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챕터 2.
스스로 움직이는 장원민들.
그들은 분주해졌다.
“장원 역사상 가장 성대한 걸로 준비해 보자.”
“당연한 이야기를!”
분주한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수확제.
매년 있어 온 수확제였지만, 이번만은 전과 달리 특별했다.
이전에는 없던 대풍년이었으니까!
이후에 내야 할 세금을 제외하고도, 그들의 손에 쥐어진 곡식들은 많았다.
작은 알곡들 정도가 아니었다.
대풍년 덕에 그들이 지닌 곡식의 상급의 것들이 되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법이었다.
“고기는? 전에 그레놀 상단에서 사 놓은 거 있지 않아?”
“이미 꺼내 두고 있었어. 제대로 쪄 봐.”
“찌기만 해서야 되나. 굽기도 해 보고. 그 뭐냐, 장원주님이 좋아한다는 음식들도 준비해 보라고.”
그들은 닫았던 창고 문을 스스로 열었다.
아낌없이 자신들이 가져온 재료들을 소비했고. 집에서 비전으로만 전해지는 조리법들을 서로 공유하였다.
모두가 일심동체가 돼 움직였다. 그렇게 준비된 수확제였다.
준비한 요리들이 테이블에 산처럼 쌓였다.
테이블 주변은 그들의 열기를 밤새 달궈 줄 모닥불이 차지했다.
대수확제를 위해서 만든 자리.
축제의 가장 상석에는 그들 스스로가 모시고자 한 테스가 자리해 있었다.
완벽한 축제였다.
상석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테스.
그로서도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성대한 축제였다.
“오. 이 정도는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이게 다 테스 님 덕분이죠. 다들 신이 난 거, 보여요?”
-재밌구나. 다들 기운이 넘쳐. 특히 물의 기운도. 후후, 전에 없던 재밌는 광경이야.
가장 높은 상석에서 움직이는 아래의 그들을 바라보는 건 놀랄 만한 즐거움들이었다.
웃음을 띤 채 무거운 요리를 나르고.
요리를 나르는 아낙네에게 다가가 도와주면 웃음이 전염됐다.
그들 곁을 지나가는 아이들은 모형 검을 들고서 용사 흉내를 내고 있었고. 나이 먹은 자들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듯, 한참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간간이 나서, 축제의 중심을 잡아 주었다.
‘좋다…….’
좋은 광경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인데.’
테스 자신은 단지 제 영역을 지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움직였던 나날이었다.
그 결과가 그가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그려지고 있었다.
장원민들의 행복이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보았음에 테스도 가슴 깊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기심이 낳은 행복이라. 이 또한 재미있는 결과야.’
하나의 재미였다.
지금까지 그가 움직인 건 자신만을 위한 개인적인 이유.
하지만, 그 파급 효과는 장원민 전체에게 미쳤다.
그의 움직임 하나, 손짓 하나가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파급 효과는 너무나도 컸다. 그 결과가 눈앞의 축제다.
한편으로 전능감이 느껴졌다.
‘귀족 놈들이 왜 지들이 신이나 된 듯 행동하는지 이제 알겠네.’
그 움직임 하나에 많은 게 반응하고 그 결과물들이 이리 크니까.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에게 긍정적 변화를 일으켰음에 행복을 느꼈다. 가슴 아래부터 벅차오르는 뿌듯함이 있었다.
테스는 장원민들이 마련해 준 술 한 잔을 들어 마셨다.
“좋다.”
“……저도요. 뿌듯하네요.”
그 옆에 자리한 에나도 같이 술잔을 기울였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술로 목을 적시는 걸로 충분했다.
장원민들이 마련해 준 성대한 안주들은 필요조차 없었다.
상석 아래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기뻐하는 장원민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배가 불러 왔으니까.
아침부터 시작한 왁자지껄한 수확제는 해가 내려앉은 밤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소란스러운 밤이 흘러갔다.
* * *
대수확제는 단순히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생명들이 잉태됐구나.
“그걸 느끼나?”
-생명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물이 있으니까. 괜히 우리의 속성에 생명이 있는 게 아니지.
“역시 신기해. 그건 신선들도 가지지 못한 속성들인데 말이야.”
-신선?
“그런 게 있다.”
밤새 새로운 생명들이 잉태되었다.
