅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은밀하게 나누는 대화란 것이 좋을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그런데 하비의 표정을 뭐라 해석한 건지 한 귀족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벌써 경계하시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베르텐 경과 로투스 경은 썩 어울리지 않는걸요.”
“설마 스터스 경을 두고 베르텐 경이 바람이라도 피울까.”
“그 스터스 경이 질투를 다 하시고. 정말 사랑이란 건 놀랍다니까요?”
놀라운 건 그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는 당신 머리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하비는 초유의 인내심으로 내리눌렀다. 귀족들끼리 신이 나서 나누는 잡담에 하비의 얼굴은 반비례하여 찌그러졌다. 억측이 난무한 이 자리에서 한시라도 빨리 뜨고 싶었다.
‘둘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하비가 모두의 관심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동안 빅터는 이 파티의 주인공인 반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야밤의 풀벌레가 찌르륵 울음을 울며 뛰어다녔다. 환히 설치된 등 아래 테이블에서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반이 공손한 태도로 빅터에게 포도주를 올렸다. 같은 나이지만 이미 상하 구도가 확립된 모양새였다. 맑은 유리 부딪치는 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귀한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피워 무는 빅터를 반은 알게 모르게 노려보았다. 태도는 순순했지만 말투에는 순수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나에게 오랜 친구를 배신하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놓고, 이제 와서 교제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베르텐 경.”
그동안 반은 빅터의 명으로 하비와 관련된 정보들을 빠짐없이 넘겼다. 넘긴 후에는 늘 죄책감에 시달려 왔는데, 정작 일을 시킨 장본인은 뒤에서 하비와 몰래 관계를 하고 있었다.
반은 빅터가 하비를 진심으로 경멸하는 줄 알았다. 약간은 동조하는 마음으로 과하게 정보를 퍼나르는 데 열을 올렸던 자신이 추잡하게 느껴졌다.
“흐음.”
빅터는 화를 내는 반을 물끄러미 보았다. 감정 하나 없는 소름 끼치는 눈빛이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반은 안절부절못하며 처음의 패기마저 잃어갔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은은하게 반을 쥐고 강압적으로 내리눌렀다. 드디어 빅터의 입술이 열렸다.
“지금 내게 따지는 건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면서도 반은 귀족의 자존감을 내세웠다.
“따지다니요.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내게 악역을 자처하게 해놓고 뒤에서 정작 스터스 경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진 연유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나를 농락하기 위함입니까?”
절실한 물음이 냉소로 되돌아왔다. 흐릿한 담배 연기가 반을 휘감았다.
“로투스 경은 본인이 농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나?”
역으로 돌아온 질문에 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잔인한 말이었다. 차마 반박하지도 못하고 반은 테이블 아래 주먹만 움켜쥐었다.
로투스가는 이미 빅터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빅터가 귀국하자마자 손댄 것이 바로 로투스가의 존망이었다. 귀족들의 정보가 모이는 중심가. 그걸 장악해야 온전히 올란시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로투스가는 빅터의 정보청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고, 반 로투스의 늙은 아버지는 이것을 몹시 못마땅해했다. 그는 그 반동으로 더욱 스터스가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죽은 라힌 스터스라면 이처럼 쉽게 그 새파란 자식에게 가문을 넘기지 않았을 테지! 그놈의 아들인 하비 스터스조차 빅터 그놈에게 뻣뻣한 태도로 굴지 않느냐. 차라리 스터스 경처럼 몸으로 꼬여서 빅터 베르텐 그놈을 손에 쥐든지! 다 능력 없는 네놈 때문에……! 쿨럭, 쿨럭…….’
몸도 좋지 않아 병상에 누워 있는 그는 시종일관 분노하고, 아들인 반을 반푼이 취급했다. 어제도 아버지가 던진 물건에 머리를 맞았다. 반은 생각만 해도 맞은 부위가 아파와서 아직도 부어 있는 관자놀이 쪽을 어루만졌다.
빅터는 테이블까지 뛰어오른 작은 녹색 풀벌레를 가만히 보다 담뱃대로 치워 버렸다.
“여태까지 군말 없이 동조해 놓고 왜 징징대는 건지 모르겠군.”
