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공개 열애(2권) (4/18)

제4장 공개 열애

하비는 빅터가 부른 의사에게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듯하고 비밀을 엄수해서 그나마 마음이 편한 상대였다.

무엇보다 혼자 치료하기엔 상처가 덧날 수도 있고, 직접 고약을 바르는 느낌이 너무 별로였다. 그걸 바르면서 고통마저 쾌락으로 치환하여 느끼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하비를 집까지 무사히 태워주라는 명을 내린 빅터는 그사이 또 무슨 볼일이 생긴 건지 홀연히 떠나 버렸다.

호출한 의사가 하비의 상태를 진찰한 뒤 해열제를 처방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그들은 마차에 동승했고, 쌍둥이 사용인 중 베타 쪽도 마차 안에 함께 올랐다. 여전히 마부는 알파 쪽이 했다.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의사가 분노를 터뜨렸다.

“도대체 그분은 무슨 생각이신 건지! 너무하십니다. 제가 베르텐 경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빅터의 사용인이 뻔히 눈 뜨고 보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의사는 용감하게 하비 편을 들었다.

그의 상처를 떠올리며 의사가 씩씩댔다. 무릎도 다 까져 있고,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나 널브러져 있던 꽃줄기들, 내벽에 난 상처들을 되짚어보면 빅터가 무슨 짓을 시켰을지 뻔히 보였다.

빅터의 쌍둥이 사용인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넌지시 이야기해 준 것도 있었다.

귀족들의 변태적인 취미에 질릴 대로 질린 의사가 입에서 불을 뿜듯이 굴자 하비가 마차의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담담히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조용히 있어주면 좋겠군. 나도 그 상처들이 썩 영광스럽지는 않으니까.”

말은 그리해도 의사가 함부로 입을 놀리면 빅터에게 죽임당할 거라는 사실쯤은 뻔히 꿰뚫고 있는 하비의 걱정이었다.

베타 쪽이 하비의 염려를 흘리며 의사의 말에 즉각 동의했다.

“제가 생각해도 이번 일은 너무했습니다.”

여태까지 빅터가 한 모든 일에 눈감았으면서 제 주인을 은근히 돌려 깠다.

“밖에서 듣는 소리만으로도 스터스 경의 고충이 과하다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생각해 보니 젤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밖에는 귀 밝은 그의 사용인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하비가 헛기침을 했다.

“이름이……?”

베타 사용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제 소개를 했다.

“벤입니다. 마차를 몰고 있는 놈은 ‘진’이고요.”

“그랬나. 여태 이름도 모르고 지냈어. 앞으론 이름을 불러도 될까?”

정중한 하비의 말에 벤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지요.”

덜컹덜컹!

하비의 얼굴에 희미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구멍 안이 너무 쓰라렸다. 아픔을 드러내지 않도록 애써 숨기면서 하비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곤란한 질문이면 꼭 대답하지 않아도 돼.”

빅터의 베타 사용인, 벤은 흔쾌히 승낙했다.

눈치 빠른 의사는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해주며 자는 시늉을 했다. 머리를 마차 벽에 기대더니 금방 코를 골았다.

하비가 그의 배려에 속으로 미소 짓고는 물었다.

“임페르 해적단 납치 사고로 누굴 잃었지?”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벤은 아무 말 없이 빤히 하비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진지해 보이는 밤색 눈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다 상당한 무례였음을 깨닫고는 벤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동생을 잃었습니다.”

하비의 곧고 선명한 이목구비에 어둠이 깔렸다.

“……그런가. 그럼 그 나스타라는 여자는?”

그 적개심 많고 칼날 같던 알파 사용인을 떠올리며 묻자 벤이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나스타는 오빠를 잃었습니다.”

게다가 집사인 레나는 어머니를 잃었다고 했다. 하비는 레나를 제외한 다른 사용인들의 과거를 물었다. 임페르 해적 사태 때 누굴 잃었는지, 어떤 아픔을 지녔는지 말이다.

차례대로 이어지는 질문에 벤은 간결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하비의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그의 안색을 하나하나 살폈다.

“묻는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하비가 무거워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알고 싶었어.”

새벽의 쌀쌀한 공기가 열어놓은 마차 창문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밖은 너무 늦은 시각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의 불빛만 고요히 따랐다.

하비는 어둠 속에서 제 앞길만 밝히며 달리는 마차가 꼭 자신 같았다. 쓴웃음이 입가에 배어 나왔다.

“난 모르는 게 너무 많았거든. 알아야 할 것도, 귀 막고 눈 돌리면서 지나쳤지.”

죽은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너무 팍팍했다는 변명조차 통하지 않을 것이다.

벤은 지독히도 후회 가득한 하비의 음성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자신조차 모두의 복수에 동참했으면서, 이 처연해 보이는 남자에게 독한 말을 뱉을 자신이 없었다. 별것 아닌 위로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줄 수 있다면 해주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왜 이리 변한 걸까. 무엇이 벤의 마음을 뒤흔든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벤이 힘주어 말했다.

“모르는 일에 대해서까지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고쳐 나가면 되는 거니까요.”

하비는 미소로 답변을 대신했다. 가장 그를 괴롭게 하는 건 빅터인데, 정작 빅터의 사용인들은 따뜻함을 주었다.

순간 마차가 돌부리를 지나치며 덜컹댔다. 칼날 같은 고통이 엉덩이 아래에서 다시 엄습했지만 하비는 익숙하게 입술을 물고 참아냈다.

“그나저나 네 주인은 이 야심한 밤에 어딜 간 거지?”

벤은 난감한 기색으로 하비의 눈을 피했다. 제법 잘 답변해 주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어딜 봐도 두루뭉술한 답변을 되돌렸다.

“주인님은 아주 바쁘십니다. 돌봐야 할 곳도 많고요.”

빅터는 가끔 사업차 만나는 비밀스러운 파트너가 있었다. 파트너의 정체는 남들에게 밝힐 수 없어 벤은 얼버무렸다. 곤란한 기색에 하비도 더 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하비에게 벤이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오메가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하비가 멍하게 눈을 깜박대다가 피식 웃었다. 달리 할 대꾸도 없는 엉뚱한 말이었다. 정식 관계라 못 박은 건 빅터였고, 그건 또 하나의 공개적인 족쇄일 뿐이었다.

하지만 딱히 벤의 오해를 고치지는 않은 채 하비는 침묵하기를 택했다. 때로는 침묵이 괜한 변명보다 낫다.

문득 하비가 자조했다.

‘이게 최선일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를 풀고, 수정하는 일은 하비에게 길고 긴 고통만 안겨주었다. 오해가 아니라 진실임을 알게 되었을 때 받는 타격이 너무 컸다.

마치 빅터와 그의 사용인들이 가진 분노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하비는 열이 오른 얼굴을 덜컹대는 마차 벽에 대었다. 진실이 주는 거대한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덜컹덜컹!

마차가 흔들리고, 몸을 태울 듯한 맹렬한 열기가 뺨과 귀, 옆 이마로 천천히 빠져나갔다.

차가운 기운이 열을 식혀주자 뜨거운 머릿속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그의 머리는 조금 살 만하면 끊임없이 한 사람만을 고집했다. 빅터 베르텐.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빅터는 타고난 수완꾼으로서, 하비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뒤흔들어 놓았다. 가장 아픈 곳을 농락하고, 찔렀다. 그러면서 피 흘리며 아파하는 그를 은근히 제 품에 구겨 넣으려 했다.

‘착각이든 아니든, 너를 가장 잘 알고 인정하는 건 나일걸.’

‘가장 잘 이해할 사람도 나야.’

‘한 번이야. 한 번만 내려놓으면 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장담하지.’

‘혼자 잘 견디고 버텼다는 것도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차라리 그 말에 넘어가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매혹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한 순간, 빅터가 키스했고 하비는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허리에 손을 감고 적극적으로 대했다.

하비가 머리를 흔들면서 상념을 떨쳐내려 했다.

‘어딘가 홀린 것 같군.’

하비를 사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빅터는 하비의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하비는 빅터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그는 기만과 사기에 능한 자다. 약속을 철석같이 지키는 상인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일과 돈이 걸리지 않은 약속까지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자가 걸어온 길이 라힌 스터스 때문에 얼마나 핏빛 가시밭길이었든, 아들인 자신에게 푸는 폭력이 정당하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비는 제 살을 깎고, 뼈를 내주어서 해묵은 원한을 풀고자 했다.

좀 풀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도 사실 했다.

‘이렇게 오래 올 줄은 몰랐지.’

그런데 빅터의 행태는 갈수록 도가 지나쳤다. 이제는 그의 영혼과 마음까지 앗으려 하고 있었다.

송두리째 뒤흔들어 하비를 그 백색 저택으로부터 강제로 떼어놓으려는 것처럼. 스터스가가 이룩한 순결한 유산을 짓밟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스터스가는 하비에게 지켜야 하는 존재인 동시에 발을 묶는 족쇄였다. 하비는 본능적으로 제가 가진 것을 부수려는 빅터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이끌렸다. 그게 문제였다.

어쩌면 백색 외딴 저택에서 숨죽여 지내면서 죽여온 반항적인 기질이 되살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숨 막히는 곳에서 살기 위해 죽여야 했던 그의 저항 정신이, 빅터의 한계까지 모는 그 고통 속에서 씨앗을 틔우고 싹을 맺은 건 아닐까. 하비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 의사가 기지개를 켜며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를 깨었다.

“이런, 깜박 졸았지 뭡니까. 원래 일찍 자는 사람이라.”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자 의사는 계면쩍게 웃으며 하나뿐인 환자를 붙들었다.

“스터스 경.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열이 심한 것 아닙니까?”

하비는 아무렇지 않게 마차 벽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한숨 자고 나면 좋아질 거니 괜찮아.”

“괜찮기는요!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겪으시고 어떻게 금방 괜찮아지시겠…….”

“그만.”

하비가 딱딱하게 안면을 굳히고 의사의 뒷말을 잘랐다. 무슨 말이 더 튀어나올지 몰라 빠르게 조치한 것이었다.

벤이 질린다는 얼굴로 의사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하비에게 말했다.

“안 좋으시면 참지 마시고 꼭 이야기해 주십시오. 참기만 하면 병드니까요.”

“알겠네.”

“근데 그 브로치 말입니다. 주인님이 화내시던 그…….”

차마 말을 다 못 하겠는지 벤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하비도 알아듣고 경직된 얼굴로 아는 척했다.

“아아.”

“얼마 전 시장에서 그걸 사시는 걸 제가 봤습니다. 젤가라는 노예에게 사 준 것이 아니라는 것도요. 주인님이 설마 의미 없이 산 것에 그토록 화를 내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제대로 말씀드릴까요?”

벤과 진은 하비가 시장에서 그 브로치를 한참 만지작대다가 산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젤가보다 빅터의 이미지와 더 가깝다는 것도 눈치챘다. 정작 당사자인 하비 스터스와 그들의 주인인 빅터만 모르는 것 같아 답답했다.

하지만 하비는 단박에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아니, 괜찮아. 지금 와서 해명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나. 내버려 둬.”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얼결에 다시 집어 온 금빛 브로치를 하비가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그는 브로치의 매끄러운 면을 손으로 쓸면서 녹색의 큰 보석을 눈에 담았다. 깎인 녹색 단면은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모든 걸 담을 것처럼 속이 비치는 것 같은데, 막상 가까이 들여다보면 예상외로 불투명했다.

하비는 딱 한 번,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빅터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막 깨어났을 때 보이던 혼탁함이었다.

“베르텐 경이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인가?”

벤이 어두운 얼굴로 순순히 털어놓았다.

“예. 심할 때는 몽유병처럼 돌아다니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가.”

빅터가 악몽에 시달릴 때, 깨어나자마자 애타게 잡았던 그 손길이 생각나서 하비는 손목을 매만졌다.

‘그 느낌은 뭐였지.’

막 깨어난 빅터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불안정해 보이고, 눈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위험천만한 상황의 인간 같았다. 오만한 평소의 모습은 어딜 가고 매달리는 한 사람만 오롯이 남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타인을 깔아보듯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 차이가 낯설었다. 아프게 하면서 이해한다 말하고, 아끼는 것처럼 굴다가도 또 가차 없이 상처를 준다. 정말이지 헷갈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비는 브로치를 도로 집어넣었다.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만 심란해졌다. 다시 열이 오르고 호흡이 힘들어졌다. 기분 탓인지 상처가 났던 구멍도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의 굴욕이 다시 떠올라 화가 났지만 그의 기분을 삭이려는 것처럼 곧바로 빅터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따라붙었다.

널 가지고 싶다고, 원한다고.

‘베르텐 경이 그리 말한 적이 있었던가.’

하비가 곧장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혈맥이 불규칙적으로 뛰고 심장이 쾅쾅 울렸다. 열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분노가 지나쳐 몸이 이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빅터를 만난 이후로 그가 알던 모든 것이 여지없이 뒤집어지고, 모습을 달리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의 마음조차도.

* * *

다음 날, 오랜만에 청에 돌아온 빅터에게 대리인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빅터가 자리를 비울 때를 대비해 세워둔 대리인은 핏기 없는 안색에 다크서클이 길게 늘어진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무너질 것 같은 서류 더미를 양팔로 가득 안은 그가 여유롭게 들어오는 빅터를 맞이했다. 빅터는 어느 때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파리한 안색의 대리인과 달리 혈색이 돋고 건강해 보이는 피부에서 윤이 났다.

“그간 쌓인 서류 다 제가 처리했습니다. 저한테 혹시 미안한 건 없으십니까?”

빅터가 귀찮다는 얼굴로 책상에 놓인 서류를 한 무더기 움켜쥐었다. 한 손에는 청 앞의 베이커리에서 산 갓 구운 빵을 들고 있었다.

“전혀. 그러려고 널 대리인으로 세운 건데. 네 할 일 한 것뿐이잖아.”

“제가 대리인인 건 맞는데요. 그렇다고 제가 전부 처리하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쉬지도 못하고 청에서 먹고 자고 했단 말입니다.”

빅터는 고소한 향이 일품인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상단 일과 베르텐가의 현 가주가 떠넘기고 간 일들을 처리하는 데만도 벅찬 빅터였다.

‘귀찮게.’

