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협박
채앵!
검끼리 부딪쳐 내는 맑은 소리가 퍼져 나갔다. 천장의 반짝이는 크리스털 장식 아래, 기품 있어 보이는 남자 여럿이 레이피어를 들고 각기 대련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유력 정가의 사람이나 작위 있는 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사교 소드 클럽이었다.
이중 가장 주목을 받는 무리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바로 유망한 외교관인 하비 스터스 경의 대련이었다.
그는 친구인 반 로투스 경과 레이피어를 맞대고 솜씨를 빛내고 있었다. 문제는 오늘따라 하비 스터스 경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대련 상대인 반 로투스 경이 그날따라 기나긴 수다를 뽑아내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평소대로라면 반은 기세에 몰려서 한마디도 못 했을 것이다.
반이 팔을 휘두르며 투덜댔다.
“이딴 간지러운 검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아무리 기사도가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챙!
불평과 함께 얇고 긴 검이 부딪쳐서 맑은 공명음을 냈다. 잘 세공된 레이피어였다. 구부러질 정도로 가는 검이었지만 끝은 뭉툭하고 둥글어서 찔려도 죽지 않을 정도로 무뎠다. 하지만 무딘 검끝과는 달리 검을 잡고 휘두르는 두 남자의 검술은 날카로웠다.
끼긱!
두 개의 검이 가까이 맞붙었다. 파들대며 떨리는 칼끝이 서로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두 남자는 상대의 약점을 찌를 기회를 노리며 빙빙 돌았다.
하비는 움직일 때마다 몹시 힘들어 보였지만 반은 땀을 잔뜩 흘리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고작 귀족들의 유행으로 소모되다니, 너무 아깝지 않나? 그 두껍던 검도 사교계 영애들처럼 호리호리해졌고 말이야.”
하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씹을 뿐이었다.
끼기긱!
비등한 힘으로 부딪친 두 개의 길고 얇은 검이 맞붙은 채 원을 그리며 돌았다. 체격은 비슷했지만 숙련도는 하비 쪽이 좋았다. 게다가 힘을 비축했다가 필요할 때 뽑아내는 능력도 좋았다. 하비는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와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허리, 단단한 팔에서 폭발적인 힘을 내곤 했다.
하비의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실력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검을 맞댄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하비가 현재 뛰어난 기술을 쓰는 것도 아닌데, 팔과 어깨까지 징징 울렸다. 반은 고작 이런 가벼운 동작에도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다시 입을 놀렸다.
“어디 아픈가? 아까부터 이상한데. 아니, 오늘 여기 올 때부터 이상했어.”
줄곧 침묵하던 하비가 열에 들뜬 얼굴로 낮게 일갈했다.
“시끄러워.”
까앙!
그가 힘을 주어 친구인 반을 떨쳐냈다. 기어이 기 싸움에서 미끄러진 반의 검이 물러났다. 그때 옆 무리에서 시끄러운 환호성이 들렸다.
“와아아!”
“역시, 빅터 베르텐 경!”
“또 이겼나?!”
스터스 경 외에 사교 소드 클럽에서 주목받고 있는 자였다. 빅터 베르텐. 돈으로 작위를 산 신흥 귀족이자 현 정계 의원이었다.
하비 스터스는 빅터 베르텐의 이름을 듣자마자 지나치게 움찔했다. 하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그쪽으로 던지고 말았다. 크나큰 실수였다.
그의 친구인 반 로투스가 야비하게 웃음 짓더니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허점을 발견하고 찌르듯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어딜 보고 있나!”
깡!
하비가 재빨리 방어했지만 이미 늦었다. 반의 공격에 검이 튕겨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심지어 그대로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반은 숨을 몰아쉬며 씩씩대면서도 넘어진 하비의 목에 검끝을 겨누었다. 오늘은 반 로투스 경의 승리였다.
하비는 목을 꾹 누르고 있는 차가운 검의 촉감에 비스듬하게 웃었다.
“경이 기사도를 논하니 웃기는걸.”
주변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귀족 청년들이 한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하비 스터스 경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몹시 실망스러웠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경기였기에 이들의 시선은 곧장 옆 무리인 빅터 베르텐으로 향했다.
반도 그제야 옆 무리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빅터 베르텐 의원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안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겨누었던 검끝을 치워주었다.
“날 비난하는 건가? 허점을 보인 자네 잘못이지.”
반이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하비도 마주 웃으며 친구의 손을 꽉 잡고 볼썽사납게 넘어진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아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앉은 채로 조금 쉬기로 했다.
그때 하비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 떨었다. 근원지를 찾아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시선의 주인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분명…….
‘빅터 베르텐, 그 자식인가.’
금발을 깔끔하게 자른 빅터는 주변의 칭찬과 찬사를 받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화려한 웃음이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하비는 알고 있었다. 저 웃음이 얼마나 위험하고 음험한 것인지를.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날카롭고 뱀 같은 눈이 남아 독을 품고 사람들을 주시하곤 했다.
‘가식적인 놈.’
하비는 친구인 반의 손에 의지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켰다. 어젯밤의 여파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물론 하비는 지금도 충분히 괴로웠다. 하얀 얼굴이 붉게 익어 터지기 직전이었다. 반이 그를 수상하게 보며 턱을 만지작댔다.
“근데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며칠 병치레로 외부 일정을 모두 취소하더니, 아직 안 나았어? 진찰이라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검에 실린 힘도 형편없었단 말이지. 자네가 아프면 나라의 큰 손실이라고.”
건장한 신체와 명석한 두뇌, 젊고 잘생긴 외모로 능력 있는 외교관으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하비 스터스 경은 검술마저 훌륭했다. 그는 또래들도 인정하고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인사였다.
그러나 요즘은 새로 떠오른 인물 때문에 전보다는 인기가 다소 식었다.
“난 괜찮아.”
하비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친구를 안심시켰다.
“안 그래도 자네 말대로 급한 일만 끝나면 쉴 생각이야. 난 이만 가보지.”
“부축이라도 해줘?”
“아니, 됐어.”
그때 반이 코끝을 찡그렸다. 그러곤 무슨 냄새라도 맡은 듯 개처럼 킁킁댔다. 알파인 사내들만 잔뜩 모인 이곳에서 나서는 안 될, 처연하고도 아름답기까지 한 향이었다.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사교 소드 클럽은 알파반과 오메가반으로 나뉘었다.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라 억제제를 먹어도 종종 사고가 일어나서 취한 조치였다. 물론 이와 상관없는 베타는 아무 반에나 들어갈 수 있다.
반이 놀람을 감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몽롱한 눈빛이었다.
“이게 무슨 향이지? 엄청 좋은 냄새야. 옆 반에서 여기까지 건너온 건가?”
하비는 순간 눈을 크게 치켜떴지만, 얼른 기색을 숨기고 모른 척했다.
페로몬 억제제를 챙겨 먹었는데도 누군가가 눈치를 챘다. 빅터가 준 것이긴 하지만 아무리 교활한 그라도 가짜 억제제를 줬을 리는 없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행위일지라도 지금껏 하비는 충실하게 빅터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비는 정체 모를 향이 난다는 반의 의문을 뒤로하고 비틀대면서 탈의실로 향했다.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생겨서였다. 이대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 같았다.
‘개자식……! 이런 걸 넣고 생활하라고 하다니…….’
오늘따라 유독 하비의 안색이 파리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안쪽에 마련된 고급스러운 탈의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빅터 베르텐의 활약으로 청년들은 모두 밖에 있었다. 사람이 없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확인한 하비는 옷을 모두 벗고는 단체 샤워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수증기가 장막처럼 하비의 주변을 둘러쌌고, 그는 그때야 안심했다. 이것만 몸에서 빼내면 괜찮을 것이다.
하비는 온몸으로 물줄기를 맞았다. 갈색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뜨거운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어깨와 부딪쳐 여기저기 튀어나갔다. 나머지 물줄기는 보기 좋게 발달된 복근으로 흘러내렸다. 아래로 계속 흐른 물은 잔뜩 발기한 그의 페니스를 천천히 기다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비가 괴로운 듯 신음을 뱉었다.
“하아, 하아…….”
일부러 일정에 앞서 사교 소드 클럽에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외부 일정을 돌기에는 단단히 선 페니스 때문에 힘들었다. 그나마 사교 소드 클럽에서 몸을 격하게 움직이면 흥분으로 서는 일이 종종 있어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다음 외부 일정을 위해서는 ‘이것’을 빼야 한다. 심호흡을 한 하비가 천천히 손을 뒤로 향했다. 멈칫하긴 했지만 순조롭게 그의 긴 손가락이 뒷구멍으로 들어갔다.
“윽…….”
하비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구멍으로 손가락이 들어갈수록 다리가 후들거리다 못해 꺾일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이것만 빼면 돼. 이제 괜찮겠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제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왔다. 하비는 이를 악물고 계속 감행했다. 이리저리 휘젓던 손가락이 구멍 안쪽 어딘가에 걸렸다.
‘이건가.’
샤워실 벽에 기댄 하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집을 나선 순간부터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원흉이었다. 구멍 깊숙한 곳에 동그랗고 작은 구슬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긁어서 빼내기는 쉽지 않았다. 잘못 건드려서 하필 느끼는 곳을 눌러 버려 더욱 고역이었다. 구슬이 애액 때문에 더 미끈대면서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안 돼……!”
하비가 눈을 홉뜨면서 절정을 맞았다. 머릿속이 끔찍한 쾌감으로 하얗게 비었다. 아슬아슬하게 터질 듯 말 듯하던 성기가 뿌연 정액을 흘렸다. 샤워기에서 뿜어내는 물과 정액이 섞여 가랑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흐읏……!”
하비는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벽에 머리를 댄 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는 멍한 눈으로 절정의 여운을 느꼈다. 참았던 만큼 오르가슴도 길어서 발가락이 휙 일제히 곱았다. 입도 반쯤 벌어졌고, 턱 끝도 바들거렸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하비를 깨웠다.
“힘들어 보이는군.”
여운에 잠겨 있던 하비는 샤워실에 길게 드리워진 사람의 그림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좋아하는 건가?”
깜짝 놀란 하비는 그제야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미끄러졌다. 하지만 재빨리 다가온 누군가가 그의 팔을 꽉 잡아주어서 바닥에 머리를 박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이쿠, 조심하셔야지.”
가벼운 휘파람 소리가 그의 예민해진 목뒤로 직격했다. 하비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다가 멀어지던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잡아준 사람은 금색 머리의 체격 좋은 미남자였다.
빅터 베르텐, 그다.
하비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차라리 넘어져서 뇌진탕이나 걸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머릿속을 스쳤다.
하비의 아우성치는 속마음과는 달리 빅터는 침착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도와줄까?”
하비가 이를 갈았다.
“꺼져.”
빅터는 욕을 들으면서도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노란 눈썹을 덮은 금발 아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대련하던 옷을 그대로 입고 들어온 그는 하비를 잡아주느라 옷이 다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하비는 빅터에게 조금의 미안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이 지경이 되도록 궁지에 몰린 것도 빅터 베르텐 때문이었으니까.
지금도 빅터는 하비를 일으켜 주는 척하면서 그의 팔을 바짝 당겨 압박을 넣고 있었다.
“현직 의원에게 꺼지라니. 어젯밤에도 좋다고 안겼으면서 너무한 거 아닌가.”
하비는 입술을 거세게 물고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참아냈다. 며칠 동안 빅터에게 지독하게 시달린 탓에 심한 근육통이 팔에도 알알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빅터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제 괜찮으니 팔을 좀 놓아줬으면 하는데.”
“걱정해서 기껏 여기까지 와줬더니.”
하비는 눈썹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걱정? 아무래도 빅터 베르텐 경은 걱정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축객령이 분명한 날 선 하비의 시선에도 빅터는 나가지 않고 젖은 옷을 아예 훌훌 벗었다.
“다른 알파 놈들이 눈치챌 것 같아서. 그 가랑이 벌린 것 같은 향 좀 그만 흘리지 그래?”
“네가 나한테 먹인 빌어먹을 약 때문이잖아. 난 원래 알파…… 라고.”
하비는 이제 말하는 것도 힘겨웠다. 빅터가 팔만 쥔 것이 아니라 허리춤을 들이밀고 은근히 구멍 쪽에 문질러서였다. 비비는 듯한 허릿짓에 하비가 헛숨을 들이키며 잘게 떨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격렬함이 그를 무력하게 했다.
하비의 반응에 차갑게 웃은 빅터가 속옷까지 빠른 기세로 벗어 샤워실 어딘가로 던졌다. 검술로 잘 정제된 하비의 날렵하고 세련된 체격에 비하면 빅터는 좀 더 날것의 탄탄한 몸이었다. 젖어서 달라붙은 옷을 모두 던진 빅터가 주춤 몸을 빼는 하비를 뒤에서 붙들었다.
“그럼, 얼마나 잘 품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
하비의 등 뒤에 선 빅터가 그의 구멍에 손가락을 몇 개 집어넣었다. 느릿하게 휘저을 때마다 쿨쩍대는 음란한 소리가 났다.
차각차각!
구멍 안 구슬끼리 부딪쳐서 나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벌써 안이 젖다 못해 애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을 넣은 것만으로도 하비는 숨을 헐떡대며 자지러졌다. 탄탄하고 길게 뻗은 하비의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가 뻣뻣해졌다.
“흐학! 아……! 응…… 그만!”
빅터가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벌써 훌륭한 오메가가 되었어.”
하비는 고개를 숙이고 구멍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이겨내려 애썼다.
“임시로 몸이 착각해서 변하는 거지만, 효과는 충분하군. 여기, 미끈거리고 축축한데?”
뭐라 항의하려던 하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샤워기에서 내린 물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깊은 곳이었다. 빅터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구슬은 빼줄까? 곧 외부 일정일 텐데. 회담 테이블에 서야 하는 몸 아닌가?”
구멍 속 손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빅터가 다른 손으로 하비의 페니스를 꽉 쥐었다. 그러곤 제 품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늘씬하고 단단한 몸을 즐겼다.
“이걸 세우고 뒤로는 느끼면서 회담을 할 생각인가? 그럴 거면 계속 품고 있고.”
그때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비의 굳건하던 눈이 흔들렸다. 이런 현장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의 정치 인생은 끝이었다. 오랜 기간 쌓아온 스터스가의 명성도 여기서 모조리 파도 맞은 모래성이 된다.
‘안 돼…….’
인기척을 눈치챈 빅터가 빠른 손놀림으로 샤워기의 수압을 높였다.
쏴아아아아!
더운 물안개가 짙어지고 물줄기 소리가 한층 강해졌다. 그럼에도 빅터의 음성은 하비에게 또렷하게 닿았다. 소름이 돋도록 낮은 목소리였다.
“매달리고, 사정해서 내 마음을 돌려봐. 아님, 예쁜 짓이라도 해보든가. 그럼 빼주지.”
하비는 급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그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제 한 몸의 고루한 자존심보다는 눈앞에 닥친 가문의 파멸을 막는 것이 먼저였다. 하비는 혼란스러웠다. 고작 돈으로 의원직을 산 비천한 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스터스가를 더 욕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당장의 큰 부끄러움이 하비의 눈을 흐렸다.
