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챕터 16.
그가 할 일. 바로 영역 확보였다.
‘최대한 늘려야지.’
장원을 얻음으로써 그가 갖게 된 영역은 생각보다 넓긴 했다.
장원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약 3km 지름을 지닌 원형 지역이 그의 장원에 속했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었다.
애당초 그가 받아 온 서류에도 두루뭉술하게 영역이 적혀 있었다.
이 주변 장원 전부가 데프 백작의 영역일뿐더러, 작은 장원이 확장을 해 봐야 한계치가 있기에 만들어진 두루뭉술함이었다.
‘이 점을 노려야겠어.’
그게 틈이었다.
그가 수월하고 조용하게 영역을 늘릴 수 있는 틈!
테스는 서류에 적힌 두루뭉술한 지형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맞출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보아하니, 장원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지름 4km까지는 영역으로 해 놓아도 충분해 보였다.
슬쩍 선점만 해 놓으면 주변에서 따질 자가 없어 보이는 터.
그러자면 마음만 먹는 걸론 부족했다.
제 영역이란 걸 확실히 선포하고 보여 줘야 했다.
그리해야 그의 영역에 다른 장원주나 생물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힘을 보여줘야겠는데.”
영역 선포를 위한 강력함을 선보일 시간이었다.
* * *
“저기가 좋겠어.”
명분도, 시기도 따질 것 없이 처리할 수 있을 적. 몬스터가 장원 주변에 널려 있었다.
테스는 제 힘을 보여 줄 제물로 이들을 선택했다.
-끼웨에엑.
-끼이이…….
안 그래도 장원 가까이에 있는 코볼트 영역이 보였다.
‘슬슬 겨울을 노리고 자리 잡은 건가.’
상대는 떠돌이 코볼트 따위가 아니었다.
50~70마리 정도 되는 중소 부락 규모였다.
게일이 넘겨준 서류에도 없던 몬스터들이다.
다시 말해 새로 생긴 몬스터란 이야기.
지금은 추수가 끝난 늦가을. 슬슬 겨울의 삭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니 장원 가까이에 자리를 잡은 듯했다.
‘몬스터치곤 영리한 선택이야.’
몬스터치곤 약한 개체가 코볼트다. 약자인 코볼트로선 장원 옆에 자리를 잡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 거다.
장원이 있기에 강한 몬스터 영역으로부터 멀 뿐더러.
식량이 모자라 겨울을 나기 어려워졌을 때 여차하면 인간의 장원을 습격해 겨울을 날 수도 있을 테니까.
장원을 습격하면 꽤 많은 동족이 죽어 나가겠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니 코볼트로선 이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문제는 나 같은 장원주가 있다는 점까지는 상정하지 못했다는 거겠지만…….”
공중에서 부유하던 테스는 저 멀리 있는 코볼트의 영역 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내려앉은 곳은 다름 아닌 땅 위.
이 땅 아래가 바로 코볼트의 영역이었다.
‘역시나 은밀해.’
곡괭이 하나 없이 동굴을 팔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코볼트. 이 아래에 상당한 수의 코볼트의 기척이 느껴졌다.
단지 기척을 느끼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광범위 탐색.”
테스는 새로 익힌 마법 주문을 펼쳐 은밀히 마나를 퍼트렸다.
퍼트려진 마나가 저 아래에 있는 코볼트의 정보를 가져다줬다.
‘역시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네.’
상황은 그의 예상대로다.
코볼트들은 아래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몇은 동굴을 확장하고 있었고.
중간쯤엔 어린 코볼트들이 몰려 있으면서 먹이를 달라고 빽빽 울어 댔다. 얼마 전 그의 눈에 띄었던 전사 계급 코볼트들이 안으로 들어가 먹이를 나눠 줬다.
특이한 건 족장 정도 되는 녀석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족장이 없다는 걸 제외하면, 전형적인 코볼트 부락의 모습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형성된 부락은 아니었다.
‘그래도 방비가 튼튼한데.’
그렇다고 얕보고 안으로 들어갔다간 어지간한 용병들 몇은 잡아먹을 만한 동굴이었다.
실제 그가 브론즈 등급이던 시절, 코볼트 동굴을 얕보고 들어갔다가 같이 토벌을 간 파티원 몇몇을 잃기도 했었다.
약한 몬스터라고 해도 얕볼 필요는 없는 것이고.
설사 코볼트 수백 마리가 달려들어도 쉬이 상대할 수 있는 지금이라고 할지라도 적을 우습게 보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방심은 독이었으니까.
지금까지의 경험, 가진 힘, 수법들, 몇 가지 경우의 수를 가늠해 보던 테스는 가장 좋은 꾀를 생각해 냈다.
“후음,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이겠어.”
* * *
그는 은밀히 기척을 죽인 채, 광범위 탐색으로 읽은 코볼트 영역을 아래에 두고 움직였다.
‘쉽다.’
그는 단순히 움직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며 동시에 품에 지니고 있던 부적을 곳곳에 뿌렸다.
