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챕터 15.
황혼과 같은 붉은빛이 내려앉은 공간. 그 아래 맺혀 있는 핏덩이들과 전사의 시체들. 그 위로 자리를 잡은 자가 하나.
‘뭐지?’
자신이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접하고 있던 힘은 사라졌고, 그 대신 존재하는 게 눈앞 풍경이다. 기이한 풍경 가운데서 테스는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저자. 느껴지는 힘이 그 신성력과 같아. 그럼 결과는 하나.’
저자는 신이다.
야만족의 신. 어쩌면 전사의 신이었을지도 모를 자. 제국 황제에게 패배하여 영락해 버린 존재다.
온몸에 가득한 생채기가 그 영락의 증거일지도.
-네가 이번 대의 후보자인가.
“후보자라. 승천자 후보를 말하는 건가.”
-그래.
예상보다 대답은 쉽게 나왔다. 테스에게 무언가 숨기거나 꺼려하는 기색도 없다. 되레.
‘내게 호감이 있는 눈치인데.’
허락만 된다면 하나라도 알려 줄 듯한 느낌.
“대체 그 후보라는 게 뭐지? 사실, 강자라면 누구든 승천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드래곤은 모두 신이 됐을 거다. 하기는, 가장 많은 후보자를 갖은 종족이 드래곤이긴 했지.
“……뭔가 있단 거군. 그게 뭐지?”
-아직은. 아직은 알 수 있을 때가 아냐. 허락이 되지 않았거든.
“허락?”
-…….
그는 대답 대신에 저 위를 가리켰다. 하늘이다.
신이 하늘을 가리킨다라. 대체 무슨 의미에서일지 테스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후보에 대해서 알 수 없다면 다른 거라도 물을 수밖에.
테스는 그가 지지하고 서 있는 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검의 주인이 당신이었나?”
-그래.
그가 손에 지니고 있는 검.
그 검은 테스가 성국의 눈을 피해 공간 주머니에 숨겨 놓은 검과 흡사했다. 그가 아르펠 공작으로부터 얻은 검 말이다.
중원식 검이다.
두터운 대검을 사용하는 야만인 검에 비해서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검신. 테스는 그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네가 어떻게 그걸 갖고 있는 거지?”
-뻔히 예상되지 않는가. 그 정도 머리는 있을 거 같은데.
“……내 예상이 맞단 거군.”
어쩌면 저자는 자신과 같이 차원을 넘어온 자거나 각성을 한 자다. 혹은 중원의 무공을 어떤 식이든 익혔거나.
‘그럼으로써 승천자가 됐겠지. 설마, 승천자의 조건이 무공을 익혀야만 하는 건 분명 아닌 거 같은데.’
그럼으로 그는 신좌가 됐고. 황제에게 패배했다.
그렇다면 어찌 패배했는지라도 알게 되면, 테스 자신이 승천하는 데 도움이 될 터. 테스는 곧바로 물었다.
“네가 그런 처지가 된 거도 내 예상과…… 아, 이런!”
-……허락된 시간이 짧군.
아니 물으려 했다.
드드드드득-
테스가 미처 모든 걸 알아내기도 전. 그와 테스가 존재하는 공간 자체가 스러지고 있었다.
파편화되어 사라져가는 공간. 테스는 마지막까지도 물어보려 했으나,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의 뇌리를 꿰뚫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알고 싶다면, 힘을 익혀.
콰아아앙-!
그 말을 끝으로, 공간이 완벽히 폭발했다.
* * *
테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본래의 공간에 돌아와 있었다.
“크윽…….”
“괜찮으십니까!”
테스의 신음에 놀란 데브론이 가까이 다가왔다. 걱정스런 표정이 가득한 그.
그에게 테스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고작 일 분 정도였습니다. 빛이 번쩍이더니, 순간 거대한 힘이 테스 님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러곤 흡수됐죠.”
“……흡수? 아!”
스스스스-
가슴어림. 테스의 품에 전에 없던 새로운 이종의 힘이 존재했다. 방금 전 접촉했던 중의 묘리가 섞인 기운이었다.
힘은 그에게 완전히 섞인 게 아니었다.