이런 징징대는 하이톤의 소리보단 다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하비의 나지막한 저음을 떠올리던 빅터가 물고 있던 빵을 뱉어냈다. 미친 거 아닌가. 당혹스러움은 곧 짜증으로 바뀌었다.

“나도 일부는 집으로 챙겨 가서 해.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지. 지금 당장 넘겨줘?”

“의원님!”

빅터가 빵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털며 삐딱하게 대꾸했다.

“대리인 자리 때문에 네 아버지가 나한테 쏟아부은 술값도 아직 다 회수 못 했을 텐데.”

억울한 얼굴로 뭔가 항의하려던 대리인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였다. 꼭 누군가를 닮은 것 같은.

빅터는 익숙한 페로몬을 맡았다. 시원하고도 청아한 기운마저 도는 깨끗한 페로몬이었다.

‘설마.’

안색이 휙 달라진 빅터가 들어오라 말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였다. 하비가 동그란 문손잡이를 잡고 서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었다.

“스터스 경?! 여긴 어쩐 일로…….”

오늘도 하비는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한 업무 차림이었다. 남색 겉옷에 금장 단추마저 정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고, 손목에는 빅터와 마찬가지로 풍성한 하얀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밤색 머리칼도 한 올 한 올 빗어 넘겨서 깔끔했다. 어젯밤의 굴욕과 수치는 전혀 보이지 않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리인이 당황스워하며 고개를 푹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복도를 지나가던 사용인들이나 청 관련자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사귄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를 하비가 몸소 인증한 것이다.

빅터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어지럽게 널린 서류 더미를 가리듯 그 앞을 막아섰다. 완벽주의자인 하비에게 엉망인 집무실 현장을 보이는 것이 껄끄러웠다.

하비가 수군대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말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네.”

하비는 결코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선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뻣뻣하게 밖에 서서 말했다.

“지나가다가 들렀어. 혹시 잊었을까 봐.”

빅터가 반쯤 벌린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아아. 저녁 약속?”

하비가 다니는 외교부 건물은 빅터가 있는 청 건물보다 한참이나 더 가야 했다. 가는 도중에 기억하고 들러서 만남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었다.

빅터는 묘한 감정에 젖어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

빅터는 어제까지 하비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것도, 심지어 그걸 행한 사람이 본인이라는 것도 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근데 몸은? 좀 괜찮은 건가?”

빅터의 뻔뻔함에 하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알면서 묻는 건가. 의사가 처방해 준 해열제가 잘 듣는 건지 어젯밤처럼 열이 나지는 않지만 여전히 구멍 안이 얼얼했다. 병 주고 약 주는 데는 아주 탁월했다.

‘열 받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하비는 빅터의 물음을 일부러 묵살하고 용건만 말했다.

“일 끝나면 약속한 대로 소드 클럽에서 곧 보지. 아.”

지체 없이 뒤돌아섰던 하비가 고개만 뒤로 돌리고 말했다.

“저녁은 든든하게 먹고 와. 허기지면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 힘들 테니까.”

문이 조용히 닫혔다. 하비의 성격처럼 문을 여는 것도, 닫는 것도 정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빅터가 힘을 빼고 책상 앞을 벗어나 제자리로 갔다. 의자에 앉자 조금 현실감이 들었다. 고요한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청의 대리인이 한심한 듯 그런 빅터를 보았다.

“의원님. 그렇게 좋으세요?”

“내가 뭘.”

“계속 웃고 있으시잖아요.”

빅터는 말도 안 된다며 극구 부인했다.

“잘못 본 거겠지.”

빅터의 업무 대리인은 이름이 ‘폰’으로, 그의 부모와 더불어 스터스가의 오랜 지지자였다. ‘폰’은 로열 가드에게 대대로 수여되는 별칭 같은 것이었는데, 정작 하비는 쓰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터스가의 무용을 칭송하는 자 중에는 자식의 이름을 일부러 그리 짓는 자들이 있었고, 대리인도 그러한 경우였다.

이미 빅터의 변명 같은 대답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꿈꾸는 듯한 얼굴로 폰이 말했다.

“스터스 경은 여전하시네요. 넘치는 기품, 우아한 발걸음, 멋지세요…….”

빅터는 노란 눈썹을 찌푸리며 대리인인 폰을 노려보았다. 순간적으로 폰의 형질이 무엇인지 따졌다. 생각해 보니 베타였다. 그 순간 원인 모를 경계심이 스르륵 사라졌다.

‘웃기는군.’

그 넘치는 기품과 우아한 발걸음을 지닌 자가 간밤에 비싼 꽃들을 구멍에 꽂은 채 맨몸으로 바닥을 기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빅터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하비 스터스의 치부였다. 그리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개운해졌다.

“해야 할 일 많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이제 움직여.”

빅터는 늘어진 손목의 레이스를 다른 손으로 받치고 잉크병에 고풍스런 깃이 세워진 펜을 꽂았다. 그러나 종이에 찍으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빅터가 폰을 타박했다.

“잉크병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하나.”

폰이 입을 삐죽대면서도 착실하게 새로운 잉크병을 내왔다. 빅터는 그 시간마저 몹시 느리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업무 시간이 몹시 긴 것 같았다.

탁.

현 의원의 집무실 문이 제대로 닫힌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하비는 긴 숨을 내쉬었다. 빅터 앞에만 서면 그에게 당했던 것들이 고스란히 떠올라서 긴장이 되었다. 어깨가 바짝 굳고 뒤가 자꾸만 욱신거렸다. 아직도 빅터의 것을 품고 있는 것처럼.

아닌 척해도 몸이 기억하는 것들은 언제나 그의 이성을 앞섰다.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빅터의 목소리에도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문고리를 꽉 쥐었을 정도였다. 야성적인 페로몬이 그의 온몸 구석구석 거칠게 파고들어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하비는 어제의 굴욕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토록 힘들게 했으면서 낯짝 두껍게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고작…….

‘괜찮냐는 질문이나 태연하게 던지는 놈인데.’

그는 복도를 빠르게 지나가며 분기를 터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대다가 하비의 무서운 얼굴에 말도 걸지 못하고 지나쳤다.

“의원님과 싸우셨나?”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였어?”

“벌써 사랑싸움인가.”

수군대는 주변의 목소리에 하비는 천천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감옥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일그러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펴면서 하비가 속으로 한숨지었다.

‘다 그놈 때문이지만.’

문을 열자마자 제일 처음 보인 것은 놀란 듯하다가 물 흐르듯 변하는 빅터의 표정이었다. 얼떨떨함에서 반가움으로 바뀌는 찰나에 용건을 던지자 아예 기쁜 듯 은은하게 미소 짓기까지 했다.

하비가 그를 굳이 몇 번이나 되새기게 하며 소드 클럽으로 불러내는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좋아하니 마음이 켕겼다.

하지만 하비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여태 빅터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하비다운 작은 복수였다. 그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소소한 앙갚음이 될 것이다.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데까지 몰린 건가.’

스스로가 한심해졌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빅터는 분명 선을 넘었다. 하비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긴 지 오래였다. 그걸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빠르던 하비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더 나은 선택지를 위해 최대의 끈기를 가지는 것이 그의 성정이자 직업이었다. 혹독하기만 한 시련을 탈출구 모색 하나 없이 견디기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하비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빅터에게는 끊임없이 휘둘리고 칼자루를 뺏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냐. 노력했다고.’

빅터에게 약점 잡힌 것들에 대해서도 그사이 하나하나 알아왔고, 진실의 실체에 상당히 접근했다. 믿을 만한 자에게 맡겨놓은 스터스가의 재무 조사 내역도 곧 보고를 받을 예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협박만 당하는 것과 알고 당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그리 자위하면서도 하비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빅터가 쥔 것을 뺏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가 쥔 칼을 더욱 엄정하게 살피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비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등 뒤로 한기가 찾아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막고 맹렬히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지?’

여기까지만 해야지. 다음엔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멈추지 못하고 지금의 상황까지 와버렸다. 빅터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단정해 버리고 체념했다.

그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를 얼얼하게 때리는 충격이었다.

“어?”

마침 청으로 들어오고 있던 반 로투스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하비가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반은 바로 표정을 고치고는 하비를 불러 세웠다.

“스터스 경! 여기!”

앞만 보고 걸어가던 하비가 우뚝 멈춰 섰다. 고개만 살짝 틀어 상대를 확인하던 하비는 반을 발견하고는 몸을 휙 뒤로 틀었다.

“로투스 경?”

바깥에서는 친한 사이라도 예의를 갖추는 반이었기에 하비도 이름 대신 성을 불렀다.

반이 다가와서 살갑게 말을 붙였다. 청 앞에서 하비를 보자마자 쭈뼛대던 모습은 어딜 가고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이틀 뒤에 내 생일 파티가 열리는 건 알지? 꼭 와. 작년보다 더 성대한 파티가 열릴 예정이니까.”

파티를 즐기고 싶은 심정은 전혀 아니었지만 하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근데 베르텐 경과 함께 오는 건가? 그…… 아무래도 두 사람, 그런 관계니까.”

‘그런 관계’라고 말할 때 반의 표정이 아주 이상했다. 웃는 것도, 일그러뜨리는 것도 아닌 난감한 얼굴이었다. 하비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어지는 반의 말에 하비는 그가 왜 그리 난색을 표했는지 알 수 있었다.

“베르텐 경도 생일 파티에 초대했거든. 당연한 거지만.”

보통 귀족끼리 연인 관계일 경우에는 겹친 행사가 있을 때 동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연인은 사람들에게 끈끈한 사이임을 과시하며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화려하게 치장하고 오곤 했다.

그런데 반은 다른 이들보다 하비에 대해 잘 알았다. 하비는 진심으로 빅터를 싫어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두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거대한 스캔들의 중심에 선 것이다. 아무런 내색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이다.

만약 그토록 싫어하던 자와 연애가 진행되고 있었다면 하비의 성격상 티가 났을 것이다. 반은 그의 오랜 친구라서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이상하단 말이야…….’

반이 하비가 나온 건물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에서 나오는 걸 보면 베르텐 경과 만나고 오는 길이겠지?”

하비는 반의 시선을 피했다.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을 통해서 전해도 될 것을 직접 왔다는 것은 굳이 하비도, 반도 지적하지 않았다. 동시에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인가? 베르텐 경과 사귀는 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하비는 한숨으로 대신했다. 알아들은 반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험난해 보이는걸.”

“그랬지.”

지금도 그렇고. 하비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켰다. 반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들겼다.

“힘든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신경 써줘서 고맙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 관계로 돌아온 것 같아서 하비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반의 얼굴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상을 감지한 하비가 물었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나?”

반이 한참 고민하다가 겨우 물었다.

“혹시 말이야. 어젯밤에…….”

즉각적으로 하비는 자신이 표정 관리를 잘했을까 걱정했다. 어젯밤 가면 투자회에 빅터와 함께 갔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당황한 하비가 입매를 만지며 경직된 것을 풀었다.

‘정신없어서 눈치 못 챘을 줄 알았는데.’

물론 하비는 반의 목소리를 듣고 가면 투자회의 사회자가 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하비 자신은 되도록 반의 앞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들켜도 사실 별일은 아니었지만 서쪽 방에서 빅터와 있었던 일련의 사건 때문에 밝히기가 찜찜했다. 하비 혼자 켕기는 것이었다.

다행히 반은 싱긋 웃더니 평소처럼 하비를 대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늦겠어. 얼른 가.”

“생일 파티 때 보지.”

그때 반이 하비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반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묘하게 서먹해져서 이런 식의 포옹은 그간 한 번도 없었다.

하비가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다가 곧 편안한 자세로 반의 등을 역시 가볍게 두들겼다. 반이 하비의 얼굴을 마주 보고 씨익 웃었다.

“얼굴 펴고! 베르텐 경과 잘 지내길 바라. 힘들게 하면 꼭 나한테 이야기하고. 이틀 뒤에 봐.”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한 반이 먼저 떠났다.

그 자리에 서 있던 하비는 작게 미소 지었다. 누군가의 지지를 받는 기분은 언제든 좋은 것이다. 잃었던 뭔가를 되찾은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다.

‘음?’

순간 하비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휙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관심 없이 지나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뭐지?’

어리둥절하게 뒤를 더 살피던 하비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늘 가던 외교부로 걸음을 옮겼다. 반과 만나기 직전에 어떤 생각을 집요하게 했던 것 같은데 서먹했던 친우와의 심정적인 화해로 금방 휘발되었다.

빅터의 생각을 좀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비는 빅터가 있을 청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따가운 햇살이 눈을 가려 손날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회색빛 청 건물에 빅터가 있을 집무실이 어렴풋이 보였다.

‘뭐, 상관없지.’

그의 머릿속은 금방 빅터가 밀려나고 업무적인 것들로 가득 찼다. 마치 빅터에 대해 오래 생각하면 나오지 말아야 할 어떤 끔찍한 결론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의식이 빠르게 빅터를 지웠다. 오늘도 중요한 일이 잔뜩 쌓여 있을 것이다.

하비가 자리를 떠난 직후, 의원실의 청회색 커튼이 거칠게 닫혔다.

* * *

낮이 짧아지고, 계절은 선선하게 돌아서고 있었다. 빅터는 짧아진 해가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지루한 업무 시간도 단축되었으니까.

소드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빅터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하비를 제일 먼저 발견했다. 일부러 찾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사람들 틈에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던 하비도 마찬가지로 빅터를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하비의 눈을 따라 빅터에게 향했다.

둘 사이에 뜻 모를 기류와 정적이 흐르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졌다. 어느덧 여기저기서 터지던 소음이 완전히 죽고, 침묵만이 남았다. 간간이 들리던 칼 부딪치는 소리조차 사라졌다.

빅터와 하비의 주변으로 몰려든 귀족 청년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둘 중에 하나가 말을 꺼내야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이 깨질 것 같았다.

아직도 그들이 사귄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형성한 스터스가를 따르는 파와 베르텐가를 따르는 파의 균형을 깨지 않고 있었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빅터가 여유롭게 웃더니 하비에게 다가갔다. 그는 군중 속을 헤치고 그 핵을 이루고 있는 하비의 손을 잡았다. 하비는 말없이 고요한 눈빛으로 빅터를 보았다.

빅터와 만난 이후로 항상 차갑던 하비의 손에 웬일인지 따뜻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굳은살이 많고 길쭉길쭉한 손을 끌어당긴 빅터가 하얗고 부드러운 뺨에 키스하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빨리 오려고 했는데 일이 늦어졌어.”