반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빅터가 그의 속을 거칠게 후벼 팠다. 빚은 듯한 얼굴이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솔직히 말해서 로투스 경도 스터스 경을 무너뜨리는 게 기분 좋지 않았나?”
“무슨 소린지.”
움찔했지만 반은 열성적으로 잡아뗐다. 뒤로 다시 물러난 빅터가 입에 머금은 연기를 반의 얼굴을 향해 뿜었다. 미간을 구기면서도 담배 연기를 미처 피하지 못한 반에게 빅터는 쐐기를 박았다.
“이제 와서 아닌 척하기에는 내가 말하지 않은 정보까지 잘도 넘겨주던데. 나는 스터스 경의 저택과 그 측근까지 모두 살피라곤 하지 않았거든.”
나스타가 얻은 정보, 즉 늙은 회계사의 소식도 사실 로투스가, 정확히는 반 로투스의 손에서 흘러나온 정보였다.
반은 더듬대며 빅터의 일침에 부들거리기만 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 그건……!”
빅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 로투스는 그나마 하비가 끝까지 믿고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일부러 노려 접근한 것이긴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빅터는 입이 썼다.
아무것도 모르고 믿고 있을 하비에게 조금, 연민이 들었다.
하비는 반이 가진 어두운 감정이 이 정도일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반면 빅터는 반 로투스가 왜 이러는지, 얼마나 큰 오래 묵은 원망이 숨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반이나 자신이나 크게 다를 것 없는 비슷한 처지라, 빅터는 누구보다 반의 심정을 이해했다.
물론 이해와 용납은 다른 문제다.
‘이런 열등감에 찌든 놈 생일이나 챙겨주겠다고 그리 애를 쓰더니.’
속으로 혀를 찬 빅터는 반이 따라준 포도주를 옆으로 버렸다. 아까 나가떨어진 풀벌레가 포도주를 맞아 붉은 강인 양 떠내려갔다. 하비에게는 벌레를 꼬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빈 잔에 새로운 포도주를 채우며 빅터가 비꼬았다.
“스터스 경이 가엾군그래. 경을 친구랍시고 곁에 두고 있었다니.”
하비를 두둔하는 빅터의 태도에 위기의식을 느낀 반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하비에게 알려질 것이 몹시 두려웠다. 그도 하비가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내가 했던 짓을 하비에게 알리면, 나도 알릴 겁니다. 베르텐 경이 시켜서 한 거라고.”
빅터는 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하비’라는 이름이 고까웠다. 이런 지경이 되어서도 ‘좋은 친구’라는 타이틀은 버리기 싫다는 속내였다. 빅터의 속이 차갑게 들끓었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옅은 살기를 흘렸다.
“로투스가가 누가 시킨다고 할 자존심 없는 가문인지 미처 몰랐는데.”
반이 벌떡 일어나며 빅터의 손에 들려 있던 담뱃대 끝을 꽉 쥐었다. 핏발 선 눈으로 반이 경고했다.
“우리 가문을 함부로 모욕하면 아무리 경이라도 용서 못 해.”
속내를 드러낸 개가 악취를 뿜었다. 로투스 경의 알파 페로몬은 생선 비린내가 났다. 바다에서 자라온 빅터조차 반갑지 않은 불쾌한 알파 냄새였다. 물론 오메가가 맡으면 바닷가의 쾌적한 향일지도 모른다.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반이 움켜쥔 담뱃대도 옆으로 휙 버렸다. 더럽다는 듯한 몸짓에 반은 굴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터스 경에 대한 뒷조사는 이제 중단해. 차후 로투스가에서 계속 그 뒤를 쫓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두고 보지 않을 거야.”
저 멀리서 하비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도 하비 특유의 시원한 페로몬이 코끝을 스쳤다. 이에 빅터가 느긋하게 일어나더니 악귀 같은 얼굴인 반에게 충고했다.
“열등감은 그쯤에서 묻어두고 예전처럼 좋은 친구로 지내. 그게 경의 신상에 좋을 테니까.”
빅터는 분노하는 반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낮춰 속삭였다.
