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챕터 4.
주변 영지의 귀족을 건드리는 것과 직속의 귀족을 건드리는 건 이야기가 다른 법이었다.
막 나가는 테스라지만, 아주 최소한의 선은 지킬 줄을 알았다.
테스는 검을 허리춤에 다시 차고, 오줌을 지려 버린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 작은 해프닝이 있었군. 그렇지 않나?”
“크으읍……. 큽. 마, 맞습니다.”
기사는 막 돼먹은 놈이지만, 다행히 눈치는 있었다.
작은 해프닝이라고 하기엔 말도 안 되는 상황.
주변이 온통 난장판이 되었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공포에 질린 용병들이 가득했지만 상관없었다.
저들을 이끄는 기사가 해프닝이라고 말하면 해프닝인 것이었다.
“…….”
“…….”
강자인 테스에게 따질 힘은 더더욱 없으니.
촉수에게 풀려난 용병들은 슬쩍 검을 집어넣으며 침묵을 지키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이고, 폭력에 가까운 우김!
하지만 그걸 따지고 드는 자는 없었다.
되레 기사는 전보다 고개를 더 조아리고 있었다. 힘의 논리에 완전히 사로잡힌 태도였다.
“잠시 이야기 좀 해야 할 거 같은데?”
“다, 당연한 이야깁니다.”
“우선 네놈들이 왜 여기를 왔는지부터 설명해 봐.”
“그것이…….”
* * *
걸걸하게 입을 놀리던 기사는 사라졌다.
지금에 와선 그 누구보다 공손하게 그는 설명을 했다.
데프 백작의 기사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
징발령!
그 휘하에 있는 장원들에 일제히 징발령을 내렸다. 장원에 허락된 병사들의 수가 50명까지이니 그 수를 전부 데려오라고 했단다.
혹시나 징발령에 응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때는 즉결 처형하라는 명까지 내렸단다.
그들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장원주는 데프 백작에게 장원을 받음으로써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의 아래에 있음으로써 장원을 다스릴 권리였다.
권리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르는 법.
권리를 부여한 데프 백작의 요청 시, 언제라도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책임이 테스에겐 있었다.
그제야 테스는 저 기사가 그토록 거만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징발에 응하지 않을 경우 즉결 처형이다.
즉결 처형의 권리를 부여받은 기사가 원하기만 하면 장원 하나 끝장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명분이야 징병에 응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될 뿐이다.
설사 응했어도 그리 우기면 될 뿐이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작은 장원일지라도 쌓은 재화가 있는 법. 그 재화를 적당히 챙기기만 하면 일개 기사가 얻지 못할 많은 이득을 얻을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쉽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걸 막을 자는 없었다.
옆에서 덜덜 떨고 있는 용병들도 같은 생각으로 무기들을 준비하고 왔었을 거다. 미리 장전된 석궁이 그 증거다.
야만적인 상황이지만, 이해 못 할 건 없었다.
다만 힘이 없었다면 역으로 당할 수 있었던 테스로선 입맛이 쓸 뿐이다.
‘쯧. 죽여 버렸으면 일이 복잡하게 돌아갔겠어.’
저자를 죽이지 못하는 것도 아쉬울 따름이고.
어쨌거나 징발령에 대해선 이해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용병을 고용하고 상비병들만 돌려 가면서 전쟁을 수행하던 데프가 징발을 했다라…….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보통 장원 수준의 징발까지는 전력전을 의미하는 터.
이 이야기를 달리 보자면.
‘데프 백작이 밀리고 있단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크게 한 방 던져서 영지전을 끝내겠단 의미이겠군.’
일개 용병이던 테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영지전. 그 영지전의 끝이 슬슬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한 테스. 그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이번엔 많지 않았다.
“징병에 응한다고 전하도록.”
“……넵!”
아무래도 오랜만에 영지 바깥으로 나서야 할 때가 온 듯했다.
* * *
작은 해프닝(?)을 무사히 넘긴 테스는 곧바로 준비에 착수했다.
“몇 명이나 준비해야 할까요?”
“오십을 딱 채워야겠지. 많을수록 생존율은 더 올라갈 테니까.”
일반 장원처럼 장원민들 사이에서 따로 징병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는 노예병들이 있었으니까.
신병과 방어를 위한 최소 병사들을 제외해도 50명은 충분히 동원하고 남았다.
“테론, 내가 없는 사이 자네가 방비를 맡는 걸로 하지. 게일과는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고.”
“명 받잡겠습니다!”
“좋아.”
테론의 양가창법이 오성에 이르고 있는 상태다.
그가 있으면 장원의 방비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새로 구성해야 하는 징병군.
“무구를 어느 정도 수준에 맞출까요?”
“허접하게 맞춰서야 우리만 손해인데. 그렇다고 모든 전력을 다 보이자니 그도 좀 그렇고. 흐음…….”
너무 튀어서도, 너무 약해서도 곤란하다.
약하면 다른 장원들에게 무시를 당할 터이고 너무 충실히 무장을 시키면 상위 귀족들의 눈에 들 수도 있었다.
보통의 하위 귀족이라면 상위 귀족의 눈에 드는 게 소원이겠지만.
‘나로선 귀찮을 뿐이야.’
테스로서는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규병 수준 정도가 좋지 않을까요?”
“우선 그 정도로 맞추도록 하자고. 혹시 모를 일은 내가 나서 처리하면 되겠지.”
그러기에 테스는 딱 정규병 수준의 무장을 갖추도록 지시했다.
에나는 그런 테스의 말을 따르는 한편, 불안해했다.
“근데……. 이 정도 수준으로 될까요? 다들 실전을 겪기는 했지만……. 어째 불안하네요.”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전쟁이 돌아가는 방식 자체가 생각보다 간단하거든.”