빅터의 손을 쳐낸 하비가 뒤돌았다. 분노와 굴욕으로 그의 밤색 눈이 파리하게 떨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건가. 이 굴종의 끝은 존재하는가.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스터스가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겠지.
하비의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멈추는 것을 보고 빅터가 비웃었다.
“아, 그걸 넣고 있는 게 더 좋다고? 그런 거면 말리지 않겠어.”
빅터는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굴었다. 그를 놓치면 구슬을 뺄 시간도 없었다. 결국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두워진 얼굴로 하비가 무릎을 꿇었다.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그리 자신을 억지로 납득시키며 자존심을 버렸다.
“빨리, 뭐든 할 테니까 이것 좀 제발…….”
빅터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엎드린 하비를 고고하게 내려다보았다. 거세게 악문 하비의 입술에서 벌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빅터가 아무 말이 없자 하비는 샤워기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굵고 다부진 하비의 등이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갈대 줄기처럼 길게 늘어졌다.
“부탁합니다, 베르텐 경.”
하비의 입술이 터져 흐른 피가 뜨거운 물에 섞여 하수구로 흘러들었다. 붉은 핏물이었다. 그걸 내려다본 빅터가 삐딱하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론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도 뚜렷한 걸음걸이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빅터는 곧 웃음기를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깥과 하비의 달아오른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그가 결정했다.
“어쩔 수 없나.”
혀를 찬 빅터가 하비를 일으켜 세웠다.
“뭐든 한다고 한 거, 잊지 마시길. 하비 스터스 경.”
마지막까지 이죽거린 빅터가 하비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러곤 하비의 뒷구멍에 손가락 몇 개를 깊게 밀어 넣었다.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딸각!
여러 개로 뭉쳐 다니던 구슬이 빅터의 손가락에 대번에 걸렸다. 하비는 수차례 시도해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빅터는 빠를 뿐 아니라 너무 쉽게 했다.
“흐윽……!”
하비가 무너지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방금 손짓으로 또 갔다. 미칠 것 같은 드라이 오르가슴이 그를 벅차도록 덮쳤다. 애액이 터져서 그의 뒷구멍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하비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신음이 자꾸만 새어 나갔다.
“으응……! 하윽! 큭!”
빅터는 하비에게서 강렬하게 나는 오메가 특유의 페로몬 향에 미간을 구겼다. 언제 맡아도 자극적이었다. 당장에라도 박고 싶은 유혹적인 향이었다. 강렬하면서도 시원한, 그가 잘 아는 어떤 꽃의 향과도 몹시 닮았다.
‘이러다 다른 놈들이 다 알겠군.’
빅터는 자신의 우성 알파 페로몬을 방출해 하비의 것을 짓눌렀다. 둘 다 알파이니만큼 평소라면 좀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하비가 많이 약해진 터라 쉬웠다. 게다가 지금 하비는 어설픈 오메가가 된 것이라 페로몬이 불안정했다. 임시방편이지만 잠시나마 다른 사람들의 후각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딸각딸각!
빅터의 손가락이 더 빨리 움직일수록 하비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흰자가 보였다. 하비는 너무 느껴서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잘 단련된 하비의 어깨와 허벅지가 속수무책으로 경련했다.
구슬을 빼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절정에 달한 하비는 사람들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쯤 완전히 쓰러졌다. 빠진 구슬들이 빅터의 손에 온전히 들어간 순간, 사람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샤워실에서 싸우고 있는 거 아냐? 페로몬을 이렇게나 뿌려대는데, 뭔가 이상하다니까.”
“그러게. 아니면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어?”
빅터는 안을 가득 메운 증기를 없애기 위해 샤워기를 껐다. 불쑥 들어온 청년이 둘의 상황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지금 쓰러진 게 스터스 경인가?”
고개를 끄덕인 빅터가 구슬을 잡은 손을 꽉 쥐어 숨겼다. 그러곤 다른 자에게 부탁해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하비를 일으켜 세웠다.
“탈의실에 있는 내 옷 좀 가져다주겠나? 스터스 경이 갑자기 쓰러져서 부축해 주느라 다 젖었어.”
하비는 받쳐주고 있는 빅터에게 체중을 실은 채 넋이 나가 있었다. 기대고 있는 자가 빅터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사이 다른 자가 또 들어오고, 호들갑을 떨어 사람들이 더 몰렸다.
빅터는 다른 청년이 가져온 옷을 받아 입었다. 그러곤 옷 속에 미리 숨겨뒀던 약을 사람들 몰래 꺼내 정신없이 떠는 하비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연속된 오르가슴에 거의 이성을 잃은 터라 하비는 슬쩍 입에 넣어준 약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했다.
빅터는 사람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속으로 웃었다.
‘이럼 당분간은 괜찮겠지.’
그가 먹인 것은 하비를 오메가로 만든 약의 효과를 무효화하는 성분의 약이었다.
신약은 알파를 오메가로 완전히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몸을 속이는 것이라 호르몬도 일시적으로 바뀌고, 오메가의 체형으로 변화하는 것도 오래 복용할 때나 서서히 이루어졌다. 방금 것으로 곧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오메가 페로몬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빅터는 이 즐겁고 아슬아슬한 게임을 벌써부터 남들이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비가 신약으로 체질을 넘나들며 고통스러워한다는 건 아무도 몰라야 했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반 로투스 경이 뛰쳐 들어와 하비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 이게 무슨! 이 친구 왜 이래?”
누군가는 의사를 부르러 뛰어나갔고, 몇몇은 다가오지는 않고 멀찍이서 쓰러진 하비를 눈으로만 훑었다.
“며칠 아프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요즘 소야 회담에 힘쓰느라 무리했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래서 아까 대련도……?”
온갖 추측과 수군대는 소리가 그들을 수증기처럼 에워쌌다. 빅터가 반을 제치고 앞으로 다시 나선 뒤 하비를 업으려 했다.
“의사를 불러오는 것보다 내가 업고 가는 게 빠르겠어. 다들 비켜주게.”
하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비가 사태를 알아채곤 빅터를 밀쳐냈다.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하비가 낮게 으르렁댔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밀쳐진 순간 빅터의 눈이 뱀처럼 늘어났지만 하비는 못 본 척했다. 어쨌든 자존심을 팔아넘긴 결과 구슬은 정말 빼준 모양이었다. 잔여감이 남아 몸 안이 계속 뜨겁긴 해도, 견딜 만했다.
‘아까보다 훨씬 나은데.’
하비는 빅터가 몰래 약을 넣어준 것을 모른 채 걱정하는 반과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천천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킨 그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아. 잠시 어지러워서 쉬고 있었던 거지. 다들 호들갑 떨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해.”
하비는 어질거리는 이마를 짚고 균형을 잡느라 벽에 좀 더 기대어 있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는 반의 주장에도 하비는 회담 일정을 감행했다. 모두를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하비는 평소처럼 고고하게 사교 소드 클럽을 떠났다.
빅터 베르텐은 힘들어 보이는 하비의 넓은 등을 말없이 보았다. 그러다 곧 몰려오는 주변 귀족 청년들의 격려에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이 자리에 없는 하비 스터스를 욕하며 빅터를 추켜세웠다.
“스터스 경이 평소에 그리 경을 비아냥댔는데도 그런 신사적인 태도라니, 정말 감명받았다네.”
“아까 봤어? 도와줘도 화를 내던걸.”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주변인들이 더 열을 냈다.
“신경 쓰지 말게. 우린 자네 출신이 어떻든 자네를 지지하니까. 고리타분한 스터스 가문 사람들이 뭘 알겠어.”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가 오늘따라 빅터의 목을 죄었다. 그는 답답한 듯 하얀 러플 블라우스 목단을 잡아 펄럭였다. 달아오른 열이 아직 식지 않았다. 그만 아는 하비 스터스 경의 달큰한 향이 코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빅터는 쓰레기통에 처박은 구슬을 고갯짓으로 흘끗 보았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구슬 여러 개가 오물로 젖은 채 빛났다.
* * *
“정말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집사가 그리 말리는데도 기어코 하비는 마차에 올라섰다. 집사는 갈색 머리에 차분한 검은 눈을 지닌 청년이었다. 스터스가에서 오래 일하던 늙은 집사는 노환으로 죽어서 그의 아들이 집사 일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마부에게 마차를 천천히 몰라고 신신당부한 집사는 연거푸 하비를 말렸다.
“괜찮대도.”
걱정스러운 눈망울이 마음에 걸린 하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집사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베르텐 경이 다녀가기만 하면 몸이 너무 안 좋아지시는데,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의사를 부르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막으시니 더 걱정이 됩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찌르고 들어온 말이라 하비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마음속 동요를 포커페이스로 빠르게 감춘 하비가 입단속을 명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 베르텐 경이 우리 집에 드나든다는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대외적으로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
“여기서 더 안 좋아질 게 있겠습니까만……. 알겠습니다.”
그러나 집사는 하비의 완강함을 이기지 못했다. 슬그머니 다가온 하비의 매서운 눈초리에 그는 입술을 삐죽댔다.
빅터가 오기만 하면 사용인을 전부 물리고 비밀스럽게 둘이서만 방에 틀어박히니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집사조차 물리고 절대로 오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집사는 이제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분 눈빛도 영 마음에 안 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베르텐 경을 좋아하지만 저는 아니라고요.”
집사의 투덜거림을 조금 들어준 하비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부가 집사의 잔소리를 깊이 새겼는지 조심한답시고 너무 천천히 몰았다.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띠고 들렸다. 하비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시원하게 내달리는 느낌을 원했다.
‘그냥 말을 타고 갈 걸 그랬나.’
하지만 집사의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몸도 안 좋은데 말을 타고 가면 어떡하냐는 잔소리가 몇 절로 이어질 것 같아 마차로 갈아탄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간다고는 하지만 길이 잘 닦이지 않은 곳은 어쩔 수 없었다.
덜컹!
하비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반나절 동안 민감한 곳에 구슬을 품고 긴장했더니 속이 너무 안 좋았다. 유들거리는 빅터의 얼굴이 떠오르자 구토감마저 일었다.
‘빌어먹을 놈.’
하비는 메슥거리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회담 자리까지 가는 길이 너무 길었다.
하비가 빅터 베르텐을 알게 된 건 꽤 오래전이었다.
예전 세간을 들썩이던 해적 납치극이 있었다. 주동한 것은 임페르 해적단이란 곳으로, 국력이 강한 국가들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던 악명 높은 해적들이었다. 임페르 해적단은 일부러 부자들이 타는 호화 여객선을 노려 그들의 가족, 특히 아이들을 유괴했다. 그리고 큰돈을 요구했다.
임페르 해적단은 올란시의 의원에게 요구했다. 가문을 이을 소중한 아이들의 목숨을 얻고 싶다면 한 아이당 천만 페르를 내놓으라고.
하지만 하비 스터스의 아버지이자 그 당시 올란시의 재선 의원이던 라힌 스터스 경은 절대로 해적과 타협하지 않겠다 선포했다. 부자들이 반발했지만 라힌 스터스 경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폭력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지론이었다.
‘국가의 돈을 이런 일에 내어 줄 수 없소이다. 우리는 폭력 단체와 협상하지 않습니다. 원칙은 원칙. 하지만 최선을 다해 해적들을 설득해 보이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라힌 스터스 경의 연설은 바다 위의 해적단에게도 전해졌다. 해적들은 스터스 경을 비웃었다. 해적단의 이름이 ‘임페르’인 것도 일확천금을 뜻해서였다. 그들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인도적인 방법이 통할 리 없었다.
결국 해적들은 인질들을 하나하나 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 그다음에는 손가락, 발가락, 그런 식으로 협박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부자들끼리도 둘로 나뉘었다. 라힌 스터스 의원을 지지하는 쪽, 그렇지 않은 쪽으로.
지지하지 않는 쪽의 몇몇 부자는 진작 은밀하게 돈을 보내 자신의 아이를 빼 오기도 했다. 스터스 의원을 지지하는 쪽은 스터스 의원이 해적 인질 사태를 해결하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러다 드디어 사망자가 나왔을 때, 참지 못한 부자 하나가 라힌 스터스 의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돈을 건네주었다.
불안에 떨던 다른 부자들도 스터스 의원의 지지를 철회하고 너도나도 돈을 해적에게 내어 주었다.
딱 하나, 빅터 베르텐의 조부인 레토 베르텐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지독한 구두쇠였고, 돈의 힘을 광적으로 믿는 자였다. 평민 출신이었지만 오로지 돈 하나로 작은 귀족 가문을 통째로 사들였다.
심지어 레토 베르텐은 돈에 있어서는 가족도 없는 냉혈한이었다. 그는 가문을 이을 손자는 여럿이라며 빅터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빅터의 부모가 아들을 살려야 한다며 반대했지만 워낙 레토 베르텐의 힘이 강력해 어쩔 수 없었다. 빅터의 부모는 지원하던 생활비를 끊겠다는 레토 베르텐의 협박에 굴복했다. 아들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을 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빅터는 가문에서 버림받았고, 다들 그가 해적들의 손에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성인이 된 빅터가 거대 해양 상단을 꾸려 고국으로 되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덜컹덜컹!
마차에 실려 창백한 얼굴로 바깥을 보던 하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커피하우스가 보였다. 고급스러운 외관에서 돈을 바른 흔적이 여실히 드러났다.
‘저것도 그 자식이 들여온 거였지.’
하비 스터스는 그가 돌아온 직후 있었던 대소동을 똑똑히 기억했다.
빅터가 화려하게 귀환한 뒤 꽤 오랫동안 몇 개 없는 신문의 헤드라인은 모조리 그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
빅터 베르텐 경, 생환!
임페르 해적단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다!
황금을 물고 온 남자!
커피하우스 대성황!
한 가십 신문에서는 논평을 통해 빅터를 황금 뱀에 비유했다. 황금만 보면 물고 절대 놓지 않는다는 전설의 뱀이었다. 그때부터 대부분 사람들이 빅터를 그리 불렀다.
빅터는 거대 해양 상단을 이끄는 리더답게 돈이 될 만한 것은 귀신같이 알아보고 투자했으며 반드시 큰 수익을 냈다. 커피와 고급 향신료 같은 것들을 들여온 것도 빅터였다.
커피하우스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정치, 예술 등을 논하는 귀족 청년들의 모임이 생겼다. 몇 년이 지나면서 커피하우스는 대중적으로 여러 계층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혁신이었다. 그리고 시류를 이끈 빅터는 돈을 끌어모아 거부가 되었다.
하비가 탄 마차는 커피하우스를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하비의 머릿속에 끈덕지게 자리 잡은 빅터는 도통 지나갈 생각을 않았다. 아예 똬리를 틀고 하비의 상념을 온통 차지했다.
