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챕터 5.
크리스탈 홀이 분주해졌다.
머무르던 홀의 주인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온몸을 흰빛으로 물들인 그들이 오랜만의 소란으로 모여들었다.
예신 혼돈으로부터 시작되어.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으로 나뉜 신들.
그 아래 마법이란 법칙이 줄기를 이루고. 더 아래에는 이 세계에서 중심을 이루는 행운, 농경, 복수, 전쟁 등의 신이 각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잊힌 옛 신들의 자리를 제외 한 그 수가 열둘.
이 크리스탈의 홀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의 수도 딱 열둘이었다.
수가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하나, 하나는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대리한다 말하는 교황들이었으니까.
신을 대리한다 하는 그들은 그에 걸맞은 힘을 갖추고 있었다.
형상만 인간일 뿐이었다. 인간의 육신은 차차 벗어던지며 몸 안을 신성력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격을 뛰어넘는 게 일견 승천자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승천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자는 없었다.
모여든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단 하나의 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명의 신 피리엘을 모시는 주교 벤. 차기 교황으로 일컬어지는 그가 가져 온 편지. 그 내용은 그들에게 섬뜩함을 가져다 줬다.
『예비 승천자 발견』
-이걸 사실이라고 보오?
-아니라 말하긴 어렵네. 그 벤이 가져 온 것이니까.
-허어…….
-재밌군.
모시는 신에 따라 각기 반응이 갈렸다.
생명의 피리엘, 빛의 핀도르를 믿는 교황들은 불안에 찼다. 어둠의 아리엔과 죽음의 다렐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이들 사이에서도 분란은 있었다.
-재미? 허. 이게 재미가 있을 일인가?
-비어 버린 신의 자리. 그 마지막이 채워졌을 때, 의미가 무엇인 줄 알고!
-성국이 망한다는 예언이 실행되는 것이겠지.
-그러니 재밌을 수밖에. 우리 어둠들이 풀려난다는 의미니까.
-허…….
하기야 같은 신을 모셔도 분열되는 게 인간이다.
열두 신을 모시자고 모인 이들이 분열되지 않는 게 되레 이상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들이 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신을 믿고자 모인 성국의 성민들이 보면 기함을 토할 만큼 놀라운 광경. 계속해 만들어지고 있는 분열을 막아내는 건 단 하나였다.
-그만! 우리끼리 더 분열할 참인가? 저 제국을 두고.
재앙의 페넬을 모시는 교황 이자젤.
어디든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게 재앙.
그러한 재앙의 힘은 역설적이게도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였다.
잊힌 옛 신 혼돈의 자리가 비워져 있는 한, 재앙이 가져다주는 힘은 무엇보다 강력하였으니까.
-잊지 말게나. 지난 며칠 간 페넬께 떨림이 있으셨음을…….
-허! 설마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인가?
-그 방향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아직 알 수 없네. 이리로 올 수도, 다른 곳을 향해 움직이실 수도. 재앙께선 언제나 변덕을 부리시니까. 그러니 방향을 틀어야 하네.
-……이쪽으로 오시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거군.
-그런 게지.
-허허…….
재앙의 교황이 던지는 경고에 분란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이 상태로 분열이 이어지면, 재앙의 신이 성국을 향해 움직일 수 있음을 경고하였으니까.
결국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분란이 아닌, 통합을 만들어 내야 했다.
-재앙의 신께서 움직이실 정도면, 예비 승천자가 나오긴 했다는 의미군.
-관측이 아직 안 되지 않았잖나?
-큼…… 그 어린 관측자들이야, 제 구실을 하려면 멀었으니까.
-그럼에도 선택받은 아이들일세.
-알고 있지. 아직 어릴 뿐이야.
예비 승천자를 찾아내야 했다.
예비 승천자를 찾아낼 수 있을 자들은 단 한 가지 족속들뿐이었다.
관측자.
교황들로서도 쉬이 건드리지 못할 자들. 성자, 성녀에 비견하는 선택을 받은 그들만이 예비 승천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은 어렸다.
이제 막 관측자가 되었을 뿐. 전대 관측자들로부터 제대로 된 전승을 받지 못하였다.
-새로운 관측자가 준비되지 못한 이 틈에…… 하필 예비 승천자의 정보라.
-시기가 공교롭군. 전대들은 힘만 가지고 있을 뿐, 눈은 잃었어.
-그만큼 예비 승천자에겐 행운이 작용한 걸지도 모르지.
예비 승천자를 찾아야 할 이들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예비 승천자가 진정한 승천자로 발돋움한다면. 그날이 곧 성국이 무너질 때이니까. 오래 전 예언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들로선 절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꾀를 내야 했다.
-관측자가 완전히 전승받기 이전까지는 결국 직접 찾을 수밖에.
-누구를 보낸단 말인가?
-이걸 가져 온 벤. 그자부터 움직이도록 하는 게 어떠한가?
-벤이라…… 허. 과연 그자가 잘 해낼는지.
-차기 교황이 될 수도 있을 자네. 그자가 하지 못한다면 다른 자도 불가능한 일이야.
