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챕터 19.
창대한 망치 부족의 텍트.
일전의 두 도시가 건설될 때 들어왔던 드워프 중 하나. 그가 부족원 일부를 이끌어 온 덕에 도시 에나원은 상당한 발전을 해냈다.
덕분에 테스로서는 한 번 만나 봤던 차였다. 그때의 만남은 꽤 놀라웠다. 서로 구면이었으니까.
“용병 노릇을 하던 녀석이, 이렇게 성장하는 걸 보는 거도 오랜만이란 말이지.”
“그런 늙은이 같은 말투 좀 버리지 그래?”
“헹. 테스, 네가 네 나이에 맞지 않는 말투를 지녔다고 생각하지 않냐?”
“……쯧. 그거야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지.”
그와 테스의 만남은 도시에서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용병으로 하류 인생을 구르던 시절.
텍트와 그의 만남이 있었다. 그때 텍트는 의뢰주 중에 하나였고, 테스는 고용된 용병이었다.
‘그때는 감히 드워프 얼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지.’
의뢰 내용은 호위였다.
수많은 용병들이 둘러싼 가운데 드워프제 물건을 들어 나르는 의뢰. 간간히 있는 의뢰였고, 그 수익이 쏠쏠하기에 많은 용병이 몰리곤 했다.
그리고 그날.
‘일이 벌어졌지.’
값비싼 드워프제 물건을 노린 자들과 전투가 있었다.
수많은 자가 죽었고, 그보다 많은 자가 다쳤다.
‘그리고 사이가 꼬였고…….’
전에 시어린이 있던 용병 파티와 사이가 꼬인 거도 그때쯤이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보니 동료를 신경 쓰기 힘들었던 상황. 그런 가운데 서로 목숨을 위협받았고, 오해를 낳았다.
그때의 테스는 그런 오해를 풀 생각도 없었으니, 파티는 자연스레 해체였다.
테스로선 별달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 중 하나였으나, 텍트는 그날의 일을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호탕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기억력 하나는 기가 막히는 텍트였다.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는 헛소리는 덤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다.
도시 건설이 끝나고, 연단로를 보여 준 이후. 별다른 인연이 이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연이기도 했다.
그래도 완전히 연을 끊자고 생각은 않은 테스다.
“헹. 사정은 무슨.”
“됐고. 그나저나 이리 급하게 찾은 이유는 뭐냐? 전에 줬던 영약이 쓸모가 있든?”
그 연을 잇고자 그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영약 몇 개를 주기까지 했었다. 드워프에 걸맞게 불과 땅의 기운이 잔뜩 채워진 영약들이었다.
‘드워프랑은 거래로 인연을 맺는 게 맞는 방식이지.’
서로 인연이 있더라도, 쉽게 정을 주지 않는 게 드워프가 가진 삶의 방식. 그러기에 그들과 거래 방식으로 연을 잇는 게 가장 쓸모가 있었다.
“흐흐. 쓸모라. 아주 흘러넘쳤지. 다들 더 구해 달라고 성화더라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다행히 영약을 이용한 테스의 방식이 먹힌 듯싶었다.
이참에 영약 거래를 핑계로 도시 확장과 공사에 드워프를 써먹을까 싶은 테스. 그는 은근슬쩍 이야기를 던졌다.
“그에 관한 거래라도 하자고 찾아온 거냐?”
“뭐, 평시라면 당장 내놓으라고 하겠다만. 지금은 아니다.”
“그럼 영약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찾아 온 건가.”
아쉽게도 드워프 텍트는 그를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다. 되레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왔다.
“나는 이번에 거래가 아닌 의뢰를 하러 왔다, 테스.”
“뭔데?”
“……우리 영역을 구해 주길 바란다.”
구원 요청을 하면서도, 꼿꼿이 허리를 펴고 있는 그. 드워프다우면서도, 눈은 흔들리고 있는 텍트를 보며 테스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긴 또 무슨 문제가 발생한 거야?’
* * *
테스는 설명을 하게 했고, 바로 들었다.
그리고 내려진 결론.
‘이거도 대범람과 관련이 있는 거였군.’
대범람의 징조가 인간 영역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사실이었다.
불만큼이나 물을 다루는 게 드워프. 열을 가하면 식혀야 하는 게 당연하기에 그들은 그만한 수로 시설과 정령을 다룰 줄 알았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그들은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고. 거기서 문제가 튀어나왔다.
“그날도 깊이 파고 들어갔더랬지. 슬슬 새 광물들도 필요하고, 수로도 확장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너답지 않게 서론이 긴 게 세한데.”
“한데, 들어가고 보니 생각지 못한 게 튀어나오더라고. 일종의 봉인지였다.”
봉인지라. 테스는 여기서 무언가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뭐가 봉인된 곳이었는데?”
“타락한 물의 정령! 봉인지를 여는 순간 손 쓸 세도 없이 가장 강한 게 튀어나가더군. 그건 잡을 수도 없었다.”