“아, 믿었던 친구의 배신감에 괴로워하는 걸 내가 위로해 주는 좋은 전개도 있겠군.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말은 그리해도 빅터는 하비가 다른 사람 때문에 마음 쓰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하비를 심란하게 하고 마음 한편을 차지하는 건 빅터 베르텐, 자신이다. 다른 자가 끼어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늙은 회계사든, 친구인 반 로투스 경이든, 심지어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일지라도.
하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넘실대며 부닥치는 알파끼리의 페로몬에 미간을 찌푸렸다.
로투스가의 너른 정원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 처박혀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다. 혹시 사람들의 말대로 정말로 두 사람이……?
“여기서 뭐 하는 거……?!”
빅터가 도착한 하비를 휙 끌어당기더니 목덜미에서 나는 페로몬을 마음껏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반의 비린내 나는 페로몬을 맡았더니 이런 청량한 향이 절실했다.
하비는 불쾌한 것 같은 친구의 눈치를 보며 쩔쩔맸다. 벗어나려 했지만 빅터의 팔심이 너무 완강했다.
“뭐 하는 거야.”
빅터는 이제 팔꿈치로 찍으려는 하비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더욱 깊이 목덜미에 코를 박고 하비의 페로몬을 맡았다. 직후 정말 하비의 공격이 먹히기 전에 뒤로 물러난 빅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친한 친구끼리 이야기하라고. 나는 빠져줄 테니.”
빅터가 화창하게 웃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동시에 반에게 눈짓을 주어 하비에게 허튼소리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반은 붉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자존심을 차리려고 해도 빅터가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저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엄청난 굴종이었고, 자괴감이 드는 열세였다.
막상 하비는 그것조차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반은 빅터의 비호를 받는 하비마저 곱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빅터는 하비를 진정으로 신경 쓰고 간혹 그에게 약한 모습마저 보였다. 소드 클럽에서 일어난 일을 반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비에게 꼼짝 못 하던 빅터의 모습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말이 옳아.’
같은 알파지만 하비처럼 몸을 팔아서라도 걸어 다니는 황금이자 최고의 영향권자인 빅터 베르텐을 수중에 넣었어야 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하비의 성격에 자발적으로 빅터를 꾀었을 리 없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반은 진실마저 보려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왱왱거리는 벌건 말벌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빅터에게 가장 깊고 내밀한 ‘열등감’이라는 독을 들켰다는 사실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비는 말없이 포도주만 연신 들이켜는 반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래?”
“아무것도 아닐세.”
“어떤 이야기를 했든, 신경 꺼. 베르텐 경이 사람 속을 긁는 데는 도가 텄거든.”
하비는 그의 화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치고 빠지기의 고수이며, 교묘하게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들 줄 아는 남자였다.
빅터가 사라진 곳을 보며 이를 가는 반을 보니 또 무언가 안 좋은 소리를 쏴붙여 댄 것이 분명했다. 적에겐 몹시도 잔인한 인간이니 무슨 말을 해도 놀랍지 않았다.
그때 반이 하비를 노려보며 매섭게 말했다.
“같은 알파로서 자존심 상하지도 않나?”
깜짝 놀란 하비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복기하며 짧게 되물었다.
“뭐?”
“저런 밑바닥 출신의 상스러운 놈에게 깔리다니. 고작 ‘우성’이라는 이유로 굴복하고 있는 거냐고.”
하비는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친구를 멍하게 보았다. 여태껏 봐온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친구, 반 로투스 경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그는 빅터에게 당한 것을 하비에게 화풀이하고 있었다.
‘대체 베르텐 경이 뭐라고 했길래…….’
하비도 금세 언짢아졌지만, 티 내는 대신 차분하게 반의 이성을 되돌리려 했다.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해. 그리고 자넨 몇 가지 잘못 알고 있어.”
하비는 담담하게 사실만을 꼽아서 반에게 들려주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다.
“밑바닥 상인 출신은 그의 할아버지 레토 베르텐이었고, 베르텐 경은 엄연히 귀족가에서 태어난 진짜 귀족이야. 더욱이 내가 그에게 단지 ‘우성’이라는 이유로 굴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은 핏물같이 흘러내린 포도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하비가 하는 말이 다 옳았다. 그래서 그를 더 분노케 했다.