‘갑자기 정계에 뛰어든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는 안다. 하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빅터는 사람들 앞에서 적절하게 쇼를 하더니, 아예 의원직을 사버렸다. 정확히는 돈으로 관련자를 모조리 매수하고, 선거권이 있는 자들에게는 선의를 빙자한 거액의 기부를 해댔으며, 그들이 사는 곳에 부를 가져올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결국 빅터는 의원직을 돈으로 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비는 그리 생각했다. 게다가 빅터가 꿰찬 그 자리는 하비 스터스의 아버지가 있던 자리였고, 하비가 거절한 자리이기도 했다.
처음엔 하비는 빅터가 왜 그렇게 올란시의 의원 자리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빅터가 먼저 그에게 접촉해 왔다. 첫 만남에서 하비는 빅터의 속내를 알게 되었다. 하비는 그제야 사람들이 빅터의 진면목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빅터 베르텐, 그자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복수’란 이름의 악마였다.
“거의 다 왔습니다.”
빅터에 대한 생각이 길어질 때쯤, 마부가 그에게 언질을 주었다.
드디어 마차가 멈추자 하비는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내렸다. 그것이 빅터가 먹인 약 때문일 거라고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로 그는 준비된 장소로 향했다.
소야 회담은 중요한 자리였다. 중계 무역으로 먹고살던 하비의 모국을 둘러싼 강대국끼리의 어깨 싸움이었다.
여태까지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했지만, 이곳에서만 나는 귀한 품종의 꽃 때문에 투기 광풍이 불었다.
주변 강대국들은 너도나도 그 꽃을 원했고, 그 과정에서 다툼이 일었다. 이쪽에는 얼마로 팔았는데 저쪽에는 더 높게 판다든지, 공급량에 차별을 둔다든지 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갈등이 생겼다.
이미 귀족 사회에서 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을 정도로, 그 꽃은 움직이는 돈 그 자체였다.
하비가 바삐 움직이는 타지의 외교관들을 한심해하는 눈으로 보았다.
‘그깟 꽃이 뭐라고.’
하지만 사태는 심각했다. 하비가 안 좋은 몸을 이끌고 와야 할 만큼 전운이 감돌았다.
웃지 못할 분위기 속에서 하비는 회담장에 도착했다. 하비는 수석 외교관이었고, 먼저 도착한 외교관들이 그를 반겼다. 그런데 왠지 다들 난감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 의아하던 차, 하비는 그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여기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하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입을 벙긋대다가 겨우 말했다.
“베르텐 경이 왜 여기에…….”
빅터가 그곳에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제자리인 것처럼 편안하게 회담장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하비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빅터는 느긋하게 웃으며 깍지를 끼고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왜요. 제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득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은 하비가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올란시의 의원님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꼰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꾸며 빅터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우리 시에서 열리는 회담이니까, 당연히 의원인 제가 신경 써야 하지요.”
“지금쯤 더 중요한 일이 있으실 텐데요? 오늘은 올란시에서 가장 큰 고아원을 여는 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이들이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하비는 빅터가 가장 큰 고아원의 후원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 점을 지적하며 굳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여태 하비는 빅터가 불쾌해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표현하길 참아왔다. 그러나 어차피 사교 소드 클럽에서의 일로 말이 번질 것이다. 더 조심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빅터는 역시 만만치 않은 자였다. 그가 진득하게 미소 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그것보다 이쪽이 더 급해 보여서 말입니다.”
“더 급하다니, 그게 무슨 말…….”
하비의 의문은 곧 풀렸다. 수염이 희끗희끗한 총괄 외교관이 들어오더니 빅터에게 크게 허리를 숙인 것이다. 얼결에 하비도 빅터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양쪽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는 하비를 뒤에 두고 총괄 외교관이 만면 가득 빅터를 향한 환영을 담았다.
“벌써 오셨습니까? 급히 부탁드린 건데도 이리 달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의원님.”
빅터는 총괄 외교관이 들어온 순간부터 공손하게 굴었다. 자세도 이미 바꿔서 어른을 향한 예를 갖추고 있었다.
“뭘요. 제가 나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오히려 이런 기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없던 겸손까지 떠는 것을 보며 하비는 기막혀했다. 입에 아주 기름을 칠한 것 같았다.
하지만 총괄 외교관은 빅터의 태도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벌써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하비는 이쯤 되니 대체 저 철면피가 무슨 일로 온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총괄 외교관의 눈이 애정으로 반짝거리더니 그가 빅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 수 있으면 입이라도 맞출 것 같은 맹렬한 기세였다.
총괄 외교관에게 손을 잡힌 순간 빅터의 입매가 잠시 일그러졌지만 아무도 몰랐다. 뚫어지게 그를 보고 있던 하비만 잠깐의 변화를 눈치챘을 뿐이었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의 소유권을 가진 게 의원님이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하비가 그제야 깜짝 놀라 여유롭게 웃고 있는 빅터를 보았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는 명품 품종 중 가장 상급으로 치는 꽃이었다. 투기 목적으로 거래되는 꽃이니만큼 가격이 천정부지였다. 꽃의 알뿌리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생기는 특이종이라 재배하기가 굉장히 까다롭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게다가 바이러스로 생기는 꽃이니만큼 공급도 제한되어 가격은 나날이 치솟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소유한 사람이 누구냐였는데. 여태 비밀로 하다가 왜 지금 와서?’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천에 널렸는데 직접 접촉할 소유주가 철저히 정체를 가리고 있어서 다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꽃의 농장주는 재배권을 가진 소유주가 허락하는 사람에게만 꽃을 팔았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으니 소위 높은 사람들은 소유주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우위인 편한 거래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신이 매달려야 하는 거래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니 총괄 외교관으로서는 빅터에게 키스를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손에 쥐면 강대국들을 좌지우지할 최고의 패가 마련된 셈이니까.
“물론 우리 의원님께서 타국에 정식으로 파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가 말끝을 흐리며 빅터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하비는 총괄 외교관이 너스레를 떨며 빅터의 환심을 사려 애쓰는 것을 떨떠름하게 보았다.
생각해 보면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빅터이니 큰돈이 될 명품 품종에 미리 손을 써두었을 것이 뻔했다. 그가 괜히 골든 스네이크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셈페르 아우구스투스까지 손을 댔을 줄은.’
하비가 심란한 마음으로 보는 동안 빅터가 빙긋 웃었다.
“걱정 마시죠. 제가 괜히 그간 가렸던 얼굴까지 팔아가며 이곳에 왔겠습니까. 국익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의 확답에 총괄 외교관의 얼굴도 활짝 폈다. 걱정하던 다른 외교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하비만이 어두워진 얼굴로 회담장을 둘러보았다.
수석 외교관 하비 스터스 경의 얼굴에 드리워진 먹구름과는 별개로 회담은 빅터를 중심으로 굴러갔다. 빅터는 속속히 회담장에 도착하는 타국의 외교관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중 몇 명이 빅터를 보더니 반색했다.
“오, 자네 왔는가!”
“소유주가 자네인 걸 알았으면 먼저 말할 것을 그랬어.”
그들은 질세라 빅터에게 접근하며 호의를 보였다. 빅터를 아는 외교관이 있는 쪽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전혀 모르는 쪽은 패색이 짙었다.
“하하! 그러실까 봐 여태 숨긴 겁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니까요.”
하비는 대체 그의 돈과 인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졌다.
‘해상 무역을 주름잡았으니 타국에 아는 자들이 없을 리도 없지만.’
회담은 시작도 하기 전인데, 이미 빅터가 모두 끝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비는 어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 * *
회담은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평화적으로 끝이 났다. 빅터가 총괄 외교관에게 했던 호언장담대로 전쟁까지 불사하려던 강대국 쪽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빅터가 공평하게 차별 없이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주변국들에 공급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귀한 품종이 안정적으로 수급되기만 한다면 피차 서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중간에 낀 빅터의 모국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피해를 볼 나라였기에.
총괄 외교관이 흡족한 표정으로 빅터를 보더니 자랑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베르텐가는 엄청난 행운을 바다에 떠밀었던 것 같군요.”
빅터의 눈에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역시 능숙하게 이를 숨기며 화답했다.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저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허헛! 이런 보물을 뒤늦게라도 알았으니 저 또한 행운이라 해야겠군요.”
주거니 받거니 즐거이 덕담이 오갔다. 조용히 뒤따르던 하비를 돌아보며 총괄 외교관이 기분 좋은 얼굴로 권했다.
“우리 수석 외교관도 고생했네. 역시 자네가 끼니 회담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군. 스터스 경의 사전 정보와 적절한 중재가 없었으면 조금 더 멀리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하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말 나온 김에 다 같이 성공을 자축하러 가지 않을 텐가? 의원님도 모시고 말이야.”
총괄 외교관이 주름을 가득 접으며 웃었다. 그를 따르던 다른 외교관들의 표정에 난색이 떠올랐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번 잡히면 해가 뜰 때까지 붙들려 있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빅터가 선수를 쳤다. 가슴에 손날을 얹으며 그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일이 많아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함께 하죠.”
“아, 하긴. 바쁜 분을 잡으려 했군요. 어서 가보세요.”
하비는 그때까지만 해도 빅터가 자신을 데려갈 줄은 몰랐다. 꼼짝없이 총괄 외교관의 술주정을 들으며 밤을 샐 줄 알았는데, 빅터가 그를 지목했다.
“즐거울 자리에서 중요한 분을 빼내 죄송합니다만, 스터스 경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같이 가도 상관없겠지요?”
당황한 건 총괄 외교관뿐만 아니라 다른 외교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비가 큰 체격만큼 술도 강했던지라 총괄 외교관의 술주정을 끝까지 수발해 줄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러나 빅터는 그들의 당혹스러움을 뻔히 알면서 밀어붙였다.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내일 보세, 스터스 경.”
하비는 얼떨떨한 얼굴로 강제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결국 외교관들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하비를 빅터에게 보내주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선 하비가 의심스럽게 빅터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구해준 건 고마운데, 이유가 뭐지? 또 뭘 하려고?”
어둑해진 거리에 하나둘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달이 뜨고, 그 아래 오로지 한 목적을 위해 사지에서 돌아온 악마가 눈을 떴다. 환한 낮 아래 빛나던 빅터의 금발은 어둠 속에 잠겨 검게 물들었다.
빅터는 어둡게 눈을 빛내며 하비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휘어 감았다. 하비는 마치 뱀에게 졸린 듯한 기분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하비를 즐겁게 바라본 빅터가 그의 귓가에 가까이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내가 스터스 경에게 할 게 하나밖에 더 있겠나?”
하비는 귓가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입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름 끼치도록 가까웠다.
“이번엔 내 저택으로 가지. 경의 집에선 집사가 워낙 시끄럽게 굴어서 피곤하더군.”
유독 그에게만 잔인한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저택에 도착한 빅터는 사용인들 앞에서 하비와 친한 척 연기했다. 그런 뒤 그대로 하비를 자신의 방으로 끌고 왔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고 지낼 거라며 사용인을 모두 물렸다.
모든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빅터가 하비를 침대로 거칠게 밀쳐 넘어뜨렸다.
“자, 이제 오늘 치 일을 시작해야지.”
빅터는 재킷을 벗고 기품 있게 잠근 러플 블라우스의 소매를 하나하나 풀었다. 소매 안쪽에서 핏줄 선 단단하고 굵은 손목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흉터도 많이 보였다.
침대 위로 밀쳐진 하비가 체념한 얼굴로 옷을 하나하나 벗어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금방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된 하비에게 빅터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턱을 움켜쥔 빅터가 입속으로 그 약을 밀어 넣었다. 알파를 일시적으로 오메가로 바꾸는 호르몬 교란제였다.
하비는 그제야 빅터가 모르는 사이 자신에게 이미 원래대로 되돌리는 약을 먹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약은 두 종류였다. 알파인 하비를 염두에 두고 제조된 것으로, 알파에서 오메가로 바꾸는 것과 알파로 다시 되돌리는 것이 있었다. 물론 억지로 형질을 바꿔 버리는 전자의 약이 훨씬 몸에 무리를 주었다. 빅터는 이 두 개를 다 써서 하비를 충분히 괴롭히는 중이었다.
어쩐지 페로몬이 바뀐 것을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다.
‘왜 몰랐지?’
하비는 자신이 그런 것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지냈다는 것에 충격받았다. 빅터와 엮이면 항상 이런 식이긴 했지만. 소드 클럽에서의 일이 어지간히 타격이었던 듯했다.
“컥!”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목젖 안을 찌를 정도로 깊이 들어왔다. 약은 순식간에 하비의 목 뒤로 넘어갔고, 빅터는 준비해 둔 물을 그의 입에 들이부었다. 하비의 입에서 넘친 물줄기가 목까지 흘러내렸다.
강제로 넘어간 물 때문에 하비가 컥컥댔지만 빅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길게 찢어진 눈에는 오로지 증오만 가득했다.
먹자마자 바로 약 기운이 올라왔다. 형질을 변형시키는 약은 먹을수록 효과가 빨라졌다.
약에 의해 착란을 일으킨 뇌가 잘못된 신호를 아래로 내려보냈고, 호르몬이 변하자 하비의 뒷구멍에 반응이 왔다. 알파가 오메가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몸속의 내장 전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너무 아프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저 눈앞의 남자가 더 큰 고통을 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격통에 침대에 엎드린 하비는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있는 대로 짓씹었다.
“흐으…….”
몸은 금방 바뀌지 않고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제일 힘든 시간이 바로 이때였다. 몸속에 없던 것이 생기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역겨웠다. 게다가 빅터는 그가 체내의 변화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또 다른 고통도 안겨주었다.
빅터가 준비된 물건을 몸서리치는 하비 앞으로 툭 던졌다. 침대 위로 흉물스럽고 큰 모조 성기가 굴러다녔다. 멀리 이역에서 구한 상아로 만든 귀한 것이었지만 빅터는 그 정도는 눈 감고도 구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하비에게 명령했다.
“원래 알파였던 구멍이라 그런지 너무 뻑뻑해. 넣기 전까지 충분히 넓혀둬.”
빅터의 잔인한 점은 일부러 하비의 명예를 짓밟고 그의 몸에 수치를 새긴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하비가 괴로워해도 사정을 봐주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빅터는 배를 움켜잡고 힘들어하는 하비의 머리칼을 콱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키스할 것처럼 얼굴이 가까워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하게 눈물조차 삼키는 하비에게 혹여나 잊지 않도록 빅터가 덧붙였다.
“아, 당연히 내가 보는 앞에서.”
그는 절대 하비에게 키스하지 않았다. 대신 철저하게 성적으로 괴롭혔다.
잘 보이게 하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던진 빅터가 침대 맞은편의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 의자 아래에는 미리 준비된 긴 말채찍이 있었다. 특별히 고안되어 그냥 만질 땐 몹시 부드럽지만 맨살에 닿을 땐 꽤 타격감이 컸다.
사용인이 불을 붙여두고 간 긴 담뱃대를 입에 문 빅터는 재밌는 연극을 감상하듯 하비가 자위를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머뭇대는 하비를 움직이게 한 건 나른한 목소리로 던져진 빅터의 목소리였다.
“뭐 하고 있나? 시작해.”
하비는 빅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개처럼 엎드려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아로 만든 모조 성기를 쥐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듯 하비의 얼굴에 절망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곧 눈을 질끈 감았다. 사교 소드 클럽의 샤워실에서 그랬듯이, 수치는 금방 지나갈 것이다.
