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작은 전환점
쏴아아아!
어느덧 비가 거세지며 빗줄기도 굵어졌다. 빗줄기는 후드도 소용없을 정도로 세찼다.
빅터도, 후드를 쓴 하비도 그 비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빅터의 황금빛 머리칼도, 그가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도 전부 젖었다. 그들의 몸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 바닥의 더러운 웅덩이에 고여 한데 섞였다.
귀조차 따가운 빗줄기 속에서 빅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선명한 색채의 검이 되어 하비에게 박혔다.
“그놈의 행방을 알고 싶나?”
그 검의 색은 선명한 핏빛이었다. 하비의 밤색 눈이 증오로 일그러졌다. 그를 똑똑히 확인한 빅터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하비와 마찬가지로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빅터는 하비의 팔을 끌어당겨 그대로 골목의 어두운 길목으로 들어갔다.
쿵!
하비는 강제로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엄청난 힘이었다.
빅터가 나타날 때부터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던 하비는 평소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강력한 알파의 페로몬 향에 전 하비의 페니스는 벌써 팽팽하게 발기했다.
빅터도 마찬가지였다. 하비를 본 이후부터 그에게서 나오는 오메가 페로몬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흥분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에는 이토록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적이 없었는데.
빅터의 아래를 본 하비가 흠칫했다. 앞섶을 뚫을 것처럼 불룩한 빅터의 중심을 확인한 그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빅터의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빅터는 하비의 후드를 단번에 벗겼다. 드러난 하비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분노가 넘실대고 있었다. 덩치 큰 사자가 위협하듯 하비는 갈색 눈썹을 안으로 좁게 모은 채 빅터를 노려보았다.
두껍고 흉터 많은 큰 손이 떨리는 밤색 눈 주변을 어루만졌다. 빗줄기가 워낙 굵어 하비는 눈을 다 뜨지도 못했다. 그의 눈두덩이 위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알고 싶으면…….”
하비의 눈가에 고인 빗물을 닦아내려는 듯 어루만지던 빅터가 그대로 하비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찰팍!
하비는 질척한 물웅덩이 위로 강제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바로 눈앞에 빅터의 흥분한 페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축축한 물이 하비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로 스며들었다. 빅터의 페로몬에 흥분해서 나온 애액이었다.
“내 걸 잘 빨아보든지.”
빅터가 차가운 얼굴로 지루한 듯 말했다.
“그럼 어디에 시체를 버렸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비는 무릎에 축축하게 젖어드는 빗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차가운 빗속에서 뺨에 닿는 빅터의 것은 바지 너머인데도 너무 뜨거웠다. 하비의 단정한 눈썹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여기서 이딴 걸 입에 물라고?”
덩치 큰 쥐 한 마리가 하비의 구두 위를 밟고 지나갔다.
비가 오고 있어서인지 좁은 골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심지어 불결함까지 가미된 장소에서 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로 할 수는 없었다. 하비는 자신이 이곳에 들락거린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자의 행방을 내 처지와 맞바꿀 수 있나?’
하비는 머릿속으로 익숙히 저울질했다. 빅터가 그를 정말로 죽였을 경우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경우,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쪽을 생각해도 역시 답은 하나였다.
빅터가 고민하는 하비의 뺨을 검지로 툭툭 쳤다.
“이를 세웠다간 여기서 박아달란 의미로 알겠어.”
“아직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하비가 단정 짓지 말라며 이를 드러냈지만 빅터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할 거잖아? 고결한 스터스가의 사람이니까.”
“무슨 의미지?”
“시체의 행방이라도 알면 그놈을 가족들에게 돌려줄 수 있잖아. 장례라도 제대로 치르게 할 수 있고. 스터스가는 그런 물거품 같은 가치에 목을 매는 곳 아니었나.”
빈정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하비는 빅터의 의도를 알면서도 묘하게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빅터가 벗겨놓은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크게 심호흡을 한 하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단단히 발기한 빅터의 페니스를 꺼내 들었다. 겨우 거기까지 하는 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빅터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하비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끔찍한 것을 보듯 하던 하비의 시선은 후드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후드 위로 큼직한 손을 올린 빅터가 하비의 결심을 끊임없이 뒤흔들었다.
“싫으면 하지 마. 대신 네가 원하는 정보는 결코 얻을 수 없겠지만.”
빅터도 여태껏 이렇게까지 힘든 행위를 시킨 적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중심부를 빠는 짓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이건 귀족에게는 최악의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비의 마음속에 수천 가지 의문이 피었다가 졌다.
하비는 뜨겁고 거대한 페니스 가까이로 머뭇머뭇 얼굴을 가져갔다.
빅터가 차가운 눈으로 이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자꾸만 머리로 파고드는 따가운 빗줄기도 신경을 긁었다. 분명 원하던 상황인데, 이상하게 빅터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더럽게 느리네.”
흠칫하던 하비가 용기 내어 혀를 내밀었다. 뜨거운 혀가 빅터의 거대한 페니스 위로 닿았다. 빗물이 페니스의 경사를 타고 흘려내려 하비의 입속으로 함께 밀려들었다. 짭짤한 맛이었다.
끝부분만 들어갔을 뿐인데 벌써 버거웠다. 알파의 것을 물었다고 하비의 뒷구멍에서 애액이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오메가 페로몬도 더욱 강렬해졌다.
“젠장…….”
못 참겠다는 듯 빅터가 하비의 뒤통수를 너른 손바닥으로 감쌌다. 하비는 틀림없이 그가 흥분한 상태로 페니스를 입속에 처박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참해도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하비가 후드 안에서 눈동자를 굴릴 때였다. 빅터의 손이 하비의 머리를 거칠게 밀어냈다.
바지춤을 정리하며 옷매무새를 다듬은 빅터가 멍하게 자신을 보는 하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누가 오고 있어.”
갑자기? 하비가 깜짝 놀라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하비의 구두를 밟고 지나간 것 같은 커다란 쥐새끼 한 마리만 찍찍대며 뛰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빅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뒷골목을 빠져나갔다.
비를 맞으며 성큼성큼 걷는 빅터는 못마땅한 얼굴로 주먹을 터질 듯이 쥐고 있었다. 누군가 오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빅터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더 모질게 못 한 거지? 노예보다 못한 처지라는 걸 똑똑하게 각인시켜 줄 기회였는데. 빅터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하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옥 같은 나날 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렸던 밤색 눈동자가, 그 단단하면서도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자신의 것을 잡고 애처롭게 떨리는 것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차라리 평소처럼 더 독하게 굴었으면 아무 생각이 안 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때였다. 말없이 빅터를 따라 걷던 하비의 얼굴에 희미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번쩍!
“윽…….”
섬광이 터지듯 백색 자연광이 하늘 전체로 넓게 퍼져 나갔다. 번개가 치고 있었다. 하얀 나뭇가지가 펼쳐지듯 어두운 밤하늘에 가닥가닥 하얀 선들이 생겨났다.
후드에 가려진 하비의 얼굴에도 하얗고 창백한 빛이 어렸다.
하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배를 움켜쥐었다. 배 속이 뭔가 이상했다. 장기가 온통 타는 듯이 뜨겁고, 격렬한 통증이 올라왔다. 신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 간혹 뜻 모를 고통이 찾아오긴 했는데, 이토록 본격적인 경우는 없었다. 큰 변화가 생기기 직전의 어떤 전조 같았다.
쿠르릉!
곧이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천둥이 길게 울었다.
이상을 감지한 빅터가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허리를 숙이고 배를 움켜쥔 하비를 발견한 빅터는 곧장 뛰어갔다.
“무슨 일이지?”
억지로 참고 있지만 하비에게서 신음이 낮게 터져 나왔다. 심상치 않아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증오스러운 존재지만 이렇게 빨리 이상이 생기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의사를 불러야겠군.’
어두워진 낯빛으로 의사를 부를 생각을 하던 빅터는 자신의 팔을 불쑥 잡는 손길에 아래를 보았다.
“……줘.”
하비가 강한 힘으로 그의 팔을 휘어잡은 채 웅얼거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악력이 엄청났다. 하비는 휘청대는 몸을 겨우 가누면서 끊어질 듯 말 듯 말했다. 후드 아래 얼굴이 귀신처럼 창백했다.
하비는 본능적으로 말했다. 지금 되돌리지 않으면 뭔가가 시작될 것 같았다.
“이제 한계야……. 원래대로 되돌리는 그 약, 빨리 내놔. 한계라고, 제발…….”
애원하던 하비가 스르륵 머리를 아래로 떨구었다. 놀란 빅터는 큰 체구의 하비를 얼결에 붙들어 잡았다. 하비의 두 팔이 길게 늘어지고 시체처럼 덜렁댔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일이 귀찮게 되었어.’
빅터는 축 늘어진 하비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골목 쪽에서 아까 그 두 남자가 나타났지만 빅터는 손을 휘저어 그들을 물리쳤다. 묘한 고집이 생겼다.
“내가 하지. 너흰 마차나 가져와.”
빅터는 장신에 체격 좋은 하비를 아무렇지 않게 등에 둘러업고 도착한 마차 안으로 구겨 넣었다. 마차는 성인 남자가 길게 누워도 충분한 공간이 있을 정도로 커서 하비를 눕힐 수 있었다. 빗물에 잔뜩 젖은 하비의 몸이 마차 시트를 짙게 물들였지만 빅터는 개의치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만 또렷하게 보였다.
시체를 처리한 알파 쪽 남자가 마부 역할을 했는데, 그는 말을 모는 내내 콧잔등을 찡그렸다. 마차 안에서 전해오는 하비의 페로몬 향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참으려 했지만 너무 자극적이라 계속 발기 상태였다. 결국 그가 주인인 빅터에게 요청했다.
“주인님, 그분에게 향수를 좀 뿌려주십시오.”
“왜?”
“페로몬이 좀 독합니다.”
빅터가 피식 웃고는 알파 수사슴의 페로몬으로 만든 향수를 기절한 하비에게 뿌려주었다. 그제야 알파 마부는 안정되어 말을 몰 수 있었다. 그 정도로 하비의 오메가 페로몬은 강렬했다. 아까 전 알파 세 놈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빅터가 어이없어하며 죽은 듯 누워 있는 하비를 보았다.
‘엉덩이 몇 번 내줬다고 벌써 이렇게 되다니.’
하비의 오메가 페로몬이 원래 이렇게까지 강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편이었다. 신약의 복용을 거듭하면서 뭔가 부작용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집에 도착해 빗물과 더러운 뒷골목 웅덩이에 푹 절은 하비를 씻긴 것도 빅터였다. 사용인을 시켜도 됐는데 굳이 본인이 하겠다고 나섰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저 다른 사람이 하비를 만지는 것이 찜찜해서였다.
저 큰 덩치를 혼자선 못 씻긴다며 사용인들이 잔소리했지만 빅터는 꿋꿋했다.
“내가 할 테니 손도 까딱할 생각 마.”
“아주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끼고 도시네요.”
“그래 보이나?”
“아무렴요. 성질 더러운 주인님이 이토록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만.”
애지중지라는 단어에 빅터가 미간을 구겼다. 말도 안 된다.
“헛소리.”
빅터가 비아냥대는 사용인 몇 명에게 코웃음을 쳤다. 이 집 사용인들은 빅터가 해상 무역을 휘어잡던 시절 이전부터 함께해 온 사람들이라 빅터와 크게 격의가 없었다. 그만큼 허물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기에, 빅터가 하비에게 가진 증오나 경멸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빅터의 행동을 더더욱 이해 못 했다. 그가 스터스가의 사람에게 기만당하고 얼마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측근들이었기에.
“뭐, 맘대로 하십쇼. 나중에 뭐라 하진 마시고.”
빅터의 사용인들은 입을 삐죽대며 하비를 노려보고 떠났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높은 신분의 귀족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빅터의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의사는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누워 있는 하비를 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자초지종을 들은 의사는 놀람을 금치 못하며 빅터에게 폭풍 같은 잔소리를 했다.
“그런 불결하고 더러운 곳에서 일을 치시다니! 정말 큰일 날 일입니다. 스터스 경 체내에 안 좋은 균이라도 들어갔으면 어쩔 뻔했겠느냔 말입니다.”
고급스러운 목가풍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빅터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귀를 후볐다. 벌써 몇 번째 잔소리인지 모르겠다. 스터스가에게 큰 선망과 호의를 가지고 있는 의사이기에 대충 이해는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죽을 선을 간당간당하고 있는 꼴이 보기 좋지 않았다.
의사는 호들갑을 떨며 두어 번 같은 소리를 반복하다 느긋하게 떨어진 빅터의 말에 얼어붙었다.
“목청이 이리도 큰 줄 몰랐군. 이왕이면 스터스 경의 몸을 변화시킨 신약을 만든 게 나라는 소리도 크게 떠들고 다니지 그래?”
빅터는 여유를 가장해서 말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 날카로운 칼날이 있었다. 대번에 알아들은 의사는 목뒤가 선뜩했다. 의사가 얼른 빅터의 앞에서 고개를 짧게 숙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더 깊이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빅터가 양손에 깍지를 낀 채 앞으로 상체를 숙여 몸을 내밀었다. 위험스런 웃음을 얼굴에 걸고서 빅터는 의사를 아무렇지 않게 협박했다.
“번번이 잊는 모양인데. 네놈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게 나라고. 함부로 떠들지 마.”
의사는 팽팽한 살기에 숨도 못 쉬고 빅터의 눈치만 살폈다. 영락없이 고풍스러운 귀족의 모습을 하고, 빅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더러운 수법도 곧잘 썼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의사가 침대에 길게 누워 있는 하비의 단정한 얼굴을 흘끗 눈을 굴려 보았다. 그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하필 저런 악질적인 남자에게 걸려서 스터스 가문의 하나뿐인 가주가 고생이었다.
‘내가 만든 약 때문이긴 하지만.’
예의 그 신약 때문에 하비의 몸 상태가 오락가락하는지라, 요즘 그는 진찰 목적으로 자주 호출되고 있었다. 의사는 하비를 보지 않은 척 빅터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사죄의 말을 올렸다.
“잘 알지요. 주제넘게 말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이만 가봐.”
빅터는 귀찮다는 얼굴로 깍지 낀 손을 풀고 허리를 뒤로 편하게 젖혔다. 황급히 사라지는 의사의 뒷모습을 본체만체한 빅터는 테이블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종이들을 한 손으로 휩쓸듯이 잡았다. 소매를 걷어 올린 굵은 팔에 깊은 흉터 몇 개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빅터는 한 손으로 귀를 받치고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채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녹색 눈이 진중하게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나갔다. 투자 목록에 대한 보고이자 향후 정세에 대한 예측 보고이기도 했다.
정밀하게 짜인 보고서는 한눈에 봐도 완벽에 가까웠다. 빅터가 보람찬 얼굴로 미소 지었다.
‘누가 키운 놈들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만족스럽게 종이들을 훑던 빅터는 이내 고개를 돌려 하비가 누워 있는 침상을 보았다. 누구보다 건장한 남자인데, 어째 재회한 이후로는 침대에 뻗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다. 모두 빅터가 시작한 일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화려한 침대의 헤드에 이국적인 패턴이 여러 겹 겹쳐서 새겨져 있었다. 침대가 품고 있는 남자는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더욱 기품 있어 보였다.
순간 빅터는 잊고 있던 것이 불쑥 떠올라 의사가 사라진 방향을 무심코 보았다.
‘신약의 부작용이 어디까지인지, 그걸 안 물어봤군.’
빅터는 의사를 다시 불러오려다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의사도 잘 모른다고 한 것이 생각나서였다. 여러 사람을 상대로 먼저 안전성 검사를 해봐야 하는데 검증되기도 전에 먹여 버렸으니, 어떤 부작용이 나와도 할 말이 없었다.
빅터는 곤히 눈을 감고 있는 하비의 정갈한 모습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흐트러진 긴 밤색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서 이마를 덮고 있었다. 몸은 대충 닦았지만 머리칼까지는 전부 말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빅터가 워낙 힘이 좋은 편이라 180을 훌쩍 넘는 장신의 남자를 씻고 닦는 데도 큰 무리가 없었다.
빅터는 사용인들의 불만이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했나 의문이 들긴 했다.
하비는 팔이 긴 하얀 슈미즈를 입고 누워 있었다. 아래로는 품이 넉넉한 하의인 드로이즈를 입고 있었다.
저렇게 보니 창백한 얼굴은 둘째 치고 건장하기 그지없어서, 금방 죽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만약 죽더라도 그건 하비 스터스의 운명일 것이라 편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원래의 빅터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 하비의 죽음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빅터의 가슴에 묵직한 중압감과 묘한 거북함, 불쾌감이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그건 안 되지. 하비 스터스는 꼭 살아 있어야 해. 그래야 내 복수가 완성되니까.’
