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챕터 12.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몰아의 상태서 깨어난 테스. 그는 자신의 기운을 담은 단전들이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지닌 내력과 선천진기가 대폭 줄어 있었다.
내력은 일 갑자, 선천진기는 40년 정도.
전에 비해 한없이 줄어든 양. 그득 차 있던 단전의 빈자리가 커져 있었다. 그럼에도 테스는 나쁘지 않다 여겼다.
-완전히 달라졌구나?
“그래. 정순함 자체가 달라졌지.”
-거의 정령과 같은 정순함이긴 하구나.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테스.
그가 보기에 내력의 양이 전부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질이었다.
기운의 순수성이 높을수록, 같은 기운이라도 다른 위력을 내게 돼 있었다. 지금의 빈자리는 뒤에 있을 채움을 위한 비움이었다.
‘어차피 양이야 언제든 늘릴 수 있어. 중요한 건 결국 균형을 맞췄다는 거지.’
흔히 말하는 심기체.
심은 정신이요. 체는 육체이요. 기는 기운을 말함이었다.
심인 그의 정신은 전생 각성으로 인해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의지력으로 타락한 정령을 부서낼 수 있는 게 그 증거다.
육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개정대법에 이어 완벽한 환골탈태로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낸 지 오래다.
‘문제는 기였다. 이도 신경을 써야 했는데, 전혀 쓰지 못했어.’
기운의 정순함을 신경 쓰지 못했다.
선천진기와 내력. 둘이 내는 상승효과에 취해 기운 그 자체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럼으로 심기체의 균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바였다.
‘이걸로 정말 전생보다 한 발자국 나가게 된 거지. 제대로 된 시작점에 선 거고.’
어쩌면 전생의 우화등선 실패 원인 중 하나는, 이러한 불균형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 불균형을 완전히 잡았다.
좋은 현상이었다.
그로 인해 얻은 건 많았다.
같은 기운이라도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게 된 건 부차적인 일일 뿐이었다.
-정말로 오랜 세월을 살 수 있게 돼 버렸어.
“그런 의미에서 지긋지긋하게 보겠지. 기억하고 있지? 종신 계약을 하겠다고 한 거.”
-물론이야.
굳이 등급을 나누자면 최상급에 가까워진 물의 정령을 완전히 얻었다.
성장을 위해서,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게 정령. 그런 그녀의 약속이니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테스로선 완벽한 아군 하나를 얻은 셈이다.
정령은 종신 계약만으로 멈추지 않았다.
-설사 수백 년을 네가 살더라도 지킬 것이다. 그 외의 것도 준비를 해야겠지.
“아아. 새 조건 말이지. 하긴, 아직 듣지 못하긴 했네.”
-잔뜩 기대해라. 준비하는 데 시간은 한참 걸리겠지만.
테스가 장난스레 말했던, 또 다른 조건.
‘반쯤 농담이었는데. 지킨다면 나야 좋지.’
알아서 생각하라고 말했던, 조건을 물의 정령은 지킬 생각인 듯했다.
과연 무얼 가져다줄지는 모르겠으나, 꽤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최상급이 된 그녀가 아무거나 가져다주진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그도 그녀도 성장에 성공했다.
“그나저나 일이 참 재밌게 돼 버렸어.”
-지금의 결과 말인가?
“그래. 나조차도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건 아니거든.”
이조차 그가 예상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물의 정화를 얻고 퍼뜩 떠오른 영약에 대한 생각 확장. 다른 자에게 줘 버리느니 계약된 정령에게 주겠다는 심술.
거기서부터 깨달음을 얻어서 이런 성장을 해 버릴 줄이야.
‘예상 못 한 대로 돌아가니까 세상이 재밌는 법이긴 하다만.’
몬스터 토벌 이후 꽤 많은 계획을 짜놓았던 테스. 그로서는 기쁘면서도, 상황이 공교롭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시간을 보낸 거지?”
-영약을 만들기 시작하고 삼 주. 깨달음을 갈무리한 데 일주일이다. 총 한 달이지.
“햐, 이거 나가면 잔소리 좀 듣겠는데.”
그가 없는 사이, 밀려 버린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 * *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어.’
테스는 초인처럼 변한 자신의 몸을 한껏 활용해야 했다. 전투가 아닌 업무에 활용한다는 게 문제.
잠을 자지 않아도 지치지도 않는 몸. 금세 회복되는 정신력을 이용해 그는 필사적으로 영지 일들을 처리했다.
“영주님, 결재해 주셔야 할 게 한가득인데 또 어딜 가십니까?!”