빅터가 지루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직 멀었어?”
아직 하비는 모조 성기를 넣지 못하고 구멍 주변만 배회하고 있었다.
“헉…… 허억…….”
하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신체가 강제로 변하는 고통에 적응하랴, 빅터가 시키는 대로 하랴, 정신이 없었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하지만 빅터는 오늘도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여러 번 헛손질하는 하비를 독촉하며 그에게 초조함을 더했다.
“그렇게 머뭇대서 오늘 밤 안에 끝나겠나?”
식은땀 때문에 손안의 모조 성기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걸 알면서도 빅터는 더 잔인하게 굴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하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입에 담았다.
“더 끌면 라힌 스터스 의원 일을 모두에게 공개하겠어.”
하비의 너른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건 하비가 빅터에게 저항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게 하는 이유였다. 하비는 붉어진 눈으로 분노에 떨었다.
‘교활한 놈.’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안 되겠다 판단한 하비는 결국 이전처럼 모조 성기를 입에 물었다.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하비가 오메가의 몸으로 변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애액이 나오려면 멀었다. 더욱이 빅터는 모조 성기에 묻힐 어떠한 윤활제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입에 무는 수밖에 없었다.
“흡…… 욱…….”
입안에 넣고 천천히 넣었다 빼자 하비의 타액이 모조 성기에 묻어났다. 목 안쪽을 찌르는 감각에 구역질이 났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래도 빅터의 성기를 빠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직 빅터는 하비에게 그것까지 시키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비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춥! 추웁-!
음란한 소리가 빅터의 너른 방 안을 울렸다. 모조 성기가 하비의 입속을 들락날락하는 장면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미끈하게 잘 빠진 근육들로 가득 메워진 건장하고 우아한 몸이 남자의 것을 흉내 낸 모조품을 물고 버거워하고 있는 장면이라니.
상아 모조 성기가 하비의 입을 터질 것처럼 가득 점거했다. 모조 성기가 입안을 오갈 때마다 볼이 홀쭉해졌다가 부풀기를 반복했다. 그의 입가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빅터는 진심으로 초상 화가라도 불러 지금의 음탕한 하비 스터스 경을 그림에 새겨 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비가 입을 놀리는 사이 모조 성기가 충분히 젖었다. 지켜보는 빅터의 것도 흉흉하게 발기해 하의를 터질 듯 채웠다. 어느새 하비에게서 은은하게 오메가의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빅터는 아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을 길게 늘어뜨렸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약한 페로몬을 내보내는 가짜 오메가에게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언제 맡아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페로몬이야.’
한편 하비는 빅터의 시선에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오메가로 젖어가는 몸을 우성 알파가 한 점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그리 생각하니 하비는 점점 아래가 뜨거워졌다.
빅터에게 협박을 받아 신약을 먹고 이런 짓을 하는 것도 여러 번이다. 이제 몸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젖는 것 같았다.
‘드디어 미친 건가.’
머릿속 상념을 몰아낸 하비는 심호흡을 하고 준비된 모조 성기를 구멍에 밀어 넣었다. 더 지체하면 빅터가 정말 기다려 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흐으으……!”
하비가 부들부들 떨며 상아 모조 성기의 절반을 집어넣었다. 몇 날 며칠 반복된 행위로 그의 구멍은 아주 녹진해졌다. 그래도 처음은 늘 힘들었다. 당연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니까.
빅터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신음도 참지 말고 내. 들을 사람도 없으니까.”
하비가 숨을 몰아쉬며 모조 성기의 남은 부분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구멍이 움찔움찔 떨며 반갑게 대용품을 받아들였다.
“네놈이 듣고 있잖아.”
힘겹게 내뱉은 말에 빅터가 짧게 웃었다.
“나한텐 들려주기 싫은 건가? 그러니 더 듣고 싶어지는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빅터가 긴 말채찍을 쥐었다. 온 정신을 뒤에 있는 모조 성기에 집중하던 하비는 그가 일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다 등과 엉덩이에 길게 닿는 익숙한 아픔에 이를 악물었다.
철썩!
말채찍이 길게 뻗어 하비의 단단한 등과 어깨를 할퀴고 내려갔다. 대번에 하비의 맨살에 붉은 줄이 생겼다.
채찍을 휘두른 자는 여유롭게 다른 손에 담뱃대를 들고 담배 연기를 뿜고 있었다. 보기 좋게 튀어나오고 들어간 근육에 생긴 불그죽죽한 상처 위로 빅터가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하비는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독하게 소리를 삼켰다.
철썩! 철썩!
채찍이 떨어질 때마다 하비의 뒷구멍은 박혀 있는 모조 성기를 더욱 꽉 물었다. 채찍질이 끝나자 모조 성기가 스르륵 빠지고 하비는 침대로 털썩 엎어졌다.
그걸 지켜보던 빅터의 녹색 눈에 광기가 스며들었다.
“이 정도론 역시 성에 안 차지?”
빅터는 피우던 담배를 장식용 가구 위에 올려두었다. 그가 하비의 엉덩이에 한쪽 발을 올리더니 연한 노란빛이 도는 모조 성기를 집어 들었다. 빅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번에 그것을 구멍에 밀어 넣었다.
푹!
한껏 예민해진 하비의 구멍 안을 모조 성기가 헤집자 드디어 참았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흑…….”
하비는 이불을 쥐어뜯으며 낮은 울음을 토해냈다. 뾰족한 끝이 가장 쾌감에 취약한 곳을 사정없이 찔렀다. 순식간에 하비는 절정에 달해 이불을 정액으로 축축하게 적셨다.
빅터가 모조 성기를 쥐고 더 깊이 넣더니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목까지 붉어진 하비를 증오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다 끝날 때까지 물고 있어. 한 번이라도 뱉으면, 뭐 말 안 해도 알고 있으리라 믿고.”
말을 마친 그가 채찍을 높이 들었다. 팽팽하게 잡아당겨 채찍의 탄력을 확인한 빅터는 능숙하게 힘을 실어 하비의 맨몸에 채찍을 내려쳤다.
착! 차악!
아까완 다른 소리가 났다. 빅터는 채찍을 제대로 쓸 줄 알았고, 아무리 아프게 때려도 흉터가 남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아까까지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흡, 윽! 읏!”
채찍이 길게 닿을 때마다 억눌린 신음이 하비의 입술에서 새어 나갔다. 보통 사람이면 이미 기절했을 정도로 고통이 심할 텐데 용케 버티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꿈틀대던 채찍이 하비를 휘감았다가 멀리 떠나갔다. 그럴 때마다 그의 뒷구멍이 품고 있는 모조 성기가 움찔댔다.
하비는 당장에라도 힘을 풀고 정신을 놓고 싶었지만 빅터가 보고 있었다. 절대로 지기 싫었다. 이깟 폭력에, 가문을 모욕하는 발길질에 고개 숙일 수는 없었다. 그런 각오로 여태껏 버텨왔는데 이제 힘에 부쳤다. 하비는 부드러운 이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삼켰다. 너무 아팠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비의 눈앞이 아득해질 무렵, 빅터는 드디어 채찍질을 멈췄다. 그리 채찍을 휘둘렀는 데도 빅터는 멀쩡했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빅터가 채찍을 내려두었다.
다 타들어간 담배를 흘끗 내려다본 빅터는 혀를 찼다. 이 정도 시간이 흐를 때까지 굴복하지 않다니.
‘스터스 가문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핏줄이었나? 미처 몰랐군.’
정말 빅터가 말한 대로 하비는 한 번도 모조 성기를 뱉지 않았다.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눈앞의 남자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라힌 스터스 의원의 아들이다.
오랜 시간 빅터는 이런 상상만으로 버텼다. 해적들에게 말도 못 할 온갖 고문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날만을 고대했다.
자신은 이토록 잔악한 해적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는데, 뒷짐 지고 구경만 한 라힌 스터스 의원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정의를 대변하는 척하면서 제 잇속을 채운 그 더러운 정치가 말이다. 물론 고작 돈 얼마가 아까워 자신을 버린 베르텐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둘 중에 누가 더 원망스럽고 밉냐고 자문하면, 이상하게도 빅터는 항상 라힌 스터스 의원의 아들인 하비 스터스를 떠올렸다. 지금쯤 편안히, 안락한 침대에서 꿈을 꾸고 있을 라힌 스터스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같은 고통을, 아니, 그보다 더한 지옥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적에게 납치당하기 전, 둘은 한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긴 대화는 없었지만 어린 빅터는 또렷하게 하비 스터스를 기억했다. 품위 있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명문 귀족가 도련님이었다. 밤색 머리에 밤색 눈이 잘 어울렸다.
‘그놈은 지금쯤 좋은 이불 위를 뒹굴고 있겠지.’
어린 빅터는 억울했다. 왜 하필 자신인지, 이 불행이 자신에게만 온 것인지 원통했다.
돈을 주지 않는 부자의 아들을 해적이 어떻게 처리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건 최악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돈이 오지 않자 해적들은 입을 더 늘릴 수 없다며 어린 빅터를 바로 죽이려 했다.
높이 들린 칼이 허공에 반짝인 순간, 빅터는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살고 싶었다. 이대로 죽어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수라도 하려면 우선 살아야 했다. 어린 빅터는 그동안 눈치껏 봐온 해적 중에 가장 관대해 보이는 자를 골라 그의 다리에 매달린 것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빅터는 아이다운 눈물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빅터가 매달린 자는 해적의 수뇌부로 지내면서 살려달라 우는 아이 정도는 수도 없이 보았다. 그렇더라도 확실히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고민하던 그가 빅터에게 물었다.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지? 난 필요한 인간만 남겨둔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어린 빅터가 외쳤다. 해적에게 필요한 인간?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들이 해적질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돈이요! 돈을 벌어드릴게요. 어떤 것이 돈이 되는지, 뭘 해야 돈을 크게 벌 수 있는지 제가 잘 알아요! 할아버지가 돈 버는 방법을 유심히 지켜봤거든요.’
아이의 처절함을 본 해적은 결국 그를 살려주기로 했다. 빅터가 눈썰미 있게 붙든 그자는 해적단 중에서도 선장 다음으로 결정권이 있는 높은 자였다. 빅터는 영리함을 무기로 그의 환심을 사고, 살기 위해 뭐든 했다.
그때 빅터는 성정 거친 해적들에게 맞는 건 예사였고, 심지어 외모가 반반했던 어린 빅터를 성적으로 이용하려던 해적도 있었다. 다행히 빅터를 마음에 들어 한 높은 자가 그를 구해준 데다 쓸만한 놈으로 키울 생각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선포를 했다.
그럼에도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핑계로 이뤄지는 물리적 폭력에서까지 안전하지는 못했다. 빅터는 매일 이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밤마다 더러운 침대 위를 기어 다니며 이불에 피를 묻히고 마른 침을 뱉던 어린 날의 빅터는 다짐했다.
살아 돌아가서 스터스 경과 그의 아들인 하비 스터스에게 더한 악몽을 안겨줄 것이라고. 자신이 아팠던 것보다 더 끔찍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니 라힌 스터스는 이미 죽었고, 그 자리를 하비 스터스가 대신하고 있었다. 복수할 대상은 하나 줄어들었지만, 빅터의 복수심은 전혀 줄지 않았다. 오히려 하비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자 더욱 크게 타올랐다.
성인이 된 빅터가 건너편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몇 군데 남았지만 매끈하고 잘생긴 금발의 미남자가 잔혹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모조 성기를 놓치지 않으려 굴욕적인 자세로 허벅지와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하비에게 그가 즐거운 듯 말했다.
“내가 매일 어떤 꿈을 꿨는지 알아?”
복수에 취한 몽롱한 얼굴로 빅터가 말했다.
“어떻게 해야 널 가장 효율적으로 밑바닥에 처박을 수 있을까, 방법은 수천, 아니, 수만 가지였는데 그중에 뭘 골라야 할지 고민했지.”
무덤 속의 라힌 스터스 의원이 알면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소중한 가문의, 하나뿐인 아들이 이 꼴을 당하고 있는 걸 알면 얼마나 원통할까. 빅터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아찔할 정도로 흥분되었다.
“그 순간에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더라고.”
하비를 오메가로 만든 약에 대한 아이디어도 그때 떠올린 발상이었다. 단순히 오메가로 만들어서 괴롭히는 것보다 빅터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고통을 주는 쪽이 훨씬 나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비가 계속 몸이 변하는 끔찍함 속에서 생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그때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던 하비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빌어먹을 감상은 여러 번 들었으니 됐고, 빨리 끝내.”
빅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하비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말채찍으로 턱밑을 찍어 올린 빅터가 강제로 들린 하비의 얼굴에 대고 으르렁댔다.
“회담 자리에서는 그렇게 날고 기더니, 왜 자신이 처한 상황은 매번 최악으로 만드는 거지? 네 주특기잖아. 상대방이 원하는 걸 알아내서 협상하고 교섭하는 거.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나?”
턱을 들린 채로 하비가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모르긴 뭘 몰라. 네 천박한 욕구에 장단 맞춰주는 거겠지.”
“하, 아직도 그 소린가.”
빅터는 이쯤 되면 그의 정신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려움 하나 없이 그저 곱게 자란 귀족 도련님일 줄 알았더니, 하비는 빅터의 예상보다 꽤 근성이 있었다. 지금도 약발이 슬슬 돌아 뒷구멍에서 애액을 줄줄 흘리고 있는 주제에 입은 잘 돌아갔다.
빅터가 짜증스러운 듯 금발을 손으로 휙 넘겼다.
“그래. 빨리 끝내보지. 슬슬 귀찮아졌거든.”
관계를 시작하면 정신 못 차리고 품 안에서 울 거면서 아직도 저 밤색 눈동자는 죽지 않았다. 빅터는 속이 뒤틀렸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아직 꺾이지 않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언제까지 버티는지 두고 보자고, 스터스 경.”
저번에는 말채찍을 구멍에 꽂고 바닥을 기게 했는데도 무너지지 않았다. 심지어 개 짖는 소리까지 시켰는데도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굴욕적인 짓을 시킬 때면 곧장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행위가 모두 끝나면 그의 태도는 여전히 꼿꼿했다.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품위 있는 귀족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뭐, 시간은 많으니까.’
빅터는 초조함을 가라앉혔다. 아직 모든 수단을 다 쓴 것은 아니었기에.
그래도 공들인 시간은 헛되지 않아서 약간의 소득은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빅터가 구멍에 깊게 박힌 모조 성기를 빼내어 멀리 던진 뒤 제 것을 하비의 엉덩이 사이에 비볐다.
하비에게서 이전과는 다른 떨림이 느껴졌다. 빅터는 여러 번 살을 맞대서 알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빅터가 눈을 길게 접었다.
“왜, 넣어줘? 박아줬으면 좋겠나?”