아직 하비 스터스는 밑바닥을 보지 못했다. 진정한 바닥이 무엇인지, 고귀한 도련님으로 평생 자라온 그가 알 리 없었다.
빅터는 하비를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당연했다. 그 짧고 강렬한 과거의 조각은 빅터를 지금껏 지탱해 준 집요한 끈이었으니까.
한 귀족이 연 자선 사업회에서 어린 하비는 몹시도 그곳과 어울리는 정갈하고 우아한 차림새로 인형처럼 서 있었다. 지금도 그의 모습을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했다.
웃고 떠드는 귀족들의 하이 톤의 목소리들이 유령처럼 연회장을 떠돌았다. 어린 빅터는 그 웃음소리들이 너무 싫었다. 가식적이고, 음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저 인형처럼 아름다운 밤색 머리의 소년에게서는 다른 것이 보였다. 예의 바르고 말끔했지만 묘하게 냉소적인 눈빛이 섞여 있었다.
‘저 녀석도 나랑 비슷한 놈인 건가.’
어린 빅터는 직감했다. 저 우아한 귀족 소년도 자신과 다름없이 이곳을 몹시나 지겨워하고 있다고.
‘하비 스터스라고 했던가.’
어린 빅터는 관심을 가지고 밤색 머리 소년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하비를 중심으로 꽃을 둔 꿀벌처럼 빙빙 돌았다. 물론 하비는 그런 빅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빅터의 할아버지, 레토 베르텐이 못마땅한 얼굴로 다가와 어린 빅터의 팔을 잡고 질질 끌었다. 구석에 숨어 있던 빅터는 끌려가면서도 계속 힘을 주어 반항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얼른 가서 높으신 어른들께 인사드려야지.”
“시, 싫어요!”
“뭐라고?”
어린 빅터가 녹색 눈을 똑바로 치켜뜨며 제 할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매번 강압적인 할아버지의 태도가 정말 지긋지긋했다.
“이딴 지루한 곳에 더 이상 끌려다니기 싫다고요. 절 좀 내버려 두세요!”
노한 레토 베르텐이 반지 낀 손을 휘둘렀다. 맞을 것을 각오한 빅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다. 입이 좀 터지고 피가 나겠지만 그런 몰골로 연회장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빅터가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토 베르텐의 손을 휘어잡은 다른 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좋은 곳에서 뭐 하고 있는 거요. 아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소.”
라힌 스터스 의원이었다. 하비와 똑같은 밤색 머리칼에 밤색 눈을 한 온화한 인상이었다.
레토 베르텐은 깜짝 놀라 얼른 손을 거두었다. 그러곤 늙은 몸으로 라힌 스터스 의원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런.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작고 무너진 한 허름한 귀족가를 돈으로 산 빅터의 할아버지는 명예에 집착했다.
언제나 고개가 꼿꼿하던 빅터의 할아버지지만 귀족들에게는 항시 저자세였다. 그중에서도 스터스가에게 대하는 태도는 더욱 그랬다. 어린 빅터조차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고개가 땅이 닿도록 숙이는 상대가 스터스가임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스터스가는 대대로 하나같이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배출했다. 특별한 교육법이 있는 건지, 유전자의 우월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입 모아 스터스 가문을 칭송했다.
그 칭송이 헛되지 않은 것인지, 라힌 스터스 의원은 명성답게 기품 있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빅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참 착하게 생긴 아이구나. 우리 아들도 너처럼 해맑은 면이 있으면 좋으련만. 가서 맛있는 과자라도 먹고 오렴.”
어린 빅터는 라힌 스터스 의원을 향해 동경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귀족이다. 할아버지처럼 졸부가 된 자가 억지로 귀한 척 발버둥 쳐봐야 진짜 귀족에게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신이 난 빅터는 라힌 스터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레토 베르텐이 잽싸게 도망가 버리는 어린 빅터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지만 곧바로 그를 붙잡는 라힌 스터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자자, 인사는 충분히 받았지 않습니까.”
빅터의 할아버지, 레토 베르텐을 말린 라힌 스터스 의원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을 뒤로한 어린 빅터는 과자를 한 움큼 집어 우물거리며 자선 회장을 배회했다. 여전히 하비 스터스를 중심에 둔 동선이었다.
빅터는 지루함을 교묘하게 감춘 저 인형같이 차가운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어린아이다운 치기였다.
그가 하비에게 작은 장난을 치기로 결심한 건, 그때였다.
“으음…….”
하비의 낮은 신음에 빅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침대를 보자 하비는 벌써 반쯤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 헤드에 허리를 기대고 있었다.
빅터는 눈가를 찌푸렸다.
‘왜 저러는 거지?’
하비는 비정상적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빅터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눈빛이 평소와 많이 달랐다. 풀려 있는 밤색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뜨거워서 답답해…….”
중얼거린 하비가 이불을 들추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는 빅터가 앉아 있는 테이블까지 맨발로 비척비척 걸어왔다.
하비가 오메가가 된 이후 나오는 특유의 페로몬이 방 안 가득 흘러넘쳤다. 그것은 빅터의 우성 알파 페로몬과 섞여서 기묘한 화합을 이루었다.
‘왜 이러지.’
물끄러미 쳐다보는 빅터의 눈빛에 하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지 보기만 했을 뿐인데 이상한 흥분과 고양감이 들었다. 심지어 뒷구멍에서 애액이 고여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몸이 꼬였다.
파악!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 하비가 널려 있는 종이들을 거칠게 치웠다. 종이가 사방으로 팔랑대며 떨어졌다.
몸이 이상하다고 연신 중얼거린 하비가 테이블 위로 한 팔을 딛고 빅터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거대하고 견고한 탑이 무너지듯 하비의 몸이 빅터에게로 잔뜩 쏠리다가 우뚝 멈췄다.
“…….”
“…….”
고요한 녹색 눈을 하비가 마주 보았다. 잔인한 시선이었다. 그게 보기 싫어서, 하비는 반대편 팔을 길게 뻗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이 알파에게는 원망만 가득했다. 이토록 괴롭힘당하고 미움을 살 만한 일 따윈, 한 적이 없는데.
투두둑!
빅터의 단정한 목 아래 셔츠가 하비의 우악스런 힘에 뜯겨 나갔다. 하비가 손아귀 힘만으로 빅터의 셔츠를 뜯다 못해 그 위로 걸친 베스트를 잡아당겼다. 현재 그의 행동에는 이성이 한 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동공이 흐려진 밤색 눈을 들여다보면서, 빅터는 눈치챘다. 하비가 뱉는 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설마, 히트가 온 건가.’
효과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
하지만 빅터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하비가 한 팔로 테이블을 짚은 채 그의 상체를 거세게 끌어당겼다. 놀란 빅터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하비의 원망 섞인 저음이 닥쳤다.
“내가 그렇게 미우면……. 그렇게 밉고 싫으면 차라리 죽이면 되잖아.”
빅터는 충분히 힘으로 하비를 떨구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건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하비의 밤색 눈이 물결처럼 일그러지고, 입술은 온 힘을 다해 꽉 물고 있었다.
구음을 강요할 때조차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이토록 직설적인 감정 표출은 하비 스터스와 맞지 않았다. 괜찮은 척 고풍스러운 가면 속에 원망을 가려야 그다웠다.
슈미즈에 가려진 하비의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묘한 얼굴로, 빅터는 멱살을 잡힌 채 이어지는 하비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 재무 회계사처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게 너한테 제일 쉬운데. 내겐 왜 그러지 않지?”
하비가 문득 일그러진 얼굴로 피식거렸다. 빅터가 한 말들이 생각나서였다.
“아아……. 그랬지. 나는 오래 두고 괴롭힐 생각이니까.”
지금의 하비는 취한 사람처럼 가감 없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빅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럼 이게 첫 히트가 되는 건가?’
보통 첫 히트가 오면 빠른 시간 안에 거의 이성을 잃게 마련인데, 하비는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버티는 듯했다.
생각을 끝낸 빅터가 괴로워하는 하비를 마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빅터의 녹색 눈이 말갛게 반들거렸다.
“말해두지만, 그놈은 죽이지 않았어.”
놀란 듯 눈을 치켜뜬 하비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 없다. 빅터 베르텐이 중요한 증거가 될 사람을 순순히 남겨뒀을 리가 없다. 그는 몹시 철두철미한 성미니까. 하비는 생각한 루트를 이야기했다.
“그럼 먼 대륙에 노예로 팔아치웠나?”
“아니.”
“거짓말. 넌 항상 거짓말만 해. 분명 다른 수를 썼겠지.”
하비는 겨우 말을 마쳤다. 시야가 핑글핑글 돌아서 생각이 어려웠다. 온몸을 차근차근 잡아먹는 뜨거운 열기가 머릿속까지 잠식했다.
곧 근질거리는 뒷구멍에 뭔가를 박아넣고 싶다는 욕구만이 온통 하비를 집어삼켰다. 엉덩이가 꿈틀대면서 없는 것을 허전해하며 자꾸만 수축했다. 미끈거리는 액이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여기선 안 돼…….’
이성을 다잡아보았지만 이미 틀렸다. 헉헉대던 하비의 눈에서 초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멱살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밑으로 떨어졌다. 하비는 아예 테이블 위로 길게 엎드려 괴로워했다. 배 속에 뭔가가 생긴 것 같았다. 그곳에 알파의 것을 쑤시고, 체액을 가득 붓고 싶었다.
“헉……. 허억…….”
하비는 그 생각이 미친 것 같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오로지 정념에만 매달렸다.
빅터는 테이블을 붙들고 괴로워하는 하비에게 상체를 숙였다. 귓가에 빅터의 입술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하비는 끊임없이 움찔거렸다. 발가락이 한꺼번에 곱아들고, 테이블 위를 긁고 있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부들거렸다.
하비의 온몸에 땀이 나서 젖은 얇은 슈미즈가 야하게 보였다. 적당히 발달한 전신 근육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빅터는 일부러 하비의 귓가를 입술로 배회하며 속삭였다.
“난 한 번도 경에게 거짓말한 적 없어.”
빅터가 하비의 뒤에 가서 섰다. 그리고 익숙하게 하의인 드로이즈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달아오른 하비의 귀를 살짝 물었다. 하비는 정신을 놓고 부르르 떨었다. 볼륨 있는 단단한 엉덩이 사이에 손가락을 몇 개 넣으니 벌써 홍수처럼 터진 액이 빅터를 반겼다.
“윽……!”
조금 만졌을 뿐인데 하비의 두터운 몸이 크게 떨렸다. 단풍처럼 울긋불긋 열기로 물든 붉은 몸이 점점 빅터를 향해 열렸다.
빅터는 애액으로 젖어가는 하비의 드로이즈를 벗기고, 하얀 슈미즈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가 정신없어 보이는 하비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씁쓸해 보였다. 빅터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만약 했다면 그건 너겠지.”
두꺼운 손가락을 굽혀 고리처럼 만든 빅터가 말과 동시에 손을 구멍 속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크읏! 으응……!”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하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벌린 입술로 신음을 쏟아냈다. 길게 경련을 일으키던 하비가 본능적으로 꿈틀대며 테이블을 기다시피 했다.
“어딜 가려고.”
꿈적대는 그 단단하고 긴 손을 빅터가 위에서 찍어 누르듯 잡았다. 반대편 손으로는 구멍을 끊임없이 쑤시고 희롱했다. 그럴수록 활짝 열린 하비의 뒷구멍이 벌름거리며 빅터의 손을 물었다.
“흐으…….”
하비의 도톰한 입술 옆으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너무 느껴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의 허리에서는 경련이 일고, 두툼한 허벅지에는 힘줄이 퍼렇게 돋았다.
쿨쩍! 쩌억!
하비의 구멍에서 나온 애액이 빅터의 손가락이 박힐 때마다 끈적대는 소리를 냈다. 미끈거리다 못해 손이 전부 젖을 정도로 나온 애액과 함께 하비의 페로몬이 진하게 흘러나왔다. 알파를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을 빼낸 빅터가 흥분한 페니스를 그의 엉덩이 사이로 비비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누르듯 잡고 있는 손 아래로 하비의 손이 연신 꿈틀댔다.
‘나도 주체가 안 될 정도인데, 다른 놈들은 완전히 맛 갔겠어.’
빅터는 알파인 사용인들은 전부 아예 집 밖으로 보내놓은 터였다. 아니었으면 진작 정신 줄을 놓은 놈들이 방까지 침범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나마 우성 알파에 혹독한 첫 러트 신고식을 치른 빅터니까 이 엄청난 페로몬 홍수 속에서도 이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때보다야 나을지도.’
해적들 사이에서 잔인한 첫 러트를 치렀던 기억이 빅터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피비린내가 코끝에서 진동했다.
그 피 냄새 나는 고통을 잊으려는 듯 빅터가 하비의 안으로 페니스를 강하게 밀어 넣었다. 어서 넣어달라는 것처럼 떨리던 엉덩이 사이로 커질 대로 커진 빅터의 것이 박혀들었다. 구멍 끝까지 단숨에 처박자 속에 있던 애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푹!
동시에 하비의 페니스가 테이블 위에서 왈칵 정액을 쏟아냈다. 한 번에 간 것이다.
“끕…….”
하비가 소리 없이 자지러지며 턱을 번쩍 치켜들었다. 차마 말도 못 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등에 힘이 쏠린 탓에 하비의 단단한 허리 위로 굵은 선 몇 개가 융기했다. 옷 위로 굴곡을 이루는 그것을 빅터가 흥분한 눈빛으로 쓸어보았다.
한계까지 몰려 경련을 일으키던 하비가 길게 늘어지려 했지만 빅터는 사정 봐주지 않았다. 하비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꽉 얽어맨 빅터가 등 뒤에서 낮게 말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뻗으면 어떡하나.”
녹색 눈동자를 접은 채 천천히 페니스를 뺀 빅터가 다시 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열이 오른 구멍에 크고 단단한 빅터의 페니스가 꽉꽉 메우듯 들어찼다.
퍽!
배 안에 빅터의 것이 가득 차 숨이 막혔다. 하비가 젖은 숨을 삼켰다. 뒤에서 시작된 어떤 끔찍한 감각이 온몸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더 원하게 되는, 너무 느껴서 고통스럽기까지 한 쾌감이었다. 작은 열기가 자글자글 끓어서 거대한 용암이 되어 하비를 집어삼켰다. 사정한 지 얼마 안 되어 하비의 중심부는 다시 팽팽해졌다.
‘또…….’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드라이 오르가슴이 하비를 휘감았다. 그가 숨도 못 쉬고 두 번째 절정에 달하는 순간, 빅터는 금방 페니스를 뒤로 물렸다.
“흐으읏……!”
구멍 안을 긁으며 나가는 감각에 하비가 비명을 삼키며 빅터에게 잡힌 손을 밀었다. 하지만 빅터가 누르는 힘이 더 강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비의 뒷구멍이 알파의 페니스를 못 나가게 하려는 듯 서둘러 빅터의 것을 조였지만 이미 늦었다.
빅터는 꺼낸 페니스를 하비의 뒷구멍 주변부로 뭉근하게 비볐다.
“더 해줬으면 좋겠어?”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하비가 움찔움찔 허리 아래를 움찔움찔 떨었다. 빅터가 벗겨놔서 허벅지에 걸쳐진 얇은 속옷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하비의 허벅지가 워낙 부피가 있어서 드로이즈가 찢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빅터는 하비의 등에 턱을 가볍게 얹고 장난치듯 말했다.
“난 참을 수 있는데. 이걸로 끝낼까?”
아직 부족했다. 이걸로는 안 된다. 하비가 엎드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이성이 배제된 고갯짓이었다. 빅터도 알고 있었지만 더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자 하비는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안 돼. 더……. 부족해…….”
빅터가 하비의 애원하는 어조에 미소 지었다. 만족스러움을 입술 아래 감추고 빅터는 관대한 알파인 양 하비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 뒤론 말이 없었다. 빅터는 충실하게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오메가를 쑤셔주었다. 양손은 하비의 허리를 꽉 붙들고 구멍 안을 때리듯 박았다.
푸욱! 퍽!
하비는 테이블 위로 머리를 박고 미친 듯이 흔들렸다. 땀에 젖은 밤색 머리칼이 테이블에 쓸려 가닥가닥 흩어졌다. 흉포하게 뒤를 파고드는 알파의 커다란 성기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낮은 신음을 뱉었다.
