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챕터 7.
그레놀이었다.
상단주란 직책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얼마 남지 않은 제 가신들과 함께 온 그는 바로 테스를 찾았다.
다른 이라면 면담을 거부당했을 터.
하나, 영지 초기부터 그레놀이 쌓아 놓은 공은 상당했기에 만남은 바로 성사됐다.
이미 오래전부터 천리향을 묻히고, 레므나를 이용해 그레놀에 관한 정보를 얻어냈던 테스다.
그가 연합의 인물이라는 거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테스는 그 수준을 연합의 유력 가문의 후손이거나, 혹은 새로운 세력을 꿈꾸는 자 정도라 여겼었다.
한데, 그 정체는 예상 이상이었다.
‘연합의 왕자라 불릴 정도의 수준이라곤 예상 못 했는데.’
무려 그는 연합에서도 세 손가락으로 꼽히던 유력 가문의 자제였다.
대범람의 수해를 입어 그 세력이 반 이상 무너졌다 해도, 이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는 연합의 특성 때문.
각 세력 사이에서 합종연횡이 계속해 이뤄지고. 그 사이에서 몰락하거나 득세하는 곳이 시시각각 나타나는 곳이 마스키지언 연합이었다.
그들은 전체 전력을 더하면 카르소니아보다 강력하나, 그 힘이 중앙화되지 못했기에 분열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가문이 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성을 한 테스조차도 그 시작이 카르소니아가 아닌 연합이었더라면,
‘미처 날개를 펴기도 전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연합인들의 뼛속까지 박혀 있는 견제 방식에 의해 지금의 상태에 이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였다.
그러니 테스는 반쯤 망해 버린 그레놀이었으나, 그를 경시하지 않았다.
신분을 밝히고 자신을 찾는 그레놀을 그는 성실히 맞이하여 주었다. 적어도 그레놀에겐 그럴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범람 이후를 예견했다.
“다짜고짜 찾아오더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대범람 이후에 벌어지는 일. 이미 반쯤 예상하고 있으셨지 않습니까? 물의 기운이 범람하며 균형이 깨졌으니, 그다음이 뭐겠습니까?”
“마계 혹은 이계의 침략이 이뤄지겠지. 지난 데빌 던전을 생각하면 마계가 가장 확률이 높겠고.”
“예. 바로 그거죠. 때문에 데빌 던전을 빠르게 처리해야만 했었는데, 카르소니아의 왕은 뜸을 들였지요. 다행히 테스 님이 나서 줬으나 미묘하게 늦긴 했었습니다. 그러니 마계는 더 가까워졌지요.”
데빌 던전. 마나 이상 현상. 침공.
아직까지 하나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일종의 예언이라면 예언을 말하는 셈. 그런 말을 하는 그레놀의 눈엔 확신이 얹혀 있었다.
‘차원에 관한 지식들을 지니고 있는 건가. 그레놀이 가진 가문의 힘이 그에 관련된 걸지도 모르지. 하기야, 그 정도쯤 되니 연합의 유력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테스의 예상대로 그레놀이 가진 차원에 관한 지식은 상당했다.
정확히 그 가문의 피로 이어지는 지식의 깊이가 다른 자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보는 게 맞았다.
그레놀의 가문인들은 성국의 관측자와 또 다른 방식으로 다른 곳들을 관측하는 자들이었고. 이를 이용하여 고대부터 큰 힘을 가져 왔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이용해 거래를 할 줄 알았다.
지금의 자리도 그런 거래 자리였다.
그레놀은 테스와 쌓은 오랜 인연을 이용해 대면하고자 했고. 둘이 대면하면서 서로에 관한 거래를 하자 했다.
그레놀은 대범람으로 피해를 받은 자신의 가문에 관한 도움을 원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랍시고 꺼낸 게, 바로 지금의 예언이었다.
그레놀의 예언이 없더라도 테스는 현 상황을 이미 깊이 파악하고 있던 터.