하비가 조금이나마 무너질 때는 이때뿐이었다.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미 오메가로 변한 하비의 몸은 알파의 페니스를 반겼다. 모조 성기 따위로는 충족이 안 된다는 듯 하비의 구멍이 기대감으로 멀건 애액을 주룩주룩 흘렸다. 발기한 페니스를 주변에 비비기만 했을 뿐인데 물이 터져서 하비의 탄탄한 허벅지를 타고 이불까지 흥건하게 적셨다. 완전히 오메가로 변했다는 신호였다.
하비는 속에 무언가가 생긴 것 같은 이물감을 느끼고 몸을 비틀었다. 언제 느껴도 이 이상한 감각은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빅터가 완전히 발기한 페니스를 일부러 느릿하게 구멍의 주변부로 훑었다. 그러자 처음엔 미약하던 오메가의 페로몬이 강렬해졌다. 숨이 막힐 만큼 매혹적인 꽃향기였다.
몸은 거부해도 본능은 숨길 수 없었다. 오메가는 알파를 끌어들인다. 꽃이 벌을 향으로 꾀어내듯이, 하비의 몸은 알파를 원하게 되었다. 게다가 빅터는 알파 중에서도 최상으로 꼽히는 우성 알파였다.
“흡…….”
하비는 발가락을 전부 오므릴 정도로 격하게 반응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쯤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본능을 거부하고 있을 것이다. 빅터는 그가 맹렬하게 저항하지만 또 지고 말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감사히 생각해. 나 아니었으면 이렇게 예민한 몸인 줄 평생 몰랐을 거 아닌가.”
빅터가 검은색 새틴 장갑을 끼더니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향수를 뿌렸다. 오메가 페로몬을 감출 용도였다. 일부러 독한 향을 뿌려서 그나마 강렬한 하비의 오메가 페로몬 향이 희석되었다. 바깥에 서 있을 알파 사용인들을 위한 배려였다. 하비가 오메가로 변했을 때 뿜는 페로몬은 갈수록 강렬해져서, 알파 사용인들이 힘들어할 정도였으니까.
하비는 그를 돌아보며 낮게 으르렁댔다.
“그만 지껄이고 얼른 끝…… 으윽!”
퍽!
빅터가 하비의 엉덩이를 잡더니 한 번에 끝까지 박았다. 철퍽대는 소리와 함께 하비는 순식간에 절정에 달했다. 그의 밤색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해일 같은 쾌감이 밀려들었다. 머릿속이 하얗다 못해 새까맣게 변할 정도로 극심한 오르가슴이었다.
“큭……!”
하비는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 애액을 물처럼 쏟아냈다. 그의 허벅지 아래쪽 침상이 온통 흥건하게 젖었다. 하비의 온몸은 벌겋게 물들었다. 그의 볼륨 좋게 솟은 어깨, 봉긋하게 솟은 엉덩이, 단단한 허벅지 등에 차례로 경련이 일었다.
빅터가 구멍에 박은 채로 채찍을 다시 집어 들고 하비의 입술을 눌렀다. 짓씹어서 붉게 물든 입술이 꽃잎처럼 열리며 새빨간 혀가 드러났다. 하비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타액을 수습하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붉게 드러난 혀를 꾹꾹 누르면서 빅터는 안타까운 척 혀를 찼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것도 이제 힘들 것 같은데.”
채찍 끄트머리를 입에서 꺼내자 하비가 기침을 연거푸 했다.
“쿨럭, 쿨럭!”
임무를 다한 말채찍을 빅터가 멀리 던졌고, 정신을 차린 하비가 고개를 아래로 하고 젖은 눈으로 빅터를 노려보았다. 쾌감으로 흐트러졌던 이지가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하비는 끝까지 요지부동이었다.
“닥치고 하던 거나 마저 해.”
빅터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깊게 박은 페니스를 조금씩 구멍에서 꺼냈다. 괴롭힐 목적으로, 일부러 아주 천천히. 하비는 큰 체격이 무색하게 바들거렸다.
빅터의 페니스는 우성 알파답게 컸다. 발기한 것이 들어오면 구토감이 일 정도였다. 그 큰 것을 살살 긁듯이 구멍에서 빼내니 감질났다. 근질거리는 기분에 하비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엉덩이를 꿈틀거렸다.
빅터가 그런 하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닥치라니. 우리 스터스 경께서는 나같이 ‘돈으로 자리를 산’ 천박한 놈의 말투도 곧잘 흉내 내신단 말이지.”
빅터는 하비가 평소에 자신을 두고 비꼬는 말을 인용했다. 완전히 만개한 오메가의 구멍이 빅터의 페니스를 따라가려는 듯 쫀쫀하게 표면에 들러붙었다. 구멍의 붉은 속살이 페니스에 들러붙어 함께 나올 것처럼 오물거렸다. 솔직한 하비의 몸은 끊임없이 애액을 내어 빅터의 페니스를 녹였다.
‘그만……. 제발, 그만.’
하비는 주먹을 터질 것처럼 쥐고 몸의 반응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오메가가 된 몸은 목마른 듯 허겁지겁 알파의 것을 주워 담으려 했다.
지켜보던 빅터는 기가 막힌 듯 피식거렸다.
“하긴, 하는 짓도 남창이나 다름없어졌지만. 엉덩이를 스스로 흔들고 있잖아.”
구멍에서 반 이상 빠져나온 거대한 페니스는 핏줄이 흉흉하게 서 있었다. 애액으로 온통 번들거리는 것을 눈을 굴려 본 하비가 처음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다 약 때문이라고. 빨리, 이젠 그만 끝내. 오늘은 평소보다 더 원 없이 했잖나.”
확실히 신약을 거듭해서 먹을수록 하비의 몸뚱이는 더욱 민감해지고 쾌감에 약해졌다. 빅터의 녹색 눈이 길게 늘어났다. 신약을 제조한 의사의 말이 맞았다. 계속 반복해서 먹이면 부작용으로 정말 영영 오메가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적이 있었다.
하비의 감도가 좋아지고 있다는 건 빅터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구멍과 페니스가 연결된 부위에서 거품이 이는 것이 보였다.
더없이 뜨거운 광경이었지만 빅터는 냉랭한 얼굴로 거친 허릿짓을 시작했다.
“아윽……. 흐읏! 흐……! 크읏! 으응……!”
하비의 봉긋한 엉덩이와 빅터의 복부가 닿을 때마다 애액이 질퍽하게 사방으로 튀었다.
철퍽! 퍽! 퍼억!
하비는 끝이 없는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몇 번이고 드라이 오르가슴에 취했다. 절정에 달하도록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망치가 한계 없이 그의 온몸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하비의 밤색 눈동자가 천장으로 휙 올라가고 꽉 쥐었던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쿨쩍! 푸욱!
겨우 참았던 생리적인 눈물이 두 눈 가득 괴었다. 너무 느껴서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니면 슬픈 건지, 혹은 비참한 건지,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하비는 빅터가 새틴 장갑을 낀 손으로 엉덩이를 때리고 박아 넣을 때마다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더, 더 넣어줬으면 좋겠다는 미친 생각마저 했다.
퍽! 푹!
빅터가 박을 때마다 하비의 단단한 등허리에 주름이 접혔다가 사라졌다. 등허리 능선을 거세게 움켜쥐고 있는 커다란 빅터의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로 거칠었다. 그런 만큼 남을 상처입히는 데 능했으며 실제로 그는 그리 살아왔다. 빅터는 그랬기에 더더욱 꼿꼿한 하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상처받지 않는 거지? 널 지탱해 주고 있는 게 대체 뭐길래?’
하비는 거칠게 흔들리며 잔뜩 발기한 제 것도 함께 흔들었다. 애액으로 푹 젖은 이불을 쥐어뜯었음에도 제어 못 한 쾌감의 흔적들이 입에서 마구 튀어나갔다.
“힛……! 으윽! 아……! 아윽……! 응……!”
흉터 많은 빅터의 굵은 팔에도 힘줄이 솟았다. 그는 더욱 세게 하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재촉하듯 끌어당기는 구멍에 못 이겨서 중간부터는 빅터도 거의 이성을 잃고 박아댔다. 하비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열에 들뜬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빅터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허벅지를 벌리고 페니스를 뒤로 받고 있으면서도 하비는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빅터는 드디어 참았던 분노가 솟았다. 이렇게 무너졌으면서, 제 것을 달라고 조르고 있는 상황에서마저 기품 있어 보이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 남자를 통째로 부서뜨리고, 망가뜨리고 싶었다.
마음 깊은 곳에 잠가두었던 뭔가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빅터에게서 어릴 때부터 해적과 부대끼며 익힌 거친 욕설들이 가감 없이 튀어나왔다.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는 저열한 말들이었다.
빅터가 하비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 올리고는 증오 섞인 날 선 말들을 던졌다.
“이 씨발, 창부 같은 게…… 이렇게 박아줘도 아직 모자라나? 아직도? 더 채워주길 바라?”
뒤로는 쑤셔 넣으면서 저급한 말이 귓속에 퍼부어지는데 하비는 그런 데서도 느끼고 있었다.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하비가 구멍을 꽉 조이는 동시에 빅터에게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양의 정액이 구멍 속에 들이부어졌다. 각인도, 뭣도 하지 않은 채 감정 없이 부어지는 맹물에 불과했다. 그들의 관계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로지 과거의 그림자를 복수로 벗겨내려는 잔혹한 자와, 그의 그늘을 함께 뒤집어쓰게 된 누군가가 있을 뿐이었다.
“흣……!”
순간, 하비의 페니스가 정액을 쏟아내고 뒷구멍에서도 애액이 터졌다. 앞뒤로 물을 뱉은 하비의 발가락이 일제히 오므라들었다.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하비는 또 한번 커다란 쾌감의 파도를 맞고 길게 떨었다. 배 속 어딘가가 까맣게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퍼억-!
마지막으로 빅터의 페니스가 배 안쪽을 강렬하게 때릴 때, 하비는 저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고 정신을 잃었다.
* * *
빅터는 생환하자마자 집에 되돌아가 가문의 이름을 되찾았다. 이미 레토 베르텐은 노환으로 사망한 뒤였고, 다들 그날의 일로 빅터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잘 대해주었다.
빅터는 해적에게 잡혀 있던 나날들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한미한 베르텐 가문을 열과 성을 다해 키웠다. 절대적 가주였던 레토 베르텐의 사망 이후 기울어가던 가세는 빅터가 들어오면서 급격히 상승세를 보였다.
레토 다음으로 가주 자리를 이어받은 자는 빅터를 좋아했고, 급기야 내정자를 모두 제치고 빅터를 후계자로 지정했다.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신화적인 이야기에 귀족 청년들은 열광했다.
빅터는 비록 인질로 잡혀서 집안에서 버림받았지만 거친 바다 위 해적들 사이에서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심지어 살아남는 데서 그치지 않고 중간에 탈출해서 한 해양 상단에게 구출받은 뒤 자수성가해서 돌아왔다. 그걸로도 모자라 오로지 빛나는 실력과 능력으로 인정받아 모두의 암묵적 지지하에 가문의 후계자 자리까지 꿰찼다.
한편, 빅터가 바다 위에서 목숨을 걸며 떠도는 동안 명문가인 스터스 가문은 서서히 기울었다. 해적 인질 사태를 자신의 책임이라 통감한 라힌 스터스 경이 자진해서 사퇴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리를 버리고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들인 하비 스터스가 두각을 나타냈다.
모든 것이 동년배에 비해 뛰어났던 하비는 외교관으로 진로를 잡았다. 다만 하비는 아버지처럼 의원 선거에 나서지는 않았다. 정책을 결정짓는 자리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하비는 선거에 나가면 무조건 적극 협조하겠다던 주위의 도움도 모조리 거절했다.
하비는 아버지 라힌 스터스를 몹시 존경했지만 ‘그날’의 강경한 조치는 다소 이해 가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더 유연하게 대처했어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하비는 라힌 스터스 경이 죽음의 강을 건널 때까지도 그날의 의문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하비의 직감이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묻지 말고, 묻어두라고.
그래서 하비는 돌아온 빅터 베르텐 경이 몹시도 불편했다. 그날의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빅터의 초대를 받았을 때 바로 거절했어야 했다. 하비는 지금까지 그날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당신 아버지의 진실을 알고 싶으면, 내 저택으로 찾아와.’
사교 소드 클럽에서의 재회에서 빅터는 그리 말했다. 하비는 마음이 격하게 일렁였다. 심장이 쿵쿵대며 그의 불안을 알렸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의혹이었는데, 그 중심에 서 있는 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와 다시 하비의 심장을 두들기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싶은가? 정말로?
‘이제까지 잘 모른 척해왔잖아.’
하비는 자신을 나무랐다. 끝까지 아버지를 믿고 빅터의 제안 따위는 듣지도 말았어야 했다. 하비는 이 모든 게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 여기면 빅터가 주는 온갖 고통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다 부족한 신념에서 비롯된 자신의 실책이며, 빅터는 이를 꾸짖는 아버지의 호된 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분명, 최근까지는 그리 생각했다. 아버지의 행적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주인님, 주인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집사의 목소리였다. 하비는 무거운 눈덩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겨우 뜰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소란을…….”
말을 꺼내자마자 목에서 찢어질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기침을 하며 눈을 완전히 뜨자 안경을 쓴 남자가 보였다. 그 옆으로 걱정스러워하는 집사가 차례대로 보였다.
하비가 이 정체 모를 안경 쓴 남자가 누군지를 의아해하자 집사가 눈치 빠르게 알아보고는 설명해 주었다.
“베르텐 경께서 저택까지 손수 데려다주셨습니다. 여기 계신 유능한 의사도 붙여주셨고요. 그간의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졌다고 하시던데,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의사라는 자가 하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묘하게 하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람 보는 것이 빠른 하비는 의사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빅터가 붙인 사람이라고 하니 더욱 의심이 증폭되었다.
하비는 주변을 둘러보고 이곳이 자신의 저택임을 알았다. 익숙하고 따뜻한 풍경이었다.
“베르텐 경은 돌아갔나?”
“예, 주인님. 바쁜 일이 있다며 바로 가셨습니다.”
하비가 침대 위에서 힘없이 눈을 굴려 의사를 보았다.
“진찰할 때 내 몸을 본 건가?”
하비가 넌지시 물었다. 의사는 눈을 굴리더니 재빨리 고개를 휘저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옷을 다 입고 계신 상태였고, 의원님이 절대 벗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한 가문의 가주이자 귀한 몸이니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하지만 하비는 의사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계속 눈을 피하는 걸 보면 느낌이 왔다.
아마 진찰시킨 뒤 빅터가 미리 입막음했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빅터는 약속을 철저히 지켰으니까. 그가 빅터의 어떤 요구도 잘 따르고 있는 만큼 외부에 하비의 몸 상태를 발설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왜 그 비열한 자식의 약속 따위를 믿고 있는 거지?’
하비는 빅터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손바닥 뒤집듯 언제든 약속을 깰 수 있을 인간인데, 왜 자신과의 약속은 지킬 것이라 확신하는지.
그때 집사가 뭔가 생각난 듯 탁자에 놓여 있는 곱게 접힌 편지 한 장과 유리병을 가져왔다.
“베르텐 경께서 주고 가셨습니다. 보시면 아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알겠네. 나중에 확인하지.”
