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챕터 2.
그녀의 붉음은 부끄러움이 아닌 분노가 그 정체였다.
고작해야 용병 출신. 그런 자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공작 부인. 그녀가 터트리는 분노는 꽤 매서웠다.
테스는 가만 당하는 법 없이 따박따박 대답을 해 줬다.
얼마나 상대를 해 줬을까.
바깥에서 공작 부인을 기다리던, 그녀의 시녀 중 하나가 들어오고서야 밀실의 대화는 끝이 났다.
“쯧…….”
나갈 때까지도 그를 째려보는 그녀의 시선.
그는 피하지 않았다. 되레 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나가는 그녀에게 예법을 올렸다. 더 약 오르라는 듯이.
그녀의 꼴을 본 테스는 각오를 더 다졌다.
‘이거 더 제대로 해야겠는데. 방해 들어 올 거까지 생각해 놔야겠어. 공작에게 부탁을 좀 해 봐야겠군.’
각오가 서면 바로 실행하는 게 테스의 본성.
그는 방에 마련된 줄을 당겼다. 얼마가지 않아 방에 새로운 시종이 들어왔다.
“공작 전하께 내가 추가로 요청할 것들이 있다고 전달해 줄 수 있나?”
“그게 무엇이든 일 순위로 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좋군. 내 말하는 것들을 전부 구해다 줘.”
테스는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읊었다. 시종은 그 말들을 집중해 들었다.
“다 기억했나?”
“약초 로만스, 브런, 페럿, 샤이널…….”
백에 가까운 약초. 마석. 마법 재료. 마도구. 모종의 수단을 위한 재료…….
단 한 번 들었음에도 시종은 전부 기억했다.
‘미친. 시종인데도 이 정도 수준이라고?’
테스도 감탄할 만한 기억력이었다.
하기는 아들 치료를 위해 온 테스다. 그런 테스를 보좌할 시종을 허툰 자로 뒀을 리가 없었다.
잘 보니 기운도 다른 시종들과 달랐다.
‘오러를 익혔구만. 은밀해.’
숨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상황으로 봐선 신분을 숨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공작이 이리 신경 써서 보냈다는 거는…… 공작 부인이 어떻게 나올지 대충 예상은 했다는 거구만.’
방금 전 있던 밀실의 일. 그 일이 공작의 귀에 분명 들어갈 거란 거다.
일이 잘 끝났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일이 틀어졌더라면, 저 시종이 숨어 있다 나섰을지도 몰랐다. 공작은 진심으로 치료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무슨 일이 꼭 벌어지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명문으로 제 부인인 공작 부인을 정치적으로 압박할 수 있을 테니까. 아니면 그녀의 가문에 압박을 하거나.
그럼에도 대놓고 공작이 나서지 못한 건 어떤 모종의 이유가 있을 터.
‘가만 보니 이 가문도 막장이로구만.’
공작이 묶여 있는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가설이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테스가 파고들 필요는 없는 터.
타 가문에 암투까지 끼어들 여유는 없었다.
테스는 제 할 일만 하면 그뿐이다.
“구해 줄 수 있는가?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데.”
“움직여 보겠습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할 겁니다.”
“허…… 그것들을 고작 일주일이면 구한다고?”
“프로스트 문의 치료를 위하여 공작님께서 준비하신 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그게 아니더라도 아르펠의 힘이라면 당연한 겁니다.”
이 정도가 당연하다라.
‘과연 명문가라 이거지.’
그가 구하라 말한 건 단순한 재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주일이라 말하는 시종의 모습에서 아르펠의 자부심을 엿보는 테스였다.
“자, 그럼…… 저는 바로 움직여보겠습니다.”
조용히 물러나는 시종. 그를 테스는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단 일주일.
‘약속한 기간을 정말로 지켰구만…….’
공작이 테스가 말한 요청한 걸 모두 구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준비가 끝나자마자 테스는 공자의 방으로 발을 디뎠다. 환자실이 되어 버린 그곳에 테스는 자신이 할 수 있을 모종의 것들을 설치했다.
그 모든 장면을 재료를 구해다 준 시종이 함께했다.
“준비는 끝이야.”
“공작님께 얼마나 걸린다고 말씀드릴까요?”
“이전에 말씀드린 거와 같아.”
“한 달이군요.”
“맞아. 대신 하나는 확실히 해 줘야 해. 앞으로 이곳에 너조차도 발을 디디면 안 돼. 그게 조건이야.”
“그 조건. 이미 전달해 두었습니다.”
마법진으로 환자의 시간을 멈췄다지만 상태는 좋지 못했다. 시간 지체 마법만 풀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정도다.
