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챕터 6.
초췌해진 왕. 그는 예를 받다가 말고 말을 던졌다.
“우직한 용병 출신인가 했는데, 그렇게 수를 쓸 줄은 몰랐네. 클…… 내가 어리석었지.”
“우직하다기보단 셈이 좋은 용병이죠. 수를 쓰는 건 기본인 거고. 모르는 쪽이 당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제가 그랬던 것처럼.”
“모르는 쪽이 당한다라. 그도 맞는 말이군.”
테스는 마력 침식 현상이 영혼 오염을 불러일으키는지 몰랐다.
그러기에 단 세 가지 조건만으로 계약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왕을 상대로 횡재를 했다 여겼었다.
‘전혀 아니었지.’
명백한 손해였다.
이미 오래전 상단전을 열어 영혼 오염 따위 당할 일은 없다지만, 그래도 손해였다. 모르고 당할 뻔하였으니까.
때문에 마탑은 그걸 이용해 그에게 숟가락을 얹으려고 한 거다. 테스는 되레 마탑을 이용해 왕에게 압박을 하였을 뿐이고.
‘이 또한 마탑이 내가 상단전을 연 걸 몰라서 손해를 봤지.’
결국 서로 모른 상태로, 먹고 먹히는 짓을 반복했다.
왕에게서 테스로. 테스에게서 마탑으로. 그리고 마지막. 마탑이 왕에게 한 방을 먹였다.
“그들을 그리 움직이게 할 줄은 몰랐어. 그들이 움직인 게 벌써 수십 년 만이니까.”
“그들이 제게 뭘 주라 하덥니까?”
그들. 마탑을 말함이다.
보는 자가 많아 정식으로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어쭙잖은 백작위만이 아니라 진짜 권리부터 주라더군. 기사단 셋을 창설할 권리를 주라더군. 더불어 자유 기사단도.”
“휘유. 그들이 잘도 해냈군요.”
“……클. 덕분에 나로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당장 대신들만 해도 왜 이리 퍼 주냐고 난리거든.”
백작위에 있는 귀족이 가질 수 있는 기사단의 수는 총 둘이다. 변경을 지키는 변경백들에게 영지 방위와 국경 방위를 위해서 주어진 권한.
여기에 셋을 더 더한다라. 가히 공작이나 가능한 권한이다.
기사단의 유지 비용은 논외로 치고. 이 권한만으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잔뜩 늘어나게 돼 있었다.
‘여기에 자유 기사단 추가라. 미쳤군.’
더한 건 자유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영지란 족쇄가 풀린 기사단이었다. 영지 방위가 아닌 그들이 모시는 군주 그 자체만 충성을 지키면 되었다.
명분을 이용해 움직이는 기사단과 달리 자유 기사단은 그조차 필요 없었다.
카르소니아 왕국에만 있는 기이한 전통 덕분이다. 초대 왕이 기사단 출신이었기에, 자유 기사단은 그런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이한 전통을 마탑은 잘도 찾아와 테스에게 안겨줬다.
“퍼 주다니요. 딱 적당한 거래를 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이쪽은 목숨을 걸고 데몬 던전을 파괴하였으니까요.”
“……정말 목숨을 걸기는 걸었나?”
“그렇다고 해 두죠.”
대답하는 테스의 무표정.
“끝까지 당한 건 나군. 젠장.”
그제야 왕은 자신이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걸 실감하는 듯, 욕지거리를 한번 내뱉을 뿐이었다.
그래도 왕은 왕인가. 그는 금방 자기 표정을 수습하곤, 테스를 바라 봤다.
“작위식까지만 받고 가게나. 나는 그대를 오래 왕도에 두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 외에 그들이 건네준 건 자네가 알아서 확인하도록 하고.”
“왕이 바라시는 대로. 기꺼이.”
“클…… 다른 걸 바랐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어서 가 보게.”
왕은 피곤한 듯 한 손으론 얼굴을 반쯤 가리곤, 다른 한 손은 휘저어 테스에게 돌아가란 신호를 보냈다.
짧은 사이. 수년은 더 늙어 보이는 왕이었다.
* * *
“여우 짓을 하다가 걸리면, 자기가 당할 줄도 알아야지. 후후.”
왕궁에 마련된 자리에 가 테스는 만족스레 걸터앉았다.
그의 머리론 왕이 곤란할 게 뻔히 그려졌다.
곧 있을 테스의 작위식.
그게 끝난 이후 왕은 몇 년간 정치적으로 고생해야 할 터다.
마탑의 압박을 받은 그가 테스에게 건네준 권한은 넘쳤고.
굶주린 다른 귀족들이 보기에 자신들도 얻고 싶은 권리들이니까. 테스가 받은 권리를 자신들에게도 부여해 달라 달려들겠지.
