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붉은 왈츠 (3/18)

제3장 붉은 왈츠

빅터는 하비를 기다리는 동안 업무를 보고 있었다. 시 자체에서 처리해야 할 서류에, 베르텐가의 차기 가주 명목으로 해야 할 일, 더불어 진행하고 있는 개인적인 투자 사업 등 할 일이 태산이었다.

의자에 앉아 기계적으로 사인 하고, 도장을 찍던 빅터는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 상태로 벌써 내리 4시간을 한 번도 안 쉬고 있었다.

차가운 테이블에 뺨을 기대고 엎드리며 빅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아다니는 게 낫지, 이것도 못 할 짓이네.’

며칠째 잠도 거의 못 자고 처리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빅터에게 차기 가주 자리를 배치해 준 현 베르텐가의 가주는 그 뒤부터 모든 일을 빅터에게 떠넘겨 버렸다. 그래놓고 본인은 전 세계를 유랑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빅터가 이를 갈며 지금쯤 이국의 어느 미녀와 노닥거리고 있을 베르텐가의 가주이자 외삼촌을 떠올렸다.

‘조금만 참자. 곧 끝날 거니까.’

그가 복수할 대상은 스터스 가문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스터스가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현 가주인 하비 스터스가 연상되었다.

‘정말 안 올 생각인가.’

사실 오라고 한다 해서 하비가 진짜로 올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자신이 집사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 문제였고, 하비에게 일말의 빌미를 주었다. 그에게 마음속의 동요와 혼란, 균열을 보여 버린 것이다. 그 영악한 사람이 자신이 망설인 것을, 틈이 생긴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지옥을 버티게 해준 것은 하비지만, 그곳에 있게 한 건 그 사람의 아버지였다. 게다가 편지로 농락당했던 기억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빅터의 마음속을 휘감고 있었다.

‘그 망할 편지는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미…….’

빅터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분명 그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 그런데 돌아와서 막상 다시 만나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 끗 차이로 증오 이상의 무언가가 빅터의 새까만 심장을 뒤덮고 있었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미약하게나마 회생했다.

하비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하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수록, 그 이상한 이물감은 크기를 더해갔다. 격렬한 증오 위로 얹어진 묘한 두근거림은 거북하기도 헸지만, 한편으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기회를 주겠다는 말까지 꺼냈으니, 이제 라힌 스터스 일만으로는 무리일지도.’

빅터는 이제 하비를 묶어두기에 협박만으로는 부족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하비의 속에서도 무언가가 변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아예 공개적으로 연인 사이로 못을 박아버렸다. 그러면 하비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쉽게 나타나지 못할 테고, 더 편하게 그를 속박할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건 나 한정이라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빅터가 제 머리를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렸다. 금발이 그의 길고 굵은 손가락에 걸려 삐져나왔다.

‘왜 돌아와서도 벗어날 수 없는 거지.’

빅터는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굳게 다짐한 것이 있었다. 깔끔하게 복수다운 복수만 하고 이제 하비 스터스를 털어버리겠다고.

그렇게 새 삶을 살겠다며 희망찬 포부를 가졌는데, 아직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각하고 있는 게 이 모양이다. 그 반반한 얼굴을 보기만 해도 짜증 나고 화가 나는 걸 보면 하비를 싫어하는 건 분명한데, 왜 이 꼴인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제길…….’

돌아버릴 것 같다. 빅터는 오락가락하는 제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사람을 증오하는데, 한편으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꾸 생각이 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빅터는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고풍스러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이게 다 수면 부족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 의사 놈이 여기저기 떠벌리지 말아야 할 텐데.’

일이 바빠서 못 잔 것도 있지만 원래 잠을 거의 못 잤다. 심각한 수면 장애 때문에 빅터는 그쪽 방면으로 저명한 의사들도 찾아가 봤다.

그중 한 의사가 빅터가 어릴 때부터 겪은 생존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일들이 정신까지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 말이다.

빅터가 19살이라는 꽤 늦은 나이에 발현해 첫 러트를 겪은 것도 스트레스 때문이라던 의사의 말이 세트로 묶여 떠올랐다. 보통은 사람마다 차이는 있어도 15살이 되면 형질이 발현되곤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빅터가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아늑한 잠이 몰려왔다. 첫 러트 때 가장 먼저 골랐던 오메가가 누군가를 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들었다.

빅터는 눈을 감고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며칠 만에 간신히 드는 잠이었다.

잠들기 직전에 했던 생각 때문인지, 하필 그는 해적선에 있을 때를 꿈꾸었다.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은 그 악몽이 빅터를 휘감았다.

오메가들의 비명이 울리는 강렬한 페로몬 폭풍 가운데였다. 좁은 방에서, 빅터는 또다시 묶여 있었다. 양손을 스스로 묶은 채 고통을 견디는 중이었다.

“헉……. 허억…….”

인내하느라 땀이 끊임없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가닥가닥 타서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누가 제발 이 지옥에서 꺼내줬으면……!

사막에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뜨거운 태양 아래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갈증에 목이 타서 헐떡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천천히 빅터에게 다가왔다.

‘누구지?’

다른 오메가들은 빅터에게 붙들리면 해적에게 살해당할까 봐 멀찍이서 다가오고 있지도 않았다. 19살의 앳된 빅터가 긴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를 올려보았다. 시원한 느낌의 페로몬을 지닌 남자였다. 게다가 어두운 안개 같은 것이 가면처럼 남자의 코까지 내려와 있어서 누군지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숨 막히고 뜨거운 페로몬 폭풍을 그 남자의 시원한 페로몬이 조금이나마 가로막아 주는 것 같았다.

그리운 향이었다. 갑자기 속에서 왈칵 뜨거운 것이 솟았다. 이 사람을 안고 싶다. 미친 듯이 안고 싶다.

빅터의 녹색 눈에 이채가 서리고, 흥분이 차올랐다. 묶인 팔을 떼어버리려는 것처럼 빅터가 악을 썼다.

덜컹덜컹!

잠들었던 다른 오메가들이 깨어날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 사람은 빅터에게 조용히 하라는 것처럼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얌전해진 빅터를 그가 빠른 손짓으로 풀어주었다.

풀려난 빅터는 그 사람을 짐승처럼 덮쳤다. 넘어진 남자 위로 올라탄 빅터가 그의 옷을 마구 찢었다. 단단한 육체였다. 찢긴 옷 사이로 탄력 있는 가슴과 갈색 유륜이 드러났다. 노출이 어색한지 어깨를 움츠리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왜 이 몸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짧은 의문이 끼어들었지만 빅터는 개의치 않고 정신없이 그 탐스러운 몸을 취했다.

빅터가 혀로 유륜을 굴리자 그가 신음을 흘렸다.

“흐으…….”

그는 두꺼운 팔을 빅터의 등에 얹고는 다리를 벌렸다. 적극적이었다. 극도로 흥분한 빅터가 어느새 나체가 된 남자의 구멍 안에 페니스를 들이밀었다.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가 언제 바뀐 건지, 바지가 언제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꿈이니까 가능하다고 여겼다.

‘꿈이니까?’

순간 빅터는 꿈인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깨고 싶지 않았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빨리 이 갈증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빅터는 결국 급하게 자신의 페니스를 남자의 뒷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전희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괜찮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크흑……!”

넣는 순간 깔린 남자가 낮은 울음을 내었다. 넣기 전에도 미칠 것 같았는데, 막상 넣고 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시원한 페로몬과는 달리 안은 뜨겁고, 축축하고, 아늑했다. 이미 이 구멍에 여러 번 넣어본 것 같은 익숙함도 있었다.

‘너무 좋아…….’

몽롱해진 빅터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더 깊이 쑤셔 넣었다. 더 듣고 싶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빅터를 안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찰팍, 찰팍!

남자의 허벅지가 흔들리고, 뒷구멍에서 애액이 넘치도록 흘렀다. 액이 구멍 속에서 미끈거리며 빅터의 페니스가 더욱 원활하게 출입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오메가였던가? 빅터는 허리를 밀어 넣으면서도 의아해했다. 페로몬이 오메가의 것이 아닌데, 어째서 오메가 같은 몸을 가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한 건 오메가의 페로몬이 아닌데 발정이 나서 박아대고 있는 자신이었다.

‘꿈이잖아. 뭘 생각하고 있어.’

빅터는 생각을 던져 버렸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인내심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헉……! 허억!”

남자는 이제 자지러지며 허리를 흔들고, 빅터의 것을 꽉꽉 물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는 참인지 제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빅터는 남자의 손을 떼어내고 허겁지겁 입술에 키스했다. 혀가 들어가자 멈칫하던 남자가 천천히 자신의 혀를 빅터의 것에 감았다. 처음인 것처럼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빅터가 속으로 웃었다. 이 덩치 큰 남자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으음……! 으븝, 윽! 흑!”

빅터의 입술 때문에 남자의 신음이 갈라져서 나왔다. 더 느끼는지 구멍에서 나오는 애액이 늘었다. 구멍이 순간적으로 확 조이는 바람에 빅터가 절정에 달해 남자의 뒷구멍에 사정했다. 안에서 삐져나올 정도로 많은 정액이었다.

빅터는 손을 내려 남자의 다리를 더 벌렸다.

위로는 키스하고, 아래로는 정신없이 박던 빅터가 순간 온몸을 정지시켰다.

뻣뻣해진 빅터가 이상한지 남자가 보채듯 정액과 자신의 애액이 섞여 흐르는 야한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빅터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 안 돼…….’

그제야 이 사람을 취하면 해적이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든 것이다.

최악의 가정을 떠올린 순간, 꿈이 빅터에게 형벌을 내렸다. 슬슬 마무리를 짓고 자신을 인식한 인간을 내쫓으려 할 때, 꿈은 가장 잔인해졌다.

벌컥!

좁은 방문이 열리더니 비정상적으로 큰 사내 두엇이 들어왔다. 그들은 강제로 빅터의 아래에 있는 남자를 끌어냈다.

“그러지 마! 제발! 그 사람은 제발……!”

절박하게 외치며 해적들의 발치를 붙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꿈이니만큼 해적들은 거의 괴물이었다. 해적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앳된 빅터를 찍어 누르더니, 그대로 빅터와 관계하던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이상한 일이었다. 해적들이 집요할 정도로 남자의 배만 공격해 댔다. 더구나 남자는 필사적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견디지 못한 남자가 결국 피를 토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왜 배만 저렇게……? 안 돼!’

남자는 지독하게 하혈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빅터의 페니스를 수월하게 먹던 그 뒷구멍에서, 벌건 핏물이 비쳤다.

“악!”

남자가 아픈 듯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뒷구멍에서 결국 꾸물거리는 빨간 핏덩어리를 왈칵 쏟아냈다. 마치 살아 있었던 무엇처럼, 처절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미약한 움직임도 곧 멈췄다.

남자의 움직임도, 동시에 완전히 멎었다. 죽은 듯했다.

빅터의 눈에 믿기지 않는다는 놀람이 맺혔다. 그것은 곧 어마어마한 분노로 바뀌었다. 용건이 끝나자 해적들은 죽은 남자를 발로 툭툭 차서 마지막 확인을 하더니 미련 없이 뒤돌았다.

빅터가 온통 피가 어린 몸으로 그들에게 달려들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흠씬 두들겨 맞고 나가떨어졌다. 그 직후 해적 잔당들은 해적 수뇌에게 처형당했던 그때처럼 목이 댕강 잘리더니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쓰러진 빅터가 죽은 남자와 그가 쏟아낸 핏덩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빅터는 울음을 삼키며 이미 사라진 해적들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이 개새끼들아…….”

죽은 남자의 얼굴을 가리던 까만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빅터는 남자의 시체나마 제대로 보기 위해 물기 가득한 눈을 홉떴다.

검은 가면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빅터는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이건……. 뭐…….’

남자의 정체는, 하비 스터스였다.

이제 빅터를 완전히 퇴출하려는 듯, 꿈이 그를 무의식에서 바깥으로 거세게 밀어냈다. 붉은 물안개가 온통 끼더니 그날의 좁은 방도, 죽은 남자도, 핏덩이도 모두 사라졌다.

빅터는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도란도란 말소리도 들렸다.

“왜 이러지?”

“또 악몽을 꾸시나 봐요.”

“깨워줘야 하나?”

“제가 깨울게요.”

“내가 하지.”

하비의 목소리다. 놀란 빅터가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손이 하나 와 있었다. 빅터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탁!

손을 내밀었다가 빅터에게 붙들린 하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 굳이 잡혀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빅터의 손을 뿌리쳤다. 왠지 불쾌해진 빅터가 떨떠름한 얼굴로 시간을 물었다.

“지금…… 몇 시?”

빅터에게 잡혔던 손을 이리저리 돌린 하비가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9시. 저녁 시간도 훌쩍 넘겼어. 경의 집사가 걱정하던데. 식사도 안 하고 일만 한다고.”

잠깐 잔다는 게 몇 시간을 자버렸다. 가물거리는 빅터의 시야로 진짜 하비의 얼굴이 보였다.

‘낭패군.’

점점 정신이 들자 빅터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꿈을 꾼 직후가 가장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곤하고, 힘들었다. 심신을 가다듬고 갈무리하는 시간이 늘 필요했는데 하필 가장 약해져 있을 때 하비가 나타난 것이다.

‘왜 지금 와선.’

빅터는 하비가 멀쩡한지 저도 모르게 다시 확인했다. 벌건 피나 고통스러운 기색 따윈 한 점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멀뚱멀뚱 빅터를 보던 하비가 이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보나?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빅터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비의 태도에 피식 웃었다. 개꿈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예전처럼 그를 짓누르는 악몽일 뿐이다.

‘봐. 짜증 나잖아.’

현실의 하비는 보자마자 화가 치솟는 존재였다. 여전했다. 달라진 것은 없다. 관계는 여전하고, 빅터는 아직도 하비 스터스에게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안하게 쿵쾅대는 빅터의 심장은 멎질 않았다. 그가 입으로 토해내던 그 벌건 피와, 뒷구멍으로 어쩔 수 없이 쏟아내던 꾸물대는 핏덩어리가 머릿속에서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빅터는 이 더러운 기분이 진정될 때까지 하비를 멀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기분 나빠 할 말을 일부러 툭툭 던졌다.

“오란다고 진짜 올 줄은 몰랐는걸. 이렇게 개처럼 얌전히 잘 따를 줄 알았으면 일찍부터 이래볼 걸 그랬어.”

하비가 대번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빅터는 밤색 눈동자가 경멸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베르텐 경이 우리 가문의 치부를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는 꼴은 차마 못 보겠어서.”

역시 하비와는 이런 것이 어울렸다. 웃기지도 않는 악몽으로 걱정하는 것보다는.

‘걱정?’

빅터는 방금 든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하비의 말대로 꿈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어 제정신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빅터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뚝뚝 꺾으면서 비아냥댔다.

“신약이 아주 잘 드나 본데. 멀쩡히 잘 돌아다니고.”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하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 아니었나?”

이번엔 빅터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스터스 경을 불렀을 때는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겠어? 모르고 온 건 아니겠지?”

하비는 길게 침묵했다. 빅터의 말이 맞다. 그런데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그는 점점 스터스가의 집착에 환멸이 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대가 공들여 쌓아온 하얀 저택을 제 손으로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빅터의 직감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알파와 사귀는 것쯤은 잠깐 화제가 되다 잊힐지 몰라도, 스터스가를 지탱해 온 도덕적인 토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건 다른 이야기다. 하비는 스스로에게 당부했다. 다짐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니까 온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하비가 물끄러미 테이블 아래에 놓여 있는 빅터의 손을 보았다. 아까 잡혔던 손이 지나치게 뜨거웠다는 것 따위를 왜 신경 쓰고 있냔 말이다.

그때, 옆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던 레나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집사가 고개를 숙이더니 방 밖으로 홀연히 빠져나갔다. 설마 밖에서 또 듣고 있지는 않겠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깥을 보던 하비는 담담한 빅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 집사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몰라도 아주 잘 길들였어. 방금도 경을 도와주고 나가지 않았나.”

“도와줘? 나를?”

빅터가 피식 웃더니 레나가 나간 쪽을 턱짓했다.

“눈치 못 챘어? 흐름을 끊고 가버렸잖아. 하여간 누가 주인인지. 덕분에 나도 정신 차렸지만.”

빅터의 턱짓대로 하비도 얼결에 문을 돌아보았다.

빅터는 하비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숨을 트고 생각다운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섞일 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는군.’

냉정하게 정리한 빅터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돌아온 하비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그는 하비의 알 수 없는 속을 헤집고 들춰볼 생각이었다. 주제로는 하비 스터스가 썼던 그 편지가 적절했다. 열 받아서 불태워 버릴까 하다가 참은 것이 다행이었다. 언제든 다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편지, 경이 쓴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거짓말한 거라는 것도.”

뜨끔한 하비는 공격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빅터가 자신의 집안을 들쑤시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 편지의 진실은 대대로 이어오던 잔혹한 전통과도 이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알아도 안 되지만, 빅터 베르텐은 더더욱 안 된다. 자유로운 무역 상인이기도 한 빅터는 스터스가의 광적인 집착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비웃기만 할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고리타분하고 비이성적인 가문이라고 모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다. 고작 이런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몸도 기꺼이 팔았냐는 비아냥을 빅터에게 들을 바엔,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낫다.

비참한 심정을 숨기고 하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명백한 증거를 보고도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건 베르텐 경의 버릇인가?”

기분 나쁠 수 있는 하비의 말에도 빅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비는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자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네가 숨기고 있는 게 과연 뭘까.’

피식 웃은 빅터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직관. 이걸로 투자를 성공시켜 왔고, 덕분에 스터스 경을 내 집까지 불러올 수 있게 되었지.”

빅터가 벌떡 일어나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마치 예전 어릴 때의 그 자선 파티처럼. 그리고 하비는 그때처럼 무덤덤한 눈길로 그를 보고 있었다.

‘또 그 눈이군.’

오기가 생겼다. 언제나 그랬다. 사람을 깔보는 것도 아닌,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저 눈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속에서 부글부글 뜨거운 곳이 끓었다.

빅터가 접대용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하비에게 다가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하비의 시선이 따라왔고, 동시에 하비는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빅터는 그것을 보고 잠시 눈을 찡그렸지만 곧 평정을 찾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멀찍이 떨어진 거리를 빅터가 자리를 옮겨 가까이 당겼다. 하비가 불편해하며 다시 엉덩이를 떼려는 순간, 빅터는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짓눌렀다. 꼼짝달싹 못 하고 의자에 붙어버린 하비에게 바짝 상체를 기울인 빅터가 속삭였다.

“기회를 주기도 했는데, 왜 굳이? 뭘 숨기고 싶어서?”

하비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탔다. 혼자 감내하고 숨겨왔던 비밀들이 그의 속을 어지럽혔다. 가장 말하지 말아야 할 적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그는 식은땀이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다. 스터스가의 유구한 전통과 명예에 대한 집요함을 혼자 짊어져 왔다. 온몸을 짓누르는 그 무게가 무겁고 아파도 앓는 소리 한번 내본 적 없었다.

