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챕터 4.
그레놀이었다.
“멀어지기는 무슨. 이대로 도망간다고 해서 도망이 쳐지나. 시끄럽고, 어서 내 손이나 잡아. 명령이야.”
“……큭. 명대로!”
그는 떠내려가려 하는 자신의 기사 페오를 잡아챘다. 상단주를 자처하고 있는 그의 호위역을 맡아주는 페오.
가는 곳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그레놀의 손을 부여잡아 겨우 떠내려가는 몸을 억지로 일으킬 수 있었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 잡으려다 떠내려갈 뻔했는데, 은혜는 무슨. 익스퍼트나 되어서 대체 왜 물에 빠지고 그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페오가 고개를 숙여온다. 고개 숙인 그가 변명하듯 뒤이어 말을 이을 리 없었다. 그는 훈련받은 대로만 행동하는 자였으니까.
“에휴. 되었다. 말을 해서 뭐 하나. 그래서 상황은?”
“보시다시피, 물건들은 전부 잃었습니다. 세력권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합니다. 대범람은 우리 연합에도 문제를 일으켰으니까요.”
연합이라.
그가 속한 곳이 마스키지언 연합이었을까. 아니면, 숨어 있는 다른 연합인가.
뒤이어지는 둘의 말에서 그 힌트가 담겨 있었다.
“……그 테스가 카르소니아의 우기를 남부로 보내는 만큼, 연합의 우기가 더 거세지긴 했지. 미묘한 차이긴 하지만 치명적이었어.”
“그자의 성격상 일부러 벌인 일은 아니었겠죠. 애당초 우기를 이용하려 했다면, 그리 나설 이유도 없었을 거고요.”
“그게 맞지.”
남부의 우기가 강해져 피해를 볼 법한 세력. 그리고 연합. 결국 둘이 마스키지언 연합의 인물들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연합으로 뭉쳐 있지만, 각기 수십여 개의 세력이 군집해 있는 게 그들이 속한 마스키지언 연합이지 않은가.
그들이 연합에 머무르지 않고, 카르소니아 왕국 등에서 활동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연합의 인물들 중 상행에 밝은 자는 꽤나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상행위를 위해서 온 곳곳을 떠도는 자는 넘쳐났으니까.
재밌는 점은, 테스와 접점을 만들어냈던 그레놀의 경우 본디 상인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테스와 거래를 시작한 건 테스와 접점을 만들기 위함.
그리고 그러한 접점을 만들어낸 이유는.
“단단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무르기도 한 자가 테스니까. 그래서 제법 그가 마음에 들었는데 말야. 언제고 이용해 먹으려고 온갖 수작을 부렸는데, 상황이 이리돼서야…….”
“……공자께서 추구하시던 대의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지요.”
테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레놀에게 있어 테스는 급작스럽게 힘을 드러낸 송곳. 그 송곳이 향하는 방향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그가 얻을 건 차고도 넘친다 여겼기에 했던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테스에게 온갖 편의를 봐주고. 그 편의를 통해 빚을 쌓아 놓으면, 후에 이용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 정말 남은 게 하나 없네.”
막상 그 주변은 폐허만이 가득했다.
온 곳곳이 물에 쓸려 나갔고. 남아 있는 건 흙으로 만들어진 토사들뿐이었다.
마스키지언 연합이 자랑하던 건축물도, 꽃핀 상행위 속에서 만들어졌던 재산들도 전부 쓸려 갔다.
그나마 그가 자랑스레 여기던 저택은 마법의 힘에 의해 보호됐다.
하지만, 딱 그뿐이다.
“진짜 중요한 사람들이 이리 쓸려 나가서야 무슨 방법이 있나.”
“……공자님이라면 방법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상황에서도 내 편을 들어주는 건 좋다만, 망한 거라고.”
그레놀로선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물려주어 왔던 고풍스런 저택 따위에 가치를 두지도 않았다.