하비 스터스는 언제나 맞는 말만 한다. 그 진실 됨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적을 만들기도 했다.
“설마, 베르텐 경에게 정말 마음을 준 건가?”
저번에도 했던 질문이었다. 하비는 반이 왜 이렇게 빅터와 자신의 관계에 열을 올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최대한 솔직하게 답변하려 애썼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도 혼란스러워. 그래도 정말 싫다면 이런 자리까지 함께 나오지는 않았겠지.”
온갖 핑계를 대서라도 빠졌을 것이다. 귀찮은 질문들에 둘러싸일 것 알면서도 나온 것이 하비의 진심이었다.
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빈틈을 파고들려 했다.
“정말 베르텐 경에게 협박당하거나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그동안은 협박과 강압으로 점철된 관계였다. 하지만 하비는 집요하게 묻는 친구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끝내 아니라고 부정할 수밖에.
“설마. 그랬다면 지금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겠어?”
의심스러운 반의 눈빛을 겨우 넘긴 하비는 그 뒤로도 그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오늘따라 반이 평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불편하고, 거북했다.
‘설마, 베르텐 경의 욕을 해서?’
자신을 낮잡아서 후려친 것보다 그게 더 불편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탈한 숨을 뱉으며 하비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기껏 도망친 자리가 빅터가 있는 곳이었다. 회의감이 들었다.
빅터는 하비를 발견하자마자 사람들을 헤치고 그를 끌고 왔다. 여전히 많은 사람을 일부 물리친 빅터가 귀에 거의 닿도록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이야기는 잘 하고 왔나?”
빅터의 입술 감촉에 흠칫하던 것도 잠시, 빅터의 듣기 좋은 저음이 하비를 뭉근하게 감쌌다.
“그럭저럭.”
하비의 표정을 빠르게 살핀 빅터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워? 로투스 경이 이상한 소릴 한 건 아니겠지?”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속삭였다. 하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로 하비가 조용히 말했다.
“개인적인 일 때문이야.”
사실 늙은 회계사의 장례 문제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시체가 썩고 있는데도 최대한 냄새가 나지 않게 염을 하고 특수한 조치를 해둔 게 다였다.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러주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입관비, 관을 드는 인건비 등등. 심지어 좋은 묫자리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래도 마음 같아선 좋은 곳에 비싼 향유를 넣어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집사의 말도 일리는 있지.’
이제 스터스가엔 그럴 돈이 없다는 단호한 집사의 말에 하비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하비는 지난번 집사와의 짧은 입씨름을 떠올렸다.
‘주인님, 대체 저자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입니까? 전대에 수고를 한 사람은 맞지만 ‘그 일’에 일조한……!‘
‘그 일?’
하비의 물음에 집사가 깜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 보니 회계사가 종종 쓰던 서랍이 열려 있었다.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집사는 서랍 쪽을 몸으로 슬쩍 가리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주인님, 뭐든 완벽하신 건 좋지만 이런 일에까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나친 도덕적 결벽증이 가끔 현실 감각마저 상실한다는 것을. 이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스터스가의 지나친 결벽과 하비 스스로의 성정이 뒤섞여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었다.
어디 말할 곳도 없어 마음이 답답하던 차였다.
“갑갑해 보이는데, 둘이서만 산책이라도 할까?”
눈치 빠른 빅터가 먼저 제안했다.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하비를 꾀었다. 사람들 틈에서 질문 공세에 시달리던 하비는 신호를 보고는 재빨리 동의했다.
빅터가 하비의 손을 잡고 마지막 질문자를 등지더니 그대로 뛰었다.
손을 뻗어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비는 그저 다리를 놀렸다. 처음으로 느끼는 해방감과 쾌감이 마음을 바람처럼 거세게 때렸다. 달리면서 닥쳐오는 선선한 바람이 그의 가슴에도 스며들었다.
자유로운 냄새였다. 빅터를 닮은, 자유분방하고 얽매이지 않은 푸릇한 향 말이다. 어릴 때 그를 처음 봤을 때도 어쩌면 이런 것에 끌렸을지도 몰랐다. 하비는 자꾸만 황당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헉, 헉……. 그만 뛰어도 될 것 같은…… 헉.”