“힉! 으응……! 아!, 흣!”
테이블 하단에 하비의 굵은 허벅지가 연신 충돌해 엄청난 충격음을 냈다.
쿵! 쿵! 쾅!
나중에는 부술 것처럼 큰 소리가 났다. 하비의 눈 밑으로 땀이 흘러내리고, 날렵하고 단단한 턱에 눈물처럼 맺혔다.
쩍! 쯔억!
봉긋하게 솟은 하비의 엉덩이는 온통 애액으로 번들거려서 빅터의 다리가 닿을 때마다 기묘한 화음을 냈다. 튼튼하고 굵은 다리와 하얀 엉덩이 사이로 하얀 액이 여러 가닥으로 길게 늘어났다가 붙었다.
“윽……! 으앗……. 헉……!”
하비가 흔들리며 테이블 위를 머리로 마구 쓸었다. 그의 머리가 테이블에 닿은 채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흘러내린 땀이 어지러이 물 흔적을 남겼다. 하비는 이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어서 알파의 정액을 몸 안으로 쏟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본능밖에 남지 않았다.
“좋아, 더……. 더 해, 박아줘…….”
하비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뻗었다. 빅터가 그 손을 꽉 잡고 뒤로 휙 당겼다. 그 덕에 구멍 안쪽으로 빅터의 것이 더 깊이 박혀서 하비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짧게 질렀다.
“윽!”
얼굴이 허공으로 반쯤 뜨자 하비의 단아한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드러난 얼굴은 붉게 물든 데다 미친 듯이 색정적이었다. 밤색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빅터는 난잡하게 흐트러진 하비의 모습을 비웃었다. 이제야 하비 스터스의 거짓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빅터는 헐떡이는 그를 침대 쪽으로 끌고 가 던졌다. 그러곤 테이블 아래 서랍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빛바랜 편지를 꺼냈다.
빅터는 침대에 쓰러져 힘들어하는 하비를 담담하게 내려다보며 답답한 손목의 커프스를 밀어 올렸다.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기억나?”
하비는 말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은 빅터가 낡은 편지를 둘둘 말아서 그 끝으로 꼿꼿하게 선 하비의 페니스를 긁어 내렸다.
“흐앗……!”
그것만으로도 하비는 허리를 높게 띄웠다. 동시에 그의 엉덩이에서 액이 터져 나오고, 핏줄 가득 선 허벅지에 간신히 걸려 있던 바지도 기어이 찢어졌다.
빅터는 그에게서 나오는 엄청난 페로몬에 머리가 어질거릴 지경이었다. 첫 히트라서 더할지도 모르지만.
‘제기랄…….’
원래 알파였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페로몬은 강렬했다. 알파 수사슴의 페로몬을 뿌려봐도 별 소용 없을 정도였다. 빅터의 녹색 눈이 길게 늘어났다.
‘약의 부작용이 이런 건가.’
땀으로 너무 젖어서 찰싹 붙은 슈미즈 위로 유륜이 흥분한 채 바짝 솟아 있었다. 너무 자극적이었다.
빅터가 마른침을 삼키며 편지를 우선 이불 위에 올려두었다. 투명해진 슈미즈를 뚫을 것처럼 솟아 있는 젖꼭지 위를 빅터가 혀로 핥자 하비가 높은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선명한 근육 덩어리로 이루어진 판판한 가슴을 빅터가 손으로 터질 듯 쥐었다.
“너무 야한데. 스터스 경은 이런 몸을 대체 어떻게 참아온 거지? 놀랍군.”
찢어진 드로이즈를 옆으로 집어 던진 빅터가 참을 수 없어 하비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벌름거리는 그 붉은 속살 안으로 다시 제 것을 밀어 넣었다.
하비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낮은 교성이 울려 퍼졌다. 쉰 목소리까지 빈틈없이 야했다.
이번에도 단 한 번 깊게 쑤셨을 뿐인데 하비가 부르르 떨더니 사정했다. 빳빳한 그의 성기에서 묽어진 정액이 흐르고, 구멍과 이어진 빅터의 페니스 밑동에는 밀려 나온 애액이 들러붙었다.
빅터가 페니스를 더 깊이 쑤셔 넣으며 집어 든 편지를 하비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곳곳에 물에 번진 검은 글씨가 보였다. 수려하고 우아한 필체였다.
그 필체를 보자 쾌감에 절어 거의 정신을 놓은 것 같던 하비의 밤색 눈에 잠시 빛이 돌아왔다.
빅터가 편지를 더 가까이 들이대며 음산하게 말했다.
“이게 스터스 경의 거짓말이지.”
빅터는 다시 만난 하비에게 몇 번이고 묻고 싶었다. 이 편지는 대체 뭐냐고. 이 빌어먹을 거짓말은 대체 뭐였냐고.
몇 번이나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치명적인 거짓말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런데 하비가 생리적인 눈물을 눈에 가득 단 채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쓰지 않았어. 너한테 편지 같은 건 쓴 적도 없다고…….”
빅터는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또 거짓말을 하는 건가. 분노마저 치밀었다.
“……뭐? 해적 인질 사태 때, 네가 사람들 손에 이런 걸 쥐여 보냈잖아. 우리더러 희망을 가지라고, 네 그 같잖은 세 치 혀로……!”
몇 번이나 다그쳤지만 하비는 쾌감에 떨 뿐 끝까지 그 편지는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빅터가 괴롭힘의 강도를 높이면서까지 물어봤지만 아니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상하군.’
아무리 첫 히트로 이성이 없는 상태라고는 하나 자신의 필체를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저 상태를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순간 하비의 뒷구멍이 수축해서 빅터의 것을 꽉 쥐어짰다. 빅터가 녹색 눈동자를 찌푸렸다. 편지를 놓칠 정도로 강렬한 절정이었다.
“윽……!”
많이 참았던 만큼 사정은 길었다. 빅터가 놓친 편지가 하비의 얼굴로 너울너울 떨어졌다.
“크읏!”
빅터는 하비의 뒷구멍 속으로 정액을 넘치듯 쏟아부었다. 넓게 벌려진 하비의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하비가 편지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빅터가 몇 번이나 협박했던 것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서였다.
지금 그는 신약으로 오메가가 되었다고 했다. 이 상태에서 정액을 받으면 어찌 될지는 하비도 잘 알고 있었다.
“임신하면…… 안 돼…….”
그런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고, 아직도 모자랐다.
하비가 이불을 움켜쥐면서 스스로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빅터가 내미는 편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 고양감을 더 느끼고, 알파의 정액을 더 쥐어짜고 싶었다.
빅터는 물끄러미 그런 하비를 내려다보았다. 긴 사정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하비의 히트는 건재했다. 편지가 제 얼굴을 덮은 줄도 모르고 헉헉대고 있는 꼴을 보니 스터스가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빅터는 비틀어진 입술로 하비를 가린 편지를 주워 들었다.
‘시작은 분명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날 자선 사업 연회장에서, 어린 빅터가 생각해 낸 장난은 바로 하비 스터스를 주의를 끄는 것이었다. 그 앞을 몇 번이나 지나쳤지만 별 반응도 없는 것이 심술이 났다.
어떻게 해야 저 무표정하고 예쁜 인형의 얼굴에 틈이 생길까. 그렇게 생각해 낸 것이 아픈 척 엄살을 부리는 것이었다. 과연 저 귀족 도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놀라서 허둥지둥거릴까, 아니면 무서워서 도망갈까.
“갑자기 배, 배가 아파……!”
빅터는 우스꽝스럽게 어설픈 흉내를 내며 하비 앞에서 쓰러졌다. 미친 척 광대처럼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린 빅터는 반쯤 발작하는 미치광이로 보였다.
그는 하비가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연기에 속아 넘어가겠냐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이 어이없고, 어린 마음에 재밌기도 해서 속으로 계속 웃었다. 베르텐가에서도 유달리 통제 불능의 악동으로 꼽히던 빅터였다.
그러나 그 순간 어린 빅터는 보았다. 어떤 것에도 무감각해 보이던 하비가 사색이 되어 달려오는 것을.
어린 하비는 쓰러져 있는 빅터를 살피면서 크게 소리 높였다. 인형처럼 예쁜 어린아이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단단한 목소리였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빨리 의사를 불러주세요!”
심지어 하비는 작지만 야무진 손으로 꼬물거리며 빅터를 안아 들더니 제 이마를 빅터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빅터는 심장이 멎는다는 게 이런 것임을 그때 알았다. 하비의 이마가 제 것에 닿는 순간, 묘한 향이 느껴졌다. 아직 알파와 오메가, 베타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어린 나이임에도 하비는 특유의 향이 있었다. 귀족들이 뿌리는 향수 냄새인가 생각도 했다.
‘기분 좋은 향…….’
나름대로 응급 처치를 끝낸 건지 하비는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차마 눈도 뜨지 못하고 꽉 감고 있는 빅터를 작은 두 팔로 감싸 안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참아. 이렇게 있으면 체온이 올라갈 테니까.”
빅터는 하비의 순간적인 대처와 의연한 모습에 놀란 것도 있지만, 더 놀란 것이 있었다.
이 차가워 보이는 인형 소년의 가슴은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더군다나 하비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쿵쿵거리는 소릴 들으니 그도 놀란 것이 분명한데 쓰러진 빅터부터 챙긴 것이다.
‘이건 뭐지…….’
빅터는 제 가슴도 같이 뛰는 것에 의아해했다.
쿵, 쿵, 쿵.
힘차게 요동치는 가슴속의 무엇이 어린 빅터를 흥분케 했다. 맥박, 심장 박동, 숨소리, 적어도 이런 건 하비와 자신이 다를 바 없었다. 출신과 성분 따위는 이 소년에게 아무런 가로막이 되지 못하는 듯했다.
어린 빅터는 이런 귀공자가 자신을 위해 놀라고, 열의를 다해 챙긴다는 것에 묘한 감동과 우쭐함마저 들었다. 그런 만큼 그를 속이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장난이 너무 과했다.
빅터가 움찔거릴수록 하비는 더욱 그를 꽉 껴안았다. 어린 하비는 철통같이 빅터의 곁을 지키며 의사가 올 때까지 절대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하비에게 다칠지도 모른다며 자신이 대신 봐주겠다는 한 귀족 어른의 손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전 괜찮아요. 의사가 오면 보여 드릴 겁니다.”
빅터는 하비의 이런 행동들이 인상적이었다. 별것 아닌데,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장난친 거라는 걸 알 텐데 이렇게 진지하게 곁을 지켜주다니.
게다가 그는 스터스가의 강력한 후계자 아닌가. 사업 몇 개로 졸부 귀족이 된 베르텐가와는 시작부터 달랐다.
그런데도 하비는 빅터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걸 무서워서 모른 척하거나 멀찍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보호해 주었다.
하비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의사는 꾀병인 것을 알고 솔직히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을 부라리고 있는 레토 베르텐을 보고는 눈치 빠르게 어린 빅터를 쉬어야겠다며 내보내 주었다.
“어르신께 혼나기 전에 어서 가거라. 아프다고 해줄게.”
하비는 빅터가 장소를 떠나는 그때까지 걱정 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 따뜻함이 봄날의 햇살처럼 뚜렷하게 빅터의 기억을 차지했다. 하비의 품 안은 넘치게 아늑하고, 자상했다.
그 이후로 연회장이나 파티 같은 곳에 끌려갈 때마다 하비 스터스가 번번이 눈에 들어왔다.
빅터는 언제부턴가 고약한 레토 베르텐의 나무람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파티에 가면 하비가 있으니까.
물론 하비는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졌기에 상관없었다. 더욱이 부모님께서 심하게 꾸지람한 데다가 다시는 스터스가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신신당부까지 하신 탓에 하비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스터스가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된 빅터는, 그래서 해적에게 잡혔을 때도 굳게 믿었다. 스터스가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여기서 나가면 그날 꾀병으로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어린 빅터는 거친 해적들이 우글거리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금방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자애로운 밤색 머리의 라힌 스터스 의원과 꾀병 부리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준 소년, 하비 스터스가 해방시켜 줄 것이다.
빅터는 해방된 인질을 데리러 온 자들이 몰래 쥐여 준 하비 스터스의 편지를 받고는 더욱 빅터는 희망에 부풀었다. 간결하고 단정한 글씨체가 하비와 몹시 닮아 있었다. 그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간악한 해적들은 당신들의 숭고한 생명을 함부로 앗아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고 신이 구해줄 겁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굳은 신념을 가지면 반드시 살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당시 집에 돈이 없어 빅터와 함께 마지막까지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모두 스터스가의 도련님을 칭송했다. 역시 스터스가의 훌륭한 사람이라면서.
그래서 어린 빅터는 스터스가가 자신을 구해줄 거라 확신했다. 라힌 스터스도 비록 국가의 돈을 해적 같은 테러 단체에게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몰래 사람들을 보내 도와줄 거라는 망상도 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 온전히 혼자 힘으로 해적들 틈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빅터는 지금도, 과거의 악몽에서 살아남기 위한 복수를 실현 중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왜 더 엉망이 되는 건지.’
빅터는 여전히 페니스를 구멍에서 빼지 않은 채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하비가 자의로 벌린 다리를 한계까지 밀고, 그의 뒷구멍에 쑤셔 박고, 원하는 대로 정액을 쏟았다.
관계에 여전히 키스는 없었다. 하비는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화염 속에 사로잡혀 빅터와 첫 히트 사이클을 보냈다.
모두에게 잔인한 밤이었다.
* * *
하비 스터스 경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괴소문이 퍼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의 휴가가 너무 길어졌다.
스터스가에서는 하비가 최근 회담 준비로 인한 과로로 병이 나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요양에만 힘쓰기로 했다며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자 하비 스터스도 제 아버지를 따라 갈 때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귀족 청년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돌았다.
스터스 가문 사람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비의 긴 요양으로 스터스 가문에서 뛰어난 인재들만 나온 것은 교차로의 악마와 거래를 한 것 때문이 아니냐는 소문도 다시금 회자되었다. 악마와의 거래로 가문 사람들이 재능을 얻은 대신 수명을 내준 것이라고 말이다.
“넌 그걸 믿니?”
“아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커피하우스에 남장을 하고 들어온 평민 여자애 둘이 수다를 떨었다. 귀족 신분인 여자들은 커피하우스 출입이 자유롭지만 평민에 한해서는 제한되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고 똑똑한 이 둘은 남장을 하고 커피하우스를 드나들며 세상일을 접하곤 했다.
밝은 갈색 머리의 소녀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짜 콧수염을 만지면서 재잘댔다.
“사람들이 그딴 헛소문을 믿을 만하지. 스터스가 사람들 수명이 정말로 짧잖아. 안 그래? 라힌 스터스 의원도 아직 창창한 나이에 시름시름 앓다가 금방 돌아가셨고.”
옆에서 자꾸만 떨어지는 가짜 턱수염을 보정하던 빨간 머리 소녀가 대꾸했다.
“얘! 너무 갔다. 그건 해적 사건 직후였잖아. 자진 사퇴까지 하실 정도로 괴로워하신 일이었어. 분명 그분 성격에 혼자 다 짊어지시다가 병을 얻으신 거겠지.”
둘의 옆에서 묵묵히 솟아 있던 신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지면 뒤로 금발에 녹색 눈의 이목구비가 선명한 미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빅터의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빅터가 물끄러미 보고 있자 시선을 알아챈 빨간 머리 소녀가 흠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빅터의 정체를 알아본 그녀가 새하얗게 질려 친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헉?”
“의원님이야.”
그들은 빅터가 자신들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 사이로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청년들과 청록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은 긴장한 채 빅터의 눈치를 살폈다. 커피하우스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인 걸 들켰으니 바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당당했다. 붉은 머리 소녀가 콧수염을 더 단단히 붙였고, 밝은 갈색 머리 소녀는 샐쭉하게 빅터를 노려보았다.
“좀스럽게 고자질할 건 아니죠?”
“남장한 게 죄도 아니고. 그럴 거면 애초에 우릴 들여보내 주든가요!”
조용하게 쏘아붙이는 당돌한 그들의 태도에 빅터가 웃었다.
“설마. 그런 좀스러운 사내는 아닙니다만, 두 분의 말에 관심이 좀 생겨서 말입니다.”
빅터를 노려본 그녀가 자신의 붉은 머리 친구를 돌아보더니 안심하라며 수신호를 주었다.
“어떤 말이요? 스터스 가문 사람 관련이요?”
빅터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차로의 악마 부분은 별로 관심이 안 가지만, 스터스가 사람들의 수명이 짧다는 부분에는 호기심이 가는데.”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모습에 두 소녀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빅터 베르텐 경은 역시 라이벌인 하비 스터스 경에게 관심이 지대한 모양이었다.