지금 와서 이해해 보겠다는 빅터의 말을 정말 믿고 싶은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자신을 이해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있을 리가 없었다. 신뢰할 수 없는 자를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알 수 없는 열기와 갈망으로 하비의 입이 달싹거렸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이 말이 하마터면 목 언저리에 걸려 있다가 위로 튀어나올 뻔했다. 하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눈앞의 미남자는 언제든 수틀리면 그를 잡아먹을 수 있는 포식자다. 괜찮다고 하고 있지만 절대 그럴 리 없었다.

하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빅터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편지를 내가 썼든 아니든, 경에게는 중요하지도 않잖아. 그저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던 거 아닌가?”

빅터의 눈이 길게 늘어지며 잔인한 빛을 띠었다. 하필 하비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빅터가 믿는 주변인은 해도 되지만, 스터스가의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를 지옥에 밀어 넣은 그 핏줄만큼은, 절대로.

빅터는 가장 화가 났을 때, 가장 냉정해졌다. 그게 그의 무서운 점이었다.

“아아, 그랬지.”

허벅지를 짚은 빅터의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 하비는 통증을 느꼈다. 다리를 부러뜨릴 것처럼 강한 누름이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빌미를 주는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스터스 경도 즐기고 있는 건가?”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면 무슨 짓을 당할지 뻔히 알면서 제 발로 오지는 않겠지.”

빅터는 극도로 흥분했지만 조용히 인내하고 억누르고 있었다.

‘엄청나군.’

하비는 빅터의 기운에 짓눌려 숨쉬기도 힘들었다. 확실히 우성 알파는 다르다. 우성 알파는 흔치 않아서, 하비도 사실 직접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빅터를 포함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고,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하비는 버거웠지만 여느 때처럼 버텨서 압박을 이겨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여태껏 참은 것도, 지금 온 것도, 전부 경이 우리 가문의 치부를 폭로하겠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뿐이다.”

떨떠름한 얼굴로 하비가 답하자 빅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이제 라힌 스터스의 위상이 하늘같이 높은 분에서 치부로 조정된 건가? 그거 하난 속이 시원하군.”

“…….”

빅터에게 또 말려들었다. 하비는 어떻게든 스터스가를 흠집 내려고 안달 난 남자에게 자꾸 내부의 흔들림을 비추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빅터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비의 허벅지를 꽉 누르고 있었다. 빅터의 손을 흘끗 내려다본 하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경이 한 말대로 해. 하던 대로만 하라고.”

어차피 협박으로 유지되어 온 관계였다. 하비는 빅터가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사람을 뒤흔드는 것을 경계했다.

“내가 하던 대로라…….”

하비는 생각에 잠긴 빅터를 보고 입술을 물었다. 빅터가 이쯤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벗어, 아니면 넣어. 약을 강제로 먹이고 나서 구멍을 넓히라며 뭔가를 던져 주던 게 생각나서 하비가 수치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빅터는 전혀 예상 밖의 말을 던졌다.

“답답한 집 말고, 밖에서 늦은 저녁을 먹을까 하는데.”

하비의 허벅지 위로 손을 천천히 올리면서 빅터가 유혹하듯 말했다.

“혼자 가기 싫어서 말이야. 동행해 주었으면 해.”

하비는 야릇한 손길에 흠칫 떨었다. 강압적인 말투도, 강제하는 행위도 전혀 없었다. 요약하면 나가서 식사나 한 끼 하자는 권유에 가까웠다.

갑자기 바뀐 태도에 하비는 어리둥절했다. 바깥에서나 보여주는 신사적인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기가 막힌 하비가 입을 열려다가 금방 닫았다.

“아, 토 달지는 말고. 경에게 선택권은 없으니까.”

그럼 그렇지. 하비는 익숙한 대화에 쓰게 웃었다. 빅터와는 이런 식의 대화가 역시 편하다.

하나 묘한 것은 허벅지를 짚고 있는 빅터의 손이 아직도 뜨겁다는 것이었다.

* * *

한바탕 소란 뒤, 하비는 빅터와 함께 그의 저택에서 나왔다.

소란이란, 빅터의 사용인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같이 외출을 한다고 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놀란 듯했다.

사용인 몇 명이 껄렁한 자세로 툭툭 내뱉었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네요?’

‘주인님, 너무 앉아서 일만 하니까 아래쪽도 일을 못 하는 겁니다.’

마중 나온 집사 레나가 그들을 노려보았고, 같이 나온 나스타는 배를 잡고 웃었다.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지 못한 하비를 잡아끈 빅터가 한마디 남겼다.

‘다녀올 때까지 그 자식들 입 묶어놔.’

레나의 눈짓에 나스타가 신속히 움직였고, 뒤에서 비명이 들려오다 뚝 끊겼다.

하비는 빅터의 저택 사용인들의 활력에 작게 웃었다.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바로 방에 틀어박혀 고문에 가까운 희롱을 받다 보니 이런 분위기를 전혀 몰랐다.

“집사 성격이 참 좋더군.”

“레나? 우리 집 귀염둥이지. 말만 좀 건방지게 안 하면 좋겠는데, 그것도 직업병이라 어쩔 수 없을 거지만.”

하비가 의아해 물었다.

“직업병?”

“몰랐나? 레나는 심리 상담사야. 공부도 꽤 열심히 했고. 물론 학비는 다 내가 지원했지.”

하비는 놀란 눈으로 빅터를 보았다.

“다들 멀쩡해 보여도 고장 난 부분이 있어서, 삐뚤어진 놈들이 많아. 아까처럼 막말하는 놈들도 포함해서. 물론 능력은 인정하지만. 그런 놈들을 레나가 치료해 주는 거지.”

빅터에게서 들은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재능과 능력이 있었다. 투덜대긴 해도 빅터가 그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게 눈에 보였다.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애정이 느껴지는 주종 관계라니. 하비는 자유분방한 빅터의 저택 분위기가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스터스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사용인들이 예전처럼 많아져도 빅터의 저택 같은 느낌은 나지 않을 것이다.

“부럽군.”

빅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뭐?”

하비는 그 뒤로 입을 다물고 빅터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의문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었다.

하비 스터스는 여전히 구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하비는 언젠가 반이 그에게 푸념처럼 말했던, ‘시대를 앞서간다는’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세계는 크게 바뀌고 있지만, 그가 발을 담근 하얀 저택은 과거의 그늘에서 오로지 옛것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스터스가는 겉으로는 선한 가면을 썼지만 속으로는 독기를 내뿜으면서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서서히 말려왔다.

하비는 그런 방식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송두리째 바꿀 용기도 없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뼛속 깊이 박제된 것들이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비는 걸음을 옮기느라 흔들리는 빅터의 등을 지켜보았다. 오늘따라 그 등이 크고 단단해 보였다.

간단히 외출할 거라길래 말을 탈 줄 알았는데, 빅터는 굳이 마차를 이용했다. 당연히 쌍둥이도 따라붙었는데, 둘 중 알파 마부가 오늘따라 편안해 보였다. 하비가 다시 알파가 되어서 괴로울 정도로 강렬한 오메가 페로몬을 뿜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는 거지?”

빅터는 대꾸 없이 너른 마차 구석에 있는 상자를 끄집어냈다. 거기서 희한하게 생긴 가면 두 개를 꺼내 하나를 하비에게 던졌다. 얼결에 받은 하비가 두 눈이 뻥 뚫린 하얀 개 모양의 가면을 보았다.

“설마 이 밤에 가면무도회라도 가려고?”

“비슷한데 더 좋은 곳이지.”

빅터가 가볍게 말하며 자신의 것을 썼다. 그의 가면은 검은색 표범이었다. 까만 표범이 하비를 향해 홱 돌아보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바꿔줘?”

“아니. 됐어.”

한숨을 쉰 하비가 하얀 개 가면을 묵묵히 썼다. 어디까지 끌려갈지 이제 예상도 안 되었다. 이건 단순히 외식을 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본격적인 데이트에 가깝지 않은가.

빅터의 의중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연인 선언을 하더니, 이제 그 콘셉트에 맞춰서 제대로 행세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얼굴이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건 다행인가.’

밖에서는 연인 행세,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개보다 못한 취급. 양지에서는 다르게 행동하는 빅터가 어색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연인 행세도 효율적으로 자신을 궁지까지 몰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하비는 지금쯤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을 상처투성이 재무 회계사를 떠올리며 빅터가 저지른 잔인한 짓을 상기했다.

‘사람을 망가뜨리는 데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놈이야.’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말이다. 하지만 사용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또 다정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 정확히는 스터스가에게만 혹독했다. 적에게는 가차 없어 보이니까.

‘딱히 적이랄 게 있나. 나에게만이겠지.’

하비는 무의식중에 빅터가 준 하얀 개 가면을 손으로 만졌다. 우둘투둘한 면 위로 긴 코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만져졌다.

하얀 개. 빅터의 수중에 떨어져 있는 하얀 저택의 개.

‘언제든 잊지 말라는 건가.’

하비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창문 바깥을 보고 있는 검은 표범은 어떤 얼굴일지 알 수 없었다. 하비도 반대편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빅터가 돌아보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마차가 덜컹대며 튀자 앞을 보았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려서 보니 이미 그의 마부는 하비의 것과 비슷한 까만 개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른 쌍둥이 쪽도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우아해 보이는 하비의 하얀 개와는 달리 음습해 보이는 까만 사냥개 가면이었다.

“이제 들어가 볼까.”

빅터가 하비의 팔을 정중하게 잡고 마치 연인처럼 입장했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던 하비였지만 그러지 못하도록 강하게 누르는 힘에 강제로 입구까지 끌려가다시피 했다.

입구를 지키는 노란 고양이 가면을 쓴 덩치 좋은 사내들이 그들에게 입장권을 요구했고, 빅터는 자연스럽게 품에서 황금빛 단추를 꺼내 들었다. 그걸 표 대신 쓰는 듯했다. 하비는 신기해하는 눈으로 입장 절차를 지켜보았다.

무도회장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탁한 공기가 훅 끼쳐들어서 하비는 눈가를 구겼다.

‘무슨 냄새지?’

이를 눈치챈 빅터가 피식 웃고는 하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참아. 익숙해질 테니까.”

그 알싸하면서도 눈가를 뿌옇게 저미는 공기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각양각색의 가면을 쓴 귀부인과 귀공자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손에 뿌연 공기의 원인인 듯한 기다란 장죽을 들고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비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장죽을 물끄러미 보았다. 연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담배 향은 아닌데.’

웅성거림이 잠깐 멎었다. 여러 명의 시선이 대번에 빅터와 하비 일행에게 쏠렸다. 그들 중 가장 먼저 공작 가면을 쓴 영애가 다가와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하얀 팔목과 가느다란 어깨를 드러낸 과감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 좋은 신참을 데려왔네? 오늘 밤에 함께할 동지야?”

빅터가 웃음기를 빼더니 하비를 붙든 팔에 힘을 주었다.

“여긴 외국인이라 이쪽 사정을 잘 몰라. 조심해 주었으면 하는데.”

공작이 눈을 반짝이며 하비를 아래부터 위까지 훑었다.

“어머, 그래? 마음에 들었는데. 네가 데려오는 외국인들은 ‘고객’이니까 건드리면 안 되지. 아쉽네.”

뭐가 아쉽다는 건지 몰라도 공작 가면은 하비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자신을 훑던 시선에 오싹함마저 느꼈던 하비가 빅터에게 조용히 물었다.

“여긴 대체 뭘 하는 곳이지?”

“차차 알아갈 테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 그리고 외국인 연기 잊지 마. 외국어는 잘할 테니 하나 설정해. 대충 장단 맞춰줄 테니까.”

하비는 한숨 쉬며 알았다는 고갯짓을 했다. 그 뒤로 붉은 오리, 까만 닭, 노란 물소 등 다양한 가면들이 그들에게 들렀다가 비슷한 질문을 하고 떠났다.

가면들이 하는 질문들을 종합해 이곳의 정체를 추측한 하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정보성 사교 클럽인가?”

“얼추 맞았어.”

빅터도 어느새 그 장죽을 입에 물고 있었다. 하지만 하비에게 권하지는 않았다. 하비도 딱히 그 기분 나쁜 연기를 직접 들이켜고 싶지 않아서 먼저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구석에서 칩을 이용한 간단한 도박이나 큐를 들고 당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비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갔다.

‘저기에 뭔가가 뜨나?’

높은 곳에 커다란 판이 붙어 있었는데, 2층 계단에서 사용인들이 끝이 넓적한 긴 장대를 이용해 빈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아직 예행연습이나 준비만 하는 단계인 걸 보니 본격적인 것은 아닌 듯했다.

귀족들이 몰래 모인 곳에서 어떤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라면, 가능성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하비가 언뜻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설마, 투기 목록?”

빅터가 연기를 내뿜으며 웃음 지었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제야 정답이군.”

그렇다면 이곳에 반 로투스 경이 빠질 수가 없다. 귀족들의 정보를 취급하는 로투스가에서 이런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가면을 써서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반이라면 목소리를 듣고 알 수도 있다. 이런 장소에 있는 것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거짓 연인 선언을 한 빅터와 함께 있는 것은 결코 보이기 싫었다.

빅터가 두리번대는 하비를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아니.”

하비가 얼버무리자 빅터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 변화를 모르는 하비는 또 다른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커다란 판 아래 있는 크고 빈 단상에 눈길이 갔다.

“저기서 연극이라도 하는 건가.”

“글쎄. 그럴까.”

왠지 불퉁하고 불친절한 답변에 하비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곳을 계속 주시했다. 찜찜했다.

‘저 단상에 투기 목록들이 나오는 걸지도.’

예상하면서도 떨떠름함은 마음속에서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그때 회장 전체가 불이 꺼지고 어두워졌다. 자욱한 연기만이 유유히 허공을 부유했다. 긴장한 하비가 주변을 경계했다. 어둠 속에서는 항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경계 하나 없이 여유롭게 자리를 지키며 하던 것을 하고 있었다. 뭔가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하비는 그의 긴장을 감지한 빅터가 작게 웃는 것을 듣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러다 빅터가 손을 잡는 것을 느끼고는 퍼뜩 아래를 보았다. 하비는 여느 때처럼 불쾌한 듯 말했다.

“뭐 하는 거야.”

하비가 뿌리치려 하자 빅터가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러곤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심해. 쇼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하비는 대번에 예민한 귀가 간지러워져서 움츠렸다.

하비의 반응을 눈치챈 빅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하나하나에도 곧잘 반응하는 것이 하비 스터스다우면서도, 의외였다. 빅터는 하비가 이곳에 온 뒤로 털을 곤두세운 개처럼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우습고…….

‘좀 귀엽긴 한가.’

이 덩치 큰 남자를 두고 한 생각이 이딴 것이라니. 빅터는 순간 자신이 미쳤나 했다. 그 생각은 곧 밝아진 무대와 쩌렁쩌렁한 사회자의 목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모두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기대 투자 품목을 소개하기에 앞서, 깜짝 경매 이벤트를 준비했거든요! 기다려 주신 만큼 기쁘게 즐기실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그럼, 쇼를 시작합니다!”

사회자는 황금 뱀 가면을 쓰고 있었다. 흡사 광대 같은 요란한 복장이었지만 눈여겨보면 값비싼 재질의 의복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비가 무대 위로 등장한 사회자를 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반?”

목소리만 듣고도 바로 알아차렸다. 나름대로 변조한 것 같지만 오랜 친구인 하비는 바로 눈치챘다.

이런 비밀 클럽에서 사회자를 맡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하긴, 로투스가가 개입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반을 마주칠까 경계했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이니 예상 못 한 바도 아니었다.

“이번에 저희가 준비한 이벤트는 바로 이것입니다!”

황금 뱀 가면이 손을 쭉 내밀더니 무대 옆을 가리켰다. 불빛이 사회자인 반 로투스의 손길을 따라갔다. 그러자 검은 휘장으로 가려진 무언가가 나타났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때맞춰 사용인들이 2층에서 장대를 가지고 종이를 내리자 크고 까만 글자가 나타났다. 상품의 기본가가 숫자로 환산되어 뚜렷하게 보였다. 꽤 높은 수치라, 사람들의 기대치가 올라갔다.

“이번엔 노예인가?”

“기대되는걸요?”

“전에는 놓쳤지만 이번엔 꼭 내가 가질 거야.”

하비의 주변에서 가면 쓴 귀족들이 수군댔다. 어떤 노예길래 이토록 가격이 높은 건지 궁금하던 찰나, 사용인들이 검은 휘장을 한 번에 벗겨냈다.

까만 철로 된 새장 속에 한 남자가 갇혀 있었다. 미남자였다. 하얀 피부에 녹색 눈, 화려한 금발을 지닌 귀한 티가 흐르는 앳된 사내였다. 가면 쓴 귀족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그 순간, 하비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앞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죽었다고 보고받은 최고의 ‘비둘기’가 다름 아닌 그곳에 구금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총괄 외교관이 그리 난리를 쳤던 그자였다.

‘젤가?!’

어떻게 그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죽기 직전에 노예 상인의 눈에 띄어 물물교환되어 왔을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젤가는 누가 봐도 튀는 존재였으니까.

하비의 혼란에도 아랑곳 않고 회장 분위기는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아름다운 노예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귀족이 많았다.

“자, 놀라기엔 이릅니다. 이번 상품은 최상급으로, 무려 슬루인 제국에서 간신히 빼 온 것입니다. 외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재주가 아주 많은 노예입니다. 확인해 본 결과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침대 생활도 포함입니다.”

가면을 쓴 귀족들이 여기저기서 웃었다. 지켜보던 하비가 으득 이를 갈았다. 재주가 많은 것은 당연했다. 그가 직접 고른 비둘기니까.

빅터는 하비의 옆에서 수상한 눈길을 보냈다. 대체 저 노예가 뭐길래 이리도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러지?”

하비는 대답하지 않고 숨죽인 채 아무런 표정이 없는 젤가를 보았다.

‘네 정체를 밝히지도 않은 거냐.’

꼴을 보니 젤가는 자신이 본국 사람임을 밝히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첩자인 것이 밝혀지면 여러모로 곤란하니 끝까지 입을 다문 것이다.

“기본가는 다들 보셨으니, 이제 시작합니다!”

저 체념한 표정을 보니 이대로 두면 평생 노예로 살 생각인 것 같아 하비가 나섰다.

“백이십 기나.”

‘기나’는 지폐 중 최고 단위였다. 게다가 하비가 제시한 금액은 일반 서민들의 일 년 치 급여와 맞먹었다. 그의 가문에 돈줄이 마른 것을 감안하면 큰마음 먹은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이 발 빠르게 제시하는 금액이 더 높았다. 심지어 서서히 올라갔다. 하비도 질세라 금액을 높였지만 사실 그 이상 지불할 능력은 없었다. 파산을 감수하고 일단 불러서 젤가를 빼 올 생각이었다. 하비의 손에 식은땀이 맺히고 관자놀이에도 땀이 흘렀다.

그런데 하비를 뚫어지게 지켜보던 빅터가 한발 나섰다.

“천오백 기나.”