‘마나 이상 현상이 벌써 몇 차례 벌어지고 있는데, 대범람 이후를 준비 안 하고 있으면 그게 더 어리석은 일이지.’
그에 관한 준비는 이미 철저하다 할 정도로 하고 있었다
“분명 이해는 했어. 예언도 알겠고, 침공도 이미 알고 있었지. 그에 대한 방비는 자네도 이곳을 오면서 봤을 거고.”
“예. 놀랄 정도였습니다. 이미 방비를 충분하다 할 정도로 하셨더군요.”
유민들을 이끌고 오던 병사들은 침공을 대비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실전 경험을 쌓은 의선문의 문파원들도 그들 곁에 자리해 있었다.
반쯤 정착하다시피 한 텍트의 부족원들은 성벽을 끌어 올리고 있었고. 그 옆에 데브론을 포함해 새로 받아들인 영지 마법사들이 속도를 더했다.
여기에 대진법을 이용하여 얻은 기운을 통해 결계까지 쌓았다.
유비무환의 수준을 넘어, 설사 왕국의 전력이 다 들이닥쳐도 버텨낼 수 있다고 자부하는 수준이었다.
이를 여기까지 찾아온 그레놀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 그런데 여기서 다 망해가는 자네가 내게 줄 게 뭐가 있지? 고작 경고를 해 준다고 해서 내가 자네를 도와주긴 힘들어.”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얻을 정보를 가지고 저를 도와 달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죠.”
“그래서? 가진 패를 한번 툭 터놓고 이야기해 봐.”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그레놀과 나눈 정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애써 찾아온 그에게 작은 자리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대범람 사태에서 사람을 도왔듯, 그를 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서, 어지간한 수준의 대가로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테스였다.
그런데, 그레놀이 그로선 생각도 못 한 패를 꺼냈다.
“이 모든 사태, 아니 앞으로 벌어질 사태들을 관측할 수 있는 힘을 드릴 수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뭐라고?”
이어지는 그레놀의 말엔 테스도 놀람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테스의 반응을 예상한 듯, 그는 말을 더했다.
“관측을 도울, 아니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드리면 거래를 해 주시겠냐 이겁니다. 저 그레놀에게 연합을 주시면, 아니 힘을 준다 약속하면 그걸 드리죠. 저희 가문이 가진 피의 힘을요.”
“허…….”
예지, 예언, 진리의 파악.
그레놀 가문이 지닌 힘들의 핵심. 그들의 피로부터 이어지는 힘을 전수하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아니, 설사 전수가 된다 하더라도 그걸 실행하려 하다니.
누대에 걸쳐 이어진 힘을 전수하려면 얼마나 큰 각오가 서려 있어야 할까.
테스는 흔들림 없는 그의 눈으로부터 각오를 읽었다.
‘도박이로군. 제 능력을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으로 연합을 먹으려고 하는 거야.’
과연 그들이 가진 피의 힘보다도, 연합이 가치가 있을까.
테스로선 알 수 없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그레놀도, 피를 전수받으며 살아 온 자도 아니었으니까. 애당초 한 개인이 타인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거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의 각오보다도 중요한 건 테스의 결정.
반쯤 공수표로 느껴지는 그의 거래물과 거래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였다.
‘문제는 내가 구미가 당긴다는 건데.’
재밌는 건, 그레놀의 말에 그 어떤 확신도 느껴지지 않음에도 테스의 마음이 동한다는 거였다.
사태를 관측하여 예언할 수 있는 힘이라니.
아니, 예언 정도가 아니라 예측 수준만 되더라도 상관없다. 꽤 대단한 힘이잖은가.
‘그 어떤 신의 힘보다도 매력적인 것일지도.’
전에 없던 새로운 힘이다.
이 세계의 힘을 탐구하고, 승천자가 되려고 하는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어서 받아들이라고. 그럼으로써 저 힘을 탐구하고 잡아먹어 얻어내라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답을 해 주시죠. 이곳이 안 되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테니.”