긴장한 채 서 있던 귀족 청년들이 한꺼번에 헛숨을 들이켰다.

당사자인 하비는 말없이 뺨을 손등으로 닦았다. 오전에 있었던 일도 어느새 소문이 퍼져 있어서 대부분은 두 사람이 싸운 것으로 생각했다. 연인 관계임을 믿지 않던 귀족 청년들은 한탄했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애정 행각에 얼굴을 붉혔다.

하비는 내심 당황하긴 했지만 빅터의 이런 쇼가 놀랍지는 않았다.

“저녁은 든든히 먹고 왔나?”

하비는 확인하려는 것처럼 또 한 번 물었다. 사실 빨리 오기 위해서 대충 빵으로 때웠지만 빅터는 그렇노라 답했다.

빅터의 대답에 하비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들고 있던 끝이 뭉툭한 얇은 레이피어를 어깨 위에 올렸다.

“오늘은 나와 대련을 하지. 어때?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귀족 청년들의 눈에 일제히 불빛이 반짝였다.

“워!”

“오오!”

이미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한 시점부터 알게 모르게 이쪽으로 쏠리던 시선이었다. 구석에서 연습하던 귀족 청년들이 환호하며 레이피어마저 던지며 달려왔다.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었다.

하비 스터스 경은 항상 빅터 베르텐 경과의 정면 대결을 피해왔다. 빅터가 가끔 도발한 적도 있지만 한 번도 넘어가지 않고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하비가 먼저 대결을 청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빅터도 조금 놀란 듯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그런 속셈으로 이곳으로 부른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알쏭달쏭했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혹은 하비답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빅터도 제 몫의 레이피어를 어깨에 올렸다. 냉랭한 눈으로 하비를 마주 보며 빅터가 대꾸했다.

“싫다고 할 이유가 없지. 땀 빼고 난 뒤가 기대되는군.”

의도적으로 하비와의 데이트를 은근히 흘린 빅터의 말에 다른 자들이 대신 귀를 붉혔다.

역시 빅터의 말에 대꾸도 않은 하비가 곧장 그를 중앙으로 불러냈다.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긴장한 가운데, 대결이 시작되었다. 대결 전 복식을 갖추고 예의를 보인 뒤, 본격적인 검술이 펼쳐졌다.

그리고 빅터는 깨달았다. 하비가 왜 그리 저녁을 먹고 오라고 채근했는지.

까앙!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빅터는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막긴 했지만 자칫 가슴에 찔릴 뻔했다. 손목이 얼얼했다.

끼기긱!

눈 깜짝할 사이 하비가 품으로 파고들어 레이피어를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비는 조용히 일갈했다.

“검술을 머리로 하나? 정신 차려.”

하비는 무서운 기세로 그를 몰아쳤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폭풍 같은 검술이었다. 여태까지 보여준 검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청년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죽여 대결을 지켜보았다.

그들도 슬슬 깨달았다.

“……스터스 경 맞지?”

“그런 것 같네만.”

“평소엔 적당히 하고 있었던 건가.”

지금껏 대련할 때 하비가 제 실력을 전부 발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힘은 빅터가 우위였지만 날렵함은 하비 쪽이 훨씬 위였다. 거기다 체중과 속도까지 완벽히 활용하는 검술이라 본래 가진 힘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까앙!!

소드 클럽에서 대련할 때 이런 소리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긴 레이피어가 유연하게 휘었다가 되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부딪친 검 사이에서 불꽃이 튈 정도였다.

하비의 밤색 눈이 조용히 빛났다.

하비를 상대하는 빅터는 죽을 맛이었다. 하비가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 교묘하게 다른 것을 유도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하비는 심지어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호흡도 거의 일정했다.

까각……!

빅터의 팔에서 근육이 튀어나올 것처럼 퍼렇게 솟았다. 검을 맞대고 있는 그만 알 수 있는 엄청난 기세였다. 이미 하비의 리듬에 휩쓸려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비는 일부러 빅터의 무게중심을 계속 옮겨 다니게 하고 있었다. 위장 속에 있는 것들이 한데 뭉쳐 다니며 빅터를 괴롭혔다. 하비의 검술을 좇다 보니 어지러이 이리저리 춤을 추듯 했다.

한마디로, 하비의 검술은 빅터에게 엄청난 멀미를 유발했다.

결국 참다못한 빅터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굴욕적인 자세로 손을 들어 대결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고작 10분도 안 되는 허무한 대결이었다.

막 몽둥이처럼 날아오던 하비의 레이피어가 그의 뺨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얇고 뭉툭한 끝이 빅터의 얼굴 근처에서 파르르 떨었다.

“잠깐.”

그가 파리한 안색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는 겨우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았다.

“……내가 ……졌어.”

빅터의 손에 쥔 레이피어가 힘없이 떨어졌다. 빅터가 누군가에게 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들 놀라 눈만 굴렸다.

둥글게 모여 구경하던 귀족 청년들을 헤치고 빅터가 빠르게 퇴장했다. 다행히 사람들 앞에서 엎드려 토하는 굴욕만은 면했지만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치욕적인 모습이었다.

하비도 곧이어 빅터를 뒤따라갔다. 다들 웅성대면서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논의했다. 빅터를 추종하던 무리 중에는 불쾌한 듯 소드 클럽을 나가는 자도 보였고, 하비를 따르던 자들은 통쾌하게 웃었다.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하비는 빅터가 조금 가엾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더 가혹하게 몰아붙일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혹독하게 훈련받아 온 하비와 해적선에서 살상용으로만 배운 빅터의 검술은 당연히 차이가 났다. 더군다나 하비는 로열 가드 가문 대대로 쌓인 무가의 경험치를 그대로 전수받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하비가 대결을 피해온 것은 괜히 빅터를 자극해서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빅터가 공개 열애로 그를 외부에서까지 정신적으로 괴롭힐 생각이라면, 하비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예정이었다.

“욱!”

빅터는 야외의 수도관 앞에서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말만큼 많이 먹은 것은 아닌지 토사물은 별로 없었다.

하비가 그의 곁에 천천히 다가갔다. 빅터가 틀어놓은 수도에서 투명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연신 문질렀다.

옆에서 팔짱을 낀 하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든든하게 먹고 왔다더니, 내용물을 보니 먹은 것도 별로 없군.”

“시끄러워……. 우욱!”

다시 한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빅터가 수도관 아래에 멀건 위액을 쏟았다. 더 나오는 것도 없었다. 빅터는 다시 한번 차가운 물로 입안을 헹궜다. 그사이 하비가 빅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안 빅터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꿈틀대던 빅터가 하비를 대뜸 잡더니 휙 끌어당겼다. 당긴 그대로 빅터가 입술을 박고 혀를 밀어 넣었다. 입술 박치기에 가까운 키스였다.

하비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시큼한 위액 맛이 나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빅터의 미끈한 혀가 더욱 깊게 밀려들어 하비의 입천장을 넓게 훑었다. 하비가 손가락을 움찔했다. 달려드는 그의 페로몬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몇 번 더 거칠게 달려들던 키스에 하비가 밀어내려 할 때쯤 빅터는 알아서 물러났다.

팔을 꽉 잡았던 빅터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가 떨어졌다.

번들거리는 입술로 빅터가 씨익 웃었다. 하비는 흔들리는 눈으로 방금 당한 것을 곱씹었다. 입맛이 텁텁했다.

“방금 토한 사람과 키스한 소감이 어때?”

하비는 찜찜한 얼굴로 빅터의 옆에 서서 말없이 물을 틀었다. 격렬하게 입을 헹군 하비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입술을 닦으며 내뱉듯 말했다.

“……이나의 가게에서 파는 도리 빵을 먹고 왔군.”

“이나가 빵을 참 잘 굽지.”

말없이 동의하던 하비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유치하게 사람들 앞에서 빅터를 망신 주려고 계획하고 그걸 끝까지 이룬 자신도, 얄밉다고 악착같이 이런 식으로 갚은 빅터도 우스웠다.

이게 뭐 하는 건지.

잠잠하게 웃고 있는 하비를 빅터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멍하게 보느라 수도꼭지를 반대로 돌린 바람에 물이 수도관에서 콸콸 쏟아졌다. 수압이 너무 세서 물줄기가 튀어 옷도, 머리칼도 다 젖었다.

화들짝 물러난 두 사람은 젖은 꼴로 머쓱하게 각자 다른 곳을 보았다. 갑자기 밀려든 침묵이 어색했다. 이런 식의 고요함은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햇빛이 지나치게 따가웠다.

그때까지도 수도관은 폭발하듯 분수처럼 시원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뭐 하는 건가?”

“미안.”

얼결에 사과의 말을 전한 빅터가 반대로 꼭지를 돌려 수압을 낮추었다.

끼익.

녹슨 수도관에서 긴 소리가 났다. 젖은 생쥐 꼴인 하비가 옷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대강 털어냈다. 머리까지 다 젖었다.

하비가 뚝뚝 물이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 올렸다. 갑자기 튄 물보다, 예상치도 못하게 나온 빅터의 사과가 더 사고처럼 다가왔다.

“더한 짓을 해도 사과 한번 못 받았는데, 이런 걸로 받을 줄이야.”

하비는 빅터가 코웃음 치며 뭐라고 받아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 빅터는 얌전히 입을 닫았다.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일침을 놓은 하비는 말없이 입안을 계속 헹구었다. 빈말 하나 없는 빅터가 다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입술을 닦는 척하던 빅터는 곁눈질로 하비를 보고만 있었다. 복잡한 시선이었다.

하비의 하얀 러플 블라우스가 물에 젖어 반쯤 투명하게 변해 탄탄한 가슴의 윤곽이 드러났다. 입술을 박박 닦고 있는 길고 곧은 손에도 물기가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도 수려한 얼굴은 잠잠하게 떨어지는 붉은 노을 안에서 빛이 났다.

빅터는 눈을 돌리려 했지만 누군가가 붙든 것처럼 턱이 움직이지 않았다.

‘뭘 계속 보고 있는 거냐.’

반짝대는 물방울 사이로 점점 떨어지는 붉은 석양이 걸려 석류알같이 보였다. 하비는 결벽증 환자처럼 이제 얼굴까지 씻고 있었다. 하비의 큰 손이 가득 물을 담아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지켜보던 빅터의 목울대가 길게 일렁였다.

하얗고 긴 목덜미에 이어 그 아래까지 눈길이 갔다. 단단한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눈이 더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빅터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런 사람이 그의 발아래에서 기어 다니기도 하고, 온갖 능욕을 감내하기도 했다.

빅터는 그 사실을 떠올리곤 묘해졌다. 우쭐해지거나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쿵, 쿠웅-

빅터의 심장이 우울한 것처럼 느리게 뛰었다. 하지만 빠르게 뛰는 것보다 더 생생했다. 내가 살아 있노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리지만 확실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당황해서 하비처럼 얼굴을 물로 크게 적셨다. 옆에서 하비가 이상한 듯 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져 아래로 웅덩이를 만들 정도였지만 빅터의 느린 심장 박동은 그치질 않았다.

‘왜 이러지.’

하비 스터스를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있나? 과거의 일로 어떻게든 상처 입히려고만 했지, 그를 면밀하게 살펴볼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알 생각도 없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알려고 하지조차 않았다.

그러다 문득 빅터는 쓰게 자조했다. 무얼 가장 싫어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겠군.’

그게 그리 신경 쓸 만한 일인가. 빅터는 자신이 왜 지금 와서 이딴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하비는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이상 빅터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수라고 해봤자 이런 소소한 것이다.

‘이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지.’

귀족들 앞에서 대결에서 져 굴욕을 보이는 것? 하비 본인에게는 몹시 큰 스트레스가 될 상황일 수도 있지만, 빅터는 조금 부끄러우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는 하비만큼 명예나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체면치레를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필요할 때 귀족다운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뿐이다.

빅터가 속으로 웃음 지었다.

‘이런 걸 복수랍시고 하다니.’

그에겐 얼굴 붉히는 것으로 끝날 일이긴 해도 어쨌든 기분이 상하기는 했다.

물론 이런 식의 앙갚음에 더 큰 것으로 되갚아줄 수도 있었다. 하비는 이미 그에게 가지고 놀기 손쉬운, 거기다 분풀이도 할 수 있는 적당한 장난감으로 전락한 사람이다. 못 할 게 어디 있나.

그리 생각한 순간, 빅터의 상상 속에서 평온하던 저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히 사라졌다.

거의 반사적이었다. 빅터는 매달리듯 저도 모르게 불쑥 잊어가던 것을 하비에게 상기시켰다.

“그 약 말인데.”

경쟁적으로 입을 헹구던 것을 멈추고 하비가 고개를 들었다. 물은 여전히 금빛 수도관 아래 청량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빅터가 말없이 물끄러미 하비를 보았다. 사심 없는 녹색 눈을 보자 하비는 빅터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입에 담기도 싫은, 체질을 강제로 변형시키는 신약일 것이다.

깨달은 순간, 미약하게 웃음기가 돌던 하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무표정해졌다. 싫어도 곧바로 어떤 결론으로 치달았다.

‘설마 이 일로 약을 쓰는 보복을 하겠다는 건가?’

얼마간 빅터가 하지 않아 잊고 있었다. 하비는 오메가로 변하는 과정에서 빅터가 하는 짓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모조 성기로 구멍을 넓히라고 하기도 하고, 채찍을 휘두르기도 했다. 게다가 완전히 오메가로 변한 뒤에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강한 쾌감에 몸으로 매달린 적도 있었다. 그것이 가장 괴롭고, 힘들었다. 원하지 않는데 고작 생리적 욕구에 져서 쌓아 올린 것들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비는 익숙하게 떠오른 두려움을 숨겼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그 빅터 베르텐이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겪었는데 이대로 넘어갈 리가 없다.

그런데 빅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또다시 하비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뜻 모를 눈빛을 한 채 선언하듯 천천히 말했다.

“앞으론 안 쓰겠다고.”

하비는 믿기지 않는 듯 입을 벌렸다.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호르몬 교란제인 신약을 언급한 순간 불안해지는 하비의 표정을 빅터도 읽었다.

