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챕터 13.
“……명성이랍니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상관없다. 그 위업의 방향성이 무엇이든 끝이 모를 명성. 그를 얻어내야만 승천자의 자격을 지닐 수 있다.
“베빈 그분께선 마탑에 머물러만 있었기에 얻지 못하였고. 수많은 실패자들이 자기 수련에만 고행을 쌓다가 얻지 못하였다고 하시더군요.”
“허…….”
테스로서는 낯설지 않은 개념이었다.
‘공덕이잖아?’
전생의 중원에서 말하는 공덕.
주변에 선행을 쌓아 만들어지는 게 공덕이었다. 그러한 공덕과 데브론이 말하는 명성이 다를 게 뭔가.
하기야, 말이 공덕이지 그때도 선행과 악행을 가리지 않았다.
선행을 쌓아 신선에 이른 자가 있는 가하면 마교에서 탈마하여 마선에 이르는 자도 있었으니까. 역대 천마만 하더라도 셋이 마선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어찌 신이 되었느냐 했더니 이런 비사가 있었을 줄이야.
이제야 전생에 그가 우화등선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밝혀졌다.
‘공적이 부족했어. 쯧.’
무림에서 알아주는 의선! 천하십대고수 반열에 오른 고수! 의선문의 문주!
그를 따르는 수 없는 이명들로도 부족했던 거다.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명성…… 그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많은 명성을 필요로 했다. 아니 명성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사람들의 뇌리에 테스란 이름 자체를 새길 수 있어야 했다.
‘아아…… 그래서 황제 정도나 돼야 승천에 성공하는 건가. 성국에서는 승천자 자체를 부정하면서 그 명성을 깎아내리는 거고!’
그제야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베빈은 ‘명성’이라는 두 글자의 키워드를 알려줬을 뿐이지만, 테스에게는 그보다 더 값진 지식은 어디도 없었다.
“베빈에게 빚을 진 셈이네.”
“저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데, 이해하셨군요.”
“대놓고 힌트를 던져줬는데, 못 알아들으면 그도 이상하지.”
이건 빚이다. 언제고 갚아야 할 빚.
베빈은 그녀만의 변수를 만들고자 테스에게 빚을 지우는 듯했다. 꽤 무게감이 느껴지기야 하지만,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그녀의 호의만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그렇군요. 베빈 님께선 원한다면 마탑의 퀘스트라도 만들어 도와줄 수 있다 하시더군요. 소개를 해 드릴까요?”
“아니. 내가 내 방식을 찾아야지.”
“흘흘……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 전달합지요.”
데브론의 웃음 속에서, 그녀의 제안은 부드러이 거절당했다.
* * *
테스의 거절에 베빈은 바로 답신을 해 왔다. 이번은 편지도 아닌 메시지 마법을 통해서 바로 보냈다.
[나쁜 녀석. 어서 강해져서 지부나 만들어. 망할 놈아.]
테스는 그녀의 메시지를 보고 웃음부터 났다.
“푸핫. 거 많이도 화났구만.”
능청스럽기만 한 그녀답지 않게 직설스런 어투. 평소답지 않게 그녀가 꽤 많이 화가 났다는 반증이다.
그래도 뒤이어 오는 메시지의 내용을 보면.
[그래도 기대는 할게. -베빈]
완전히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호의에 마탑과 거래에서 많은 덕을 보고 있는 테스로서는 다행인 일.
“뭘 기다리는지는 몰라도. 서로 좋은 협력자는 될 거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제가 보기엔 이미 협력자로 보입니다. 흘흘.”
“거 착각이야. 어쨌거나, 마법에 재능 있는 아이들의 교육을 부탁하지.”
“맡겨만 주십쇼.”
어쨌거나 베빈의 협력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테스는 자신에게 새롭게 투신한 데브론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맡겼다.
데브론이 진행하는 교육은 꽤 깊이가 있는지라, 이는 테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문파에 빠져 있던 톱니바퀴가 채워지고.
아이들의 수련과 수업 속에서 하루하루가 태엽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사이에도 테스는 저만의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명성. 끝을 모를 명성이라…….”
승천자가 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 그를 채우기 위한 방안에 대한 고민이었다.
‘우선 영지는 아닌 거 같고.’
영지 확장은 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한계까지 끌어 올린 빠른 속도였다. 여기서 더 성장 속도를 끌어들일 방안은 아직 없었다.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성에 차지가 않지. 그러자면 결국 다른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전쟁인가?’
전쟁.
