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챕터 5.
장원 주변 몬스터를 학살하던 당시.
레므나 장원주는 가장 빠르게 달려온 자 중 하나였다.
‘그러곤 가장 빠르게 내뺐지.’
떠돌이 오크를 학살할 때였나.
테스가 오크 대가리를 쪼개던 모습을 보곤 그는 곧바로 자리를 내뺐다.
재밌는 건 얼마 뒤다.
사람을 시켜 작은 물건을 하나 보냈다. 손바닥만 한 목함에 담겨있는 건 하급의 마나석이었다.
고작해야 30골드도 되지 않는 물건.
용병에겐 횡재라 할 만한 거지만 당시 테스로선 그리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다. 실험을 위해 소비하는 마나석만 해도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그 행동이 특이하여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별거 아닌 선물을 하곤, 대단한 선물이나 한 거처럼 친한 척하더니…… 이번에도 비슷한 거 같죠?”
“그때, 겨우 찾아왔다가 문전박대당한 건 기억도 못 하나 본데.”
“저리 반갑게 손을 흔드는 걸 보면, 확실한데요?”
“……허, 참. 뻔뻔한데, 특이하게 밉상은 아니란 말이지.”
“저도 그게 신기하네요.”
에나와 테스. 둘의 대화가 얼핏 들릴 법한데도, 레므나 장원주는 사람 좋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용병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더니. 그게 사실이긴 한가?’
비굴하나 사근사근한 미소. 테스로서는 익숙한 미소였다.
“어이쿠.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이거, 겨우 발을 맞췄습니다그려. 제가 운이 좋지요? 하하.”
역시 일부러 발을 맞춘 거였나.
하기야, 가까운 장원이라도 그 거리가 반나절은 됐다. 비슷하게 거리를 맞추려면 저쪽에서도 꽤 서둘러야 했을 거다.
문제는 그 이유다.
귀족 축에도 못 드는 게 장원주. 그런 장원주 자리라도 평민에겐 쉽지 않은 자리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평민 출신인 레므나 장원주도 쉽게 장원주 자리를 얻은 건 아닐 거란 소리. 그런 그가, 굳이 따라 온다는 건 이유가 있을 터였다.
테스는 돌리는 법 없이 물었다.
“대체 왜 발을 맞추려고 한 거요?”
“허허. 뻔한 이유지 않겠습니까. 살고 싶어서지요.”
“으음?”
“그게 제 진심입니다. 흐흐.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시잖습니까?”
아무래도 이자. 뭔가 아는 게 있는 듯싶었다.
* * *
정보를 대가로 살려주기를 바라는 걸까.
‘가진 무력도 약한데 어떻게 장원주가 됐나 했더니…… 주변 보는 시야가 좋은 거네.’
한번 입이 트이기 시작한 레므나 장원주는 걸게 말을 이어갔다.
그가 가져다주는 정보는 하나같이 쓸모가 있었다.
“그러니까 50명씩 장원민을 징발해 가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아무렴요! 거, 그러다 장원이 거덜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징발령은 50명이었지 않나.”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50명을 안 데려가면 어떻게 하려고?”
“히야. 돈이 있잖습니까, 돈이. 전쟁 자금 지원이라는 명목이 있습죠.”
“……하. 그런 거였나.”
방금 전까지. 테스가 고민하던 징발령에 대한 고민을 속 시원히 해결해 줬다.
‘결국 돈이었네.’
이번 일. 징발병 50명을 동원해 온 테스가 순진한 거였다.
대다수의 장원주들은 병사를 대신해 돈을 준비해 왔단다.
한 병사당 8골드 정도.
“비싸군.”
“장원 입장에서는 팍 돈이 뜯기는 거지만서도…… 뭐 그래도 장원민 죽는 거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도 맞는 말이기도 하고.”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이를 대신하여 바치면 된단다. 그 뒤 적당한 행정 처리로 가짜 병사를 만들어 낸다나.
눈에 훤히 보이는 수지만, 그게 또 먹힌다니.
“다들 눈이 삔 건가?”
“눈이 삔 게 아니라 셈이 빠른 거지요. 어차피 징발병 수준이라 해야 그게 그거 아닙니까. 적당히 돈을 받고 용병 고용이 더 나은 거지요.”
“허…….”
그들 사이에 셈법이 있는 덕분이다.