룬 조각 덕에 이전보다 더 강화된 부적들이었다.
부적은 그의 손을 떠나 마치 나비처럼 날며 흩어졌다.
그가 원하는 자리에 툭 하고 안착하면서 빛을 흩뿌리고 스스로 타올랐다.
하나, 둘, 셋…… 총 열.
그가 그간 만들어 놓은 부적 중 일부가 타오르며, 코볼트 영역을 감쌌다.
고작해야 몇 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스스스-!
부적이 타오르자, 주변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
‘시작됐다.’
그건 마법진이 아닌 진법이었다.
토환진!
주변의 지력을 흔들며 진을 설치한 진법사와 공명하도록 만들어 주는 기초적인 진법.
흔히 중원의 진법가들은 이 진을 이용하여 더 복잡한 진을 세우는 토대로 사용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선은 이걸로 충분하지.”
진법이 작동함으로써 느껴지는 지기와 공명, 이 둘만으로도 그는 충분함을 느꼈다.
지금부터 그가 해야 할 일은 진법을 쌓는 것이 아니라 마법 하나를 불러들이는 것으로도 충분하였으니까.
대지. 진동. 공명.
세 개의 룬어를 쉽게 조합하고, 강화의 룬어를 섞어 넣는다.
단순한 읊음. 그가 마법 주문을 완성하자.
“대지 조종. 붕괴.”
망설임 없이 거대한 마력이 주변을 뒤틀며, 땅을 파고들어 갔다.
* * *
진법을 통한 마나의 공명. 연이은 마법의 주문.
‘미쳤다.’
테스도 놀랄 정도의 위력이 튀어나왔다.
그가 디디고 선 땅이 흔들렸다.
춤추듯 흔들리는 마력은 술사인 그의 의지대로 아래로 파고들었다.
이 아래는 단순한 땅의 흔들림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엉망이 됐어.’
마치 땅이 살아 움직이는 듯 뒤틀렸다.
옆에 있던 코볼트를 동굴 기둥이 덮쳤고, 아래에서 위로 튀어나오며 공동을 프레스 찍듯 찍어 버렸다.
-끼에에엑!
놀란 코볼트들이 동굴 입구로 내달렸지만, 그들이 연 입구는 이미 닫혀 있었다.
그 뒤는 남은 동굴의 연쇄 붕괴였다.
콰드드득- 콰득-!
거대한 샌드웜이 입질을 하듯 남은 코볼트들을 땅이 잡아먹었다.
술사인 그도 놀랄 정도의 완벽한 붕괴!
“하……. 연구를 할 때도 이 정도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진법과 마법의 공명.
지난 시간 3클래스 주문을 익히며 만들어 놓은 가장 단순한 수였다.
한데 그 단순한 수의 효과가 이 정도일 줄이야.
유지하고 있던 광범위 탐색을 통해 그 위력을 확인한 테스는 몇 번이고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 몇 분, 고작 몇 초의 마법 시전.
코볼트 중소 부락 하나를 붕괴시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거대한 힘의 유동이었으며.
그게 가진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가 그간 준비한 수를 몇 개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일은 더욱 쉬워진다는 의미였으니까.
“좋네.”
만족스러움과 함께, 자신감을 얻은 테스는 바로 다음 영역으로 향했다.
* * *
중원과 달리 이 세계엔 강자가 많았다.
드래곤, 엘프, 드워프, 리자드맨 같은 이종족을 제외하고도 녹빛을 지닌 생물체들은 언제나 인간을 노렸다.
손쉬운 사냥감이었으니까.
‘이 세계는 너무 괴물들이 많아. 그러니 발전이 더뎠을지도…….’
오죽하면 이 작은 장원의 옆에 있는 작은 언덕의 주인이 아울베어일까.
이 작은 언덕의 최강자로 코볼트 따위는 두 팔로 찢어발겨 버릴 정도의 강자.
거대한 두 눈에 일반 곰보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아울베어의 거처는 동굴이었고, 그 덩치에 걸맞게 입구는 거대했다.
“가장 강자부터 죽이는 게 재밌겠지.”
테스는 아울베어 둥지에 선 채로 손에 든 독초를 비볐다.
독초의 진액이 흘러내렸다.
만독공의 구결을 외워 독초의 힘을 끌어올리고 동시에 독 마법을 부려 독을 강화했다.
아울베어가 테스의 정체를 읽어 낸 것도 그쯤이었다.
-크허어엉!
쿠우웅. 쿵.
굉음을 내며 몸을 일으킨 산주인은 곧바로 테스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테스는 아울베어의 움직임을 읽으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됐다.’
독이 완성되는 그 순간 아울베어가 높이 손을 들었다. 손이 아래로 내려오며 테스의 뇌를 곤죽 내려는 찰나.
“이거나 먹어라.”
테스는 가루가 돼 버린 독초를 아울베어를 향해 흩뿌렸다.
우뚝.
