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챕터 11.
무너진 적.
그중 누구도, 지쳐버린 테스의 앞길을 막는 자가 없었다.
아군조차도 그의 몸을 보면 슬금슬금 내빼기 바빴다. 전장에서 날뛰고 있던 그의 몸이 인상에 박힌 덕분이리라.
그런 찰나. 그를 찾아오는 자가 있었다.
“마검사인 건 알았지만…… 대체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그 위력은 무엇이고?”
“추격대를 구성했으면,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기사 이반이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온 그. 귀족다운 미소를 짓고서 그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용케도 날 본 거네. 그리고 찾아왔고.’
그의 태도는 레므나 장원주와 비슷했다. 전보다 공손히 테스를 대하고 있었다. 그가 지닌 힘의 격을 깨달은 덕분이다.
“그쯤이야 기사 에슬이 충분히 해 낼 터이지 않겠소. 안 그래도 공을 더 세울 필요가 없기도 하고.”
“공을 더 세울 필요가 없다라. 이반 님도 질투라도 받는가 보지요?”
“어디를 가든, 송곳은 견제를 받는 법이지요.”
“송곳이라…….”
오랜만에 보는 그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이전 공물 운행 시의 모습이 더 필사적이라 보일 정도.
그 이유가 테스는 짐작이 갔다.
‘이반이 테스론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는 소문이 돌더니…… 사실이었을지도.’
전에 없이 늘어난 이반의 넉살. 테스는 잘도 받아들였다.
“스스로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후후. 그리 보입니까? 하기야 스스로 금칠을 하기에 그쪽이 보인 위력은 어마어마하기는 했지요.”
“어렵사리 준비한 한 수였을 뿐입니다.”
“그런 거 치고는, 아직도 쌩쌩해 보이는군요. 저 장면은 아직도 무시무시하고.”
테스에게 답하며 이반은 한곳을 가리켰다. 그가 이끌던 좌익이 있던 곳이다.
테스는 그곳을 바라봤다.
혈흔. 육편 조각. 으깨진 시체…….
적을 처참하게 으깨어 놓은 광경. 기마대와 적 우익이 저 위에 핏빛으로 그득 자리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겁니다.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는 했지만 말이 많이 나오기는 할 거고.”
말이 나온 다라.
하위 귀족의 견제라든가 질시를 말하는 것이겠지.
전장에서 힘을 보여준 테스는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안 막아 주실 겁니까?”
“푸핫!”
그의 뻔뻔함에 이반이 거나하게 웃었다.
“그렇담 나한테 한번 빚진 겁니다?”
“빚이라기보단 작은 성의를 받았다 치지요.”
“허, 그게 성의라. 그래도 우선은 만족하도록 하죠. 대신 여러모로 이야기를 좀 나눠 봐야 할 거 같은데…….”
추격대가 오고 가고. 패잔병들이 고함치는 가운데서도, 이반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때 아니게 여러 가지를 물어 오며, 테스를 계속해 탐색해 왔다.
전장 중에서도 사교 행위라니. 그다운 일이었다.
하나, 테스는 이반과 대화보다도 그 뒤편이 더 신경이 쓰였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이반의 옆에 자리한 채, 테스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는 자.
야만인 비욘이었다.
올란과 얘기할 적 나왔던 과거의 동료 중 하나.
고작해야 네 번의 의뢰였다지만 하루 벌어먹고 사는 용병에게 있어 네 번의 의뢰 수행은 꽤 오랜 경험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비욘.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상당했다. 기운만 놓고 보면 흡사 테스와 비슷할 정도의 성장이 느껴진다.
‘무공을 익힌 건 분명 아닌데…… 이 녀석도 뭔 각성이라도 한 건가?’
야만인의 피를 각성한 건가. 온몸에 거대한 기운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해낸 것일까.
힘을 탐구하는 테스로선 그 연유라도 알아보고 싶었다.
‘과연 저 정도라면, 테스론의 표범이라 불릴 정도는 돼.’
그러기에 눈앞에 있는 이반보다 그녀가 더 궁금해졌다.
“후후. 그럼 약속한 겁니다? 나중에라도 언제고…….”
“아아.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회를 놓칠 필요가 있겠는가.