빅터는 대번에 모든 귀족을 눌렀다. 그 정도 금액이면 시가지 중심의 작은 건물 하나를 살 수 있었다. 하비도 깜짝 놀라 빅터를 쳐다보았다. 빅터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황금 뱀 가면을 쓴 사회자, 반 로투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검은 표범이시군요. 더 높은 금액 있습니까?”

빅터가 초조해 보이는 하비의 옆모습을 힐끔 보더니 더욱 단호하게 못 박았다.

“이천오백 기나.”

그러자 다들 숨죽이고 입을 닫았다.

황금 뱀 가면을 쓴 사회자 반이 주변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가지고 싶은 듯 손을 올리다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탐나더라도 파산하면서까지 노예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현재 검은 표범 가면이 제시한 금액은 보통 귀족이 한 번에 지불하기에는 몹시 부담스러운 고가였다.

“모두 이의 없으십니까? 그럼 저기 검은 표범 님이 1번을 낙찰했습니다!”

실망하는 귀족들에게 사회자인 반이 어르는 말을 던졌다.

“깜짝 이벤트가 하나 더 있으니 실망하지 마시고!”

다음에 공개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옥으로 만든 거북이였다. 먼 타국에서 가져온 귀한 것이라는 사회자의 감언이설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하비는 그런 것보다 당장 젤가를 데리고 이 회장을 나가고 싶었다. 본 이벤트가 아님에도 역겨운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다.

그 소란 속에서 하비가 빅터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한테 넘겨.”

“누굴? 아까 그 노예?”

“어떻게든 값은 지불할 테니까 넘겨줘.”

빅터는 팔짱을 끼고 기분 나쁜 듯 낮게 웃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마음에 들어서 산 건데. 경에게 넘겨줘야 할 의무도 없고.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군?”

할 말이 없어진 하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외교관으로서 키운 첩자라고 이 자리에서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빅터는 그런 하비를 보며 한쪽 입매를 올렸다. 삐뚤어진 미소였다.

‘흐음.’

하비 스터스가 이토록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빅터의 속이 묘하게 뒤틀렸다.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보던 빅터가 냉정하게 말했다.

“일단 끝까지 봐. 난 중간에 나갈 생각 없으니까.”

잠깐의 경매 이벤트가 끝나자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회장 측에서 직접 선별한 향후 인기를 끌 예상 투기 품목들이 줄줄이 나왔다. 한때 올란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꽃 중에 새로운 개량종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고, 어느 원시 국가가 배출한 왕가의 보물도 있었다.

진행은 순조로웠고 귀족들의 환호 소리가 간간이 섞였다.

이벤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빅터는 말이 없는 하비를 약 올리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이런. 내일 또 은행에 불이 나겠어. 미리 줄 서놓으라고 말해놔야겠군.”

하비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모든 투기 품목 예상 시간이 끝나고, 성공적인 투자를 기원하는 시간이 있었다.

노예들이 가면을 쓰고 나와 춤을 추는데, 이곳에 참여한 귀족들은 그중 마음에 드는 노예를 골라 방에 데려가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아무나 골라 사적으로 가면을 벗겨 본 뒤 마음에 드는 노예면 성공적인 투자가 된다는 개념이었다. 귀족들의 방탕한 게임 중 하나였다. 귀족들이 연신 피우고 있는 연기의 정체는 몸을 이완시키고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빅터가 사회자를 따로 불러 잔인한 주문을 했다.

“아까 내가 산 노예, 저 틈에 섞어.”

오히려 놀란 건 사회자와 하비였다.

“네? 낙찰된 사적인 소유물인데 그래도 됩니까?”

“섞어. 실컷 돌리고 나서 나중에 돌려주면 돼.”

사회자인 반이 주먹을 꽉 쥐고 부들거리고 있는 하얀 개 가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왠지 하얀 개 가면에게서 익숙한 페로몬이 나는 것 같았지만 반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물러났다.

참다못한 하비가 빅터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으름장을 놓으며 낮게 일갈했다.

“방금 말, 당장 취소해.”

빅터는 까만 표범 가면 아래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내 소유물이니 내 마음이야.”

“취소하라고.”

“못 하겠는데.”

바로 쌍둥이가 개입하여 빅터에게서 하비를 떼어놓았다.

주변에서는 두 사람의 몸싸움 정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수상하고 나른한 연기를 헤치고 벌써 방으로 사라져 자기들끼리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귀족도 많았다.

머리가 아플 지경인 연기 속에서 하비가 뚜렷한 밤색 눈동자에 빅터의 까만 표범 가면을 가득 담았다. 협상을 하려면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하비는 나지막하게, 처절함을 담아 물었다. 여태껏 빅터가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몸이라도 내주면 내 말을 들어줄 건가? 그 약을 먹고 변하면 되나?”

빅터가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피식댔다. 이 고상한 남자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추락했을지, 본인이 만든 상황이지만 씁쓸했다.

하지만 빅터는 마음을 숨기고 일부러 더 고집스럽게 말했다.

“꼭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경의 몸을 취할 수 있는데 내가 왜.”

빈정대는 빅터의 말투에 하비가 이글대는 눈빛을 도전적으로 던졌다. 금방이라도 또 멱살잡이가 벌어질 것 같아 베타와 알파 쌍둥이가 뒤에서 긴장한 채 대기했다.

빅터는 방금 전 붙들렸던 가슴팍을 툭툭 쳐서 깔끔하게 폈다.

“쥐고 있는 경의 치부가 한두 가지인 줄 알아? 내가 하는 짓들이 싫다면 방법은 간단해.”

검은 표범이 잡아먹을 것처럼 하얀 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위협적으로 낮게 읊조렸다.

“그 빌어먹을 스터스가를 포기해. 그럼 모든 게 해결돼.”

하비의 눈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스터스가를 포기하라고? 지금 당장?

빅터의 목소리가 악마의 유혹처럼 감미롭게 들려왔다. 그가 하비의 주변을 천천히 맴돌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내게 약점 잡혀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고, 저 노예도 풀어줄 수 있지.”

하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나 한편의 빚처럼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하얀 저택과 그를 믿고 따르는 몇 남지 않은 사용인, 그리고 라힌 스터스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빅터에게 시달려 온 것이 얼마이고, 버린 것이 얼마인데 지금 와서 전부 내려놓으란 말인가.

결국 하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까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절대 할 수 없었다.

“……난 못 해.”

걸음을 멈춘 빅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돌아서려는 빅터의 팔을 하비가 세게 움켜쥐었다. 하비가 부들거리면서 목소리를 억누르고 그에게 제안했다.

마지막 묘수가 있었다. 자신을 어떻게든 밟고 싶어 하는 빅터에게 먹힐지도 모르는, 최후의 방법이.

“내가 저 속에 들어가면 되나?”

검은 표범 가면 속에서 녹색 눈이 크게 일그러졌다.

“뭐?”

하비는 가면 쓴 노예들이 나와 춤출 예정인 빈 무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무대 끝에 이미 준비된 노예들이 모여 있었다.

“저 틈에 내가 그 노예 대신 섞이겠어.”

하비는 귀족 사회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돌려지다가 망가지면 그만이다. 노예는 곧 돈이다. 돈은 돈으로 갚으면 된다. 그러니 함부로 다루고 심지어 죽여도 상관없었다.

아름다운 노예일수록 더욱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귀족들의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그것이 귀한 상품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특권이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빅터는 암묵적으로 비둘기의 ‘생명권’을 박탈한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돌려주면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하비는 그것이 진심이 아님을 알았다.

서서히 빅터의 눈빛에 분노가 스몄다. 믿기지 않는 듯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무슨 이야길 하는지 스스로 알고는 있는 거야?”

하비가 담담하게 답했다.

“알고 있어.”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무엇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자가 택할 수 있는 건 그 자신을 불구덩이로 던지는 길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비는 오히려 머릿속이 말끔하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빅터의 말대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비둘기를 저대로 내버려 두어도 어쩌면 운 좋게 죽지 않고 살 수도 있다. 평생 안고 가야 할 상처는 얻겠지만, 어찌 됐든 이 잔인한 곳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서? 이제 그것조차도 희미해졌는데 무얼 그리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빅터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하비를 말렸다.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잠깐. 다시 생각해 봐. 아무리 봐도 경은 어떤 상황에 처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

하비는 담백하게 말했다. 하얀 개 가면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빅터를 보았다.

“그래. 모르겠어. 아무것도, 이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하비는 내부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이미 망가진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어디로 가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빅터에게 하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통보했다.

“그럼 내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어.”

빅터의 팔을 놓은 하비는 사회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가지 못하게 덥석 붙드는 빅터의 손에 강제로 멈춰야 했다.

검은 표범이 한껏 낮게 으르렁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저 노예가 그렇게 소중해? 지금 제정신인가?”

하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체념이 깃든 미소였다. 그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빅터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아무래도 이 어지러운 연기 때문인 것 같군.”

하비는 걸음걸이마저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빅터는 그를 차마 더 잡지 못했다.

손끝이 떨리고 있는데도, 하비는 끝까지 노예들과 사회자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쌍둥이는 하비가 떠나간 뒤 구석의 테이블에 혼자 자리 잡고 앉아 술을 퍼마시는 빅터를 불안한 눈으로 보았다. 그는 오는 사람도 다 쳐내고 혼자만 고급 와인을 까고 또 까고 있었다. 곧 터질 활화산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했다. 불안해진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보며 눈치를 살폈다.

팍!

빅터가 술이 남은 잔을 테이블 위로 거세게 내려놓았다. 남은 술이 빅터의 얼굴까지 크게 튀어 올랐다. 마치 붉은 피처럼 보였다. 빅터의 얼굴이 악귀처럼 잔인해졌다.

빅터는 힐끔힐끔 제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쌍둥이를 가까이 불렀다. 빅터가 드디어 명을 내렸다. 먼저 명령을 받은 것은 알파 쪽이었다.

“넌 가서 그 빌어먹을 노예 새끼 데리고 와. 손끝 하나 대지 말고.”

그런 뒤 베타 쪽을 향해 빅터가 명했다.

“그리고 넌 스터스 경을 감시하다가, 누가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나한테 바로 알려.”

빅터는 와인 잔 밑동을 잡고 원을 그리듯 흔들었다. 드러난 굵은 팔뚝에 핏줄이 서고, 핏물처럼 붉은 액체가 잘게 흔들렸다.

“혹시라도 그를 고르는 귀족 놈이 있다면 끌고 가서 죽이고.”

쌍둥이 중 베타가 깜짝 놀라서 반발했다.

“예? 귀족을 죽이라고요? 뒷수습이 너무 힘들어지는데요.”

하지만 빅터의 단호한 명령이 재차 떨어졌다.

“죽여. 가장 고통스럽게. 네 전공이잖아.”

흔든 와인을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으며 빅터가 덧붙였다.

“아니, 차라리 그 귀족 놈을 내 앞으로 데려와. 내가 직접 하는 게 낫겠군.”

쌍둥이는 다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다 못한 알파 쪽이 빅터에게 고했다.

“주인님, 빈속에 술을 너무 드신 거 아닙니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 아니겠지요?”

빅터가 새로운 와인 병을 따서 잔에 채워 넣었다. 그는 피식거리면서 대꾸했다.

“내가 이 정도로 취하는 거 봤어? 멀쩡해. 아주 제정신이야. 아까 스터스 경이 말하는 거 너도 봤잖아. 차라리 그 사람이 취했다고 하는 게 나을 지경이다.”

쌍둥이도 가면을 쓴 노예 무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에 하비가 있다. 그 긍지 높은 귀족이.

“……그렇긴 했지만 말입니다.”

오죽하면 그들조차 하비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보통 귀족도 아닌, 뼈대 있는 가문의 수장이었다. 스터스가가 이름을 날린 것은 로열 가드로서 본국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다만 최근 있었던 전쟁에서는 불참했다. 라힌 스터스가 병중이었고, 하비는 하나뿐인 가주라 가문을 이을 자가 없어 제외된 것이다.

어쨌든 스터스가는 대대로 본국을 수호하던 가문 중 하나였다. 문무를 모두 겸비한 완벽한 귀족 그 자체로 군림했던 것이다. 총과 포가 발달하여 기사 제도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와중에도 그 역사를 알고 있는 자들이 칭송해 왔고 말이다.

스터스 가문은 약자를 수호하고, 신뢰하는 자들을 끝까지 이끌고 가는 정의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런 가문이니만큼, 해적 인질 사태의 전모를 아는 빅터 측의 일부 유가족은 배신감 때문에 더 이를 갈았다.

어쨌거나 하비의 행동이 몹시 인상적이었는지 은근히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쌍둥이들도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하비가 보여준 행동들은 여태껏 일관적이었다. 자신을 믿어주고 아껴준 사람들을 절대 배신하지 않았고 등 돌리지 않았다. 무엇 하나 스터스가의 본래 명성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노예들 틈에 섞여 있는 하비를 주시했다.

‘우리가 정말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집사 레나가 하는 소리들은 그저 그가 하는 공부의 일환이라 여겨 사실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쌍둥이의 혼란은 빅터에게도 여지없이 공평하게 전염되었다. 빅터는 와인 한 병을 더 마신 뒤에도 불안한 듯 장죽을 입에 물고 연기를 끊임없이 뱉고 있었다. 이쯤 되니 삼키는 건지 뱉고 있는 건지조차 헷갈렸다.

“자, 시간이 됐습니다. 노래 나갑니다!”

준비된 관현악단이 제각기 악기를 연주해 기묘한 화합을 이루었다. 음의 선율 속에서 하비를 알아보지 못한 반이 빅터가 동의한 것으로 알고 노예와 하비를 바꾸어주었다.

그때 무대 뒤에서는 젤가가 경악 중이었다. 가면을 바꿔치기하다가 하비의 얼굴을 본 것이다. 금발의 미소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스터……!”

채 말을 다 하기 전에 하비가 조용히 하라며 제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젤가는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까스로 손을 내린 젤가가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아니, 왜 저와 바꾸시는 겁니까? 어째서요? 저는 다 각오를 했는데…….”

옷도 바꿔 입으며 하비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며 대충 둘러댔다.

“설명은 다음에. 그리고 넌 여기 있으면 죽어. 이쪽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적어도 난 죽지는 않을 테니까.”

젤가는 절망스러운 얼굴을 한 채 하비가 손에 든 가면을 보았다. 그러자 하비가 손수 하얀 개 가면을 씌워주었다. 젤가가 송구스러운 듯 자꾸만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하비는 걱정 말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어떻게든 잘 빠져나갈 테니까 젤가 넌 뒷문으로 먼저 나가라.”

젤가는 고개를 숙이고 방금 갈아입은 하비의 옷을 살폈다. 여전히 고위 귀족치고는 검소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들리는 바로 스터스가의 재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젤가가 몸을 빼내는 대가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비에게 그 거액을 지불할 능력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하비의 굳건한 의지에 그가 뭐라 입을 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나오실 수 있는 거지요?”

하비는 말없이 노예용 가면인 검은 쥐 가면을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젤가가 울컥한 얼굴로 하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제가 꼭 찾아가겠습니다.”

하비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달랬다.

“그래. 들키지 말고.”

하비는 빅터의 가면과 쌍둥이 사용인들의 가면 인상을 알려주며 특히 주의하라 일러주었다.

젤가는 노예들 틈에 섞이러 나가는 하비를 복잡한 눈으로 보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먼 타국에서도 하비가 신경 써준 덕에 비둘기들은 큰 생활고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여러모로 생명의 은인인데 그런 사람을 두고 가도 되나.

수없이 고민하던 젤가는 하비를 위해 움직였다. 그가 해준 만큼 다음에 갚으면 된다. 살아야 은혜도 갚을 것 아닌가.

젤가는 무대 뒤로 재빨리 빠져나가면서도 여유로워 보이도록 걸었다. 내부 구조는 들어오면서 다 파악해 두었다.

좀 걷다 보니 단단한 철문이 보였다. 저것이 뒷문이었다. 모두 노예들의 춤을 구경하러 간 건지 다행히 주변에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 이대로 탈출한다.’

두리번거리던 젤가가 철문을 꽉 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젤가는 휙 뒤돌아 반격했다. 그러나 주먹을 날린 순간, 바로 잡혔다.

‘스터스 경이 조심하라고 한 그 가면……!’

바로 검은 사냥개 가면을 쓴 사내였다. 큰 손으로 우악스럽게 젤가의 팔을 잡은 검은 사냥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곱상한 외모치곤 주먹이 꽤 맵네.”

검은 사냥개가 바로 젤가의 목뒤를 쳐서 기절시켰다.

축 늘어진 젤가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하비를 걱정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젤가의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

그 시각, 하비는 노예들 틈에 섞여서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추는 춤은 하나도 모르는 데다가, 너무 흐느적거렸다. 격식 있고 절제된 귀족적인 춤이 몸에 밴 하비는 아예 뒤로 몸을 빼고 합류하지도 않았다.

하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검은 쥐 가면을 쓰고 춤추는 노예들을 보았다.

‘도대체 이런 춤이 뭐가 좋다고 몰려와서 보는 거지?’

하비가 그나마 막연히 믿었던 건 귀족들이 통상적으로 안기 좋은 호리호리한 몸매를 선호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대다수가 알파였다. 알파들은 이런 위험도가 크지만 한 방이 있는 투기를 좋아했고, 오메가들은 안전하고 오래가는 투자 방식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비처럼 어깨가 넓고 큰 키에 근육으로 단단한 몸을 가진, 게다가 알파의 페로몬을 뿜는 노예는 같은 알파에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줄 것이 뻔했다.

‘이상한 유행을 좋아하는 변태라면 다르겠지만.’

문득 빅터가 떠올랐지만 하비는 빠르게 머릿속에서 그를 지웠다.

하비는 적당한 때를 봐서 슬금슬금 노예들의 대열에서 이탈해 잘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로 이동했다. 하나둘씩 노예를 데려가는 귀족들이 나타나서 위험하다고 느껴서였다.

젤가와 자신을 교환하는 조건이었고, 빅터가 지켜보고 있는 만큼 완전히 몸을 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귀족에게 걸려 모르는 사람과 밤을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운이 좋지 않았다. 제일 처음에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 공작 가면이 눈을 빛내며 다가온 것이다.

“몸 좋은 알파 노예가 내 취향인 건 어떻게 알고 주최 측에서 준비했지?”

하필 이런 때.

하비가 거부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공작이 우아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불쑥 다른 손이 다가와 공작 가면의 손을 쳐냈다. 검은 사냥개 가면이었다. 하비가 놀라 움찔하자 검은 사냥개가 작은 신호를 보냈다. 협조해 달라는 사인이었다.

검은 사냥개가 공작 가면에게 정중히 요청했다.

“실례하지만 제가 먼저 잡았습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 내가 먼저 발견했는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검은 사냥개 가면이 슬쩍 금화 몇 개를 공작 가면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공작 가면은 금화를 확인하더니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이 정도 돈이면 밖에서 더 좋은 노예를 살 수도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공작 가면은 검은 사냥개에게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문 근처 방이 제일 아늑하고 좋더군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공작 가면이 장죽을 들고 웃음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하비는 묵묵히 서 있는 검은 사냥개를 보더니 가면 아래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려는 거지?”

