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의선, 황제되신다-72화 (72/191)

제72화

챕터 22.

‘진짜 믿을 수 있나…….’

소문 하나를 믿고 움직여야 하는 처지라니. 60의 유민들을 이끌고 있던 콘버트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익어가는 겨울. 겨울이란 계절 외에 모든 게 시들어가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유랑이라니 한숨이 비어져 나오지 않음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우리 집은 어떻게 됐을까요?”

“다 타버렸겠지.”

“……돌아가겠죠?”

“그 머저리가 있던 곳에 왜 돌아가. 끝났어, 이미.”

갈 곳은 없다.

그가 속해 있던 영지 앙스는 완전히 초토화됐다. 그가 속해 있던 장원은 그중 가장 독하게 당했다.

‘머저리 같은 장원주 놈.’

장원주 때문이었다.

앙스 영주가 뭘 준다 했는지 몰라도. 그는 끝까지 항전을 택했다. 대체 뭘 준다 하기에 그리 선택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운은 좋았다.

정보를 미리 듣고 이만한 사람들이라도 이끌고 왔으니까.

그래도 문제가 없는 건 아녔다.

“토마스가 또 아프대요.”

“그 자식은 나설 때부터 아프다만…… 또 난리군.”

“약초꾼 한스 아저씨 말로는 오늘이 고비라는데요.”

“후우…… 지랄 맞군.”

겨울이 주는 한기는 독했다. 이 한기 속에서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차 환자들이 늘고 있었다. 어서 정착할 곳을 찾아야 했다.

어디를 가나 환대는커녕 박대를 당했다. 다른 장원에 발을 들이밀 수도 없었다.

거절당했으니까.

찬바람을 피하고자 억지로 들어서봐야, 다가드는 건 칼밖에 없을 터였다.

해서 움직여 온 게 이쪽이다.

테스 장원.

그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유민들을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게 벌써 몇 달 전의 이야기다.

‘여간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한데…….’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니.

소싯적 용병 노릇을 했던, 콘버트로선 믿기지도 않는 소리다. 그럼에도 그 하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안도, 희망도 없었으니까.

“오! 저긴가 봐요!”

“와…… 진짜 파여 있는데? 저게 다 해자라고?”

“성벽은……? 소문보다 더 두텁잖아!”

저 멀리 소문으로만 듣던 넓은 테스의 장원이 보여 왔다.

목적지가 가까이 보인다. 그러자 그가 이끌던 유민들이 없던 힘이라도 낸 듯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받아주기를…….’

이번은 제발 받아주기를 기원하며. 선두에 서 있던 콘버트는 제 발을 재촉했다.

점차 장원이 가까워져 갔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굳건히 닫혀 있던 해자 끝에 성문이 열렸다.

안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병사라니?

‘설마, 실패인가! 소문이 거짓이었어?’

환대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병사는 최악이다.

컨버트는 풀어져가던 긴장감을 옥좼다. 소리쳤다.

“젠장! 다들 튈 준비 해.”

“……저, 저리로 안 가고요!?”

“다 죽이자고 병사가 다가오잖아! 다들 튈 준비 해. 여기도 글렀어. 젠장!”

왜 하필 여길 선택했을까. 다른 곳에 갔어야 하는데. 아님 차라리 도시라도 갔어야 했다. 그럼 반이라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을 이끄는 자신이 잘못 선택을 해서다.

‘망할…….’

유민들이 방향을 돌리는 사이.

그는 되려 더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품에 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나라도 나서야지.’

알량한 책임감 때문은 아녔다.

그저, 잘못 선택했으니 대가를 받는 거였다. 자기 하나 죽어나가면,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던 젠스는 살지도 모를 일 아닌가.

‘발 빠른 놈이니 녀석 하나는 살리겠지…… 쯧.’

그는 결심을 하며 앞으로 한발 더 나갔다.

“오지 마! 우리는 그냥 물러날 테니까, 가게만 해 달라고! 건드리지 말고!”

미친 광인처럼 소리쳤다. 제발 아무런 일도 없기를 바라며. 저 빌어먹을 병사들의 창끝이 자신들에게 닿지만 않기만을 바라면서.

“오지 마! 오지 말라고!”

“…….”

그의 비명에도 병사들은 더 가까워져 왔다. 그러다 그 중간에서, 전혀 병사답지 않게 생긴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백은 좋은데 판단력은 안 좋군.”