‘시간의 흐름을 조종하고. 그 가운데 치료가 되도록 해야겠지. 그래서 걸리는 시간이 한 달.’
조금의 방해라도 들어온다면 제 아무리 테스라도 치료는 실패한다.
“꼭 지켜져야 할 거야. 그게 치료의 성패를 좌우하니까.”
“예!”
“그럼 한 달 뒤에나 보자고.”
시종이 물러나고. 테스는 기다렸다는 듯 환자실의 문을 닫았다.
* * *
환자실 안.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자, 시작해 볼까.’
테스는 미리 배운 대로 시간 지체 마법진을 조율했다. 멈춤에 가깝던 시간이 느슨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스스스스-
기다렸다는 듯 환자의 몸에 있는 기운이 움직인다.
“하. 바로 날뛰는 거냐.”
양의 기운이 스물스물 퍼져나가려 한다.
테스는 침을 꽂아 그 기운들이 멈추도록 만들었다. 그러며 동시에 자신의 기운을 조심스레 환자에게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도 음기를 잘 조절해야 할 텐데.’
테스의 손으로부터 퍼져나간 음기가 열기를 잠재워 갔다.
몸의 기운이 안정화됐다.
테스가 기다렸던 순간이다. 그때가 되자 테스는 준비한 침들을 환자의 온몸에 꽂아 넣었다.
‘해내자고.’
진정한 치료의 시작이었다.
치료 사흘째.
제자 프로스를 치료할 때와 비슷한 방식을 썼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환자의 몸을 점차 강화시켜 나갔다.
치료 일주일째.
매일같이 밀어 넣은 1갑자가 넘는 기운. 침을 통해 조율해 나가자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치료 열흘.
마법진의 시간을 점차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흐르던 시간이 점차 빨라졌다.
“……아.”
“드디어 눈을 뜬 건가.”
빨라진 속도에 의식을 잃고 있던 환자가 눈을 떴다.
구음절맥에 걸린 자는 타고난 천재. 아릿한 눈을 뜬 라프러트는 테스를 바라봤다.
그는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환자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흘렀다.
“……특……이한…… 방식의……치료……로군.”
“저만의 방식이죠.”
“그……런가…….”
그러기에 테스가 보기엔 한없이 느린 방식으로 입을 열어왔다.
‘불안할 테지. 그러니 믿음을 줘야하고.’
테스는 그런 환자의 눈을 바라보며 답해 줬다.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그리 만들어 드릴 거니까.”
“잘…… 부탁…….”
“믿으십쇼.”
“…….”
그 말을 끝으로 환자는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건지. 혹은 치료를 하는 테스를 배려하고자 눈을 감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스무 날째.
흐르는 시간은 점차 빨라져간다. 환자인 그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호전되어갔다.
“대단하군…… 이리 고통스럽지 않은 게 얼마 만이던지 모르겠어.”
“앞으론 매일 그럴 겁니다.”
간단한 대화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수준이 됐다.
치료 자체가 고통스러울 텐데도 그는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라프러트라 이름 밝힌 공자는 때때로 테스가 하는 치료를 바라볼 뿐이었다.
스물아홉 날째.
상태는 완전히 호전됐다.
전에 프로스가 그러하듯, 라프러트는 적어도 침상 위에선 정상인과 같은 몸이 됐다.
‘끝이 오고 있어.’
최종적인 치료를 할 수 있는 몸이 만들어졌다는 의미. 이제 남은 건 몸의 마지막 균형을 바로 잡는 것뿐이다.
그 사이 라프러트와 테스의 사이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드디어 내일인가.”
“네. 내일이면 결판이 날 겁니다. 치료는 성공이겠죠.”
“자네는 언제라도 자신만만하군.”
“이미 몇 번이고 치료에 성공했었으니까요.”
“경험에 의한 자신감인가…… 나쁘지 않아.”
“그게 제 장점 중 하나죠.”
“킥. 그거는 맞는 거 같아.”
간간히 이어지던 대화는 길어졌다.
서로에 대해서 많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치료에 관해선 많은 말을 나눴다.
환자의 상태를 알아야 하는 건 의원의 기초. 그러기에 테스는 대화를 하며 그의 상태를 계속해 파악해 나갔다.
‘좋은데.’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혹여나 올 거라 생각했던 공작 부인의 방해도 없었다. 바깥을 맡은 공작이 부인을 잘 막아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 환자실은 완벽한 밀실이나 다름없기에 바깥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기에 모든 건 예측일 뿐이었다.
“……아마. 마지막 치료는 주의해야 할 거야.”
“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아는 그녀의 성격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을 노리는 걸 즐기거든.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망가트리는 걸 즐긴다나?”