“용병을 굳이 고용 안 해도 그네들은 상관없을 겁니다. 그간 나간 비용도 꽤 채울 수 있는 거니까요.”
“재미있군.”
일종의 귀족. 혹은 귀족의 끄트머리에 줄을 댄 장원주들이나 할 법한 셈법.
용병이나 의선으로 굴렀던 테스로선 이러한 셈법들을 몰랐다. 여태 알 수 있을 방법도 없었다.
그 방법을 눈치 빠른 레므나 장원주가 채워 주고 있었다.
그는 징발병을 돈으로 대신할 수 있는 방법 외에 적당히 세금을 후려칠 수 있을 방안들도 알려줬다.
‘재밌네.’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는 테스로선 티끌만 한 팁.
하지만 입담 좋은 레므나 장원주를 통해 듣다 보니 꽤 흥미가 생겼다.
그는 징발병이나 장원을 돌리는 방식, 장원주 간에 정보를 돌리는 방식도 한참 설명을 해댔다.
그러면서 테스의 병사들 옆에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뻔뻔하지만, 이야기값이라고 하면 나쁘지 않긴 했다.
‘더 이야기할 게 없나.’
문제는 이 말 많은 장원주의 이야기보따리도 끝을 보인다는 거였다.
이틀쯤 지나니, 재밌게 듣던 테스는 슬슬 흥미가 떨어졌다. 그가 흥미가 떨어져 가는 게 보인 걸까.
레므나가 슬슬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제가 살기 위해 붙는다는 이야기를 한 건 기억하시죠?”
“들었지. 이쪽만 50명을 동원했으니, 그 옆에 붙어서 살 방도를 높이겠다는 거 아닌가.”
제가 붙은 이유. 그에 관한 근거를 슬슬 불어대기 시작했다.
“흐흐. 그것도 맞습니다만…… 아무래도 이 전쟁이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고?”
“예. 이번 거 완전한 전면전은 물론이고. 듣기로, 아예 끝을 볼 기셉니다. 데프 백작이 이 한 번에 끝내려 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평상시 전투 양상과는 다르다는 건가.
‘이러면, 주의를 할 필요가 있겠는데.’
테스가 가진 지난 경험이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단 이야기다. 이건 좋지 못 하다. 테스는 정보를 더 얻으려 물었다.
“데프 백작이 굳이 무리를 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
“허어이…… 거, 이 전쟁의 이유 못 들으셨습니까?”
“앙스와 휘슬의 해묵은 원한. 아닌가?”
“허어…… 참. 이리 주변 보는 눈이 어두우셔야…….”
장원주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쳐댔다.
그러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테스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테스는 그가 뭘 하나 두고 보잔 생각으로 그를 가만 두고보자니, 그가 작은 한마디를 던졌다.
“……새로운 광산입니다! 무려 보석 광산!”
테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제 좀 알겠군.’
짧았어야 할 영지전이다.
그 영지전이 길게도 이어졌다.
얻는 바도 없이 돈만 잡아먹는 전쟁을 왜 이리 길게 이어가나 싶었는데, 웬걸. 광산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전비로 쓴 만큼 따겠다는 거로구만.’
전쟁을 벌이고. 그 결과 광산을 집어 먹겠다는 거다.
“듣기로 앙스와 휘슬이 처음엔 조용히 처리했답니다. 그러다 테스론이 뒤늦게 알고 낀 거지요.”
“뒤늦어서야 쉽진 않았을 건데?”
“그래서, 잠자는 사자 데프를 끌어들인 거지요. 뭘 줬는지는 모르는데…… 꽤 귀한 걸로 꼬셨답니다.”
“공물이로군.”
역시 그 공물. 심상치 않은 물건이었던 게 분명하다.
‘전쟁에 끌어들일 만한 물건이라…… 무리를 해서라도 뭔지 알아볼 걸 그랬나.’
테스로서는 공물에 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 하지만 당장 알아낼 방도는 없었다.
아쉽게도 장원주도 그 정체까지는 모른 듯했다.
“오오. 그거는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겉은 선물이라지만, 사실 공물이었습죠. 그 외에 꽤 많은 사람이 오고갔답니다. 서로 조율을 했겠죠.”
“누가 광산을 운영하고, 누가 판매를 할지겠군.”
“바로 그겁니다!”
