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챕터 1.
물어오는 아르펠 공작.
어느새 그의 눈은 제국의 제후가 아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돼 있었다.
‘제리코와 비슷한 눈이네.’
부정실린 아버지의 눈.
테스로선 익숙했다.
아버지든 아머니든 부모란 존재가 그랬다. 신분을 떠나, 그게 누구든 아픈 자식을 가진 부모의 공통된 눈이었다.
지금. 아르펠 공작에게 유일한 희망은 그였다.
치료를 할 수 있을 자가 그뿐이었으니까. 눈동자 한편에 스민 공작의 불안을 씻어낼 수 있는 거도 그뿐이었다.
이럴 때, 테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눈에는 확신을. 목소리는 담담하게 가져야 했다. 부모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도록 또렷하게 답해야 했다.
“할 수 있습니다.”
“허…….”
약간의 탈력감을 느낀 것인가.
공작의 몸이 잠시 흔들렸다. 이내 다시 중심을 잡았다.
그의 눈에 있던 불안기 한결 가신다. 그럼에도 아직 불안은 남아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그가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 정말로 가능하다고?”
“네. 시간이 필요하긴 합니다.”
“얼마나? 몇 년이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라면…….”
“재료만 준비된다면 딱 한 달입니다. 그 재료도 공작님의 가문이라면 금방 구할 것들이죠.”
“허. 허허허…… 한 달! 한 달이란 말이지!”
감탄인가. 불안인가.
흔들리는 공작의 눈빛 사이로 수많은 감정들이 오간다.
그러다 이내 그는 다시 본래의 또렷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제후의 눈빛이 되어 테스에게 말했다.
“좋네, 한 달. 내 그 안에 해내기만 한다면 자네에게 딱 필요한 걸 준비해 주지.”
“미리 준비해 놓으셔야 할 겁니다. 그게 뭐든지요.”
“내 기대하지.”
* * *
확신을 받은 공작은 자리를 파했다.
대기하던 자를 통해 테스가 머물 숙소를 안내하도록 했다. 그러곤 그는 제 할 일을 하고자 자리를 떠났다.
그는 한 명의 아비지만 동시에 제국 남동부를 아우르는 제후였다.
이만큼 시간을 낸 것도 그로선 꽤 많은 것들을 할애해야 했을 거다.
그러한 공작이 떠나가고.
제가 머물 숙소에 들어서고 나서야, 테스는 깊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아…… 피 말리는구만. 과연, 공작은 공작이란 건가. 강하단 말이지.”
제 저택의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침대 위로 몸을 뉘였다.
그러며 테스는 단 한 시간 전 느꼈단 공작의 힘을 가늠했다.
‘서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마법적 힘은 느껴졌다. 내가 경지를 살피기 힘들 정도란 건데…… 그럼 최소 7클래스는 되나?’
7클래스. 대마도사의 경지다.
인간 최고의 경지가 8클래스로 칭해지니, 바로 그 아래 있다는 의미.
공작은 육체의 단련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몸이 강건해 보였고, 뜻 모를 마력의 기류가 육체를 계속해 돌고 있었다. 테스로선 알 수 없을 가문의 비전을 수련했을 거였다.
‘가장 중요한 건 눈이었어.’
무엇보다 그 금안이 신경 쓰였다.
처음 테스를 바라 볼 때 마력이 흐르던 그 눈. 테스의 모든 걸 속속들이 살피는 듯했다. 테스가 지닌 기감 이상의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그 눈에서 느껴지는 서늘함.
한참은 기억에 남을 만한 느낌이었다.
“정말로 엘프 피를 이은 건가. 아니면 드래곤? 어느 쪽이던…… 저게 진짜 귀족이 지닌 힘이겠지.”
피를 타고 흐르는 강력한 힘. 단승이 아닌 계승 귀족들이 지녔을 비전.
그 비밀을 잠시나마 엿본 느낌이었다.
환골탈태를 하고, 초절정의 벽을 향해 다가가고 있던 테스. 단 몇 년 만에 얻은 성과기에 치솟아 오르던 자신감이 잠시 주춤하기에 충분한 힘이었다.