어쩌다 보니 도망 온 모양새가 되었다. 달리던 도중 빅터의 손은 떨어졌지만 아직 뜨거운 체온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하비가 숨을 몰아쉬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웃음은 점점 커졌다. 마치 철부지 아이처럼 자리를 피한 것이 우습기만 했다.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이렇게 달려본 적도 없는 것 같다.
하비가 웃는 얼굴을 빅터는 한참이나 말없이 보기만 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맑게 번져 나가는 환한 미소와 낮은 웃음소리를 보고, 들었다.
하비의 잘 정돈된 하얀 이목구비에 달빛이 걸려 아른댔다. 뚜렷한 검은 음영이 그의 얼굴 곳곳을 환하게 밝혔다.
‘아…….’
어디선가 찬란한 이명이 날아와 박혔다. 빅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아프게 찌르는 듯하다가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울던 풀벌레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하비의 심장, 그가 내쉬는 숨소리, 잦아지는 작은 웃음, 표정들에 모든 것이 집중되었다.
빅터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길게 일렁였다.
‘내가 미친 건가.’
따라오던 풀벌레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하비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도 빅터에게선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느낀 하비가 돌아보았을 때, 빅터는 찬물 맞은 사람처럼, 혹은 두려움에 질린 사람처럼 하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은 뭐지?”
헛기침을 한 빅터가 허둥지둥 말했다.
“체력이 왜 이렇게 부실해졌어. 그 건방진 집사 놈이 제대로 식사도 챙기지 않는 건가?”
“모자랄 것 없이 늘 잘 챙기지만 내가 식욕이 통 없어서 안 먹지. 미안할 따름이야.”
빅터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여간 제 사람이라고 철벽같이 방어해 주는군. 그 정성으로 나도 챙겨주지 그래.”
이 자리에서 반 로투스의 행각을 까발려도 하비는 반을 옹호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확실한 물증을 보기 전에는 믿지 않는다 하겠지. 빅터는 씁쓸하게 웃었다.
빅터의 쓴 미소와 섭섭하다는 듯 들리는 말투에 하비는 당황했다.
“아직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언제쯤 익숙해질 거야?”
하비에게 평소처럼 말을 걸 때마다 찌르르 가슴속이 울렸다. 철저히 기만하기 위해 꾸며낸 말과 행동에도 하비는 솔직하게 반응했다. 지금도 그랬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정말 미안한 표정을 하고서 빅터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제대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빅터는 하비가 진솔하게 맞받아칠수록 마음 한구석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시간을 좀 줘. 그리고 오늘은 심란한 일이 생겨서 더 집중이 안 되었어.”
“무슨 심란한 일? 아아. 개인적인 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하비는 정면으로 마주치기로 했다.
“고맙고 미안했던 분 하나가 간밤에 돌아가셨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빅터는 모른 척했다.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불안하게 수런댔다.
“그게 누군데?”
“경도 아는 사람.”
하비가 돌려 말하거나 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공법이었다.
빅터는 그 고요하고 직설적으로 맞부딪쳐 오는 밤색 눈에 놀랐다.
“라힌 스터스 전 의원의 회계사이자 재정 담당이었던 분. 알고 있잖아.”
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빅터는 심란한 얼굴로 기만을 숨겼다.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이 기묘한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바싹 마른 입을 열어 빅터가 간신히 놀람을 꾸며냈다.
“그 사람이 죽었다고? 왜?”
하비는 침묵했다.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혹여나 그가 관계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조차 지우면, 조금 더 의심 없이 빅터의 진심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길 바란다는 얼굴로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멀리서 서늘한 밤바람이 길게 불어왔다.
“혹시, 경이 죽인 건 아니겠지.”
나뭇잎끼리 부딪쳐서 나는 어지러운 소리가 청량하게 빅터의 귓전을 울렸다.
빅터는 바라보는 하비의 시선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밤색 눈동자에 갇혀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묘한 죄책감으로 답답함마저 들었다.
‘왜 이런 거냐고.’
빅터는 바짝바짝 목이 타고 기도가 열기로 타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애써 평소처럼 위장했다.