물물교환으로 젤가와 바꾼 것으로 알 텐데, 이제 와 개입하는 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은 사냥개 가면은 하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물론 이미 사회자에게도 돈을 쥐여 주어 무마한 상태였다. 사회자인 반 로투스 경은 하얀 개 가면을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실랑이가 일자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차마 귀족을 죽일 수는 없어서…….”

하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족을…… 죽여?”

검은 사냥개는 베타 쪽이었다. 그가 골치 아픈 듯 뒷머리를 마구 긁으며 토로했다.

“그런 게 있습니다. 주인님이 더 큰 사고를 내기 전에 얌전히 따라오십시오.”

* * *

빅터는 가면을 벗고 서문에서 가장 좋은 방에 앉아 있었다. 붉은색 비단 휘장이 길게 드리워져 있는 호화로운 침대가 그의 앞에 놓였다.

방구석에서는 3명으로 구성된 작은 악단이 연주하고 있었다. 붉은 침대 휘장만큼이나 사람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노래였다. 물론 귀족들의 사생활을 보지 못하도록 검은 커튼이 드리워 악단의 앞을 가리고 있었다. 소규모 악단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도 한 상태였다.

까드득!

그의 손가락이 소파 위를 뚫을 것처럼 움켜쥐었다. 빅터는 침대를 놔두고 굳이 털 짐승의 가죽을 깐 너른 소파 위에 등을 기댄 채 방문만 뚫어지게 보았다.

‘왜 안 오지.’

벌써 다른 귀족이 채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비의 돌발 행동에 당황해 막지도 못하고 흘려보낸 것이 지금 와서 후회가 되었다. 협박을 빌미 삼아 끌려다니다 사람이 변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하비 스터스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넌 길들인다고 길들여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빅터가 이마를 짚고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그깟 노예가 뭐라고, 대체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구한단 말인가.

‘기분 나빠져서 돌린다는 소릴 하긴 했지만……. 분명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으면 그놈은 지금쯤 죽었겠지.’

하비의 혜안이 맞았다. 빅터도 사실 그 노예를 반쯤 죽이려고 한 소리였고, 하비가 그를 알아챈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하던 빅터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다곤 해도 너무…….’

그가 서른여섯 번째로 소파를 뜯고 있을 때쯤 문이 벌컥 열렸다. 까만 사냥개 가면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쥐 가면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쌍둥이 중 베타 뒤로 하비가 따라왔다.

“모셔 왔습니다.”

앉아 있던 빅터가 벌떡 일어나려다가 제자리를 지켰다.

“……잘됐군.”

만약 그 망할 노예가 먼저 들어왔다면 벽에 기대 있는 장검부터 손에 들었을 것이다. 하비가 온 것이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가 보는 앞에서 노예를 죽일 생각은 사라졌으니까.

빅터의 베타 사용인이 아무 말 없는 하비를 흘끗 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남자였다. 그가 빅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너무 요란하셨습니다. 로투스 경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관심 끄라고 해. 그 애송이가 어딜 넘봐. 그 자릴 준 것도 난데.”

사실 이 회장 자체도 빅터가 주관한 것이었고, 앞으로 유행할 투자 목록을 정리해 매주 선보인다는 아이디어도 그가 낸 것이었다.

빅터는 돌아오자마자 올란시 전체를 먹는 계획을 시작했다. 이곳을 지배하고, 장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양지뿐만 아니라 귀족가의 음지까지 모두 섭렵하기 위해서는 로투스가의 협력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이곳의 사회 및 이벤트 진행과 명목상의 운영을 맡겼다. 빅터와 로투스가는 현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빅터가 귀찮아하는 얼굴로 명했다.

“놈이 더 관심 가지지 못하도록 알아서 조치해. 스터스 경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빅터가 하비를 자신의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발치에 무릎 꿇렸다. 굴욕적인 자세였지만 하비는 말 한마디 없이 따랐다.

하비가 머리를 숙이자 두텁지만 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알파 특유의 페로몬이 후각을 자극했지만 빅터는 불쾌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대신 빅터는 다른 의미로 놀라는 중이었다.

‘꿈과 정말 똑같군.’

하비의 알파 페로몬은 평소에도 지겹도록 맡았는데, 왜 꿈에서는 바로 인지하지 못했는지가 더 이상했다.

빅터는 상체를 숙여 하비와 거리를 좁혔다. 이 거리조차 불편한 듯 자꾸만 멀어지려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하비의 처지를 알려주는 말을 독사처럼 뱉었다.

“조건, 기억하지?”

진창으로 걸어가겠다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비 스터스였다.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자발성이 빅터의 기분을 더 추락시켰다.

“아직 노예의 춤이 끝나지 않았으니, 경은 그 노예 놈이 나타날 때까지 그 대신이야.”

하비는 까만 쥐 가면을 쓴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순종적인 척하는 걸 보니 빅터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꽉 조였다. 저게 다 그 노예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면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날뛰는 제 감정을 조절했다.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고.’

빅터는 하비가 편지에 대해 거짓을 말한 뒤부터 계획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치욕을 감수할 정도로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 그것을 하비 스스로 망가뜨리게 할 것이다. 남이 하는 것보다는 그가 제 의지로 깨부수는 것이 훨씬 의미 있었다.

무조건 약점을 쥐고 뒤흔드는 것보다는 서서히 시간을 두고 온몸을 조여서 이것이 파멸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게 하는 것이다.

빅터가 까만 사냥개 가면을 쓴 베타 사용인을 손짓으로 불렀다.

“음악 바꿔. 적당한 걸로.”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그가 예를 갖추고는 검은 커튼이 쳐진 곳으로 갔다. 빅터가 피식 웃더니 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밖은 괴이한 놀이가 끝날 때까지 계속 시끄러울 테니, 우리도 즐겨보자고.”

빅터는 무릎 꿇고 있는 하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무얼 하려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그의 팔뚝을 움켜쥐고 빅터가 말했다.

“아까 같은 저열한 노래는 경의 고상한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으니, 익숙한 노래로 바꿔주지.”

이윽고 유혹적으로 끈적대던 음악이 기품 있는 왈츠로 바뀌었다. 현악기의 음이 더욱 풍성해지고 무게가 생겼다. 군인들이 전쟁 전 맞춰서 춤추기도 하는, 군무가 섞인 절도 있는 왈츠였다.

빅터는 하비를 데려온 베타 사용인까지 내보냈다.

“넌 나가서 다른 사람이 못 들어오게 막아.”

“알겠습니다.”

열렸던 문이 다시 단단히 닫혔다. 이제 이 방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검은 천 뒤에 기거하고 있는 음악인들과 왈츠밖에 없었다. 계약으로 입을 닫고 있는 음악인들은 음악 그 자체였으니, 이 방을 점거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은 빅터 베르텐 경과 하비 스터스 경, 두 귀족뿐이었다.

빅터가 가면 뒤로 얼굴과 감정을 숨긴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 남자에게 왜 이토록 집착하는 것인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모르니 마음 가는 대로 할 뿐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빅터는 춤을 신청하듯 손날을 가슴에 대었다가 그어 내렸다. 무도회에서나 차리는 예였다.

빅터가 흐트러진 금빛 앞머리 사이로 녹안을 매력적으로 빛냈다.

‘이런 곳에서 단둘이 춤을?’

하비가 빅터에게 황당한 눈길을 보냈다. 확실히 키도 크고 체격 좋은, 아름다운 미남자긴 했다. 귀족 영애들이 이 청을 받았으면 얼굴을 붉히며 바로 그 손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숙적으로 알려진 하비 스터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근에 이상한 선언을 하긴 했지만.’

속은 어떻든 하비는 이의 제기는 하지 않았다. 빅터의 말대로 그는 젤가와 자신을 맞교환했으니까. 어떤 의미였든, 약속은 약속이다.

밖에서 누군지도 모를 귀족에게 걸려 능욕당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순간 하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귀족보다 베르텐 경이 더 낫다는 건 무슨 발상인 건지.’

긴 한숨으로 상황을 받아들인 하비가 맞인사를 했다. 빅터의 즉흥적인 행동에 어울려 주기로 한 것이다.

3박자로 떨어지는 고풍스러운 음악이 이어지고, 빅터가 먼저 발을 떼었다. 미끄러지듯 뻗어 나가는 걸음에 하비의 것이 섞여들었다.

시작 전에 빅터가 여자역을 먼저 자처해서 춤은 순조로웠다. 빅터는 맨 얼굴로, 하비는 여전히 까만 쥐 가면을 쓴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아하면서도 선 굵은 위엄이 어려 있는 군무식 빅터의 춤과 절제되면서도 정중한 하비의 스텝이 맞물렸다. 분명 역할이 나뉜 춤이었지만, 각자의 스텝을 고수한 두 사람의 왈츠는 야성미마저 보였다.

두 사람의 단단한 몸이 때때로 부딪치면서 타격음을 내는 것조차도 춤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왈츠가 아니라 군무의 확장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비가 가면 속에서 눈을 굴려 빅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정말 알 수 없는 악취미였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런 게 재밌는 건가.’

하비는 원을 그리듯이 돌면서 빅터의 단단한 허리를 안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움찔하며 최대한 크게 닿지 않도록 범위를 좁혔다. 몸이 닿는 순간 빅터의 익숙한 페로몬이 하비에게 닿았다.

‘이상하군.’

같은 알파, 게다가 알파인 그를 짓누르는 우성 알파의 것인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하비는 빅터와 자주 몸을 섞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여겼다. 불쾌한 추측이었다.

‘아니면 이것도 약의 부작용인가.’

마침 빅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피 흘리며 쓰러졌던 꿈속의 하비가 번뜩 머릿속을 스쳤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하마터면 스텝이 꼬일 뻔했다.

‘그 개 같은 꿈은 왜 또 여기서 떠오르는 건지.’

검은 장막 뒤에서 웅장한 왈츠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어느덧 두 사람의 귀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무음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빅터는 지금의 상황이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서로를 파괴하듯이 말로, 혹은 몸으로 치고받던 것들이 없었던 일처럼 음악 속에 묻혀 사라졌다.

빅터는 지금 이 순간, 하비 스터스의 내면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같은 고양감에 취했다. 하비가 가면을 굳이 벗지 않는 것은 그만의 시위이자 고집인 것도 잘 알았다. 이토록 그의 속마음과 행동 양식을 잘 아는 사람이 자신 말고 또 있을까.

뜻 모를 우월감이 솟았다. 가면 쓴 남자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면서 스치는 살결에 흥분이 일었다.

언뜻 가면 뒤로 보이는 귀마저 길고 모양이 정갈했다. 하비 스터스의 외양은 모든 것이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단정했다. 심지어 남들이 잘 모르는 그 속내까지도.

‘나만이 알지.’

그는 해적선에서 억류되었던 오랜 기간, 그리고 대륙에 안전히 상륙한 뒤로도 집요하게 하비만을 그렸다. 비록 상상 속에서 하비 스터스를 몇 번이나 찢어 죽이기도 하고, 그리 좋지 않은 감정으로 좇긴 했지만, 그만큼 하비를 생각해 왔다.

‘몸도 포함해서.’

천하의 하비 스터스가 오메가의 몸으로 발정이 나서 박히는 모습을 볼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그리 생각하니 빅터는 조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하비가 다시 가까워졌을 때 빅터는 마음먹은 것을 시행했다.

“하나 충고하는데, 이제 그만둬.”

말없이 춤에만 몰두하던 까만 쥐 가면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온몸 바쳐서 가문의 결백을 증명하려 드는 거.”

하비가 가면 아래에서 동요하는 것이 떨림으로 전해져 왔다.

빅터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세 치 혀로 사람을 현혹하는 것은 그의 전공이었다. 스텝을 밟는 빅터의 발이 직선으로 미끄러지며 교묘하게 하비의 것을 피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딱!

빅터의 발이 절도 있게 바닥을 찍으며 큰 소리를 냈다.

“나도 제정신 아닌 놈인 건 인정하지만, 아무리 봐도 경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거든. 너무 과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빅터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과하다고.”

빅터는 계속해서 하비의 현실을 냉정하게 꼬집었다.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나. 그렇게 낄 곳 안 낄 곳 구분 못 하면서 귀족이, 그것도 로열 가드 가문의 귀족이 부나방처럼 몸을 던져대는 게 정상인 것 같아?”

하비의 마음에 돌을 던지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그의 눈이 미친 듯이 일렁였다. 빅터가 한 번 더 하비를 내려찍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깨끗해지고 싶어? 뭘 위해서?”

빅터의 빈정거림은 제대로 하비의 약한 곳을 찔렀다. 하비는 결국 자신도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나 하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빅터는 그 부분을 너무 정확하게 짚었다. 마치 하비의 속내 정도는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라힌 스터스, 그 겁쟁이 놈과 다르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빅터가 던진 돌에 하비의 마음을 둘러친 불투명한 유리창이 깨졌다. 산산이 부서져서 조각이 하비를 찔렀다. 너무 아팠다. 듣다 못한 하비가 낮게 일갈했다.

“한 번만 더 내 아버지를 모욕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어떻게 가만두지 않을 건지 궁금한데.”

빅터는 가면 아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적어도 저 밤색 눈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빅터는 즐거이 상상했다. 그리고 현실도 그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비는 누군가가 이토록 자신의 속을 헤집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업무상으로 외교를 논할 때와는 달랐다. 각자의 입장을 전달하고, 조율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성공적인 협상은 모두가 만족해야 하지만 그건 이론에 불과했다.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각오로 임해야 하는데, 빅터와의 관계에서는 도무지 그 접점이 보이질 않았다. 그에게는 살을 내주면 뼈까지 잃었다. 바로 지금처럼, 여태까지 고수했던 입장을 뒤집어가면서 사람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그래서 뭔가를 예측하고 얻을 수가 없었다.

현악기 소리가 높아졌다. 하비의 판판하고 돌 같은 가슴과 빅터의 무기 같은 어깨가 세게 부딪쳤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멀어졌다. 격식 있는 왈츠가 점점 격렬해졌다.

이 정도 춤으로는 숨이 찰 리 없었다. 대신 하비는 다른 것으로 숨이 막혔다.

“정말 이상한 말만 하는군. 여태껏 그걸로 내 발목을 잡았으면서, 이제 와서 놓으라니.”

돌이켜 보면 빅터의 태도 변화는 편지 사건을 계기로 시작해서 알파 연인임을 공식적으로 알리면서 절정을 맞았다. 스터스가를 버리라는 둥, 마치 스터스가로부터 그를 따로 떼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비가 흠칫했다.

‘설마, 다른 목적이 있나?’

하비는 그렇게 함으로써 빅터가 얻는 이익이 있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목적이 복수나 분풀이에 가까웠던 지난날과는 방향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하비를 흔들어놓기에는 충분했다.

‘나를 흔들어서 무슨 이득이 있어서? 스터스가를 의심하게 하고, 실망시켜서 뭘 얻으려고.’

하비는 퍼뜩 스치는 생각에 경악했다. 즉각 춤이 멎었다. 하비가 멈춰 서서 빅터를 노려보았다. 노래는 여전히 끊기지 않았다.

하비는 생각한 것을 입으로 옮겼다.

“혹시 의원직도 모자라 스터스 가문도 돈으로 사고 싶은 건가? 그게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과 연관이 있나?”

그게 사실이라면 하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빅터 베르텐은 누구보다 뛰어난 수완가이자 사업가다. 남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뺏는 것에 능했다. 사람의 심리까지 이용해서 말이다.

“뭐라고?”

빅터의 표정이 시시각각 이상하게 바뀌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하비는 딱딱한 목소리로 못 박았다. 사람을 뒤흔들어 놓고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빼 갈 속셈이었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건 절대로 안 돼. 내가 먼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문을 팔 생각은 추호도 없어. 경의 가문처럼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빅터의 가문인 베르텐가는 한미했던 귀족가를 그의 조부가 사들인 것이었고, 이를 지적하는 말이었다.

빅터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피식피식 웃었다.

“내 가문처럼, 이라.”

딱히 비꼬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마지막 말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하비는 짧게 사과했다.

“방금 말은 너무 갔군.”

가문을 산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귀족에게 이런 말은 금물이었다. 정면으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성질이기에.

빅터는 할 말이 몹시 많았지만 가까스로 입을 닫고 있었다. 이 고요한 밤색 눈을 지닌 남자는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에게도 자존심을 상처 입힌 것에 사과한다. 하비의 그런 정직함과 고지식함이 싫지 않지만, 가끔은 짜증 나게 거슬렸다.

‘성격 나쁜 나는 그런 걸 부수는 데서 희열을 느끼지만.’

어떻게 하면 저 견고한 것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빅터는 골몰했다. 끊긴 춤은 다시 이어지지 않았지만, 빅터는 춤을 출 때보다 더한 즐거움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이 넘치도록 즐거웠다.

그가 하비의 목을 조를 것처럼 가볍게 쥐었다. 이것은 놀이다. 누군가를 부수고 나면 끝난다. 오랫동안 열망해 왔던 길고 긴 놀이였다.

하지만 빅터는 이 놀이에 너무 몰입했다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도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어느 것이 게임이고, 진짜는 무엇인지조차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는 거지?”

그는 하비의 굵은 목을 위협적으로 쓰다듬었다.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어. 일부는 맞는 말이야. 물론 스터스가는 줘도 받지 않을 거지만…….”

웃음기를 없앤 빅터가 하비의 목을 잡고 그대로 벽에 밀었다.

퍽!

그가 하비를 몰아붙였다. 까슬한 벽 재질이 하비의 등을 찔렀다.

“쿨럭!”

등과 목에서 오는 아픔에 눈가를 찌푸리는 하비에게 빅터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경은 받고 싶거든. 살 수 있으면 노예처럼 돈으로 사고 싶을 정도로. 경의 말대로 의원직도, 가문도 전부 돈으로 사는데 못 살 게 뭐가 있겠어?”

현재 빅터의 재산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긁어모은 돈만 해도 시 전체 예산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부를 과시할 생각은 없었다. 돈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은 알아서 찾아오니까.

동시에 빅터는 자신이 길바닥에 돈을 뿌려도 하비는 줍지 않을 것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고하게 모른 척하며 그 망할 하얀 저택으로 돌아가겠지.

하비는 차갑게 일갈했다. 빅터가 몰아붙일수록 기개는 되살아났다.

“나를 사서 뭐에 쓰려고? 쓸 만한 노리개를 찾는 거라면 다른 놈을 찾아.”

이 높은 목을 꺾으려면, 다른 것이 필요했다. 하비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일까.

빅터는 순간 이곳으로 오기 직전 마차에서 하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럽군.’

빅터의 사용인들 이야기를 하던 때였다. 그 유대 관계를 부러워하는 듯했다. 스쳐 지나간 말이라 깊이 생각 못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다. 하비의 그 말이 다르게 치환되어 들렸다.

외로워.

알 수 없는 알싸한 감정이 가슴을 치고 지나갔지만, 빅터는 이를 무시했다.

빅터는 생각난 것을 즉시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조금의 연기가 필요했다. 강하게 나가면 더욱 세게 나오니, 부드럽게 우회를 하는 편이 나았다.

빅터가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얼굴을 대고 하비의 목을 어루만졌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며 처연해졌다.