테스는 말을 붙여 오는 이반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면서. 한편으로 전음을 날렸다.
그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는 비욘을 향해서였다.
-저녁에라도 한번 보지.
-…….
비욘도 테스를 알아본 듯했다. 전장에서 보인 그의 힘이 궁금했던지, 또렷한 눈으로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전음이 들려오자마자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망설임은 없어 보였다.
‘성격은 여전하구만.’
잠깐의 합의.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녀는 약속을 지킬 터였다.
그 사이, 몇몇의 무리가 이반을 향해 다가왔다.
적은 아니었다. 테스론의 그리핀 상징을 달고 있었으니까.
상징을 달고 온 자들은 이반에게 작게 귓속말을 했다.
추격대. 전후 처리. 전비…….
몇몇 단어가 테스의 귀를 간질였다.
말을 다 들은 이반은 아쉬운 듯, 테스를 바라봤다.
“이거……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어쩔 수 없게 되었군요. 약속한 대로 나중에라도 분명 기회를 줄 거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내 꼭 기억할 겁니다.”
이반은 다시 만나자는 말을 몇 번이고 하더니.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그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여기까지 와서 시간을 낸 거 자체가 그로선 무리를 한 게 분명하다.
하기야 알 바인가.
테스는 떠나가는 기사 이반보다도 그 옆에 자리한, 비욘이 중했다.
궁금증이 계속해 샘솟는 존재였으니까.
테스는 이반과 함께 떠나는 비욘의 뒤통수를 향해서 전음을 재차 날렸다.
-기억해라. 밤이다.
이번에는 꼭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으니까.
* * *
전장이 정리되고 늦은 밤.
아쉽게도 그와 비욘과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를 찾는 선객이 있었다.
“저를 찾는다고요?”
“당장 준비를 하게. 명이시니까.”
“허…… 그리하죠.”
늦은 밤임에도 그를 찾는 자가 있었다.
테스는 금방 채비를 마치었고.
그를 찾아온 사자는 곧바로 그를 찾는 자를 향해 안내를 했다.
데프 백작.
북부의 잠든 사자라 불리는 그가 테스를 찾고 있었다.
* * *
전장에서 가장 거대한 막사.
데프 백작의 막사 안을 들어선, 테스. 그는 누가 소개하지 않았음에도 데프 백작이 누군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강하군.’
대마법사가 손수 만들어낸 듯, 아름답게 빚어진 갑옷. 그 안에 담겨 있는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자가 머리를 사자 갈기처럼 풀어 놓고 있었다.
그가 데프 백작이다.
“아아…… 왔군. 다들 먼저 들어가 있게나.”
“명!”
테스가 들어왔음을 느낀, 데프 백작.
그는 테스를 바라보며 찡그렸던 인상을 펴고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장을 다루던 거인의 손이 왔군.”
거인의 손이라.
‘누가 벌써 별명을 붙인 건가.’
중원이나 이 세계나 명예랍시고, 별명을 붙이는 자들이 많기는 했다. 그런 별명을 자신이 얻을 줄이야.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거인의 손. 거인을 지극히 혐오하는 신관들이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별명이었다.
‘하기는 신관이 무슨 상관이라고.’
얽힐 일도 없는 터기에, 테스는 별명을 듣고도 괘념치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기며 예를 올릴 뿐이었다.
“데프의 사자를 뵙습니다.”
“사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허명이지.”
허명이라 하기엔 데프 백작이 가진 기세는 강렬했다.
‘역시 다 안 읽히나.’
더 가까워짐으로써 테스는 그의 강렬함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유려한 갑옷 아래에 들어차 있는 그의 육체. 그 안에서 뻗어 나오는 힘은 강렬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깊은 근원.
그 안까지는 허락하지 않는 듯, 테스의 기감을 피해가고 있었다.
역시 강자.
이 세계의 백작이라 칭하기에 어울리는 힘이었다.
“후후. 귀족의 몸을 그리 뚫어져라 보는 건 예가 아니네만…….”
“아……!”
“뭐, 덕분에 나도 재밌는 구경을 했으니 이쯤은 넘어가지.”
탐색의 시간을 가벼이 깬 건, 데프 백작이었다.