“스터스가 사람들 모두 일 중독에 너무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교육받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맞아요. 저흰 악마 같은 건 안 믿어요. 그딴 게 어딨어. 다 미신이지.”
똑 부러지는 이성적인 대답에 빅터가 의외라는 듯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똑똑한 아가씨들이군. 내 밑으로 들이고 싶을 정돈데.”
“의원님 밑에 들어가면 뭔가 다른가요?”
빅터가 그들에게 더욱 흥미를 가진 순간이었다. 좋은 기회라고 덥석 물지 않고 오히려 조건을 역으로 따진다는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니까.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빅터는 그런 것에 민감했다. 그의 투자에는 ‘좋은 인재를 보는 안목’도 활용되었으니까.
“직접 키운 정보꾼들이 좀 있는데, 그들과 함께 일하면 훨씬 많이 배울 겁니다. 다만 바다에서 자란 놈들이라 거칠어서, 그건 감안해야 하고.”
두 소녀가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안이 괜찮아 보이면 수락하고. 생각할 시간을 좀 더 주겠습니다.”
그들은 빅터가 고압적인 귀족 남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귀족 대 평민이 아닌 사람 대 사람, 동등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잠시 숙덕대던 두 사람은 빅터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둘도 없는 기회라고 여긴 듯했다.
“그런 것 따위, 각오했어요.”
“우리 아빠 영업장에서도 날 이길 남자는 아무도 없다고요.”
빅터는 갈색 머리 소녀의 제법 매서워 보이는 눈빛과 빨간 머리 소녀의 단단한 체형을 유심히 보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하우스를 들여온 건 나지만 문턱을 만든 건 이 사회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대신 이번 일만 해주면 특별히 허가증도 드리도록 하죠.”
빅터가 직접 만들어주는 골드 카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과였다. 외국인들을 위해 빅터가 고안한 것으로, 어지간한 귀족조차 받기 힘든 카드였으므로 두 사람의 눈이 반짝거렸다.
“와!”
“그럼 저희야 감사하죠.”
눈에 띄게 좋아하는 둘을 빅터가 흐뭇하게 보았다.
그때 빨간 머리 소녀가 불쑥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서, 의원님은 왜 스터스가 사람들의 수명에 관심을 갖는 거예요?”
빅터는 다정하게, 하지만 위험스레 녹색 눈을 휘었다. 하얀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빅터가 조용히 일렀다.
“좋은 정보꾼은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왠지 모를 한기가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위험한 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직감한 그녀가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빅터는 다시 부드럽게 표정을 바꾸어 달래듯 그녀에게 말했다.
“좀 더 숙고해 보고 내일 같은 시각에 이 커피하우스로 오면 됩니다. 부모님께도 잘 말씀드리고.”
고개를 끄덕인 빨간 머리 소녀가 친구를 데리고 조용히 커피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문을 나서기 전 뒤돌아 빅터를 마주 보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밑으로 들어가 정보꾼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빅터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는 피식 웃었다.
“악마나 귀신을 믿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자질이지.”
해적선에서 신을 버린 그 순간부터, 빅터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합리적인 생각,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오고 있다. 신분과 성별은 중요치 않을 때가 언젠가 올 것이다. 빅터는 그리 보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 말고, 사람의 생각과 이성의 힘을 믿었다.
그러나 그런 빅터라도 하비 스터스의 편지는 도무지 미스터리였다.
‘분명 하비 스터스의 필체였는데 그가 쓰지 않았다고? 그럼 누가 쓴 거지?’
워낙 정신과 경황이 없던 때에 다그쳤던 것이라 제대로 못 봤을 수도 있지만, 그 눈빛은 분명 이지를 갖고 있었다. 하비 스터스는 필체를 정확히 인식했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고, 진솔했다.
빅터의 긴 손가락이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그사이 그를 조용히 보좌하던 음침한 쌍둥이 사내 중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베타인 쪽이었다.
“주인님, 슬슬 시간이 되었습니다.”
“벌써 그리되었나? 알았다.”
빅터가 오른쪽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복잡한 기계 속에서 두 개의 바늘이 시간을 알리려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숨 가쁘게 일정에 쫓기는 게 꼭 하비 스터스를 보는 기분이었다.
빅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기저기 심어놓은 연락책들로부터 들은 것들이 하나하나 떠올라서였다.
‘고작 한 명이 몸져누웠다고 징징대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동안 하비 스터스 경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책임을 져왔는지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총괄 외교관은 계속 초조해 보이고, 밑에서 보좌하던 사람들이 죽어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무능한 놈들.’
빅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시곗바늘을 무심하게 보더니 다시 주머니 속으로 시계를 쑤셔 넣었다.
“시계 장인들과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겠지?”
“예.”
시계 장인은 단순히 시계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교한 손기술이 필요한 여러 분야에 기술자로서 활용될 여지가 있었다. 빅터는 그 사실에 집중했다.
“좋은 조건으로 잘 붙들어놔. 괜찮은 거래처니까. 잠재력도 크고.”
“알겠습니다.”
돌아서려던 빅터가 반대편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내에게 물었다. 알파이자 마부 역할을 곧잘 하는 자였다.
“스터스 경의 상태는?”
“아직 의사에게 연락이 없습니다.”
“그런가.”
빅터는 저들끼리 모여 떠들고 있는 한 무리의 귀족 청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쪽으로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빅터가 커피하우스로 들어온 직후 합석을 계속 사양해서 선뜻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빅터는 그들을 향해 경멸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귀족들이란 언제나 그에게 따분하고 하품을 유발하는 존재였다. 하비 스터스만 제외하고 말이다.
‘보고대로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어야 할 텐데 말이지.’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그 남자는 빅터에게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것 외에는 뒤로 털 것도 없었다. 빈틈이 한 점도 없는 무서운 사내였다.
빅터가 조용히 경고했다.
“잘 감시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의사를 말하는지 스터스 경을 일컫는지 몰라 베타인 사용인이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하비라고 말하기엔 그는 지금 병중이었다.
“어느 쪽 말입니까?”
빅터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비 스터스.”
눈치껏 담뱃불을 붙여 두 손으로 공손히 주인에게 건넨 알파 사용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스터스 경은 꼼짝없이 누워 지내고 있을 텐데, 사고 칠 기력이나 있겠습니까?”
빅터는 긴 담뱃대를 잡고 연기를 내뿜었다. 녹색 눈이 길게 늘어지며 차갑게 웃었다.
“넌 스터스 경을 너무 얕잡아 봐. 그러다 큰코다칠걸.”
여태 하비로부터 제대로 된 반격 하나 없었는데 주인은 뭘 그리 경계하는지 모르겠다. 알파와 베타 쌍둥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빅터의 사용인들 모두는 그들의 주인이 지나치게 하비를 높게 친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하비 스터스도 다른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자인데 말이다.
그러나 빅터의 생각은 여전히 사용인들과 다른 궤를 달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빅터는 하비가 완전히 의식을 놓기 전 기어이 전 의원의 재무 회계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낸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쾌감에 덜덜 떨면서도 하비는 집요했다. 처음 얼마간은 정말로 정신 못 차리고 오메가의 본능에 충실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그의 밤색 눈동자가 점차 뚜렷해졌다.
‘그 사람, 어디 있냐고.’
‘어디 있어……. 말해.
빅터의 정액을 뒷구멍에 수없이 받고, 몇 번일지 모를 사정을 하면서도 그는 끝까지 재무 회계사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알아냈다. 오죽하면 빅터가 두 손 두 발 들었을 정도였다.
놀라운 정신력이었다. 하비 스터스가 그저 편하게 살아온 귀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뭔가 있어.’
빅터는 찜찜한 마음을 담배로 달랬다. 그의 뚜렷한 입매가 일그러졌다. 입술 사이로 젖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괜히 말해줬나.’
이제 와서 하비가 알아낸들 달라질 것은 전혀 없지만.
생각난 김에 빅터는 다른 곳에 들르기에 앞서 하비에게 먼저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 하비에게 붙인 감시인은 뛰어난 실력에 비해 성미가 급하고 불같았다. 게다가 알파다. 그런데 하비는 현재 히트 사이클까지 온 오메가였다. 아직 원래대로 되돌리는 약을 쓰지 않아서였다. 빅터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스타 그 녀석, 또 사고 치지 말아야 할 텐데.’
그 시각, 하비의 집에선 조용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최근 하비가 혹여 정체를 들킬까 베타인 사용인만 남겨두어서 현재 그의 저택에는 알파나 오메가 형질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알파인 사용인 하나가 그의 저택을 제집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에 짧은 까만 머리, 파란 눈에 행동이 재빠른 알파 여자였다. 빅터가 보낸 사용인이었다.
너른 저택 안을 들쑤시고 다니던 그녀는 코를 개처럼 킁킁댔다.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났다. 사용인들의 식사 시간도 아닌데 말이다.
“이상하네. 방금 그놈이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
생각하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입에서 험악한 욕설도 함께 튀어나왔다.
“이 음험한 쥐새끼!”
그녀는 파란 눈을 번뜩이더니 바로 뒤돌아 하비의 침실까지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걸어갔다. 스터스가의 사용인 하나를 기절시키고 강제로 뺏은 옷을 입고 있어 들키지는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며 신속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지? 누가 저택에 들어온 건가? 내가 언제 놓친 거지?”
음식 냄새는 하비의 방 근처에서 났다. 심지어 물밑 작업을 하는 것처럼 조용히 분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이상한데.’
사용인이 몇 없어 돌아다니기는 수월했다. 실제 잠입해 보니, 스터스가의 겉으로 보이는 으리으리한 모습은 허상이었다. 스터스가는 재력이 형편없었고, 사용인도 몇 없었다.
한편, 수상한 자가 돌아다니는 상황 중에도, 하비의 침대에는 체격 좋은 밤색 머리칼의 사내가 등을 보인 채 곤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진짜 하비 스터스가 아니었다.
하비의 침실에는 옆방과 이어진 숨겨진 비밀 통로가 있었다. 고대부터 귀족의 저택에는 숨겨진 방이나 탈출로가 많았다.
안색이 많이 안 좋긴 했지만 하비는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아늑한 비밀 방에서 그가 피곤한 듯 의자에 앉고는 생소한 얼굴의 사내에게 물었다.
“잘 데리고 왔나?”
베타인 사내가 하비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꾸했다.
“네. 분부대로 했습죠.”
“잘했군. 수고비는 나중에 집사가 돌아오면 원하는 만큼 가져가. 이건 내 선금이고.”
오크로 만든 책상에 손을 댄 하비가 서랍에서 새끼손톱만 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사내에게 던졌다. 솜씨 좋게 보석을 받아 든 사내가 재빠르게 문밖으로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자마자 하비는 비틀대는 몸을 책상에 가누며 이마를 짚었다. 불같이 뜨거웠다. 빅터에게 하룻밤 내도록 괴롭힘당했더니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후우…….”
하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후들거리는 제 허벅지가 우스웠다. 굵고 단단한 영락없는 알파 사내의 것이었지만, 정신이 나간 채 이것으로 빅터의 허리를 감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짓거리였다.
하비가 자조 섞인 미소를 뱉으며 손으로 열이 오른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쨌든 정보는 얻어냈고, 시간은 벌었다.
‘베르텐 경이 날 우습게 봐서 차라리 다행이야.’
하비는 일찍이 스터스가의 저택에 빅터가 붙여둔 사람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들을 색출해 내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속이는 편이 더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눈을 피해 비슷한 체격에 같은 머리 색을 지닌 자를 매수해 자신인 것처럼 눕혀둔 것이었다.
하비의 페로몬을 잔뜩 묻힌 옷을 입혀두어 헷갈릴 여지도 주었다. 앞으로 종종 그 가짜와 바꿔치기하며 빅터가 붙여둔 눈을 속일 작정이었다.
하비가 문득 피식 웃었다.
‘그놈이 준 향수를 이럴 때 써먹다니.’
하비는 빅터가 준 알파 수사슴의 향수를 온몸에 뿌린 채 옆방에 있었다.
그는 곧 슬픈 눈으로 간신히 되찾아 온 남자를 훑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조심스럽게 데려온 남자가 구석 침대에 덜덜 떨며 앉아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하비가 구출해 온 남자는 라힌 스터스 전시의원의 사라졌던 재무 회계사였다. 하비는 빅터가 그의 부재를 빨리 알아차리지 않도록 구금하고 있던 시설에 돈도 꽤 쥐여 주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상당한 돈이 들었지만 하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늙은 재무 회계사의 몸이 많이 상한 것이 걱정이었다.
하비가 보다 못해 힘든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여긴 안전합니다. 더 이상 고생하실 필요 없으시고요.”
하비의 다정한 말투에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재무 회계사는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갑갑해 보이기도 해서 하비가 미안한 듯 서둘러 말을 붙였다. 비밀스러운 방이라 창문이 없는 것이 더 불안 요소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창문이 없는 방이라 죄송합니다. 상황이 좀 안 좋아서, 다 정리되면 좋은 방으로 드리겠습니다.”
그가 있던 곳은 한 낡은 시설이었다. 불온한 정치 사범, 혹은 미치광이들을 수용하는,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지고 더러운 장소였다.
간간이 복지 개념으로 선심 쓴 귀족의 돈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대외 과시용이었고 지원은 늘 얼마 가지 못했다. 그런 곳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안 봐도 훤했다.
‘가엾은 사람.’
하비는 라힌 스터스의 재무 회계사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접근했다.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성호를 그어주었다. 이 가련한 남자에게 신의 가호를.
하비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의 메마른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뼈밖에 없는 앙상한 몰골이었다. 그가 빅터에게서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얼마간의 대화 끝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시력도 잃고, 기억마저 잃어서 무사하셨던 거군요.”
빅터에게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한 건지 몸 전체가 끔찍한 흉터와 화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비는 입술을 짓씹고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잔인한 놈들.”
똑똑똑!
옆방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비와 옆방의 가짜 하비가 미리 짜둔 신호였다. 교대해야 한다는 긴급 신호였다.
하비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재무 회계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좀 쉬고 있으세요.”
얼른 돌아가 교체하자마자 하비의 방문을 두드리는 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단정적인 말투는 명령조에 가까웠다. 하비는 침대 속에 몸을 밀어 넣으며 의아해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집사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때문에 지금처럼 이런 몰상식한 방문 방식은 있을 수가 없는 예였다.
하비가 눈살을 찌푸리고 기다리라고 할 찰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의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총괄 외교관과 처음 보는 얼굴의 짧은 흑발의 사용인이었다.
하비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그나마 총괄 외교관은 이때쯤 올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총괄 외교관도 높은 신분의 귀족이라 막아설 자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근데 저긴 누구지? 새로 들어온 사용인인가?’
하비의 눈길이 옆으로 이동했다. 큰 키에 푸른 눈, 짧고 검은 머리, 스터스가 사용인들이 공통적으로 입는 하얀색의 통일된 복장을 입고 있었다.
하비가 속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 집사가 새로운 사용인을 들여왔다면 바로 보고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
재정난에 허덕이는 스터스가였고, 사용인을 더 들일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하비는 의심스러운 여자를 잠시 눈에 담았다. 혹여 집사가 정신이 없어 미리 알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고려했다. 그녀는 총괄 외교관의 왜소한 등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괄 외교관은 난감한 얼굴로 하비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그게 목적이 아닌 것이 분명했기에 대충 둘러댄 하비가 이유를 물었다.
“슬루인 제국과의 전쟁 배상금 문제 때문입니까? 금광 채굴권이나 현금, 혹은 사람 수 맞추는 건 시민을 노예로 대체하여 배상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비의 모국은 이미 전쟁을 치렀고, 패전했다. 외교관들이 힘을 합쳐 소야 회담 때 기를 쓰고 전쟁에 끼지 않으려 했던 건 이 때문이었다. 이미 막대한 전쟁 배상금이 걸려 있었고,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할 여력도 없었다.
사용인 차림을 한 흑발 머리 여자가 총괄 외교관에게 냉수를 가져다주었다. 받자마자 손에 든 것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가 답답한 듯 말했다.
“그것도 문제가 좀 있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어. 자네 머리를 좀 빌려야겠네.”
“무슨 문제 말입니까?”
하비가 들어온 다른 자에게 눈치를 주었다. 나가라는 암시였다. 그녀는 눈치 빠르게 하비의 눈짓을 알아듣고는 조용히 나갔다.
“듣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천천히…….”
총괄 외교관이 파리한 안색으로 대뜸 내뱉었다.