“무, 무슨 판단! 안심시키고 다 죽이려고?”

“우리가 그대를 죽여서 뭣 한다고? 뒤나 보시오. 더 위험한 게 있으니까.”

컨버트는 뒤를 바라봤다.

-키이익!

“억!?”

코볼트 무리가 보였다.

굶주린 코볼트다. 이 추운 겨울, 유랑민은 저들에게 좋은 먹잇감인 터.

해자가 가까이 있지만, 굶주렸기에 무턱대고 이곳을 노리고 달려왔던 게 분명하다. 멍청했던 자신은 그걸 여태껏 몰랐던 거고!

앞은 병사, 뒤는 굶주린 코볼트.

“마, 망했다…….”

끝났다. 다 죽을 거다.

뒤에 있는 코볼트도 문제요. 설사 코볼트를 죽여도, 코볼트를 데려온 그들을 벌한답시고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컨버트는 힘이 푹 빠지는 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려 하는 그를 어느덧 다가온 그 자가 잡았다.

“망하지 않을 거요. 우리가, 아니 영주님이 그리 하게 만들 거니까.”

“…….”

무슨 소리지?

말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컨버트의 어깨를 잡고 다정히 말하던 그는 대차게 소리쳤다.

“뭣들 하나! 어서 가서 처리하지 않고!”

“명!”

그 목소리에 병사들이 반응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빨랐다.

순식간에 유민들을 따라잡은 병사는 그들을 제쳐 지나갔고. 코볼트와 조우했다.

-키이익!

때때로 굶주린 코볼트는 강력했다. 고작 장원의 병사들이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아니, 아니어야 했는데…….

푸우욱- 푹-

병사들이 창을 내지르는 족족 코볼트의 숨이 넘어갔다. 단 한 수. 한 번의 창질에 코볼트가 죽었다.

‘이게 말이 돼?’

고작해야 장원의 병사들이 보일 위력이 아니었다.

단 몇 분.

코볼트 무리가 절멸 당했다.

그 몇 분간 멍하니 학살을 지켜보던 컨버트. 그의 귀로 다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곳의 행정관정 제리코라 하는데, 그쪽은 이름이?”

“……커, 컨버트. 컨버트라 합니다.”

제리코였다. 그의 사람 좋은 목소리에 컨버트는 안심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뒤 이어지는 말에.

“오. 좋은 이름이군.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지 컨버트. 우리 장원에 들어오겠는가?”

“……네!”

“새 보금자리를 찾은 걸 환영하네.”

그는 자신의 도박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됐다! 살았어!’

드디어. 안착할 곳을 찾았다.

* * *

병사들이 코볼트 사체를 정리했다.

그 사이 제리코는 유민들을 이끌어갔다. 성 해자를 넘어가는 사이도, 제리코의 입은 쉬지 않았다.

“영주님은 공짜를 좋아하지 않으시지. 그러니, 그대들에게 공짜로 보금자리를 내주지는 않을 걸세.”

“……예상은 했습니다.”

당장 노예 낙인을 박아 넣지 않는 거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겠지. 해자로 둘러싸인 이 장원에 들어와서 공짜 밥을 내달랄 생각은 그도 없었다.

“그렇다고 착취를 원하시지도 않아. 그럴 분도 아니고.”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가만 지불하면 되네. 이곳에서 안전을 확보하게 된 대가.”

“저희는 지불할 게 없습니다. 보다시피 빈털터리잖습니까.”

유민이 달리 유랑을 하던가.

그의 말대로 그들이 지니고 있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식량도 다 떨어졌다. 언 땅을 파 뿌리를 캐먹지 않았다면 몇은 더 죽었겠지.

그런데 대가라. 불가능하다.

그런 그들을 보고 제리코는 고개를 저어댔다.

“이거 이해를 시켜 줘야겠구만. 당장 대가를 지불하란 게 아니네. 살 방도를 마련해 줄 터이니, 이 뒤에 사정이 되면 갚도록 하란 거지.”

“네?”

이어지는 제리코의 설명은 단순했다.

1. 유민은 안전이 확보된 곳에서 개척을 시작한다.

2. 마련해 준 자재로 살터를 확보할 것.

3. 음식은 제공되며, 추후 수확을 하면 그 일부를 갚는다.

간단하였으나, 컨버트에게 필요한 건 다 있었다.

“……거, 거저먹는 거 아닙니까, 이거?”