빅터는 물이 떨어지는 수도관을 꽉 잠그고 스스럼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하비 앞에 있는 관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흘렀다. 빅터는 그 수도관도 하비 대신 잠가주었다. 끼익대는 소리는 말소리에 묻혔다. 빅터가 앞에 서자 하비의 큰 키를 가릴 만큼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왜냐니.”

깨끗하다 못해 너무 물을 쏟아부어 파랗게 질린 입술을 보면서 빅터는 순간 다시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어울리지 않게 끼어든 감상을 스스로 묵살하며 빅터가 만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불어오고, 그들을 둘러싼 푸른 식물들이 바르르 떨었다. 불쑥 빅터의 길고 풍성한 눈썹 아래 눈이 다정한 척 휘었다.

빅터가 하비의 차가운 손을 천천히 잡았다. 움찔대는 하비를 똑바로 마주 보며 빅터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소.중.한.연.인.을 그리 다루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높은 콧대와 이어진 매력적인 입술이 하비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가 떠났다. 검을 오래 잡아 단단한 뼈가 드러나고 굳은살이 많은 하비의 손이 연신 꿈틀댔다. 그의 얼굴은 석양이 내려앉은 것처럼 붉어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손등에 남아 있는 듯했다.

지나치게 강조된 ‘소중한 연인’ 발언에 하비가 오묘한 낯빛을 보였다. 요컨대 빅터 스스로 설정한 공개 연인 관계에 충실하겠다는 의미였다. 소소한 보복을 당했음에도 오히려 지독한 신약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도 했다.

하비는 늘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던 상대가 적극적으로 구애하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자가 누구보다 달콤한 말을 흘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마음을 홀리려 한다.

심장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가파르게 뛰었다. 그토록 자신과 가문을 더럽힌 자에게. 그것도 같은 알파한테.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건 무슨 심리인지 하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의심을 놓고 편해지고 싶었다. 긴장한 채 매번 언제 당할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보다 믿는 자로 두고 싶었다.

하비는 평소에도 정적이 많았다. 위에 선 자일수록 발치를 흔드는 바람이 요란한 법이다. 하비를 존경하는 자도 많았지만 교묘하게 적의와 질투를 감추고 접근하는 자도 많았다. 가려내는 것도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다.

‘정말 믿어도 되나.’

빅터가 고개를 든 순간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한 하비가 의무인 것처럼 되물었다.

“무슨 속셈이지?”

더욱 효율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역할극에 심취하다 보니 정말 빠져들기라도 한 건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하비의 물음을 무시하며 빅터가 어느새 저만치 먼저 걸어갔다.

“둘 다 젖었으니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가야 하지 않겠어? 새 옷은 내가 준비해 두겠어.”

하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친절한 빅터가 낯설었다.

이제 어스름하게 가라앉기 시작한 저녁 하늘이 붉은색에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빅터의 금빛 머리칼이 하늘과 같은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었다.

문득 생각난 듯 빅터가 뒤돌아 덧붙였다. 녹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고 익살맞게 반짝였다.

“모두의 앞에서 내 무릎을 꿇린 건 아까 그걸로 갚았어.”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툭 친 빅터가 휘파람을 불며 소드 클럽으로 빨려가듯 들어가 버렸다. 몹시 즐거워 보였다.

하비는 인상을 쓰며 다짐했다. 절대 이번 한 번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빅터를 소드 클럽으로 불러낼 핑계는 앞으로도 충분했다. 거짓이긴 해도 공인된 연인이니까. 거절 못 하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혹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본인이 뱉은 말은 정말 지키려나 보군.’

그렇다면 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하비는 주먹을 세게 다잡았다. 빅터에게 당했던 구멍 안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 * *

빅터가 준비해 둔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 하비는 여느 때처럼 늙은 회계사를 돌보았다. 말을 자주 시키는 게 좋다는 주치의의 조언으로 그에게 이야기도 자주 했다. 젤가가 보답으로 몰래 구해다 준 주치의였다. 젤가와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편지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오늘도 잘 계셨습니까?”

하비는 그를 모셔둔 비밀 방에 들어오면서 말을 걸었다. 주로 일기 같은 내용을 많이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들, 업무상 생겼던 사건들이었다.

빅터와의 일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껄끄럽기도 했지만 회계사가 들어서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퀭한 눈빛이 하비를 향했다. 얼마 없는 희끗한 머리칼이 간신히 볼품없는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야기에 약간의 반응은 하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평소처럼 업무 이야기를 늘어놓던 하비가 머뭇대다 겨우 입을 열었다.

“자꾸 저를 흔드는 놈이 하나 생겼습니다만.”

빈 동공이 조용히 하비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저를 진심으로 미워했던 사람입니다. 제게 맺힌 것이 많은 자라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괴롭혀 대던 놈인데.”

하비가 다시 머뭇대다가 말했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갑자기 제가 좋다는군요.”

“…….”

“황당하시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데. 그런데…….”

빅터를 떠올리자 하비는 가슴속 어딘가에 찌릿한 둔통이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빅터가 유일한 이해자 같았다. 오랜 시간을 오로지 하비 스터스와 그 가문만을 지독하게 생각하고 집착했던 남자다. 악연으로 엮였지만 어찌 됐든 스터스 가문의 가장 내밀한 비밀과 하비의 속내에 접근한 유일무이한 남자이기도 했다.

하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어보고는 싶군요. 너무 오래 혼자였습니다.”

외로움이 얕은 숨에도 묻어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때 하비는 그가 자꾸만 작은 목소리로 어떤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잘 들리지 않아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예?”

“마음 가, 가는 대로…….”

회계사가 쭈글쭈글한 입술을 간신히 움직이며 더듬댔다.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하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가 원하던 말을 회계사가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하비는 크게 실망했다.

“의원님. 저는 그저 따르겠습니다.”

하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에게 하는 소리였다. 회계사는 아직도 과거에서 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동공이 머나먼 지난 시간을 비추고 있었다.

“악이든, 선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하는 것이 전부 옳습니다……. 자신을 믿으세요.”

늙은 회계사가 중얼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비가 천천히 일어났다. 마음속에서 뭉근하게 피어나던 감정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하비는 침대에 걸터앉아 썩은 등걸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당신은 항상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었지. 내게든, 아버지에게든.”

하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충신이야.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는 말이었다.

결국 현실로부터 눈 돌리게 하는, 무서운 독 같은 조언.

“아버지는 그런 독이라도 마시고 싶었겠지.”

그리고 자신도.

빅터 베르텐이라는 맹독을 말이다.

하비는 안부를 전하며 회계사의 손을 잡아주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늙은 회계사의 손가락이 움찔댔다.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무고한 시민들이 흘리는 피는 제가 다 마시겠습니다…….”

넓은 유리창으로 별빛이 고요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다음 날.

다짐대로 하비는 그날도 빅터를 소드 클럽으로 끌고 왔다. 빅터가 떨떠름하게 얇은 대련용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잡으면 숫제 하비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지켜보던 귀족 청년들이 질려서 차마 못 볼 정도였다.

“으…… 또야.”

“내가 토할 것 같다고.”

“동감일세.”

하비를 따르던 청년들조차 그의 지독함에 고개를 내저었다.

하비는 멀미를 유발하는 그 어지러운 검술로 빅터를 곤혹스럽게 했다. 이에 대응해 빅터도 아예 저녁을 먹고 오지 않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멀건 위액을 토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오늘도 요란하게 기침을 뱉으며 수돗가에서 입을 축이고 있는 빅터에게 하비가 모른 척 다가가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나.”

먹이를 낚으려는 것처럼 빠른 손이 날아왔지만 하비는 이제 여유롭게 피했다. 저번에는 모르고 당했지만 사람은 경험으로 사는 동물이다.

빅터가 이를 갈면서 축축한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언제까지 이럴 거지?”

피식 웃던 하비는 진지하게 태도를 바꾸고 가지고 온 레이피어를 가죽끈으로 고정된 검집에 넣었다. 깔끔한 동작으로 구불거리는 힐트에서 손을 떼며 하비가 말했다.

“이유를 알려주면 생각해 보고.”

“무슨 이유.”

“날 싫어했잖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던 거 아닌가?”

빅터는 한 번 더 수돗물로 입술을 축이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머릿속에 산소가 들어오자 하비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담담한 척하지만 몹시 초조해 보였다.

‘어리석긴.’

결국 그는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의심조차도 정직하게 부딪쳐 온다. 하비 스터스다웠다.

속으로 웃은 빅터는 숨을 길게 내쉬더니 짧게 답했다.

“그랬지.”

하비가 눈을 치켜떴다.

“그랬지? 지금은 아니라는 말인가?”

빅터는 답답한 듯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해. 내가 아직도 경을 그토록 증오하고 저주한다면 부른다고 달려 나와서 이 개고생을 하고 있겠어? 아직도 못 믿나?”

“경이 스터스가 사람들을 믿지 않듯이, 나도 마찬가지야. 베르텐가 사람들은 신의를 지키지 않아.”

가문에 대한 애정이 눈곱만큼도 없는 빅터였지만 무시하는 것 같은 하비의 발언에 발끈했다. 경고성으로 날아오는 날카롭고도 묵직한 살기에도 하비는 끄떡 않았다.

“물론 신용과는 다른 문제지. 상인으로서의 신용은 철보다 더 단단히 지키지만, 아닌 것에는 언제든 돌아서는 걸 몇 번이나 봐왔어.”

입이 써진 빅터는 차가운 물을 다시 머금었다가 뱉어냈다.

“그럼 뭐에 대고 맹세하면 믿을 생각이지?”

“경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빅터가 미간을 은은하게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라…….”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빅터는 언제나 같은 것을 보고 그것만을 위한 맹목적인 삶을 살았다.

“그럼 나는 내가 여태껏 모은 돈에 대고 맹세하지.”

겨우 돈이라. 베르텐가 사람다운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하비는 허탈해졌다. 하비에게 돈은 단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게 목적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깟 돈이 뭐 그리 소중하나?”

빅터의 입매에 쓴웃음이 비스듬하게 걸렸다. 이 고상한 남자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않았다.

“그깟 돈 때문에 목숨을 여러 번 구했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거든.”

해적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빅터가 돈을 벌어다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투자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지니지 않았더라면, 좋은 물건을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험난한 살의 속에서 일찍이 어린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돈 때문에 그를 죽음 앞에 내던졌다.

돈 때문에 죽을 뻔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돈 때문에 살아났다.

빅터의 입에 기이한 자조가 담긴 끈 떨어진 인형 같은 미소가 맺혔다.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달려 있었다.

“돈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눈빛만은 진실하였다.

“그것만이 날 인간으로 있게 하고, 나를 살게 해.”

하비로서는 정말 이해 가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빅터의 눈을 보고 있자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진지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산 사람이다. 당연히 같을 리가 없었다. 모든 걸 이해할 수도 없었다. 각자 지키려고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빅터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하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참이나 고민하듯 깊게 패던 하비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사실은 이미 끝난 문제일지도 몰랐다. 어디 한번,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드디어 하비가 입을 열었다.

“……그래.”

빅터가 대번에 반색했다.

“그럼 이 짓도 그만두는 건가?”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그만둔다고 하진 않았어.”

좌절하는 빅터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보던 하비가 덜컥 엄청난 발언을 했다.

“진심을 알린다고 생명 같은 돈에 맹세할 정도인데 말이지.”

하비가 말갛게 웃음 지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재산의 절반을 떼어서 줄 수도 있는 건가.”

빅터가 깜짝 놀라 주춤 뒤로 물러섰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하비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달라고 안 해. 나한텐 필요도 없는 거니까.”

하비가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인 줄 몰랐다. 빅터는 멍하게 웃고 있는 하비를 보았다.

사실 돌이켜 보면 하비는 친한 사이에는 유쾌한 농도 간혹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걸 잊고 있을 정도로 하비에게서 안 좋은 표정만 꺼내온 것이 빅터 자신이었다.

‘그럼 마음을 열었다는 건가?’

친근한 사이로 대해준다는 건, 이제 믿어준다는 의미인 건가.

빅터의 혼란은 모른 채 하비가 회중시계를 꺼내 들더니 불쑥 내일 일정을 말했다.

“내일 반 로투스 경의 생일 파티에 같이 가는 건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하비는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가 놓았다. 스쳐 지나가면서 하비의 레이피어 힐트가 빅터의 허리춤에 닿았다.

“실망시키지 마.”

짧은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준비를 잘하고 와서 자신을 욕보이지 않게 해달라.

적어도 연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까.

네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

빅터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적어도 하비는 자신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다. 집요하게 틈을 파고든 결과였다.

그러나 빅터는 성공했다는 희열보다 착잡함이 앞섰다. 실망시키지 말라는 말이 이상하게 심장을 조였다. 하비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아릿하게 그의 가슴을 압박했다.

하비의 진심은 언제나 무거웠다.

희미하게 달라붙는 막연한 죄책감을 떨쳐내던 빅터가 자신을 비웃었다. 죄책감? 그런 건 하비가 가져야 할 감정이다.

‘같이 어울리더니 나도 이상해지고 있는 건지.’

빅터는 머리를 흔들어 끈적하게 얽어매는 하비에 대한 생각을 마저 떨구어냈다.

오늘 저녁에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며칠 후에 있을 의회 회합을 위한 사전 준비를 해야 하고, 가장 큰 동직 조합(길드)에서 일어난 분쟁을 조정해야 하며, 도로세에 대한 불만이 많아 세율 조절도 고려해야 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중심은 ‘돈’이었다. 의원이 하는 가장 큰 일도 세금 관리와 돈 쓸 곳을 정하며, 제대로 된 쓰임새로 투입하는 것이다.

‘그 위선자는 못 한 거지.’

라힌 스터스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빅터는 불쾌한 듯 미간을 구겼다. 공교롭게도 하비는 외양적으로는 어머니 쪽보다는 라힌 스터스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하비를 보면 그 양심 없는 작자가 생각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곤 해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막 하비를 따라 소드 클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빅터는 소리를 죽이고 나타난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주인님.”

검은 머리에 알파 페로몬을 지닌 여자였다. 전에 하비를 덮칠 뻔도 했던.

빅터는 반사적으로 하비가 있을 건물을 힐끔 보았다. 그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날카롭게 물었다.

“나스타.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급히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나스타가 고하는 내용에 빅터는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얼른 줄이긴 했지만 흥분까지 완전히 가라앉지는 못했다.

“회계사 놈이 사라져? 어디로?”