잠재적인 적들은 많았다.
염탐꾼은 문파를 돌리는 사이에도 끝없이 침입을 시도하곤 했다.
상대는 단지 염탐꾼을 보내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다른 행동도 개시했다.
영지 주변으로 악의적 소문들이 하나, 둘씩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테스가 말하는 문파라는 게 다 사기라더라.
-헹.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떠돌이 마법사였던 자가, 무슨 오러를 가르쳐.
-마법도 제대로 가르칠까 모르겠어.
-유민들이 들어가서 굶주리고 있다던데?
문파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 영지의 불안, 테스를 향한 공격…….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테스 자체의 위신을 깎아 먹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은 뒷공작들이었다.
전이라면 테스도 크게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거였다.
이제는 아니었다.
“쯧. 썩어빠진 것들이…….”
끝을 모를 명성을 지녀야만 승천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금. 저런 식으로 소문이 퍼져나가는 건 테스로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이 상황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럼에도 당장 전쟁을 벌일 순 없었다.
“명분이 없어. 명분이…….”
그를 노리는 자들 전체로 벌이는 전쟁. 무리다.
설사 전력을 갖췄다 해도, 명분이 없다. 그러기에 전쟁은 완벽한 답이 아니었다.
명분 없이 벌인 전쟁은 명성을 올리지만, 동시에 적에게서 명성이 떨어지기도 하니까.
결국 답은 다른 데 있었다.
“시답잖은 소문을 잠재우면서도, 내 명성을 끌어 올리는 방안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한 번에 여럿을 해결해야 했다.
“이런 경우에 전생엔 어찌 해결을 했더라…… 가만? 그 방법이 있었네!”
테스의 머리로 번뜩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 * *
요튼 디프트.
디프트 자작가의 차남이자 손꼽히는 기사 중 하나. 실상은 노력 없이 그 가문이 지닌 비의 덕분에 힘을 얻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제가 지닌 힘에 자신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가 나선 곳은 도시의 살롱, 사무르.
사무르에 도착해 그가 발을 디디자 곳곳에서 환영 인사들이 들려왔다.
길게 뻗어 있는 연초를 피우는 자, 누운 채 시종에게 열매를 받아먹는 자, 제 몸을 드러내고 주변을 희롱하는 자까지…….
모두 한량다움이 묻어나는 자들이었다.
“오늘은 빨리도 왔군?”
“여, 요튼. 자네가 이 시간부터 웬일인가?”
“내 어제 이야기가 끝나지가 않아서, 분을 풀 수가 있어야지!”
그들이 반김에도 요튼은 진심으로 분한 듯 씩씩댔다.
“아아. 그 운 좋은 얼치기 말인가.”
“그래! 그 자식! 별것도 없는 그깟 놈이 뭐라고, 독립 영주가 된단 말인가.”
운 좋은 얼치기.
남의 뒷담이나 까기 좋아하는 살롱의 귀족 자제들이 붙인 자의 별명이었다. 이 외에도 온갖 시답잖은 별명을 붙여 한 사람을 욕하고 있었다.
근래의 요튼은 그런 한 사람을 향해 진심으로 분노하는 자 중 하나였다. 여태껏 얼굴을 보지도, 특별히 스쳐지나간 인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워워. 그게 벌써 반년도 더 넘은 이야기라고. 뭐, 그리 흥분하고 그러나.”
“하…… 이제 반년이 지난 거지. 내 그 전장에 나갈 기회만 있었으면, 그놈 자리는 내거였다고!”
“데프 백작의 전장?”
“그래! 그 전장!”
“크흐. 우리 가문이 붙었으면, 페넌 쪽이었을 걸? 그럼 지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페넌이 졌으니까.”
“그거나 저거나! 내가 있었으면 승리하는 쪽이 달라졌겠지! 승자가 갈렸을 거라고.”
발언에 진심을 담기라도 한 건가. 씩씩대는 요튼은 제 기운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냈다.
스스스스-
테스가 봤다면, 우습지도 않게 여길 기운. 하지만 이곳 살롱에 있는 귀족 자제들에게는 강력한 기운이기만 했다.
“허어. 입 조심하게나. 그러다가, 데프 백작가에서 들으면 또 어쩌려고?”
“하……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닌가! 내 기회만 닿으면, 그깟 놈의 코를 아예 뭉개 버릴 거라고! 자네도 그럴 거잖은가?”
“후핫. 당연한 소리를!”