땀이 나는 손바닥을 주먹을 쥐어 감추고 빅터가 서운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럴 이유가 없는 걸 가장 잘 알 텐데. 왜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거짓을 고할수록 심장은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 아픔은 점점 실체가 되어 빅터를 짓눌렀다.
하비의 눈빛이 기쁨으로 빛날수록 빅터는 더 괴로웠다. 그의 배신이 드러났을 때 예상되는 하비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다. 고요한 밤색 눈이 분노로 일그러지고, 환하게 웃던 입매가 파들거리겠지.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빅터는 온몸을 타고 흐르는 핏줄이 한 올 한 올 분쇄되는 것 같았다.
‘왜 이런 기분이어야 하냐고…….’
크고 날카로운 가시가 심장 속으로 천천히 파고드는 느낌마저 들었다. 짧지만 간헐적으로 고통이 찾아왔다.
지독한 고통에 빅터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마치 커다란 고리에 속박된 것처럼, 하비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신체가 반응했다. 드디어 빅터는 이것이 정상적인 범주가 아니라 판단했다.
‘뭔가 이상한데.’
하비 스터스를 아프게 하는, 혹은 아프게 할 거짓과 기만을 뱉을 때마다 그것이 역으로 돌아와 제 심장을 찔러댔다.
빅터의 변화를 알지 못한 채 하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빅터는 아니었다. 묵은 가시처럼 걸려 있던 의심이 걷히자 하비의 입가에 미소마저 감돌았다.
“다행이군. 나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 괜찮나?”
그제야 그의 안색을 발견한 하비가 당황해서 빅터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듯 빅터는 곧 괜찮아졌다. 하지만 하비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너무 기분 좋아 조금 더 기대고 싶었다. 그러나 빅터는 충동을 버리고 즉시 몸을 떼어냈다.
의지하다니. 그것도 하비 스터스에게.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정말, 뭔가가 이상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빅터가 머리를 휘저었다.
“아, 잠깐 어지럼증이 생겨서.”
하비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 것도 있었나?”
“그러게 소드 클럽에서 작작 하라니까.”
빅터가 구시렁댔다. 그러나 하비는 의외로 이런 데서는 계산이 냉정했다.
“아직 멀었어.”
정말로 안색이 나빠진 빅터가 질색했다.
“……설마 계속 불러내서 그 어지러운 체험을 매일 시킬 셈인가?”
“얼마간은.”
“왜? 당한 게 화가 나서?”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어.”
앞으로도 계속 두들겨 맞을 것을 생각하며 핼쑥해진 빅터가 좋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뭔데.”
하비가 망설였다. 즉답은 나오지 않고 어설픈 침묵만 이어졌다. 왠지 들어선 안 될 것 같았지만 빅터는 홀린 듯이 하비의 대답을 기다렸다.
달빛이 그림자를 거둬내고 있었다. 나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하비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반듯하고 굴곡이 선명한 하비의 얼굴이 절반 정도 밝아졌을 때, 그제야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런 식으로라도 조금씩 비워야 진심을 다할 수 있으니까.”
쿵.
내내 빅터의 심장에 불안하게 매달렸던 묵직한 추가 떨어졌다. 그건 빅터의 내면에 있던 하비 스터스에 대한 케케묵은 이미지였다. 해적선에서 끊임없이 혼자 불안에 떨며 만들어냈던, 빅터 혼자만의 하비 스터스 말이다.
빅터가 오랜 세월 이를 갈며 그렸던 위선적인 하비 스터스와 지금의 그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빅터의 혼란과 함께 한꺼번에 풀벌레가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하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방금 한 말이 추상적이어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하비는 조금 더 말을 이어나갔다.
빅터가 어떤 표정인지 알지 못한 채 하비가 하늘의 장막에 걸린 노란 달을 올려다보았다.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제대로 된 관계를 이어나가기 힘들잖아.”
빅터는 할 말을 잃고 하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속에 쌓였던 빅터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모조리 덜고 나서 진심으로 애정을 받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만큼 성실하고 진지하게 관계를 생각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비 스터스의 계산법은 스터스가 특유의 결벽과 맞물려 무척 엄격했다. 빅터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못 말리겠군.’
