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챕터 24.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귀족이 확실했다.
잘 다듬어진 외모. 그에 맞는 행동거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데도 잘도 영지에 몰래 들어왔군.’
느껴지는 힘은 거의 없는데도 그의 행동은 자신감이 차 있었다.
얼마 전에 이곳에 도착하였을 텐데. 그는 이 자리가 제 자리인 듯 자연스레 테스를 맞이했다.
“비스론 남작이라 합니다.”
“아시다시피 테스 남작입니다.”
“후후. 네. 처음 뵙고 보니, 들었던 거보다 더 젊어 보이시는군요.”
“동안이란 이야기를 종종 듣기는 합니다.”
“과연 그거뿐일까요? 경지가 오르면 젊어진다는 말이 있긴 하죠.”
“후음…….”
비스론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는 눈썰미가 좋음을 넘어 예리했다.
‘내 정보를 어디서 들은 거군. 정보 길드이려나.’
이런 자가 정보를 구할 곳은 훤했다. 정보 길드다. 그곳에서 테스에 관한 정보를 샀을 거다.
그는 단순히 정보를 사는 거만으로 만족지 않았다.
‘산 정보를 이용해서, 제 자신이 분석까지 하는 거네.’
경지에 관해서 슬쩍 찔러보는 거까지 보면, 이런 조심스런 만남을 한두 번 해 본 자가 아니었다.
능력 있는 자다.
과연 이런 자를 부리는 자가 누굴까.
“하핫. 이거 실례였을까요?”
“반쯤은 실례라고 해 두지요. 자신의 경지를 타인이 말하는 걸 좋아하는 마법사는 없으니까.”
“후음…… 명심합지요. 자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지요?”
“피차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은 없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는 테스. 그는 가슴 가득 저자를 보낸 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 호기심을 노리고 상대가 훅 들어왔다.
“그럼 우선, 제가 어디서 왔는지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저 북부에서 절 보내셔서 내려왔습니다.”
“북부라면?”
그의 장원 위로 테스론. 그 위로 앙스, 페넌이 이어진다. 그보다 더 위는 울픈 산맥. 사람이 있을 곳이 아녔다.
그럼 페넌인가.
말을 받는 테스의 목소리에 거부감이 실린다.
“내가 페너탄 기마대를 전멸시켜서 직접 찾아온 건가? 피값을 받으려고?”
“그깟 말박이 녀석들을 제가 신경 쓸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보다 더 북부에서 온 것을요.”
그도 아니었다.
페넌보다 북부. 울픈 산맥.
울픈 산맥은 사람이 살 수 없다. 영지 페넌만 해도 고작 울픈의 지류가 맞닿았을 뿐인데, 몬스터의 출몰이 잦지 않은가.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
“설마 브루니언 제국에서 온 건가?”
“정확히는 아르펠 공작께서 절 보내신 거지요.”
“……허.”
북부 브루니언 제국의 아르펠.
페넌 위 울픈의 지류를 넘어서면 아르펠 공작의 광대한 영역이 나왔다.
제국 사 대 공작 중 하나이며, 엘프의 피가 섞이었다는 설화가 들려오는 곳.
특이하게도 엘프 피가 섞였으면서도, 가주의 생은 짧은 가문.
손조차 귀하여 그 명맥을 간신히 잇는 곳이 아르펠이었다.
방계조차 귀하여 가문인 수가 적음에도, 그 힘을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은 그들이 가진 강함이었다.
그 힘은 그들이 말한 대로 북부의 피일 수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다른 어떤 비의가 있을 지도 몰랐다.
그는 그 힘을 통해서 제국에 수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영향력 중 일부는 테스가 속한, 카르소니아 왕국에도 흘러들어왔고. 꽤 많은 우호 귀족들을 데리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 왕국에 귀족위도 하나 받아 놓은 게 아르펠이었다.
‘제국 공작인 주제에 이곳 백작위도 미리 만들어 놨다고 들었으니, 본격적이긴 하지.’
귀족이란 족속이 꽤 여러 나라에 작위를 받는 건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가능만 하면 몇 개든 작위를 받아놓으려는 게 귀족이었으니까.