그는 사자 갈기처럼 난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상황이 반전되었네. 저쪽이 페너탄 기병대를 끌어들였으니 아직 끝은 아니네만…… 흠…… 뭐 이런 건 별달리 신경을 안 쓰는 편이던가?”
“고작해야 일개 장원주가 알기엔 복잡한 일이죠.”
페너탄 기마대.
테스가 무너트린 그들 덕에 데프 백작으로선 골치가 아픈 듯 보였다.
단순히 이번 전쟁에 승리했다 해서 좋아할 처지가 아니란 소리.
‘상황이 복잡해졌나 보군.’
하기는 페너탄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적이다.
이번 일전을 통해서 전장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듯 보이는 백작. 그로선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겠지.
변수엔 변수로 부딪치는 것이 정석.
적이 페너탄을 끌어들였다면, 이쪽은 테스가 변수였다.
백작은 변수가 된 테스에게 짙은 눈빛을 보냈다. 그가 전장에 더 끼어들기를 원하는 걸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테스로선 더 깊이 끼어들길 원치 않았다.
“허허. 일개 장원주라니. 과연, 그런 일을 벌여 놓고도 그걸로 끝이 날 거 같은가?”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니 작게 맺음을 했을 뿐입니다.”
“그 맺음 덕분에, 득을 봤던 나로선 쉽게 넘길 일이 아니긴 하지.”
“…….”
다행히 데프 백작은 더는 끼어들기 싫다는 테스의 의도를 잘 알아들었다.
데프는 작게 혀를 차며,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쯧.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파지겠군. 하기는 내가 과욕을 부렸을지도. 그래도, 줄 건 줘야겠지. 자자, 이리로 와 보게.”
“더 가까이 말입니까?”
“그래. 자네 말대로라면 작은 맺음이라도 해 줬으니, 보상은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본래라면 안 될 일이나, 지금은 특수하니 넘길 만한 게 있으니까.”
테스를 가까이 끌어들인 데프 백작.
그는 큼지막한 꾸러미와 함께 테스로선 생각지도 못한 걸 같이 넘겨주었다.
그걸 본 테스의 눈이 놀람으로 가득 찬다.
“……이것은?”
“후후. 꽤 재밌는 것이지 않은가.”
놀란 테스. 그를 보며 데프 백작이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백작의 막사를 다시 나설 때까지도.
테스는 제 품에 담겨져 있는 것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식 임명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상황이 복잡해졌으니까.
일개 요식 행위를 생략하고. 데프 백작이 넘겨준 것에는 테스로서도 상상치 못한 게 끼어 있었으니까.
“허 참…….”
“다녀오신 거예요? 이게 다 뭐래요?”
“마나석. 최소 중하급은 되더구나.”
“와…….”
백작이 넘긴 꾸러미
그 안에는 수십 개의 마나석과 보석이 들어가 있었다.
이들만으로 족히 만 골드를 넘을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이런 물건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건네준 인장이 박힌 종이 하나다.
“아까부터 보시는 그게 뭐예요?”
“작위서다. 이걸 이런 식으로 받을 줄이야.”
“자, 작위요!?”
“그래. 남작 위에 명을 하다더구나. 허 참.”
작은 종이. 그 안에 문장.
데프 백작으로부터 얻은 남작위 작위서. 그 증명서가 그 손안에 들려 있었다.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 그의 백작이란 작위.
그의 권한에 따라 만들어진, 이 작위서는 왕의 허락이 없더라도 귀족으로 인증해 주는 증거였다.
이 작위서만으로 그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할 수 있는 터.
하위의 귀족일지라도 모을 수 있는 징발병의 수는 300이 넘으며. 그보다 넓은 영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뿐이랴.
다소의 희생이 들 수 있겠지만, 원하기만 한다면 자체적인 영지전을 벌이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몇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던 작위를 한 방에 얻은 셈이다. 전승이 아닌 단승이라지만, 그조차도 테스에겐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이리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장원이 아니라 전장을 뛸 걸 그랬나. 하기야, 장원에서 쌓은 힘이 없었으면 이리 될 수도 없었을 테니. 결국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군.’
이 한 방이 테스로선 얼떨떨하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