“젤가가 죽었어.”
하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 젤가? 가장 능력 있었던 자 아닙니까.”
하비는 당장에라도 일어날 것 같은 기세였다.
젤가는 주변국인 슬루인 제국에 심어놨던 첩자였다. 지금 외교관들은 다른 나라에 첩자를 심어두고 정보를 얻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젤가는 하비가 직접 골라낸 인재니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녔는데, 하필 발각된 것이다.
“게다가 젤가가 정보책으로 써먹었던 놈이 하필 황족이 꽁꽁 숨겨둔 애첩이었던 모양이야. 젤가가 간 무렵부터는 그 황족과 왕래하지 않아서 젤가도 전혀 몰랐다고 하더군. 젤가의 정보책이 최근 황족과 다시 교제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어.”
하비가 무거운 한숨을 지었다. 얼마나 철저히 숨겼으면 그 능력자가 몰랐을까. 안타까우면서도 등골이 선득했다. 제국의 황족에게까지 이야기가 흘러들어 갔다면 자칫 전쟁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암암리에 첩자를 보내는 것과 보낸 것을 들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으므로.
하비가 어두워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 안 하셔도 알 것 같군요. ”
“슬루인 제국 사람들은 고문에 능해. 젤가가 죽기 전에 다 불었을 거라고!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총괄 외교관은 안절부절못하며 하비가 누워 있는 침상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하비는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전체 그림을 그렸다. 아무리 봐도 지나친 걱정 같았다.
“아직 다른 자들에게는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젤가만 들통났을 뿐이지요. 서둘러 풀어놓은 ‘비둘기’들에게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해야겠습니다.”
비둘기는 첩자들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다른 첩자들의 안전을 걱정해 한시라도 빨리 귀환을 명해야겠다는 하비의 말에 총괄 외교관이 펄쩍 뛰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미 다 들켰을 거라고. 내 말 못 들었나? 지금 불러봐야 이중 첩자를 들이는 셈밖에 더 되겠나! 어차피 젤가가 털어놔서 다들 잡혔을 거야. 지독한 고문으로 이중 첩자 노릇을 하겠다는 다짐들을 다 받아놨겠고!”
흥분하는 그를 하비가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확인해 볼 테니 걱정 마시고…….”
“아냐. 그냥 거기서 죽게 놔두게. 그게 제일 나아.”
하비의 입가에 예의 바르게 떠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비가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총괄 외교관을 보면서 그의 의중을 되짚었다. 목소리가 극도로 낮아졌다.
“비둘기들 꼬리를 전부 자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이중 첩자를 본국에 들일 수는 없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재고해 주십시오. 다른 방법을 꼭 찾아보겠습니다.”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세.”
두 사람은 고집을 꺾지 않고 팽팽하게 대립했다. 이럴 땐 언제나 하비가 한 수 물렸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타국으로 건너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을 비둘기들의 처분이 결정될 것이니까.
“비둘기가 이중 첩자로 변질되었다면 제 선에서 반드시 처리할 테니, 믿어주십시오.”
“어허, 안 된다니까!”
“부탁드립니다, 외교관님.”
하비가 몇 번이나 간곡하게 말하자 굳건한 의지로 밀어붙이던 총괄 외교관도 흔들렸다. 고민하던 그가 희끗하고 관리 잘된 턱수염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야. 하여간 사람이 모질지 못하단 말이지. 할 땐 해야 하는데 말이야.”
총괄 외교관은 스터스가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가 마음이 약한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하비의 밤색 눈이 고요하게 일렁였다.
“그럼 다음 문제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총괄 외교관은 하비를 믿었다. 그의 믿음이 감사하면서도 하비는 마음이 못내 불편했다.
‘알고 있어.’
하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것을 총괄 외교관이 정면으로 찌른 것이다.
지나친 도덕적 결벽증.
스터스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명예와 품위를 지켜왔지만, 그것들이 간혹 발목을 잡을 때가 있었다. 책임지고 사퇴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굳이 자릴 내놓은 라힌 스터스 전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총괄 외교관의 말이 멀어졌다. 하비는 죽음의 냄새가 가장 가까웠던, 아버지의 마지막 날이 생생했다.
죽기 전 라힌 스터스는 하나뿐인 아들 하비의 팔을 잡고 가래 끓는 소리로 말했다. 오래 병치레를 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게 강한 악력이었다. 하비의 팔에 멍이 들 만큼.
‘아들아. 넌 다음 가주야. 스터스가는 거짓말하지 않아. 사람들의 신뢰를 저버리지도 않지. 넌 절대로! 깨끗해야 돼. 네 손은 언제나 이 스터스가 저택처럼 하얗단다. 알겠느냐?’
당시 하비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아버지의 손을 보았다. 병으로 바짝 마르고 앙상한 손은 원래의 하얀 피부 결을 잃고 갈색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하비에겐 이질적이고, 낯선 모습이었다.
‘그날의 아버지는 누구였는지.’
심란한 마음을 감춘 하비와 얼마간 외교 관련 사안들을 이야기하던 총괄 외교관이 나가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낯선 흑발 머리 여자가 바로 들어왔다. 처음 문 앞에서 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비의 허락은 받지 않은 채였다.
하비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툴툴대며 입을 열었다.
“어휴! 쫑알쫑알. 하여간 시끄럽고 멍청한 귀족 놈들.”
귀를 터는 시늉을 하던 그녀가 곧 위험스레 웃더니 하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비가 반사적으로 이불 밑에서 작은 휴대용 단검을 꺼내 쥐었다. 입술을 깨문 하비는 어렵지 않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끈질기게 괴롭히다 못해 이제는 완전히 보내 버리려는 것인가.
하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지? 베르텐 경의 끄나풀인가?”
그녀가 모자를 멀리 집어 던지고는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감탄의 의미였다.
“주인님 말대로 확실히 여타 귀족과는 좀 다르긴 해. 반사 신경이 좋아. 그래 봤자-”
깡!
여자가 숨기고 있던 반대편 손에서 다른 단검이 날아와 하비의 검을 멀리 튕겨냈다. 두 개의 단검이 얽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람을 직접 썰면서 얻은 기술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비는 도망치지 않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만 했다. 그 무기질적인 눈빛에 그녀는 거북함마저 들었다.
‘곧 죽어도 고매한 귀족이라 이건가? 재수 없게!’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 칼끝을 하비의 목에 겨누었다. 금방이라도 닿는 것을 베어낼 것 같은 날카로운 날로 하비의 목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살려달라는 애원은 전혀 없었다.
‘뭐야, 이건.’
이쯤 되자 그녀는 오기가 생겼다. 저 희멀겋고 뻣뻣한 얼굴이 목숨을 구걸하며 애원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 어떤 귀족도 이쯤 되면 눈물 한 방울 정도는 눈가에 달아줬는데.
‘어?’
그러다 그녀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하비의 페로몬에 흠칫했다. 알파 수사슴 향수의 효력이 다해 점점 오메가 페로몬이 강해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페로몬이었다.
‘어떻게 이런 향이 나지? 알파였던 놈이었는데?’
손가락이 부들거릴 정도로 맛있는 페로몬 향이었다. 알파지만 우성인 빅터에 비해 인내심이 적은 그녀였다. 하지만 주인의 명을 떠올리며 억지로 참았다.
“아무래도 주인님은 당신이 영악한 쥐새끼인 걸 다 알고 날 붙여둔 모양이야.”
하비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딱히 반항하려 하지도 않고, 턱을 치켜든 채로 되묻기까지 했다.
“아직 날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은 건가?”
“당연하지. 우리 주인님이 당신을 괴롭히는 걸 얼마나 기대했는데. 첫 히트는 주인님이 혼자 다 먹었지만 난 다음 걸 기다리고 있어. 혹시 알아? 우리한테도 돌려주실지.”
히트 사이클이란 말이 웃긴지 그녀가 계속 피식거렸다. 칼끝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갔고, 자연스럽게 하비의 턱도 위로 솟구쳤다. 높은 콧대 위의 밤색 눈동자가 향하는 시선도 천장으로 올라갔다.
칼을 천천히 목울대로 내리면서 그녀가 매혹적으로 웃었다. 흥분한 알파의 생식기가 이것을 취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굳이 알파인 날 붙여둔 건 알아서 취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더 몰아붙이라는 뜻?’
그녀가 빅터의 의도를 마음대로 해석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참아야 하는데, 알파의 페로몬이 날뛰었다. 하비가 이를 눈치채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러트가 곧인 건가? 페로몬 갈무리도 안 되는 걸 보니 아직 애송이군.”
그녀의 짙은 눈썹이 휙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마디도 지지 않는 하비가 몹시 짜증 났다. 칼끝에 힘을 주자 하비의 하얗고 단단한 목에서 핏기가 비쳤다.
“갈무리 안 되는 건 마찬가지 아냐? 오메가 페로몬을 질질 흘리는 천박한 새끼가. 억제제 없이 첫 러트를 온몸으로 맞은 새파란 알파한테 박혀볼래?”
물론 하비가 현재 페로몬을 간수 못 하고 있는 건 신약 때문인 걸 알지만, 그녀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빅터의 복수는 일부 빅터네 사용인들의 복수와도 겹쳤다.
빅터의 사용인 중에는 해적 인질 사태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돈 없고, 배경 없는 평민들은 유일한 희망이 당시 시의원이었다. 라힌 스터스, 그 사람만이 힘없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었다. 부자 아이들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일부 평민들도 함께 잡혀 인질이 되었지만 라힌 스터스는 이를 모른 척했다.
그녀가 푸른 눈을 어둡게 번뜩였다.
“첫 러트라니까 기억나는데. 당신은 우리 주인님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지도 못하지? 첫 러트 때 말이야. 그 말도 안 되는 걸 견뎌낸 분이야.”
빅터 베르텐의 첫 러트? 하비가 눈을 굴려 그녀를 보았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나 같으면, 아니, 당신 같아도 미쳤을걸? 견딜 수 있을까, 그 생지옥을.”
하비의 목에서 뜨거운 피가 솟아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신 같은 건 아마 첫 오메가가 죽었을 때부터 바로 미…….”
“나스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엄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허리를 냉정히 잘랐다. 놀란 나스타가 뒤돌기도 전에 손이 다가왔다.
“헉?!”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빅터가 하비의 목에 닿은 검날을 손으로 밀었다. 나스타는 기겁해서 하비의 목을 찌르던 검을 치웠다.
“왜 그래! 다쳤잖아! 괜찮아, 주인님?”
날카로운 예기에 손을 베여서 피가 흘렀지만 빅터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사나운 얼굴로 나스타를 다그칠 뿐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감시하라고 했지, 내가 언제 스터스 경의 목을 따라고 했나?”
나스타가 단검을 등 뒤로 숨기고 황급히 빅터에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장 나가.”
나스타가 하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페로몬이 너무 자극적이라 박고 싶어지던걸요, 주인님. 다음에 저도 끼워주세요.”
빅터가 흉포해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어지간한 모습은 다 지켜본 나스타조차 흠칫거릴 정도의 살기였다.
“넌 일주일간 근신이다.”
“흥. 그렇게 하시든지요. 틀어박혀서 레나랑 놀지, 뭐.”
나스타는 휙 뒤돌고는 고양이처럼 유연한 몸짓으로 훌쩍 떠났다. 그전에 빅터에게 무언의 눈짓을 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집 어딘가에 또 다른 쥐새끼가 있는 것 같은데요?’
알아들은 빅터는 모른 척 하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창문 밖을 살핀 그는 스터스가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마치 사용감을 숨기려고 한 것처럼 지나치게 반들거렸다.
‘흐음.’
빅터의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가주인 그가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마차를 사용했다니. 게다가 마차를 썼다는 걸 숨기려 한 흔적까지 있는 건 분명 뭔가 있다는 의미였다. 거기까진 간파했다.
하지만 설마 하비가 바로 행동력을 발휘해 라힌 스터스의 재무 회계사를 데려왔으리라는 건 빅터도 예상치 못했다. 하비 스터스가 그리 행동력이 좋은 사람인지는 그도 몰랐다.
그때 하비가 생각에 잠긴 빅터를 불렀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빅터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하비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부하인 나스타가 그의 단정한 목에 낸 칼자국이 확대되어 보였다. 괜히 신경 쓰였다.
“잠시. 숨 좀 돌리고.”
빅터가 젖은 금빛 머리칼을 휙 넘기며 땀을 식혔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
빅터의 한 손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붉은 피가 그의 크고 거친 손에 맺혀 방울을 이루는 것을 하비가 물끄러미 보았다. 목 줄기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피가 심장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묘하게 심장이 뛰었다.
어지간해서는 지치지도 않는 빅터가 숨을 고르고 있다는 건, 멀리서부터 달렸다는 증거였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하비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그저 그의 힘든 과거를 보상받기 위한 노리개가 아니었던가.
혼란스러운 건 빅터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숨 고르기는 끝났지만 아예 뒤돌아서서 제 이상 행동을 되짚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지?’
실제로 빅터는 하비의 페로몬에 나스타의 페로몬이 섞이는 것 같은 이상함을 감지하고 서둘러 왔다.
그리고 그가 막 도착했을 때, 나스타가 그의 목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본 순간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대로 달려 막았다. 맨손으로 잡은 것도 급해서였다.
평소 빅터답지 않은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 아무리 물어도 일을 친 몸뚱이는 제 주인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설마 정말 오메가로 인식하기라도 한 건가. 약만 바로 주면 알파로 되돌아갈 인간한테?’
오메가는 간혹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소중하고 귀하게 대해졌다. 빅터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이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빅터가 주머니 속의 알파로 되돌리는 약을 만지작대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몸은 좀 괜찮나?”
하비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몸이…… 괜찮냐니?”
하비는 그의 언행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죽일 듯이 괴롭히고 있으면서 안부를 묻는 건 고단수의 놀림인 건가? 달려오면서까지 그 알파 여자를 제지한 건 널 괴롭혀야 하는 사람은 나니까, 뭐 그런 유치한 발상인가? 하다못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빅터의 사람이 했던 말이 하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상처 난 빅터의 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제는 피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끗한 카펫에 붉은 물을 들이고 있었다.
빅터가 첫 러트에서 겪었다는 생지옥이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하비는 생각과 동시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내가 알 필요가 뭐 있어.’
빅터에 대해 궁금해한 것을 깨닫자마자 하비는 자괴감에 빠졌다.
빅터는 하비가 말이 없자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묘한 눈길로 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인데, 한가하게 선문답할 시간 없어.”
하비는 아까부터 계속 가슴 어딘가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불쾌했다. 간질거리는 이상한 감각이 역겹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불편한 얼굴로 화답했다.
“한가하지 않다면서, 내 몸 상태나 물어보자고 여기까지 들른 건가?”
빅터가 주머니 속의 약을 꺼내서 보란 듯 하비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스터스 경이 알파로 되돌리는 약을 달라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거든. 그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면 한달음에 달려올 만하지.”
하비가 지겹다는 표정을 짓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긴 한숨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하다 하다 이제 그 약으로 협상하자는 건가…….”
빅터가 팔짱을 끼고 비웃음을 지었다.
“뭐 어때. 스터스 경의 가장 자신 있는 분야 아닌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거래는 오고 가야지.”
“그 약을 당장 줄 게 아니면 사람을 불러서 쫓아 보낼 생각이다.”
하비의 진심을 가득 담은 협박을 빅터는 여유로이 넘겼다.
“그것보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역시 본론은 이쪽인가 보다. 하비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빅터의 말을 경청했다. 이해 못 할 소리로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것보다야 정확한 용건이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그 편지. 네가 쓰지 않았다고 했지.”
“무슨 편지?”
기억이 안 난다는 듯 하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 못 하는 척하지 마. 이럴까 봐 챙겨 왔으니까.”
빅터가 친히 챙겨 온 품속의 편지를 그의 눈앞에 다시 한번 펼쳐서 보여주었다. 하비는 편지를 받아 들고 찬찬히 읽었다. 그의 표정은 단조로웠지만 희미하게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빅터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하비가 무슨 말을 할지 내심 기대되었다.
만약 정말 하비 스터스가 쓴 것이 아니라면 빅터는 모든 일의 원흉인 라힌 스터스에게 온전히 분노의 화살을 돌려 버리고 그의 아들은 놓아줄 생각도 있었다.
하비는 원망의 굴레를 감내하며 제 목을 스스로 조인 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터스가는 경제적으로도 철저히 몰락했다. 이제 편지 건만 마무리되면 스터스가의 가주는 합당한 대가를 치렀으니 더 이상 심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결심도 했다.