빅터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심란해졌다. 혼란이 폭풍처럼 그를 휘감았다. 하비 스터스는 알면 알수록 빅터가 상상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 계속 새로운 파격을 선사했다.
빅터가 살기 위해 치열하게 임했던 그곳은 폭력과 거짓이 난무했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무사히 돌아온 후에 만난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랬기에 빅터는 하비의 계산법이 너무나 생소했다.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제대로 된 관계를 이어나가기 힘들잖아.’
어떻게 이토록 맹목적이고 일관되게 진실 될 수 있을까.
하비는 어릴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놀려주려고 일부러 아픈 척했는데 오히려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었던, 면식 없는 아픈 자를 온몸을 다해 돌보고 지키려던 올곧음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전율이 올랐다. 동시에 자신에 대한 뼛속 깊은 혐오가 울컥 치솟았다.
‘하…….’
그간 발악하듯 하비의 이중적인 가면을 벗겨내겠다며 온갖 굴종을 주었다. 정당한 복수라 되뇌며 하비를 파괴하려 했다.
누군가에게 향하는 감정조차 이토록 소중히 생각하는 이런 사람을 상대로 말이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하비와의 첫 단추를 섣불리 끼워 버린 건 아니었나. 잠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빅터는 즉시 밀려오는 회한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스터스 경이 어떤 사람이든,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비가 그 저주받을 남자의 핏줄이란 것도, 빅터가 사지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서 발버둥 쳤던 시간 동안 하비는 평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빅터의 심장은 짜부라질 것처럼 아프게 조여왔다.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는 것처럼.
‘왜 자꾸 이런 기분이…….’
하비는 그의 속도 모르고 여전히 귓등을 붉힌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간 동안 경이 하는 행동을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이제 본격적으로, 빅터를 제대로 보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빅터의 꾸준한 거짓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기뻐야 하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기쁘지 않았다. 지금처럼 하비를 계속 속일 수 있을까. 빅터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어두워진 빅터의 얼굴을 오해한 하비가 위로하듯 말했다.
“검술 실력이 늘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을 거야.”
“그걸 말이라고……!”
반발하며 번쩍 고개를 든 빅터는 농담을 하고 나서 미소 짓고 있는 하비를 보고 다시 침묵했다.
정말 머리 어딘가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오늘따라 하비가 이상할 정도로 환해 보였다. 그뿐이랴. 그가 거짓을 일삼는 자신을 보며 웃으면 심장을 쥐어뜯기는 듯 고통이 일었다.
내가 정말 하비 스터스를 미워하는 것인가. 그를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빅터는 처음으로 깊은 의문이 들었다. 반드시 재고해 봐야 할,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하비를 속여 마음을 얻은 뒤 그 마음을 꺾어 복수하려던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하비가 팔을 잡으며 얼굴을 가까이하자 그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안색이 너무 이상한데.”
하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일부러 다정하게 굴던 것도 그만두고, 빅터는 얼결에 그의 팔을 떨쳐내었다. 하비의 얼굴이 이상해진 것을 보고 빅터가 서둘러 말을 꾸며냈다.
“이제 환기는 좀 되었지?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것 같거든.”
때맞춰 멀리서 귀부인이 몇몇 목소리를 높이며 오고 있었다. 하비는 빅터가 쳐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반딧불이 작은 날갯소리를 내며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반딧불로 반짝대는 시야 속에서 금발의 아름다운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손을 쳐낸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하비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하비는 속으로 웃었다. 왠지 처음으로 빅터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이제 돌아가지.”
돌아가는 길이 하나라서 어쩔 수 없이 걸어오고 있던 귀부인들과 마주쳤다. 하비는 표정이 굳었지만 빅터는 살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하비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손해만 볼 것 같았다.
반면 하비의 얼굴이 경직된 건 요즘 귀부인들에게 붙들리면 빅터에 대한 것을 시시콜콜 늘어놔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비에게서 빅터와의 관계에 대한 뭔가를 알아내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굴었다.
