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챕터 4.
테스가 의선문으로 불러들인 자들은 행정가였다.
제리코를 필두로 하여, 영지의 각 영역을 맡고 있는 관장들. 행정관이라는 하나의 기관으로 묶기에 너무도 비대해진 그곳.
다가오는 행정관의 장들은 하나같이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름에 찾아왔습니다. 전에 명하신 일들을 확인하고자 하시는 거겠죠?”
“잘 왔네. 확인이라, 맞네. 거기에 덧붙여 새로운 일도 몇 가지 시킬 것이 있어서 말이야.”
새로운 일이라.
그 단어에 행정관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하였다.
“……차라리 죽이시죠?”
제리코의 얼굴엔 살기까지 스쳐 지나간 듯했다.
“에이, 다들 죽으면 누가 일을 하라고?”
“…….”
“……허. 허허허…….”
“오래,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어? 무병장수해야지. 그를 위해서, 내가 매일 보약도 지어다 주고, 포션도 주고 있잖나.”
“……주군! 그거 가지고 겨우 여기까지 버틴 겁니다.”
테스의 능청에,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제가 왜 여기를 제 발로 기어 들어왔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대신에 지원은 최상이지 않나?”
“……그거 아니면 다들 탈출했을 겁니다.”
“자식을 둔 게 죄죠. 말이 제자지 볼모로 잡은 거 아닙니까. 크흡…….”
“요즘 행정관들 사이에 무슨 말이 도는지 아십니까? 사기 당했단 말이 나옵니다. 대우는 좋은데, 그 대우보다 일거리가 더 많다고요!”
“배부른 소리로구만.”
푸념을 해 보지만, 거기까지다.
이들이 푸념해 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테스의 지원이 우선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영지에 일이 넘치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떠날 수 없는 건, 그가 그려 나가는 이상향에 어느새 감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
넘쳐나는 대우를 떠나, 그가 그려 나가는 방식이 가신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몇 가지 조치를 취해 줘야겠어. 현자가 북부와 중앙을, 마탑이 동부를 처리해 주고 있으니 우리도 하나는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남부로군요.”
“그래.”
“그쪽은 어렵진 않을 겁니다. 남부 귀족 다수가 주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의선문을 통해 실질적으로 묶여 있기도 하고요. 꽤 오래전부터 제자들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키워 놓기도 했습죠.”
“그걸 이제 써먹어야 할 때가 온 거지.”
“정말로 전역을 다 먹게 되는 거군요.”
제리코는 현재의 위치를 새삼 실감하는 듯했다.
‘장원에서 시작하여 영지, 어느새 왕국 전역을 잡아먹는 건가.’
감회 어린 그의 표정 속에서 읽히는 그의 내심이 테스의 눈엔 자연스레 읽히고 있었다.
하나, 중요한 건 감회 따위도, 그간 해낸 일들에 대한 감동 따위도 아니었다.
바로 눈앞의 현실을 처리해야 했다.
제리코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금세 자신을 추스르고는 현실로 돌아왔다.
“한데, 그게 다입니까? 남부는 어차피 귀족들을 찾아 확인만 하면 될 일이잖습니까. 새 일이라고 하신 거치곤 작은데요? 시키실 일이 있으면 빨리 말씀해 주시죠.”
“후후. 눈치가 늘었군.”
“주군 밑에서 구르려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니까요.”
“맞는 말이야. 여기에 몇 가지만 더 해 주면 돼.”
“……하나도 아니고 몇 가지라니. 두렵습니다만은.”
겁먹은 기색을 보이는 제리코의 말에 상관없이 테스는 바로 명을 내렸다.
그 명을 들은 행정관들의 표정은 자연스레 핼쑥해져 갔다.
* * *
의선문을 나선 행정관들의 기색은 무거웠다.
테스의 명에 따라 앞으로 벌일 일, 그에 대한 수습과 영향력에 따라 또 새로 벌어질 일들까지. 미래에 있을 여러 일을 생각하면 도무지 가벼이 있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몇 달은 또 죽어 나가겠습니다.”
“……그래도 해야지. 그게 주군의 대의니까.”
그만큼 그들의 어깨에 새로 만들어진 짐들은 무거웠다.
그러나 무겁다 해서 일을 피하는 자는 없었다.
그들의 주군인 테스 앞에서나 떼를 쓰듯 우는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주군인 그가 일을 맡기면 그 누구보다 열의를 보이는 게 이들 행정관들이기도 했다.
특히 제리코의 변화는 가장 무쌍했다.
테스에게 푸념한 기억조차 없다는 듯, 행정관장다운 태도로 변해 있었다.
“대의라……. 주군은 자신의 수련을 위하여 영지를 꾸렸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와 버렸군요.”
“그래. 여기까지는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야. 그래도 이미 벌어졌으니 어쩌겠는가. 따르며 할 수밖에.”
“예.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지요. 그게 영광스런 일이기도 하고요.”
“영광이라……. 그래, 그럴지도.”
말을 음미하듯 잠시 눈을 감은 제리코. 그 짧은 사이 많은 생각을 정리해낸 듯, 다시 눈을 뜬 그의 눈엔 정광이 어려 있었다.
그러곤. 바로 일을 배분했다.
“에일런, 자네는 남아 있는 곡식과 융통 가능한 모든 자원에 대해서 정리해 오게. 그 배분 계획까지도.”
“두 시간만 주게나.”
“좋군. 알스는 의선문의 마법사들과 협력해서 임시 숙소를 마련하기 위한 방법을 찾도록 하고. 바이트 자네는 식량 생산을 끌어당길 마법진의 확장을 요청하게. 그리고 에미르 자네는…….”