아주 작아 느끼기도 힘든 것들을 물의 정령은 빠지지 않고 느끼었다.
새로운 생명들이 잉태돼 움직이는 것. 활력. 즐거움.
-재밌구나. 재밌어.
여타 다른 영지들에서는 보기 힘든 그 광경을 보며 물의 정령은 진심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가는 영지민들의 삶이 보였다.
“이 경험들이 그들에게 단합을 가져다주겠지. 인간이란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법이니까.”
-너도 그런 인간이지 않느냐? 보아하니, 어젯밤 느끼는 게 많은 듯하던데?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나 또한 인간이니까.”
-쉬운 인정이구나. 그 또한 기묘한 태도이기도 하고.
“나 자체가 기묘한 상태이니까.”
그 삶 속에 폭 들어가 있음을 느꼈던 테스다.
각성을 하고 의선의 기억에 영향을 받아 가며 점차 기묘해져 가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그로서도 대수확제의 기억은 강렬했다.
점차 기묘해지고 변질되어 가는 정신을 잠시나마 잡아 주는 듯하다고 할까.
거기서 테스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우화등선 하기 전에 계속해서 인간성이 기묘해지지 않으려면……. 이런 기분을 자주 느껴야 할지도.’
기묘하게 변해 가는 상태도 좋으나, 그도 결국 인간.
계속해 변해 가는 정신을 그대로 두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랐다.
우화등선도 전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되지.’
그리되어선 전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결국 이 정신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살아야 할 거야.’
새로운 인연을 맺거나 그 인연을 더욱 깊이 만들어 가는 게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연을 꼭 인간이라는 개체하고만 맺을 필요는 없으니.
-전에 이야기한 계약에 대해서 대답을 듣지 못하였는데?
“연장 말이지?”
-그래. 계약의 연장. 본래라면 이 수확기 이후로 떠나야 했으나……. 꽤 재미있지 않느냐. 너도. 이 영역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고 있어. 우선은 올해까지는 더 연장을 해 볼까?”
-좋지. 그사이, 또 새로운 경험을 한다면 더 많은 성장을 할 테니까.
“다만 내 개인 시간은 충분히 보장을 해 주라고.”
-후후, 그건 나중에 또 이야기해 보자꾸나.
“……쯧.”
급작스럽게 눌러앉은 물의 정령과 계속해 인연을 쌓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이야기일 터였다.
좋은 변화. 급속한 성장. 거기서 오는 행복.
장원의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번영만이 남은 듯 보이는 이때.
‘뭐지?’
그의 기감을 간질이는 새로운 기척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테스가 지닌 기감의 범위는 넓었다.
일 갑자가 넘는 내력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거미줄을 쳤다. 여기에 3클래스에 이른 마력이 함께 망을 촘촘히 짜며 기감을 보조했다.
그 홀로 지닌 기감만으로도 이 거대한 장원을 덮고도 남을 지경.
여기에 진법까지 더해지니 기감의 그물망이 해자를 넘어 저 멀리 수 킬로미터에까지 뻗어 나갈 정도였다.
그런 기감에 걸려 쏟아지는 정보는 넘쳐났다.
쏟아지는 정보를 버텨 내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성장해 나갈 정도니까.
그런 와중에 그의 기감에 걸린 건 아무리 봐도 예상외의 것이었다.
‘용병단 전체를 데려온 건가. 그 수만 하더라도 40은 넘는데, 문제는 그 안에 있는 자다. 오러를 익혔어.’
일단의 무리가 이곳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진 힘은 일개 장원을 상대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전력. 급작스런 무장 단체의 방문이라.
테스는 자신이 움직여야 함을 느꼈다.
“에나, 북쪽의 관문으로 오도록. 예상치 못한 자들이다.”
“침입자인가요?”
“방문자일지 침입자일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 먼저 간다.”
“넵! 금방 따라갈게요!”
테스는 명을 하고, 몸을 띄웠다.
점프, 비행, 페더 폴 그리고 경공.
온갖 수단들을 이용하여 날 듯 움직이는 그.
스스슷-
그 속도는 경이로울 지경.
장원을 스쳐 가는 그의 아래로, 장원주인 그를 보고 놀란 시선들이 보인다.
그는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목적지로 직행했다.
목표인 북쪽의 관문.
