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챕터 18.
그레놀을 맞이하는 테스.
그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보아하니 단순 상단주만은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다.
그레놀이 찾아온 건 몇 달 전. 그간 그레놀을 대신해서 움직인 건 그의 호위와 그가 보내온 다른 인물들이었다.
호위의 실력이 상당한 건 둘째 치고서라도, 문제는 그다음 인물들이었다.
하나같이 일개 상단주가 데리고 있을 만한 자라고 보기엔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겉으로야 어리숙한 척을 했지만 속이 문제였다. 힘이 느껴지는 자가 많았다. 그걸 테스가 놓칠 리가 있겠는가.
‘차라리 능력만 뛰어났다면 문제가 없겠는데.’
문제는 그들과 거래를 하고 난 이후였다.
거래가 끝이 나고도 그들은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거래가 끝나자마자 장원 바깥으로 나가는 흉내만 냈다.
‘밤마다 찾아왔었어.’
물건을 사간 이후 저녁, 시장이 열린 그 다음 밤에는 어김없이 침입자들이 찾아오곤 했다.
바로 그레놀의 상단을 따라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장원 내부를 자세히 살피기보단 테스가 만들고 있는 해자를 더욱 자세히 살폈다.
때로는 지형지물을 스케치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일개 상단이 거래처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보기엔 석연찮았다.
그러니 경계를 할 수밖에.
“하핫,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구해 와야 할 자들의 난이도가 있었지 않습니까?”
“이해하고 있네. 구하기 어려운 자들이긴 했지.”
테스는 경계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태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수하들이 와서 염탐하는 장면들을 영상 마법으로 찍었고.
그 증거를 수없이 모아 놨지만, 당장 그것을 그레놀에게 보일 생각은 없었다.
‘후음, 그레놀보다도 그 뒷배가 더 신경 쓰인단 말이지.’
지금 당장 그레놀에게 칼을 들이밀어서야 얻을 게 없어서였다.
칼을 들이밀려면 확실한 때에 들이밀어야지, 어쭙잖은 증거 몇 개를 가졌다고 칼을 들이미는 건 실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저들이 장원의 핵심까지 들어온다면야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되레 이용해야 한다.’
지금은 저들을 이용할 때였다.
저들의 속내를 떠나서, 장인 노예를 데리고 오는 저들의 실력은 진짜배기였으니까.
“그래도 시간을 들인 만큼 꽤 많은 자들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얼마나 더 데려온 거지?”
“대장장이 장인이 둘. 도제급이 셋, 양치기 숙련자와 사육사도 데려왔습죠. 무려 군마를 사육하던 잡니다. 거기다 듣고 놀라지 마십쇼. 목수는 무려 최고 장인급에 거의 다다른 자들입니다.”
“호오…….”
이거 봐라.
그가 데려온 장인만 다섯이었다. 도제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보조해 줄 노예들도 몇씩 데려왔다.
그가 데려온 노예 숫자는 총 서른.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고작해야 70명 인구를 자랑하는 장원에 있을 만한 장인의 수는 절대 아니었다.
“가축도 꽤 많이 데려왔는데?”
“부하들에게 듣기로 영역이 아주 커지고 있단 소리를 들어서 말입죠. 후후, 그에 딱 맞춰 데려왔는데, 마음에 드시는지?”
“들다마다. 저 대금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가 더 걱정될 정도야.”
그는 사람이 아닌 가축도 테스가 말한 수의 3배를 가져왔다. 닭, 오리, 돼지, 소. 암수로 육십 쌍씩 들여왔다.
‘거기다 또 추가라.’
여기에 하나 더. 두 쌍의 말도 가져왔다.
“이건 군마만큼은 못해도 어지간한 짐마보단 나을 겁니다. 종마로 쓰실 만할 겁니다.”
“허어…….”
“겨우 구한 겁니다. 저희 상단에서도 없어서 못 파는 거죠.”
말이라니. 그것도 종마(種馬)로 쓸 만한 급이었다.