저런 강자가 제국에만 최소가 넷일 거다.
공작의 수가 넷이니까. 그에 더해 수많은 귀족들이나, 경지를 숨긴 자들도 있겠지.
전 대륙으로 하면 수백, 수천이 될지도 몰랐다.
온갖 종족들이 존재하는 게 이 세계니까.
그런 자들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이제 막 자신은 우물 안을 벗어났을 뿐이었다.
‘이거 기준점을 더 높게 잡아야 할지도.’
테스가 원하는 건 뭐든 해낼 수 있을 자유.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저들 모두를 아우르는 힘이었으니.
아르펠 공작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야 할 터였다.
지금보다 더 많은, 몇 개의 벽을 뚫어야 하겠지.
힘든 길이다.
그렇다 해도 주눅이 들진 않았다.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그는 되레 기대했다.
언제고 그런 강재와 마주할 때를. 그리고 그들을 뛰어넘을 때를 기대했다.
그리고 또 하나,
“대체 뭘 준비해서 주려나. 그 공작이 허세를 부릴 자는 아닌데 말이지.”
치료한 이후. 주어질 거라는 보상도 기대됐다. 허언을 하지 않을 자이니, 꽤 괜찮을 걸 줄 터였다.
테스는 그에 대한 기대를 키워가며, 앞으로 할 치료에 대한 계획을 점검해 갔다.
‘마법적 처리가 돼서 일이 더 쉽겠어. 시간을 멈춰 놓으면, 구음절맥이 변수를 일으킬 확률도 줄 테니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겠지. 구음절맥 자체가 워낙에 이리저리 튀는 녀석이니.’
치료 요법, 필요한 마력의 양, 확률을 높이기 위한 마법 재료.
많은 부분을 생각하고 가늠했다.
그러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방문자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방 바깥이 분주해졌다.
느껴지지 않던 인기척들이 기감으로 느껴졌다.
“뭐지?”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사이, 인기척의 주인들이 그의 방 바로 바깥에 도착했다.
상대는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불쑥 문을 열어 젖혔고. 그 가운데 당당하게 들어서는 자가 있었다.
‘흠…….’
여인이었다.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벨벳 드레스가 어울렸다. 그에 맞는 기품을 갖은 외모였으나, 눈빛은 표독스러웠다.
“이렇게 맞이하실 건가요?”
“예정에 없던 손님은 받지 않는 주의라서 말입니다.”
“흠…… 손님은 그쪽이겠지요.”
이쪽이 손님이라. 공작가의 사람이란 건가.
‘손이 귀하기로 유명한 공작가인데, 누구려나?’
지난 며칠 사이. 공작 가문의 사람들에 대해 알아 본 테스다.
아르펠 공작가의 특징은 짙은 금안. 그녀는 푸른빛을 띠는 눈동자를 갖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문에 그런 여인이 하나 있긴 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다행히 눈이 없지는 않네요.”
“눈이 없으면 꽤 곤란한 삶을 살았던지라 말이죠.”
공작 부인. 구음절맥에 걸린 아들을 낳고 죽은 정처의 다음인 후처.
‘브람스 백작의 딸이었던가.’
제후급은 못 돼도 상당한 권력을 지닌 브람스 가문. 그곳의 후손인 그녀의 위세는 공작가 내서도 꽤 대단했다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글쎄요.”
그녀가 테스에게로 다가온다.
테스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에 가서 이야기를 하자는 의미. 그와 그녀가 자리에 마주하자 열렸던 문이 때맞춰 닫혔다.
둘만 있는 밀실이 됐다.
‘하…… 이거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할 텐데.’
아무런 일이 있든 없든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
테스는 조심스레 상황을 녹화하는 마법을 부리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듣기로 용병 출신이라 하던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편하시겠죠?”
“그쪽이 부인께서 편하시다면. 그리하시지요.”
테스가 긴장한 듯 보였는지, 그녀는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네요.”