독에게 당한 아울베어의 몸이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독이 제대로 먹혔다는 의미. 곰같이 거대한 덩치를 지닌 놈에게도 독이 통했다는 사실에 테스는 만족스러웠다.
“이 방식도 재밌는데.”
히죽 웃은 테스는 곧바로 아울베어를 향해 다가갔다.
-그르륵…….
아울베어는 단순히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낼 수 있을 뿐, 테스에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이만 죽어.”
아울베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발을 내질렀고, 그의 몸이 떠올랐다.
떠오른 그의 몸. 둘의 눈높이가 맞춰진다.
그의 손이 휘둘러졌다.
쒜에에엑-!
공기를 가른 손에는 내가중수법이 실려 있었다.
바깥이 아닌 안을 곤죽으로 휘젓는 게 내가중수법의 묘리. 그 손이 아울베어의 머리에 닿는 순간.
-키에엑…….
침투경의 묘리가 실린 그의 기파가 아울베어의 뇌로 스며든다.
차올라 있던 뇌가 그만 곤죽이 됐다.
제아무리 아울베어라도 뇌가 사라지면 살 길이 없었다.
쿠우우웅.
뇌를 잃은 놈의 머리가 까뒤집힌다. 동시에 거대했던 몸이 땅 아래로 쓰러졌다.
단 한 수.
고작해야 단 한 수에 영역의 주인이 쓰러졌다.
“이거, 처리하려면 힘을 꽤 써야겠는데. 후후.”
테스는 만족스레 웃으며, 거대한 덩치를 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을 뿐이었다.
‘자, 바로 다음으로…….’
산의 주인을 처리했으니 이제 남은 건 산주인 자리를 넘보는 작은 것들을 처리하는 일일 터.
-꾸익!
“어설프게 찾아오기는.”
떠돌이 오크 무리를 보자마자, 그는 곧바로 갈기갈기 찢어 주었다.
북쪽의 장원 가도 아래 숨어 있는 더트스.
흉포한 이를 지닌 두더지형 몬스터가 땅에서 고개를 내민 순간, 그 고개를 쑤욱 뽑아 들자마자 이를 잡아 부러트렸다.
이렇듯 흉악한 몬스터들을 지워 나갔다.
스스스-
“제대로 뿌려볼까.”
동시에 그는 움직이며, 자신의 마나를 주변에 흩뿌리는 걸 잊지 않았다.
마나의 흩뿌림.
일종의 영역 선포였고, 마나에 예민한 몬스터들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
강자에 속하는 몬스터라면 모를까.
작은 무리는 얼씬도 못 하게 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고작 몇 달일 뿐이지만, 그 몇 달도 그에겐 소중했다.
때는 곧 겨울.
겨울 동안에 그가 장원의 사람들에게 시킬 일들을 위해선 작은 몬스터라도 얼씬거리는 건 절대 사양이었으니까.
* * *
오는 족족 몬스터를 없앴으나, 그의 노력에 비해 효과는 미미했다.
“이 작은 영역에 몬스터들이 너무 넘치는데……. 역시 이어지는 산맥이 문젠가.”
열흘간의 사냥. 수십 번의 크고 작은 전투.
산 주인을 없애 버렸음에도 그리고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상대했음에도 몬스터는 슬금슬금 아래로 계속 내려오곤 했다.
마나의 흩뿌림에도 작은 무리가 찾아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흩뿌림보다 더 강한 강자가 있다는 이야기.
‘저기 또 내려오는군. 저 위에 대체 뭐가 있기에 계속 내려오는 건지. 쯧.’
그가 수십 번의 전투를 하는 사이.
장원의 사람들은 그의 활약상을 지켜보며 존경과 안정감을 느꼈다.
주변 장원의 장원주가 보낸 사람들 몇이 이곳으로 와 전투를 보고 갔을 정도다. 처음 그의 의도대로 겁을 먹고 달아났다.
압도적인 힘을 본 덕택이었다.
수십 번의 전투로 몇 가지 성과를 얻어 낸 셈.
하지만 막상 일을 벌이는 그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대론 끝이 안 나. 계속해서 전투만 반복해야 한다.’
지속적인 반복 전투가 가져다주는 지루함이 느껴졌다.
강자로부터 경험이라도 얻는다면 모를까.
당장 강자는 찾아오지도 않을뿐더러 약해 빠진 것들만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몬스터를 잡으며 얻은 사체를 팔면 수익이 상당할 터이나.
홀스 파워로 얻는 거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나 다름없었다.
영역도 확보하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적들을 차단할 수가 필요했다.
그는 한참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결국 새로운 수단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처음부터 그걸 구현해 낼 걸 그랬나. 쉽게 가자고 했더니, 되레 더 복잡해진 셈이네. 쯧.”
도시 지넬을 보고 그가 압도되었던 것.
그것을 이곳에 구현할 필요성을 느꼈다.
바로 두꺼운 성벽이었다.
‘혼자는 확실히 무리지. 하지만 방법을 달리하면…… 충분해.’
그는 그 거대한 성벽을 반대로 만들 생각이었다.
위가 아닌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