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챕터 11.
원형의 푸른색.
‘수기가 엄청난데.’
떠오른 그것을 향해 테스는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 위로 푸른색 빛이 불쑥 떠올랐다.
“이게 뭐지?”
-물의 정화다. 핵 안에 담겨 있는 거지. 정령이라면 누구든 갖고 있는 것이다. 현세에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지만.
“정화라…….”
물의 정화라니. 테스로서도 처음 알게 된 물건이었다.
그러나 낯설진 않았다. 그와 비슷한 물건을 여러 번 봤으니까.
‘내단이랑 비슷한데?’
내단. 혹은 영단.
영물이라 불리는 존재가 죽으면 이러한 정화가 나오곤 했다.
소싯적 영약 제작을 위해 영물 사냥도 몇 번 경험했던 바. 이런 내단은 여러 번 만졌었다.
손에 떠올라 있는 물의 정화는 그보다 순수하기야 하다만, 딱 그 정도다.
-때로 드래곤 하트와도 비견되는 물건이다.
“내가 보기엔 영 반쪽짜리인데.”
그가 보기엔 진짜 내단보다 못했다.
기운의 균형도 없으며 오롯 수기만이 존재했다.
‘이러면 쓰기가 어려워지지.’
인간은 균형이 없는 기운을 흡수해선 살아남기 힘들었다.
절맥만 해도 음양의 기운이 맞지 않아 온 혈맥이 뒤틀리는 것이지 않은가. 음양을 떠나 오행 중 수기만 이리 있어서야 써먹기 힘들었다.
‘이 수준이면, 북해빙궁 궁주라도 어려울 거 같은데.’
결국 기운의 균형을 맞춰 줘야 제대로 쓸 만한 물건이 된다.
균형을 맞추려면, 이에 걸맞은 재료들을 구해야 할 터. 어디선가 불의 정화라도 하나 구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를 생각하면.
‘이건 계륵이구만.’
당장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렇다 해도 가치가 없는 건 분명 아니었다.
당장만 해도, 이 정화를 요청하는 존재가 있었다.
-가능하면 내게 주었으면 좋겠구나.
“전투 중에 도움이라도 됐다면 모르겠다만, 딱히 줄 이유가 없는데?”
-종신 계약이라도 해 주겠다. 내가 이 정화를 흡수하고 나면, 네게 더 쓸모가 있어질 거다.
“후음…….”
추측하기로 그와 계약한 정령을 등급으로 굳이 나누자면 상급에 가까웠다. 그조차도 테스와 계약을 통해 선천진기를 부여받은 덕분이다.
그런 물의 정령이 정화를 하나 흡수한다면, 최상급 정령이 될 터.
‘알려지기로 물의 정령 중 최상급 수준의 정령이 숫자가 다섯이었던가…….’
왕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개체가 된단 의미다. 여기에 테스가 선천진기를 지속적으로 주입하여 주면 왕을 노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령이 어떻게 되어먹은 판으로 돌아가는지 몰라도, 분명 도움이 되긴 될 건데 말이지. 줘야 하나.’
물의 정령이 재촉해 온다.
-역시 안 되느냐.
그만큼 성장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하기는, 수천 년간 같은 상태에 머물기도 하는 게 정령. 그런 상황에 인간으로 치면 영약이 주어진 셈이다. 그거도 등급이 올라가는 영약이다.
‘……가만, 영약이라?’
정령이 욕심을 낼 만하다고 이해하던 테스. 그의 머리로 퍼뜩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재밌는 방식이 있었다.
‘될까?’
몇 번을 가늠해 봐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인간이 아닌 정령이기에 가능하다.
생각을 정리한 테스는 역으로 제안했다.
“내가 이 정화보다 더 강화된 걸 주면 어떻게 할래?”
-뭣? 그런 게 존재할 리가…….
“한번 잘 생각해 봐야 할 거야. 그때 가선 네가 아니어도 다른 정령도 눈독을 들일 거 같거든. 한번 지켜보라고.”
당황해하는 물의 정령. 테스는 그 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보다, 물의 정화를 품에 넣었다.
-아…….
정령의 얕은 아쉬움이 그의 귀로 들려왔다.
* * *
테스가 퍼뜩 해낸 생각.
그건 일종의 개념 확장이었다.