“단순히 노리개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하비의 눈에 큰 진동이 찾아왔다. 지금껏 빅터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해일처럼 지나갔다. 놀리려고 연인 선언를 했던 것 아니었나. 혼란이 왔다.

당시 상황을 되짚어보면, 반 로투스 경과 대화하고 있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보던 빅터가 느닷없이 선언했다. 마치 질투를 하는 사람처럼.

하비는 말도 안 된다 여겼다. 태도가 그리 한순간에 뒤바뀌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은 점점 깊어졌다.

짧은 시각에 빅터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증오가 분노로, 분노가 분풀이로, 분풀이가 후회로, 그 후회가 일그러진 애정으로 발전했다는 그런 이야기인가.

아니, 애초에 빅터 베르텐이 그런 인간적인 후회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하비의 뇌리에 그 저택의 사용인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빅터가 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에게는 따뜻했다.

‘왜 지금 와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하비는 여태 가슴속에 새까맣게 구멍 난 곳을 애써 위장하고 덮어왔다. 그런데 지금 그걸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이 헤치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 돼.’

본능적으로 온 신경이 쭈뼛 섰다. 이걸 두려움이라고 하는 걸 테다.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빅터가 그의 동요를 눈치채고 더욱 밀어붙였다. 하비의 몸 여기저기를 지분대면서 예민한 곳을 스쳤다. 빅터는 움찔대는 하비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고작 노리개로 삼으려고 지금껏 경을 이렇게 괴롭혔겠냐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잘 생각해 봐.”

하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하비가 빅터의 가슴을 강하게 밀어냈다.

하비가 헐떡이며 가까스로 마지막을 선고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간다. 약속된 노예에서 다시 귀족으로 돌아갈 때였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노예들의 춤은 다 끝났을 것 같은데.”

빅터는 어떤 충동이 강렬하게 들었다. 가까웠다 생각했던 하비는 금방 또 멀어졌다.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빅터는 손을 내밀어 하비의 가면을 천천히 벗겼다. 하비도 거부하지 않았다. 약속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거부하지도 않는 것임을 빅터는 또 너무 잘 알았다. 하얀 뺨과 강건해 보이는 턱이 절반 보였다.

“그거 알아?”

살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을 온통 하비 스터스에 대한 생각에 할애하며 살았다. 빅터는 충분히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든 아니든, 너를 가장 잘 알고 인정하는 건 나일걸.”

하비도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 어떤 형태였든, 빅터와 부대끼는 동안 그가 어느새 보이고 싶지 않았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는 것을.

‘듣기 싫어.’

빈틈을 교활하게 파고드는 빅터에게 거부감이 생기는 동시에, 하비는 그곳이 채워졌으면 하는 아이러니도 느꼈다.

빅터가 집요하게 하비의 곁을 머물며 정말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듯이 다정하게 말했다.

“가장 잘 이해할 사람도 나야.”

아주 드물지만,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사람만이 온전히 날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

빅터가 그 착각에 쐐기를 박았다.

“정말 단 한 번도 등에 얹힌 짐을 모른 척하고 싶던 적이 없나? 다 없던 일로 해버리고 싶지 않아? 혼자서 힘들지 않냐고.”

두려움에 하비의 턱 끝이 떨리고 있었다. 빅터는 맹수를 달래듯 반쯤 드러난 하비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한 번이야. 한 번만 내려놓으면 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장담하지. 그 케케묵은 옛일들, 전부 없던 일로 덮어주겠어. 앞으로 그 일로 경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 약속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주지.”

빅터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혼자 잘 견디고 버텼다는 것도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밤색 눈이 끊임없이 일렁였다. 하비는 이 감정이 진짜일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외로웠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큰 적이라 생각했던 자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그의 빈 곳을 알고 있다. 이건 위험했다.

하비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굴곡 쳤다.

‘넘어가지 마.’

빅터는 하비의 가면을 서서히, 급하지 않게 벗겨냈다. 거의 끝이 보였다.

“한 번만 스터스가를, 라힌 스터스를 부정해.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협박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이야. 편지도 그렇고, 더러운 짓은 전부 네 아버지가 한 거니까. 솔직히 억울하잖아? 안 그래?”

아마 땅속에 묻힌 라힌 스터스가 지금 살아난다면 빅터의 말대로 하라고 강요했을 것이다. 하비 스스로 그 일과 연루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현 스터스가의 가주는 결점 없이 깨끗하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공표해 주기를. 그러려고 편지까지 조작한 것 아닌가.

그러니 용서해 줄 것이다.

하비의 눈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갈라졌다.

그 순간, 가면이 완전히 벗겨졌다.

툭.

노예를 상징하는 까만 쥐 가면이 빅터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덤덤할 거라 생각했던 빅터가 놀랄 정도로, 열기로 가득 찼다.

반듯한 밤색 눈과 눈썹, 그 사이로 흐르듯 내린 높은 코,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이 차례차례 보였다.

그의 혼란스러운 눈빛과 마주친 순간, 빅터는 그를 교란하던 것도 잊었다. 강렬한 충동만 남았다. 그러려던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 다문 입술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치겠군.’

빅터는 하비의 목덜미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가면이 사라진 하비의 얼굴에 순조롭게 빅터의 입술이 닿았다. 격정적이고 황홀했다. 왜 진작 이 입술을 맛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너무 달았다.

당황한 하비가 입술을 파고드는 혀에 얼결에 침입을 허락했다. 그 뒤로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밀어낼 것처럼 막연하게 허공에 떠 있던 하비의 손이 빅터의 허리로 머뭇머뭇 감겼다. 빅터의 상의 주름이 하비의 큰 손에 가득 잡히고, 그는 입술을 벌리고 파고드는 뜨거운 것을 받아들였다. 혀가 길게 뒤엉키고 야릇한 소리를 냈다.

“하아…….”

혀가 섞이는 가운데 나오는 하비의 신음에 빅터는 머리끝에 전율이 일었다.

춤을 그리 춰도 고르던 숨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서로의 알파 페로몬이 이 더위를 가라앉히는 시원한 안개처럼 느껴졌다.

음악이 더욱 강렬해지고, 선율이 빨라졌다.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빅터는 하비를 벽에 밀어붙이고 단단한 어깨에서 근육이 잡힌 가슴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하비가 입술 사이로 또다시 짧은 신음을 냈다. 민감한 유륜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흥분한 빅터가 저도 모르게 하비의 아래에 손을 댔다. 반쯤 서 있었다. 빅터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하비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들짝 놀란 하비가 빅터에게서 제 몸을 떼어냈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한순간의 감정에 휩싸여서 빅터 베르텐과 키스했다. 하비는 자신이 그것에 동조한 것이 충격적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적이 흘렀다. 절정으로 치닫던 음악도 끝이 났다.

“…….”

“…….”

뜨거운 공기만 내부를 잔열처럼 떠돌아다녔다. 직전의 뜻 모를 흥분이 새로이 시작된 음악 속에 섞여 사라졌다.

하비의 뜨거운 머리가 천천히 식었다. 하비는 자신이 무모한 성격임을 잘 알았다. 지나칠 정도로 몸을 던지고 뛰어든다는 것도.

“경의 말이 옳아. 나는 계속 무모하게 행동했지.”

하비는 부르튼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고, 허리를 숙여 떨어진 까만 쥐 가면을 주웠다.

“근데, 베르텐 경은…….”

몇 번 마른기침을 뱉은 후에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키고 싶은 게 없나?”

“뭐?”

빅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았던 감정들이 하비의 단호함에 뒤로 밀려나고, 평소와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내가 속한 곳을, 나고 자란 곳을 지키고 싶은 게 뭐가 이상하지?”

하비가 손에 들린 가면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담백한 대답이 이어졌다.

“나와 연이 있었던 사람을 지키는 게 뭐가 잘못되었고?”

빅터는 할 말을 잃고 하비의 진지한 생각을 듣고만 있었다.

“그 저택 사람들. 경은 그 사람들을 지키고 싶을 거 아닌가. 나도 마찬가지야.”

“…….”

“스터스가의 한 일원으로서가 아닌, 그 사람을 알았던 한 사람으로서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

방금 전까지의 열정은 모두 사라진 정갈한 얼굴에 빅터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혀가 미끈한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더불어 하비의 말속에는 진심이라는 알맹이마저 단단히 박혀 있었다.

하비는 지금껏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왔을 것이다. 빅터는 차가운 얼굴로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까지도.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까만 사냥개 가면을 쓴 빅터의 쌍둥이 사용인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축 늘어진 금발의 한 남자를 데리고서.

‘젤가?!’

하비가 깜짝 놀라 젤가를 살폈다. 죽은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역시 나가기도 전에 잡혔다.

쌍둥이 중 알파 쪽이 보고했다.

“죄송합니다만, 이 녀석이 깨어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빅터는 그제야 두 사람의 옷이 바뀐 것을 알았다. 젤가는 하비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꿔치기해서 탈출시키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눈이 어두워졌다.

“으음…….”

그때, 젤가가 몸을 뒤척이다 품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다.

딸깍!

황금빛을 띤 브로치였다. 빅터가 그 물건을 수상하게 보더니 명했다.

“그게 뭐지? 이쪽으로 가지고 와.”

하비가 초조한 눈으로 빅터가 주운 브로치를 보았다. 왜 하필 지금, 저 물건이 여기서 나타난단 말인가.

“이런 걸 품에 지니고 다녔단 말이지.”

빅터가 수상한 눈길로 브로치를 집어 허공에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특별한 것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길 가다가 간혹 볼 수 있는, 손이 많이 간 장식품 정도?

신음을 내며 깨어나고 있는 젤가를 향해 빅터가 무의식중으로 브로치를 비춰보았다. 젤가가 눈을 떴고, 그 눈을 본 순간 빅터는 깨달았다.

‘하아?’

금색 브로치는 큰 녹색 보석을 안고 있었다. 젤가와 똑같았다.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에 녹색 눈을 한 미청년. 빅터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브로치와 젤가를 계속해서 비교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젤가와 브로치의 상관관계가 어떤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도 필사적이었군.’

노예를 대신해서 몸을 바치다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야 가능했다.

빅터는 브로치를 망가뜨릴 것처럼 꽉 쥐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침묵하고 있는 하비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스터스 경. 이게 이유였나?”

이런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저 청년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니.

분노를 넘어, 음습한 검은 안개가 빅터의 심장을 거세게 조였다. 그것은 배신감에 가까웠다. 온몸을 태울 만큼 강렬한 감정이었다.

빅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복잡한 얼굴로 젤가만을 보고 있는 하비가, 죽을 만큼 증오스러웠다.

“저 노예를 특별히 감싸고자 했던 게?”

하비는 알아야 했다. 그를 옥죄고 있는 줄이 단순한 끈이 아니라, 맹독을 지닌 독사라는 것을. 그걸 알려줄 시간이 되었다.

빅터의 녹색 눈이 어둡게 점멸했다.

젤가가 완전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방 안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숨 막히는 긴장과 침묵, 새로 시작한 노래가 흐를 뿐이었다.

침묵을 깨고 빅터가 중얼거렸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느릿하기까지 한 낮은 목소리에 하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빅터가 손에 움켜쥔 황금빛 브로치를 만지작대며 젤가와 하비를 번갈아 보았다.

가면을 쓴 쌍둥이는 서로의 눈을 보며 난감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빅터가 저런 목소리와 저런 태도로 누군가를 볼 때면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를 냈다. 하나가 죽어 나가거나, 반신불수가 되었다. 게다가 빅터가 현재 내뿜는 페로몬이 너무 압도적이라 형질을 가진 자들은 표정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결국 빅터의 사용인 중 알파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그나마 멀쩡한 얼굴로 서 있는 베타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좀 말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알파 쪽 쌍둥이는 힘겨워하며 베타 쪽을 떠밀었다. 그러나 페로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페로몬은 못 느껴도 살기는 느낀다고…….’

하비도 가면으로 입과 코 사이를 막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하고 폭력적인 페로몬 방출이었다.

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깬 것은 젤가의 목소리였다. 아직 정신이 완전히 깨지 않았는지 말 사이에 띄엄띄엄 간격이 있었다.

“스터스 경이…… 왜…… 여기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젤가가 두리번거리다 하비를 발견하고는 하얗게 질렸다.

“으윽!”

그러나 곧 젤가는 구토하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오메가였다. 우성 알파인 빅터가 작정하고 누군가를 누르려 내보내는 페로몬은 자극적인 것을 넘어서 지나친 독이었다. 젤가가 놀란 눈으로 페로몬의 중심에 서 있는 빅터를 보았다.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건?’

그것은 젤가의 몸 구석구석 파고들어 할퀴었다. 기분 좋은 페로몬이 아니라, 온몸을 찢을 것처럼 날카롭고 칼끝처럼 예리했다. 슬루인 제국에서 잡혔을 때 지독한 고문을 받았던 터라 젤가의 육체는 지나치게 야위었다. 이런 것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결국 방 안 모든 사람의 눈길이 하비에게 쏠렸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어 보였다. 모두의 눈길을 받은 하비가 움찔하더니 빅터를 보았다.

빅터는 살벌한 얼굴로 브로치를 손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망설이던 하비가 다가가 그의 팔목을 세게 잡았다.

“베르텐 경.”

빅터의 시선이 닿은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거렸다. 하비가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만 좀 하지. 다들 힘들어하고 있지 않나.”

빅터가 눈만 내려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하비의 손을 한 번 보고, 눈을 올려 하비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그제야 폭군 같던 페로몬이 잠잠해졌다.

“아아. 생각 좀 하느라.”

생각 두 번 하면 사람 잡겠다는 소리도 차마 못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은 커튼 뒤에서도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악단 중에도 알파나 오메가가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하비는 빅터가 터질 것처럼 쥔 브로치를 난감한 얼굴로 보았다. 시장을 걷다가 무심결에 산 것이고, 사실 왜 샀는지도 아직 모를 일이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구매였다. 빅터가 저걸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비는 이유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방 안의 사람들이 한숨 돌리고 있을 때, 하비가 애써 갈무리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건 그저 내 물건이야. 저 노예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빅터가 이제껏 보여준 하비의 행동을 떠올리며 냉랭하게 웃었다. 브로치를 들고 하비의 눈앞에 흔들며 빅터가 말했다.

“그건 봐야 알겠지. 이제 하나하나 밝혀보자고. 저 노예 놈과 대체 어떻게 안 사이인지, 무슨 관계인지.”

눈이 휘둥그레진 젤가가 빅터와 하비를 번갈아 보며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하비를 보고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챈 젤가가 넙죽 엎드려서 간청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으며 외쳤다. 생명의 은인이 자신과 연루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끌려오다가 우연히 스터스 경과 잠깐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감히 주제도 모르고 풀어달라 청했습니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테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스터스 경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젤가의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데웠다. 빅터가 차갑게 웃었다.

“병자 같은 몰골에 비해서 기운이 차고 넘치는데……. 상황 판단은 전혀 안 되는군.”

빅터는 엎드려서 흠칫 떠는 젤가를 벌레 보듯 보았다. 이어 그의 냉정한 시선이 가면을 손에 들고 서 있는 하비를 핥듯이 훑었다.

하비는 그사이 또 무언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속내를 읽히지 않으려는 전략적인 포커페이스일 것이다. 얼어붙은 얼굴에서 도무지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왠지 열 받는데.’

하비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간신히 젤가에게로 돌아왔을 때 빅터의 음성은 전보다 더 낮고 음산하게 변해 있었다.

“그 자리로 돌아가 봐야 이미 다 끝나 있을 건데, 뭘 어쩌려는 거지? 널 사느라 쓴 돈이 얼마인 줄은 알아?”

젤가는 그저 엎드린 채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빅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등 위로 채찍처럼 떨어졌다. 온몸이 따가울 정도로 아픈 살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빅터가 구석에 세워둔 장검을 가지고 왔다. 길게 뽑아 든 장검이 젤가의 목에 드리워졌다. 빅터는 바로 내려칠 것처럼 장검을 허공으로 높이 들었다. 일부러 하비가 끼어들 틈을 준 것이다.

빅터의 예상대로 참다못한 하비가 결국 둘 사이로 뛰쳐들었다.

양팔을 벌리고 젤가를 지키듯이 서서 빅터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자비를 베풀게.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경의 말대로 이깟 노예가 뭐라고, 그리 피를 보고 방을 더럽힌단 말인가.”

빅터는 고요하게 하비를 마주 보더니 장검을 다시 검집으로 밀어 넣었다. 거칠고 난폭한 동작이었다. 그가 장검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하비와 젤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빅터는 먹잇감을 몰듯이 빠르게 자신의 이론을 펼쳐 덫을 놓았다.

“옷까지 바꿔 입을 정도로 탈출에 정성을 쏟는 것도 이상하고. 꼭 내보내고 나서 다시 만나려고 한 것같이.”

확실히 하비 스터스의 평소 성정을 빼고 평범한 상황에서 비추어 보면, 이상했다. 귀족이 노예를 감싸들며 이렇게까지 몸을 아끼지 않는 건 이례적인 일이니까.

젤가 역시 녹색 눈에 의문을 담고 있었다. 빅터가 왜 이토록 하비에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누가 봐도 알파와 알파끼리의 관계였다. 그런데 빅터의 언행은 하비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예민하게 따지고 있었다.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젤가의 의문을 눈치챈 빅터가 피식 웃으며 말해주었다.

“본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노예라 그런지 잘 모르나 본데.”

빅터가 그의 앞에 섰다. 긴 그림자가 젤가의 야윈 몸 위로 드리워졌다.

“스터스 경과 나는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다.”

젤가는 엎드린 채 놀라 눈을 크게 떴고, 하비는 즉각 반발하려다 빅터의 쏘는 듯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말을 보태면 바로 젤가를 죽일 것 같아서였다.

빅터는 꼼짝도 않는 젤가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경과 과거에 어떤 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특별히 스터스 경을 초대한 자리야. 감히 분위기를 망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귀족의 여흥을 망친 노예는 팔다리를 잘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를 알고 있는 하비도 분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젤가를 산 건 빅터였고, 하비는 더 이상 끼어들 자격이 없었다. 여태껏 한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관여했다.

빅터는 덜덜 떨고 있는 젤가를 내려다보며 하나 제안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목을 치고 싶지만, 그리하면 스터스 경이 슬퍼할 것 같아서 기회를 주겠어.”

“무, 무슨 기회를……?”

“정확한 신분을 이 자리에서 밝혀.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젤가가 하비의 눈치를 살폈다. 첩자라는 것은 죽음 이상으로 중요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본국이라도 함부로 외교관의 첩자라는 것을 밝힐 수 없었다. 타국으로 보낸 첩자라는 존재 자체가 자칫 국제 문제로 결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젤가는 이미 슬루인 제국의 왕족과도 깊숙이 연관되었다가 겨우 사선을 넘어온 상태였다.

하비도 도와줄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입술만 짓씹었다.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젤가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땅에 머리를 연신 박았다.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스터스 경은 저와 아무런 연관이 없……!”