다만 그 후일담은 잘 알았다. 아니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테스론이 운영을, 데프가 판매를 할 겁니다.”
“그럼 휘슬과 앙스는?”
“이번에 저희가 상대해야 할 자가 그 둘의 연합군이죠.”
“허…….”
막장이었다.
서로 적대하던 앙스와 휘슬.
대체 둘이 언제 편을 맺은 것이며. 휘슬을 돕겠다고 나선 테스론은 대체 언제 배신을 한 거란 말인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족보를 찾아보면 꼬일 대로 꼬여 있고. 원한을 살피면 부부 사이에도 있는 게 귀족가라지만.
상상치 못한 전개가 되어 있음에 테스는 정신이 멍해짐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멍한 정신은 평원에 도착해서도 길게 이어졌다.
“……이러고 이길 생각이라고?”
“허허. 왜 그런 짜게 식은 표정을 지으십니까. 이것들 좀 보십쇼. 강한 정병들이지 않습니까!”
아니,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의 예상보다도 더 막장이었으니까.
‘어째, 하나같이 제대로 된 부대가 없다. 대규모 전투면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허…….’
레프 평원까지 오고가는 병사들을 수없이 봤다.
장원의 징발병들이었다.
그들의 수준이야 이미 여러 차례 보았고. 그들이 그리 병사들을 구성하는 이유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터.
여기까지는 그도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이 평원의 중심이 될 데프 백작과 테스론 자작의 병사와 용병들이었다.
‘……수준이 다 거기서 거기군. 다 수준이 낮아.’
어디 하나 제대로 무장을 한 자들이 적었다.
삐쩍 굶어 있는 것이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듯 보였다.
기사와 그 종자들의 무장은 그나마 상태가 나았다. 검은 잘 길들여져 있고 군마의 상태도 건강해 보였으니까.
문제는 그 수가 소수라는 데 있었다.
결국 소수를 제외하면 장원의 징발병들과 비교해서 조금 나을 뿐이다.
‘이 세계 전쟁이 막장인 건 알았다만…… 이건 예상을 뛰어넘잖아.’
그나마 봐줄 만한 건 그 수였다.
곳곳에서 징발을 해 오고. 주변 용병들을 싸그리 긁어모아 와서 만들었을 그 수는 수천은 돼 보였다.
“대략적으로…… 8천쯤 되는군.”
“그걸 다 세어 보셨습니까?”
“대충 느끼면 알게 되네.”
“허…….”
숫자를 느낌에 놀란 장원주가 기함을 토했다.
테스는 그를 상관치 않고 계속해 기감을 발휘하여 숫자를 세었다.
‘정확히 8120명인가. 문제는 반대편인가…….’
느껴지기로 반대편의 수는 7000명 정도였다.
수는 적었지만, 저들은 이번 일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듯했다. 느껴지는 기세도 높고 병사의 상태도 미묘하게 저쪽이 더 강하였다.
‘이건 좋지 못한데.’
아무리 전쟁을 숫자로 한다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달랐다.
아군이 1000명이나 수가 더 많다지만, 실제 전쟁에 들어가면 그 차이가 좁혀질지도 몰랐다.
하기야 휘슬과 앙스로선 독기를 품고 있을 거다.
둘이서 나눠 먹든 지지고 볶아 한쪽이 먹든 간에 저들끼리 결정할 광산 문제였다.
그걸 테스론과 데프가 끼어들었으니.
독기를 품어서 전력을 다하는 게 그들 입장에선 당연했다.
문제는 저들을 테스가 상대해야 한다는 건데.
‘회의가 시작되면 무리해서라도 한마디 해 봐야 하나?’
죽지는 않겠다만, 피해를 받고 싶지 않은 그로선 작게 의견이라도 낼 생각이었다.
그는 복잡한 내심을 꾹 참고 회의 시간을 기다렸다.
“영지전 회의다! 자격을 갖춘 자들은 모두 영지전 회의에 참여하도록!”
약속의 시간이 되자 벌어지는 영지전 회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 회의에 참여하고자 테스가 나섰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장원주들에게는 자격이 없습니다.”
“뭐?”
“남작 위 이상의 분들만 참여가 가능합니다. 모쪼록, 뒤로 가서 대기를 해 주시기를.”
징병해 오라는 명을 해 놓고. 참가 자격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하, 참…… X불 놈들이…… 이젠 어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