“푸흐흐. 그래 보이는가? 농지 개척을 하는 거도. 집을 지어내는 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닐 텐데?”

“전에 비하면 훨씬! 아주 훨씬 낫습니다!”

“그런가.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로군.”

어디 마음에 들기만 할 정도일까.

안전과 식량 확보가 된 다는 거만으로도, 전에 없던 영주에 대한 존경심이 듬뿍 생겨날 정도다.

그뿐이랴. 생각지 못한 기회도 있었다.

“능력만 된다면 모두가 농사만 지을 필요는 없네. 그건 재능 낭비니까.”

“그렇담…… 능력만 있으면 다른 직업도 가능하단 겁니까?”

“예를 들어 약초 지식이 있다면 약초꾼 무리에 넣어줄 걸세. 아, 특히 이건 영지에 가장 필요한 거 중 하나지.”

“오! 안 그래도 약초꾼이 있습니다.”

한스가 좋아할 소식이다.

“거, 좋군. 그 외에 다른 직업도 좋네. 치료사도 좋고. 초장이도 좋아. 뭐든 재주가 있음 말하게. 영주님께서 값을 치러 줄 테니.”

치료사는 없어도 초장이는 있었다.

‘다들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제 능력들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정착은 더 쉬워질 거다.

제리코가 설명을 하는 사이.

귀를 쫑긋하고 듣던 유민들은 어느새 장원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피곤할 텐데 나머지는 나중에 하지. 자자, 우선은 즐겨보라고.”

“무엇을…….”

“보면 알 걸세. 한센. 가서 도와줘.”

“옙!”

그 중심지에서 유랑민들에겐 천국과 다름없는 것들이 주어졌다.

굶주린 그들에게 죽이 만들어져 주어졌다.

“고, 고기가 들어있어!”

“우와!”

허여멀건 한 죽이 아녔다. 내용물이 알차게 들어간 죽이었다.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환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송됐다. 치료를 해 주기 위함이란 말을 들었다.

‘우리를 치료해 줘? 허…….’

치료라니.

찰과상만 잘못 도져도 죽어나가는 게 평민의 일상이다.

그런데 치료라.

상상도 못 한 일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내를 하던 게일이란 자가 다시 오면 놀라지나 말라며 잔뜩 허세를 부렸다. 다 치료돼서 쌩쌩하게 돌아올 거라던가.

신관이 있냐 물었는데, 그건 아니란다.

‘대체 뭔 소린지…….’

신관이 없는데 어떻게 치료를 한다는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치유돼 온다면 그걸로 환영할 일이었다.

남은 자들에게는 또 다른 곳이 안내 됐다.

“이건 뭡니까?”

“공용 목욕탕이란 곳일세. 영주님이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곳이지. 위생을 위해서야.”

“위생…… 모르겠군요. 그걸 신경 써야 하는 건지는…….”

당장 오늘 먹을 거도 없이 살아야 하는데 위생이 웬 말인가. 위생이란 말 자체가 그들에겐 생소했다.

그 반응을 보고도, 게일은 장담하고 있었다.

“쓰다 보면 알게 될 걸세. 나중엔 시키지 않아도 오게 될 거야.”

어떻게든 습관이 붙을 거라고.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거부할 도리는 없었다.

“후음…… 어쨌든 의무라니 들어가 씻으면 되는 거지요?”

“옳지. 그럼 되네! 거, 잘들 즐기라고.”

유랑민들이 처음 들어선 탕이란 곳은 뜨뜻했다. 귀족들이나 할 만한 호사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중에 작은 해프닝이 있긴 했다.

빨래를 하던 유랑민들이 관리자에게 혼나는 일이었다. 벌이라도 받을까 했는데, 다행히 주의로 끝이 났다.

그 뒤도 계속해 별천지의 일이 일어났다.

욕탕을 나서니 새로운 옷가지들이 주어졌다.

제리코가 사람을 시켜 가져다 둔 포대마다 곡식들이 있었다.

임시라지만 냉바람을 막아줄 숙소도 있었다.

‘대체 여기는…… 뭐지? 내가 죽어서 환상이라도 보는 건가.’

몇 시간 전. 죽을 각오를 하고 있던 콘버트로서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다. 여기가 내가 뼈를 묻을 곳이야.’

없던 집착이 생겨나고 있었다. 새로운 터전에 대한 집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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