더 말하지 못하고 젤가는 컥, 숨을 들이켰다. 빅터가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목이 뒤로 꺾이는 고통에 젤가가 몸부림치는 동안 빅터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아무런 연관이 없다? 잘도 짖어대는군. 두 사람이 짠 듯이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는데, 연관도 없는 자를 구하려고 귀족이 노예 소굴로 뛰어드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여태까지 정황을 보면 누가 봐도 이건…….”

빅터의 눈이 어둡게, 그리고 반쯤은 광기를 담고 번뜩였다.

“설마, 날 두고 배신이라도 한 건가?”

동시에 쌍둥이 사용인에게서 작은 헛숨이 튀어나왔고, 하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빅터는 흡사 상처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놀라운 연기를 펼쳤다.

“이것 참, 내 사람이 노예에게 마음을 줬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이건 베르텐가의 명예까지 더럽히는 일이다. 네까짓 게 귀족의 이름까지 먹칠하는 셈이지. 난 믿었던 연인이 배신한 증거를 이제야 본 거고.”

하비는 기가 막힌 얼굴로 빅터를 쏘아보았다. 저 사람이 언제부터 제 가문과 그 명예까지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뭐? 믿었던 연인이 배신을 해?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저런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과연 상술에 능한 시정잡배였다.

하지만 이건 하비의 순진한 생각이었고, 쌍둥이 사용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동 걸리셨네.’

‘이번엔 얼마나 걸리려나.’

이건 빅터가 무언가를 집요하게 알아내려 할 때의 버릇으로, 맹수가 먹이를 바로 먹지 않고 한참 놀잇감으로 굴리다가 먹는 것과 비슷했다. 이럴 때의 빅터는 심리를 뒤흔들기 위한 거짓도 서슴지 않고 했다. 오래 시간을 두고 거짓과 진실을 섞어가며 사람을 완전히 바닥까지 몰아붙였다.

빅터가 브로치를 들어 올려 샅샅이 살피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것까지 주고받는 사이인 걸 알았는데, 내가 어찌해야 할까?”

젤가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시 외쳤다.

“그건 정말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오해십니다! 절대 스터스 경과 그런 걸 나눈 적 없습니다!”

하지만 빅터는 믿지 않는다며 젤가의 말을 단박에 부정했다.

“이미 정을 나누던 사이인 것도 속였는데, 이런 걸 못 속일까.”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하비가 다시 나섰다.

“거짓이 아니야. 저건 내 물건이고, 젤가의 것도 아닐세.”

몰아붙인 끝에 드디어 하비의 입에서 정식으로 노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하비는 정신이 없어서 자신이 젤가의 이름을 말한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번에 알아들은 빅터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름도 친근하게 부르는군. 저 노예 놈 이름이 ‘젤가’인가. 오래 알았던 사이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이제 와서 뭘 숨기는 거지?”

실수인 걸 알아차렸지만 이미 빅터의 수에 넘어가 버렸다. 하비는 낭패라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젤가와 자신이 알고 있는 관계라는 게 훤한 상황에서, 하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굳어버렸다.

반면 빅터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

심문은 끝났다. 저 노예의 정체가 드디어 가늠되었다. 빅터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하비 스터스와 저 의문스러운 남자, 젤가라는 자는 분명 과거에 연이 있었다. 하비가 몸을 던질 정도로 아끼던 자임도 분명했다. 그런데 관계를 밝히지 않는다면, 하나밖에 없었다.

‘이름이 ‘젤가’라면, 역시 저건 스터스 경이 키웠다던 그 첩자인가. 슬루인 제국에서 왔다면 확실하겠어. 사형을 앞두고 노예상한테 거래되었겠고.’

외교관들이 첩자를 키워 타국으로 보내는 건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빅터 또한 알고 있었다. 최근에 입수한 정보 중 총괄 외교관이 하비의 집에 찾아가 첩자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는 것이 있었다. 그때 화제에 오른 첩자가 저자이리라.

당시 대화는 문밖에 서 있던 나스타가 솜씨 좋게 엿듣고 빅터에게 알려주었다. 그 외에도 빅터에게 이런 정보들을 흘려줄 곳은 로투스가를 포함해 많았다.

결론은, 빅터는 중간에 다 알아챘으면서 일부러 하비를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궁지에 몰린 하비의 반응을 보면서 다른 진위를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금빛 브로치만은 예외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진짜 하비의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빅터에겐 작은 깨달음이었다.

그에게 보고된 것은 객관적인 하비와 젤가의 관계일 뿐이지, 저 둘의 감정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돌연 나타난 저 물건이 빅터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하비에게 마음을 준 상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미칠 듯한 반발심이 일었다. 찬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마저 들었다.

왜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하비 스터스에게도 마음을 나눈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왜 당연히 하비를 취하려는 자가 자신밖에 없으리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는지.

“경은 왜 매번 기회를 줘도 제 발로 차버리는 건지.”

아끼는 첩자인 것까지는 알겠는데, 이토록 열성인 건 확실히 좀 의심스러웠다. 하비의 헌신이 도를 지나친 것 같아 속이 뒤집힐 정도로 거슬렸다.

빅터가 이를 가는 소리가 음산하게 번졌다.

“정말 알 수가 없어. 나에게 괴롭힘당하는 게 그리도 좋았나? 이쯤 되니 그런 생각밖에 안 드는데.”

말을 마친 빅터가 손에서 뜨겁게 데워진 브로치를 쌍둥이 쪽으로 던졌다.

얼결에 브로치를 잡은 쌍둥이 중 베타는 빅터가 제 손목을 만지고 있는 것을 불안하게 보았다. 그는 하비가 저 물건을 살 때 몰래 미행하며 감시하던 중이었고, 그래서 알고 있었다. 하비가 무심코 산 물건이라는 것을.

빅터의 말대로 저 금발에 녹색 눈을 한 어린 청년을 염두에 두고 산 브로치라면, 조금 이상했다. 보석 색깔을 눈동자라고 치면 저 젤가라는 청년보다는 오히려…….

‘이거, 주인님을 더 닮은 거 아닌가?’

보석은 진한 녹색이었고, 젤가의 눈은 푸른빛에 더 가까운 연한 녹빛이었다. 외려 빅터의 눈동자 색이야말로 브로치에 박힌 큰 녹색 보석과 매우 흡사했다.

베타 쌍둥이가 의아해할 무렵, 빅터는 비싼 튤립이 잔뜩 꽂힌 하얀 화병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회담 때 화제가 되었던 꽃이 바로 튤립이었다. 귀한 꽃을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돈을 바른 곳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셈페르 아우구스투스까지 있었다.

“아, 마침 좋은 게 있군.”

눈짓으로 튤립이 꽂힌 화병을 가리키며 빅터가 짐짓 너그러운 척 입을 열었다.

하비는 불안함에 찌푸리고는 빅터가 주시하고 있는 화병을 보았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저 꽃들로 무얼 하려고?

“마지막 기회를 주지.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거리낄 게 뭐 있겠나? 어떤 관계인지 밝혀.”

하비와 젤가가 말 못 할 것을 뻔히 알면서, 빅터는 잔인하게 말했다. 제 속에 들어찬 것이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스스로 지어낸 배신감인지 알지 못한 채, 그는 응어리를 토해냈다.

“아니면 나를 농락하고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테니.”

침묵을 가르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하비는 혼돈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도무지 의중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긴장한 하비의 목울대가 길게 일렁였다. 차라리 빅터가 전처럼 자신과 부친을 원망하며 연좌제 형식으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쪽이 더 나았다. 그건 명확한 이유라도 있었으니까.

‘이것도 경이 하고 있는 복수의 일종인가?’

묻고 싶었지만, 젤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빅터는 젤가에게 연인과의 시간을 망쳤기 때문에 벌을 주겠다고 했고, 더욱이 과거 관계를 밝히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밝힌 상태였다.

빅터가 깔아둔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장단에 맞춰줘야, 젤가가 죽지 않는다. 그래서 하비는 의문을 삼켰다.

‘정말 원하는 게 뭐지? 가문도 아니라면, 내게 남은 게 뭐가 있다고.’

복수란 것도 어차피 관계의 일부였다. 하비가 그나마 순순했던 것은 빅터의 응분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하비는 어릴 때부터 빅터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빅터는 그걸 교묘하게 이용했다. 하비도 알면서 당해주었고, 그걸로 자신의 죄책감을 일부 깎았다.

이를테면, 상부상조인 셈이었다. 암묵적인 동의하에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져 왔다. 그런데 지금,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하비는 빅터의 의중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날 원하는 건가?’

빅터는 그에게서 합의되지 않은 다른 것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그건 부당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 반드시 있었고, 그 매개체가 ‘복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빅터가 연인이라는 새로운 관계, 즉 ‘애정’이라는 길을 동의 없이 새로 깔아버렸다.

이건 하비가 허락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암묵적인 합의를 벗어나는 것이며, 하비는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분명 그럴 수 있었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고 있던 빅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며. 뭘 망설여.”

하비가 식은땀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목뒤로도 긴장이 흘러 뻣뻣했다.

‘그런데 왜 못 하고 있는 거지.’

하비는 키스에 응하며 빅터의 허리에 저절로 손을 올렸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한 건지 깨닫자 아찔해졌다.

손가락을 통해 전해진 빅터의 단단한 몸과 코끝을 스치던 체향, 널 이해한다 말하는 그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함락당했다. 우성 알파 특유의 압도적인 페로몬조차 거부감이 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넉넉히 감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빅터의 페로몬은 견고한 벽이 되어 안전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 순간이, 너무도 생생했다.

하비는 빠르게 상념을 거두었다. 마치 그가 등대의 불빛인 듯,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이 방법밖에 없는 건가.’

우선은 외교관으로서의 소명과 관계자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빅터와의 관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새로운 관계인 ‘연인’이라는 항로에 완전히 발을 들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하비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경을, 믿어도 되나?”

허탈한 목소리였다. 반쯤 의심하면서도 하비는 빅터가 새로 개척한 항로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돌연 예정되지 않은 파도가 몰아쳐 침몰해도 할 말이 없었다. 오로지 하비의 선택이었으니까.

이에 대한 빅터의 답은 빨랐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어둡게 빛내며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말했잖아. 나 아니면 스터스 경을 이해할 자가 세상에 없을 거라고.”

빅터가 하비의 손에 들린 가면을 빼앗더니 찬찬히 말했다. 하비가 무슨 생각인지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손에 넣고 조금씩 자신을 믿도록 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빅터는 좀 더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다른 자에게 뺏기지만 않으면 된다.

“자, 그럼 다시 묻지. 우리의 명예가 달린 문제니까 신중해야 해.”

같은 질문이 새롭게 돌아왔다. 빅터의 안광이 녹빛으로 번들거렸다.

“저 노예와 무슨 관계였지?”

하비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빅터가 고의로 깔아둔 오해대로 밀고 가는 게 낫다. 젤가를 필사적으로 빼내려고 한 데 이유가 필요했으니, 첩자 아닌 다른 정당성이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과거에 젤가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거짓이 가장 타당하긴 하지.’

공교롭게도 하비는 거짓말에 서툰 편이었다. 그가 차마 젤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빅터만을 뚫어지게 보았다.

“미안하게 됐어.”

말하는 내내 하비의 손이 꿈지럭댔다. 늘 잔잔하던 밤색 눈은 연신 떨리고, 목소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젤가는 예전에 나와 사적으로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지.”

뻣뻣해진 태도로 하비는 겨우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노예로 팔리는 걸 막으려고 한 거고.”

진실 여부를 꿰뚫는 데 능하지 않더라도 이건 누가 봐도 거짓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빅터는 속으로 웃었다.

‘너무 잘 보여서 투명한 물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이군.’

오히려 하비가 눈에 다 보이는 연기를 함으로써 젤가와 감정적인 관계가 아닌, 단순히 업무상으로 엮인 관계임이 명확해졌다.

‘그랬단 말이지.’

빅터의 가라앉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환해졌다. 하비가 저 노예와 마음을 나눴는지 아닌지 여부로 그의 기분은 시궁창과 천국을 오갔다.

빅터의 온 신경은 하비 스터스에게 쏠려 있었다. 하비가 자신과의 관계를 인정했고, 더군다나 저 노예와 감정적인 교류가 깊었던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다시 좋아진 기분으로 빅터가 능청맞게 되물었다.

“최근까지도?”

“유감이지만, 그렇다.”

간단한 거짓 대답만으로도 하비의 얼굴에 작은 금이 갔다. 빅터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역시, 그런 거였나. 알겠어.”

빅터가 원하는 큰 그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손에 든 하비의 쥐 가면을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렸다.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 간의 관계에서는 가벼운 연애조차 서로의 명예를 저버리는 큰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하비는 노예와 정을 나누었다는 빅터의 말을 일부 인정했다. 현재 연인인 베르텐가의 차기 가주를 모욕한 셈이었다.

베르텐가의 차기 가주는 배신의 대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명예를 훼손한 대가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것처럼 빅터가 회전하던 손목을 멈추었다. 돌리던 가면을 멀리 던지면서 그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경과의 관계를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으니, 적절한 대가를 마지막으로 이번 건은 이만 넘어가도록 하지. 두 가문 모두의 명예를 생각해 이번 일은 발설하지 않겠어.”

하비의 잔잔한 밤색 눈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대신, 이 장소에서는 내가 시키는 걸 다 소화해야 할 거야. 끝나면 모두 없던 일로 해주지.”

빅터는 저 일그러진 표정을, 다른 곳, 다른 상황에서 좀 더 보고 싶었다.

‘물론 혼자만.’

그가 빙글 몸을 돌리더니 문 근처에 서 있는 쌍둥이 사용인을 향해 명령했다.

“모두 나가.”

걱정되는 얼굴로 하비를 흘끗대던 그들은 한숨지으며 명대로 했다. 슬슬 저 단단하지만 위태로워 보이는 하비 스터스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집사 레나의 끊임없는 설파가 먹힌 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내보낸 빅터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젤가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넌 여기 남아.”

“예? 제가요?”

젤가가 어린 새처럼 떨며 하비를 보았다. 무심결에 하비에게 향하는 시선을, 빅터가 어깨를 움직여 차단했다.

“당연하지. 넌 대가를 치러야 해.”

그가 가소롭다는 듯 선이 가느다랗고 비쩍 마른 젤가를 내려다보았다. 빅터의 우성 알파 페로몬이 다시 스멀스멀 새어 나와 젤가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스터스 경과 약속한 게 있으니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건 걱정 말고.”

빅터가 말없이 서 있는 하비의 팔을 잡곤 성큼성큼 붉은 휘장으로 가려진 침대로 데려갔다. 곧이곧대로 하지 않겠다는 듯 하비의 팔에 힘이 실리긴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힘이 빠졌다.

하비는 젤가와의 관계를 거짓으로 인정한 뒤부터 빅터가 조금 어색해졌다. 마치 정말로 그를 기만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경은 이쪽으로.”

침대에 풀썩 앉은 빅터가 강제로 하비를 제 옆자리에 앉혔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그가 멀뚱멀뚱 보고 있는 젤가에게 턱짓했다. 귀한 꽃이 잔뜩 꽂힌 하얀 화병을 가리키고 있었다.

“넌 저 화병을 들고 와.”

서둘러 화병을 잡고 오는 젤가에게 빅터가 날카로이 덧붙였다.

“혹시라도 깨면 꽃 하나당 손가락 하나를 잘라줄 테니 조심히 다뤄.”

놀란 젤가가 걸음 하나에도 힘을 실어 조심하며 가지고 왔다. 그가 무릎을 꿇고 양팔을 길게 뻗어 가져온 화병을 빅터에게 바쳤다.

빅터는 일부러 바로 받지 않았다. 젤가의 뚝 부러질 것 같은 얇은 팔목에서 화병이 위태롭게 떨리는 것을 보기만 했다.

지켜보던 하비가 보다못해 화병을 대신 받아주었다. 빅터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짙은 금빛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또 무슨 짓을 하기 전에 하비는 침착하게 물었다.

“이걸로 대체 뭘 하려고?”

하얀 화병의 차가운 기운이 하비의 드러난 팔에 닿았다. 빅터가 이를 가만히 보더니, 하비의 품 안에 든 화병으로 손을 뻗었다.

빅터의 손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하비가 어깨를 흠칫거렸지만, 빅터는 개의치 않고 화병에서 노란색 튤립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줄기를 잡고 비비면서 노란 꽃망울에서 나오는 향을 맡았다.

“이 꽃들 전부, 뒤에 꽂은 상태로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와. 아, 물론 기어서.”

하비는 숨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젤가가 하비 대신 크게 소리 냈다.

“예?!”

하얀 화병 위로 솟은 꽃 때문에 하비의 얼굴이 가려졌지만 빅터는 알 수 있었다. 몹시 황당해하고 있다는 것을.

하비는 별것 아닐 거라 생각하고 빅터의 말에 따라주었겠지만, 빅터는 늘 상상 이상의 것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하비를 생각하며 빅터가 노란 꽃을 얼굴에서 치우고 즐거운 듯 말했다.

“떨어뜨리면 이 노예의 신체 일부가 하나씩 사라진다 생각해. 어차피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니까 잘할 수 있겠지?”

개처럼 기게 한 적도 있었는데, 이깟 것이 대수냐는 빅터의 말이 뒤따랐다. 하비는 수치심에 저 입술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속삭이며 따라붙는 붉은 입술이 예민한 귀를 스치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빅터에게서 나오는 음험한 페로몬이 하비의 귀와 목덜미를 선뜩하게 눌렀다.

“이것만 지나가면 다 끝날 상황이야. 협조하는 건 경의 마음이고. 난 분명 약속했어. 이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참아주면 모두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매혹적인 저음이 다시 멀어졌다. 귓가를 달구던 뜨거운 숨도 사라지자 하비는 조금 제정신이 들었다. 볼록하고 하얀 하비의 귓등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숨 막히게 조여오는 빅터의 페로몬과 시시각각 바뀌는 그의 태도, 현란한 말들에 하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중심을 잡기에 빅터는 너무나도 굴곡 심한 파도 같았다.

빅터가 그런 하비를 눈에 담더니 젤가에게 명했다.

“구멍에 꽃을 꽂는 건 특별히 저 노예 놈에게 시켜주지. 애틋한 사이였다면서.”

젤가가 경악해서 고개를 번쩍 들고 빅터에게 소리를 높였다.

“제가 어떻게 감히 스터스 경께……! 그런 짓을 할 순 없습니다!”

빅터는 말없이 잘 깎인 꽃줄기 단면을 제 손가락으로 눌렀다. 사용인들이 관리를 잘해 대부분 꽃줄기는 뭉툭하지만, 그가 쥔 것은 날카로운 편이었다. 꾹꾹 들어가는 날 선 단면이 그의 단단한 피부를 찢을 것처럼 짓눌렀다. 피가 맺혔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아, 그래? 그럼 이 자리에서 몸에 난 모든 것을 하나씩 뽑힌 뒤 굶주린 쥐 떼에 던져지는 걸로 할까?”

손톱, 발톱 예외 없이 하나씩 잡아 뜯어 신경을 자글자글 갉아먹는 고문을 줄줄이 읊자 젤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수록 빅터의 손에서 흐르는 핏줄기도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뭔가를 망가뜨리면서 흥분할수록 그의 속에서 흉측한 감상도 함께 솟았다.

