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챕터 2.
느껴지는 마나의 잔향. 몸의 실루엣. 외모…….
많은 것들이 베빈과 비슷했다.
그러나 분위기만은 다르다. 테스가 봐왔던 베빈에게 느껴지던 생동감이 눈앞의 그녀에겐 적었다.
‘마치, 이건 반쯤은…….’
테스의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테스 자작님.”
“목소리조차 비슷한데. 대체 넌 뭐지?”
“베빈. 갇혀 버린 그녀가 만들어낸 편법의 일부죠. 또한 그녀의 일부기도 하고요.”
편법이자, 그녀의 일부라.
“하, 이런 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호문클루스라도 되는 거냐?”
“그와 비슷합니다. 정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베빈은 이리 전해 달라더군요. 알고 싶으면 빚을 더 지거나, 부탁을 들어달라고.”
“……젠장. 둘 다 마음에 안 드는 걸 알 텐데.”
“그러니 조건으로 내건 거겠죠.”
베빈의 말은 결국 테스를 제 마음대로 써먹겠단 이야기. 테스의 성격상 그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오랜만에 한방 먹었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눈앞의 존재 자체가 그만큼 흥미로웠으니까.
“직접 알아봐야 한다는 소리로군.”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요.”
그녀의 도발에 테스는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스스-
기감을 움직여 대놓고 그녀를 탐색할 뿐이다.
‘육체는 베빈 그 자체인데, 반쯤 죽어 있고. 후음…… 보통의 호문클루스도 이러진 않던데. 그 녀석, 대체 뭘 만든 거지?’
골렘은 아니다. 골렘은 생물체라기보단 무생물에 가까웠다.
인공 생명체라 불리는 호문클루스. 그도 아니었다.
그건 완벽에 가까운 생물이었다. 다만, 만들어내는 것도 힘들뿐더러. 그 생명력 자체가 짧은 게 문제다.
남은 건 하나.
‘복제체인가.’
베빈이 그녀 자신을 복제해 내는 거.
복제. 정통 마법사라 불리는 마탑이 아닌, 흑마법사들의 특기다. 흑마법사를 향한 박해를 피해 온갖 비술을 만들어낸 그들이니까.
육체 복제에부터 영혼 이식까지. 그들은 온갖 방법을 개발하고 직접 써먹고 있었다.
‘문제는 그 후유증이지.’
완벽하지는 않다.
영혼 이식은 영혼의 일부를 앗아간다.
육체 복제도 완벽하지 못하다. 일부 기능이 소실되거나 마나를 더 익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살아남고자 육체를 갈아탔다가 마법도 익히지 못하는 처지가 되다니. 그보다 더 추한 꼴이 있겠는가.
때문에 대다수의 흑마법사는 사용하지 않는 사장된 비술들이다.
다만, 중요한 건 하나다.
흑마법사도 할 수 있는 비술을 그 베빈이 못할 리가 있느냐는 거다.
‘분명 할 수 있겠지. 그녀가 가진 힘은 진짜니까.’
답은 가능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육체를 복사하고 그에 걸맞은 무언가를 부여한 게 분명했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바로 그 증거다.
‘재밌네.’
테스는 더 깊숙이 그녀를 알아보려 했다.
그녀의 구성, 흔들리는 생명력, 마력…….
무엇 하나 테스의 호기심을 끌지 않는 게 없었다.
더 깊숙하고 은밀히 기운을 들이밀려는 그 순간.
투욱.
연결됐던 마나가 차단됐다.
“여기까지. 이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끊은 거였다. 그녀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지난번에 지었던 빚은 끝난 것으로 해달라더군요.”
“지난번의 빚? 아아. 이해했다.”
지난번의 빚. 몇 년 전, 테스가 도시 지넬에서 지내던 시절.
베빈은 그에게 유혹 마법을 몰래 걸어 왔었다. 그걸 들킨 대가로 정보를 주긴 했다만. 그걸 대가로 하기엔 빈약했다.
‘그걸 아직 잊지 않고 있었던 건가. 하긴 그래야 마법사지.’
베빈은 그걸 잊지 않은 거다.
그 대가로 탐색을 허용해 준 거다.
일정치 이상은 아니라지만 상관없다. 그녀를 탐색하는 거만으로도 테스가 얻은 영감은 많았으니까.