‘영약이 꼭 인간에게만 쓰일 필요가 있나. 후후.’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에게도 영약을 만들어 주는 거. 정확히 생명이라 하기엔 기괴한 정령에게 영약을 주는 건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재밌단 말이지.’
그러기에 그는 오랜만에 흥이 올라 도전을 시도했다.
전장 수습은 테론에게 맡기고, 그는 바로 연단로에 왔다. 잘 달궈진 연단로 앞에서 그는 물의 정화를 꺼내들었다.
스스스-
존재감만으로 주변 수기를 움직이는 물의 정화.
영지에 존재함으로 수기를 잔뜩 끌어 올 터이고. 그의 말대로 다른 정령을 유인할 수 있을 귀한 보물.
그 보물을 그는 망설임 없이 쪼개었다. 쪼개자마자 흘러나오는 물의 기운들.
‘새로 담을 그릇을 줘야지. 그래야만 더 강화할 수 있을 테니.’
거대한 기운에 테스는 놀라지 않고, 제 기운을 일으켰다.
마력, 선천진기, 내력. 이 셋을 조화시켜 흘러나온 기운을 담도록 만들었다. 이를 위해서 강기를 일으켰음은 당연했다.
쏟아지는 기운을 담아내고, 그에 걸맞은 재료들을 준비했다.
고작 약초 따위로 될 문제가 아니었다.
‘데몬 핵을 다루던 기억이 없었더라면, 못 할 일이지.’
이 세계에만 있는 기이한 몬스터 사체들, 마석, 핵…….
온갖 물품이 필요했고.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당연히 있어야 했다. 여기에 더해 이를 섞기 위해 강기공을 사용해야 했다.
그야말로 테스이기에 할 수 있는 기예!
‘해보자.’
그러한 기예를 그는 잔뜩 풀어내며, 거대한 수기를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연구에 매진하는 그가 때로, 침식을 잊고 틀어박히는 일은 자주 있는 바. 이를 방해하는 자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방해자가 있다면 하나.
-…….
걱정스런 눈으로 테스를 바라보는 물의 정령뿐이었다.
테스는 정령의 시선을 무시하고, 작업에 몰두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스스스스-
“……미친. 족히 배는 더 올라갔잖아?”
전에 얻었던 물의 정화보다도 더 많은 수기를 머금은 영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니, 이걸 영약이라 할 수 있으려나.’
수기의 영약이라 할 수 있는 이것.
눈앞의 것은 둥그런 알약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대신 기운 그 자체가 형태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자유분방한 물의 성질을 대변하듯, 기운은 계속해 형태를 바꾸어갔다.
형태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상관없었다.
계속해 존재하고, 거대한 수기를 갖고 있다는 거만으로 완성이니까.
“후음. 이름을 뭐로 정한다. 수기의 영약이라 할까?”
-……이름을 짓는 건 정말 못하는구나. 그렇다 해도 이걸 정말로 해낼 줄이야.
“시끄럿. 그나저나 어때? 이 새로운 수기의 영약을 제일 먼저 본 소감은?”
-경이로울 정도다. 한 인간이 이걸 해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따름이고.
물의 정령의 눈은 순수한 감탄으로 얼룩져 있었다.
순간, 탐욕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이 수기의 영약을 삼킨다면 정령의 등급은 한없이 상승할 터. 물의 왕좌를 노릴 수도 있음이다.
제 아무리 수천 년을 살아 온 정령이라도 탐욕이 일 수밖에.
탐하는 존재는 오롯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고오오오-
그의 영지 곳곳에서 거대한 수기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물의 정령들이 이세계에 현현(顯現)하기 위해서 수기를 끌어오는 거다.
소환 마법진이 없음에도, 제 스스로 대가를 내고 찾아오려는 의미는 명백하다.
-……결국 오는구나.
“다른 정령들을 말하는 거지?”
-그래. 물의 정화 그 이상의 것이 뭔지 궁금한 것이겠지.
“갖고 싶기도 한 것일 거고.”
-아니라곤 못하겠군.
수기의 영약을 노리는 거다.
정체는 안 봐도 훤하다. 물의 정령들이겠지. 희귀하다는 얼음의 정령도 포함돼 있을지도 몰랐다.
탐욕스레 찾아오는 이들이다.
이들과 계약을 한다면, 테스가 철저히 갑의 위치에 설 수 있을 게 분명할 터.