‘피 냄새…….’

언제나 그랬다. 피 냄새만 나면 빅터는 어디선가 짙은 유황 냄새도 함께 나는 것 같았다. 썩은 달걀에서 나는 것 같은, 그 어둡고 눅눅한 냄새. 점점 지옥이 선명해졌다. 정신을 혼탁하게 하는 기이하고 속살대는 목소리들도 들려왔다.

그럴수록 빅터는 그곳에서 난 사람처럼 굴었다. 좀 더 악랄하게, 좀 더 잔인하게. 그래야 그 속에서 무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만해.”

보고 있던 하비가 의아함을 갖고 빅터의 손을 잡았다. 지나치게 찔러 피가 흐르는 노란 튤립도 치우고 빅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역겨운 유황 냄새도, 어디선가 속삭이는 것 같던 이상한 소리들도, 밤색의 고요한 시선 속에서 한꺼번에 사라졌다. 마법 같았다.

빅터는 뜬 눈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이 한 번에 사라지는 기현상을 목격했다. 남은 것은 또렷하고 나지막한 하비의 목소리뿐이었다.

젤가를 위협하는 걸 그만두라는 건지, 자해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빅터는 즉시 멈추었다. 피가 더 흐르지는 않았다.

그걸 보며 하비가 힘주어 말했다.

“내가 한다고 했잖아.”

노란 튤립 끝에 맺힌 붉은 핏방울을 눈에 담은 하비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푸른 카펫을 적시고 있는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하비는 핏줄 선 빅터의 짙은 녹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젤가의 낡은 노예복을 벗으며 하비는 반쯤 걸린 옷 사이로 머리를 빼내었다. 단련된 어깨 근육이 불룩대며 나머지 옷도 맨살에서 튕겨냈다. 잔뜩 흐트러진 밤색 머리 아래 하비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선이 빅터에게 닿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하고 압도적인 위치에 있는 자면서, 빅터가 제일 불안정해 보였다. 하비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빅터와 엮인 이후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자신조차 그 선 없는 변덕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자해를 할 정도로 배신감을 느낀 거였나.’

하비는 빅터의 이상 현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오해했다.

알싸한 감정이 하비의 가슴을 강하게 치댔다. 공개적인 관계로 선언한 게 어쩌면 빅터의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태까지 자신을 괴롭혀 온 것까지 설명할 순 없었지만, 어차피 증오와 애정은 한 끗 차이다. 그의 속은 아무도 모르고, 들끓는 변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내게 하는 행동들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하비는 피가 흐른 자국이 있는 빅터의 손가락을 보며 나머지 옷을 벗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도 하지 마. 경에겐 배신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할 테니까.”

탄탄한 다리를 감쌌던 너덜대는 노예복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속옷만 남은 하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빅터와 젤가를 번갈아 보았다. 젤가는 하비의 눈을 피했고, 빅터는 드러난 하비의 맨몸을 무심한 눈으로 훑어내렸다. 정교하게 갈라진 복근과 어깨부터 물 흐르듯 떨어지는 근육 붙은 팔, 허리의 정중선을 사이로 패인 등 고랑, 허벅지에서 무릎, 발목까지 이어지는 잘 단련된 모양새가 언제나 보는 하비의 것과 같았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어야 할 자가, 가장 담담한 모습으로 닫힌 입술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한 번 물고 씹는 것으로 이 고난을 감내하면서.

젤가는 떨리는 앙상한 손가락으로 형형색색의 꽃을 한가득 쥐었다.

투둑!

심지어 손에서 꽃 두어 개가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고문을 많이 받은 손은 작고 야위어서 많이 잡지도 못했다. 식은땀이 흘러 젤가의 등 뒤와 손바닥 안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정말 해야 돼?’

젤가가 난감한 듯 눈만 굴렸다. 눈길이 닿은 곳에 빅터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 않으면 정말 바로 죽일 것 같았다.

“히끅!”

딸꾹질을 한 젤가가 핼쑥한 안색으로 하비의 뒤에 섰다. 하비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성스러운 것을 만지듯 젤가는 간신히 중심부를 가린 잿빛 속옷으로 손을 뻗었다. 이를 빅터가 한 치의 놓침 없이 지켜보았다. 그의 입매가 작게 일그러졌지만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는 손가락으로 젤가는 하비의 속옷을 슬쩍 잡아당겼다. 탄력 있는 등 근육이 손끝으로도 적나라하게 전해져 왔다. 당긴 속옷 아래 볼륨 있는 엉덩이가 보였지만 젤가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속옷을 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차올랐다.

‘못 하겠어…….’

지금 그는 생명의 은인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려 하는 중이었다. 배덕감이 젤가의 속을 후벼팠다.

결국 젤가는 꽃을 쥔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 머리를 쿵쿵 찧으며 그가 흐느꼈다.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차라리 제 손가락을 잘라주십시오!”

하비는 한숨 쉬며 뒤돌아섰다. 빅터의 살기 어린 시선에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따가웠지만 무시했다.

하비가 맨몸으로 젤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작은 머리통에 손을 대고 더 이상 머리를 바닥에 찧지 못하도록 막았다.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하비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냥 해. 괜찮으니까. 그래야 네가 산다.”

나라를 위해 일한 게 전부인 사람이다.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하비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구해주려고 한 것이 잘못되어 이런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그래도 죽는 선택지만은 간신히 피했지만, 그의 마음까지 지켜주지는 못했다.

하비의 목소리에 더 자극을 받은 듯 젤가는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통곡했다.

“죽여주세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젤가는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그의 눈물이 부드럽게 깔린 푸른 카펫을 점점이 적셨다. 하비의 손길은 더욱 부드러워졌고, 그걸 보던 빅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침대 위에 앉아서 느긋하게 지켜보던 것을 관두고 빅터가 몸을 일으켰다.

“못 봐주겠군.”

빅터는 제왕처럼 군림하던 침대에서 내려와 울먹거리는 젤가의 손에서 꽃을 뺏어 들었다. 꽃을 갈취당한 젤가의 손엔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떨리고 있었다.

빅터는 젤가의 머리통을 쓸고 있는 하비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제 기능도 못 하는 약쟁이 같은 손으론 스터스 경의 귀한 몸에 흠집을 내겠어.”

사실 젤가가 하비의 속옷을 만진 순간, 빅터는 머릿속이 전부 뒤집힐 것처럼 부글부글 뜨겁게 끓었다. 당장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먼저 말한 것이 있으니 간신히 참고 있던 차였다.

빅터가 울고 있는 젤가에게 짜증스런 눈초리를 던졌다.

“아무것도 못 하는 벌레 같은 놈.”

빅터는 저 노예가 보는 앞에서 하비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감히 너 따위 것은 쳐다도 보지 못할 사람이라고. 그를 괴롭게 하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알량한 감정들이 빅터의 내면에서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들은 끓는 용암이 되어 넘치다 흘러내렸다. 모든 것을 태우고 짓밟으면서 한 지점을 향해 뻗어 나갔다.

빅터는 쥔 꽃들을 손에서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하는 수밖에.”

열망 같은 그 뜨거움이 날카로이 모여 빅터의 머릿속에서 이성을 잘게 끊어냈다. 그는 그대로 하비의 한 손을 결박하듯 뒤로 붙들고 침대에 머리를 박게 했다. 코와 입술이 강제로 침대 위 자색 이불에 비벼진 하비가 짧은 신음을 뱉었다.

“윽!”

빅터는 젤가가 부들대며 감히 만지지도 못할 것처럼 다루었던 그 잿빛 속옷을 무표정한 얼굴로 거칠게 끌어내렸다. 그러자 몇 번이고 박았던 붉은 구멍이 속살을 내비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비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탓에 아이러니하게도 구멍은 더욱 잘 벌려졌다.

금방 넣지 않고 뚫어져라 그 광경을 보기만 하자 하비 특유의 시원한 페로몬이 빅터의 코끝을 스쳤다. 그것만으로도 빅터는 흥분해서 성기를 세웠다.

빅터는 저것이 오메가였을 때 어떤 식으로 열리고, 어떻게 자신의 것을 삼켰는지 또렷하게 기억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물이 터져 줄줄 흐르고, 알파를 미치게 하는 강렬한 페로몬을 내곤 했다.

대부분의 알파는 견디지도 못할 정도로 자극적인 페로몬이지만 빅터만은 그걸 맡고도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사실조차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하비 스터스가 자신에게 맞춰진 몸인 것 같아서.

한기 때문에 미약하게 들썩이는 몸을 누르고 빅터는 손에 쥔 꽃 중에 붉은 것을 먼저 뒷구멍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울퉁불퉁한 꽃줄기가 매혹적인 페로몬이 나는 구멍으로 손쉽게 빨려 들어갔다. 꽃망울보다 붉은 속살이 움찔대면서 낯선 이물질을 받아들였다. 빅터가 끝이 뭉툭한 것으로 고르긴 했지만 줄기 자체의 느낌까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으윽…….”

아까보다 더 큰 신음이 하비의 입술에서 맺혔다가 튀어나갔다. 까슬까슬한 꽃줄기가 내벽을 긁으면서 길을 트는 감각이 묘하게 아렸다.

빅터가 튕기듯 위로 솟는 허리를 한 손으로 제압해 짓눌렀다. 빅터는 꽃줄기 끝이 상처를 낼까 봐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특별히 단면이 날카롭지 않은 것으로 고른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바로 출혈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계속 허벅지를 움찔대는 하비를 달래는 것처럼 빅터가 청동 조각 같은 굵은 목 줄기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고작 하나 들어갔어. 잘못 움직이면 다치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곧이어 두 번째 꽃줄기가 구멍을 파고 들어갔다. 이번엔 주홍빛 꽃이었다. 방금 전 꽃보다 굵기가 더했지만 매끈했다. 다만 천천히 들어가면서 이미 들어간 꽃줄기를 건드리는 것이 문제였다.

예민한 내벽에 자꾸 자극이 가자 하비가 다시 꿈틀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하비의 두꺼운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으로 온몸에 땀이 흘렀다. 꽃줄기를 품은 구멍에도 힘이 들어가 바짝 조였다. 빅터는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진정해. 아직 두 개니까.”

손에 달라붙는 눅눅한 땀을 윤활유 삼아 꽃에 바른 빅터가 세 번째 꽃을 넣었다. 점점 두꺼워지는 꽃줄기에 하비는 삼키고 있던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크읏……!”

하비가 이불을 쥐어뜯으며 열이 나는 이마를 부드러운 비단에 비볐다.

붉은 휘장조차 동양에서 공수해 온 것이라 전체적인 방 분위기가 이국적이었다. 그 속에서 탄탄한 맨살을 비단에 부대끼는 하얀 피부의 남자는 동양화 속에서 들어간 이방인 같았다.

꽃줄기가 늘어날수록 하비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나중엔 빅터가 아무리 세게 눌러도 튀어 오르는 것을 막지 못할 지경이었다.

꽃줄기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하비의 구멍 속을 연신 찔러댔다.

너무 심한 자극이라 하비는 손톱이 떨어질 것처럼 이불에 박고 입술을 파묻었다. 젤가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되도록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비가 당하는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젤가는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양손으로 귀도 틀어막고 싶었지만 빅터가 그러지 못하게 해서 억지로 하비의 낮은 신음을 들어야 했다.

‘그만해 주세요, 제발. 그만……!’

젤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고, 하비의 열은 높아져만 갔다.

더욱이 꽃줄기에 묻어 있던 물 때문에 뻑뻑했던 하비의 뒷구멍이 젖어들었다.

그 모습이 꼭 오메가로 화했을 때와 같아서 빅터는 성적인 긴장으로 바짝 마른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돌겠네.’

당장 박고 싶었지만 더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의 저택 사람들이 빅터에게 성격이 안 좋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빅터는 관심 있는 물건이나 사람일수록 그 한계를 시험하며 제 손에 둘 가치가 있나 없나를 따지는 것이 천성이었다. 물론 그 덕에 큰 거부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 든 모든 것은 여지없이 강제로 성장통을 겪거나 제 한계를 맛봐야 했다.

드디어 빅터의 손에 들린 꽃들이 모두 하비의 뒷구멍에 꽂혔다. 마지막은 셈페르 아우구스투스가 장식했다. 크고 화려한 자줏빛 꽃망울이 인상적인, 꽃들의 왕이었다.

‘그래 봤자 뒷구멍에 꽂힌 비싼 장식물이지만.’

빈 화병을 의미 없이 쳐다본 빅터가 정신을 못 차리고 신음하는 하비를 일으켜 세웠다.

움직이는 동안 꽃줄기들이 더 깊게 구멍 속으로 찔러 들어와 하비는 단박에 고꾸라질 뻔했다. 빅터가 팔을 꽉 틀어쥐어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비는 비명도 못 지르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필 쾌락점을 찍어 눌러서 순식간에 절정에 달했다.

하비의 어깨가 격하게 떨리고, 뻣뻣해진 성기에서 묽은 정액이 터져 나왔다. 발가락이 일시에 오므라들었다.

“끕…….”

하비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씹어서 간신히 터져 나오는 신음을 도로 삼켰다.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 절정이 찾아왔다.

하비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몽롱해진 눈으로 덜덜 떨었다. 목울대가 사정없이 일렁이고, 이윽고 팔다리에 경직이 찾아왔다. 그의 머릿속은 정으로 때린듯 강렬한 쾌감만이 가득했다. 이번엔 사정하지는 않았지만 뒤로만 갔다.

‘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지만 하비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어릴 때, 하비는 로열 가드란 것이 무엇인지 아버지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라힌 스터스에게서 이 나라를, 도시를 지키는 것이라는 답을 받았다. 가문을 수호하고, 나아가 사람들을 지키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로열 가드가 하는 일이라고.

아버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다음 가주인 자신이 짊어진다. 하비는 그게 로열 가드의 숙명이라 여겼다. 지금처럼, 개처럼 기더라도 꺾이지 않으면 된다.

아이러니였다. 오히려 바닥을 쓸고 다녀야 지켜지는 것이 존귀한 명예라니.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던 하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빅터의 녹색 눈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빅터가 혀를 차며 부들거리는 하비의 너른 어깨를 잡았다.

“벌써부터 이러면 얼마 가지도 못해서 쓰러지겠는데.”

빅터가 친절한 손길로 힘이 빠진 하비의 턱을 들어 방구석 쪽으로 돌렸다. 희미하게 물기가 어린 밤색 눈에 초점이 없었다.

“저 끝에 갔다가 여기까지만 오면 돼. 보이지? 멀지는 않아. 조금만 애써봐.”

산책을 보내는 것처럼 가볍게 말한 빅터가 하비의 턱을 놓아주고 다시 침대로 물러났다. 손이 떨어지자 힘이 빠진 턱이 아래로 추락했다.

방금 절정에 달한데다 자극이 지나쳐 몸을 못 가누는 하비였지만 의지만으로 개처럼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무릎이 한 발 나아갈 때마다 구멍에 꽂힌 꽃들이 일시에 꺼떡거렸다. 땀이 비 오듯이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턱에 맺히던 물방울이 이내 떨어졌다.

하비가 참지 못하고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허억…….”

고작 한 걸음인데 충격이 너무 컸다. 하필 그가 느끼는 곳을 자꾸 찌르고 있어서 기절할 것 같았지만 하비는 끝끝내 참았다. 꽃들이 파르르 구멍 안에서 흔들렸다. 구멍이 꽃줄기 다발을 세게 조이자 거칠한 표면이 내벽을 긁어 다음 쾌감이 성큼 다가왔다. 허벅지가 굵게 떨리고 자꾸만 꺾이려 했지만 하비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빅터가 마지막에 꽃줄기를 흔들었는데 일부러 그가 느끼는 쾌락점을 겨냥하여 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이렇게까지 괴로울 리가 없었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하비가 바닥에서 무릎을 떼어놓고 손을 억지로 밀었다. 꽃 하나가 떨어지려고 해서 구멍에 힘을 준 바람에 다시 쾌락이 밀려왔다. 하비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바닥을 쥐어뜯었다.

‘안 돼…….’

드라이 오르가슴이 하비를 덮쳤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팔이 반쯤 꺾였다.

휘청대며 쓰러질 것 같던 하비를 보며 빅터가 벌떡 일어났다가 제자리에 앉았다. 하비가 곧장 균형을 잡은 것이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꽃들이 전부 제자리를 찾았다.

보고 있는 사람이 다 아슬아슬한 광경이었다. 시킨 사람조차 압도당할 만큼, 강렬한 의지였다.

그나마 젤가가 고개를 박고 전혀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빅터는 젤가의 도피를 눈감아주고 있었다.

이를 갈면서, 하비는 주먹을 꽉 쥐고 자존심을 꾹꾹 눌렀다.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수치는 잠시 지나가면 그만이다. 목숨은 되돌릴 수 없다.

“잘하고 있어. 계속해.”

저 얄미운 목소리는 떠나질 않고 격려하는 것처럼 하비의 주위를 맴돌았다.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빅터의 존재는 마치 그의 곁에 서서 응원하는 양 몹시도 가까웠다.

빅터가 주문처럼 말했다. 그의 눈이 기분 좋은 듯이 가느스름하게 늘어났다.

“이것만 끝나면 모든 게 좋아질 거야.”

정말 모든 게 좋아질까. 속으로 의문을 표하면서도 하비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단단한 무릎에 생채기가 나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비가 앞으로 길수록 시원한 페로몬은 더욱 짙어지고, 빅터의 중심은 더욱 단단해졌다.

사실 하비 못지않게 빅터도 인내하고 있었다. 하비가 자신의 안에서 굴욕을 겪고, 꺾였다가 다시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참고는 있지만 견디기 힘들었다.

‘젠장…….’

하비가 기다가 거의 끝에 도달했을 무렵 빅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소악단의 음악은 정열적인 구간을 지나 잔잔한 선율로 진입했다. 하지만 빅터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뭉친 꽃줄기가 위태롭게 흔들릴 때마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빅터에게 자극적인 페로몬 향이 실려 왔다. 정작 오메가인 젤가는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페로몬이 그리 강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빅터는 그 미약한 페로몬에도 쉽게 반응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성질이었다.

쿵!

하비의 팔이 휘청대다가 탁자 다리에 부딪혔을 때 빅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탁자 위의 또 다른 화병이 핑그르르 돌면서 하비의 머리를 위협할 것처럼 기울었다.

하비는 눈을 힐끔 들어 떨어질 것 같은 꽃병을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앞으로 더 전진시키기만 했다. 꽃병이 제 머리 위로 떨어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에 빅터만 초조하게 이를 바라보았다.

타닥.

하비가 천천히 지나간 뒤로 화병이 똑바로 서자 그제야 빅터는 안심했다. 그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울렁거리고, 손가락이 연신 움찔거렸다. 몇 번이나 들썩거리면서 무릎에 힘을 세우던 빅터는 초유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제자리를 지켰다. 목이 바싹 타고 입안이 사막이 된 것같이 건조했다.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빅터는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인내로 내리눌렀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저 아슬아슬한 남자를 벽에 몰아붙이고 박고 싶었다. 하지만 빅터는 우성 알파 중에서도 다시 없을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그는 솟구치는 열망을 누르고, 또 눌렀다.