일이 순식간에 배분되었다. 각자가 맡은 영역과 능력에 맞춰 배분된 일에 불만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 일이 다소 많으나, 가장 큰 짐을 떠맡고 있는 건 결국 그를 총괄해야 할 제리코였으니까.
일을 분배받은 행정관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테스의 명에 따른 결과가 눈에 보일 만큼 그려지기 시작했다.
* * *
외교를 도맡은 자들, 이젠 외교관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갑시다. 갈 길이 머니 서둘러야 할 겁니다.”
“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들 전진!”
그들은 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옆엔, 외교관을 지키기 위한 병사들과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마차가 행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마차만 각기 수십여 대는 되었기에, 그들이 움직이며 만들어지는 줄은 길게 늘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행렬이 다시 수십이었다.
총합 수천, 마차만 해도 수백의 행렬이 매일 아침이면 출발하였다.
어센션을 떠나, 타 영지에 들어선 외교관들. 그들은 각 영지의 영주관을 찾아 들어섰다.
“정지해 주십시오!”
“어센션 영지의 도마스라 하네. 영주님을 뵐 수 있겠는가?”
“……어센션!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초대를 받은 방문은 아니었다.
수상한 이 시기에 파티 따위를 벌일 여력을 지닌 귀족은 없었다. 설사 여력이 있다 해도 파티 따위보다는 여러 수난을 겪은 영지를 추스르기도 바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초대 따위는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영주님께서 바로 들라 명하셨습니다! 이리로!”
테스의 영지에서 보낸 자를 되돌려 보낼, 담력을 지닌 자들은 감히 없었으니까.
안으로 들어선 영주관.
몇 날 며칠이고 기다릴 것 없이, 외교관은 곧바로 영주를 볼 수 있었다.
“어센션의 도마스라 합니다. 남부의 패자이신 배럭 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하핫. 패자라, 그건 옛말 아니오. 이제 와 누가 테스 님 앞에서 패자를 자처하겠소.”
“그리 말해 주시니 영광이로군요.”
외교를 도맡은 도마스는 영주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행정관이라 할지라도 그는 작위를 받지 못한 평민이었다.
본디 단승의 작위조차 받지 못한 그가 고개를 숙이지 않음은 죽임을 당하더라도 이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영주이자 카르소니아의 자작위를 지니고 있던 배럭은 감히 그를 탓하지도, 책을 잡아 힐난하지도 못하였다.
‘내 작위를 먼저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소문이 사실이었던 건가. 허허.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구나.’
도마스가 그의 작위를 말하지 않는 걸 보고, 그 내심을 이미 짐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본디 배럭의 작위는 카르소니아 왕국의 왕조로부터 나온 것. 도마스가 그를 말하지 않음은, 옛 카르소니아에 상관없이 테스가 움직이겠다는 신호였다.
짧은 대화였으나, 그 안에 담기 수사적 의미를 모를 배럭이 아니었다.
기실 그 수사적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었을지도 몰랐다.
“한데, 어센션의 외교관께서 이곳에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소이까?”
“때가 와서 말입니다.”
“때라 하심은…….”
외교관으로 온 도마스는 제 의도를 숨기지 않고 바로 드러내었으니까.
“통합.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러 왔습니다.”
“통합!”
“옛 왕조는 잊고, 이제 흩어진 모든 걸 다시 규합할 때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허허.”
말이 통합일 뿐. 그가 원하는 건 테스의 어센션 영지로의 병합이었다.
병합 이후의 변화는 극적일 게 분명하였다. 자작이었던 배럭의 작위가 그대로 유지가 될 보장도, 앞으로 있을 그의 가문에 대한 보호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선택할 때가 된 거로군. 아니 이걸 선택이라 할 수 있을는지. 과연, 어디까지 가문을 보존해낼 수 있을꼬.’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이미 없었다.
설사, 무력을 동원해 도마스를 내쫓고 이 자리를 파한다 해도 병합은 피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괜한 자존심으로 한 번의 뻗댐을 보이다가는, 그 뒤엔 도마스 같은 외교관이 아닌 테스의 병사들이 군홧발을 들고 찾아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배럭 자작은 제 목을 가져다 바치듯 대놓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세를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소. 내 구체적으로 어찌 따르면 되겠소이까? 그리고 내가, 아니 이 가문이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겠소?”
이 대세를 따르겠노라고 말이다.
“이리 적극적으로 나서주시다니, 자작님과는 이야기가 편히 진행될 듯싶군요.”
“허허…….”
그제야 자작이란 작위를 말해 주는 도마스. 배럭의 완벽한 항복 선언에, 그 가문이 지금의 성세 정도는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단 의미였다.
‘이게 정답이었구나…… 시대가 변하고 있어. 아니 완전히 개벽하고 있다 봐야 하나. 이번 병합이 끝나면…… 나도 이만 물러나야 할 때가 올지도. 쯧. 그때 둘째가 아닌 첫째 녀석을 의선문으로 보낼 걸 그랬나. 어쨌거나…… 지금이 최대의 고비겠어.’
제 선택이 옳았음에도, 배럭은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었다.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이어지던 카르소니아 왕조가 무너지고. 그 뒤에 이어지는 새로운 왕조, 어쩌면 왕조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가는 테스에 복속되는 걸 새삼 실감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귀족으로서 왕조에 대한 충성심 따위야 별달리 존재치도 않았으나, 급작스런 변화에 따른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까지는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이 도마스란 외교관과의 대화로 제 앞으로의 삶이 정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자, 우선은 영지를 어떻게 통합하는지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그러세.”
배럭 자작. 그의 남은 운명이 테스가 보낸 일개 외교관의 입으로 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운명에 대한 대화는 이곳 배럭의 영지뿐 아니라, 외교관이 파견된 온 곳곳에서 동시에 이뤄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