하비는 빅터가 또 무슨 꿍꿍이로 이런 것을 두고 갔는지 벌써 두려웠다.
착잡한 얼굴의 하비에게 의사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저택을 떠났다.
거대한 문을 나서자마자 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 빠른 분이신데, 무사히 빠져나왔네. 대체 의원님은 무슨 생각이신 건지…….’
하비의 예상대로 의사는 그의 상태를 모두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의사는 약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맙소사. 이 약을 스터스 경에게 쓰고 있었다니. 드디어 그분도 미치신 건가?’
의사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행여나 누구에게 들킬까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알파를 오메가로 만드는 약은 원래도 암암리에 존재했다. 알파끼리 맺어지는 것이 귀족가에서 유행처럼 떠돌고 있던 터라, 독한 약을 무절제하게 쓰거나 위험한 시술을 해서 생긴 부작용도 심각했다. 국가적으로 금지해도 위험한 불장난에 눈이 먼 귀족 청년들이 불법적인 것까지 동원하던 때였다.
빅터에게 불려 온 이 의사는 뒷골목에서 꽤 이름난 자였고, 빅터의 의뢰를 받아 신약을 제조했다. 약은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빅터 베르텐의 손에 들어갔다.
빅터는 신약의 유포권과 제작권, 그리고 뒷골목 의사의 목숨까지 모두 저당 잡았다.
애초에 몸을 속여 호르몬을 변형시킨 뒤, 바뀐 호르몬으로 체내까지 변형시킨다는 것은 빅터의 아이디어기도 했다. 그러니 의사도 빅터가 권한을 가지는 데에 큰 불만은 없었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돈을 받기로 해서 딱히 목숨을 저당 잡히지 않았어도 외부로 약을 풀거나 발설할 일도 없었다.
한편, 빅터는 하비의 저택 부근에 마차를 대기하고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는 금발 아래 번뜩이는 녹색 눈으로 도망치듯 떠나는 의사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제대로 잘하고 왔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저리 겁내는 걸 보니 쓸데없는 소린 안 할 것 같고.’
빅터가 고급스러운 외벽으로 둘러싼 하비의 백색 저택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저 자부심 강한 백색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들의 고귀한 알파 가주가 오메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까.
‘알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두긴 했지만. 웃기는군.’
빅터는 마차의 창문을 내리고 출발시켰다. 그는 뜻밖에 찾아온 기회에 계속 피식대며 미소 지었다. 생각할수록 웃긴 일이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하비는 소위 약발이 워낙 잘 받았다. 신약을 개발한 의사의 말로는 사람에 따라 아기집까지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빅터는 신약이 막 완성되었을 무렵 의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했다.
‘정말 아기집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건가? 원래 알파인 사람이, 이깟 장난 같은 약 하나 때문에?’
‘확실치는 않지만 신약의 임상 시험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무슨 부작용이 생겨도 놀랍지 않지요.’
의사는 혹여나 정말 아기집이 생긴다면 몸을 속여 강제로 만든 것이니 금방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가능하더라도 임신은 절대로 권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느 분께 쓰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신중히 써주십시오. 돈에 눈먼 제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잠깐 속이는 건 가능해도 사람의 몸이란 건 영악해서 금방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리 신신당부했던 의사가 하비의 상태를 보더니 기절초풍할 것처럼 놀랐더랬다. 일단 자신의 신약 실험 대상이 하비 스터스 경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조금 전의 촌극을 떠올리며 빅터가 웃었다.
‘신중히…… 라.’
솔직히 놀랐다. 하비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는데, 기절한 상태에서도 절대 배에서 팔을 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무의식이 작용한 것처럼.
빅터는 공범자인 의사를 불러 하비의 상태를 확인하게 했다. 그들은 처음의 우려대로 신약이 지나칠 정도로 하비에게 영향을 미쳐 아기집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히트가 발동하지 않아 임신한 것은 아니고,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지만 빅터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의사는 하비에게 원래대로 돌아오는 약을 다시 쓰면 알파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아기집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빅터는 이를 보류했다. 원래라면 다시 되돌렸을 테지만 다른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였다.
‘일단 이걸 뿌리고 다니라고 해야겠어.’
빅터는 의사가 주고 간 오메가임을 숨기는 특별한 페로몬 향수 여분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알파인 수사슴의 침샘에서 추출한 것으로, 오메가임을 숨길 수 있었다.
하나는 짧은 편지와 함께 하비의 집사에게 주고 왔으니 하비가 알아서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분간은 하비가 오메가가 된 것을 아무도 모른다.
빅터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기회로군.’
하비의 자존심은 스터스 가문의 명예, 그리고 전 의원이었던 아버지 라힌 스터스의 곧고 청렴한 업적, 뛰어난 알파 자질과 본인이 가진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아버지 라힌 스터스의 청렴결백한 업적은 무용지물에, 외려 현재 하비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약점이 되고 말았다. 스터스 가문의 명예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폭로되면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러면 남은 건 하비 본연이 가진 외교관으로서의 능력과 알파로서의 자존심뿐이었다.
‘여기서 알파로서의 자존심까지 완전히 뭉개면 아주 완벽한 시나리오가 되겠지.’
하나하나씩 하비를 지탱하던 것들을 무너뜨리던 빅터는 이제 다음 계획을 시행하기로 했다.
펄럭!
그는 사용인이 마차 안에 미리 놓아둔 신문을 펼쳐 읽었다. 헤드라인에 어제의 소야 회담 성공을 기리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현 올란시의 의원이자 빅터 베르텐 경에 대한 찬사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글귀를 대충 눈으로 훑은 빅터는 그 현란한 칭찬에도 아무런 감흥 없이 냉정하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빅터 베르텐이 관심 있는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으므로.
한편 빅터의 의중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하비는 심란한 얼굴로 그가 남긴 편지를 읽고 있었다.
[남기고 간 걸 시간 날 때마다 몸에 뿌려. 이왕이면 자주.]
하비가 반듯한 이마를 찡그렸다. 별것 아닌 내용인데, 빅터의 강압적인 말투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언제 들어도 재수 없는 목소리라니까.’
어쩌다가 첫 만남부터 꼬여서 꼼짝도 못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는 빅터의 꼭두각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몹시 한심해진 하비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파악!
빅터의 편지가 구겨진 채 테이블에 닿았다가 서서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비는 그게 꼭 자신의 처지인 것 같았다.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하비가 굴욕에 치를 떨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겁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라힌 스터스 경.’
명문가의 가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같은 알파에게 깔려서 허우적대는 것도 모자라 쾌감을 구하며 엉덩이를 흔들기까지 했다. 단순한 욕구를 못 이겨서 애걸하듯이 빌기도 했지 않은가. 빨리 끝내달라는 말은, 빨리 넣어달라는 말과 같았다.
하비는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제 남은 눈물조차 없었기에 물기가 묻어 나오지는 않았다.
첫날, 처음으로 오메가가 되어 빅터에게 뒤를 뚫렸던 그날 이후로 하비는 자발적으로 울지는 않았다. 생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쾌감의 눈물이라면 몰라도.
그러다 문득 하비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배 속이 욱신욱신한 건 둘째 치고, 깊숙한 곳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기절한 사이 그놈이 다시 돌아오는 약을 먹인 게 아닌가? 몸이 왜 이러지.’
예민해진 하비의 몸은 평소와 다른 점을 민감하게 감지했다. 확실히 다르다. 뭐가 달라진 건지는 아직 잘은 몰라도, 하비는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알아낼 때까지는 조심해야겠어.’
구슬 같은 게 박힌 것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그보다 더한 것을 심어놨을지도 모른다. 빅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비 스터스를 무너뜨리고 스터스 가문을 밟고 싶어 할 테니까 말이다.
하비는 우선 빅터가 시키는 대로 제 몸에 알 수 없는 향수를 뿌리고 외출했다. 집에 박혀 있어봤자 더 좋은 생각도 나지 않고 가라앉는 기분이라 환기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또 나가십니까?”
하비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집사가 쫓아 나왔다. 그는 좀 더 쉬라고 하비를 뜯어말렸지만 하비가 집사의 말을 듣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주인님! 이번엔 어딜 가십니까! 주인님!”
뒤에서 시끄럽게 구는 집사를 떨쳐낸 하비가 새하얀 백마를 이끌어 천천히 산책하듯 걸었다. 답답한 마음에 주변을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바로 말을 타고 달리기에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적당히 걸어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하비가 불쑥 뒤를 돌아보았다. 스터스가의 상징인 하얀 저택이 보였다. 하비는 한참이나 새하얀 건물을 눈에 담았다. 비록 기울어가는 스터스가지만 자신은 가주로서 저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해가 내려가며 주홍빛 노을이 하얀 저택에 걸려 환상적인 광경을 자아냈다. 아름다웠다.
‘빌어먹을…….’
하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서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렸다.
하비를 탐내는 가문이 꽤 있어 이곳저곳에서 좋은 혼처가 들어와 있던 차였다. 괜찮은 오메가 집안이 있으면 골라 결혼도 할 생각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이 하얀 저택을 물려주고, 그렇게 스터스가는 영속할 예정이었는데.
하비는 세게 쥐었던 주먹을 풀고 다시 뒤돌아 걸었다.
‘이 상황에서 가능할는지 모르겠지만.’
빅터 베르텐. 그자가 있는 한 절대 불가능할 꿈이 되고 말았다. 오메가와 알파를 오가는 이상한 몸이 된 지금, 하비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빅터와 어떻게든 결판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빅터의 입을 막으면 모든 게 끝날 일인데 부와 명예와 사람들의 지지까지 모두 등에 업은 그를 없애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암살자라도 고용해야 하나.’
그러나 누군가를 죽여 문제를 해결하는 건 하비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기에는 빅터의 존재가 너무 위험했다. 더 이상 그의 요구를 들어주며 질질 끌려갈 수도 없었다. 이제 한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하비도 직감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고민하며 걷던 하비가 푸르릉대며 머리를 비비는 백마의 존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 경이 몹시 아끼던 백마였다.
하비는 입김을 푸푸 내뿜으며 자신을 위로하는 백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스터스 가문은 다른 자의 피와 눈물로 세워진 저택이 아니었다. 명예를 아는 선조들이 세운 것을 제 손으로 더럽힐 수는 없었다. 하비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먼저 해야지.”
빅터는 전 의원이었던 라힌 스터스 경이 저지른 부정을 빌미로 그를 협박하고 있었다. 라힌 스터스 경이 해적 인질 사태 때 단순히 자신의 신념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과오를 덮기 위해 정치적인 쇼를 했다는 폭로였다.
당시 시의원이었던 라힌 스터스는 불법 투기로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고, 몰래 올란시의 재정에 손을 대고 있었다고 했다. 해적들에게 내어 줄 금액도 없었을뿐더러, 시의 재정을 사적으로 끌어 쓴 것이 들킬 위험이 컸기에 폭력 단체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명목을 내세운 것이었다.
빅터가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증거는 확실했다. 당시 재정 담당 회계사가 작성했던 기록을 빅터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인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하비는 귀족가의 정보가 흐르는 중심을 잘 알았다. 로투스 가문이었다. 하지만 직접 가서 물었다간 스터스가의 오점이 될지도 모를 정보가 로투스가에 흘러 들어간다. 문득 하비는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 벌써 날이 그리되었나.’
하비가 본 곳은 반이 있을 저택이었다. 스터스가의 저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로투스가의 저택이 있었다.
곧 반 로투스 경의 생일이었다. 하비에게는 여러 친구가 있지만 반은 특별했다. 원래 스터스가는 로투스 가문과 절친했기에 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한 형제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의 선물만큼은 하비가 손수 마련하곤 했다.
‘반이 좋아하는 게 뭐였지.’
그러고 보니 반과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를 한 지 꽤 되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변을 팽개치고 산 지 오래되었다.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에 대한 일은 따로 알아보면 된다. 가서 오랜만에 안부나 묻고 허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생각에 잠겨 몇 차례 백마의 갈기를 쓰다듬던 하비가 훌쩍 말 등에 올라탔다. 그는 그대로 말을 달려 로투스가의 으리으리한 저택까지 달렸다. 말이 뛸 때마다 엉덩이가 쪼개질 듯이 아팠지만 간신히 견뎌냈다.
아픔에도 익숙해질 때쯤, 스터스가의 저택보다 두세 배는 커 보이는 대저택이 나타났다. 정원의 크기도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창을 치우고 하비를 맞았다. 그중 하나가 쪼르르 달려가 하비가 왔음을 알렸다.
‘여긴 여전하군.’
문지기들이 열어준 거대한 대문으로 들어간 하비는 정원에 도착하자 날렵하게 말에서 내렸다. 기품 있는 백마를 몰고 온 하비는 오늘도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사교 소드 클럽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니! 스터스 경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소식을 들은 로투스가의 사용인이 달려와 말을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계속 앞발을 들며 불안한 듯 도리질을 쳤다.
“워워.”
오늘따라 불편한 것처럼 투레질하는 말을 손으로 두들겨 얌전하게 만든 하비는 간신히 말을 사용인에게 넘겼다.
뒤늦게 하비가 푸릇푸릇한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꽃이 많아 벌도 많았다. 그가 몰고 온 백마는 벌에 쏘인 적이 있어서 유난히 벌에 두려움이 많았다.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반 로투스 경이 놀라운 얼굴로 자신의 친구를 돌아보았다. 하비는 친구의 물음에 오히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달려온 사용인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서였다.
“웬일이라니. 종종 찾아오지 않았나. 새삼스럽기는.”
반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 정중앙에 놓인 정원은 잘 손질된 꽃과 식물들로 가득했다. 정원사들이 종종 들락거리며 관리하는 게 보였다.
하비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정원을 구경했다. 로투스 경의 저택은 암암리에 정보를 취급하는 중심가 같은 곳이었다. 대대로 사교계나 귀족 가문의 온갖 이면 정보를 처리하고, 그 대가로 돈과 안전을 얻었다.
귀족 사회에서 모두가 모르는 누군가의 사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건 큰 힘이었다. 일찍이 귀족들의 검은 이면을 안 로투스 가문의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부를 쌓아왔다. 그런 만큼 그들이 소유한 정원도 규모가 방대했다. 황제 부럽지 않을 것이다.
문득 하비는 테이블에 온갖 종이가 널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눈길이 그쪽으로 가자 반은 얼른 종이들을 낚아채 모은 뒤 하비가 보지 못하도록 뒤집었다.
하비는 눈을 좁히며 모른 척 물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반이 뜨끔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툴툴댔다.
“보면 모르나? 정보 취합. 우리 가문이 제일 잘하는 짓거리지.”
“무슨 자료가 그렇게 많아?”
사용인이 다가와 반의 담뱃대에 불을 붙여주었다. 반이 그걸 입에 물고 뻐끔댔다.
“알잖아. 요새 다들 투기에 미쳤거든. 어떤 품목이 좋을지 물어보는 놈들도 많고.”