-결국 답은 정해진 거로군.
-벤으로 하세.
-그에게 전권을 주도록 하지.
-그래. 그가 매듭을 지음이 맞겠지.
고심하던 교황들은 관측자가 아닌 다른 패를 선택했다.
주교 벤.
출처가 불분명한 예비 승천자의 정보를 가져온 그가 관측을 위해 움직이게 되었다.
얼마 뒤.
크리스탈 홀에서 은밀한 부름이 있었다. 부름을 받은 주교 벤은 크리스탈 홀을 떠나 움직이기 시작했고.
조용하기만 하던 성국의 교황청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건 비단 성국만이 아니었다.
아르펠 공작이 약식으로 진행한 작위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영지로 돌아왔다.
영지로 돌아올 때도 전과 같은 텔레포트를 통했다.
‘데프 백작과 아르펠 공작 사이에 협의가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텔레포트를 이리 쉽게 허락할 리도 없지. 그럼 영지전도 분명 뭔가 있겠군.’
그가 텔레포트하여 도착한 곳은 장원 레므나.
정치력 하나는 타고난 장원주는 테스가 오자마자 충신처럼 그를 반기었다.
“오오! 금의환향하여 돌아오셨군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정보 길드에서 정보라도 사는 건가?”
“예? 정보 길드라니요. 그런 고가의 걸 제가 어찌 이용합니까. 단지 귀동냥을 조금 하고 다니는 거죠.”
귀동냥 수준으로. 테스의 정보를 듣는다라.
단순 그 정도 수준은 넘지 않는가.
‘제리코가 행정적 수완이 좋다면, 이자는 정보와 외교력에 관련해선 뛰어나.’
테스는 새삼 레므나 장원주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며,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새로 만들어 내는 정보 관련 부서는 이자가 맡아도 될지도?’
눈앞에 툭하니 나타난 인재다. 테스는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났다. 이자를 영입하고자 하는 욕심. 못 할 것도 없었다.
현재 그는 장원주란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가장 먼저 장원을 넘겨주었다지?”
“흘. 제가 보기에 대세가 그리 돌아가고 있었으니까요. 더 버텨서 장원을 지켜보아야, 언제고 넘겨야 할 거 같았습니다.”
아르펠 공작이 넘겨준 일곱 개의 장원 가운데 레므나도 포함 돼 있었다.
“후음. 그래서?”
“해서 비싼 값을 치를 수 있을 때, 대뜸 넘겼지요. 그게 가장 제게 옳은 선택이니 말입니다.”
장원을 넘겼으니, 그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 레므나란 이름을 지우고 장원을 떠나야 했다. 이제 그의 땅이 아니었으니까.
‘어려운 선택이었을 거야.’
레므나로서 이 장원은 평생을 일궈서 얻어 낸 성과였을 거다.
용병으로 굴렀던 그가 장원주가 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 꽤 많은 고생을 해서 얻었을 건데도 포기라.
어지간하면 아집을 부릴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고 있었다.
‘고집을 부릴 법도 한데, 판단력도 좋아.’
레므나는 이번에 얻은 돈을 갖고 도시로 돌아간다 했다.
장원만은 못해도 작은 상점을 꾸린다던가. 평민치고는 풍족한 삶을 살게 되겠지만, 장원주던 시절보단 못한 삶이다.
그의 얼굴 위로 아쉬움이 스친다. 테스는 그 아쉬움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아쉽지 않았던가?”
“아쉽죠. 안 아쉽다 하면 거짓말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최선을 선택할 뿐이죠.”
아집과 최선. 그 사이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자는 드물다.
그 말을 듣고 테스는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장원을 두고 돌아갈 필요가 없는 방법도 있는데 한번 들어보겠는가?”
“예? 설마…….”
역시 눈치가 빠르다.
테스는 바로 말을 이었다.
“내 사람이 되게. 정식으로 나의 가신이 되라는 말이야.”
언제나 최선을 선택하는 레므나다. 그의 갈등은 짧았다.
그의 표정이 사근사근하게 변했다. 양손을 쓱쓱— 비비며 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작. 아니, 주군!”
“크큭. 거창하게 주군까지야. 자자, 새로운 관계를 잘 성립해 보도록 하자고.”
테스. 그가 수완 좋은 가신 하나를 얻어 냈다.
가신을 얻기가 무섭게, 테스는 주변 장원의 통합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 일에 새로운 가신으로 들어 온 레므나가 선봉에 섰다. 그는 주변 장원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정보들을 빠짐없이 테스에게 가져왔다.
가져 온 정보는 제리코가 정리하며 교차 확인했다.
“어때?”
“레므나를 말하는 거라면, 아주 좋습니다. 가져 온 정보 어디하나 문제가 없을 정돕니다.”
그 정보를 통해 성과를 얻었다.
“좋아. 그래서 성과는?”
“다른 장원주들이 숨겨 놓고 몰래 데려가려던 노예들을 전부 찾아 왔습니다.”
장원 거래엔 장원에 속한 노예도 포함된다.
