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챕터 22.
‘나는 지금 가진 깨달음을 흡수하는 걸로도 시간이 필요해.’
테스 개인의 강함. 그 자신이 강자의 축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가진 깨달음을 체화(體化)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예상되는 지금.
테스는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또 일을 벌리시겠다고요?”
“아니. 이번엔 수습을 해 봐야지. 영지도 탄탄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그가 눈을 둔 곳, 바로 영지다.
때문에 그는 행정관을 찾았고. 머리를 푹 박고 일하고 있던 제리코를 기어이 집무실에서 꺼내었다.
테스가 부를 때마다 어김없이 일이 생기는 터.
그는 별 말을 안 했음에도 제리코는 벌써부터 긴장을 하고 있었다. 자기 보호를 하려는 듯 한숨부터 푹 내쉬며 그가 말했다.
“지금 영지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계시고 저를 부르신 겁니까.”
“지금부터 자네가 말해 주지 않을까? 아냐?”
“……크흡. 물어보는 주제에 대놓고 당당하지 좀 마십쇼!”
“에이, 그래서 말을 안 해 줄라고?”
“해야죠. 암요. 안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흐흐. 그런데 말입니다.”
“음?”
“저만 죽을 순 없으니, 아예 다 부르도록 하죠.”
제리코가 히죽 웃고 있었다.
‘악마 같은…….’
아귀처럼, 제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 * *
게를 독에 가두면 서로가 잡아 당겨 단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다던가.
영지에서 오랜만에 벌어지는 회의가 딱 그 모양이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테스. 오른편에 제리코가 자리 잡음과 동시에 각 영역의 행정관장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다들 죽을상이네.’
일에 치였는지 하나같이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기에.
“재생력 강화. 힘 부여. 체력 강화.”
“오오…….”
“사, 살 것 같다…….”
스스-
테스는 그들에게 가장 먼저 버프 마법부터 다발로 걸어 주었다.
그때가 돼서야 행정가들이 정신을 차렸다.
그중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건, 건축관을 맡은 알스였다.
“흐으으…….”
당장 숨이 넘어갈 거 같았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만큼 그가 피로가 쌓여있다는 의미.
‘행정가를 계속 구해다 줘도 일이 많은가 본데…….’
어지간해선 흔들림 없는 테스로서도 걱정이 될 정도였다.
‘보약이라도 한 첩씩 해 줘야겠어. 저들이 쓰러지면 내가 일을 해야 하잖아?’
물론, 저들이 들으면 당장 파업을 해도 이상치 않은 걱정이었다.
어쨌거나 여기 있는 자 중 테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의 걱정에 상관없이 제리코가 운을 띄웠다.
“자자. 다들 모였으니, 영지 현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게나.”
“제리코. 으득…… 고작 그런 걸 말하자고 부른 거냐?”
“그거뿐이겠어? 문제가 난 것도, 다 말씀드리고 이참에 한 번에 해결 봐야지.”
“해결이라…… 뭐, 그렇다면 이게 맞긴 하겠어.”
처음 반발하던 그들은 저들끼리 순식간에 합의를 봤다.
‘평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보이네.’
테스가 일을 벌리면. 제리코가 계획을 짜고, 세부 사항은 각기 다른 계열을 맡는 자들이 돌리는 거겠지.
회의가 돌아가는 거만으로도 그 상황이 훤히 보였다.
테스가 일 처리 방식을 파악하는 사이, 건축관장 알스부터 영지 보고를 시작했다.
“오! 그거도 그렇구만…… 그래 어디 나부터 이야기 드려야겠어. 큼큼…… 자아, 잘 들어주시죠. 영주님.”
* * *
‘이거, 내가 없어도 될 지도?’
행정가들은 곧 죽겠다고 난리지만, 영지는 생각보다 잘 돌아가고 있었다.
재무 상태만 봐도 최상이었다.
영지 수익의 다수를 차지하는 파워 홀스의 월 생산량이 4만 개 전후. 이와 함께 개발된 재생 연고도 1만 개 가량 팔리고 있었다.
그뿐이랴.
농업관장 바이트가 아이디어를 냈던 과실주는 또 다른 특산물이 됐다.
약수인 영지 물을 쓰다 보니 몸에 좋단 소문이 터진 덕. 귀족들 사이에선 파워 홀스와 과실주를 먹으면 상승 효과가 있다고 같이 찾을 정도였다.