하비 앞으로도 담뱃대가 주어졌지만 하비는 이를 거절하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렇긴 하지. 나한테도 베르텐 경과 친하면 다리를 놔달라는 둥 벌써 청탁이 들어오고 있어. 다 그 꽃을 얻을 목적이겠지.”
빅터 이야기만 나오면 몸 어딘가를 불로 달군 인두로 쑤시는 기분이 들었지만 하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베, 베르텐 경?”
그런데 반이 빅터가 언급되자 이상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하비가 수상하게 쳐다보자 그가 헛기침을 했다.
“아아, 네가 참여한 그 소야 회담? 그건 시작일 뿐이야. 이제 포도밭도 전쟁터가 될 거라고.”
“포도밭? 포도주 때문인가?”
반이 긴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뿜어냈다.
“맞아. 품종 좋은 포도밭을 서로 차지하려고 난리들이지.”
하비가 혀를 내둘렀다. 다들 미쳐가는 것 같다.
“종잇조각이 화폐가 된 이후로 점점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군.”
이런저런 요즘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하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세상의 흐름을 먼저 앞서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외교부에 돌아가면 과열된 투기 품목 위주로 한번 알아봐야겠어. 이대로면 2차 소야 회담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반이 하비를 물끄러미 보다가 묘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반은 다 피운 담뱃대를 내려놓고 이번엔 고급 포도주에 손을 대었다.
“자넨 항상 앞질러가는군.”
“뭘?”
“시대를.”
반이 포도주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나를.”
그가 이미 많이 취한 듯해서 하비는 반이 더 마시려는 것을 막았다. 하비가 걱정스럽게 그를 보며 물었다.
“요즘 너무 술독에 빠져 사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나?”
“아니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것이 어딨어. 우리 로투스가의 반푼이 신세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감히 누가 반 로투스 경에게 그런 말을…….”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하비는 알 수 있었다. 반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비스듬하게 걸렸다.
“누구긴 누구야. 우리 아버지지.”
반의 아버지인 세반 로투스 경은 항상 자식에게 지나칠 정도로 엄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스터스가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과 열등감도 엄청났다. 그건 어릴 때부터 하비도 잘 알고 있었다. 세반 로투스는 만나면 그에게도 잘 대해주었지만 언제나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내곤 했으니까.
반이 포도주를 목에 털어 넣고는 씁쓸하게 말했다.
“우리 집안에서 2등은 필요 없다고 늘 말씀하셨지. 자넨 늘 1등을 했고 말이지.”
반도 외교관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은 하비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이미 반은 다른 길로 빠져 버렸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이었다.
그의 부친은 하비를 한 번이라도 이긴다면 외교관의 길을 걷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끝까지 반은 하비를 꺾지 못했다.
물론 하비는 반이 아버지와 그런 약속을 했는지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된 하비가 몹시 미안해했지만 반은 그것마저 속이 뒤틀렸다.
하비는 아무 잘못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만약 하비가 일찍이 알았다면 모른 척 한 번쯤 져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더 비참했다. 반의 자존심을 두 번 밟는 일이었다.
반이 담뱃대를 물고 허공을 올려보았다.
“우리 아버진 항상 자네 가문을 이기고 싶어 하셨지.”
하비는 착잡한 눈으로 친구를 보았다.
“그건 윗세대 이야기야. 우린 다르잖아.”
“그래, 다르지. 아~~ 주 다르지. 넌 1등, 난 2등. 하하!”
반은 하비의 손을 뿌리치고 남은 포도주를 전부 들이마셨다. 딸꾹대며 입술에 묻은 것을 손등으로 훔쳐내던 반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취한 얼굴로 그가 빈정대듯 말했다.
“그래서 우리 1등! 하비 스터스 경께서는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하비는 안타까움과 한심함이 섞인 표정으로 취한 친구를 말끄러미 보았다.
“물어볼 게 있어서 오긴 했는데.”
하비는 반에게 갖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려 했다. 곧 생일이기도 했으니 반이 좋아하는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빅터 베르텐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물어볼 거? 뭔데. 우리 스터스 경께 드릴 수 있는 정보면 뭐든 줘야지! 암!”
하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지금은 안 될 것 같아서. 다음에 부탁하지.”
빅터와 관련된 것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너는 뭐든 잘해서 좋겠다는 건 반이 농담으로 늘 하던 소리였다. 정말 마음에 맺혀 있는 줄은 몰랐다. 언제나 가볍게 말해서 친구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면서 말이다.
하비는 진심으로 반에게 사과했다.
“미처 몰라서 미안했다.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내가 알았으면 아마…….”
하비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차마 널 위해 일부러 져줬을 거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비도 그 말이 오히려 반을 짓밟는 내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이 피식거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됐어. 어차피 내일이 되면 다~ 잊고, 하비 스터스 경의 좋은 친구로 돌아갈 텐데.”
반의 주정을 조금 더 들어주다가 하비가 조용히 일어났다. 배웅하려는 사용인을 물리고 하비는 반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반. 넌 좋은 친구야.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몸을 일으킨 하비가 조용히 반의 어깨를 짚었다.
“정원에 벌이 너무 많아. 꽃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군.”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뭔지는 몰라도 잡음이 날 만한 것들은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미였다. 나직하게 충고를 남긴 하비가 로투스가의 너른 정원을 떠났다. 떠나는 큰 보폭의 발걸음마저 일정했다.
하비의 큰 그림자가 사라지자 반은 말없이 빈 술병을 정원에 던졌다.
쨍그랑!
병이 깨지며 유리 조각이 흩어졌다. 깨진 조각들은 꽃 사이사이로 숨어 번뜩였다. 반이 머리칼을 움켜쥐며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찍었다.
쿵!
반은 괴로워하며 더욱 고개를 숙이다가 기어코 테이블에 이마를 쾅쾅 찧었다. 몇 번이나 이마를 박던 그가 아예 늘어지면서 중얼거렸다.
“왜 항상 사람을 나쁜 인간으로 만드냐고…… 왜……. 네가 제일 나쁜 녀석이면서.”
그가 어지러이 늘어놓은 자료 중 발신인에 베르텐가의 문장이 찍힌 것이 보였다.
* * *
하비에게 친구는 많았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어두운 뒷골목으로 말을 몰고 들어가며 하비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반은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줄이야.’
하비는 반을 통해 로투스 가문을 이용했지만 사실 그건 양날의 검이었다. 로투스 가문에서 얻는 것들은 곧 그 가문의 방패가 되고 검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하비는 언제나 반이 자신의 검과 방패가 되어주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자만했다. 정작 그 친구가 얼마나 속앓이하고 있을지는 알지도 못한 채.
‘이번 생일 때 정말 좋아할 만한 걸 찾아서 선물해야겠어.’
하비는 생각을 이어가며 뒷골목 깊은 곳으로 계속 발을 옮겼다. 로투스 가문 이외에 날것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 지금 하비가 가고 있는 곳이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
워낙 어릴 때부터 평민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던 그였기에 이런 곳이 그리 싫지 않았다. 뼛속까지 귀족인 아버지에게 늘 혼나기는 했어도 말이다. 라힌 스터스의 꾸중이 극에 달하던 날, 하비는 더 이상 평민 친구들과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뒷골목에 존재하는 정보상의 위치는 남았다. 평민과 섞여 놀았던 나날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흔적이었다.
하비는 근처의 평범한 옷가게에서 로브를 하나 사서 후드를 푹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다. 몰고 온 백마는 믿을 만한 곳에 맡기고, 평범한 갈색 말을 샀다.
이윽고 한 허름한 여관에 도착한 하비는 마구간에 말을 매어놓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여급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하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하비의 정체는 알 수 없어도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는 건 대충 예상했다. 허름하게 온몸을 꽁꽁 가렸지만 감출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큰 키에 너른 어깨, 균형 잡힌 체격, 살짝만 보이는 턱과 날렵하고 곧은 코에 강건한 기개가 보였다. 게다가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좋은 향기까지 났다.
알파인 여급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혼자이신가요? 자리를 안내해 드릴까요?”
하비는 여급에게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여급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물러났다. 이 후드 쓴 남자에게서 아주 미약하지만 희미한 오메가의 페로몬 향이 났다. 아까 전에 좋은 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메가 페로몬이었던 것을 알고 여급은 속으로 놀랐다.
이는 하비가 반의 일에 몰두하느라 빅터가 준 향수를 깜박하고 뿌리지 않은 탓이었다. 어느새 그는 시간 날 때마다 향수를 뿌리라는 빅터의 당부를 까맣게 잊었다.
하비가 팔짱을 끼고 테이블 여럿을 눈으로 훑었다. 값싼 술을 들이켜는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떠들썩하게, 혹은 게걸스럽게 접시에 코를 박고 늦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건 이 여관의 위장한 모습이었다. 진짜 모습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아는 사람은 아는, 정보의 창구였다. 로투스 가문에서 취급하지 않는 하급 정보들이 주로 오갔지만 간혹 쓸 만한 것들도 나왔기 때문에 하비도 종종 이용했다.
하비는 조용히 카드를 치는 무리에게 접근해서 털썩 앉았다. 들고 있던 패 하나를 던지려던 사내가 움찔하며 후드 쓴 하비를 돌아보았다. 멀끔한 하비와 달리 길이가 다른 수염이 여기저기 난 남자였다.
“누구지? 웬 놈이야.”
하비가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낮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매번 번거롭게 하는군.”
슬쩍 지폐 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남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카드놀이에 다시 집중했다.
방금 말을 걸었던 수염 난 남자에게 하비가 조언했다.
“나라면 그 패는 끝까지 가지고 있겠어.”
“쳇. 건방지게 훈수 두지 말라고.”
구시렁대기는 했지만 남자는 하비의 조언에 따랐다. 결국 내려던 패 말고 다른 패를 슬그머니 내민 것이다. 그자는 수염이 마치 염소의 것 같아서 ‘염소수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남자였다. 비록 하급 정보를 취급한다지만 이쪽 방면에서는 가장 솜씨가 뛰어난 자였다.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던 하비가 순간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낯익은 페로몬 향이 느껴졌다.
“여기 베르텐 경이 다녀간 적이 있나?”
“시의원님? 그분이 왜 여길 오겠어. 이런 지저분한 곳에.”
하비가 다시 한번 익숙한 페로몬 향을 들이켰다. 희미하지만 확실했다. 빅터의 것이다. 야생의 범이 풍기는 것 같은, 두려움을 주는 강한 페로몬. 풀숲에 숨어 있는 맹수처럼 거친 풀 향도 함께 났다. 느낌 탓인지 압도적이고 은밀한 자신감마저 묻어났다.
하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분명 페로몬이 남아 있는데.”
염소수염이 검지로 이마를 긁었다.
“페로몬? 우린 그런 거 모르겠는데? 넌 어떻게 아냐? 알파, 오메가, 뭐 그런 건가?”
하비가 움찔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알 줄 알았는데 모른다는 반응을 접하니 당황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이 사람들은 모두 베타였다.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 그건…….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나.”
하비는 이곳에 온 목적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염소수염이 지저분하게 수염이 난 턱 끝을 벅벅 긁었다.
“돈 될 만한 건 다른 나리들이 싹 쓸어 가서 말이지. 더 줄 만한 게 없소만?”
“내가 궁금한 건 아직 가져간 자가 없을 텐데.”
“뭔데 그래? 말을 해야 알지.”
카드 하나를 홱 던지며 수염 남자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다 담담하게 나오는 하비의 다음 말에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전 시의원인 라힌 스터스 경의 회계사. 올란시의 재무를 담당했던 자. 그자의 행방.”
사실 빅터에게 협박당하는 동안 하비도 손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처음 하비는 아버지가 저지른 불법 투기라는 것부터 찾기로 했다. 그러려면 당시 라힌 스터스 경의 명으로 재무를 담당하던 재무담당 회계사를 추척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비는 빅터가 뭔가 오해했을 거라는 생각을 굳게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입증해 줄 사람이 없었다. 라힌 스터스 경의 자진 사퇴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하비는 왜 여태까지 그걸 몰랐을까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부터 수습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자는 정말로 실오라기만 한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그 뒤로 점점 하비에게도 이상한 점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라힌 스터스 경의 갑작스러운 자진 사퇴, 사퇴 이후 항상 불안해 보이던 모습, 죽기 전까지 무언가에 쫓기듯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것도 지금에서는 수상하게 보였다.
‘빅터 베르텐, 그자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빅터는 단순히 거짓으로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정당한 울분을 쏟고 있는 것이다.
하비는 꼼짝 않고 얼어붙은 염소수염을 수상한 눈길로 훑었다.
“분명 나보다 먼저 그자를 찾던 사람이 있었을 텐데.”
한참 뒤에야 염소수염이 다시 팔을 움직여 카드를 판에 던졌다.
“……나는 그런 사람 몰라.”
모른 척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이대로 물러설 하비가 아니었다.
“실종된 지 꽤 되었는데 가족들이 실종 신고조차 하지 않고 있어. 찾아가 보면 다들 뭔가를 숨기더군. 이상하지 않아?”
“집에서 내놓은 인간이겠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었어.”
하비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도와 성심성의껏 일했던 재무 회계사를 기억했다. 유약해 보이긴 했어도 실력 하나만큼은 알아줬다. 가정에도 몹시 충실한 다정한 가장이었다.
하비가 염소수염을 달래듯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음성으로 회유했다.
“말해주기 껄끄러우면 나보다 앞서 찾았던 자의 인상착의라도 알려줘. 그럼 들은 걸로 치지.”
결국 염소수염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비는 그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꼭 알아야겠어?”
“알아야 돼. 중요한 일이거든.”
염소수염이 제멋대로 난 수염을 손으로 마구 훑었다. 불안해 보였다. 고민 끝에 염소수염은 카드를 같이 치던 친구들에게 판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했다.
“잠시 나갔다 오마. 너희들끼리 놀고 있어.”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대는 남자들을 뒤에 두고, 염소수염은 하비를 끌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마른세수하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마. 그간 우리가 한 거래가 얼마야. 정을 봐서 특별히 말해주는 거라고. 알겠어?”
하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염소수염이 입을 벌렸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접근하지만 않았더라면 정말로 이야기해 줄 생각이었다.
“히익!”
뭔가를 말하려던 염소수염이 하비의 뒤쪽을 보고 기겁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나, 난 이만. 다음에 말해줄게! 도망쳐!”
하비와 염소수염이 따로 나오는 것을 눈여겨보던 건장한 사내 몇이 따라 나온 것이었다.
모두 알파인 그들은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술집에서부터 하비의 페로몬 향을 맡고 따라 나온 자들이었다. 하비의 몸을 취하기 위해 작정한 것이다.
“윽……!”
세 알파 전부 얼굴이 붉고 술 냄새가 지독히 났다.
역한 술 냄새와 따갑게 찔러오는 페로몬 때문에 하비는 구역질이 났다. 마치 매혹하려는 것처럼 성적인 의도를 담은 페로몬이었다. 더불어 강압적으로 찍어누르는 의도도 느껴졌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같은 알파인 하비가 저들의 페로몬에 오메가처럼 반응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워낙 갑자기 벌어진 일이다 보니 정신이 없어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하비는 우선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강압적으로 굴복시키려는 페로몬에 저항했다.