그런데 다 읽은 편지를 묵묵히 접어서 건네주며 하비는 뜻밖의 말을 했다.
“이 편지는 당시 해적 인질 사태 때 내 손으로 직접 썼어.”
“……뭐?”
빅터는 번개에 맞은 것처럼 우두커니 하비의 고백을 들었다. 분명 전에는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그때의 하비 스터스가 지금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진솔해 보였다. 냉정한 얼굴로 딱 잘라 본인이 쓴 것이라고 선을 긋는 현재의 하비 쪽이 오히려 더 거짓 같았다.
“정말 네가 쓴 편지라고? 그게?”
빅터가 황망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하비를 마주 보았다. 생각을 조금 바꿔볼까 했던 건 그의 사용인 중 누군가가 빅터를 끈질기게 설득해서였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주인님도, 나스타도, 베르텐가 사람들도! 스터스 경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다고 몰아붙여요? 그냥 원망할 대상을 찾고 싶은 거잖아요. 정신 좀 차리세요!’
그 말대로, 빅터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는 묵묵히 침묵하다가 결국 사실을 시인했다. 오랫동안 인정하기 싫었지만 빅터도 알고 있었다. 그릇된 복수라는 것을.
그것을 인정하는 데는 굉장한 고통이 따랐다. 그래서 더 인정하기 싫었다. 이 고통조차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미 충분히 아팠는데, 왜 스터스가 사람 때문에 또 아픔을 겪어야 하는가.
하지만 빅터는 어릴 때부터 위선을 경멸했다. 어느 무엇보다 위선이 가장 싫었다. 그 시절 하비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위선 떠는 귀족이 아니라서였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배에서 내릴 때, 나를 속이는 짓만은 하지 말자고 맹세해 놓고선.’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오로지 스터스가에게 복수할 생각으로만 버텼기에 악만 남았다. 그것이 빅터의 눈을 가렸다.
빅터는 아직까지도 해적들이 그 편지를 뺏어서 인질들의 머리를 툭툭 치며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이 귀족 나리가 너흴 살려줄 것 같아? 정말? 우리랑 내기할까?’
어린 빅터는 편지를 빼앗으려 몸싸움까지 불사해 가며 처절하게 외쳤다.
‘살려줄 거야! 우릴 구해줄 거라고!’
해적들이 공처럼 구긴 편지를 어린 빅터의 키 높이 위로 휙 들어 여기저기 놀이처럼 던졌다. 편지를 쫓아다니던 빅터는 번번이 허탕 쳐야 했다. 놈들은 마지막엔 빅터의 다리를 걷어차서 넘어뜨리고는 일제히 낄낄 웃었다.
‘지상에서 기도한다잖아. 안.전.한. 지상에서. 기도발이 통할지 한번 볼까? 누구부터 실험해 볼래?’
그때부터 인질들이 하나하나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목이 잘리고, 손과 팔이 바닥을 나뒹굴고, 피가 튀고, 시체는 갈매기 밥이 되었다. 몇 날 며칠 살육의 날이 이어졌고, 어느덧 빅터의 차례가 되었다.
하비 스터스의 기도는 바다 위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의 편지는 해적들 사이에서 한참이나 조롱거리로 돌아다녔다. 그걸 연시인 양 외워서 읊고 다니는 해적들도 있었다.
‘간악한~ 해적들은~ 당신들의 숭고한 생명을 함부로 앗아 가지 못합니다~ 크하핫! 우리가, 그리고 신이 구해줄 겁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누군가가 구성진 가락으로 곡까지 붙여 부르던 것이 빅터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젠장!’
참을 수 없어져서 빅터는 자리를 박차고 침대 위에 앉아 있는 하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눈이 벌겋게 변한 빅터가 대뜸 하비의 뒷목을 한 손으로 콱 쥐었다. 목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하비를 자신 쪽으로 세게 끌어당긴 빅터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솔직히 말해. 빠짐없이 진실만 말하라고.”
피를 토하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내가 들어준다잖아. 마지막 기회야. 숨기는 게 있으면 다 말해. 이해할 순 없어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은 해볼 테니까.”
이성적인 사고를 가장 중요시해 온 만큼, 빅터는 조금 더 냉철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가장 큰 원수인 라힌 스터스의 아들로서, 하비는 충분히 벌을 받았다. 남은 인질들에게 거짓 희망을 주고 기만한 그 편지를, 자신이 쓴 편지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풀어줄 참이었는데 지금 와서 뭐라고?
뒷목을 조이던 손이 점점 앞으로 옮겨왔다. 하비는 숨이 막혀 얼굴이 붉어졌다.
“큽……!”
하비가 목이 조인 상태로 빅터의 손등을 제 손으로 덮었다. 하지만 떼어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잡고 있을 뿐이었다. 하비는 호흡이 곤란한 가운데서도 담담하게 말을 쏟아냈다.
“무슨…… 진실? 이 편지에 쓰인 필체가, 내 필체라는 건 베르텐 경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헐떡임 가운데 마지막 말이 떨어진 순간, 빅터는 표정을 완전히 지웠다. 분노도, 슬픔도, 미소도, 아무것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아니, 이미 확신한 얼굴로 하비에게 말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숱한 감정이 빅터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빅터의 녹색 눈에 커다란 광기가 서렸다.
“그 편지를 정말 네가 썼다고…….”
빅터는 하비의 목을 꽉 쥐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고 방금까지 쥐었던 자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하비의 밀려난 손도 잡아주었다. 연인에게 하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하비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빅터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빅터가 그 손을 천천히 놓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작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야릇하게 피었다.
“하아…….”
짜릿한 전류가 그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참을 수 없는 간질거림이 그의 배 속에서 터져 나왔다. 거대한 웃음이었다.
“하하하!”
빅터의 배 속에서 거대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없이 기쁘고, 큰 안도가 들었다. 아직 마음껏 미워해도 된다. 그럴 만한 이유가 남았다. 하비가 그것까지 가져가진 않았다.
빅터가 손을 내리자 하비는 입술을 깨물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불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빅터는 그것마저 사랑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군.”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차가운 증오만 남았다. 하비 스터스는 과연 대단한 사람이었다. 몸이 갈라지는 아픔도 아직 견딜 만한가 보다.
빅터는 그가 심지 굳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분명 그 편지는 하비 스터스의 필체가 맞다. 하지만 첫 히트 때 하비가 말했던 것도 진실이었다. 정황은 다 알 수 없지만 모종의 뭔가가 존재했다.
‘그게 지금 와서 뭐가 소용 있지?’
중요한 것은 하비 스터스가 편지가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대단한 진실도 아니지만, 빅터에게는 중요했다. 그 편지 한 장이 하비 스터스가 당한 괴로움을 그나마 정당한 것으로 바꿔주었기 때문이었다.
빅터가 웃음기를 머금고 하비의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마치 기사처럼 정중하게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스터스 경의 의지를 받아들이지. 진실보다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 그리 거짓말을 했으니. 아마 다 낡아빠진 스터스 가문 때문이겠지만.”
빅터가 고개를 당당하게 들었다. 어떤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 같은 하비 스터스가 그의 녹색 눈동자에 비쳤다.
하비가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주 감사히 생각해.”
덕분에 하비를 마음껏 진창으로 밀어도 될 것 같다. 본인이 돕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빅터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주머니 속을 뒤졌다. 익숙한 감각이 손끝에 걸렸다. 하비에게 그가 원하던 것을 줄 생각이었다.
“선물로 되돌리는 약을 주지. 받아.”
빅터가 하비의 품으로 꽁꽁 싸맨 종잇조각을 떨어뜨렸다. 펼치면 하얀 알약이 나올 것이다.
얼결에 약을 받은 하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빅터를 빤히 보았다.
“이건…….”
알파로 되돌리는 호르몬 교란제, 신약이었다. 하비는 약을 살피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빅터에게 확인했다.
“진짜 약인가?”
‘알파로 되돌리는’이라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지만 빅터는 바로 알아들었다.
“당연하지. 가짜 약을 줄 거라고 생각했어? 진짜니까 바로 복용해.”
빅터는 친절하게 물을 따라서 가져왔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사라졌지만 하비는 조금 망설였다. 머뭇대던 그가 알약 몇 개를 동시에 물과 함께 삼켰다. 하비의 목에 도드라진 울대가 꿀렁이더니 알약이 대번에 사라졌다.
하비는 자신을 감시하듯이 지켜보고 있는 빅터의 시선을 피했다. 왠지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충 아무 말이나 던졌다.
“이제 그 구역질 나는 향수는 안 뿌려도 되겠군.”
약이 잘 듣고 있는지 하비는 속에서 묘한 느낌이 났다.
‘이걸로 된 건가.’
이제 임신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되돌리는 약을 먹었을 때는 오메가로 변하는 것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찜찜한 점은 꼭 일정 시간이 지난 뒤 하혈을 한다는 것이었지만.
빅터가 하비의 안도를 눈치챈 듯 비아냥대는 말투로 받아쳤다.
“얼마 뒤에 다시 오메가로 바뀔 테니 너무 섭섭해하진 마. 신약은 아주 많다고.”
하비는 진지하게 빅터가 소유하고 있는 약들을 털어볼까 생각했다. 약들을 모두 없애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워낙 빅터의 소유지가 많아 어디에 숨겼을지 상상도 안 되어서 금방 포기했다.
‘일일이 뒤졌다간 금방 눈치채고 다른 곳으로 옮기겠지.’
그때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밖으로 쏠렸다.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아.”
문득 빅터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예정을 바꿔봐야겠어.’
하비를 가장 확실하게 괴롭힐 방법이 생각났다. 하비는 다른 사람의 평판을 신경 썼다. 빅터는 귀족 사회에서도 불편한 화젯거리가 될 만한 일을 꾸밀 생각이었다.
빅터가 문밖을 쳐다보았고, 동시에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비는 반사적으로 침대맡에 서 있는 빅터를 난감한 눈으로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누가 본다고 딱히 이상할 것도 아니었지만, 사이가 안 좋기로 소문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귀찮은 화젯거리가 될 것 같아서였다.
빅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하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
정중한 대답 뒤에 스터스가의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한 무리의 귀족 청년들이 우르르 등장했다. 집사가 사람들을 주렁주렁 달고 온 것이다. 물론 큰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집사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주인님, 여기 손님들이 잔뜩……. 어, 베르텐 경 아니십니까?”
문병 온 지인들은 꽃이나 선물을 들고 있었다. 거기엔 반 로투스 경도 포함되었다. 반은 빅터를 보자마자 흠칫 놀랐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어! 베르텐 경이 와 있었나! 마침 같이 가자고 기별을 보냈는데, 허탕 쳤군그래.”
“언제 선수 친 거지? 하여간 빨라.”
그들은 본래 온 목적은 잊고 왁자지껄 서로 좋을 대로 떠들고 있었다. 스터스가의 젊은 집사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고, 이를 발견한 빅터가 중재하듯 그들의 말을 끊었다.
“당연히 와야 할 병문안 아닌가.”
그제야 그들은 환자인 하비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했다.
스터스가의 집사는 빅터를 향해 감사의 눈빛을 전했다. 그가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해서였다. 아마 빅터가 바로 다음에 던진 말이 아니었으면 더 감사한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하비가 아프다고 하는데, 당장 달려와야지.”
그 순간 하비를 포함한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
“…….”
“…….”
방금 저 베르텐 경이 스터스 경을 두고 ‘하비’라 불렀다. 저리 부를 수 있는 건 가족, 아주 절친한 오랜 친구, 혹은…….
그나마 용감한 누군가가 어색한 얼굴로 얼어붙은 입을 떼었다.
“어어…….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하고 예민할 수 있는 문제지만, 혹시 자네 둘…….”
빅터가 빙긋 웃더니 친한 척 하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알았나?”
하비는 빅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지?’
빅터의 손이 몸에 닿자 하비는 놀란 듯 움찔거렸지만 평소처럼 화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딱히 반응할 여력도 없어서였지만, 다른 귀족 청년들이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기에 충분했다.
빅터도 여세를 몰아 귀족 청년들을 향해 넉살을 떨었다. 뜬소문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눈에서 반짝임을 보아서였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쳐 사교계에 온갖 소문이 떠돌 것이다. 상상만 해도 몹시 즐거운 빅터였다.
“몰랐나? 전에 소드 클럽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하비가 샤워실에 쓰러져 있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걱정 많이 했어.”
귀족 청년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이런 관계인 줄도 모르고 스터스 경을 헐뜯었던 것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그때……?”
스터스 경을 욕했을 때 빅터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상기하며 귀족 청년 하나가 손가락을 들어 하비를 가리켰다.
물론 이 자리에서 하비 스터스를 욕했다는 말이 나올까 봐 옆자리에 서 있던 다른 청년이 그의 발을 콱 밟았다.
“주인님? 어째서 그런……!”
집사가 황망한 얼굴로 하비와 빅터를 번갈아 보았다. 알파끼리 어울리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리 좋아 보이는 형태가 아니었다. 하물며 국가 차원에서 인구 감소를 걱정해 암묵적으로 금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빅터는 피식 웃으며 하비의 밤색 머리칼을 손에 올렸다. 가닥가닥 결 좋은 머리칼이 그의 손에서 흘러내렸다. 안색이 핼쑥해지는 집사 보란 듯이 빅터가 하비의 머리칼을 만지작댔다.
“알파끼리 사귀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 말해보게. 살면서 그런 법은 보질 못했거든.”
귀족 청년들이 차마 둘을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반 로투스 경조차도 방관하고 싶다는 얼굴로 다른 곳을 보았다.
헛기침과 외면이 난무한 가운데, 하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끼어들었다. 그는 이곳을 정리해 줄 유일한 구원자였다. 하비는 빙글대고 있는 빅터를 노려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베르텐 경이 농담하는 거니까, 다들 넘어가지 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제야 귀족 청년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아까까지 눈도 못 마주치던 자들이 아닌 듯했다.
“그, 그렇지?”
“역시! 스터스 경이 그럴 리가 없지.”
“그게 무슨 말이야? 베르텐 경이야말로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지!”
여기서도 스터스가와 베르텐가의 분파로 나뉜 모양이었다. 귀족 청년들이 둘로 나뉘어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집사가 몹시 불편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라힌 스터스가 건재할 때는 이런 모욕적인 일도 없었다.
집사는 알파인 가주가 알파와 얽힌 것조차 불쾌했다. 하물며 빅터 베르텐은 우성 알파일 뿐 아니라 의원직과 귀족까지 모조리 돈으로 사들인 졸속 부자였다.
불쑥 어떤 사실에 생각이 미친 집사가 다시 한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서, 설마, 주인님이?’
덩치도 비등하긴 했지만 빅터 쪽이 좀 더 우세했다. 몹시 불온한 생각이지만 어느 쪽으로 예상해 봐도 주인인 하비가 깔릴 것 같다는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 음흉한 눈길들이 하비에게 떨어졌다.
정작 불온한 시선을 받는 당사자인 하비는 불쾌한 낯빛조차 보이지 않고 모두가 빨리 이 방에서 나가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 건만 해도 마음이 심란한데, 거짓말을 잘도 둘러대는 빅터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하비는 속으로 한숨지었다.
‘이런 게 재밌는 건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빅터가 생각하는 재미의 측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이 고리타분한 귀족이라 더더욱.
하비가 보기에 빅터는 귀족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앞선 자유분방한 선구자에 가까웠다.
‘시대를 앞선 자…….’
하비의 시선이 자연적으로 사람들 사이로 향했다. 빅터도 빅터지만 하비의 신경을 잡아끌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반 로투스 경, 그의 오랜 친구였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문제가 부상했다.
‘자넨 언제나 앞서가는군. 시대를, 그리고 나를.’
그 말은 가시처럼 돋아나 하비의 마음을 계속해서 찔렀다. 피 흘릴 만큼 큰 상처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불편한, 그런 정도의 작은 생채기였다.
이를 숨기려고 하비는 일부러 반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생일이 곧이지 않나?”
“그, 그렇지.”
반이 어색해하는 것이 보였다. 하비와 싸운 건 아니지만 당시 분위기가 묘했고, 자신의 열등감을 고백했다는 것이 생각나 껄끄러운 듯했다.
빅터가 팔짱을 끼고 둘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빤히 보았다. 빅터의 뚫어질 것 같은 시선에 못 이긴 반은 예전처럼 친근하게 말했다.
“어, 그랬지. 이번에도 신기한 걸 사주려고?”
하비가 선선히 미소 지었다.
“그럴 생각이야. 몸이 많이 나았으니 산책 겸 나가서 보려고 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늘 열성이라니까. 고맙다.”