“그래. 지난번의 빚은 여기까지로 해 두지.”
“잘됐네요.”
좋은 거래였다. 문제는 이 다음. 베빈이 빚이라는 이유만으로 눈앞에 그녀를 보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진짜 용건이 뭐지?”
“저희가 지난번의 빚을 갚았듯, 이번엔 테스 님이 저희에게 진 빚을 갚았으면 합니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다.
“빚이라. 성국의 시선을 끌어준 걸 말하는 거겠지.”
“예. 반쯤은 성공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죠.”
“좋아. 말해 봐.”
어지간한 건 들어줄 용의가 있는 그였다.
다만 이어지는 말에는 그도 인상을 잠시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 던전 탐험. 그에 대한 동행을 요구합니다.”
“……이런.”
독식하려던 던전을 독식치 못할 수 있었으니까.
국왕의 입장에서야 던전은 골칫거리다.
마법사인 테스 입장에선 던전은 희귀 재료의 보고였다. 마족의 일종인 데몬 던전. 그 안에서 거둬들일 부산물의 가치는 상당할게 뻔했다.
그걸 나누자는 이야기로 테스는 이해했다.
그는 금방 계산을 끝냈다.
‘이건 거부해야겠네.’
답은 거부.
테스는 제 의사를 그대로 표현했고.
“아쉽게도 그건 안 되겠는데.”
“이 던전 사태 자체가 테스 님의 잘못 때문인 데도요?”
“뭐?”
연이어 생각지 못한 말을 듣게 됐다.
‘던전 사태 자체가 내 잘못이라니? 이게 뭔 소리야?’
그녀의 설명은 간단하며 명확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마나 폭발. 테스 님이 벌이신 일이 맞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오리발을 내밀어 봤지만.
그녀는 품에 있던 걸 꺼냈다. 안에는 어떤 마법진의 흔적이 세밀히 그려진 그림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림 안 엔 테스가 전에 진법석을 날린 흔적이 있었다.
“발뺌하시지 마세요. 이미 다 알고 왔으니까.”
“이렇게까지 나온다면야. 인정하지. 그래서? 그게 이번 던전 사태와 무슨 연관이 있는데?”
“지독한 우연이긴 하죠. 연이은 다속성 마나 폭발. 그게 마계에까지 가서 마나 이상 현상을 일으킨 거니까요.”
진법석 중에 마계까지 간 게 있었던 건가. 그게 이상 현상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거고? 말도 안 되는 확률.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되도 않는 확률에 걸렸다 이거로구만.”
“네. 저희는 그걸 관측하자마자 온 곳곳에 이상 현상을 막아야 했죠. 마탑도 마나 이상 현상엔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성국의 눈을 잠시 피하려다 마탑에도 일이 벌어지게 했다는 건가.
‘빈대를 태우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운다더니…… 쯧. 내가 딱 그 꼴이네.’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확률이다. 하지만, 현실 자체가 본래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가능성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꽤 있었다.
‘애당초 내가 전생 각성한 거도 확률로 보면 불가능 그 자체지. 이번도…… 그런 건가. 뭔가, 개입돼 있을 거 같긴 한데. 당장은 모르겠단 말이지.’
그녀의 주장을 아니라 부정하기에, 눈앞에 그녀가 보내는 눈빛엔 진실이 담겨 있었다.
분명 사실이다.
“뭐, 좋아. 이 이상 현상들이 내 탓이라 우선 치자고. 그러니 던전을 내가 막으면 될 거 아닌가? 그거면 수습도 스스로 하는 게 되는 거고. 꼭 같이 가야만 하나?”
“저희도 이번 사태에 피해를 받았으니, 어느 정도는 이번 던전으로 벌충을 해야 하니까요.”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당당했다.
“무슨 맡겨놓은 돈 찾든 내놓으라는 식이군.”
“대신, 저희도 한 가지를 내놓으려고요.”
“그게 뭐지?”
“테스 님의 목숨이요.”
갑자기 목숨이라니.
멍해하는 테스를 두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대로 가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왕도 그걸 아니까 쉽게 다 내준 거예요.”