그에게 가치 있는 건, 가문의 유산과 저택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이 지닌 저택. 그 주변으로 만들어져 있는 가문의 영역. 그 아래 부림을 받는 자들이 중요했다.
한데 눈앞의 상황은 뭔가.
자랑스러웠던 그 모든 것들이 쓸려 나갔다. 수 대를 이어서 만들어 갔던 역사가 무너졌다.
이 상황에서 그레놀의 정신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빌어먹을 저택보다도, 이 피에 담겨 있는 정신력 덕분이겠지. 진짜 중요한 건 이런 거라고. 망할 마법사 놈들. 중요한 걸 지키지 못했어.’
절망스런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에 잡아먹히기보다는, 그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새로운 수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에 그의 구미가 당겼다.
“아무래도 한번 뻔뻔해져야겠다.”
“예?”
몇 년간의 거래로 질겨진 인연에게 들러붙는 거였다.
‘내 방식은 아닌데, 어쩔 수 없나. 시기가 워낙에 수상하니.’
그는 타오르는 속을 잠재우고, 억지로 빙긋 웃었다. 테스와 거래할 때면 보이던 가식적인 웃음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말했다.
“우선 살고 봐야 하지 않겠어? 한번 뻔뻔해져서 목숨을 구함 받을 수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남는 장사겠지.”
“설마 그를 찾아가시려고 하는 겁니까?”
“달리 방법이 있나. 이러려고 애써 만들어 놓은 인연이 아닌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가 보자고, 북부까지 가는 길이 꽤 험할 테니까 말야. 반박은 하지 마, 명령이니까.”
“……명! 따르겠습니다.”
남부의 마스키지언에서 그 위 북부로.
분노를 삼키고 애써 가면을 쓴 그레놀의 목적지가 정해졌다.
연합으로 이뤄진 마스키지언에서 왕자라고도 불리던 그. 왕족이 없음에도 왕자로 불릴 수 있는 성세르 자랑하던 그가 상단주란 직함을 벗어던졌다.
그런 그를 보고 테스가 어떻게 나올지는 그레놀조차도 예상할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대범람의 빗줄기를 뚫고 북부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당당했다. 일말의 망설임 따위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피로부터 이어받은 정신력 덕분일 수도, 혹은 그가 지닌 대범함 덕분일 수도 있는 태도.
어떤 이유에서든 그의 당당한 태도는 그 뒤를 따르는 기사 페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있었다.
마스키지언의 그레놀. 그가 대범람 속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 * *
예상치 못한 방문자들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테스는 알 수 없었다.
역병을 이겨낼 방법. 그를 위해 골똘히 머리를 굴리던 것만으로 심력이 전부 소모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바깥에 신경을 쓸 겨를이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결국 그 방법을 생각해냈으니 성과는 있었다. 문제는 그 방법이, 그 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다른 자의 도움이 필요하단 것.
테스는 도움이 필요한 자를 바로 자신에게 불러들였다.
그, 드워프 텍트였다.
텍트는 테스의 부름을 받자마자 거센 외침을 터트렸다.
“이 망할 인간 놈이! 드워프인 나를 이리 대하는 건 너뿐일 거다. 도시 건설을 시키더니, 이제는 다짜고짜 연장 챙겨서 오라고?”
“도움이 필요하니까.”
“쯧. 어지간하면 도움을 주지 않을 텐데, 네 놈이니 안 줄 수도 없구나. 그래서 용건이 뭐냐?”
테스는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 거대한 양손검의 검날이 반 이상 땅에 박혀 있는 채로 있었다.
“어억! 저, 저걸 저리 둬!?”
텍트는 놀란 눈을 하고 달려갔다.
“이 망할 놈! 아무리 실패작이라지만 우리에겐 소중한 창작물이거늘!”
소리치며 달려간 텍트.
파지직-
그가 검날에 손을 대려 하자, 강한 기운이 터져 나오며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이, 이 무슨…… 분명 물의 기운만 흡수했던 녀석일 텐데.”
“물의 기운에 내 기운을 섞었지. 거기다, 대범람의 기운도 같이 섞었더니, 저 상태가 되던데. 일종의 변질이랄까.”