“그건 모르겠어요. 목격자도 없고, 철저하게 했나 본데요?”

“눈도 먼 사람이 감시를 뚫고 혼자 움직이기는 힘들 테고 분명 누가 도와줬겠지.”

누가 그랬을지는 훤했다. 빅터는 차갑게 웃었다.

“스터스 경.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넘어오는 척하면서 뒤로는 이런 여우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였다. 누가 누굴 배신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뒤통수를 강렬하게 때리는 행동이었다. 하비가 그에게서 더 얻어낼 것은 없겠지만, 회계사는 본인이 저지른 짓으로 여생을 힘들게 살아야 할 놈이었다.

조용히 분노하던 빅터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라힌 스터스의 일들은 전부 사실이다. 다만 하비가 모르는 마지막 진실 한 조각이 남았을 뿐.

그 진실을 당시 라힌 스터스 의원의 재무 담당이었던 회계사가 확실히 알고 있다.

‘그걸 제 손으로 거두어 갔다니.’

이대로 영영 묻어버릴까 생각도 했었는데, 하비는 아무래도 운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제 가슴을 후벼 팔 칼을 굳이 포장까지 곱게 해서 집으로 가져갔을 줄이야.

‘그건 내가 직접 알려줄 생각이었다고.’

하비 스터스의 육체를 희롱하고 휘젓는 것도, 그의 마음을 조각조각 찢는 것도 모두 자신이 해야 한다. 다른 자가 제멋대로 난입해서 알리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곰곰이 고민하던 빅터가 나스타에게 명했다.

“은밀하게 찾아내.”

“찾아내면 어떻게 처리할까요?”

빅터의 눈이 냉정하게 빛났다.

“죽여.”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사고사로 위장해. 스터스 경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러다가 만약 스터스 경에게 걸리면? 그땐 뭐라고 하실 건데요.”

나스타가 까만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마치 걸리길 바란다는 듯한 물음이었다. 주인임에도 빅터가 사용인들과 워낙 막역한 사이다 보니 종종 놀리려는 행태를 보였다. 너무 풀어줬나 생각하며 빅터가 엄하게 말했다.

“안 걸리게 네가 일 처리를 잘해야겠지. 그 정도 실력도 안 되는 줄 몰랐는데.”

“제대로 할 건데, 만약이 궁금해서…….”

풀이 죽어서 목소리가 작아지던 나스타가 불쑥 불편함을 토로했다.

“근데 ‘그 새끼들’ 면상 좀 안 보면 안 되나요?”

또 이 소리다. 빅터는 피곤한 듯 한숨 쉬었다. 나스타가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빅터의 사용인들과 대립하는, 같은 상단에서 사이가 좋지 않은 무리가 있었다. 빅터도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정이 있어 공생하는 관계였다.

주인의 곤란을 못 본 척한 그녀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볼 때마다 칼로 쑤시고 싶은 거 얼마나 참는데. 상단 일이라서 참는 거지. 아니었으면 그냥……!”

빅터는 나스타의 불만을 단칼에 잘랐다.

“여태까지 참은 만큼 계속 참아.”

그녀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나스타뿐만 아니라 사용인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불만임을 빅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랠 수밖에.

“그리고 이번 일까지만 처리하면 이제 분리하기로 했잖아. 앞으로 볼 일 없을 거야.”

나스타가 구시렁대면서 왔던 것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알겠다고요.”

마침 샤워실에서 간단히 씻고 야외로 나오고 있던 하비가 나스타를 발견하고는 흠칫 굳었다. 그녀는 빅터가 준 신약으로 오메가가 되었을 때 덮치려 했던 알파 사용인이었다. 벤이 해준 말이 연달아 떠올랐다.

‘아, 임페르 해적 사태로 오빠를 잃었다던 그……. 무슨 일이지?’

같이 나오면서 수다를 동반하던 귀족 청년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나스타라는 저 여자가 나타나면 항상 좋지 않은 일이 따라붙었다. 과한 걱정일지는 모르겠으나 하비의 직감은 꽤 잘 맞는 편이었다.

하비의 옆에 있던 귀족 청년들이 수돗가에 서 있는 빅터를 발견하곤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저기 베르텐 경 아닌가? 아직도 안 가고 있나.”

“스터스 경을 기다린 건 아닌지.”

모두의 시선이 하비에게 향했다.

하비는 불편한 얼굴로 주변의 따가운 눈빛을 피했다. 그러다 되레 빅터와 눈이 맞아버렸다.

큰 키에 품이 넉넉한 어깨, 균형이 잘 잡혀 탄탄한 상체 아래 긴 다리가 차례대로 보였다. 본의 아니게 훑어본 것처럼 되어 하비는 마주친 눈을 슬그머니 반대편으로 돌렸다.

하비가 시선을 피하자 이유를 모르는 빅터는 불쾌한 듯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딜 가려고?”

빅터의 부름에 하비가 이야기하던 것을 멈추었다. 주변 청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먼저 가보겠네.”

덜 마른 머리칼을 한 채 하비가 빅터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빅터는 하비의 주변에 벌처럼 붙어 나불대는 몇몇 귀족 청년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비의 청량한 페로몬이 그들의 페로몬에 가려 빅터는 짜증이 치솟은 상태였다.

“어딜 가는 거냐니까.”

“곧 저녁 약속이 있어서.”

빅터의 짙은 금빛 눈썹이 불만스럽게 휘었다.

“누구와?”

하비가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 꼭 말해야 하나.”

빅터는 꼭 하비가 가는 곳을 일일이 고지하고 다녀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하비의 대답에 머리를 굴리던 빅터가 우선 조건을 물었다.

“내가 동석해도 되는 자린가?”

“뭐?”

당황한 하비가 대답을 꺼렸다. 빅터가 함께 가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다.

외교관들끼리 뭉치는 자리긴 했지만, 빅터가 가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의원을 데려가면 더 좋아할 것이다. 총괄 외교관이 현재 빅터를 몹시 아끼고 있고, 다른 외교관들도 그와 안면을 트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까.

하비의 생각이 조금 더 나아가다가 의기양양한 빅터의 표정에서 멈추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실패를 해봤을 것 같지 않은 자신 가득한 모습이었다.

쌓아온 제 실력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는 자들이 대개 이런 얼굴을 한다. 외교부에서도 무수히 보는 얼굴이었으나 빅터의 것은 달랐다. 권력욕에 찌든 음심이 아니라, 아직 격 높은 야망이 남아 있는 자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하비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한쪽으로 기울었다.

‘데려가도 이상한 관계는 아니게 되었으니…….’

고민하던 하비는 빅터와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나쁠 건 없었다. 다만 기분이 좀 이상할 뿐이었다. 그 끔찍한 신약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부터 빅터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 우스꽝스러운 왈츠를 출 때부터였나.’

그때 이후로 아버지 라힌 스터스에 대한 일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고 빅터가 한 일들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고통이 연장되지는 않고 있다.

하비의 머릿속은 마음대로 이 상황을 좋은 것으로 납득했다. 지속되던 아픔이 한순간에 사라진 자리에 부드러운 애정이 쏟아진다. 혼란 속에서 거짓이라 의심해 봐도 잠시뿐이었다.

아직까지 빅터는 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결 온화해진 눈빛도 하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결국 하비는 홀린 듯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상관없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빅터가 예의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하비는 마법에서 깬 것 같았다. 누군가가 뒷목에 찬물을 부은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내일 있을 반 로투스의 생일 파티는 그렇다 쳐도, 업무 관계에서 만나는 동료들과의 자리에 빅터와 함께 가다니?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하비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빅터를 노려보았다. 또 당했다.

빅터가 싱글대면서 아까 전 하비가 한 것처럼 그의 어깨를 쥐었다.

“씻고 나올 테니 기다려.”

손을 떼고 떠나던 빅터가 급히 뒤돌더니 다시 한번 강조했다.

“혹여 먼저 가진 말고.”

왠지 말해두지 않으면 먼저 출발해 버릴 것 같아서였다. 빅터의 예상대로 버리고 갈까 잠깐 생각했던 하비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흠칫했다.

물론 조금도 그런 생각 따윈 하지 않은 것처럼 하비는 태연하게 말했다.

“기다릴 테니 천천히 나와.”

끝까지 못 미더워하던 빅터가 사라지고 난 뒤, 하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가자고 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아까 전 귀족 청년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빅터와 뜨거운 관계인 것으로 한데 묶여 취급당하는 것이 아직 부담스러웠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이미 허락했으니 할 수 없지.’

어쨌든 빅터를 기다려 함께 마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이동한 하비는 기대했던 반응들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골목에 가스등이 은은하게 주홍빛 불빛을 내고 있었고, 격식 있는 벽돌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바삐 지나다녔다.

하비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다소 우울해 보였다. 오늘도 술고래인 총괄 외교관의 희생양이 되는 건가, 암울한 그림자로 가득했다. 그러나 외교관들의 분위기는 하비 일행이 오자 한 번에 되살아났다.

“이게 누군가!”

총괄 외교관이 제일 먼저 빅터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뒤이어 다른 외교관들도 두 사람을 보고는 안색을 달리했다.

“의원님, 스터스 경, 안녕하십니까!”

“세상에, 두 분이 함께 오신 거예요?”

빅터가 쓰고 온 모자를 벗으며 호의적인 미소를 한껏 짓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갑자기 자리에 끼게 되어 죄송합니다. 미리 연락드릴 시간도 없어서…….”

정말로 미안한 듯 빅터는 말끝을 흐리다가 슬쩍 본론을 던졌다.

“불편하신 게 아니면,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빅터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하비가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보았다. 저 가식은 여전하다.

하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다른 외교관들은 빅터가 정말로 가버릴까 봐 잡는 데 급급했다.

“불편이라뇨!”

“시의원님이시라면 대환영이죠.”

결국 빅터는 외교관들이 붙들어서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가시죠!”

펍이 많고 왁자지껄한 옆 건물에 비해 이곳은 고급스럽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고위 공직자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열정적인 토론이 간간이 오가다가 끊기곤 했다.

그러나 하비와 빅터가 함께 들어오면서 내부가 묘하게 들떴다.

당연히 첫 화제는 두 사람의 관계였다. 하비가 불편해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두 분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쩌다 알파인 분들이…….”

대놓고 물어보는 한 어린 외교관의 질의에 하비는 난감한 얼굴로 그저 술만 부었다. 대답은 자연스럽게 빅터에게 넘어갔다. 그는 쏠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태평하게 어깨만 으쓱했다.

“대화를 좀 해보니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통하는 것도 있고, 귀족스럽지 않게 생각도 트였다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더군요.”

퍽이나. 하비는 그의 입에 발린 소리에 헛숨만 들이켰다. 공통점이 많다고? 통하는 게 있다고? 대체 뭐가? 되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하비는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나 빅터의 대답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외교관들은 알아서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테이블에 놓인 고기 한 점을 나이프로 자르며 한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의원님은 귀족의 특권 의식이 싫다고 자주 그러시긴 하셨지요.”

“스터스 경도 꽉 막힌 것 같지만 결정적인 데서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시니까요.”

“두 분이 잘 맞으시겠네요.”

자기들끼리 추측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포도주가 금방 동났다. 하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다행이긴 한데.’

하비가 반대편에서 태연하게 다음 포도주를 따고 있는 빅터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시작은 고작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폭력이었다.

하비는 빅터가 진심이라고 완전히 믿지는 않으면서 왜 이런 자리에까지 데려왔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믿고 싶은 거겠지.’

자신이 이리도 나약했던가? 누군가의 진심에 매달릴 만큼? 하비가 조용히 자문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목으로 넘어가는 포도주가 썼다.

빅터는 외교관들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하비는 위화감을 느꼈다. 옆 사람과 이야기하며 기품 있게 웃는 빅터가 낯설기도 했다. 그와 함께하는 자리가 편안하면서도 아늑할 수 있다니.

‘정말 이상해…….’

하비가 잔을 만지작대며 빅터의 옆모습을 흘끔댔다. 간간이 빅터가 그를 보며 은밀한 미소를 흘렸다. 시원한 눈꼬리를 올리며 사람들 몰래 눈웃음을 보냈다.

하비는 속이 간질간질하게 조여들어서 어색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신약의 영향을 받아 오메가가 된 것도 아닌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빅터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우성 알파다운 강렬한 페로몬과 어우러져 매력적으로 보였다.

‘술이 오른 건가.’

너무 많이 마시긴 했다. 그러니 다 술 때문이다. 하비는 알딸딸한 기분으로 음식들엔 일절 손대지 않고 빈속에 술만 부었다. 멀쩡한 정신으로 이런 기분을 느낄 리가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을 재밌는 듯 보고 있던 외교관 하나가 서두를 꺼내 들었다.

“참, 예전에 외교부에서 스터스 경이 고백받았던 건 아십니까?”

“벌써 반년이나 지난 일을 지금 와서 왜 꺼내 드나.”

하비가 불편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이미 신이 나고 술기운과 흥이 오를 대로 오른 그는 멈추지 않았다. 빅터는 그만두게 하려는 하비를 막고는 미소 지으며 그를 독려했다.

“계속 들려주시죠.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외교부에서 가장 인기 있던 신입 외교관이었는데 뭐, 지금은 결혼했지만요. 저번 달에요. 노리는 사람이 많았는데 결국 스터스 경에게 고백하더군요.”

빅터가 턱을 괴고 눈을 어둡게 빛냈다.

“호오. 그래서요.”

“스터스 경이 거절하면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나는 일과 결혼했다, 뭐 그런 흔한 이야깁니까?”

점점 차가워지는 빅터의 표정을 못 보고 이야기를 과장스럽게 꾸며내려던 외교관은 하비의 저지에 입도 못 열었다. 하비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 버린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이니 나보다 더 좋은 사람과 만나라고 했어. 이제 됐으니 다른 이야기나 하지.”

“그때도 여전히 재미없었군.”

빅터의 핀잔에 모두 동의했다. 일에 치여 살다가 솔로 생활이 길어지고 있는 외교관들이라 연애는 늘 관심사였다. 그런데 담백하게 살며 아무와도 엮이지 않던 하비가 갑자기 공개 연애를 발표해 버려서 다들 질투 반, 부러움 반으로 짓궂게 굴었다.

외교관이라는 직업 때문인지 열린 사고를 지닌 자들이 대부분이라, 알파끼리의 교제에 대해서 불쾌함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점점 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능글맞은 총괄 외교관이 본심을 내비쳤다.