“간단하다고요?”
“그래. 아주 조악하다고 할 정도지. 이쪽도 대규모는 처음 보기는 한다만, 비슷하게 돌아갈 거다.”
테스의 말대로다.
타국끼리 전쟁을 벌이는 전력전은 이야기가 다르다만, 영지의 귀족끼리 벌이는 영지전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높이지 않는다고 보는 게 무방했다.
‘적당히 명분을 잡아서 치고받고, 그 가운데서 이득을 얻는 게 그들 일상이니까. 그 사이에서 뒈지는 건 병사나 용병인 거고.’
전쟁의 흐름 자체는 단순했다.
명분이야 만들면 되고 서로 선전포고를 한다. 그 뒤에 평야나 전장에서 모여서 싸움을 벌이는 게 기본이었다.
오죽하면 시간까지 정하여 싸우고 밤이 되면 전쟁을 그만두고 서로 조심스레 후퇴를 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다.
‘중원의 군주들이 봤으면, 거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짓거리들이라고 욕했겠다만…….’
이게 이 세계 영지전의 기본 룰이었다.
이걸 어기면 귀족 세계에서 욕을 처먹는 건 기본이고, 품위나 명예 따위가 없다면서 깎아내리는 자들도 수두룩했다.
굉장히 어리석어 보이는 전쟁이지만.
“대체 왜 그렇게 하는 건데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영지전을 벌인 귀족은 죽지 않잖나. 제 목숨은 소중하다 이거겠지.”
“……웃기는 짓들이네요.”
귀족 입장에선 이만한 놀이도 또 없었다.
어지간해선 목숨을 잃지 않는 전쟁.
그만한 유희가 그들에게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심심찮게 벌어지는 게 영지전이고. 금방 수습되다가도 또 벌어지는 게 영지전이었다. 다만.
‘이번은 좀 이상하단 말이지. 데프 백작이 징발령까지 내린 정도면……. 뭔가 큰 게 걸려 있는 건 분명해. 그럼 좀 다른 식으로 돌아가려나?’
길게 이어지고 있는 지금의 영지전이 수상할 따름이었다.
워낙 수상쩍은 영지전이기에 최대한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만, 징발령까지 내려진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
테스는 금방 채비를 마쳤고.
“그렇다면 가자.”
“옙!”
“출병이다!”
50명의 징발병을 꽉 채워 미리 약속되어 있는 평원을 향해서 쏜살같이 움직였다.
* * *
평원을 향해 움직이는 테스의 행렬.
주변의 장원들도 전부 징발령에 동원됐을 와중에 이 자리에서 날뛰고 있을 도적들은 없었다.
“평화롭네요. 폭풍 속 고요나 다름없지만요.”
“며칠 못 갈 평화일 거다. 앞으로 3일. 남은 평화니 편히 즐기도록 해.”
“3일이라. 그때부터는 진짜 전쟁이군요.”
“그런 거지.”
전쟁터로 예정된 레프 평원.
사흘 동안 달려온 지금. 그곳까지 닿는 데 남은 시간이 3일이다.
이동하는 사이,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장원인들을 보았다. 징발병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들을 봤다는 소리다.
오가는 행렬의 수는 테스의 예상 이상으로 많았다. 문제는 그 구성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이런 부분에 있어선……. 역시 경험이 부족해.’
징발병 50명을 꽉 채워 온 테스. 그에 비해 다른 장원의 병사들의 수는 적었다.
장원주들은 징발병 수를 꽉 채워 오지 않았다.
지나가다 보이는 병사들의 수를 보면 많아야 30명 정도. 아직까지 50명을 꽉 채워 온 건 테스가 유일했다.
‘수도 문제다만, 그 내용물도 영 처진단 말이지.’
수준도 낮았다.
정규병처럼 무구를 갖춘 자들도 적었고, 제대로 된 훈련은커녕 제 손에 쥐어진 창대를 버거워하는 자들도 다수였다.
지나갈 때 보면, 덜덜 이를 떨며 두려움에 잡아먹힌 자도 넘쳤다. 사기 자체도 낮다는 의미.
테스의 군대와 비교할 거 없이 엉망이다.
이쯤 되자 테스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징발령은 분명 오십일 텐데. 그 기사 놈……. 날 제대로 엿 먹인 건가.’
그 거만하던 징발 기사가 순간적으로 거짓을 고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작은 장원에 50명을 동원하면 망할 테니 징발 수를 부풀렸다거나 한 게 아닌가 하는 추론까지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의 기감을 간질이는 자들이 있었다.
‘저들도 징발병인가?’
저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무리들. 여태까지 봐 왔던 징발병 무리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문제는 그 방향.
“저자들, 이쪽을 향해서 오고 있는 거 같지 않아요?”
“그리 보이는구나. 이거 이상한데.”
징발병으로 보이는 저들. 테스의 군대를 보자마자 속도를 더 끌어올려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속도를 끌어올리는 일단의 무리들 가운데, 가장 앞.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테스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어 그 정체를 파악했다.
“저자는…… 레므나의 장원주?”
“대체 이리로 왜 오는 걸까요?”
레므나. 테스의 장원과 같이 외곽에 있는 장원들 중 하나. 특별한 거라곤 장원 대리를 대신하여 장원주가 직접 장원을 운영한다는 정도.
그 특색 없는 장원의 장원주가 계속해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테스 님!”
서로 얼굴을 알아볼 만큼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전에 없던 환대를 하며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알던 사이예요?”
“그럴 리가.”
“근데 대체 왜 저럴까요?”
“금방 알 수 있겠지.”
테스는 영문을 모르는 채로 레므나 장원주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