그러나 제국의 제후쯤 되면 왕국의 귀족 작위는 거부하는 게 당연한 터. 그런데도 아르펠은 여러 나라의 작위를 받아 놓았다.
‘그쯤 거대하니 내가 가문 이름을 아는 거긴 한데…….’
그런 아르펠이 사람을 보냈다라.
어느 쪽이든 테스가 듣기에 충분히 놀라운 이름이었다.
‘그자들이 갑자기 왜?’
테스가 알기로. 자신은 저들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으니까.
“내가 한 열 살만 어렸더라면, 이제 와 내 잃어버린 핏줄을 찾은 게 아닌가 싶은 상상도 하겠습니다만…… 그건 아니겠고.”
“후후. 농담도 과하시군요.”
“대체 아르펠에서 날 찾은 이유가 뭡니까?”
“병자가 있으니 치유사를 찾을 수밖에요.”
저들이 찾은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치료 의뢰라도 하는 건가.’
전생의 의선이던 시절에도 치료 의뢰는 다수 들어왔다.
오대세가, 구파일방에 마교에 황궁까지. 수많은 자가 그를 찾았고, 그때마다 그는 적절한 대가를 받고 치료를 했다.
무공, 재화, 땅, 권력, 권한…….
수많은 걸 대가로 받아냈다. 지금에 이르러 그가 수많은 무공과 비전을 아는 것도 그때 받은 대가 덕분이다.
이렇게 되면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결된 테스였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다시 말문을 여는 건 그였다.
“아아.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치료 의뢰라면 못 받을 것도 없죠. 그 의뢰자가 누구든 내겐 환자니까.”
“누구든 환자라…… 좋군요. 저희는 딱 하나만 치유해 주시면 됩니다.”
“하나라는 건?”
“프로스트 문. 그 병의 치유를 원합니다.”
프로스트 문?
‘이건 또 뭔 병이야?’
테스로선 처음 듣는 병의 이름이었다.
* * *
프로스트 문.
알고 보니 구음절맥의 다른 이름이었다.
‘허 참…… 누군 저주라 하고. 누군 병이라 하네. 하기는 보기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게 이 놈의 구음절맥이긴 하지.’
설명을 듣자 지녔던 의문이 풀렸다.
‘제자 녀석 치료한 정보를 길드에서 팔아넘겼군.’
하여간 장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정보길드다.
제자 프로스. 그를 치료하자마자 정보를 넘겼을 거다. 그걸 듣고 아르펠 공작은 사람을 급파했겠지.
구음절맥의 치료는 신관도 힘드니까.
“치료가 가능하시겠습니까?”
“몇 가지 준비만 확실히 된다면 가능합니다. 대가도 충분히 주어져야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치료가 가능한 건 나뿐이죠.”
“성녀님도 가능은 합니다.”
“아아. 성녀라…… 그쪽은 생각 못 했군요.”
비스론의 말대로 성녀가 나서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신의 섭리를 직접 이어 받았다는 성녀는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다. 구음절맥의 치료 또한 불가능하지만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이유가 그 치료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봐야 오지 못하면 소용이 없죠. 올 수 있었다면 진즉에 데려왔을 테니까. 안 그렇습니까?”
“……후. 아니라고는 못 하죠.”
하지만 제국과 성국의 사이는 예로부터 좋지 못한 건 유명한 이야기다.
온갖 악연과 원한으로 얽힌 두 나라. 그 둘이 환자 하나 치료하자고 화해를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쓸데없이 말을 길게 하지는 말죠, 우리. 제 출신을 알잖습니까. 저는 용병 출신이고, 제 몸값 하나는 기가 막히게 측정할 줄 압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돈입니까?”
“글쎄요. 돈은 충분히 넘치는지라.”
“그럼 돈도 아니군요.”
비스론 남작의 여유는 완전히 사라졌다. 얼굴이 어두워진다.
여유가 넘치는 쪽은 테스가 됐다.
“아르펠 공작님께 들은 언질이 있을 테니, 그거나 이야기해 주시죠?”
“이거 원…… 못 당하겠군요. 조금이라도 협상을 해내야 제가 공작님께 점수를 딸 텐데 말이죠.”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꿍꿍 감쳐뒀던 보따리를 푸는 건 비스론이었다.
