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챕터 15.
장원을 나선 그레놀.
테스 앞에서 짓던 사람 좋은 표정을 바로 지웠다.
무표정으로 변한 그는 자연스레 빈 마차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그의 호위인 펠슨이 따랐다.
그가 자리에 앉자, 먼저 입을 연 건 펠슨이었다.
“공자님, 그자에게 정말 장인들을 구해 주실 겁니까?”
“왜? 못 할 이유가 있나?”
공자라……. 숨겨진 신분이라도 있는 걸까.
그레놀은 펠슨의 말을 자연스레 받고 있었다.
“대장장이, 목수, 사육자……. 말이 좋아 장인 아닙니까. 저들을 데려다 놓으면 그의 장원, 아니 영지는…….”
“순식간에 커지겠지. 옆에 있는 다른 장원들은 큰일이라도 났다고 덜덜 떨 거고.”
테스는 쉽게 생각해 장인을 구하라고 했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본디 장인은 각 영지의 전략 물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마법사나 기사만은 못할 뿐이지, 그들이 없으면 영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귀족이라면 누구나 잘 알았다.
때문에 장원을 가진 자들은 결코 장인들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다른 자들의 주목을 끌뿐더러 그를 본 상위 귀족은 견제를 하려고 들기도 하니까.
위험하다.
그런 위험한 일을 테스는 잘도 제안했고, 그레놀은 너무도 쉽게 받아들였다.
‘나라도 막아야 해.’
펠슨은 그걸 위협으로 생각했다.
그가 모시고 있는 그레놀에 대한 미래의 위협으로.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다만…….’
그레놀과 테스의 격차를 생각하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이야기.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 위기감을 느꼈다.
때문에 강하게 설득하려 하였지만.
“정말로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가 하려고 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일과 같다면 그때 가서는 아무리 공자님이라도 책임을…….”
그레놀은 단호했다.
“펠슨, 내가 결정을 내린 일이야. 그리고 그 결정을 따라야 할 것은 누군지 알고 있겠지?”
“그게 명이시라면.”
명령을 우선시하는 펠슨으로선 그레놀이 명령을 내린다면, 거부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아니, 거부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그게 그가 받아 온 교육이었으니까.
펠슨이 침묵을 지키자 그레놀은 그제야 만족스러워했다.
“마탑의 베빈이 눈여겨보는 자야. 이 정도 투자는 당연한 거 아니겠어?”
“베빈이라 하면……. 설마, 갇힌 자 베빈이 말입니까? 그녀가 움직였다고요?”
베빈. 그 단어에 펠슨이 움찔거린다.
그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그레놀은 히죽 웃어 보였다.
그의 눈엔 전에 없던 광기가 번뜩였다.
“그래. 베빈 아너스. 그녀가 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그녀의 호의를 얻었다면, 그는 어차피 성장하게 돼 있어.”
“……장인들쯤은 장난이게 되겠군요.”
“맞아. 어차피 성장할 자라면, 차라리 그를 도와주는 게 내게 득이 되지 않겠어?”
흐름을 타자는 이야기.
그레놀의 논리를 이해한 펠슨은 그제야 납득했다.
“우선은 도와줘 보자고. 동시에 여러 패도 던져 줘 봐야겠지. 그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보려면 말이야.”
“앞으로 더 바빠지겠군요.”
“흐흐, 오랜만에 느끼는 재미지. 자자, 어서 움직여 보자고.”
작은 고요 속에서.
삐거덕거리는 마차는 끊임없이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그가 떠나 왔던 도시 지넬이 아닌 그보다 아래에 있는, 테스로선 생각지도 못한 전혀 다른 영역을 향해서.
* * *
그레놀이 떠나고 며칠 후.
테스는 그가 가져다준 물자를 이용해 장원을 보수했다.
삐걱대는 제분소, 망가져 가는 장원의 문, 비가 새는 장원 농노의 집 수선까지…….