“의원님이 보시는 업무 중에 정책을 승인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빅터는 그가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눈썹을 치켜올려 무언으로 되물었다.

“저희가 밀고 있는 것이 좀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렵니까.”

빅터가 손깍지를 끼고 테이블 위에 경청하는 자세로 놓았다. 신뢰가 가는 낮은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며 빅터는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말씀해 보시죠.”

맞은편에서 빅터를 반짝이는 눈으로 보던 외교관이 거들었다.

“역시 우리 의원님은 듣는 것도 천부적이십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빅터를 향한 아부에 하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과한 아부를 격이 떨어진다 생각하는 면모도 있지만, 그보단 마음이 불편했다. 심지어 나이 지긋한 총괄 외교관은 빅터에게 필요 이상의 호감을 보이며 은근한 압박을 주기도 했다.

‘역시 괜히 데려온 건가.’

하비가 후회하는 동안 총괄 외교관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우리 아들이 의원님을 너무 좋아해서 초상화도 제 용돈 다 털어서 구입했는데, 언제 한번…….”

경청하는 태도로 일관하던 빅터가 손깍지를 풀고 딱 잘라 거절했다. 잠깐이지만 하비와 눈이 맞닿았다. 하비에게서 불쾌한 기색을 확인한 빅터가 의미심장하게 한쪽 입술을 휘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죄송합니다. 그건 들어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말투는 몹시 단호했다. 말도 다 꺼내기 전에 거절당한 총괄 외교관이 당혹스러워하며 변명했다.

“아, 물론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따르는 아이의 마음을 봐서 잠깐만 지도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아비의 마음입니다. 허허! 설마 제가 ‘그런 의미’로 말했겠습니까. 스터스 경이 버젓이 여기 있는데요.”

얼결에 지목된 하비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그런 의미’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 누가 들어도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비는 그가 빅터의 투자 정보력을 탐내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고, 꿍꿍이가 있음도 알았다. 자식을 통해 빅터에게 정보를 우선적으로 받겠다는 심보 아닌가. 속 시원히 말하지도 않고 얼버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총괄 외교관이 술만 들이켜고 있는 하비를 곁눈질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마음 넓은 스터스 경이 설마 베르텐 경이 고작 잘 따르는 아이에게 커피 사 주는 정도로 기분 나빠 하겠습니까?”

드디어 과묵하게 입을 닫고 있던 하비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분위기를 보고 있던 빅터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모르셨나 본데, 스터스 경이 보기보다 속이 많이 좁습니다.”

빅터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특히 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니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비는 마시던 술을 다 뱉을 정도로 심하게 기침을 했고, 다른 외교관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총괄 외교관은 당황을 감추고 실망스러움을 보였다. 그래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이런. 스터스 경이 연애를 하더니 변했나 보군.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졸지에 속 좁은 사람이 된 하비는 대화에 끼기를 포기하고 남은 술을 거덜 내기 시작했다. 이럴 땐 빠른 포기가 답이다.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남는 게 없는 자리 같았다.

한 병 두 병 늘어난 빈 병이 테이블 한편을 가득 메울 때가 되자 생각지도 못한 의견 다툼이 벌어졌다.

가장 영향력 강한 하비와 총괄 외교관 두 사람이 의견 대립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눈치만 봤다.

총괄 외교관이 잔뜩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로 나이프를 책상에 땅땅 두들겼다.

“도대체 그 쓰레기 섬은 왜 매입하자고 하는 건가?! 귀한 보석이 채굴되는 곳도 아니고, 열악해서 사람 살기도 팍팍한 곳이잖아. 대체 왜?”

하비가 테이블을 지도처럼 쓰면서 전략적인 이점을 설명했다.

“그곳 바다, 즉 영해를 쓸 수 있잖습니까. 거점이 되면 훌륭한 상업적, 군사적 요충지로 쓰일 겁니다.”

“당장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요즘 가장 위험한 해적이 그쪽 영해를 다니고 있는 걸 모르나?”

총괄 외교관의 반박에도 하비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취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또렷한 말투였다.

“해적은 소탕하면 됩니다. 섬 매입이 장기적으로 국익이 된다 판단되면 국왕께서도 소탕할 군대를 허가해 주실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빅터가 흠칫하며 하비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하비는 주장을 펴기에 바빠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제 아버지와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걸 본인은 아는 건가.

빅터는 턱을 쓸면서 흥미로운 주제에 몰입했고, 이미 혀가 꼬이기 시작한 총괄 외교관이 주절주절 반박했다.

“그게 말처럼 쉬워? 쉬우면 일찍이 임페르 해적단도 소탕했겠지!”

임페르 해적단이 언급되자 그제야 하비가 빅터를 넌지시 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고, 빅터는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것처럼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하비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해적 때문에 깊은 고통을 당했던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너무 무신경했나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든 것도 잠시, 여태 빅터가 했던 행동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그 미안함조차 사그라들었다.

그 와중에도 총괄 외교관의 반발은 이어졌다.

“애초에 소탕할 군사는 어디 있으며, 군사 비용으로 투입할 세금은 썩어 돌아? 안 그래도 전쟁에서 져서 배당금 때문에 속 시끄러운데 군사를 동원하면 주변국에서 무슨 빌미를 잡을지!”

하비는 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받아쳤다.

“그 섬을 매입할 기회가 지금밖에 없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도미니크에서 헐값에 팔아넘기려 하고 있는데, 왜 이 기회를 잡지 않으려 하십니까? 1에이커당 고작 2기나밖에 하지 않습니다. 우선순위로 두지 않으면 슬루인 제국에서 먼저 채갈 겁니다. 국력은 해상 무역이 장악한 지 오래고, 반드시 영해를 넓혀야 합니다.”

수석 외교관인 하비 스터스와 총괄 외교관의 의견 대립이 요즘따라 잦았다. 그나마 굽혀주던 하비가 최근 뭔가에 자극을 받기라도 했는지 몹시 의욕적이라서였다. 원래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렇게 밀어붙여서까지 제 뜻을 관철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총괄 외교관은 하비의 뜻에 동감하면서도 자신에게 반발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윽고 하비는 화장실을 가겠다며 일어났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빅터가 양해를 구하고 뒤따라갔다. 막상 따라가니 하비는 화장실로 간 것이 아니라 벽돌 건물에 기대서서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답답한 모양이었다.

가스등 아래 늘어진 긴 그림자가 하비의 다리 아래 출렁였다. 키가 크고 늘씬하게 체격 좋은 몸이라 그림자조차 그에 걸맞았다.

빅터가 슬그머니 하비의 옆자리에 가서 나란히 섰다. 함께 타고 온 덩치 큰 마차가 두 사람을 넉넉하게 가려주었다.

오늘따라 달이 동그랗고 환한 빛을 뿜어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같이 달을 올려다보며 빅터가 제안했다.

“내가 힘이 되어주지.”

산책 나온 것처럼 한가한 목소리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비가 놀라 되물었다.

“뭐?”

따가운 시선이 빅터의 옆얼굴에 닿았다.

“안 그래도 곧 의회에 나가야 하거든. 잘 밀어붙이면 국왕께서도 알아주시겠지.”

하비가 미심쩍게 확인했다.

“설득할 방법이 있나?”

“방법이야 만들면 되는 거고.”

벽에 상체를 기댄 빅터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늙은 너구리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건 단순한 쓰레기 섬이 아니야.”

“그러면?”

빅터는 순간 하비가 희망에 차서 바라보는 것이 귀엽게 느껴졌다. 순수한 열망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장 그리 생각한 자신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하비의 마음을 쥐기 위한 작업이자 수단이었다. 쥐고 나면 더 효율적으로 하비 스터스를 망가뜨릴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황철석이 나지. 그 외 다른 매장 자원도 꽤 된다고 알고 있고. 잠재 가치를 따지면 보석보다 훨씬 값질걸. 매장된 것들이 발견된 지 일주일밖에 안 돼서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

빅터의 답변은 놀라웠다. 해상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용한 보물섬이라는 말이었다.

하비가 의심스럽게 빅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씩 웃으며 대답을 회피한 빅터가 본론부터 말했다.

“도와줄 테니 놓치기 전에 빨리 매입해. 눈독 들이는 하이에나들이 꽤 되거든.”

하비의 얼굴에 희비가 스쳐 지나갔다. 좋긴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총괄 외교관님 말씀대로 해적이 문제긴 하군.”

하지만 이마저도 빅터가 시원시원하게 해답을 내놓았다.

“올란시에서 공식적으로 해적 소탕 작전을 승인하면 되는 거 아닌가. 모집할 군자금은 시 재정에서 끌어다 쓰지.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 붙이면 정말로 국왕의 군대를 쓸 수도 있고. 저번 의회 회합 때도 해적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긴 했거든.”

하비는 물끄러미 빅터를 보았다. 누군가가 발 벗고 나서서 자신을 도와주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하비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많았지만 역으로 도움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말없이 보기만 하자 빅터는 피식 웃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든든해서 감동받았나?”

하비가 다른 곳을 보며 모른 척했다. 은은하게 귀가 달아올라 있었다.

“감동은 무슨.”

“방금 감동받은 얼굴이었는데.”

실랑이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쓸데없는 소모전이라는 생각에 동시에 피식 웃었다. 밤바람이 오늘따라 유독 선선하고 간지러웠다.

하룻밤의 꿈 같은 잔잔한 분위기가 금방 사라지자 하비는 곰곰이 생각했다. 빅터가 말한 것들이 정말이라면 의미가 있었다. 그러려면 시의원인 그의 힘도 필요하다.

하지만 대가 없는 이득은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하비는 빅터가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는 것이 더 두려웠다. 더욱이 시 재정 같은 공공 자산을 끌어들이면 실패 시 빅터가 부담해야 할 것이 컸다. 빅터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무거운 책임인 것이다. 고작 자신의 의견 때문에 다른 자에게 그런 책임감까지 얹을 수는 없었다.

하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은 고맙지만 개인적으로 제안한 것을 시 재정에서 예산을 뺄 순 없어.”

“그럼 개인적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면 되는 건가?”

“원래부터 계획된 정책도 아니잖아. 의회 승인이 날지도 모르고, 무리한 건 하지 않는 것이…….”

“며칠 전 험하게 대한 걸 사과하는 걸로 치지.”

몇 번을 반복해도 빅터는 빈틈이 전혀 없었다. 결국 하비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경이 아무 조건 없이 해준다는 건 믿을 수 없어.”

“왜?”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상인 집안 사람이니까.”

그들은 돈의 논리에 휘둘리며 누구보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람들이다. 하비의 이중 잣대였다.

아직 보수적인 기득권의 문명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하비에게 최근의 투자 과열 사태는 못마땅한 현상이었다. 기사도 정신 따위는 한 점 남아 있지도 않은 자들이 불명예스러운 짓도 서슴지 않고 한다. 오로지 한낱 거래의 수단인 것을 위해서 말이다.

빅터가 거리를 좁히면서 의뭉스럽게 물었다.

“흐음. 아직도 어엿한 정치인으로는 안 봐주는 건가. 돈으로 자리를 사서?”

하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늘 하던 말이었는데, 왠지 빅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자신이 상처 입은 듯했다.

돈으로 샀다는 표현은 사실 틀렸다. 돈으로 사는 것도 결국 실력이다.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빅터는 시대를 대변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도 샀다. 세상이 변했고, 그는 그 세상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누구보다 빨리 터득했을 따름이었다.

하비도 잘 알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대비책도 마련하고 있었지만 빅터와 얽히면 생각이 항상 일관되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음이 약해져 하비는 자신이 했던 말을 조금 수정했다.

“……정치인이라면 더하지. 판의 유리함을 따지면서 결정은 언제든 번복할 수 있잖아.”

“그건 할 말이 없군.”

피식 웃은 빅터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 뭐든 도와줄 테니까.”

마치 나에게 기대라는 소리로 치환되어 들렸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우성 알파 특유의 압도적인 페로몬이 남실대면서 하비의 몸속에 스며들었다. 같은 알파로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다가도 여러 번 받아들인 탓인지 금방 가라앉았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했다. 하비는 또 구멍 안이 욱신대는 것 같았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굴욕적인 자세로 약을 바르고 나왔던 오전이 생각나 하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일의 원흉인 빅터가 문득 말했다.

“한 번도 먼저 물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군.”

빅터의 전매특허인 뻔뻔함은 실종되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고, 장난스럽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키스해도 될까?”

갑자기 불쑥 다가온 상황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던 하비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애써 냉소적으로 말했다.

“나한테 거절할 권리가 있나?”

“싫다면 안 하겠어.”

빅터는 진심인 듯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온도 차가 확연했다. 그 간극에 하비는 마음이 얼었다가 녹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것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항상 이런 식이지.’

이제 무엇이 진심인지를 가려내는 것도 지쳤다. 하비는 체념과 포기가 섞인 심정으로 한숨지었다.

“마음대로 해.”

“싫지는 않다는 소리군.”

빅터의 낮은 웃음소리가 하비의 귓전을 맴돌았다. 어느새 고개를 숙인 빅터는 벽과 팔 사이에 하비를 가두고 예민한 귓불을 잘근잘근 가볍게 물고 있었다. 움찔거리는 하비의 단단한 목에 고대 뱀파이어인 것처럼 이를 세웠다. 매끈한 피부에 흠집이 나고, 좋은 향이 났다. 시원한 페로몬이 코끝을 스치자 기분이 좋아졌다.

빅터가 희열에 차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떻게 하면 경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널 마음대로 상처 입힐 수 있는 거지? 빅터는 그리 묻고 있었다.

육체는 어찌할 수 있어도 그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건 결국 불가능했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폭력적으로 쏟아지던 달빛이 순간 거대한 구름 더미에 가려지고, 가시거리를 좁혔다. 어두워지는 빅터의 얼굴을 보며 하비가 허탈하게 말했다.

“이미 마음대로 하고 있잖나.”

이미 상처받았다. 수도 없이, 많이.

하비의 일렁이는 밤색 눈동자가 그리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빅터는 그걸로는 부족했다. 목마른 자처럼 하비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그 피를 마시고 싶어 했다. 하비 스터스의 가장 은밀하고 숨기고 싶어 하는 깊은 곳까지 닿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했다.

하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빅터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내가 정말 마음대로 하면 따라와 줄 건가?”

