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챕터 2.
“보기 좋네.”
-내 입장에선 힘이 줄어드는 기분이군.
“어쩔 수 없잖아. 버텨 보라고.”
점차 맑아져 가는 하늘. 테스는 그 위를 바라다보았다. 거칠어진 우기 가운데서, 파란빛을 보는 기분. 놀라우며, 동시에 생경하다.
테스는 한참 기분을 만끽했다.
아무리 그라도 기적과 같은 지금을 만들어내는 건 드문 일. 그러니 한참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아쉬울 정도야.’
마음 같아선, 이 대진법 아래에서 몇 달이고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츠츠츠츠-
대범람의 우기는 이 세계 전역을 아우르고 있었고. 하나의 대진법으로 구할 수 있는 영역은 한정돼 있었으니까.
쌓여 있는 수백 개의 무구만큼이나, 많은 영역을 구하기 위해선 어서 움직여야 했다.
* * *
화아아악-
수십여 개의 진법 구축과 연동. 이를 수행하기 위해선 제아무리 테스라도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다른 자에게 무구를 쥐여 줘 봐야 같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나마도 보물이랍시고 품에 싸매고 있겠지.’
그러니 움직여야 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사방 수 킬로미터의 우기를 잠재운 그 뒤. 남아 있는 게 있게 된다.
“사, 산 건가?”
“이리 다 떠내려갔는데 어떻게 살아!”
“……허.”
이재민들이다.
우기를 피해 높은 곳으로 숨어들었던 자들.
살아는 남았으나, 이들에게 남은 건 폐허밖에 없었다. 그들이 살아가던 집도, 농사를 위한 토지도 다 토사로 휩쓸려 가 버렸으니까.
그나마 살아남았음이 다행이나, 이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들을 구하자고, 대진법을 구축하는 테스가 움직일 수도 없는 터였다. 당장 대진법 구축을 멈췄다가는 대범람의 우기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 해서.
‘이 상황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지.’
테스는 마냥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 * *
자신을 대신해 움직일 수족을 마련한 지 오래인 테스 아닌가.
예상을 했기에, 그에 따른 준비는 그에게 손쉬웠고.
“영주님이 말씀하신 때가 지금이군.”
“……과연, 익히 예상하신 대로야. 그렇다면, 슬슬 출격시킬 때가 된 건가. 준비는 됐나?”
“구호 물품도, 의선문의 문파원들도 전부 준비됐습니다. 병사도 일부 차출해 놓았습니다.”
이미 준비를 해낸 지 오래였다.
의선문, 병사, 구호 물품. 셋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이번 의선문의 문파원들은 각기 의술을 특기로 한 자들이 중심이 됐다.
병사들은 제각기 구호 물품을 짊어지고, 채비를 마친 지 오래였다.
다들 테스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진법이 펼쳐짐으로써 그 신호는 이미 떨어진 상황.
“좋아. 근데 지금 뭐 하고 있나. 바로 출격하지 않고. 이런 때는 출병식 따위 벌이는 거보다, 바로 나가는 게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 어서 가자고!”
“명!”
“바로 의선문에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채비를 마친 병사들이 바로 영지를 떠났다.
“출격!”
그들이 움직일 경로는 정보를 맡은 레므나가 마련해 놓은 지 오래. 각기 미리 정해 놓은 수대로 찢어졌고, 각자가 정한 방향을 향했다.
병사들의 속도는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구조에 있어선 시간이 생명이기에, 발이 날랜 자들을 뽑아 구호 병사로 편재해 놓은 덕분이다.
준비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이 지칠 걸 대비하여 영약과 마법 물품을 지원했다.
영약은 이들의 기운이 쇠하는 걸 막을 것이고, 마법 물품은 부족한 속도를 더해 주는 식이었다.
이 준비만으로 이들의 속도는 몇 배로 빨라졌다.
테스의 병사들이 지닌 진격 속도가 다른 병사들보다 수배 빠른 걸 감안하면, 그 속도는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개인이 아닌 집단의 이동이기에 더 대단한 것!
그러한 구호병들의 뒤를 따라잡은 자들이 있었으니.
“같이 갑시다!”
“오셨군요!”
추가 준비를 마치고 출발한 의선문의 문파원들이었다.