그가 관문 위에 안착하자, 병사가 그를 알아본다.
십부장 중 하나인 이사르였다.
“장원주님!? 충성!”
“근래 들어, 방문자들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이사르는 당당히 답했다.
테론은 재능이 타고난 자라면, 이사르는 성실함이 남다른 자다. 북쪽 관문을 맡고 있는 그의 말은 신용할 수 있었다.
그는 첨언했다.
“그나마 있던 방문자도 2주 전 그레놀 상단 무리가 다입니다.”
“그렇군. 그럼 역시 예상치 못한 방문이란 건데.”
이사르는 눈치 또한 빨랐다. 테스의 말을 듣고 바로 반응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겁니까? 아직 저희는 파악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슬슬 보일 거다.”
“바로 대응 준비하겠습니다. 방문자가 올 수 있다! 다들 움직여!”
“알겠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도 이사르의 명이 나오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고 날랜 움직임들.
쓸데없는 움직임 하나 없이 효율적이었다. 그만큼 저들이 극한의 훈련을 버텨 냈다는 의미다.
‘훈련이 제대로 됐어.’
테스는 저들의 모습을 만족스레 바라보다가 관문의 가장 위로 올라갔다.
“테스 님! 병사들 데려왔습니다!”
“잘했다.”
얼마 뒤, 테론을 포함한 병사 스물이 더 추가되고.
5분쯤 더 지나니, 일단의 무리가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뿌연 흙먼지를 날리고 있는 그들의 수는 테스가 예상한 대로 50명 정도.
단단한 무장 위로 보이는 움직임은 상당히 절제가 심어져 있었다.
‘실전 경험을 몇 번 한 용병들. 거기다 용병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못해도 실버 1등급은 되겠어.’
전문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용병단이 분명했다.
저들만으로도 일개 장원이 상대하기엔 힘든 전력이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안에 있는 자였다.
‘말 타고 있는 자 하나는……. 고작 병사 수준인데, 다른 하나는 오러를 갖고 있는 건가. 내가 느낀 게 착각은 아니었나.’
용병 단장 바로 옆에 있는 자로 기사였다.
철 투구를 써 얼굴을 파악하기 힘든 기사의 기세는 강렬하였다. 전에 보았던 이반의 기세보다도 맹렬하였으니까.
‘제대로 된 놈이군.’
기사는 자신의 기세를 사방으로 뿌려 댔다. 제 기세를 느끼고, 장원에 있는 병사들의 기가 눌리길 바라는 눈치.
다만 그 효과는 전혀 없어 보였다.
병사들은 놀라긴커녕, 자신들이 자리 잡고 있는 자리를 더 굳건히 지켰다.
“흠……. 석궁을 준비할까요?”
“아직. 굳이 병사들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혼자 해결하실 참이로군요?”
“그게 효율적이니까.”
병사들은 적을 걱정하기보다는 홀로 나서겠다고 말하는 테스가 어떻게 움직일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기야 에나부터 시작하여 온갖 고된 훈련을 겪은 강병들이다.
인간 낚시를 당하던 시절, 테스의 무위도 충분히 봤던 그들이다. 기사 하나에 짓눌리는 것도, 걱정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무리는 금방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당당히 관문을 향해 다가온 기사는 소리를 높였다.
“장원주인가, 거 이리 오너라!”
“허?”
이리 오라?
예상 이상으로 당당하다 못해 거만한 태도.
테스가 어이가 없어 하고 있으려니, 기사는 또 목소리를 높였다.
“이리 오래도! 밤톨만 한 장원의 주인이라 이해를 못 하나?!”
“……허허, 허.”
어이가 없으면 웃음부터 새어 나오는 법이었다.
제아무리 기사라도 저런 태도라니.
‘당당하다 못해 미쳤네.’
마스터급을 제외하고는 끽해야 장원 한두 개 가진 게 기사이지 않은가.
그들도 장원주가 대다수다. 비슷한 처지에 장원주인 그를 대놓고 오라 가라 하고 있지 않은가.
“테스 님, 저거 벨까요?”
-제법 재밌는 인간이지 않은가. 그래, 저게 인간의 오만함이지.
먼저 나서고자 하는 에나. 테스는 손을 들어 그녀를 막고는.
“아니, 오랜만에 내가 한번 나가 봐야겠구나.”
관문의 문을 열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