“그 망할 테스. 죽여 버릴 독립 영주 자식. 제가 뭐라고 살롱이든 파티든 하나 모습도 안 드러내고 말이지. 쯧.”
저들은 살롱에 처박혀 몇 시간이고 조롱을 계속할 생각인 듯했다.
온갖 방법을 다 들여 욕설을 날려대고. 시종에게 테스 역을 맡겨 흠씬 때리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암살자를 보내야 한다며 돈을 걷는 시늉을 했다.
음흉한 짓거리들을 이야기하는데도, 여기 있는 자 중 누구도 부끄러이 여기는 자가 없었다.
자신들만이 지닌 알량한 정의와 가치관에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더럽고 음습한 군중 심리!
밤까지 계속될 거 같았던, 그들만의 연회. 그 연회를 깨는 자가 있었다.
“요튼 디프트. 디프트 자작가의 차남분, 맞으십니까?”
“……맞는데. 넌 뭐야?”
모습을 드러낸 자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살롱에 어울리지 않는 절제가 묻어 있는 옷이었다.
“그레놀 상단의 상단주께서 보내셨습니다. 서신 전달을 의뢰받았다고 하더군요.”
“뭣? 서신?”
아버지가 영지로 돌아오라는 명령이라도 내렸을까. 아니면 지난달에 빚지고 갚지 못한 도박금? 그거야 따서 갚으면 되는 거 아닌가!
‘대체 뭐야.’
의문 어린 눈을 하며 요튼은 서신을 받아들었다.
찌이익-
술에 취한 손을 떨며, 서신을 신경질스럽게 찢었다.
“……어, 어어?”
내용을 본 요튼의 눈이 크게 떠진다.
“뭐야, 뭔데 그래?”
“음?”
호기심에 그 옆을 지키던 자들이 모여서 서신을 바라봤다.
화려한 수식어도 없이, 짧고 간결하게 적힌 서신의 내용은 심상찮았다.
요튼 디프트, 비무를 청하오.
-테스 어센션
서신을 본 모두의 눈이 놀람으로 물든다.
“비무? 이거 결투 신청 아닌가?”
“허…… 여기까지 결투 신청을?”
“요튼, 어떻게 할 거야?”
서신을 든 채로 손을 덜덜 떠는 요튼.
‘이 미친 새끼가…… 진짜로 결투 신청이라고? 소문이 들어 간 건가? 악! 대체 뭐야?’
속으론 온갖 욕설과 함께 불안감이 닥쳐왔다. 살롱에서야 그가 최고 실력을 지닌 기사고, 최강이지만 바깥에서 아님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디프트 가문에서야 명예를 만들어 줬지만 그조차도 진짜는 아니었다.
그 힘은 그가 가문에서 이어받은 힘 중 하나였을 뿐이고. 명예와 명성은 요튼을 다른 가문에 잘 팔아넘기고자 만든 수작질의 결과니까.
한데 진짜로 와 버렸다. 그 테스의 결투 신청이었다.
‘그래. 어차피 물러날 수도 없잖아? 어쩌면…… 이건, 진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요튼은 결심을 끝마쳤다.
그는 서신을 와락 찢어발기며 주변에 답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아주 곤죽을 내 줘야 하지 않겠어?”
“오오오!”
“그래야, 요튼이지!”
요튼 디프트. 그가 비무첩을 받아들였다.
그를 제외하고 테스 영지 곳곳에 명성을 지닌 명사들에게 온갖 비무첩이 날아들었다.
다론 피터, 검객 리바트, 나이트 에슬러…….
명성이 높고 낮고에 상관없이, 많은 자들에게 날아든 비무첩이었다.
많은 자들이 대체 누가 비무첩을 받을까 하고 내기도 걸었다.
테스가 비무첩 정도는 날려야 명성이 알려진 자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였다.
짧고 간결한 비무첩 안에 담긴 내용은 오롯 비무 신청 하나!
-허허…… 쓸데없는 짓을.
-이자가 진심 미친 것인가?
-호오.
불안, 흥미, 흥분, 짜증…….
온갖 반응들이 튀어나오고 사라졌다.
-급작스레 독립 영주로 튀어나온 이자가 대체 이 무슨 미친 짓을 벌이는 거지.
-갑자기 주어진 권력에 미쳤나?
-그도 아니면, 무슨 생각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건가. 오랜 옛날 고대 시절에 전사들이나 하던 짓거리를 벌이는 연유가 대체 뭘까.
많은 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튼 다프트가 응한 첫 비무가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