높게 선 콧대가 부딪치면서 빅터는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가 입술을 붙인 채로 혀를 내밀어 하비의 입술을 열었다. 머뭇대다 벌린 입으로 길고 거칠거리는 혀가 밀려 들어갔다.

하비는 숨 가쁘게 키스를 받았다.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로 열정적이고 격렬한 키스였다. 여린 점막이 빅터의 혀끝에서 놀아났다.

하비가 밀려오는 쾌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천장을 긁을 때는 벽에 몰린 하비의 손끝이 거칠한 벽돌을 긁기도 했다. 차마 앞으로 나가 빅터를 잡지는 못하고 손톱을 해하는 정도로 끝냈다.

음란하게 얽히던 혀가 간신히 떨어졌을 때 하비가 번들대는 입술을 열었다.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는 듯했다.

“베르텐 경은 본인이 가장 잘하는 걸 모르는 것 같은데.”

늘 차분하던 밤색 눈은 기묘한 열기로 젖었다.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도 경의 뜻대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발맞춰 오지.”

믿어보고 싶다. 여러 번 되뇐 그 말. 결국, 그것이 하비의 진정한 본심이었다.

하비는 씁쓸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조차도.’

그러니 마음대로 해.

빅터는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생략한 뒷말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만족스럽게 웃음 지은 빅터가 마차 안으로 하비를 이끌었다.

사륜마차에 튼튼한 검은 말이 두 마리 매여 있었다. 마부 역할을 하던 진은 어딜 가고 없었다. 하비가 이를 지적하려던 찰나 빅터가 그의 입을 막았다.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눈치 빠른 진은 이미 술자리로 가서 두 분은 가셨다고 말을 전하고 있을 것이다.

빅터의 큰 체구를 고려해 개량한 사륜마차는 보통 마차보다 확실히 넓었다.

쿵.

하비가 구석으로 몰려도 충분히 자리가 남을 만큼 말이다.

마차 안에서 하비를 몰아붙인 빅터는 상체를 굽혀 깊이 키스했다. 좀 전에 한 것으론 부족했다. 왜 진작 이 입술을 많이 맛보지 못했던가 후회가 들 정도로 달고 매혹적이었다.

하비의 입술 사이로 뜨겁고 긴 혀가 밀려들었다. 이번에도 하비는 밀어내지 않았다. 망설임이 많이 죽었다.

빅터는 같은 알파라면 역겨울 그 페로몬이 지나치게 시원하고 달다는 것을 의아해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키스하면서 하비의 페로몬을 들이켠 순간 아래가 단단히 섰다. 빅터가 의심하며 하비의 체향을 들이켰다. 여전히 지나치게 좋았다.

빅터가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더욱 파고들었다. 빅터의 페로몬에 하비도 머리가 아찔했다.

‘술 때문이야.’

포도주의 술기운과 페로몬이 섞여 흘러들어 와서인지 하비는 몸 안쪽이 간질간질거렸다. 당장 이 참을 수 없는 감각을 풀고 싶었다.

하비가 몽롱한 얼굴로 욕망에 몸을 맡기려던 때였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빅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오메가 페로몬 향수라도 뿌린 건가.”

알파 커플끼리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한 사람이 오메가 페로몬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하비는 듣자마자 불쾌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짓을 내가 할 것 같나.”

애초에 자신이 뭣 하러 그런 걸 뿌리겠냐는 당당함에 빅터는 할 말을 잃었다. 피식 웃으며 그가 동의했다.

“그건 그렇지만.”

하비 스터스가 같은 알파인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메가 페로몬을 몸에 뿌린다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잠깐 상상하던 빅터는 이내 고개를 흔들고 빠르게 재킷을 벗었다.

위아래를 훌훌 벗어 건너편 마차 칸에 놓는 빅터를 보면서도 하비는 손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옷을 벗어야 하는데, 아직 혼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빅터의 벗은 육체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과 사내 특유의 체향이 중첩된 야성적인 향이 코끝을 적셨다.

빅터는 바다에서 자라서인지 하비처럼 정교하고 날렵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거칠고 볼륨이 큰 근육들이 어깨와 등허리에 흉기처럼 박혀 있었다.

온전히 나신이 된 빅터가 문득 킁킁대며 피식 웃었다.

“포도주 냄새가 꽤 좋은걸.”

마차 안에도 하비가 마신 진한 포도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민망해진 하비가 변명하듯 말했다.

“많이 마셨으니까.”

“왜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마시고 싶어서.”

그러니까 왜 마시고 싶었냐고 끈질기게 물어보는 빅터에게 하비가 실토했다.

“곤란한 이야기만 오가니까.”

하비는 박히듯 밀려 있던 구석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강제로 눕혀졌다. 빅터가 하비의 위로 올라오더니 러플 블라우스 상의를 말아 올렸다.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하비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빅터가 한기에 몸을 움츠리는 하비의 가슴 돌기를 손가락으로 꽉 잡고 비볐다. 순간 가슴에서 통증과 함께 묘한 쾌감이 치받아 하비를 자극했다.

“헉…….”

굵고 유연한 허리가 금세 튕겨 올라갔다. 밤의 찬 공기와 상반된 뜨거운 쾌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을 홉뜨고 부들대는 하비에게 빅터가 맨몸을 바짝 붙였다. 근육 덩어리가 미끈대며 달라붙어 야한 살 냄새를 풍겼다. 빅터가 짓궂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어떤 곤란한 이야기?”

하비는 대답 없이 부르르 떨면서 빅터의 가슴팍을 한 손으로 밀었다. 판판하고 돌 같은 근육이 손바닥 아래 만져졌다.

하비가 달아오른 빅터의 녹색 눈을 보았다. 깜박이는 녹색 눈 속에 열정이 가득했다. 너무 뜨거워서, 빨려들 것 같았다. 하비가 헐떡이며 말했다.

“너무 급해. 천천히.”

원래 같으면 이런 걸 요구할 관계도 아니었다. 빅터가 채찍을 들고 시키는 대로 하라며 반강제로 하비의 허리를 세웠을 것이다. 정말 많은 것이 짧은 시간 동안 달라졌다.

그때 마차 안으로 강렬한 달빛이 들어와 하비의 탄력 있고 하얀 살결을 구석구석 비추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월광은 하비를 아름다운 무엇으로 바꾸어주었다.

마차 구석에 구겨진 가운데서도, 하비 스터스는 제 본모습을 잃지 않았다. 열기가 올라 흐트러진 것조차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단정했다. 지켜보던 빅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젠장……. 사람 돌게 하는군.’

빅터는 그 꿈을 한 번 꾼 이후로 자주 반복해 꾸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하비가 당시 그를 지켜주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자꾸만 꿈속의 그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헷갈리는 사내와 하비가 겹쳐졌다. 얼굴과 페로몬은 분명 그의 것이었다.

‘이제 그게 꿈인지 아닌지도 분간이 안 가.’

빅터는 근육이 고루 발달해 탐스러워 보이는 하비의 가슴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돼.”

빅터는 꼬집어서 부풀어 오른 하비의 유륜을 입에 담았다. 갈색 유두가 대번에 뾰족해지며 입안에서 단단해졌다.

“흐으…….”

하비가 신음을 흘리며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빅터의 혀가 돌아갈 때마다 아래에 찌릿거리는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물고 빨고 씹는 동안 하비의 목울대도 미친 듯이 파도쳤다.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마차 의자를 긁었다.

고작 가슴을 괴롭히고 있을 뿐인데 빅터에게 워낙 집요하게 당한 전적이 있어서인지 예민해진 육체가 반응했다.

흘끗 하비의 중심을 내려다본 빅터가 웃었다.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우성 알파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보통 알파의 성기보다는 확실히 컸다.

빅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다른 오메가에게 넣은 적도 있지 않았을까. 예전의 그 젤가라는 놈이나, 혹은 외교부에서 고백했다던 어느 누군가가 하비의 것에 꿰뚫려 울부짖었을 모습을 상상했다.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도 빅터의 얼굴이 흉흉해졌다. 다 찢어발기고 조각내고 싶었다. 끝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빅터의 어둡고 잔악한 성정은 억지로 덧씌운 미소에 가려졌다.

빅터는 잔인한 모습을 숨기듯 일부러 하비에게 무안을 주었다.

“벌써 커졌어.”

하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시끄러워.”

“가슴 좀 빨아주는 정도로 이 정도면, 본무대가 기대되는군.”

하비가 미간을 구기며 그의 저질 농담에 대거리하려다 말고 헛숨을 뱉었다. 빅터가 하비의 하의를 벗기고 반 이상 발기한 것을 손으로 꽉 쥐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을 희롱할 때보다 더 큰 괴로움이 찾아들었다.

하비는 두꺼운 허벅지를 오므리면서 항의했다.

“뭐 하는 거야.”

흘려들은 빅터가 하비의 허벅지를 밀어젖히고 능숙하게 성기를 붙들었다. 힘을 주어 위아래로 훑자 몰려오는 뻐근한 쾌감에 하비가 숨도 못 쉬고 부들거렸다. 그는 마차 벽에 손을 뻗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아프지 않게 하려고.”

빅터가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선단 끝을 꾹꾹 누르기도 하고, 가볍게 훑기도 했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

하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더 큰 신음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한지, 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마저 들었다. 공포에 깃든 이율배반적인 쾌락으로 하비는 금방 절정에 다다랐다.

“으윽!”

하비의 얼굴과 허벅지가 경직되더니 커질 대로 커진 성기 끝이 터졌다. 묽은 액이 줄줄 흘러내려 빅터의 손을 적셨다.

손을 올려 시큼한 정액을 핥은 빅터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의 정액에서 페로몬과 비슷한 향이 났다.

“생각보단 묽은데. 자위라도 한 건가?”

대번에 하비의 목이 후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사실 오전에 고약을 바를 때 발기하는 바람에 두어 번 빼고 오긴 했다. 하비는 이를 숨기려 거칠게 내뱉었다.

“개소리하지 마.”

빅터는 경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존경받는 스터스 경은 나와 엮이면 입이 험해지는군.”

노려보는 시선을 즐거이 받으며 빅터는 끈적대는 점성을 확인하더니 일부는 잔뜩 발기한 제 성기에 바르고, 나머지는 손가락에 골고루 묻혔다.

사정의 여운에 떨던 하비는 구멍을 쑤시는 손가락에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빅터가 하비의 다리 한 짝을 어깨에 올리고 손가락을 쑤시고 있었다. 굵은 손가락 두어 개가 단숨에 들어왔다. 곧장 하비가 느끼는 지점을 건드리며 빅터가 말했다.

“지금은 오메가가 아니니 잘 넓혀둬야지.”

하비는 빅터의 손가락이 깊이 들어올 때마다 허공에 뜬 허리를 위로 추켜올렸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빅터의 어깨에 놓인 다리에도 바짝 힘줄이 섰다.

“그, 그만…….”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여지없이 쾌락점을 꾹 누르고 구멍을 충분히 넓혔다. 하비의 머릿속에 불이 붙는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이 번쩍거렸다.

마치 고문 뒤 자백을 받아내는 것처럼 빅터가 잇따르는 쾌감 뒤에 물었다.

“경의 첫 러트는 어땠지?”

“그런 걸 왜 지금…… 으읏……!”

되묻던 하비는 사정없이 눌러대는 손가락의 압력에 자지러졌다. 빅터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녹색 눈을 가득 휘었다. 그 속에 작은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방종한 첫 러트를 겪으면서 문득 궁금하더라고. 스터스가의 도련님은 어떤 러트를 겪었을까.”

하비는 빅터의 집사인 레나에게 들었던 그의 첫 러트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해적선에서 감금당하다시피 겪은 지옥 같은 첫 러트 말이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까. 그로선 상상조차 못 할 상황이었다. 하비는 편하게 약물 복용으로 첫 러트를 보냈고, 누군가와 억지로 관계를 맺어지도 않았다. 스스로 밧줄로 몸을 묶고 페로몬 폭풍 속에서 홀로 견뎠을 그가 가엾었다. 도와달라 외쳤을 빅터가 상상 속에서 하비의 가슴을 두들겼다.

아무리 빅터가 하비를 괴롭혔더라도, 그가 당해야 했던 비인간적인 처사까지 당연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빅터를 악한으로 내몬 건 다름 아닌 하비의 아버지였다. 하비는 심장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 와중에도 구멍을 휘젓는 빅터의 손을 하비가 잡았다. 하비는 열에 들뜬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는 진중하게 물었다.

“내가 원망스럽나?”

하비는 초조해 보였다. 이 자리에서 빅터가 저주를 퍼붓고 원망스럽다고 한다면, 전보다 조금 더 아플 것 같았다.

다행히 빅터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빅터는 하비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갈등하는 것도, 제 마음이 다쳤을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것도. 그것이 하비 스터스의 천성일 것이다.

하비의 턱에 입 맞추며 빅터가 낮게 말했다.

“아니었다면 거짓이겠지만.”

하비 스터스가 이런 다정한 사람이라 참 다행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견고한 철벽을 뚫고 나면 말랑말랑한 심장이 남는다. 그런 쉬운 사람이라서, 빅터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비는 빈틈을 파고들기에 최적의 상대였다.

빅터가 부드러운 얼굴로 보다 정밀한 거짓말을 했다.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생각하다 보면 이 감정이 뭐가 뭔지도 헷갈리거든. 증오인지, 사랑인지.”

남김없이 부숴 버리기에도, 최고의 상대였다.

빅터는 고백처럼 말하며 하비의 마지막 둑을 무너뜨렸다.

“아마 그동안은 내가 착각했나 보지.”

빅터는 울 듯 말 듯 일그러진 하비의 얼굴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떨리는 입술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라힌 스터스의 잘못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지. 경에게 묻지 말았어야 할 것까지 묻고 말았어. 진심으로 사과하지.”

하비의 뚜렷한 이목구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미소가 걸렸다. 기쁨이었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적의로 가득했던 빅터의 손길에 애정이 깃들고, 그가 하비를 진정으로 용서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기다렸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빅터는 하비의 밤색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고했다. 힘없이 늘어진 손가락에 키스하며 빅터가 그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무지했던 나를 용서해 주겠나?”

드디어 빅터의 진심 아닌 고백이 그의 강철 심장을 부숴 버렸다.

쿵, 쿵, 쿵.