의술에 관심이 많던 제자 샤널. 그녀가 이번 지원의 핵심. 그녀 뒤로 따르는 넷, 미크, 비베너, 소른, 델타는 그녀를 보조하여 움직일 제자들이었다.
후에 의약당의 당원과 당주들이 될 자들이 움직이는 첫 행보.
“한시가 급하다고 들었어요. 가장 가까운 곳부터 먼저 알려주시겠어요?”
“옙. 북쪽으로 10km 직진입니다. 메놀란 장원이 있던 곳이죠.”
“메놀란……. 지넬에 속하던 곳이군요. 기억했어요. 먼저 갈게요!”
“곧 따라가겠습니다!”
테스를 이어, 성자로 이름을 드높일 샤널이 알려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테스는 영역을 구축해 갔다.
-끝도 없이 몰아치는군.
“그만큼 많은 기운들이 몰려 있으니까. 대체 이따위 범람은 왜 일어나는 건지…….”
-그게 이 세계의 순리다. 너는 그 순리를 역천시키는 거고.
“역천이라……. 이런 것들이 순리라면 다 없애 버리는 게 맞는 거야. 뒤엎어 버리는 거지.”
-한번 생각해 볼 법한 일이긴 하군. 네가 그게 가능해진다면 말이지.
그가 대범람을 피할 영역을 구성하는 사이.
“저기예요! 저기 생존자들이 있어요!”
“엇! 여기도 있습니다!”
그의 수족들이 신속히 이재민들을 구했다.
“오오! 살았다!”
“신이시여!”
갇힌 자들을 구출하고. 굶주린 자에게는 식량을 줬다. 비를 피하다 몸이 쇠한 사람에게는 약을 지어 줘 기를 보충시켰다.
급한 응급 처치를 마련하면 그 뒤. 다른 자들이 나섰다.
“저희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맡길게요.”
속가제자들과 뒤에 투입된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터를 전부 잃은 이재민들의 호위를 맡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센션이요.”
이들이 목표로 하는 곳은 테스의 영지. 저들에게 새로운 터전이 될 곳이었다.
대다수가 이들을 따라 어센션을 향했다.
모두가 따른 건 아니었다.
“나는 이곳을 버리고 갈 순 없소!”
“나도 그렇소. 구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그래도…… 평생 살던 곳을 버리고 가는 건 무리요!”
제 터전, 고향이 소중한 자들도 있었다.
제 영역을 소중히 하는 것, 인간에게 있어서 당연한 본능이지 않은가.
‘영주님이 예상한 대로군.’
테스의 병사들은 이들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았다.
“그럼 그대들은 남아도 좋소.”
“예?”
“그대들의 선택을 존중한단 의미요. 그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기를.”
억지로 데려갈 생각조차 없었다.
‘이런 자들을 억지로 영지로 데려가 봐야 분란만 일으킬 뿐이지.’
그들을 스스로 따르는 이재민들만 해도 수만이다. 원하지 않는 자들을 데려가 봐야 쓸데없는 일이 벌어질 터이니, 내리는 조치.
되레 당황하는 쪽은 남고자 했던 쪽이었다. 거절을 바로 받아들이니 당황할 지경이었다.
“그, 그럼 우리는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이미 말했다시피, 존중하오. 본래 있던 터전을 일구고 살면 되는 것 아니겠소?”
몇몇 인물들은 테스의 수하들이 그들을 도우니, 거점을 세우는 것도 도울 거라 여겼으나.
“이, 이 상태로 어떻게…….”
“거기까지는 그대들이 할 일이지.”
“헛!”
이들을 돕고자 온 테스의 수하들이 소위 말하는 호구는 아니었다.
“도와주십쇼!”
“미안하지만, 우리가 허락된 건 여기까지요. 그럼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기를.”
매달려 오는 자들을 두고 묵묵히 떠나갔다.
되레 몇몇 병사들은 경멸하는 눈빛을 하기까지 했다.
상황을 이용해 호의를 권리로 요구하는 자들을 혐오하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챙길 자는 챙기고, 보낼 자는 보내주며 이재민 구호가 이뤄져 갔고.
“영지로 오는 이재민 수가 벌써 십만을 돌파했습니다.”
“벌써?”