“……허, 자세히 한번 말해 봐.”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 * *
그녀로부터 테스는 이번 협상의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약아빠진 것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그 결론. 이번에 그와 협상을 했던 왕 자체가 생각지 못한 여우였다는 거다.
왕은 이번 사태에 테스를 제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데몬 던전 자체는 마나 침식이 일어난 곳.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마나 침식은 그 자체로 위험했다.
‘침식이 일어난 곳에 있으면 영혼이 오염돼 버리니까.’
오염의 대가는 참혹한 죽음.
뛰어난 마법사고 전사고 상관없이 영혼의 오염은 타락을 낳게 돼 있었다.
타락은 곧 죽음. 설사 잠시 살아남더라도 미치광이가 되거나 들끓는 마나를 못 이기기고 고통에 겨워하다 죽는다.
국왕은 이를 노렸다.
테스가 던전을 깨낸다 해도 영혼 오염은 남아 있을 터.
그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리면? 독립 영주이자 신생 귀족인 그를 따르는 후계도 없는 상황이다.
남은 테스의 영지에 대한 권리는 자연스레 왕에게 귀속된다.
왕은 이걸 이용하려 한 거다.
‘그러니 우선 퍼준 거였어. 어쩐지 쉽게 내준다 했다.’
무슨 협상을 하고. 뭘 주든 테스는 죽을 테니까. 비전 마법서이니, 백작위이니 하면서 온갖 걸 쉽게 준 거다.
그 후에 테스가 죽으면?
권리를 모두 가진 왕은 테스의 영지에 남은 모든 걸 골수까지 파먹을 거다. 개척된 영지와 도시는 주변 귀족에게 팔아넘길 거고. 재산들은 제가 다 챙겨가겠지.
‘하, 이거 재밌는데.’
결국 왕으로서는 테스 하나를 죽임으로써 던전도 얻고 영지도 얻어 내는 그림을 그린 거다.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테스로선 어이가 없을 지경.
하지만, 그의 죽음을 경고한 마탑도 왕도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 나는 오염될 리가 없거든.”
“영혼 오염은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희 마탑도 이를 씻어내기 위한 비전을 마련하는 덴 수백 년이 걸렸다고요.”
“과연 그럴까?”
테스로서는 믿는 바가 있었다.
백독불침이나 환골탈태. 그 따위 걸로 영혼 오염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진 않는다. 대신, 다른 믿는 바가 있었다.
‘환골탈태 때 상단전 일부가 열린 지 오래거든.’
영을 담는다 하는 상단전.
그 일부가 오래전부터 열렸다.
주술사들은 영기를 담고 신선들은 도술을 부리는 도력을 담는다는 상단전. 그곳이 열림으로써 테스가 얻은 힘은 적었다.
아직, 중단전이나 하단전처럼 기운을 채워 넣지는 못하였으니까.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영혼 오염 따위. 절대로 불가능하지.’
열려 있단 그 자체로 그가 지닌 저항력은 상당하다. 마나 침식에 따른 오염 따위 쉽게 버틸 수 있다는 소리다.
설사 침범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미 그걸 고칠 방안은 꽤 되거든.’
그가 괜히 온갖 주술과 부적을 아는 게 아니다. 중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을 몇 번이고 겪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마나 침식이 있다면, 중원엔 마기 침식이 있었다.
마교가 사용하는 마기. 그 오염된 기운이 가져다주는 침식을 테스는 몇 번이고 치료해 냈었다.
‘완전한 의술이라기보단 주술을 섞긴 해야 했다만…….’
그러니 테스로선 자신만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감을 그녀도 읽어냈다.
“……진실이시군요. 설사 진실이 아니더라도, 이걸로 타협하실 생각은 없는 거고요.”
“맞아.”
그녀가 가진 모든 수를 던졌음에, 테스를 더 흔들진 못했다.
그러기에 테스는 빙긋 웃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사람 좋게 웃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 왕국의 왕이 이리 수작질을 부리고. 주변에서 자신을 흔들려 한다면 좋은 방패막 하나 정도는 얻어내야 했으니까.
마침 딱 좋은 수단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이제 내가 흔들 차례인가?’
자신의 보호. 그를 위해서 테스는 역제안을 했다.
“하나만 들어 준다면, 이번 던전행에 끼어 주지.”
“그게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