남자들은 감탄한 듯 자기들끼리 시선 교환을 했다. 그들 중 하나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호오, 알파 셋의 페로몬을 감당하는 오메가라니? 우성 오메가인가? 땡 잡았네.”
오메가와 알파 중엔 일반보다 뛰어난 우성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우성보다 뛰어나지만 수가 몹시 적은 극우성이 알파, 오메가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저들에게 들린 단어 중에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하비가 눈을 크게 떴다.
‘오메가라고? 내가?’
거친 관계가 끝나고 나면 빅터는 항상 하비가 다시 알파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일부러 더 괴롭게 하려는 수작임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평소에는 원래대로 생활할 수 있게 해준 게 사실이었다.
그때 빅터의 당부가 떠올랐다. 편지까지 두면서 향수를 시간 날 때마다 자주 뿌리라던 것이 이제야 이해 갔다.
‘설마, 향수를 뿌리라고 한 게 이런 이유였어?’
하비가 분한 듯 이를 뿌득 갈았다. 빅터는 아예 그를 오메가로 만들 속셈이었다.
지금껏 하비는 빅터의 그 어떤 요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어쩐지 계속 배 속이 묘하게 욱신거리더니…….’
하비는 굳은 얼굴로 항시 가지고 다니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쨌든 눈앞의 것들부터 치워야 한다. 정보를 찾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하비가 쥔 검의 넓은 날이 밤길 속에서 번뜩였다. 반대편 알파들도 단검을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하비가 자세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면 자비는 베풀어주마.”
사교 소드 클럽에서 하비는 모두가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일반 휴대용 단검을 다루는 솜씨도 마찬가지로 뛰어났다.
하지만 하비가 검을 잘 다룬다고 해서 한 번도 함부로 휘두른 적은 없었다. 지금도 저 알파 무리가 조용히 지나간다면 굳이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이러한 하비의 배려에도 술 취한 알파들은 이미 호승심이 극에 달해서 그의 선처를 몰라주었다.
“하! 자비? 자비는 우리가 너한테 베풀어야 할 것 같은데?”
알파 하나가 비죽하게 웃더니 단검을 들고 덤벼들었다. 하비는 빠르게 허리를 옆으로 틀고 칼날을 피한 뒤 검을 든 놈의 손을 내려쳤다.
“악!”
그자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단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동시에 다른 알파가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비는 꺼내 든 단검을 쓰지 않고 그저 검 손잡이로 남자의 배를 가격할 뿐이었다.
하비가 두 남자를 상대하고 있을 때 남은 알파 하나가 슬금슬금 하비의 뒤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한 하비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그가 달려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하비의 뒤를 공격하려는 남자의 팔을 낚아챘다. 힘이 엄청난지 남자가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하비가 흠칫 놀라 모습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알파를 보았다. 익숙한 페로몬 향이었다. 세 알파를 한 번에 제압하는, 강렬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좀 지켜보려고 했더니, 재미가 없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빅터가 남자의 팔을 홱 던졌다.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남자는 빅터에게 잡힌 곳에 벌써 핏빛 멍울이 들어 있었다.
“으악! 악!”
빅터는 시끄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장검을 들어 남자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컥!”
단 한 번의 칼질이었다. 남자의 가슴에서 피가 후드득 사방으로 튀었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도 났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가 스르륵 감겼다.
빅터가 쉬지 않고 팔을 움직여 다른 알파의 목에 검을 꽂았다.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더니 그의 눈이 그대로 생기를 잃었다.
빅터가 목에 박힌 검을 채 빼기도 전에 혼자 남은 알파가 반쯤 미쳐서 소리 질렀다.
“흐, 흐으으……! 악마다! 악마야!”
그는 빅터를 피해 뒤돌아 도망쳤다. 빅터는 도망가는 자의 등에 단검을 던졌다. 마치 다트라도 맞추듯 여유로운 손목 스냅이었다.
푹!
정확하게 등 한가운데에 단검이 꽂힌 남자가 털썩 쓰러졌다. 바닥에 피 웅덩이가 생기며 엎어진 그의 얼굴에 서서히 피가 번졌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했다.
하비는 이 모든 과정을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빅터가 천천히 하비에게 다가왔다. 금발이 온통 피에 절어서 붉었다. 입술과 눈가까지 핏자국이 튀었다. 하비가 마른침을 삼켰다.
‘맙소사.’
빅터는 마지막 알파의 단말마처럼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 같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등에 꽂힌 단검을 회수했다. 버리고 가도 되지만 괜히 현장에 증거를 남겨둬서 좋을 것은 없었다. 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만 한창 인기를 얻어 좋을 때에 굳이 이미지를 깎을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빅터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하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 격하게 움직였는데도 땀 한 방울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뿌리라고 한 건 제대로 뿌린 건가? 벌써 벌레가 꼬이는 걸 보니 시킨 대로 안 한 것 같은데.”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인 현장이니 말이다.
하비는 기가 막힌 얼굴로 응수했다.
“경은 방금 사람을 죽였어.”
하비의 말에도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검에 묻은 피를 길게 털어냈다. 누군가를 죽인 것이 아니라 먹음직스러운 고기라도 썬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정당방위야. 죽이려고 덤비는데 가만히 서서 찔려주기라도 하란 건가?”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내 선에서 잘 처리할 수 있었어. 그냥 날 덮친 거였다고. 더욱이 경을 공격한 것도 아니지 않나.”
듣고 있던 빅터가 차갑게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냥 덮치려 했다?”
빅터가 화가 난 것처럼 보여서 오히려 하비가 어리둥절했다.
“스터스 경은 아무에게나 다리를 벌리는 걸 좋아하는 거였나?”
“입조심해. 듣는 귀가 있어.”
하비는 빅터의 천박한 말에 질색하는 동시에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이름을 언급하면 곤란했다. 그러나 빅터는 그의 당황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그 몸을 건드릴라치면 검으로 배때기를 쑤시고 싶다는 얼굴을 하면서.”
빅터는 피 묻은 칼등으로 하비의 후드를 천천히 넘겼다. 푹 뒤집어쓴 모자 아래로 조금씩 하비의 얼굴이 드러났다. 높고 곧은 코 옆으로 이어지는 하얗고 마른 뺨, 그 위로 이어진 볼록한 귓불이 보일락 말락 할 때 빅터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다른 놈들은 ‘그냥 좀 덮치려 했다’는 선에서 끝나는 건가?”
하비가 얼른 빅터의 손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후드가 벗겨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굳은 얼굴로 하비를 노려보는 빅터는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하비는 빅터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난 건지도 짐작이 안 됐다.
하비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빅터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곤 하비에게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더니 묘한 얼굴로 잡힌 손을 순순히 내렸다. 하비의 의문은 그에게도 옮아 왔다.
하비가 얼굴도 모르는 알파들에게 당할 뻔했다. 더 좋은 일 아닌가?
‘혹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하비 스터스는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서, 그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으며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빅터는 아무 말 없이 단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손을 놓아준 하비도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이상해진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아무튼 자세한 대화는 여기선 곤란해. 장소를 옮기지. 시체는…….”
난감해하는 하비를 두고 빅터가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그러자 어두운 골목에서 남자 두 사람이 빠른 속도로, 아주 은밀하게 다가왔다.
그들이 접근했는지도 몰랐던 하비가 움찔하며 뒤돌아보았다. 건장한 체격의 알파 하나와 베타 하나였다. 앞머리를 길게 길러 음침한 분위기에, 생김새도 거의 비슷한 걸 보니 형제 같았다.
빅터가 익숙한 듯 그들에게 명령했다.
“치워둬. 뒤처리는 확실히.”
두 남자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알겠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생김새가 닮은 것만큼 대답하는 목소리도 똑 닮아 있었다. 두 남자가 신속하게 시체를 처리했다.
어둡고 더러운 뒷골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처럼 조용해졌다. 간혹 시끄러운 술주정 소리와 술병 깨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작은 비명만 들렸다. 악취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악취를 피하려 손으로 코를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러 번 와서 많이 익숙해져서였다.
그런 하비를 빅터가 의외라는 눈길로 보았다. 빅터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에게 가볍게 말했다.
“명문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 다닐 수 있지? 이런 곳에서.”
빅터의 물음을 무시한 하비가 음침한 분위기의 두 남자가 사라진 곳을 흘끗 보더니 되물었다.
“날 쫓아오기라도 한 건가? 저들을 시켜서?”
가소롭다는 듯 빅터가 냉소했다.
“날 쫓아온 건 그쪽 같은데. 내가 먼저 왔거든.”
하비는 눈썹을 구기고 저도 모르게 아직도 떠들썩한 여관을 뒤돌아봤다. 빅터가 이런 곳을 드나들 줄은 몰랐다.
“여길? 무슨 볼일로?”
“그럼 스터스 경은 무슨 볼일로 어울리지도 않는 이곳에 온 거지?”
어울리지 않는 곳. 빅터의 지적에 하비가 후드로 가린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피가 고인 바닥에 벌써 벌레와 쥐가 꼬이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여긴 언제 와도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가장 더러운 욕구가 이곳에서는 당연했다.
하지만 가장 추악한 장면들은 이곳이 아니라 그토록 고결한 척하는 귀족 사회에서 나온다. 그를 알면서도 방관하고, 애써 귀족의 품위와 명예를 지키려는 자신을 자조적으로 비웃으며 하비가 말했다.
“여긴 자주 와본 곳이야. 그리고 내 볼일을 베르텐 경에게 일일이 보고할 의무는 없지.”
하비의 반박에 빅터의 입매에 조소가 어렸다.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되고. 아까도 과잉 진압한 거였어.”
더 이야기하려던 하비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기서 빅터와 왈가왈부해 봐야 이제 의미가 없어진 일이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마침 장본인이 나타났으니 아주 잘되었다.
“그런데, 날 영원히 오메가로 만들 셈인가?”
빅터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휘었다.
“음? 벌써 알아챘나.”
두 사람은 어둑한 뒷골목 밤거리를 걸었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걷던 하비에게 빅터가 즐거운 듯 말했다.
“스터스가의 가주를 임신시킬 수 있다면 내게도 영광이지.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고.”
하비는 넉넉한 후드 아래로 분함을 감추었다. 하지만 터질 것처럼 꽉 쥔 주먹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알파인 자신이 임신이라니. 끔찍한 소리였다. 그것도 저 하비 베르텐에게 다리를 벌리고 얻은 씨로?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하비는 스터스가를 이을 방법을 걱정하긴 했지만 이런 추잡한 방법으로 이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가문을 더럽히려는 자의 씨를 받아서 가문을 잇다니? 말도 안 된다.
참고, 또 참았던 것이 터지고 내부의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그토록 인내했던 것들이 지금 와서는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부당한 대우를 왜 참아야 한단 말인가? 부당한 폭력에 무력히 휘둘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비는 울분을 담아 나직하게 말했다.
“나를 짓밟는 게 그렇게……. 그렇게 재미있는 건가.”
빅터가 하비의 떨리는 주먹을 흘끔 보았다. 뭔가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하비의 목소리가 잔뜩 억눌려 짓씹은 듯했다.
“내가, 하나하나씩 무너지는 게 그리도 즐거운 거냐고.”
드디어, 하비 스터스의 철벽같은 방패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빅터는 잔인하게 웃었다. 역시 한 점 한 점 살을 발라내니 그의 고고한 자존심도 이제 황량하게 뼈만 남았다.
“그러려고 이 수고를 들이고 있는 건데. 지금 와서 억울해?”
하비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억울했다. 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고통받아야 하는지, 몸이 강제로 개조당하는 끔찍함마저 감내해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세뇌당하다시피 그의 뇌리에 박힌 사명감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라힌 스터스는 죽는 날까지 스터스가의 존속을 걱정하고, 또 염려했다.
그러니 라힌 스터스의 유지를 받은 하나뿐인 자식의 도리로서, 하비는 최대한 조용히, 빅터의 발치에 엎드려서 이 고난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지나가고 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비록 지금 힘들어도 다음이 오면, 모든 게 끝나기만 하면, 이 굴욕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틀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하비는 그토록 원하던 끝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함마저 들었다.
고민하던 하비는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했다. 온몸이 부서질지라도 부딪쳐 하나라도 얻어내야 이 꽉 막힌 길목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질척대는 뒷골목 시궁창 위로 발을 디디며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오수가 튀어 그의 발목까지 적셨다.
“그 사람은 어디 있지? 스터스가의 부정이 기록된 증거를 가지고 있던 사람.”
빅터가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러나 시치미를 뚝 떼며 다시 걸었다.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군.”
빅터의 발도 더러운 웅덩이에서 떨어지면서 뚝뚝 물을 흘렸다. 그 흔적 위로 하비의 걸음이 새로 새겨졌다.
“모르는 척하지 마. 내 아버지가 시의원이시던 시절, 재무 담당 회계사가 있었잖아. 분명 그자에게서 정보를 빼낸 걸 테고.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지?”
그제야 이해 간다는 듯 빅터가 한껏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우리 스터스 경께서는 그깟 놈을 찾으려고 이 더러운 곳까지 직접 행차하신 건가.”
“그 사람 어디 있냐고.”
하비는 빅터가 비아냥거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반복했다. 그러자 빅터도 진심으로 상대해 주기로 한 듯 웃음을 지웠다.
그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살벌한 말을 뱉었다.
“글쎄? 지금쯤 바다 아래 상어 밥이 되어 있지 않을까.”
역시. 하비가 이를 갈았다. 빅터가 빼낸 자료는 그자에게 있었고, 이미 손을 다 써두었다. 게다가 빅터는 그를 ‘처리’했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방금도 그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걸 보았다. 빅터의 방식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후환을 두느니 없애는 사람이었다.
하비의 입술이 무겁게 달싹였다. 후드 아래 드러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죽였나?”
빅터는 금방 말을 꺼내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하비를 보고만 있었다. 그의 녹색 눈에 비스듬히 경멸이 스며 있었다.
툭, 투둑.
밤하늘에서 비가 한두씩 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밤이라 어두워 먹구름이 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하비의 후드 위로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날도 같았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라힌 스터스의 엄숙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라힌 스터스는 백색의 아름다운 저택을 등지고 근처 커다란 성당의 지하묘지에 묻혔다. 성당이나 교회의 지하묘지는 성스럽거나 명예로운 자만 묻는 귀한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 회계사는 라힌 스터스 경의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아들인 하비와도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비는 그를 똑똑히 기억했다. 정신이 없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성당 앞에서, 시의원 아래에서 재정을 보좌하던 그는 하비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차가운 손으로 슬픔조차 표현 못 하고 묵묵히 서 있는 젊은 가주의 손을 꼭 잡았다.
하비의 뒤에 서 있던 사용인이 제 키보다 큰 하비를 위해 팔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크고 검은 우산이 하비를 가려주었다.
타다다닥!
하비가 끼고 있는 검은 장갑 위로 그의 맨손이 포개졌다. 우산 하나 제대로 쓰지 않고 비에 푹 젖어 있던 그자가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죄송합니다.’
하비는 차마 뭐가 죄송한 거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완전히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