말 자체의 급이 떨어진다고 해도, 저 정도의 말은 쉬이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후음,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대체 뭘까. 알 수가 없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그레놀은 그의 환심을 사려고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 정도 노력이라면, 차라리 그레놀이 장원을 하나 사서 발전시키는 게 어떨까 싶을 지경이다.
노예는 물론이고, 풍족한 물자에다가 종자가 될 것들을 잔뜩 가져왔다.
세심한 데다 양도 많았다.
이 정도라면 그의 계획 달성이 몇 배는 더 빨라지는 건 당연할 터.
‘이유 없는 호의는 없을 텐데. 언제 한번, 지넬에 정보 길드라도 들러 봐야 할지도.’
이럴수록 테스의 의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이 정도면 밑바탕은 충분히 닦을 수 있겠어. 고맙군.”
“허엇, 이 정도 숫자를 가지고 고작해야 밑바탕인 겁니까?”
“당연한 소리를.”
“허 참, 저 거대한 해자도 그렇고, 대체 어디까지 해내시려고 하는 건지……. 저 같은 일개 상단주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뭐, 마음껏 상상해 보게나.”
그러기에, 그는 그레놀에게 따로 정보를 준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테스가 말을 삼가니 몸이 달아오른 쪽은 그레놀이었다.
“이 정도 해자라면……. 족히 성이라 봐도 무방한데. 이걸 지키시려면 또 병사도 필요하시겠습니다? 어찌 노예 병사라도 구해 올까요?”
“제대로 된 병사는 한 사람당 최소 50골드가 넘을 텐데? 됐네.”
“에이, 홀스 파워를 통해 버시는 돈도 상당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낭비지. 돈도 필요 없이 봄쯤에 다 구할 방법이 있거든.”
“그 방법이란 게…….”
“그런 게 있네.”
설명을 해 주지 않는 테스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그레놀은 말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웃는 낯으로 여지는 남겨 놨다.
“새로 거래를 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군요.”
“그런가.”
계속해서 찔러 오는 그레놀이었다.
말로는 호의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알 수 없는 자다.
노예병이라고 데려왔는데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그가 자기 사람을 심어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테스는 이제 그만하라는 듯 말도 안 되는 요구부터 던졌다.
“정 아쉽다면, 데번즈의 노예병이라도 데려오든지. 어떤가? 이거 할 수 있겠는가?”
“허엇, 데번즈의 노예병이라니요? 그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주십쇼.”
도시 데번즈의 노예병.
노예 도시로 유명한 데번즈. 그곳의 노예병은 다른 노예 병사와 달리 특별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군사 교육을 받은 그들은 숙련된 전사이자 도살자였고. 동시에 배신을 모르는 충실한 병사였다.
쉽사리 구할 수 있는 자도 아니었다.
유력자라고 할지라도 그저 한둘을 소유하는 게 다였다.
대다수의 데번즈 병사는 도시 데번즈에 속해 있을 뿐이었다.
그걸 구해 달라 하는 말의 의미는 결국.
일종의 도발이다.
“무리였나. 이거 아쉽군. 딱 거기까지가 자네의 한계였는가?”
“이거, 이거. 저를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하지만서도……. 무리는 무리입죠.”
그 도발의 의미를 알아챘을까.
그레놀의 표정에 잠시 분노가 스쳐 지나가다 이내 다시 웃음으로 되돌아왔다.
잠깐이었으나 이를 놓치지 않은 테스였다.
‘자존심이 상한 건가. 뭐 어찌 되든 좋지.’
얼마 가지 않아 표정을 푼 그레놀.
그는 더 얻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실없는 농담을 해 왔다.
가면 같은 웃음을 짓고 가벼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딱 젊고 야망 있는 상단주 정도의 모습만이 보였다.
테스는 그런 그를 적당히 상대하며, 미리 준비했던 홀스 파워를 넘겼다.
“이번에는 600알이나 파시는 겁니까?”
“슬슬 거래를 늘릴 때도 되었지.”
“허어…….”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을 넘김으로써 거래는 성대히 끝을 마치는 듯했다.