그들을 상대해야 할 왕은 온갖 고생을 해야 할 터.
‘내가 알 바냐.’
그런 혼란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테스였다.
그는 당장 있을 혼란보다도 그에게 주어진 눈앞의 보상들이 더없이 소중했다.
“보자, 이건 보석이고.”
네 개의 공간 주머니 안에 가득 담겨 있는 보석과 보물. 금화.
‘족히 8만 골드 가치는 있겠어. 보물은 사용하기에 따라 더할지도.’
재화가 넘치는 테스로서도, 만족스러울 정도의 양이었다.
여기에 작위식 전에 주어졌던 권리 증서가 그의 품에 있었다.
이전 데프 백작에게 받았던 남작위 작위서보다도 더 고풍스레 쓰여져 있는 작위서.
[테스 어센션]
그의 이름이 새겨진 백작위 작위서이며. 동시에 그가 기사단을 창설하여 부릴 수 있는 권리가 쓰여 있었다.
기사단을 떠나 자연스레 따라오는 권리도 막강했다.
총 일 만의 군세를 공식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계승 자작을 여섯, 계승 남작을 총 열을 임명할 수 있었다.
각각의 하위 귀족들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을 생각하면, 그가 부릴 수 있는 병사의 수는 수배로 늘어나 버린다.
그뿐이랴.
계승이 아닌 단승 귀족은 그보다 배는 더 임명할 수 있다.
이 권한들만 이용하더라도.
‘적어도 일개 영지의 진짜 왕 노릇을 할 수 있단 소리지.’
그 영역에서 그는 왕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만한 권리가 주어진 거다. 다른 귀족 가문이라면 대를 이어 겨우 얻어낼 수 있을 작위를 단번에 얻었다.
테스의 실력, 왕의 상황, 마탑의 압박.
이 셋이 잘 어우러지지 않았더라면 절대 얻지 못했을 힘이다.
테스는 이런 모든 것들보다도, 단 하나의 공간 주머니에 담긴 것들이 소중했다.
“5클래스 마법서. 어디, 비전들도 있나 볼까.”
5클래스 마법서. 왕궁에서 가진 비전의 수준이 얼마나 될까.
그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잔뜩 상기된다. 그는 곧바로 마법서들을 펼쳐 살피기 시작했다.
작위식이 이어지기 전날까지도 계속.
* * *
왕이 준비한 성대한 작위식에서, 주인공이 된 테스.
그는 며칠간 이어진 작위식을 통해 백작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작위식이 끝난 이후의 연회, 다수의 귀족들이 그를 찾아왔다. 몇 개의 계파로 나뉘어 있는 가문의 대표들이었다.
어느 계파든 간에 군침을 흘렸다. 테스 정도 되는 자가 계파에 들게 되면 균형의 추가 깨질 테니까.
‘정치 놀음을 할 거면 마탑에 비호를 요청하지도 않았지.’
그들에 관심 없는 테스로선 딱 잘라 제의를 거절했다.
“나는 내 수련이 중요할 뿐, 다른 쟁의들에는 관심도 없소. 혹여나, 다른 마음을 먹고 끌어들이려는 자가 있다면 그자를 확실히 처리할 거요.”
흡사, 정치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무장(武將)이 하는 듯한 단호한 말투.
다행히도 각 계파의 주인들은 테스의 뜻을 잘 이해했다. 더불어, 그를 상대로 수작질을 부렸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경고가 되기도 했고.
그나마 신선한 자들이 있다면 남부의 귀족들.
-테스 님 덕에 살았습니다!
-아직도 제자를 받고 계신지? 저희의 자제를 보낼까 하는데…….
-덕분에 힘을 얻었으니, 언제고 필요하면 말만 하시지요.
테스에게 호의로 가득 찬 그들은 몇 가지 선물을 해 줬다.
쓸 만한 금화가 있기도 했고, 고대 시절에 있다던 무술서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중 무술서는 테스의 구미를 꽤 당기게 할 만한 것들이었다.
‘무공서랑 비슷한데. 이 세계 방식은 또 다른 맛이 있겠지.’
질시와 호감. 당김과 밀침. 몇 가지 암투…….
그렇게 지나간 며칠간의 연회였다.
그 며칠만으로 테스는 정치 놀음에 완전히 질렸고. 왕의 바람대로 왕도를 바로 벗어났다.
파아앗-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여 돌아온 영지.
“영주님! 오셨군요!”
“스승님!”
몸이 이동되고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영지의 행정관들과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랜만의 만남이 반가운 듯했다. 에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고, 프로스는 그사이 더 성장해 있었다.