‘궁합이 좋기는 하지.’
식량 수급도 원활했다.
지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생산량은 매년 늘어나고 있었다. 자급자족은 물론이고, 몇 년간 쓸 수 있을 비축물자도 쌓았다. 비상시를 대비한 조처였다.
그럼에도 근방 영지에 식량을 팔고도 남을 정도였다.
아득할 정도의 수익이 계속해 나고 있었다.
“……해서 영지 재정만 해도 앞으로 10년은 써도 남을 정돕니다. 현물도 있지만, 골드로 따져도 백만 단위가 넘게 쌓였으니까요.”
“미쳤군.”
골드로 백만 이상이라.
듣는 거만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수익이지 않은가.
‘이거…… 금력을 권력으로 휘둘러도 될 정도야.’
당장 천 골드에 횡재를 했다고 여겼던 몇 년 전과는 전혀 다른 단위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돈을 잘만 사용해도 곧 권력이 될 터였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테스 자체가 금력을 휘두르는 방식에 대해선 약하니까.
‘각자 전문 분야가 있는 법이지.’
테스가 아득함을 정리하는 사이. 영지 보고는 계속해 이어졌다.
“재정은 풍족하다 치고. 그렇다면, 영지민들의 상태는 어떤가?”
“……그것이.”
영지민의 상태.
시원스레 대답하던 행정관들의 말이 여기서 툭 멎었다.
저들의 기운을 읽고 테스는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았다.
“문제가 있는 거군? 내가 의선문을 만들던 당시, 문규를 말하면서 전달했던 거 같은데.”
“……아픈 이가 없도록 하라. 그 문규. 분명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픈 이가 없도록 하라. 그것이 의선문의 문규이자 정신. 그 말을 행정관들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저희의 능력이 부족한 게 문제입니다. 당장, 영지민들이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유민들이 오는 족족 받아들이도록 한 건 테스의 명령이었다. 현재까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듯했다.
“영지에 등록된 인구수가 정확히 23872명입니다. 한데 실제는 몇 명이 있는지 아십니까?”
“유동인구를 감안하면 3만쯤 되지 않나?”
“아뇨. 그보다 많습니다. 최소 5만은 됩니다. 문제는 이들이 시장을 방문하고자 오는 단순 유동 인구가 아니라, 비등록된 정착민이란 거죠.”
비등록 정착민이라니.
‘뭐지? 비등록이라니?’
행정관들을 돌리던 테스로선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유민이 오는 족족 영지민으로 등록하도록 했을 텐데?”
“영지의 처음 시작인 테스님 장원은 괜찮습니다. 문제는 그 주변이죠. 해자도 없는 그곳으로 유민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이런…… 영지가 넓어지니 구멍이 생긴 거군.”
“바로 그겁니다. 행정관들을 파견해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메꾸기 힘든 구멍이 있는 거죠. 문제는…….”
“비등록된 자들이 영지에서 제대로 자리를 못 잡겠지.”
“예. 도시 지넬에서나 벌어지던 일이 영지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
타 영지보다 발전된 도시들. 지넬과 같은 자유 도시에 가면 항상 존재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층민이다.
제가 살던 영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도시로 들어온 자들.
이유는 상관없다. 일확천금을 꿈꾸던, 망해서 떠밀려 들어왔던 간에 새로 도시로 들어 온 자들은 대다수 자리를 잡지 못한다.
‘애당초 먹고 살 능력이 있으면…… 제가 살던 곳을 떠날 필요도 없을 테니까.’
때문에 도시는 언제나 빈민층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툭하면 도시에 문제를 일으켰다.
치안을 망가트리기도 하고. 위생을 최악으로 치닫게 하곤 했다.
“살 곳을 찾아 오다 보니, 막을 수도 없었지요. 구멍을 메꿀 사이도 없이 쏟아지기도 했고요.”
“그들은 어떻게 먹고 살고?”
“다행히 영지 전체가 활황이지 않습니까. 일거리는 있다 보니, 최하층 노동자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뒤로구만.”
“예. 조금이라도 성장이 정체되면, 저들은 바로 문제가 될 겁니다. 그때 가선 범죄 조직이라도 만들지도 모를 일이죠.”
“후음…….”
분명 당장 문제는 없다.