“갈 수 있는 곳이 있을지나 모르겠는데. 내 답은…….”
테스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려 했다.
그레놀이 격에 걸맞지 않게 갖고 있는 저 힘을 자신이 가져, 자신은 그 이상의 격을 지니고 싶었으니까.
오랜만에 드는 탐욕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려는 그 순간이었다.
샤아아아아-
“허…….”
“아, 이런…….”
거대한 마나의 울림이, 둘을 스쳐 지나갔다. 마나의 울림이 지닌 그 의미. 테스가 모를 리 없었다.
“아무래도 대답은 이다음에 해야 할 거 같군.”
“하…… 우연일지, 비틀림일지 모를 일이로군요. 뭐, 좋습니다. 다녀오시죠. 거래는 이후에 하면 될 테니.”
그를 가지고 거래를 하려는 둘의 예상보다도 더 빠르게 일이 벌어져 버렸다.
샤아아- 샤아-
계속해 느껴지는 마나의 울림이 그 증거!
“그럼 이 뒤에 보지.”
그레놀은 아쉬움을 접으며 뒤로 물러났고, 그가 만들어진 틈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 * *
영지 전역에 펼쳐진 기감. 기감을 통해서 느껴지는 마나 격류만 하더라도 여덟.
그가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테론을 비롯한 영지군 지휘자들이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주님!”
“주군!”
저들도 마나의 격류를 느낀 거다. 특유의 기감이 없더라도 느끼기에 충분한, 격류였으니까.
모두 놀란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침공이다. 대범람 이후 벌어진 마나의 틈을 노리고 있는 거지.”
담담한 테스의 설명. 그 내용은 결코 담담하게 들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놀라는 그들을 두고, 테스는 상황 설명을 이었다.
“도시 에나원에 둘, 프로스트에 셋, 셀리언과 샤너드에 각 하나다.”
“그렇다면 총 일곱인 겁니까?”
“아니. 가장 큰 게 남았어. 여기서 가장 가깝네. 어센션과 거의 붙어 있으니까.”
“허…….”
마나 격류 이후 이어지는 침공. 급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침공 방식은 악랄했다.
‘사람이 많은 곳부터 노리고 있어. 사람을 죽여서 얻은 마나나 영혼을 이용하려 하는 거겠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낼 수 있는 곳.
사람이 몰려 있는 곳만을 노리고 있었다.
전에 있던 대범람보다 더 지독한 방식이었다. 적어도 대범람은 사람이고 몬스터고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재앙을 던져 줬으니까.
이번 침공은 가장 큰 피해를 주려 한다는 점에서 악랄하다 할 수밖에 없었다.
‘전엔 중소 영지들이 무너졌는데…… 이번엔, 대영지들이 무너질 차례인가.’
안 그래도 대범람으로 질서가 무너진 상황. 이에 이어지는 재앙에 다들 긴장의 끈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테스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초인이 돼 가는 그라 해서 긴장이 없을 순 없었다.
‘이어지는 재앙이라, 최악이야. 대체 이 세계가 어떻게 여태까지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정도군.’
그러나 그는 겉으로 긴장을 드러내진 않았다.
모두를 이끌어야 하는 그가 긴장을 드러내 봐야, 얻을 것은 없었으니까.
테스는 긴장 대신 침착함을 드러냈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출격을 해야 할까요?”
“아니. 지금부터 내가 정해 주는 곳으로 다들 출격하도록. 영지에 한 치의 문제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내 명대로 정확히 움직여 줘야 할 거야.”
“……꼭 해내겠습니다!”
그의 침착함에, 가신들의 긴장이 크게 가신다. 테스가 원하는 모습이었다.
일에 대응할 이들이 마음의 준비를 마치자, 테스는 바로 그들을 이끌었다.
“좋아. 그럼 다들 따라오게. 그대들이 움직여야 할 곳들을 가면서 정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