정원 길 위로 가스등 여러 개가 환하게 빛나서 밤이라도 밝은 편이었다. 그래서 귀부인들의 손에 들린 작은 책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은 하비와 빅터를 보자 서둘러 책자를 등 뒤로 숨겼다.
“어머! 벌써 돌아오시는 길인가요?”
“두 분이 손잡고 나가시길래 어딜 가시나 했더니, 멀리 가진 않으셨네요.”
“저, 정말요. 호호!”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중 한 명은 등 뒤로 숨긴 책자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경사진 곳이라 책이 하비와 빅터가 서 있는 곳으로 굴렀다.
“앗!”
그녀가 깜짝 놀라 굴러가는 책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하비가 주워주려 했지만 빅터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가볍게 떨어진 책을 주웠다. 귀부인은 빅터가 책 제목을 훑어보자 귀까지 붉어졌다.
“저…… 주워주셔서 감사해요. 이만 주시겠어요?”
빅터는 머뭇대는 귀부인에게 책을 선뜻 건네주었다. 흙먼지도 털어서 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처음 보는 책이라 학구열이 불타서 그만.”
“그럴 책이 아니라서요. 조금 부끄럽네요.”
손바닥으로 한쪽 볼을 감싸고 귀부인이 얼굴을 붉혔다. 빅터가 피식 웃고는 덕담을 건넸다.
“요즘 유행하는 사조의 문학이군요. 좋은 책일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말씀 감사합니다.”
귀부인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허둥지둥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귀부인들도 슬금슬금 달아나듯 자리를 피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던 하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책이길래 못 볼 책을 들켰다는 것처럼 구는 거지?”
생각보다 정확한 하비의 진단에 빅터가 속으로 조금 놀라면서 대답해 주었다.
“정확히 봤군. 못 볼 책이라.”
“뭔데 그래?”
빅터는 웃음을 참으며 궁금해하는 하비에게 적당한 진실을 알려주려 했다.
하지만 말을 하려 벌어졌던 입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빅터는 말 대신 하비의 얼굴을 무심코 뚫어져라 보았다. 이 와중에 의문으로 하비의 밤색 눈이 동그랗게 변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저 알파에 체격 있는 자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다니.
‘또…….’
자신의 생각을 인지한 순간 빅터는 스스로를 욕하며 엉뚱한 상념들을 날려 보냈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하비를 보며 헛기침을 한 빅터가 끊겼던 말을 이었다.
“알파와 알파의 결합을 좋아하는 귀부인들의 소소한 문학적 취미. 이 정도로 해둘까.”
요즘 유행하는 알파 대 알파 연인을 두고 귀부인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야한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건 암암리에 많은 이가 알고 있었다. 유명한 알파 연인일수록 인기를 증명하듯 관련 책자가 많았다.
빅터가 문득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우리 것도 있겠지?”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하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알아들을 말을 해.”
“아, 몰라도 돼. 알아도 경의 정신 건강에는 득 될 것이 없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 반을 발견하곤 한 손을 치켜들었다. 생일 파티의 주인공답게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생일 선물은 마음에 들어 한 눈치였던가.’
하비가 반에게 준 생일 선물은 황금 거북이였다. 오랜 우정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금색의 거북이가 흑단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아까 전 미묘했던 분위기도 마음에 걸렸던지라 하비는 반과 선물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탁!
그런데 얼굴이 단단히 굳어버린 빅터가 하비의 팔을 잡았다. 하비가 돌아보며 왜 그러냐는 눈길을 던지자 빅터는 멈칫했다.
반에 대한 것을 하비에게 알려주려고? 이제 와서? 대체 왜? 로투스 경의 말대로 처음 사주한 사람은 빅터, 그 자신이다.
언뜻언뜻 비치는 죄책감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빅터가 가쁘게 진실 하나를 토해냈다.
“반 로투스 경을 너무 믿지 마.”
갑자기 반에 대한 묘한 이야기가 나오자 하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빅터가 진지하게 말하며 녹색 눈을 일렁였다.
“경을 위해서 하는 소리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뭔가 말하려던 빅터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반 로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면 자신이 관여했다는 사실까지 함께 끌려 나온다.
하비에게 알려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그래서 빅터는 끝까지 침묵하기로 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도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