“……설마 우리 영지에 튀어나왔던 게 너희들이 연, 봉인지 때문이었냐?”
“커흠!”
갑작스레 타락한 물의 정령이 튀어나온 게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바로 눈앞에 원인이 있었다.
‘세상 혼자 사는 게 아니니, 인과가 이어진 게 당연하긴 하다만.’
그렇다고 테스로선 마냥 탓만 할 수 없었다.
“들어 봐. 본래라면 그리 쉽게 봉인이 터지지 않았을 거다. 물의 기운이 넘쳐서 봉인이 한계치에 다다르긴 했겠다만, 단지 열었다고 봉인이 터지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럼? 뭐 다른 이유라도 있었다는 거야?”
“전에 있던 대규모 기운 폭발! 그게 방아쇠가 된 거지! 우리 영역 쪽에도 그게 터진 거고. 봉인지의 봉인을 약하게 한 거다.”
“……크흠.”
이번에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쪽은 테스였다.
‘이게 또 이렇게 이어지나.’
대규모 기운 폭발.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도 알기 때문이었다.
진법석!
축포 터트리듯 한번 거하게 터트린 거 치곤, 그와 관련된 온갖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진법석 중 하나가 봉인지를 파고들고.
약화된 봉인지에서 타락한 정령이 튀어나가, 그가 설치한 진법 중 하나에 갇히다니.
확률로만 봐도 빈약하다 못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일들이 실제 계속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이 지점에 무언가 있는 건데.’
마치 누군가 일부러 테스의 곤란을 만들어 내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테스의 생각이 깊어질 찰나. 텍트의 말이 이어졌다.
“대체 어느 망할 녀석이 그런 일을 벌인 건지. 쯧. 벌이더라도, 방비를 좀 하고 벌였어야지. 이 세상에 온갖 이상(異象) 현상들이 넘쳐나는데 거기에 대놓고 일을 벌여놨으니.”
“……뭐, 다 사정이 있는 거 아니겠어?”
“사정은 무슨! 하기사, 벌써 너희가 말하는 제국이 성립된 지가 오백 년이 다 돼가니, 일이 벌어질 때가 되기는 했나.”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있어. 그런 게.”
슬쩍, 중요한 이야기가 스쳐지나간 듯했다.
하지만 텍트는 더 길게 말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어쨌건, 들어 줄 건가? 그곳에 있는 남은 타락한 물의 정령의 처리. 완벽한 봉인까지 할 수 있는 게 너라고 우리 쪽 정령들이 말해 주던데?”
“정령들이? 허, 그쪽이랑 계약한 정령들도 꽤 친절하군.”
“수백 년을 함께 노니는데 당연한 이야기지. 우린 그 피 주머니 정원사 새끼들인 엘프 자식들이랑은 다르거든! 어쨌거나, 대답을 해 주라고. 어쩔 건가? 내 대가는 후하게 줄 걸세.”
드워프가 후하게 대가를 준다면 믿을 수 있다. 그들의 대가는 후하다 말하지 않아도 언제나 후한 편이었으니까.
“봉인지 자체를 파괴시켜 줄 수도 있는데?”
“파괴는 안 돼! 조사해 보니, 그걸 날려 버리면 우리 영역도 다 날아가 버리거든.”
“파괴가 가장 쉬운 편인데, 그건 아쉽군. 뭐, 좋아. 당장 준비해서 가자고.”
“흐흐. 바로 받아주는 건가. 역시 테스 너는 시원시원해서 좋군. 자, 가지고, 백 년만의 방문자여!”
성격 급한 텍트는 몸을 일으켰고.
테스는 그를 따라 드워프 영역을 향할 채비를 했다.
대범람 직전. 외부를 향한 지원이 드워프를 돕는 게 될 줄은 몰랐다 생각하며, 그는 채비를 금세 마무리했고.
몇 개의 이동 마법을 펼쳐 금방 드워프 영역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광경은.
“이야…… 이게 네 녀석들의 영역이라고?”
“그래. 창대한 망치 영역에 온 걸 환영한다. 그러니, 일단 저거부터 어떻게 해 봐!”
-그르륵!
치이이익- 치익-
테스로선 전에도 생각지 못한 생경한 모습들이었다.
* * *
대지는 철로 변화하고. 철은 그들의 도구가 되어 다시 대지를 파헤친다. 인위로 만들어진 거친 순환 속에 만들어진 세계.
그게 드워프의 세계였다.
‘압도적이다.’
단지 땅에 파여진 개미굴 따위의 수준이 아니었다.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의 거대한 공동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땅 아래를 파먹고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땅을 파내고 안전함을 찾아낸 것도, 계속해 이 파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이들이 가진 권능과 같은 기술 덕분일 터.
그 가운데 가장 빛이 나는 건, 바로 그들 손에 쥐어진 기이한 병기들이었다.