그는 예정보다 며칠을 더 머물다가 갔고 노예만큼이나 많은 물자를 가져온 걸 내세우며 장원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갔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테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지켜볼 뿐이었다.
* * *
그리고 며칠 뒤.
모든 인수인계를 마친 그레놀은 아쉬운 표정을 하곤 떠날 채비를 했다.
“덕분에 좋은 거래를 하고 갑니다. 이 정도 홀스 파워라면 다 팔아도 이문이 꽤 남겠습니다.”
“팔아도 손해라는 쓸데없는 말은 안 해서 좋군.”
“에이, 그런 말은 삼류 상인들이나 하는 말입죠. 후후, 저는 그쪽의 과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런 태도는 썩 마음에 드는데.”
테스는 저택을 벗어나 멀리 해자까지 그를 배웅해 줬다.
겉으론 친우를 대하듯, 웃는 낯을 하고 대화를 이어 갔다.
“마음에 드시면, 이참에 독점 거래를 더 늘리는 것이……?”
“에이,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이거, 영 쉽게 넘어가 주시지를 않으니 아쉽습니다.”
“하핫, 이쪽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나?”
테스는 틈만 나면 치고 들어오는 그레놀의 입을 막으며, 동시에 은밀히 손을 놀렸다.
스윽-!
고절한 금나술의 수법이 펼쳐졌다.
그의 은밀한 손은 다른 자들 모르게 그레놀의 살을 스쳐 지나갔다.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그레놀이었지만, 손목과 팔뚝이 노출되는 건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모든 곳에 테스의 손이 스친다. 모종의 물질이 그레놀에게 묻혀졌다.
‘됐다.’
모종의 물질. 바로 천리향이었다.
흔히 천 리 바깥까지 향을 풍기는 천리향은 은밀히 상대를 추적하는 데 일품인 물건.
특수한 처리를 하면 훈련받은 자 외에는 냄새를 맡지도 못하기에 그 은밀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의선일 적의 경험을 살려 만들어 놓은 귀한 약품 중 하나였다.
이걸 묻혀 놓았으니.
이제 그레놀이 움직이는 곳에는 천리향의 잔향들이 남을 게 분명할 터.
‘이거면 추적은 쉬워진다. 나중에라도 그가 움직인 곳을 살펴볼 수 있겠지.’
테스는 가만 이곳 장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레놀의 모든 움직임을 읽어 들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가 은밀히 수직을 부리는 사이, 길었던 마중은 슬슬 끝을 고하고 있었다.
“허어……. 벌써 해자 끝이로군요. 이거 여기까지 배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기까지 할 게 뭐 있겠나. 내 다음 거래도 기대하고 있지.”
“이리 기대를 해 주신다면, 또 제가 열심히 부응을 해 드려야겠지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레놀은 아쉬워하며 해자 바깥으로 나섰다.
그런 그레놀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테스는 가만 해자 바깥을 바라보며 그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에나가 물어왔다.
“추적할까요? 저도 그간 훈련으로 천리향 정도는 맡을 수 있는데요.”
“아니. 나중에 하자꾸나. 적어도 일 년은 잔향이 남을 테니, 그쯤이면 충분해.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추격도 좋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레놀이 잔향을 많이 남겨 놓으면 남겨 놓을수록 그에게서 얻을 정보가 많아질 테니까.
지금은 뜸을 들여야 할 때였다.
“이해했어요. 그럼 나중에 추격을 할 때는 꼭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기꺼이. 자자, 들어가자꾸나. 할 일이 많아.”
“넵!”
아쉽더라도, 우선은 가만 그를 지켜볼 때였다.
숨긴 그의 속내를 언젠가 알게 된다면 그때 가서 그 속내를 보고 그의 처우를 판단해야 할 때가 오겠지.
그때까지 테스도 제 할 일을 해야 할 때였다.
‘병사를 구해야 했는데, 마침 잘됐어. 바로 이용해 볼까.’
우선 부족한 거부터 채워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