영지의 재정은 탄탄하니 성장이 몇 년은 더 지속될 거다. 어쩌면 몇 십년간 지속될 수도 있었다. 무섭도록 성장하고 있는 테스의 영지니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일이 닥치고서야 움직이는 건 하수나 하는 일이지.’
병도 키우기 전에 치료하는 게 좋듯, 행정도 마찬가지였다. 뭐든, 가장 좋은 일처리는 일이 터지기 전에 예방하는 게 좋았다.
테스는 한참 고뇌했다. 그러다 결국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냈다.
“행정 인원 수급 범위를 제국까지 늘리도록 하지.”
“그리하시면 첩자들이…….”
“그 정도는 내가 어떻게든 때워 보도록 하지. 첩보관도 슬슬 자리를 잡는 거 같으니까. 그렇지 않나, 레므나?”
“예? 옙! 몇 달이면 내부는 돌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뭐 그러시다면야.”
당장 행정 인원을 늘리기 위한 방안들을 마련해 넣었다. 몸값도 더 올리도록 하였으니 제국은 물론이고, 가능한 한 많은 자들이 찾아오리라.
여기에 더해 새로운 방식도 더했다.
“이제부턴 등록만으로 끝내지 말고, 새로 영지민들에게 신분증을 만들어 지급하도록 해.”
“왕국의 걸 말고 따로 만들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까진 왕국의 것으로 때우거나, 장원민 등록으로 끝냈지만 이제 그럴 수준은 넘어섰으니까.”
“재정이 꽤 쓰이겠군요. 그렇다 해도…… 저희 영지 수준이면 충분히 충당 가능 합니다.”
“몇 만 골드가 쓰이더라도 그리하자고.”
“명대로 하겠습니다.”
새로운 신분증을 도입하기로 했다.
기존엔 영지민 대장에 기입하는 것으로 끝내거나. 왕국에서 쓰이는 기초적인 신분증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로 커버가 되지 않고 있는 상황.
‘우선은 다소 복잡해지겠지만…… 나중 가면 편해지겠지.’
일종의 이중 신분증을 발부하는 거지만, 나중 가면 행정상 편의가 더해질 거였다. 더불어 테스는 마지막 조치를 단행했다.
“마지막으로, 3만의 영지민들이 공짜로 생겨난 셈이니, 새로운 영지 확장은 어떤가?”
“장원 말입니까?”
장원이란 말에 가신들 몇의 눈이 반짝인다. 새로운 장원이 생겨나면 가장 먼저 불하받을 게 그들이니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테스는 그 이상을 원했다.
“고작 그 수준으로 되겠나. 현재의 어센션이라 불리는 영지, 그 이상의 걸 한번 만들어 보자고.”
“새 도시로군요!”
“그래. 잘만 해 주면 내 보상은 톡톡히 해두지. 특히, 알스. 자네에게 이건 기회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규모의 토목공사, 그에 걸맞은 식량 수급을 위한 농지 확보, 해자와 성벽 건설…….
새로운 도시 건설을 위한 몇 가지만 더해져도 빈민들 중 다수가 사라질 터였다. 자연스레 돈이 돌기 시작하니 영지의 발전은 더더욱 가속화되겠지.
그럼으로써 영지의 내실은 단단해진다.
성장한 영지의 과실을 영지군으로 돌리면 무력도 튼튼해질 터.
‘좋은 선순환이지. 내가 몇 개만 더 더해 줘도 이는 더 쉬워질 거고.’
테스는 그 일을 위하여 세부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이번 일은 나도 도와주겠네.”
“오! 영주님이 도와주신다면야, 속도가 배는 빨라질 겁니다.”
“당장 새로운 해자부터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자신도 시간을 내어 영지 발전을 꾀하려고 하였다.
* * *
단, 일주일 후.
테스의 명을 받아든 제리코가 세부 계획을 완벽히 짜왔다.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계획은 순식간에 실행이 돼 갔다.
한 달 뒤.
대규모의 공사가 단행되고. 동시에 공사장 인부로 등록된 하층민들의 영지민 등록도 함께 이어졌으니까.
바이트는 새 농지를 조성하도록 했고. 알스는 도시 계획을 짠다고 아카데미 동기들을 전부 데려왔다.
영지군은 신입을 받아들였으며.
이 와중에 테론은 새 경지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영지의 전반적인 부분이 순환한다고 여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창 영지 건설을 돕고 있던 테스.
그의 기감에 걸리지 말아야 할 것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