반이 밝게 대꾸했고, 빅터의 얼굴은 그에 반비례하여 점점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기어이 빅터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유도된 기침으로 이목을 끌었다. 모두가 주목하자, 빅터가 과장되게 말했다.
“이런. 하비가 너무 쑥스러워하니 어쩔 수 없군.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니. 하비가 질린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빅터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 따위는 그에겐 간지러움 그 이상도 아니었다.
빅터가 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무래도 직접 보여줘야겠어.”
말을 마친 빅터가 하비의 팔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하비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거칠고 갈라진 하비의 입술 사이로 빅터의 혀가 거침없이 들어갔다.
마치 미리 짠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키스였다.
* * *
짝, 짝, 짝!
“주인님, 축하드립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기계적이고 건조한 음성이 막 집으로 돌아온 빅터를 맞았다.
그는 빅터의 저택을 관리하는 오메가 집사였다. 온화한 인상의 미남자인 그는 빛바랜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를 가졌다. 그는 빅터에게 하비 스터스에 대해 도 넘는 잔소리를 한 자이기도 했다. 그는 때때로 빅터를 뜨끔하게 할 정도로 직설적인 조언도 서슴지 않았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주인님도, 나스타도, 베르텐가 사람들도! 스터스 경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다고 몰아붙여요? 그냥 원망할 대상을 찾고 싶은 거잖아요. 정신 좀 차리세요!’
얌전해 보이기만 하던 집사의 목소리가 그때만큼 진중하게 들린 적이 없었다. 아직도 선명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빅터의 눈길에 집사가 찔끔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빅터가 뒤돌아서서 대꾸했다.
“아니. 좀 재수 없어서.”
“제가 그런 적이 한두 번인가요, 뭐.”
집사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고는 빅터의 겉옷을 받아서 제 팔에 걸쳤다. 그리고 잔소리의 서두를 열었다.
“사고를 아주 크게 치셨더군요. 귀가 따가울 지경이던데. 그리 괴롭히시더니, 이제 스터스 경과 정식으로 사귀기로 하신 건가요?”
빅터는 냉정한 모습으로 듣는 둥 마는 둥 성큼성큼 안으로 걸었다. 저택이 워낙 커서 그의 방까지 한참 가야 했다.
빅터 베르텐과 하비 스터스의 키스 사건은 단숨에 사교계의 화제로 떠올랐다. 온갖 클럽에서 그 얘기들을 하느라 바빴다.
공식적인 애인 선전 포고 겸 입술 박치기에 가까운 첫 키스였다. 묘하게 달콤한 맛이 났던 것이 생각나 빅터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잠시 기억을 더듬으며 느슨해졌던 빅터의 얼굴이 금방 냉소적인 표정으로 변했다. 어차피 다 쇼다.
하비 스터스가 귀족 사회에서 같은 알파와의 스캔들로 곤란해지고, 여전히 자신에게 약점을 잡힌 채 끌려다니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빅터에게 귀족 사회의 평판은 그다지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상관없었다.
‘곤란한 건 그놈이 되겠지.’
귀족의 명예밖에 모르는 딱딱한 남자니까. 빅터가 문득 집사를 돌아보면서 쯧, 혀를 찼다.
“넌 그것보다 나스타부터 챙겨. 감시하라고 보내놨더니 페로몬도 갈무리 못 하고 일을 치고 있더군.”
대번에 집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나스타의 오메가였다. 하지만 나스타를 걱정하기보다는 하비를 먼저 염려했다. 집사는 빅터의 사용인 중 가장 하비에게 우호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설마 나스타가 스터스 경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겠죠?”
나스타는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완력이 셌다. 게다가 살인 기술은 가히 암살자 중에 최상이었다.
빅터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할 뻔했지. 내가 안 막았으면, 거의.”
안색이 파리해진 집사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맙소사……. 나스타 제발…….”
“걱정 마. 끝까진 안 갔으니까.”
빅터가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집사는 얄미워 죽겠다는 얼굴로 닫힌 방문을 노려보았다.
‘잔소리 좀 했다고 일부러 저러신다니까. 하여간 성격 참 안 좋으셔.’
빅터의 더러운 성격은 저택 사용인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했다. 집사가 다른 사용인들과의 대화로 분노를 풀 생각에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방문이 벌컥 다시 열렸다. 빅터가 얼굴을 내밀더니 덤덤하게 일렀다.
“아, 스터스 경을 우리 집으로 챙겨 와. 로투스가 놈팡이의 생일 선물인가 뭔가를 사러 갔을 텐데, 위치는 쌍둥이가 알 거다. 물어봐.”
하비는 키스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비틀대며 저택을 나섰다. 반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봐야겠다는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빅터의 집사는 주인의 명에 황당한 듯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집에서 노는 사용인도 많은데 왜 굳이 바쁜 자신을 지목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요? 왜요?”
“다른 놈들은 못 믿겠어. 네가 가장 유순한 편이니까, 잘하겠지.”
닫으려던 방문을 또 열곤 빅터가 덧붙였다.
“나스타는 절대 데려가지 마. 발정 날 때가 다 되어가는데, 스터스 경 앞에서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겠지?”
빅터는 짓궂은 얼굴로 웃고는 가차 없이 방문을 닫았다.
“주인님!”
집사가 닫힌 방문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잔소리에 대한 보복이 분명했다. 정말 성격 더러운 주인님이다.
그 시각, 하비는 빅터의 말대로 백마를 끌고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명품가를 다니다가, 차츰 서민들의 거리로 빠졌다. 나중엔 얼굴을 가리던 후드조차 말 안장에 매어두고 다녔다
하비는 예전부터 화려한 것들보다는 수수하면서 흔한 것들에 눈이 갔다.
‘흔하니까 값이 싼 거겠지만, 그것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니까.’
잘 찾아보면 숨은 보석들이 있었다. 흔해 보이는 것 중에 가치 있는 무언가가. 하비는 말을 이끌다가 멈춰 세웠다.
“오!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제일 인기 상품인데!”
하비는 모조인 것이 분명한 큰 녹색 브로치에 눈길이 갔다. 황금색 장식 안에 녹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투박한 편이라 어느 옷에 달아놔도 다 어울릴 것 같긴 했다.
‘왠지 누가 떠오르는데.’
금발에 녹안을 가진 빅터 베르텐이 뜬금없이 생각났다. 하비는 자기가 떠올려 놓고는 제 생각에 순간 흠칫했다. 친구 생일 선물을 사러 와서 왜 그런 놈을 떠올리고 있는지, 당황스러웠다.
설상가상 사람들 앞에서 행한 그 무자비한 키스까지 꼬리를 물고 생각나 하비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폭발적인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워서 정신없이 저택을 빠져나온 터였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만지니 상처가 난 건지 따가웠다. 거친 입맞춤이었다. 하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심란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상인이 얼쩡거리는 하비를 눈여겨보더니 그가 끌고 있는 백마에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나 끌 수 없는 명마로 보이니, 분명 이자가 보통 신분이 아닐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여성분께 사드릴 겁니까?”
상인을 지나치려다 붙들린 하비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남자인데…….”
상인은 뭘 착각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호객 행위를 시작했다.
“남녀 따질 게 뭐 있어요. 이런 거 신사분들도 달면 멋지더라고.”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았다. 하비는 고민하다가 상인의 화술에 밀려 그 브로치를 사고야 말았다.
‘이게 아닌데.’
이미 사버린 브로치를 만지작대며 하비가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푸르릉!”
애교 부리듯 머리를 비비는 백마를 쓰다듬은 하비가 황금색 바탕에 녹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브로치 위로 환영처럼 빅터가 겹쳐지고, 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내가 들어준다잖아. 마지막 기회야.’
어쩌면 빅터의 말대로 오해를 풀 마지막 여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 라힌 스터스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사실 하비는 그 편지를 아버지가 쓴 것임을 바로 간파했다.
‘스터스가가 대대로 같은 필체라는 걸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같은 필체, 그건 스터스가의 지독한 교육의 산물이자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스터스가의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펜을 쥔 순간부터 선조와 같은 필체를 유지하도록 혹독한 교육을 받아왔다.
필체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이어받기를 강요받았다. 생각, 겉모습, 관념, 사상, 외모까지 전부. 이것들을 익힐 때까지는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았다. 이를 따르지 않는 아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도 했다.
실제 하비 위로 터울이 큰 다른 아이가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하비는 그 아이를 보지도 못했다. 하비 스터스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으니까.
정말 스터스가에서 손을 써서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인은 과로로 인한 단명이었으니 말이다.
하비는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거대한 백색 저택이 품은 모순을 알아차렸다. 그는 살기 위해 하얀 저택의 율법을 온몸으로 익히고, 습득했다.
자유로워 보이는 한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비는 자신이 이 저택의 방식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비는 베르텐가의 수많은 아이 중 빅터를 똑똑히 기억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아픈 척하는 걸 알았지만 굳이 어울려 준 건, 하비도 그를 인식하고 있어서였다. 회장을 빙빙 돌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심 언제 말을 걸까 속으로 점치기도 했던 하비였다.
빅터 베르텐은 그 나이 대 아이답고, 억지스럽지만 한편으론 매우 자유로운 바람의 향이 났다.
푸르고, 갑갑함 없는, 어쩌면 한계도 없어 보이는 자유로운 소년.
그게 빅터 베르텐에 대한 하비의 첫 이미지였다.
나중에 그가 해적에게 붙들렸다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비는 황금색 브로치를 보이지 않게 꽉 쥐었다.
‘설마 내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셨을 줄이야……. 그렇게 싫다고 했건만.’
라힌 스터스는 어린 하비에게 편지를 쓸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따를 줄 알았던 하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라힌 스터스를 설득하려 했다.
‘지금 그 사람들한테 필요한 건 그런 공허한 마음 씀씀이가 아니라 돈입니다. 편지 같은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요. 우리 스터스가의 돈을 따로 떼어 줘도 될 텐데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윽!’
하비는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휘청거렸다. 재차 손을 치켜든 라힌 스터스는 반들거리는 밤색 눈에 묘한 광기를 띠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넌 그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보는 거냐? 아직 멀었구나. 내가 널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데, 어떤 수모를 당했는데 이걸 쓸데없다고!’
‘하지만!’
짝!
다시 한번 손이 날아와 하비의 뺨을 때렸다. 이번에는 뒤로 넘어졌다. 라힌 스터스는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강압적으로 굴었다. 다른 사람 같았다.
‘스터스가의 돈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아! 명심해라. 그건 우리 가문의 것이야.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그럼에도 하비는 여러 번 아버지에게 주장하고 대들었다. 처음으로 반항한 것이었지만, 매타작을 받고 감금 조치를 당했다. 그 자신조차 몰랐던 불같은 반발이 어린 하비의 속에서 들끓었다.
하비가 걱정스럽게 푸릉대는 말을 천천히 이끌면서 피식 웃었다. 공허한 미소였다.
‘그땐 아버지에게 반항했다는 것만으로도 전율하고 만족해 버렸지.’
하지만 해적들이 남은 인질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깨달았다.
무력한 정의감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해적 사태 같은 큰 사건을 위해서는 보다 실질적인 힘과 행동력,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차라리 모금 운동이라도 할걸.’
하비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대들기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짜내야 했다. 스터스가의 사람인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의 감정에 휘말려서 상황에 만족한 바람에 그러지 못했고,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말도 맞다. 계속해서 하비는 되뇌었다. 해적과 타협하지 않는 건 대응 방식의 정석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를 내놓으면 둘을 요구하니까.
‘내가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했더라면 조금 달라졌을까.’
그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빅터를 봤을 때 거북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이런 생각들이 한몫했다. 아버지의 생각에 동조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 막연한 가정 때문에.
하비는 스터스가의 명예로운 일원과 개인적인 한 인간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었다.
적어도 편지를 보고 아버지의 위선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래도 스터스가의 일원으로서의 마음가짐이 훨씬 강했다.
첫 히트 사이클의 엄청난 열기 속에서, 하비는 어렴풋한 시야로도 편지가 자신이 쓴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 두 번째로 빅터가 보여줬을 때는 확실히 알았다.
‘기어이 나를 사칭해서 직접 편지를 쓰셨구나.’
그건 사람들에게 하비가 청렴하고 고결한 의지를 지닌 스터스가의 귀족이자 차기 가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라힌 스터스의 광적인 집착에서 비롯한, 아들인 하비만은 깨끗하게 두기 위한 그만의 경건한 의식과도 같았다.
하비는 아버지의 그 종교에 가까운 신념에 진절머리가 났다. 하비는 끝까지 아버지에게 아들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그저 가문을 잇기 위한 장기짝에 불과했다.
‘확인을 해봐야겠어.’
하비는 결심한 듯 진지한 얼굴로 다시 뒷골목의 남자를 찾아갔다. 끝까지 미뤄놨던 모종의 조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약효가 도는지 배 속 어딘가가 뜨끈하긴 해도, 페로몬은 알파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번처럼 알파들에게 덮쳐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로 준비해 둔 말이 없어서 이번에는 백마를 끌고 그대로 뒷골목으로 갔다. 정보를 팔거나 직접 수집하기도 하는 ‘염소수염’ 남자를 찾으러 가자, 저번처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똑같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하비를 보더니 염소수염이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어! 무사했어?”
하비가 묵묵히 대꾸했다.
“나만 두고 잘도 도망가더군.”
“그건 좀……. 걔들이 워낙 이쪽 바닥에서도 소문 더러운 애들이라. 어쩔 수 없었어. 미안.”
염소수염은 정말 미안하긴 한지 차마 하비의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패를 하비에게 보이며 소곤거렸다.
“괜찮은 패가 있으면 귀띔해 주라.”
다른 자들이 염소수염을 째려봤지만 그는 모른 척했고, 하비는 피식 웃었다. 하비가 판을 눈으로 대강 훑더니 염소수염이 원하는 대로 좋은 패를 짚어주었다.
“이걸로 내.”
“좋았어.”
“야! 치사하게! 너 저번에도 저놈이 골라준 패로 이겼잖아!”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하비가 대뜸 본론을 이야기했다.
“장기로 갈 만한 건을 넘길까 하는데. 시간 되나?”
“뭐, 어떤 거? 참, 저번 건은 다시 생각해 봤는데 알려주기 뭣해.”
재무 회계사의 행방을 입막음한 자가 누구냐는 이야기였는데, 하비는 선선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이제 상관없어.”
이미 그 사람은 하비의 수중에 있었다. 필요 없는 정보가 되었다 말하자 염소수염은 미안한 듯 멋쩍게 수염을 당겼다.
“그래서, 시간이 길어질 조사란 게 대체 뭔데?”
“어떤 가문의 재정 내역을 조사해 줬으면 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하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스터스가의 재정이 파탄 난 원인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할 생각이었다.
라힌 스터스가 죽고 나서 스터스가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 건 재산을 거의 탕진한 탓이었다.
하지만 하비는 의심하지 않았다. 다 어딘가에 기부했거나 누군가를 돕는 데 썼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내역이 실제로 이뤄졌는지 딱히 확인한 적은 없었다. 여태까지 철석같이 그것을 믿었기에.
‘이젠 아니지.’
너무 생뚱맞은 조사 건이라 염소수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그런 걸 왜? ……아니다. 그냥 하면 되니까. 돈이 중요하지. 얼마 쳐줄 거야?”
“될 수 있으면, 많이.”
“그럼, 좋아. 장부는 다음에 직접 주든지, 아니면 누굴 통해서 주든지 하고.”
염소수염이 용건이 끝난 것을 알고는 휙 뒤돌아 하비가 골라준 패를 내밀었다. 얼마 뒤 염소수염이 만세삼창을 했다.
“이겼다!”
하비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그곳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고단한 하루였다.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빅터가 강제로 저지른 키스가 여지없이 생각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비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한숨지었다.
‘다 그놈이 이상한 짓을 해서…….’
그런데 마구간에 도착하자 낯선 사람이 그의 백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을 가리는 저 백마가 기분 좋은 듯 푸릉대며 그 손길을 잘 받고 있었다.
“옳지, 옳지. 착하다.”
수상한 사람은 백마의 얼굴을 친근하게 만지며 어르기까지 했다. 하비처럼 후드를 푹 뒤집어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비가 반사적으로 검을 손에 쥐었다. 어쩐지 빅터와 얽힌 이후로 이럴 일이 많아진다. 비난의 화살이 바로 그에게로 향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남자였다.
“누구지?”
“아. 이제 나오셨군요! 저 기억 못 하세요? 참, 후드를 벗어야지.”