“단승의 남작위를 전승으로. 덧붙여 그에 어울리는 영토를 선물하실 생각이신 듯합니다.”
“호오…….”
“그리고 남은 하나. 저도 모르는 선물 정도는 하나 준비하고 계신 듯하더군요.”
전승위에. 영토라.
‘꽤 힘을 쓸 생각인가 본데?’
이곳은 제국도 아닌 왕국. 백작위를 가지고 있다지만 명예직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영지와 작위를 주려면 꽤 많은 소모를 감당해야 할 터.
그런데도 치료를 하려 한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단 의미다.
‘나쁘지 않아.’
테스는 마음이 동한 걸 느꼈다.
“바로 받아들이죠.”
“오오! 시원스러우셔서 좋군요.”
계약이 성사됐다.
* * *
계약은 만들어졌으니, 이제 그를 실행해야 할 때.
‘오래 끌 필요가 없지.’
테스는 저가 필요한 걸 바로 요구했다.
“잠시 시간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치료를 위한 준비 때문입니까?”
“아니요.”
시간이었다.
환골탈태를 한 지금. 치료를 위한 준비는 필요 없었다.
‘공작가에 가면 재료야 넘쳐나겠지. 없으면 구해오라 하면 되는 거고.’
그가 필요한 건 다른 시간이다.
“당신을 데리고 울픈 산맥을 넘으려면, 꽤 많은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건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저희 측에서 준비하면 되니까요.”
“음?”
울픈 산맥. 그가 통과해야 할 곳은 지류라 하지만 쉬운 길은 아니었다. 특히, 비스론 남작 같은 자를 데려가는 덴 꽤 많은 준비를 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비스론의 표정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며칠 뒤 제가 찾아오면 알게 될 겁니다.”
“후음…….”
무슨 수를 쓸지는 몰라도, 안전한 이동 수단이 있다는 의미.
‘대체 뭘 쓰려고?’
테스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샘솟음을 느꼈다.
* * *
궁금증이 증폭되어 가던 며칠 뒤.
비스론 남작이 꽤 멋들어진 마차와 함께 찾아왔다. 그 옆에는 전에 없던 기사 여섯과 마법사까지 있었다.
‘다들 오러를 익혔어. 마법사는…… 최소 4클래스 이상인가.’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자들.
테스가 없다면, 이곳 장원 정도는 쉽게 쓸어버릴 수 있는 자들이 영지에 들어왔다.
이들을 이용해서 울픈 산맥을 넘으려는 건가.
약한 자들은 아니지만, 모든 변수를 처리할 정도의 강자들은 아녔다.
“여기에 타면 되는 겁니까?”
“귀한 분을 모시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타시죠.”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테스를 마차에 태웠다. 테스가 없이도, 아르펠 공작령으로 가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
“바로 출발합시다!”
테스가 타자마자 마차는 출발했다.
북문에서 출발한 마차는 어느 순간 방향을 틀었다. 서쪽을 향해서였다.
북서 방향.
그쪽 방향은 울픈 지류가 아니라 산맥 중심에 가까워진다. 지류도 아닌 산맥 자체를 통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터.
더 어려운 길로 가고 있었다.
‘대체 뭐지? 정체를 숨기고 움직여야 해서 돌아가는 건가. 도무지 짐작이 안 가는데.’
테스는 잠자코 지켜봤다.
이틀이 지나 삼 일째.
그들은 계속해 북서 방향을 향했다. 마법사의 버프 마법을 받은 마차는 끝없이 움직여, 꽤 많은 거리를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테스는 익숙한 나무 성벽을 봤다.
‘여기는? 음…… 레므나 장원?’
이전 평원 전투에서 옆을 지켰던 레므자 장원주.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레므나 장원이 눈에 보였다.
마차는 쉬지 않고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자의 방문임에도 성벽은 닫힐 줄을 몰랐다. 되레 레므나 장원주를 위시한 다른 장원 인물들이 마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설마…… 그건가? 허…….’
그쯤 되자 테스는 저들이 뭘 하려는지 슬슬 눈치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