“알스가 요청한 건설 건을 하러 가야 해.”
“으득. 그놈이 또 슬쩍 영주님께 부탁을 했습니까? 어서 다녀오십쇼.”
“……가지 말라고는 안 하네. 그럼 다녀오지.”
밀려버린 결재를 처리하는 건 차라리 쉬웠다. 그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차라리 전투를 하는 게 편하지. 이거 원.’
영지 내에서 오롯 그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했다.
건설에서부터 특산품 생산에, 진법 설치까지.
여러모로 많은 일들을 바깥에서부터 몸소 움직여 처리해야 했다.
바깥으로 나가자, 그를 반기는 건 수없이 많은 영지민들.
영주인 그를 쉽게 대하기 힘들기에, 가까이 다가오는 자는 없다. 그러나 눈에는 여러 감정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영주님이시다.
-오늘도 일을 나오신 건가.
몸소 나서 일을 해결해 주는 영주에 대한 호감. 신뢰.
-호오. 소문의 영주님이 저분이라는 거지?
-과연……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한데.
-포스가 장난 아니잖아?
끓어 오른 명성을 확인하고자 찾아온 자들의 호기심.
-타락한 정령을 처리했다던데.
-그게 말이 되나?
-벌써 한 달 전 일이잖아. 아니라고 하기엔 목격자도 많아.
-허허이…… 영지 하나는 찜쪄먹는 게 타락 정령인데. 거, 진짜 대단한데.
부러움, 질투, 시기, 설렘…….
한 사람에게 주어지기엔 너무도 많은 감정의 격류가 테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이번 경지 상승으로 인해 기감이 한껏 강화된 테스로선 그 격류가 어지러울 지경.
‘다 들린다고, 이 녀석들아. 그나저나, 영지 토벌전 소문이 꽤 나긴 한 거네.’
그라고 해서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달도 더 전.
영지에서 벌어진 대규모 토벌전에 염탐꾼을 보낸 자들은 수없이 많았다.
한 달이란 시간은 그런 염탐꾼들이 일에 관해 소문을 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공교롭게 테스로선 명성이 재차 올라가게 된 상황!
던전에 이어 타락 정령까지 처리하는 기염을 토한 덕에, 영지에 대한 호감도는 많은 곳에서 상승했다. 여러 곳을 떠도는 유민들에겐 안전하단 소문도 차차 퍼져나갔고.
그 결과로.
-여긴가.
-드디어 찾아왔다!
유민들의 발걸음이 영지를 향했다. 제리코가 예상한 속도보다 더 빠른 유입 속도였다.
덕분에 테스가 바빠진 거였다.
유민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건설 속도를 끌어 올려야 했고. 당장 그 속도를 끌어 올릴 수 있는 건 테스뿐이었으니까.
“영주님! 여깁니다, 여기!”
“가고 있네.”
“후후. 어서오시죠. 오늘도 건설해 주셔야 하는 게 많습니다.”
“거, 제대로 써먹는구만.”
“그게 제 일이니까요! 자, 어서요!”
테스의 이런 고행(?)에 신이 난 건 도시 건설 담당 알스였다.
그는 합리적 이유를 들어 테스를 잔뜩 부려먹고 있었다. 겉으로만 봐선 누가 영주이고, 누가 행정가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
“당장 시작해 주시죠.”
“알겠네.”
마력을 부려 일을 해야 하는 테스로서는 이를 아득바득 갈고야 있다만. 당장 대체할 자가 없었다.
‘씁. 어서 영지에 마법사 전력도 늘려야겠어. 그래야 써먹지.’
앞으로 지어질 아카데미와 의선문에서 키워질 마법사를 기다릴 수밖에.
특히 의선문에서 공간 감각과 조합 마법에 재능이 있는 제자 셀리움을 기대하고 있는 테스였다.
* * *
그렇게 여러 방면의 일을 처리하고. 시일이 지나고, 한숨을 돌릴 때쯤이었다.
테스는 문뜩 자신이 한 가지 일을 잊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청을 받아준다고 했었지.”
“네? 제가 무슨 청을 했다는 겁니까?”
“뭔 소리야, 제리코. 행정가 일은 다 들어줬잖아. 거 기억 안 나나. 영지 토벌전 때 몇 용병들의 청이 있었잖아.”
옛 인연들 중 몇이 그에게 부탁을 해 왔었다. 테스는 토벌전이 끝나면 들어주기로 약속을 했고, 그게 딱 두 달 전의 일이다.