그녀. 주의. 망가트림.
몇 가지 단어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먹을 만했다.
“그 망할 여자가 나선다는 거군요.”
“푸흐흐…… 계모라도 내 어머니인데 그리 말하는 건 재밌군.”
“퍽이나 재밌을 리가요.”
“어쨌거나 주의해. 내가 예상하기엔 최종 치료가 되는 내일을 노릴…….”
콰아아앙-! 콰아앙!
공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울림이 환자실 전체에 일었다.
테스가 설치한 진법이 흔들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빛이 도는 막이 굉음이 일어날 때마다 흔들렸다.
“아무래도 예측이 틀리신 듯싶습니다만?”
“내일이 아니라 오늘인가. 망할…… 두 번 꼬아서 온 거군.”
“그만큼 몰려 있다는 걸지도 모르죠.”
분한가. 라프러트가 주먹을 꽉 쥔다. 쥔 주먹이 흔들리고 있었다.
반대로 테스는 되레 차분해졌다.
언제고 올지 모를 암수를 상대하는 거보단, 대놓고 다가오는 자를 상대하는 게 그로선 더 편하였으니까.
‘진법까지는 예측도 못했겠지. 멍청이들.’
테스는 한동안 꺼내지 않던 검을 빼들었다.
콰앙!
그 순간, 버티던 결계가 깨져나갔다.
온몸을 검은빛으로 물들인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열.
표식이라 할 수 있는 건 가슴어림에 있는 붉은 반달뿐이었다.
라프러트 공자는 이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레드문인가. 하. 정말 죽으라는 거군. 도망가. 치료사인 자네가 상대할 자들이…….”
“말씀은 고맙게 받죠.”
“자네가 그럴 필요가…… 으읏…….”
테스는 말에 답하며, 공자의 주변에 있는 마법진을 조율했다.
그에게 흐르던 시간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공자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린다.
‘아직 어린 공자가 볼 만한 장면은 아니지.’
조율을 끝냄과 동시. 그는 암살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
마주 달려오는 암살자들.
거치적거리는 테스를 치울 요량인 듯, 뽑아든 검에 살기가 맺혀 있었다.
‘우습기는.’
테스는 그대로 보았다.
적들의 움직임. 흐름. 방식. 무기.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기감과 시야를 통해 낱낱이 읽혀졌다. 환골탈태로 강화된 육체는 그 모든 정보를 순식간에 소화해 냈고.
그에 걸맞은 최상의 대응 방식을 찾아냈다.
‘빠름으로.’
일초식 비뢰섬검.
영류비검의 최상위 초식. 쾌의 묘리를 지닌 비뢰섬검이 흩뿌려진다.
츠츠츠측-
기기묘묘하게 움직이며 흐름이 만들어진다.
흐름은 규칙성 없이 혼란스레 흩어지는 듯했다. 검이 그려내는 선을 따라 수많은 빛이 산란한다.
‘쾌에 환의 묘리가 심어진 게 바로 이 비뢰섬.’
산란하는 빛이 적과 부딪친다.
콰아아앙-!
파육음이 났다.
“……컥.”
달려들던, 적의 사지가 꺾인다.
산란하던 빛은 사지를 꺾고도 남아 여파를 퍼트렸다. 마주 달려오던 암살자 셋을 기어이 잡아 먹었다.
콰즈즈즉-
순식간에 넷이 쓰러진다.
남은 건 여섯.
그들은 둘로 나뉘었다.
셋은 테스. 셋은 공자를 노렸다. 한쪽이 테스를 막는 사이, 라프러트를 죽이려는 속셈.
즉석해서 짠 작전치고는 쓸 만했다.
문제는 그를 상대하는 게 테스라는 거다.
“어설프기는.”
암살자의 저런 행태를 테스는 이미 여러 번 보았다.
‘차라리 한 번에 왔어야지. 멍청이들.’
둘로 나뉘면 더 좋았다.
한 뭉텅이보다 나눠진 걸 쪼개는 게 더 쉬운 법이니까.
그는 비뢰섬의 검로를 연이어 그려나갔다.
쾌의 묘리로 수많은 검로를 그려내고.
환의 묘리로 빛을 산란시킨다. 빛 안엔 치명적인 검력을 내포시켜 상대를 찢어발기는 게 비뢰섬의 방식.
그가 머릿속에 그려낸 검로가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이 검기로 물들었다.
‘가라.’
빛의 한 가운데 선 테스. 그가 가벼이 손을 쓸어내렸다. 허공에 있던 검기들이 손짓을 따라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츠츠츠측-
달려드는 암살자 전부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