“멀리서 도착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더 금방 불어날 겁니다.”
“허…… 이 왕국에 이리도 사람이 많았던 건가. 하기야, 제대로 주민 신고가 되지 않은 자들도 넘칠 테니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그 속도는 행정관들이 예상한 속도 이상이었다.
‘최악을 대비하도록 했다만, 그 최악이 금방 다가오는군.’
놀라기는 했어도 준비가 부족하진 않았다.
“도시 하나당 계획하길 10만 정도까지 살도록 했던가?”
“예. 우선은 작은 도시부터 시작하는 게 맞으니까요. 다섯을 준비해 놓았으니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만은…… 그조차도 곧 채워질지 모릅니다.”
“곧 채워진다라……. 으음.”
이미 몇 차례 유민들을 받았던 경험이 있기에, 그에 맞는 준비를 해 두었으니까.
다만, 추가적인 작업까지는 불가피했다.
“도시급을 금방 만들어내는 건 무리니, 장원급으로 우선 만들어내야겠군. 이는 영주님께 보고하도록 하고. 바로 어제 텍트의 부족원들이 어제 왔다지? 만남을 주선해 보게나.”
“바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 작업. 텍트를 위시하여 새로 찾아온 드워프들이 도와주면 어떻게든 이뤄질 듯 보였다.
문제는 이 이후였다.
“이제 슬슬 영지의 여력도 달리고 있는데 말이야. 과연 어디까지 찾아올는지…….”
“더 일이나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거의 한계니까요.”
“기도를 해 볼 수밖에…….”
대범람을 막아내고, 이재민을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그러나 그 이후 새로운 일들이 터져 나오면 제아무리 테스의 영지라도 한계가 올 수 있었다.
* * *
영지의 한계.
그것을 테스라 해서 모를 리 없었다. 기감으로 영지 자체를 직접 느끼며, 조율해 나가는 게 바로 그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도 무작정 대진법을 구축하고만 있진 않았다.
-또 남쪽인가? 북쪽은 두고?
“거긴 제국의 영역이잖아. 우리보다는 여유가 있겠지.”
우선, 구할 수 있을 영역을 정확히 내다봤다.
북쪽의 제국보다는 그가 속한 왕국을 구하기 위해 남쪽 방향으로 대진법을 구축해 갔다.
왕국에 대한 충성심 따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힘을 지닌 제국에 비해서 카르소니아 왕국민은 더 힘겨울 테니까…….’
왕국이 아닌 그에 속한 사람들을 생각해서였다.
본래 재앙이란 거 자체가, 가장 약한 자들에게 더 혹독한 법이었으니까.
지금만 해도 보라.
“저 아래 도시는 또 살아남았군.”
-보아하니 마법을 이용했구나. 네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군. 재밌는 방식이다.
하늘을 떠다니는 그 발아래 있는 도시는 마법진을 써서 버티고 있었다. 대범람 가운데서 살아남고자 결계를 펼쳐 놨다.
‘제법이야…….’
그가 거쳐온 대다수 영지가 저런 식이었다.
거대 자유 도시나, 대규모 영지는 마법을 이용해 대범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핵심을 지키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문제는 핵심이 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작은 장원, 화전민이 주축이 된 개척 마을, 열악한 소규모 영지…….
이들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있었다.
마법을 구축할 방법도, 대범람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대피소 따위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테스가 구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런 자들이었다.
“그만 이동하지. 여기는 된 거 같으니까.”
-그러자.
보호받지도,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자들.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는 다시 몸을 날려 도시를 지나쳐 갔다.
남쪽. 더 남쪽으로.
지킬 수 있을 자들을 지키고, 구할 자들을 구해 가며 얼마나 내려갔을까.
-네가 속한 왕국의 반은 넘은 거 같구나.
“반이라. 벌써 그 정도 됐단 말이지.”
적어도 이 왕국 정도는 점차 수습을 해 나가고 있다고 자부를 할 무렵이었다.
날이 지나가는 만큼, 대범람의 강도도 점차 약해져 가고 있고. 대진법의 구축도 매끄럽게 이뤄지고 있으니 상황은 점차 좋아진다 여기고 있었는데.
“……이런, 망할.”
저 멀리. 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건들이 터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