제 창작물을 건드렸다고 화내던 텍트는 금방 태세를 전환했다.
실패작이지만 보구. 그들이 만들어내는 보구에 그들도 생각지 못한 기능이 있단 사실에 호기심을 가졌다.
“허…… 우리가 만들어내는 보구에 그런 기능들이 있었다고?”
“뭐, 보다시피. 내가 몇 개 조작하긴 했지만, 본래 저런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조작도 힘들었겠지.”
“호오! 대체 무슨 조작을 한 거냐?”
테스는 텍트의 물음에 쉬이 답해 줬다. 안 그래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니 설명을 해 줘야 했으니까.
기운을 심기 위한 진법석. 그 작동 원리에 대해 몇 가지 첨언을 더해 줬다. 설명을 길게 이을 필요도 없었다.
드워프인 그는 타고난 장인이었고, 금방 이해했으니까.
“일종의 마법적인 장치인가. 그렇다고 완전히 마법적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니…… 오묘하구나.”
그 타고난 오성을 통해서 진법의 정수에 슬쩍 도달할 정도였다.
‘일부를 설명했을 뿐인데. 과연, 드워프라 이건가?’
그는 계속해 살피더니 결국 틈을 찾아냈다.
딸칵-
“여기를 만지면, 조작이 가능하구나. 기운을 피하는 게 돼.”
“허…….”
기운에 둘러싸인 무구에 끝끝내 손을 대는 데 성공했다.
‘이건 놀라운데?’
그의 손이 무구에 닿았을 때, 테스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법석의 본질은 진법. 그 안에 진법적인 성질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이치를 조정하여 원하는 상태를 만드는 진법은 한 가지 치명적인 속성이 있었다.
억지로 생문을 닫지 않는 한, 언제고 한편에 생문이 마련된다는 거다.
사용하기에 따라 진법을 통과할 수 있는 출구로도 사용되지만, 생문은 달리 사용하면 일종의 약점이었다.
생문을 통과해 진법을 건드리면, 애써 만들어낸 진법이 망가지게 돼 있으니까.
그러한 생문을 텍트는 금방 건드렸다.
테스가 진법석에 들인 공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
우연찮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흘흘. 놀랐느냐?”
“안 놀라는 게 이상한 일이지 않나?”
“너무 놀라지는 마라.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물품이기에 보이는 길이 있으니까. 일종의 진리안(眞理眼)을 지녔거든.”
“진리안이라…… 신기하긴 하군.”
이는 드워프가 지닌 능력에 근거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뭐, 우리가 만들어낸 거 한정이긴 하다. 이건 기묘하게 섞였지만, 본질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니 가능한 거지.”
텍트가 더해 준 설명에 테스는 상황을 완벽히 이해했다.
‘앞으로 진법을 구성할 때, 드워프 것은 제외해야겠네. 약점이 될 수도 있겠어.’
그가 이해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무구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텍트. 그는 더 깊은 본질로 향하고 있었다.
“호오. 과연…… 후음……. 재밌는 방식이란 말이지. 으음. 이걸 이렇게 한다라.”
진법을 분석하고, 무구의 변화를 살핀다.
실패작이 됐으나 그들이 마련한 보구의 그릇을 확인한다. 그에 따른 변질도 그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테스는 장인인 텍트가 살필 수 있도록 한참을 지켜봐 주었다.
마음껏 살핀 텍트가 물었다.
“그래서 이걸 보여 주면서 내게 부탁할 일이 대체 뭐냐? 연장은 왜 챙겨 오라고 한 거고?”
테스의 부름에 처음 욕지거리를 날리던 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역시 분석하게 두길 잘했어.’
대장장이이자, 보구 제작자로서 가득 찬 호기심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있을 일이 무엇이든, 그의 짙은 호기심만 채워 준다면 괘념치 않을 듯 보였다.
테스는 그의 물음에 바로 답해 줬다.
“나랑 일 하나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