하지만, 테스는 빙긋 웃음 짓고는.
“초대받지도 않은 주제에 탐하기는.”
-무슨 짓이냐?
파스스슥-
생각지 못한 일을 벌였다.
그와 동조된 영지의 진법과 그를 동조. 영지에 있는 거대한 기운들을 부려, 스스로 움직이는 수기들을 잠재웠다.
“후우웁…….”
경지에 이른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
거대한 반발력이 지금에도 느껴지지만, 그는 의지를 일으켜 그 기운들을 계속해 줄여갔다.
그리곤 말했다.
“이건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는 거잖아? 게걸스레 달려드는 놈들보다는 네가 낫겠지.”
-그렇단 말은…….
“안 어울리게 감동은 그만하고, 어서 흡수나 해. 나라고 해도 오래는 못 막으니까.”
-……말을 조금 예쁘게 하는 재주만 있었어도, 정령인 내게 사랑받았을 거다.
“퍽이나. 계약이나 지켜.”
-꼭 그럴 거다. 그럼 감사하게 받지. ……고마워.
처음 소환할 때의 적대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
테스를 향해 호감을 머금고 있는 물의 정령은 그의 손에 있는 영약을 향해 쏘아졌다. 수기의 영약과 물의 정령이 겹쳐지는 순간.
그그그긍-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부풀어 오르고. 이내 하나의 것으로 새로이 합일(合一)을 시작했다.
그 순간, 테스를 괴롭히고 나오려던 존재들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두 기운의 합일은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었다.
수기의 영약과 물의 정령.
둘이 겹쳐지고 하나의 완전한 기운이 되어갔고. 그 위로 자라난 꽃은 테스로서도 말로만 들었던 거였다.
“……삼화취정? 이게 이렇게 피어난다고?”
삼화취정. 순수한 기운 가운데에서만 태어난다는 기운의 꽃. 테스로선 단 한 번도 경험치 못했던 꽃봉오리.
닫혀있어야 할 꽃봉오리가 만개하며 피어오르는 그 순간을 테스는 홀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게 순수한 기운인가. 순수성이란 게 이런 거고? 결국 영약이나 정령도 기운이 섞인 거일 텐데. 결국 순수성이라고 하는 건…….’
테스는 전생에서도 부여잡지 못하였던, 깨달음의 일부를 재차 부여잡을 수 있었고.
‘아아, 이제 알겠다.’
그를 새로운 걸음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중단전과 하단전. 둘 사이에 있던 간극이 좁혀지고 있었다.
선천진기와 내력.
그의 몸에 함께 존재하면서도, 이종의 진기처럼 움직이던 두 개의 기운이 함께 호응을 시작했다.
‘결국 모든 기운이 내 통제 하에 있는 게 당연한 것을…….’
이미 완벽하다 여겼던 기운에 대한 통제력이 더 짙어져갔다.
개정대법을 통해 몸에 삿된 기운을 씻듯, 이번엔 몸 안의 기운 자체에 깃든 삿된 것들이 스스로 불타올랐다.
그의 내력으로 있던 기운의 일 할이 스스로 살라지고. 사라져갔다.
순수치 못한 기운의 총아였다.
순간, 그가 지닌 기운의 총량은 전보다 줄어들었으나.
-어찌 인간이…….
그 기운의 순수성은, 수기의 영약을 머금는 데 성공한 정령이 보기에도 놀랄 만큼 깨끗했다.
씻어냄은 순간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한 번, 두 번, 세 번…….
그의 몸 안에 기운들은 계속해 대주천을 반복해가며 삿된 기운들을 씻어나갔다.
몇날 며칠이고 걸릴 수 있을 정화.
그가 지닌 기운들이 흡사 정령의 기운처럼 순수해져 갔다.
다른 삿된 존재들이 노리고도 남을 만큼 깨끗한 기운이었다. 정령이 삼킨다면 등급이 오를 수도, 마족이 얻는다면 권능을 만들어 줄 기운이었다.
그 모든 기운을 막고자 이제 막 합일을 끝낸 정령은 그의 바로 옆에 섰다.
-이번은, 내가 보호해 줘야겠구나.
“…….”
저 멀리서 그를 노릴 모든 존재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무방비가 된 그. 그녀는 자신의 기운을 일으켜 주변을 차단하였다.
그 상태로 그가 모든 깨달음을 갈무리할 그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