여태껏 죽어 있다 생각했던 심장이 단단한 껍질을 벗고, 알맹이만 남아 열렬히 제 존재를 과시했다. 몸속이 대번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하비는 더듬대다 침묵했다. 유창하게 논리를 펼치는 건 잘했지만,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 그를 이해한다는 듯 빅터가 피식 웃으며 하비의 귓불을 만졌다.

“말 안 해도 아니까, 이제 즐겨.”

빠르고 능수능란한 손놀림에 하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채 인지하지 못했을 때, 빅터는 이미 하비의 정액을 잔뜩 묻힌 성기를 밀어 넣고 있었다. 너무 커서 넣을 때마다 버거웠던 기억에 하비는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다.

빅터가 웃음을 지운 얼굴로 경고했다.

“피하면 더 아플 거야.”

그런 뒤 그가 천천히 귀두를 밀어 넣었다. 끝 부분이 들어가자 하비가 숨을 골랐다. 빅터는 하비를 내려다보다 끝까지 한 번에 박아버렸다.

퍽!

마차가 크게 들썩이고 하비가 정수리를 좌석에 박았다. 정액으로 미끈대는 성기가 그의 안을 공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정확히 느끼는 지점을 찔러서 하비가 온몸을 비틀도록.

하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빅터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그의 한쪽 다리가 퍼뜩 허공을 찼다.

“큽…….”

허를 찔린 맹수처럼 눈을 홉뜨던 하비는 간신히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았다. 찡하게 구멍에서 일어난 근질대는 감각이 폭죽처럼 머릿속에서 터졌다.

경련하는 하비의 한쪽 다리를 내리면서 빅터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여러 번의 섹스로 이미 하비가 느끼는 곳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하비가 잘 반응하는 지점은 생각보다 얕은 곳에 있고, 때문에 짓누르듯이 스쳐 지나가며 삽입하는 것에 가장 취약했다.

“돌아봐.”

빅터가 박기 좋게 하비를 뒤집었다. 그는 강제로 자세가 틀어지며 더욱 깊이 와 닿는 성기의 감촉에 진저리쳤다.

퍼억!

살짝 허리를 뒤로 빼던 빅터가 다시 박았다. 한 번 더 하비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하얀 엉덩이 아래로 잔물결이 쳤다. 말라가던 정액이 뜨거운 체온에 녹아 구멍 안에서 질척댔다.

빅터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기분 좋아? 엄청 무는데.”

하비는 대답도 못 할 정도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끝까지 박힌 빅터의 성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안에서 크기를 더 키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커진다고?’

하비는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알파인 채로 빅터와 섹스를 하는 건 지금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 꽃을 구멍에 꽂고 기었을 땐 워낙 경황없이 지나갔던 터라 빅터와 어떻게 섹스를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액이 나오지 않는 알파의 몸으로 우성 알파의 무식한 크기를 받아낸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건 빅터의 것이 파고든 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참을 만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고통에 많이 무디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별로 아프지 않다는 것에 2차 충격을 받은 하비는 고개를 숙여 가만히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적응한 거지?’

지나치게 큰 것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배꼽 아래까지 꽉꽉 들어찼다. 손으로 만지면 불룩 튀어나와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하비가 단단한 하복부를 실제로 만지려 손을 들려는데 빅터가 그 손을 깍지 끼고 뒤로 젖혔다. 팔이 꺾일 것처럼 강하게 당겨지면서 구멍 안의 성기가 샅샅이 주름을 짓눌렀다.

단숨에 쾌락점도 함께 안에서 비벼진 탓에 하비가 부들거리다 씹어뱉듯 숨을 던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허억……!”

마른 오르가슴이 그를 덮쳤다. 저릿함이 온몸을 감싸더니 질질 새어 나오던 쿠퍼액에 정액이 섞여 흘렀다. 머리끝까지 끔찍한 쾌감이 휩쓸었다.

이내 고개가 푹 떨어지는 하비를 빅터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빅터가 마차 좌석에 한쪽 무릎을 딛고 하비의 나머지 팔도 뒤로 잡아당겼다.

“이런, 머리 조심.”

말과는 다르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빅터는 허리를 더욱 밀어 성기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두 팔을 뒤로 잡고 박는 통에 하비의 균형 잡힌 허리가 유연하게 뒤로 젖혀졌다. 견고한 활시위처럼 팽팽해진 등 근육을 감상하면서 빅터는 박차를 가했다.

하비는 누가 들을까 염려해 입술에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입안에서 터져 나가던 신음이 도로 목구멍으로 튕겼지만 억눌린 짐승 같은 소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때 밖에서 사람들의 재잘대는 소리와 그림자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마차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녀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불었다.

“윈스턴 경도 알파를 탐하는 것에 맛 들렸다지요?”

“설마 윈스턴 경까지 그럴 줄은 몰랐지. 허허! 같은 알파끼리는 페로몬도 거북할 텐데, 거참. 알 수 없는 일이지.”

긴장으로 조여드는 구멍의 압력에 빅터가 반듯한 미간을 구겼다. 금방 갈 뻔했다.

하비의 안이 너무 뜨겁고 조여서 사정감이 몰려왔지만 빅터는 참아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더 참았다가 극상의 쾌락을 맛보고 싶었다.

재잘대던 남녀가 사라지자 빅터는 잔뜩 긴장해서 바깥쪽을 보는 하비를 끌어당겼다. 들키면 어떨까 걱정하는 눈빛에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고고한 남자는 언제나 백색 저택의 안위부터 생각한다.

빅터는 바로 끝까지 성기를 욱여넣었다.

퍼드덕 반응하며 하비가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마터면 소리가 나올 뻔해서 황급히 입술을 물었다.

구불대는 내벽의 주름이 일제히 펴지며 큰 부피를 받아냈다. 살이 딸려 들어가는 기분에 하비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다시 쾌락점을 찍혔다. 머리가 어질거리는 쾌락의 아지랑이가 짙게 피어올랐다.

“으윽! 크흐……!”

결국 하비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자 빅터가 잘했다는 듯 그의 너른 등을 쓸었다.

무게를 지탱한 빅터의 한쪽 무릎에 힘이 들어가고, 찢어질 것처럼 팽팽하던 하비의 구멍으로 성기가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쿵! 쿵!

마차가 흔들리자 말들이 작게 투레질을 하며 방황했다.

빅터는 삽입의 충격에 덜덜 떨고 있는 하비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큰 소리 내거나 너무 움직이면 말이 놀라서 달릴지도 몰라.”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하비가 밤색 눈동자를 불안한 듯 흔들었다. 빅터는 하비의 얼굴을 보지 못해도 하비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불안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심술 가득한 입술이 모난 듯 움직였다.

“최대한 마차가 덜 움직이게 해보라고.”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당연한 듯 요구했다.

하비의 엉덩이와 빅터의 성기가 결합될 때마다 큰 진동이 울렸다. 하비는 되도록 마차 벽에 머리를 박지 않게 최선을 다했지만 빅터의 힘이 워낙 터무니없었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밀려났다.

하비는 우성 알파의 힘이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결국 하비는 빅터가 박을 때마다 온몸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 사이로도 힘이 가해져 자연적으로 빅터의 것을 꽉 무는 셈이 되었다.

조여드는 압박에 빅터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제길……!”

홀린 듯 욕을 씹어뱉은 빅터는 드디어 절제를 잃었다. 조절하던 것을 놓고 속도를 올렸다. 처박을 때마다 잔뜩 힘을 주던 하비의 구멍을 억지로 여니 거센 반발에 성기가 잘릴 것 같았다. 연결되어 있는 부위에서 점성 연한 정액이 녹아 끈적거리며 땀과 섞였다.

하비도 끝까지 들어와 끝끝내 쾌락점을 긁고 지나가는 거대한 압박감에 헐떡였다. 정을 내려찍듯 반복되는 삽입에 다시 뭉근하고 간지러운 감각이 되살아났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하비가 느끼는 간격은 좁아지고,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머릿속에 뜬구름 같은 이물감이 끼어들어 이지를 흩뜨려 놓는 것 같았다.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또…….’

발기한 하비의 성기가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를 탁탁 쳤다. 한계치를 넘었다 생각한 순간, 하비는 또 한 번 사정했다. 마차 좌석으로 하비의 정액이 길게 튀었다. 더 묽어져 있었다.

“윽…….”

때맞춰 빅터도 미간을 찌푸리고 부르르 떨더니 구멍 안으로 상당량의 정액을 쏟아냈다.

울컥대며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것에 하비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붉혔다. 알파의 몸이라 임신할 일은 없지만 같은 알파의 정액을 뒤로 받는 것이 여전히 낯설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빅터가 그 자신보다 제 몸을 더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딜 찍어누르면 미칠 것 같은지, 어디를 박으면 자지러지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빅터가 하비의 등을 가볍게 쓸었다.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괜찮았나?”

하비는 뒷모습을 보인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전신의 근육이 아팠다.

빅터는 하비의 팔을 놓고 그를 천천히 눕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엎드려 있던 하비가 등을 반듯하게 좌석에 대고 마차 천장을 보았다. 빅터가 사정한 것이 꾸물꾸물 뒤로 새었지만 상관없었다.

하비가 누운 채 빅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느 귀족이 몰래 이국에서 수집한 비너스의 조각상보다 퇴폐적이고 반항기 가득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빅터에겐 무언가에 귀속되지 않은 자유분방함이 있어서인지 같은 나이인데도 그가 훨씬 어려 보였다.

드높은 자존심처럼 솟은 높은 콧대에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가 무슨 이상을 꿈꾸는지, 어떤 세상을 원하는지.

하비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듣는 것이 두려웠다. 그 입에서, 혹시라도 자신의 고백에 대한 답이 나올까 봐서였다.

하비가 같은 말을 돌려주는 순간, 무력하게 구속당하고 묶여 버릴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의아했지만 어쨌든 빅터는 직감을 따랐다. 키스로 하비의 입을 막았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하비는 말을 빼앗겼다.

“흐읍…….”

심장까지 내어 먹을 기세로 그의 입술을 훔치고, 얽히는 혀를 뿌리째 얽어매었다. 뱀이 교미를 하듯 붉고 탐스러운 혀가 끝없이 얽혔다. 넘쳐흐른 타액이 입가로 흘러내리고 하비가 단단한 턱 끝을 치켜들었다. 불룩한 목울대까지 내려온 타액을 빅터는 성수를 마시듯 핥았다.

물러난 녹색 눈동자가 자신이 만들어낸 열로 뜨거워진 사내를 고요히 지켜보았다. 제물을 확인하는 것처럼 집요한 눈길이었다.

내친김에 빅터는 고개를 숙여 성기 아래 회음부와 망울까지 입술로 가볍게 눌렀다. 하비가 기겁하며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눌렀다. 낮은 목소리가 긴박감을 담았다.

“그만. 이런 것까지 하지 마.”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비처럼 고지식한 고위 귀족들은 상대방의 아래를 핥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빅터는 피식 웃으며 하비의 염려를 흘려 넘겼다.

“뭐 어때.”

엉덩이 아래 구멍에도 혀를 갖다 대고 심지어 쑤시기까지 했다. 얼굴을 박고 구멍 안을 성기로 쑤셔 박듯 혀를 썼다.

하비는 움찔거리면서 입을 아예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온몸이 흐늘대며 녹는 기분이었다. 타인에게 처음 받는, 혹은 처음 허하는 집요한 애무였다.

질척하고 섹스 같은 애무가 끝난 뒤 빅터는 하비의 허벅지를 끌어당겼다. 아직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 하려고?”

하비의 정색을 그는 아릿한 미소로 넘겼다. 빅터가 하비의 허벅지를 잡아 옆으로 벌리면서 제 성기에 정액을 발랐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하비가 기함하고 밀어낼 줄 알았는데, 그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하비는 반쯤은 포기했다. 어떻게 했는지 빅터가 섹스를 아프지 않게 능란히 잘해서 기분이 좋기도 했다. 능욕이나 굴욕 주는 것 하나 없이 제대로 관계를 맺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빅터가 진심 어린 사과도 건넸고, 정식으로 교제하자고 몇 번이나 말한 것도 하비의 심중을 매섭게 뒤흔들었다.

“그럼, 넣지.”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빅터가 흉흉하게 커진 제 것을 하비의 열린 구멍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크기가 보통이 아닌만큼 들어가는 내내 힘겨웠다. 그나마 반 이상을 넘어가자 조금 나았다. 구멍 안이 온통 액으로 미끈댔다. 그래도 하비는 버거워했다.

퍼억! 퍽!

빅터가 쳐올릴 때 하비는 찡그린 얼굴로 감내했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열기가 드넓은 어깨로, 두터운 허리로, 허벅지로 내려가는 동안 하비는 시선 한 번 피하지 않고 빅터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담으려고 하는 것처럼.

빅터의 턱 끝에 맺힌 땀이 얼굴에 떨어졌을 때도.

빅터가 성기를 박으면서 노는 손으로 유륜을 문지를 때도.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허리를 잡고 더욱 거세게 쑤실 때조차.

움찔하며 눈가를 일그러뜨리는 일은 있어도 단 한 번도 눈 돌리지 않았다. 정직하고 강한 눈빛이었다.

빅터는 그 올곧은 밤색 눈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충동을 이겨냈다. 순수한 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응?’

그러다 빅터가 마차 벽을 짚고 있는 하비의 손을 보았다.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내밀다가도 뒤로 빼곤 했다.

설마 만지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건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빅터는 주춤대는 손짓을 모르는 척, 방향을 알려주었다. 빅터는 아래를 끝까지 박은 상태에서 하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키득 웃었다. 하비의 머리칼에 흡수된 땀이 시원하게 빅터의 이마를 눌렀다.

“팔로 내 몸을 감아. 그래야 덜 밀려나니까.”

하비는 그제야 안심하고 빅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제법 강한 힘이 빅터의 목과 어깨를 짓눌렀다. 하비 스터스가 처음으로 기댄 온전한 무게였다.

묘한 감동마저 느끼며 빅터는 그를 안았다.

하비 스터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단하지만 다정하고, 마음을 준 상대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돌려주는 사람.

‘그래서 뭐.’

안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반발했지만, 빅터는 가슴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열어서는 안 될 것을 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밤 속의 밤. 달빛이 약해진 어두운 밤 속에 마차의 그림자가 또 다른 밤을 만들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