반가움을 표현하는 그들.
‘그래, 이 자리가 맞는 거지.’
그들을 본 테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 * *
영지로 돌아온 그는 자신과 영지의 진법부터 연동했다.
“과연…… 많은 변화가 있었군?”
“바로 느껴지십니까? 꽤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재물도 상당히 소모해야 했고요. 그래도 결과는 좋습니다.”
제리코의 말대로였다.
그가 느끼기로 영지는 상당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첫 장원이자, 지금은 어센션이라 따로 이름을 붙인 영지는 그 크기가 크게 불어나 있었다. 해자를 넘어 그 바깥에도 영지민들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바깥에는 영지군이 치안을 위해 돌고 있었다. 진법에 걸리고도 빠져나온 소수의 몬스터를 상대하고, 때로 유랑민들을 데려왔다.
그보다 바깥.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도시 둘.
에나원와 프로스트.
누가 봐도 제자들의 이름을 따와 만들었을 게 분명한 이름을 가진 새 도시들.
그곳은 초창기 어센션을 보는 듯했다. 곳곳에서 찾아온 유민들과 데려온 노예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도시를 세우고 있었다.
특이한 건, 그들 사이에 있는 몇 명의 이종족들이었다.
“드워프가 있군? 저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별로 없는 일인데.”
“대도시에나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곤 했습죠. 그조차도 소수였고요.”
천상 장인이라는 드워프. 엘프 못지않은 번성함을 자랑하는 그들은, 타고난 장인이며 전사이고. 소 같은 고집을 지닌 자들이었다.
굽히느니 부러져 버리고. 숙이느니, 죽음을 택한다.
그러기에 노예로 삼을 수도 없는 자들이며, 동시에 적으로 둬선 안 될 자들이다. 그들이 찾아왔다라. 테스로선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왜인지가 궁금하군.”
“거래를 하자고 찾아왔더군요. 특히, 연단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정령을 이리 쓰는 건 자신들도 처음 봤다던가요.”
“그래서?”
“관찰할 수 있게 해 줬습니다. 그 대가로, 도시 건설에 도움을 받기로 했고요.”
관찰을 하는 대신 드워프가 손을 보탠다라.
‘남는 장사군.’
새삼 제리코의 수완이 엿보였다.
“잘했네. 적절한 조치였고. 그 외에 다른 거래 제안은 없었고?”
“아직까지는 없는 듯합니다. 언제고, 바라는 게 있다면 그때는 적절히 거래하면 될 뿐이죠.”
“후음…… 그게 금방 생겨날지도 모르겠는데.”
“예?”
“아니야.”
어쩐지 테스의 감은 드워프가 찾아올 거라 말해 주고 있었다. 정확한 때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열려져 있는 영안으로 그리 느낄 뿐이다.
‘가까이 있는 울픈 산맥, 몬스터의 준동, 이상 침식 현상, 드워프. 몇 가지 섞어 보면 대충 짐작은 간단 말이지. 뭐, 상관없나.’
찾아와 부탁을 한다면 그때 들어줄 뿐이다. 먼저부터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는 테스였다.
거기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고작 이종족과 관련된 일들뿐만이 아니었다.
“어센션 영지에 있는 마법진과 새 도시들도 연동을 시켜야겠어. 거기다 물도 흐르게 하려면…… 후음. 나도 바빠지겠어.”
“영주님이 던전을 깨부순 덕에 그 소문을 듣고 찾아드는 자들도 있으니, 더 많이 신경 써 주셔야 할 겁니다.”
“햐. 이거 내 수련이 편해지려고 시작한 일이 갈수록 거창해지는 듯하단 말이지.”
“흐흐. 업보라 생각하십쇼.”
귀찮아 하는 테스. 그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제리코였다.
“거, 주군이 고생하는데 그리 기뻐하지 말라고. 그거 불충인 거 모르나?”
“제가 사는 낙이 그거뿐인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자르시지도 않을 거잖습니까. 아니, 이참에 잘라주시면 저야 좋습니다만은.”
“……내가 앓느니 죽지. 시끄럽고, 어서 일이나 할 생각 하라고.”
영지 일에 있어서 제리코는 단짝이나 다름없게 된 상황.
테스는 그의 아이 같은 투정을 들어주며, 제 할 일들을 하나둘씩 점검했다.
‘이것도 시간이 꽤 들겠어.’
온연히 자신의 영역화된 어센션. 그와 같은 조치를 다른 곳에도 취하려면 테스라도 꽤 품을 들여야 할 터였다.
어찌 해야 할까 계산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그런 그의 영지에 또다시 새로운 방문자들이 양쪽에서 찾아오게 되었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이곳이 그 테스 님의 영지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