“쳐라!”
“헬카터들은 뭐해? 어서 움직여!”
치이이익- 치익-
기이한 증기를 내며 움직이는 골렘. 천둥 신이 내려앉은 듯한 망치. 땅위를 날게 하는 망토. 깨어지지 않을 듯한 절대적 마력을 지닌 갑옷…….
이 세계에서 뛰어나다고 알려진 명품들과 왕이 되는 자들이 가진 보물들도 이곳에 있는 거에 비하면 비루한 것이었다.
“진짜는 모두 여기 있었구나.”
“킥.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나.”
드워프. 그들이 가진 힘. 그건 바로 이곳에 있었다.
어찌 이러한 영역을 한 부족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여긴 거대한 왕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들은 마법과 같은 무구들을 손에 들거나 탑승한 채 마주 오는 적들을 향해 대응하고 있었다.
콰아앙-! 쾅!
격렬한 충격음. 그와 함께 터지는 충격파. 3-4 클래스의 마법이 터져나가고 남을 수준의 마력 파편들이 튀어나왔다.
그뿐이랴.
물리력이 극한에 이른 이들은 마력과 또 다른 힘을 사용할 줄 알았다.
스스스스-!
“……신성력인가?”
“정확히 보구의 힘이지. 우리의 신들은 네놈들과 달리 보구로서 말씀을 해 주시니까!”
드워프의 보구. 신이 그들에게 내려주는 그들만의 신성력!
타아앙-!
그 거대한 신성력이 물리적 간섭력을 넘어, 거대한 힘으로 화했다.
-그륵
-그르륵!
망치질 한 번에 타락한 물의 정령이 몸체를 잃고. 거대한 철 덩어리에 빙의했던, 정령이 쓰러진다.
그로도 힘이 남았는지, 한참 주변을 전격의 스파크로 물들였다.
그에 내포된 힘의 정도는 테스로서도 놀랄 만한 터.
“……보구라니, 대체.”
“보구는 처음 보나? 하기는,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왕이나 귀족쯤이 아니면 보구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긴 하지.”
“정보 비대칭성이 강하니까.”
“흘흘. 그래서 너희들이 안 되는 거다. 하기야, 너희들이 서로 힘을 합해 강해졌다면 우리가 살아남기 힘들었을 수도. 인간이란 언제나 탐욕스러우니.”
보아하니 드워프끼리는 서로 간에 정보를 공유하는 어떤 방식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드워프에 속한 텍트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인간이 드워프를 삼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걸지도.’
보아하니, 인간은 드워프의 꺾이지 않는 성격 때문에 그들을 노예로 삼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들의 보구와 무구가 지닌 힘이 두려워 건드리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저 드워프들이 세상 밖에 풀리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겠는데?’
인간을 부숴 버리고 세계 정복이라도 가능한 힘이지 않을까. 저들이 땅을 파헤치는 데 혈안이 돼 있는 게 다행이라 느낄 지경이다.
동시에 테스는 본질적인 궁금증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저런 힘이 있는데도, 타락한 정령 따위를 처리하는 게 문제라고?”
“힘의 방식 차이다. 우리는 파헤치고 부수고 만드는 건 돼도 저런 걸 다시 틀어막는 건 하지 못 해. 그건 우리 신이 허락하지 않은 거거든.”
“하, 참. 어이가 없네.”
저러한 힘을 갖고도, 봉인지를 막아내지 못한 이유가 능력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니.
어이없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도 봐라. 저 망할 것들이 또 몸을 일으키고 있잖냐! 흘흘.”
“정령을 완벽히 죽이는 건 무리란 건가. 그게 타락한 거여도?”
“보다시피 그게 우리 약점이지!”
“약점을 말하는 데도 당당하지 말라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지만, 또 어떠랴.
본래 이 세계 자체가 테스 홀로 이해하기에 복잡한 세계였다. 그걸 다 이해하는 순간이 테스가 승천자가 되는 날이지 않을까.
‘아니, 승천을 해도 다 알지 모르겠구만.’
테스는 그리 생각하며, 몸을 더 앞으로 내세웠다.
“뭐 하나?”
“왔으니 밥값을 해야지. 좋은 구경 시켜 줬는데, 이쪽도 하나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놀람도 좋고 새로운 힘을 보며 개안하는 거도 좋다. 그러나 봉인을 하자고 찾아 와 줬는데, 제대로 힘을 보여주는 것은 더 좋은 일이지 않겠는가.
몸을 내세운 테스는 품에서, 새로운 ‘그것’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텍트는 한껏 놀라 눈을 부릅떴고.
“저, 저 미친! 그 흉악한 건 무엇이야!?”
테스가 품으로부터 꺼낸 흉악한 그것에 관해 물었으나, 답은 들을 수 없었다.
고오오오-
드워프들의 힘에 자극 받은 테스. 그는 이미 몰아의 상태에 들어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