단지 존재할 뿐이었고. 그의 힘에 영향을 미치는 바도 심상을 흔드는 것도 없었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다른 자가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테스는 이 힘을 어떻게 다룰지를 알았다.
우우웅-!
“오…… 어떻게, 다시?!”
“그냥 되는군.”
그가 의념을 불어 넣자 힘은 다시 뻗어 나왔다.
빛이 산란하는 힘의 덩어리. 전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달라진 거라면 하나였다. 그가 신을 보기 이전에 비해 한없이 작아졌다.
“수 미터는 되던 게 고작 해야 30센티도 안 되는군요. 힘을 흡수하신 겁니까?”
“아니. 전혀.”
흡수는커녕, 이해도 완벽히 해내지 못했다.
덩어리에 맺힌 힘 대다수가 사라진 이유는 하나다. 신계인지 어딘지 모를 공간에 잠시 그를 부르는 데 소모된 거겠지.
힘의 덩어리가 가진 힘은 단순 일, 이 갑자로 칭할 힘이 아니었다.
내력으로 치면 수십 갑자. 마력으로 치면 8클래스 마도사가 부리는 힘 이상이다.
‘그런 힘의 이해라…… 하, 참. 쉽지 않는데.’
그 거대한 힘이 승천자가 가진 힘의 전부도 아니다. 단지, 그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된 일부였다.
이런 거대한 힘을 다루는 데 필요한 경지란 대체 어느 정도일까. 그에 대한 이해는 또 얼마나 깊어야 할 것인가.
아득하다.
아니 아득하다 못해 지저와 같이 깊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해석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를 이해해야 할, 테스의 정신은 절망하기는커녕 흥분해 있었다.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생각했더니, 그보다 더 높은 길이 있었기에 하는 흥분이었다. 그에게 더 높은 경지는 벽이 아니라 끝없는 향상심을 채워 주는 장난감이었을 따름이니까.
그리고 또한.
그 길을 향해 가는 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신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실마리 정도는 잡은 건가.”
“예?”
“재밌는 길을 찾았단 소리야. 나중에라도 자네도 익히면 재밌어지긴 하겠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문주님이 가신다면 그 길은 저도 따라가야겠지요. 꽤 힘들 걸로 보이긴 합니다.”
그리고.
초대 황제가 그러했듯,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자들을 강자로 이끄는 것도 새로운 재미가 될 터였다.
그가 성좌를 차지하고 자기 가신들을 또 다른 성좌와 하위신의 자리를 마련해 줬듯이.
자신도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이끈다면 그도 재밌는 일이 되겠지.
“후후. 죽어라 고생해도 닿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 재미는 있을 거야.”
“재미라. 그거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거지.”
상상만 해도 흥미 있는 일이다.
우우웅-!
그러자면, 눈앞에 떠오른 힘의 해석이 필요했다.
“가자고. 이곳에서 볼 일은 다 한 거 같으니까.”
“예.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영지로 돌아가 얻은 걸 해석할 시간이었다.
* * *
영지로 돌아온 테스.
그는 곧바로 문주실로 돌아와, 새로 얻은 야만신의 힘을 중앙에 띄웠다.
우우웅- 우웅-
부유하고 있는 힘.
테스는 그 힘을 가만 바라봤다. 신성력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그 힘은 테스의 시선을 느끼듯 몸체를 떨었다.
의지가 있는 것일까. 어쩌면 야만신의 시선이 여기로 이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하기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하나다.
“꼭 야만신의 뜻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겠다만…… 힘을 해석하다 보면 얻는 게 있겠지.”
눈앞의 힘으로부터 테스가 얻을 게 있다는 거.
야만인 비욘에 대한 호기심으로 행한 유적 탐사가 꽤 재밌는 일이 돼 버렸다.
‘유적지 하나를 통째로 먹어버린 셈이니, 그에 걸 맞는 보상을 해줘야겠지.’
테스는 뒷일을 생각하며 힘에 접촉했다.
스스스스-
힘으로부터 느껴지는 깊이는 전보다 깊었다.
‘과연…….’
단순 중(重)결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체득을 필요로 했다.