스스로를 자제시킨 빅터는 사고를 바꾸었다. 참는 게 아니라 하비가 움직이는 것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라고.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저 음란한 몸뚱이와 정갈하고 곧은 마음까지 전부.

그의 속에서 뜨거운 정염이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빅터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이미 하비의 페로몬에 잠식되어 있었고, 이를 대하는 방식 또한 하나로 굳었다. 하비의 페로몬을 한가득 맡으며 저 탐스러운 구멍 속에 쑤셔 박는 것이었다.

방향을 바꿔 도는 동안에도 하비의 허벅지는 몇 번이나 꺾이고 상처가 난 내벽에서는 피가 흘렀다. 무릎에는 카펫이 깔리지 않은 곳을 길 때마다 생채기가 하나둘씩 더 늘어났다.

하비가 거의 돌아왔을 때는 두 사람 다 안색이 평범치 않았다.

단 두 걸음을 남겨두고 하비가 마지막 심호흡을 할 때였다. 빅터가 벌떡 일어나 무릎 꿇은 하비를 일으켰다. 그의 한 팔을 불쑥 잡아 올린 빅터가 달아오른 하비의 얼굴에 대고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만하면 됐어. 저 노예로 인한 명예훼손은 다 갚은 걸로 하지.”

왜인지 시킨 사람이 더욱 힘들어 보여서 하비는 의아했다. 하비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수습 못 하면서도 남은 거리를 힐끔 보았다.

“아직 두 걸음 남았다.”

빅터는 질린 얼굴로 하비를 보았다. 그는 파리한 안색으로도 고집스럽게 핏기가 맺힌 입술을 물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해줘도……. 고지식하긴.”

마치 공작의 꼬리처럼 화려하게 하비의 뒷구멍에 피어 있던 튤립들을 빅터가 큰 손으로 한 번에 쥐었다. 그러곤 내벽을 긁어대던 꽃줄기를 단숨에 빼버렸다.

굵고 거친 단면들이 긁고 지나가는 감각에 하비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두꺼운 허리가 충격에 반으로 접혀들었다. 빅터가 팔로 단단히 지탱해 주지 않았더라면 넘어졌을 것이다.

“헉……!”

피와 꽃물이 섞여 하비의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고른다고 골랐는데도 꽃줄기가 내벽을 다치게 한 모양이었다.

빅터는 혀를 차더니 젤가에게 명령했다.

“젤가라고 했나. 넌 나가서 고약을 가져와. 상처에 잘 듣는 걸로.”

“예? 예, 예!”

젤가는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눈물을 그렁그렁 단 눈으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문밖에 서 있던 쌍둥이 사용인의 도움을 받은 건지 그는 금세 고약을 가지고 왔다.

쌍둥이 고용인들은 문안으로 고개를 기웃대며 상황을 보려다가 빅터의 명으로 바로 밖으로 쫓겨났다.

“괜찮나?”

하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부푼 어깨만 들썩였다. 그는 빅터의 부축으로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로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볼록하게 드러난 엉덩이 사이로 옅은 핏물 자국이 비쳤다. 아픔보다 상처받은 자존심이 더 힘겨웠다.

하비가 육체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큰 것은 빅터도 알았다.

‘귀족이 바닥을 기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없지.’

빅터가 이를 모두 알고 있으면서 시킨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하비 스터스가 다른 이에게 거짓으로라도 한순간이나마 귀속되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빅터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노예처럼 예속된 하비 스터스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마치 확인을 받고 싶은 것처럼.

그런 식으로 맛본 굴종은 달고도 썼다.

돌아온 젤가에게서 고약을 건네받으며 빅터가 냉정하게 말했다.

“스터스 경과의 약속대로 넌 자유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도록. 보이는 순간 각오해야 할 거야.”

젤가는 침대 위로 늘어진 하비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러다 싸늘해지는 빅터의 시선에 얼른 사라졌다.

빅터가 고개를 내저으며 고약을 손에 듬뿍 찍었다. 누런 고약이 빅터의 체온에 녹아 조금씩 흘러내렸다. 피는 멎었지만 아직 상처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병 주고 약 준다고 욕해도 기꺼이 들을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하비가 들썩대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팔로 무게를 지탱해서 일으키는 그를 빅터가 잡아주려 했으나 뿌리쳤다.

하비는 애써 아무 일이 없었다는 양 갈라진 목소리로 청했다. 피로가 그의 강건한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너무 늦었군. 이만 돌아가겠어.”

빅터가 고약을 찍어 바른 손가락을 멀거니 보더니 황망하게 말했다.

“지금? 그 몰골로?”

하비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잡으면서 비틀댔다.

“옷만 입으면 아무도 몰라. 돌아갈 테니 마차나 불러줘.”

출혈과 고통 때문에 질린 얼굴에 열이 올라 달아올랐으면서, 하비는 끝까지 돌아가겠노라 주장했다. 하비의 체온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이불이 금방 휑하게 식었다.

빅터가 허탈하게 웃더니 고약을 옆에 놓아두었다. 곧 웃음기를 싹 거둔 그는 중심을 못 잡고 비틀대는 하비를 잡고는 다시 이불 위로 밀어 넣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야.”

하비가 출렁대며 물결을 일으키는 비단 이불에 이마를 대고 고통스럽게 숨을 뱉었다. 상처가 난 구멍에서 급격하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압제자 같은 모습으로 이를 보던 빅터가 다른 손으로 하비의 어깨를 단단히 내리눌렀다. 하비가 고개를 옆으로 틀고 버둥거렸다.

“뭘 하려고…… 흡!”

말라가는 연고를 억지로 하비의 뒷구멍에 쑤셔 넣으며 빅터가 담담하게 말했다.

“경은 언제나 상식 범주를 벗어나. 누구보다 상식적인 척하면서 말이지.”

빅터는 이물감에 꾸물대는 구멍 속으로 더욱 깊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비가 움찔하면서 엉덩이를 조이고 손으로 비단 이불을 세게 쥐었다. 얼굴은 이불에 파묻어서 어떤 표정인지 알 길이 없었다.

빅터가 손가락을 잠시 빼더니 손가락 여러 개에 고약을 더 많이 찍어 발라 구멍에 박았다. 녹아내린 고약이 구멍 속에서 애액처럼 작용했다. 일부러 손가락을 구부려 쾌락점을 꾹 누르자 하비가 작살 맞은 고기처럼 퍼뜩 뛰었다. 하지만 다 떠오르지 못하고 빅터의 강한 힘에 짓눌려 이불 위로 가라앉아야 했다. 잔잔한 밤색 눈에 어두운 빛이 번뜩였다.

“그만……!”

이불에 짓눌리던 하비의 성기가 단단하게 서기 시작했다. 쿨쩍대며 손가락을 오물오물 먹는 뒷구멍을 탐스럽게 보며 빅터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시킨다고 정말 할 줄은 몰랐지만, 아니, 어느 정도는 알았지. 그래도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부릴 줄이야…….”

하비가 바닥에 떨어져 굴욕을 참는 모습을 수없이 요구하고, 또 봐온 빅터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비가 인간으로서나 인재라는 측면으로 봐서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목이 뛰어난 빅터는 그럴수록 탐을 내고 욕심내는 본능이 솟구쳤다.

그 꿈이 어떤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견딜 수 없이 가득 찬 오메가들의 뜨거운 페로몬 폭풍을 막아준 그 꿈속의 남자, 그가 바로 하비 스터스 경이었다.

아니면 더 이전이었을 수도 있다. 집사 레나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릴 때부터, 혹은 더 오래전부터.

집사 레나가 종종 말한 적이 있었다. 단추는 잘못 끼우면 다시 채우면 되지만, 어긋난 감정은 어디서부터 다시 맞춰야 할지 몰라서 헤매는 경우가 많다고.

‘제가 이 분야를 공부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어긋난 부분을 찾게 해주고 싶어서예요. 그러면 최소한 거기서부터 다시 더듬어 나가면서 뭐가 잘못된 건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빅터는 레나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비와 자신의 관계에는 어긋난 부분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틀어져 있었으니까.’

빅터가 하비의 등 근육 위로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빅터의 두꺼운 손가락이 뒷구멍을 멋대로 들쑤시고 구멍 속에서 야릇하게 원을 그렸다. 자극으로 꿈틀대는 근육들을 감상하면서 빅터는 강권에 가까운 제안을 했다.

“제대로 치료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상상으로만 십여 년을 마주하던 하비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빅터를 삼켜 버렸던 분노와 증오도 어느덧 많이 희석되었다. 하비를 그의 원대로 진창에 굴리면서 채워진 음습한 만족감도, 이제는 다른 형태로 제 모습을 부풀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 것이다.’

기이한 만족감이 빅터의 내부에서 커져갔다. 비틀어진 소유욕이 발해 빅터를 집어삼켰다.

다른 이가 제 것을 채간다면 이성을 잃고 다시 취하려 달려들 것이다. 빅터는 확신이 들었다. 아까 누군가 하비의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머릿속의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하비가 부들대면서도 엉덩이 쪽에 한 팔을 내려 빅터의 팔을 잡았다.

“이제 됐어. 나머지는 돌아가서 할 테니, 이만 놔.”

하비가 힘을 못 쓰고 눌린 채 말했지만 빅터는 전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개수를 늘려 그를 더욱 괴롭게 할 뿐이었다.

찌걱, 찌걱.

구멍 밖으로 녹은 연고가 밀려 나와 미약한 거품을 일으켰다. 하비의 골격 잡힌 허리와 탄력 있는 엉덩이, 그 아래 자리 잡고 있는 허벅지가 차례대로 덜덜 떨렸다. 기어코 하비의 입매가 틀어지더니 핏기 어린 입술 밖으로 신음이 흘렀다.

“흐으……. 으응……!”

뒤에서 전해지는 쾌감에 경련을 일으키는 길고 단단한 몸뚱이를 훑어본 빅터가 이윽고 손가락을 빼내었다. 들썩거리던 육체가 조금 잠잠해졌다. 빅터의 성기가 하의 안에서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었다. 그가 결국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변명 같은 말을 던졌다.

“이걸론 안 되겠군. 더 큰 걸 넣어야겠어.”

“……뭐?”

빅터가 빠르게 탈의하더니 이번에는 고약을 제 성기에 치덕치덕 발랐다. 누런 고약이 잔뜩 발기해 꺼떡대는 거대한 성기 위에서 녹기 전에, 붉은 속살이 비치는 구멍 안으로 한 번에 박았다. 핏줄이 선 커다란 성기가 작은 뒷구멍을 찢을 것처럼 가득 채웠다.

퍼억!

하비는 뱃가죽이 뚫릴 것같이 박아대는 삽입에 숨을 들이켰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억지로 들이 삼킨 숨이 드디어 짧은 호흡으로 튀어나갔다.

“허억…….”

하비가 눈을 부릅뜨며 부르르 떨었다.

상처 난 곳에 우성 알파의 거대한 성기가 비벼졌다. 연고가 발렸지만 그뿐, 배려와 인내심 따위는 없었다.

한계에 다다른 빅터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눈으로 제 아래에 짓눌린 다른 알파를 담았다. 정복감에 취한 녹안이 만족스럽게 늘어났다.

하비는 배 속 가득 들어찬 성기가 꿈틀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윽!”

빅터가 말없이 엎드린 하비의 엉덩이를 잡아 위로 최대한 끌어 올렸다. 그는 위에서 더 깊게 박아 넣으면서 땀으로 미끈대는 하비의 꼬리뼈 부근을 꽉 잡았다.

하비는 무릎으로 겨우 무게를 지탱하고 빅터가 성기를 박아서 밀어대는 압력을 버티고 있었다. 하비의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 이불을 이슬처럼 적셔갔다.

“그만하라고…… 했잖…… 허윽!”

빅터의 것이 뿌리까지 박혀서 안쪽에 바른 연고들을 일부 밀어냈다. 노란 연고가 하비의 허벅지와 회음부를 타고 뱀처럼 흘러내렸다. 끝까지 박은 성기를 천천히 뒤로 뽑아내면서 빅터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제가 안 되는데, 되도록 해보지.”

빅터는 하비의 단단한 엉덩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근육 사이로 주름이 잡혔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퍽! 퍼억- 퍽!

하비의 높은 코가 자꾸만 이불에 긁히고, 땀에 젖은 머리칼이 앞뒤로 흔들렸다. 허공에 붕 뜬 가슴팍의 유륜이 흥분으로 바짝 섰다.

빅터가 교묘하게 쾌감을 느끼는 지점을 꾹꾹 박아대서 하비는 미칠 지경이었다. 몸을 자주 맞추다 보니 빅터는 이제 그의 몸에 대해서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어느 곳을 찌르면 느껴서 경련을 일으키는지, 어디를 박아주면 있는 힘껏 낮은 교성을 참으며 입술을 물어뜯는지 말이다.

“악, 윽, 읍! 흣!”

침대에 쳐진 너르고 붉은 휘장이 빅터의 등에 닿아 너울너울 흔들렸다. 휘장은 느릿해진 현악기의 음률에 맞춰 춤추는 것처럼 붉게 물결쳤다.

빅터가 자꾸만 무너지는 허리를 바로잡아 위로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 하비의 어깨는 단단해서 근육으로 빼곡한 그 무거운 몸을 잘 지탱하고 있었다.

위에서 찌르듯 박으며 빅터는 하비가 싫어할 만한 말을 골라서 했다. 박을 때마다 그의 강철 같은 허벅지가 울룩불룩 힘이 들어갔다.

“꽃줄기도 잘 먹더니 내 것도 고픈 듯이 먹는데.”

움찔대며 성기를 받던 하비가 등 뒤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미 힘이 빠진 팔로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주먹은 막혔을지라도 하비의 눈빛은 죽지 않고 분노로 형형하게 빛났다. 동그랗게 뭉쳐진 주먹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하비는 곧 위에서 격렬하게 박아대는 허릿짓을 참아내지 못하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젤가도 없어져서 전보다 마음이 풀어진 탓이었다.

“윽……!”

흥분으로 물든 녹안이 하비의 상처 난 맨몸을 샅샅이 훑었다. 허리를 잡혀 앞뒤로 흔들리면서 하비는 이불을 이로 물었다. 안 그러면 더 큰 신음을 낼 것 같아서였다.

빅터가 이를 보더니 웃음 지었다. 그의 날렵하고 단단한 턱에서 굴러떨어진 땀방울이 하비의 엉덩이 위로 떨어졌다. 둥글게 뭉쳐진 물방울은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하비의 뒷구멍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것도 버틸 수 있겠나?”

퍼억-!

힘껏 박아 넣자 이미 꽃줄기로 여러 번 오르가슴에 다다른 하비가 예민해진 몸을 한껏 떨었다. 빅터가 정확히 쾌락점을 짓누른 것이다.

하비는 벌벌 떨면서 온몸을 뒤틀었다. 어마어마한 쾌감이 해일처럼 일어 그의 뒷구멍에서부터 허리, 등줄기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그의 하얀 육체가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갔다. 거대한 사정감이 닥쳤다.

하비가 참지 못하고 이불을 물었던 입을 벌렸다. 허벅지가 경련하고 엉덩이가 바짝 굳었다.

“흐억……!”

넓게 벌어진 뒷구멍이 절정으로 오므라들고 빅터의 것을 거세게 물었다. 하비의 굳었던 성기에서 묽은 액이 터져 나오고, 동시에 빅터도 사정감을 참지 못하고 정액을 뱉어냈다.

“크읏…….”

빅터가 금빛 눈썹을 찌푸리면서 신음을 뱉었다. 오래 참아서인지 그의 정액은 양도 많고 짙었다. 꿀렁대면서 뒷구멍 밖으로 고약과 섞여 흐르는 정액이 가관이었다. 피도 얼핏 보여서 빅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은 갈 것 같았다.

본인이 시킨 것이긴 했지만 하비의 고집도 한몫한 것이라 생각해 버린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좀 거칠긴 했지만, 내 치료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하비가 가물거리는 눈을 힘주어 떴다. 빅터에게 휘둘리면 튼튼한 몸도, 체력도, 정신력까지 모두 남김없이 갉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 빅터는 이불을 끌어당겨 하비의 뒷구멍 근처를 닦아주는 친절을 발휘하고 있었다. 거치적대는 붉은 휘장을 휙 걷어내고 옷을 갈무리하던 빅터에게 하비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평범하게 치료하는 방법은 모르는 건가?”

손을 멈칫한 빅터가 그의 지친 음색에 픽 웃었다.

“평범? 그게 어떤 건데.”

“잘 모르지만 경 같은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

“과찬이야.”

나른한 여운이 하비를 뭉근하게 감쌌다. 늦은 시각이기도 했지만 너무 시달린 탓에 요즘 무리한 하비의 육체에도 쉽게 피로가 찾아왔다. 평소보다 좀 더 빨리 지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빅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하비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뜨려고 노력하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의 꼼꼼한 습관이었다.

“젤가는 이제 약속대로 정말 건드리지 않는 건가.”

기분 좋게 대화를 이어나가려던 빅터는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하비의 말에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날 뭘로 생각하는 거지. 상인 출신인 걸 잊었나? 신용이 최우선이야. 약속은 지킨다.”

하비는 그에게 있어 빅터는 상인보다 시정잡배 이미지가 더 강하다는 것은 몰래 삼켰다.

하비는 안도의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그럼 되었다. 이제 그가 신경 써야 할 상황은 더 없는 것이다.

집에서 잘 돌보고 있는 늙은 회계사에게 좋은 방도 내주었고, 남은 건 빅터에게 약점 잡힌 라힌 스터스에 대한 일과 스터스 저택의 형편없는 재무 상황을 재조사하는 일뿐이었다. 구멍 안이 지나치게 욱신거리고 열이 올랐지만 며칠이면 괜찮아질 것이다.

‘아니, 해결되지 않은 일이 하나 더 있군.’

하비는 말간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빅터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공식 연인으로 선포해 버린 탓에 이제 어딜 가도 그 소리가 빠지질 않는다.

방금도 ‘공식 연인’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빅터가 제 약점을 쥐고 흔들었고, 그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젤가를 과거 연인으로 둔갑시킨 것도 모자라 그에 따른 명예훼손까지 몸으로 갚아야 했다.

‘이제 정신 차려야지.’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틀대면서도 하비는 똑바로 걸으려 애썼다. 겨우 허리를 추슬러 곧게 선 하비가 빅터에게 내일 일정을 물었다.

“계속 청에서 일하나?”

“아니. 주로 집에서. 내일은 청에 나갈 예정이고.”

문밖에 서 있는 쌍둥이 고용인에게 갈아입을 새 옷을 여러 벌 가져오라고 시킨 빅터가 뒤돌았다. 좋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건 왜?”

어쩐지 기대가 가득한 얼굴에 대고 하비는 조용히 말했다.

“일이 끝나면 저녁에 보지.”

“어디서?”

무서운 얼굴로 빅터를 노려본 하비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떨어진 제 옷을 주웠다.

“소드 클럽에서.”

‘공식 연인’이라는 입지를 이용할 수 있는 건 빅터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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