미성인 데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하비가 검을 거두고 물끄러미 보자 수상한 사람이 허둥지둥 후드를 벗었다. 하비는 드러난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흔한 갈색 머리에 동그란 눈이 인상적인 오메가였다.
“베르텐 경 저택의 집사?”
“기억하시는군요! 어, 그게……. 주인님이 스터스 경을 모셔 오라고 하셔서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쫓아오게 되었네요. 죄송해요.”
“날 쫓아왔다고? 어떻게?”
하비의 의문은 곧장 풀렸다. 집사의 뒤로 익숙한 빅터의 쌍둥이 사용인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하비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사이 또 감시를 붙였나 보군.”
하비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허둥지둥 머리를 푹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우리 주인님이 원래 좀 싸가지가 없어요. 죄송해요!”
자신의 주인을 깎아내리는 집사는 처음 봤다. 그것도 귀족 가문의 집사가 저런 언행이라니.
하비가 놀란 얼굴로 보자 쌍둥이 중 좀 더 온화한 인상의 베타 남자가 집사의 정수리에 손날을 꽂았다.
“레나, 그 말은 좀 심하지 않나.”
“아얏! 알았어요. 주인님한테 이르지나 마요.”
레나라. 남자인데 이름을 여성형으로 썼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하던 하비는 집사의 다음 말에 크게 어깨를 흠칫했다.
“그리고 어차피 연인이라고 대놓고 선언하셨으니까. 제가 스터스 경과 함께 있다 한들, 누가 봐도 이상하지는 않잖아요? 이미 사교계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다고요.”
“어떤…… 소문?”
하비가 차마 알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비의 문드러진 속을 모르는 집사 레나가 해맑은 얼굴로 답했다.
“두 분이 다른 귀족분들 보시는 앞에서 키스하셨다면서요!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났다니까요? 두 분 중에 누가 아래인지……. 읍!”
참다못한 쌍둥이 중 알파 쪽이 팔을 뻗어 집사의 입을 틀어막아 주었다.
“정신 차려, 레나. 지금 스터스 경 앞이다.”
“……죄송합니다.”
하비는 귀족 영애들이 어째서 그런 심란한 화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족으로서 알파인 두 남자가 사귄다는 건 입에 담지도 못할 추악한 짓거리 아닌가?
“우아한 귀족 영애들이 좋아할 만한 화젯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하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빅터의 집사 레나가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모르는 말씀을 하시네요. 귀족 영애분들이 그런 걸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알파 남자들끼리의 금단…… 읍읍!”
이번엔 쌍둥이 둘이 한꺼번에 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 * *
빅터가 오라고 했다고 바로 갈 필요는 없었지만, 하비는 그의 집사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쌍둥이를 물리자 레나가 주변을 살피더니 하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집의 불쌍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릴게요.”
“무얼?”
“그냥. 여러 가지, 다요.”
그때 레나에게서 희미하게 나스타의 알파 페로몬이 섞여 느껴졌다. 하비가 반사적으로 경계하자 그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혹시 나스타의 페로몬을 맡으셨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하비를 보며 레나는 쑥스러이 미소 지었다. 전에 하비의 목에 검을 찍어 눌렀던 그 알파 여자가 바로 레나의 연인이었다.
“제가 그 사고뭉치의 오메가랍니다. 좀 험악하긴 해도, 착한 아이예요.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여자가 알파, 남자가 오메가인 커플은 비교적 흔했다. 놀라워할 것도 아니라 하비는 선선히 수긍했다.
하비는 해적 납치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마음속 가책이 컸던지라 하비는 해적 사태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꽤 많았다.
레나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 납치 사고로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미안한 일이군. 그때 더 적극적으로 구조 활동을 했어야 했는데.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한다.”
귀족인 하비가 허심탄회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자 레나는 깜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스터스 경에게 유감없어요. 지켜보다 보면 알겠거든요. 저기 복수에 미친 인간들은 보이지 않겠지만…….”
레나는 보이지는 않지만 잘 따라오고 있을 쌍둥이를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주인님에게 당하면서도 끝까지 그 회계사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하셨다죠? 전 그걸로 충분해요.”
하비가 의외라는 눈길을 레나에게 던졌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레나는 떨어지는 해를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어머니가 누군가의 생명 앞에 제 비극을 삼킬 줄 아는 사람은 믿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저는 스터스 경을 믿어요.”
누군가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도 되는 걸까. 믿음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 하비는 알 수 없었다. 어두워지는 하비를 보며 레나가 밝게 웃었다.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소소한 것 정도는 알려 드릴게요. 뭐가 궁금하신가요?”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만 말해줘. 혹여 기밀이라 위험해질 수 있는 문제는 말하지 말고.”
“이것 봐요. 친절하시다니까.”
미소 지은 그에게 하비가 물었다.
“베르텐 경이 첫 러트 때 겪었던 게 대체 뭐였지?”
“아…….”
머뭇대는 레나를 보고 하비가 재차 말했다.
“곤란한 거면 다시 말하지만 말 안 해도 돼.”
“그런 건 아니지만, 주인님이 가엾어서요.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방금 전까지 싸가지가 없다는 둥 헐뜯던 집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인님은 알파치고 오메가의 페로몬을 잘 견디시죠. 왜 그런 줄 아세요?”
“아니.”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니냐는 말도 쏙 들어갈 정도로 레나는 진지했다. 동정심이 그득한 얼굴로 그는 천천히 과거를 풀어놓았다.
당시 빅터는 19살이었다. 빅터를 아끼는 해적 수뇌부가 자리를 비웠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하필 그날 빅터는 첫 러트가 오고야 말았다. 평소 빅터를 몹시 마음에 안 들어 하던 일부 해적들이 그걸 보고 아예 작당했다.
“꼴에 사내자식이라고, 러트가 왔네.”
“좋은 생각이 하나 났는데. 이거 어때?”
그들은 흥분된 몸을 주체 못 하는 빅터를 한참이나 방치했다. 그 뒤 거의 반 미쳐가는 빅터를 방에 가둬놓고, 굶주린 맹수에게 주는 먹이처럼 오메가 인질들을 던져 주었다.
고립된 곳에 빅터와 오메가들을 차례차례 욱여넣은 뒤 그들은 돈내기를 했다. 빅터가 어떤 오메가를 고르겠냐는 내기였다.
빅터가 본능적으로 고른 첫 오메가는 우성 알파의 강렬한 페로몬에 이끌린 듯 몽롱한 눈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 냄새나는 방에서 이성을 잃은 채 시작한 것이 빅터의 첫 관계였다. 질척한 소리가 좁은 방 안에서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 오메가는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몸이 가늘며 키가 컸다. 그리고 밤색 머리에 밤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었다.
내기에 진 해적들과 이긴 해적들 사이에서 희비가 갈렸다. 진 해적들은 돈을 잃었다는 분노를 빅터에게 돌렸다.
“저 새끼……! 가만두지 않겠어.”
그들은 빅터와 관계를 막 끝낸 오메가를 끌어내려 했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빅터가 그 오메가를 지키려고 막아섰지만 수적으로 너무 열세라 오히려 얻어맞았다.
“사, 살려주세요, 히익!”
그 오메가가 울면서 필사적으로 빅터의 발목을 잡았다. 눈 위가 터져서 흐르는 피 때문에 빅터는 시야가 붉었다. 그가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였다.
“그만해, 개새끼들아…….”
빅터는 맞아서 너덜너덜해진 채로도 그를 구해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푸욱!
해적들이 그가 보는 눈앞에서 첫 관계를 가진 오메가를 검으로 찔러 죽였다. 갈비뼈가 우두둑 부서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찌르고, 그 오메가가 경련을 일으키자 잔인한 얼굴로 한 번 더 찍었다.
빅터의 발목을 휘어잡았던 가느다란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마르고 하얀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이 작은 몸에 이토록 많은 피가 흐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빅터는 멍한 눈으로 시체가 된 그를 내려다보았다. 피에 젖은 머리칼이 붉게 변해 있었다.
“으악!”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제발……!”
구석에 숨은 오메가 인질들이 피비린내에 울부짖었다.
첫 러트라 이성이 거의 없는 가운데서도 빅터는 코끝을 스치는 피 냄새를 맡고 반응했다. 그의 녹색 눈에 분노가 일었다.
“지금…… 누굴 죽인 거야?”
방금 관계를 가진 오메가가 죽은 것을 깨달은 빅터가 해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우락부락한 덩치 큰 해적에게 배를 차이고 피를 토했다.
“커헉!”
해적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 빅터를 노려보며 피 묻은 칼로 위협했다.
“네가 고른 오메가는 다 죽을 거야. 알겠어? 저 좁아터진 방에서 러트가 끝날 때까지 한번 잘 참아보라고.”
결국 그는 죽을 것같이 힘든 가운데서도 성욕을 참으려 했다.
자신이 붙들면 그 오메가는 죽는다. 아는데도 아직 미숙한 때라 인내심에 한계가 있었다.
정상적인 첫 러트는 보통 일주일가량 지속되었다. 억제제 없이 오메가들과 함께 갇힌 채 이틀이 넘어가자 빅터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오메가가 죽어나갔다. 빅터는 점점 미쳐갔다.
세 번째 오메가가 죽고 나서, 빅터는 선택했다.
아예 자신을 방 안에 묶어두기로.
옷을 찢어서 밧줄처럼 만든 빅터가 다른 오메가에게 부탁했다.
“날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줘.”
빅터는 남은 기간 동안 좁고 어두운 방에서 러트를 버텼다. 오메가들의 강렬한 페로몬 폭풍 안에서.
오메가들도 해적의 인질이라는 두려움에 점점 이성을 놓고 페로몬을 절제하기보다 방출하고 있었다. 도저히 보통 알파가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빅터는 버텼다.
겨우 풀려난 것은 돌아온 해적 수뇌부가 빅터를 발견했을 때였다. 반쯤 제정신이 아닌 빅터를 풀어준 그는 빅터를 이 지경으로 만든 해적들을 본보기로 처형했다.
일련의 소동 속에서, 빅터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첫 관계를 가진 오메가도 눈앞에서 죽었죠. 그 끔찍한 걸 어떻게 버티셨는지 저는 상상도 안 가요.”
쓸쓸한 레나의 말을 마지막으로 빅터의 첫 러트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하비는 할 말을 잃고 그 참상을 조용히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해적들이 잔인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사람을 몰아넣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주머니에 든 황금 브로치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아까보다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몰랐어…….”
모르는 것도 죄라고, 언젠가 그의 친구인 반 로투스 경이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다. 아버지가 했던 일들, 가장 친한 친구가 가졌던 열등감, 빅터가 겪어야 했던 일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지옥 같은 곳에서 죽어갔던 일까지.
레나가 다시 목소리를 밝게 바꾸어 상냥하게 말했다.
“모르는 게 스터스 경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다고요. 신도 아니고.”
하비는 따뜻한 말에 피식 웃었다. 어쩐지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신이 아니니까. 인간이니까,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마음속에서 스산한 느낌을 주는 어떤 찜찜한 덩어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모를 수도 있지만, 내가 알아야 했던 것들이 아닌가.’
복잡한 심경의 하비는 문득 생각난 것을 레나에게 물었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지?”
레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떤 거요?”
“내가 끝까지 회계사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다는 거.”
그건 신약 때문에 히트를 맞았을 때 빅터와 나눈 이야기였다. 하비는 당시 빅터가 분명 사용인들을 물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빅터의 성격에 주변에 떠벌리고 다녔을 리는 없다.
하비가 의심스럽게 그를 보자 레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꼬았다.
“저…… 그…… 제가 귀가 많이 밝은 편이라…….”
하비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다 들었다는 건가.”
“다는 아니에요! 아닙니다! 지극히 일부만……!”
이번에도 제 살을 깎아먹은 빅터의 집사는 아예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버렸다. 하비가 걱정된 그가 빅터의 방 근처에서 알짱대며 소리를 주워들었다는 걸 알면…….
‘경을 치겠지. 근신이 뭐야, 주인님한테 죽을지도 몰라.’
더군다나 나스타도 한 소리 할 것이다. 왜 자꾸 쓸데없는 일에 끼어드냐고 말이다.
하비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내가 모르는 게 뭐가 더 있지?”
레나가 콧잔등을 손으로 훑었다.
“그건 스터스 경이 무얼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미소 지은 하비가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의문을 꺼내 들었다.
“라힌 스터스 전 의원이 해적과 사적으로 접촉한 적은 없나?”
지금 와서 궁금해진 사안 중 하나였다. 빅터와 그의 사용인들이 이렇게까지 라힌 스터스를 증오하는 데는 분명 다른 이유도 있을 거라 판단해서였다.
하비의 물음에 레나는 양손을 허공에 빙빙 흔들며 격렬하게 부정했다.
“그, 그런 거 없었어요!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그, 그분이 그, 그랬을 리는 없잖아요? 스터스가의 명예로운 귀족이신데.”
자꾸만 혀가 꼬이는 자신이 원망스러운지 레나가 울상을 지었다. 격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하비는 의심스럽게 그를 보았다.
하지만 더 캐물으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 하비는 포기했다. 알아내려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으니까.
‘이제부터 시작인 건가.’
하비는 불쑥 비밀의 방에 있을 재무 회계사가 떠올랐다. 정신없이 보낸지라 그에게 환기가 잘되는 좋은 방을 내준다는 걸 잊었다.
“잠깐 집에 들렀다가 갈 테니, 먼저 돌아가.”
“예? 아니,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저희가 모셔다드릴게요.”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쌍둥이 사용인들이 그 소리에 한탄했다. 마부 역할을 자주 하는 쪽인 알파는 당돌한 집사의 말에 그를 지긋이 노려보기도 했다. 누구 마음대로 자기들까지 한데 묶어서 모셔다드린다 만다 하는 건지.
“왜요. 제가 못 할 말 했나요? 이제 우리 주인님의 엄연한 공식 연인이신데!”
레나도 지지 않고 그들을 마주 노려보았다.
‘공식 연인’이란 선포에 삐끗하긴 했지만, 지켜보던 하비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신경전에 웃었다. 그가 레나를 말리며 백마의 고삐를 살살 끌어당겼다.
“괜찮아. 말도 있고.”
하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다른 귀족의 집사에게 할 짓은 아니라 얼른 손을 거두었지만. 하비는 동생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내 편이 없는 상황을 너무 오래 버텨서, 반가운 걸지도 모른다. 빅터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집착과 괴롭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진정한 편이 없었다. 스터스가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동시에 고립된 외딴 성이었다.
그때 하비는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휙 돌려 출처를 쫓자 시선들은 마치 불 맞은 바퀴벌레처럼 싸악 사라졌다. 대부분 여인이었다. 귀해 보이는 드레스를 두른 것을 보니 귀족 영애들인 듯했다. 저들끼리 수군거리던 그들은 하비와 눈이 마주치자 부리나케 호들갑을 떨었다.
아까 레나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모르는 말씀을 하시네요. 귀족 영애분들이 그런 걸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알파 남자들끼리의 금단…….’
금단, 그 뒤로 이어질 말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 하비는 딱딱한 얼굴로 말을 타고 집으로 달렸다.
하비는 하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재무 회계사에게 괜찮은 방을 내주라는 명부터 내렸다. 그런데 씻으러 들어가려던 차에, 집사가 머뭇대며 말을 걸었다.
“저……. 주인님?”
“왜?”
말을 하고 나서도 한참 눈치를 보는 것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하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짓은 베르텐 경이 짓궂은 장난을 친 거다. 신경 쓰지 마.”
정확히 짚은 모양이었다. 집사가 눈에 띄게 안도하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휴……. 그럼 그렇지. 정말 걱정했지 뭡니까. 그럼 헛소문이라고 어서 공표하시는 게 어떨까요?”
하비는 아무렇지 않게 뒤돌았다. 어차피 소문을 정정한다 한들, 믿고 싶은 자들은 그리 믿을 것이다.
사람들은 후속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 없고, 전후를 따져가며 사실 여부를 파악하려는 자도 드물었다.
무엇보다 빅터가 가장 큰 변수였다. 그는 하비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명해도 마음먹은 이상 끝까지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테니까. 그쪽으로는 도가 튼, 수완 좋은 남자였다.
“내버려 둬. 마음대로 떠들라고 해.”
집사가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하비를 붙들어 세웠다.
“주인님! 이상하시네요. 저들이 스터스가의 명예를 더럽혔는데,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비는 집사에게 붙들린 팔을 천천히 떼어내며 냉소적으로 웃었다.
“이제 잘 모르겠군. 가문의 명예라는 거.”
그리 잘나고 깨끗한 것이었는지, 이제 와선 알 수 없어졌다. 원래 존재하긴 했었는지조차 불투명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