그들 모두 장원의 재산이니까.
전 장원주들은 그런 노예들을 따로 챙기려 들었다.
그들 생각이야 훤히 보였다. 영지 통합의 어수선함을 노리려고 한 것이다.
“얼마나 되지?”
“수가 이백은 더 넘더군요. 정확히 218명입니다.”
“미쳤군.”
문제는 그 규모. 수가 이백이면, 어지간한 장원민 수를 넘는다.
7개 장원이 각 30명씩은 챙겼다는 소리가 된다. 아니 레므나를 제외하면 그보다 수는 더 커진다.
“한둘 정도면 넘어가 줄 텐데. 이건 안 되겠어.”
“바로 영지군을 파견 보냈습니다. 전부 데려올 겁니다.”
“처벌도 확실히 하도록 해.”
“옙! 이미 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마 몇몇은 다시는 뜨는 해를 보지 못하게 되겠죠.”
“좋은 방식이야.”
테스는 그 처리를 확실히 하게 만들었다.
주동자는 죽음. 선동되어 같이 움직인 자는 노예값에 걸맞은 값을 치러야 할 거였다.
‘장원 일곱 개는 그리 처리하면 될 거고. 문제는 나머진가.’
테스가 공작으로부터 받은 건 장원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울픈 산맥 주변의 영역도 그의 것으로 인정받았다.
일종의 개척 권한이다.
다른 자라면 그 권한을 받아도 개척할 생각을 않겠지만, 테스는 달랐다.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새로 주어진 영역은?”
“현재 정보 길드에 의뢰를 넣었습니다. 영지군 중 발이 빠른 자도 몇 보냈습니다. 여기엔 테론이 나설 거 같더군요. 에나가 활약하니 경쟁심이 붙은 듯합니다.”
“잘됐군. 서로 경쟁하다 보면 성장을 하겠지.”
할 수 있는 한 많은 정보를 모으도록 만들었다.
이 뒤 정보를 모으는 데 성공하면. 그때 테스는 개척을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개척을 위한 준비 사이에도 그가 할 일은 많았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을 제리코가 잔뜩 들고 왔다.
“이제 정식으로 독립 영주임을 선포해 주셔야 합니다.”
“그걸 꼭 해야 하는가?”
“허어…… 다름 아닌 새 독립 영주의 탄생입니다. 작위식이 있었으니, 이미 알겠지만 선포를 하는 건 또 다른 의미잖습니까.”
“후음…….”
시큰둥한 테스의 표정을 보고, 제리코는 열을 올렸다.
독립 영주.
테스가 아르펠 공작으로부터 받은 또 다른 선물 중 하나였다.
본래 귀족은 작위라는 권리를 받으면 그에 따른 책임이 주어졌다. 그 자신을 봉신으로 임명한 상위 귀족에 대한 충성이었다.
‘중원하곤 개념이 다른 충성이긴 하다만…….’
그건, 목숨 바쳐 하는 충성이 아니었다. 계약으로 받은 토지에 대한 책임 정도의 충성이었다.
이를테면 일 년에 한 번 동원령에 응한다던지. 일정량의 세금을 바치는 식이었다.
공작은 테스에게서 봉신의 책임을 지워줬다.
세금을 바치지도, 병사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그 권리를 인정하여 줬다. 그럼으로써 그는 독립 영주가 됐다.
총 여덟 개의 장원. 울픈 산맥 지류를 개척할 수 있는 권한.
이 모든 걸 올곧이 테스의 거라는 걸 인정받은 것이다.
독립 영주가 된 그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그 아래 있는 장원주의 병력 동원이 가능해졌다. 동원을 할 때마다 적당한 이권을 나눠 줘야겠지만, 공짜 병력을 얻는다는 건 꽤 구미가 당기는 일이긴 했다.
더불어 그들로부터 들어오는 세금을 생각하면, 그의 권한은 더 막강해진다.
행정관장 제리코가 열을 올리며 기뻐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다.
“그러니 선포식은 꼭 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네. 꼭 하지. 내 하기는 하겠는데, 선포식을 하는 김에 한 가지를 더 선포해야겠어.”
“네? 뭘 선포하시겠다는 것인지. 독립 영주 선포 말고 또 뭐가 있습니까?”
테스는 오래도록 생각하던 개념을 이젠 꺼낼 때가 됐음을 알았다.
‘독립 영주쯤 됐으니, 이 정도는 감당 가능하니까. 이 뒤에 성국의 견제를 생각하면…… 지금부터 시작해야 해.’
테스가 제리코에게 답했다.
“있네. 개파 선언.”
“네?”
“이해를 편히 해 주려면 보여줘야겠군. 아니, 모두에게 보여주는 게 맞겠어. 사람을 모아 봐. 바로 보여줄 테니까.”
중원에만 있었던 개파. 문파를 만들어내는 그 의식을 이제 시행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럼으로.
‘한 발짝, 아니 몇 발자국은 더 나가게 되겠지.’
테스는 새로운 기틀을 이 세계에 만들어낼 요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