작아져 버린 힘.
이 힘을 줄이고 키우는 게 가능해진다면, 그만큼 테스가 지닌 힘의 이해가 깊어진다는 의미일 터.
힘이 깊어지는 건 곧 성공적인 승천에 대한 기반이 될 터였다.
“그러자면 완벽히 이해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게 단순 무인으로서 능력만으로는 안 될 거 같단 말이지.”
쉬운 건 아녔다.
힘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저희를 부르신 거군요?”
“그래. 데브론 자네의 도움도 필요하고. 레이즈의 연금술적 지식도 도움이 될 거 같거든.”
“저로선 영광이죠!”
그 도구로 테스는 무공이 아닌 마법을 선택했다. 힘의 해석에 있어서만큼은 마법이 무공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
“자, 한번 시작해 보자고.”
* * *
영지의 마법적 자원을 모두 모은 테스.
그는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가며 새로 얻은 힘의 해석에 몰두해 갔다.
그 처음. 여러 성과가 나왔다.
“오. 저 힘을 조금 응용해 봤는데, 어떻습니까?”
“미친 증폭률이군.”
고오오오-
마법을 사용함에 그 힘이 배는 더 증폭됐다.
“문주님이 말하는 중의 묘리. 그 중심에 증폭이란 힘이 있단 것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걸 룬어 해석에 대입해 보았고요.”
“재밌는 시각인데. 어디 한번, 해 볼까.”
힘의 형상을 따라했을 뿐인데, 위력이 증폭될 줄이야.
예상치 못한 성과였고.
테스를 포함한 모두가 연구에 한창 재미를 올릴 수 있게 됐다.
마법의 증폭. 힘의 부여. 버프 마법의 강화…….
단순 힘을 연구하는 거만으로도, 얻어지는 성과는 많았다. 귀족가마다 전해지는 혈통의 비의를 알아내는 거보다도 얻는 게 더 많았다.
* * *
몇 달이나 흘렀을까.
새로 만들어내는 도시의 기반이 마련되어 가고. 야만인 부족 구출과 유적지 정화가 끝나가는 그 와중이었다.
발전해 가는 영지, 올라가는 의선문의 명성, 여러 성과들.
많은 것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딱 단 하나가 멈춰 버렸다.
“흐음…… 이거 쉽지가 않은데.”
“한창 재미가 있었는데. 딱 멈춰 버린 느낌이로군요.”
바로 테스가 진행하는 힘의 연구였다.
연구를 위해 테스가 들인 공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단순 시간만 할애하지 않았다.
왕궁으로부터 얻어낸 5클래스 마법서들을 익혀 나갔고. 관련하여 얻은 4가지 비전 마법에도 공을 들였다.
그레놀 상단을 통해 온갖 마법 재료를 쏟아 붓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다른 유적지 탐사가 도움이 될까 싶어 몇 개의 유적지를 더 탐사했다.
‘대다수 쓸모가 없었다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했단 의미.
“어쩐다. 달리 출구가 보이질 않는데.”
“여기서 다른 마법사를 데려 온다 해서 될 거 같지도 않군요.”
“으음…….”
진행이 턱 막혀 버렸다.
‘얻은 게 전혀 없는 건 아닌데…….’
그 몇 달 사이, 중의 묘리에 대한 이해가 강화됐다. 전에 사도르로부터 얻은 패도의 묘리를 무공에 녹였듯, 이번도 마찬가지로 녹였다.
패도와 중이 비슷하게 취급되니 만치 시너지 효과는 상당했다.
같은 무공, 마법이라 할지라도 위력이 증폭됐다.
이는 영약 제조에도 사용되어 약효를 강화시켰다. 덕분에 영지의 수익도 상당히 오른 상황.
얻는 게 많았으나 테스는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진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힘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하였기 때문.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전에 이야기한 요청을 한번 해 봐야겠어.”
“6클래스 마법서 요청 말입니까?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시도는 한번 해 봐야지.”
“……연락은 해 보겠습니다.”
그 돌파구로 새로운 마법적 지식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 테스는 오랜만에 마탑에 연락을 취했고. 그 결과.
‘이야, 이건 선 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