꼭 들어줄 생각은 없었으나, 그들이 뭘 부탁하는지 정도는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아. 기억났습니다. 영주님을 찾아오길래 우선 대기시켰습죠.”
“본의 아니게 시간을 끌어 버렸네. 한 번 부르도록 해 봐. 기다린 것도 있으니 어지간한 건 들어줄 생각이니까.”
“바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테스는 곧바로 요청해 왔던 자들을 찾았다.
* * *
가장 먼저 그의 요청에 응한 건 울란이었다. 그는 테스가 예상한 요청을 해 왔다.
“보시다시피 다들 제 몫을 하는 놈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정착하면 영지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작게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도움을 주시지요. 일부는 떠날 거고, 일부는 남을 겁니다.”
그가 요청하는 건 용병 길드의 설립.
어센션 영지에 제대로 된 용병 길드가 아직 없는 상황. 때를 잘 맞추고 온 울란이었다.
“용병 길드를 세우겠다는 거치고 거창하군.”
“이곳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려고요. 덕분에 그간 모은 걸 싸그리 다 소모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결국 영주님이 허락을 해 주셔야겠죠. 옛정을 좀 봐주십쇼.”
“푸핫. 옛정은 무슨.”
파워 홀스를 처음 팔던 날. 방해를 했던 게 울란이다.
그렇다 해도 그 뒤는 나쁘지 않았다. 도둑 길드 건도 입을 무겁게 해서 지켜줬고, 간간이 편의도 봐줬었다.
‘수완도 좋은 편이지.’
영지의 전력은 상당히 여유로운 상황. 그렇다 해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마나 이상 현상과 침식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좋아. 그럼 한번 해보게. 단, 내 영지에서 소란을 피우는 녀석이 있어선 안 될 것이야.”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조용히 운영하겠습니다.”
“우선, 믿어 보지.”
“흐흐. 감사합니다.”
테스는 용병 길드가 조용히 유지될 거란 걸 믿지 않았다. 말을 하는 울란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나사 빠진 용병들이 조용할 리가.’
그렇다 해도 그들이 가져다주는 전력은 진짜이니. 잘만 하면 후에 나쁘지 않게 써먹을 터였다.
다른 요청을 해 온 건 시어린이 속한 위언의 용병단이었다.
그들은 생각지 못한 요청을 해왔다.
“장원을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예. 유민들이 넘쳐나는 이곳이라면, 가능성이 충분하다 봤습니다.”
“맞는 말이긴 하군.”
영지 개척을 꼭 영주인 테스 스스로 할 필요는 없었다.
대다수의 영주들은 용병단이나 하위 귀족을 이용해 개척을 하는 게 기본이었다. 자신의 손을 들이지 않고 영지를 늘릴 수 있는 기회니까.
덤으로 들어오는 세금도 상당하니, 이는 보통의 영주라면 찬성할 일.
그러나 테스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시어린…… 그 녀석, 재능이 별로 없는 주제에 몽크가 돼서 왔단 말이지. 후음…….’
그의 옛 동료, 시어린. 그녀가 문제였다.
그녀의 품성을 따지는 건 아니었다. 말투야 경박해도 그녀가 가진 신실함에 대해선 테스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신실하다는 거다.
성국의 눈을 피하고 있는 지금이다. 이상 마나 현상과 침식으로 인해 눈이 돌아가 있는 성국.
그런 성국이라도 몰래 시어린에게 명이라도 내렸을지 모를 일이지 않은가.
“흐으음…….”
그 부분이 못내 걸리는 테스였다. 그러나.
‘친구는 가까이에, 적은 더 가까이에 두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테스는 마음을 다잡고, 결정을 내렸다.
“몇 가지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허락해 주지. 그대들에게 나쁜 조건은 아닐 것이야.”
“오오! 감사합니다!”
그건 허락이었다.
‘무슨 짓을 벌이든 옆에 두고 살펴주마.’
테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병단의 대장 위언은 만족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 뒤, 며칠이 가지 않아 위언 용병단은 사람을 데리고 개척을 위해 떠났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옛 동료 중 하나 비욘.
방랑 기사 자격으로 온 그녀는 테스로선 전혀 예상도 못 한 요청을 해 왔다.
“비욘, 너는 무슨 부탁을 하자는 건데? 대련이라도 요청할 거면, 당장 때려치우도록 하고.”
“……도와주십쇼. 제 부락이 위험합니다.”
자존심 강한 그녀가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던진 요청은 구함이었다.
“뭐? 자세히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