“환자 치료입니까? 대가만 충분하다면, 이 다음 치료를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아뇨. 그 반대예요.”
예상 외의 대답.
치료의 반대.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테스였다.
‘젠장할. 이거 잘못 걸린 건가?’
* * *
사이좋은 명문가. 우애 깊은 형제. 서로가 친애하는 가족…….
그 따위 것들이 현실에 존재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수없이 많은 게 주어졌지만 그보다 더 욕심을 내는 게 인간. 그러한 인간들의 정점에 있는 귀족들은 더 지독하게 많은 걸 탐했다.
제 가족의 것들까지도.
그들은 단지 탐하는 걸로 끝내지 않았다. 탐한 걸 가지고자 상대의 것을 노리고 행동했다.
‘쫓아내면 양반이고, 죽이는 건 너무 자주 일어났지.’
중원이나 여기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
‘이번에도냐. 쯧…… 세상이 달라져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만.’
눈앞의 공작 부인처럼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는 흔한 경우였다.
테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겨우 얻은 둘째 아들을 공작으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맞아요. 그게 내게 맞는 일이니까.”
“하…….”
그녀는 너무도 당당했다.
“프로스트 문에 걸린 아이예요. 이 가문은 유독 그 병에 자주 걸리죠. 그러한 아이가 다시 깨어난다 해서 뭘 할 수 있을까요?”
“많은 걸 할 수 있겠죠.”
구음절맥이었던 아이는 천재니까. 그러한 말까지는 집어삼키는 테스였다.
“하…… 이제 와서요? 겨우 잡은 이 가문의 질서나 무너질 뿐이죠.”
“질서라…….”
저 자신만의 질서이겠지.
‘구역질나네.’
지난 90년의 삶에, 지금의 삶을 더하면 100년이 넘도록 살아 온 테스다. 그런 그로서도 이러한 대화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니 적응을 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손이 귀한 아르펠 가문은 가주가 아니라도 대우를 해줄 텐데?”
“남은 찌꺼기나 던져주는 게 대우라고요?”
남은 찌꺼기라.
그 남은 찌꺼기도 어지간한 귀족 가문을 뛰어넘는 대우일 텐데.
손이 귀하기에 방계도 적은 아르펠 가문은 직계를 신경 써 왔다. 설사 가주가 안 되더라도 대우하고 보호하여 제 핏줄을 잇고자했다.
실제 가문의 가주가 새로운 손을 얻지 못할 경우, 살아남은 가주의 형제나 그 핏줄이 가문을 잇기도 했을 정도다.
그런데도 찌꺼기라. 우습지도 않다.
테스의 태도가 만족스럽지 못한 걸까. 그녀도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올라갔다.
“저는 허락을 받으려고 하는 거도, 사정을 구하려는 거도 아니에요. 그저 하라고 말할 뿐이지.”
“명령이란 거군요.”
“그런 거죠.”
“꽤나 당당하십니다. 뭐, 그런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을 좋은 삶을 살아오신 덕분이겠죠. 용병 출신인 저랑은 다르게 말입니다.”
“……그래서 대답은?”
“한데, 저 같은 놈들은 꼭 이런 꼴을 보면 신물, 아니 구역질이 나서 말입니다.”
전생에 이르기부터 지금까지.
설사 용병으로 굴러먹은 삶이라도 이런 대화는 언제고 좋지 못했다.
알량한 정의감은 아니었다. 힘이 없었다면 저 공작 부인의 말을 들어줘야 했을 테니까. 단 몇 년 전만 해도 무조건 들었을 거다.
지금은 다르다.
‘힘이 있지.’
공작 가문 전체를 상대하는 건 무리라도. 공작가 가주의 의견에 반발하는 자 정도는 상대할 힘이 있었다.
테스는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답했다.
“싫습니다. 의원으로서 내가 해야 할 건 치료니까.”
“이이익!”
테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밀실이 된 지금 어차피 막 나가도 상관없었다.
“잘못 들었다면 다시 말해 줄까? 싫다고.”
공작 부인의 얼굴이 붉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