투자받지 못한 장원은 고칠 곳이 많았고 그 모든 걸 고치는 데는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그는 장원 사람들의 치료도 빠짐없이 진행했다.
그들을 치료하며 민심을 휘어잡았고, 동시에 각각의 성향도 파악했다.
‘몇 명은 소질이 꽤 뛰어나.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소질이 뛰어난 자가 많단 말이지. 신기해.’
그로선 알차게 보낸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 동안, 에나는 변함없이 그의 옆을 지켰다.
해야 할 수발을 들어 주고 때로 보조가 필요할 땐 손재주를 부려 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원 일이 익숙해지고 있는 에나. 좋은 보조였다.
그렇게 장원의 수선이 마무리되고.
이제 새로운 일을 찾아야겠다 싶었던지, 에나는 생각지도 못한 물음을 해 왔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도 그에 맞춰서 움직여야 할 거 같으니까요.”
“앞으로라…….”
그녀의 표정엔 큰 각오가 서려 있었다.
하기는 죽겠다는 선택 이후, 이제 확실히 제 선택을 하는 상황이다.
그녀가 할 선택의 방향이 테스에게 달려 있으니 진지한 것도 당연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따라오려고 하는 건가 싶었더니, 제 몫은 하겠다는 건가. 기꺼운 일이네.’
에나가 앞일을 생각해 본다는 건 살겠다는 의미.
그녀를 살려 낸 테스로서는 못내 바라던 일이었다. 그게 설사 변덕으로 시작된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진지하게 답해 줬다.
“장원을 확장해야겠지. 그게 첫걸음이니까.”
“확장이요? 이미 크기는 충분하지 않나요?”
장원의 크기는 인구에 비해 매우 컸다. 수원지만 확보하면 최소 300에서 400명은 생활하기에 충분한 크기다.
장원치고는 크다. 하지만 테스로선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장의 크기가 문제가 아냐. 작을뿐더러……. 중요한 건 그 내용물이지. 사람도, 물건도 전부 부족해.”
“이 정도인가요? 장원에 새로 노예들을 들이면, 백은 금방 채울 건데요.”
“딱 그 정도 수준이겠지. 나는 적어도 소도시 크기 정도는 돼야 우선 만족할 참이다.”
“네? 소도시라뇨?”
소도시. 에나에겐 그 개념이 와 닿지 않는 건가.
그의 일을 돕겠다고 나선 그녀이니 테스는 적당히 설명을 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인구는 적어도 8천 이상. 여관이나 식당은 족히 네 개는 돼야겠지. 대장간은 최소 하나. 많을수록 좋고. 그래, 잡화점도 필요하겠구나. 신관이 있는 신전이 있으면 더 좋겠지.”
“……와아. 엄청나네요.”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하긴 둘이 더해져 이제 인구가 70명대인 작은 장원이 현실.
그 장원에 8000명의 인구에다 소도시라니.
감히 해내겠다고 말하는 거 자체가 광오한 일이었다. 경영에 타고난 재주가 있는 장원주라고 할지라도 족히 2~3세대는 지나야 해낼 수 있는 일일 터.
그런 일을 쉽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말이 나온 김에 테스는 여러 가지 설명을 더해 줬다.
상시 고용 용병보다는 상시병을 만들 거라든지. 그 규모는 대략 50명 정도 둘 것이고 어찌 무장을 시켜야 할지도 말했다.
덧붙여 그들을 전부 포함하기엔 이 장원은 너무도 작으니 거대한 확장을 거듭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에나도 같이 진지해져 있었다.
‘소도시가 첫걸음이라면……. 그럼 그다음은?’
소도시를 만들겠다는 이야기에 압도됐던 에나.
그녀는 어느새 테스가 말하는 일의 본질을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물었다.
“역시…… 계획이 다 있으시네요. 근데 그게 고작 필요에 의해서 하시는 거라면 진짜 목적은 뭔데요?”
그녀에게 숨길 이유가 뭐 있으랴.
“간단해. 나 자신의 성장이지.”
“성장이요? 성장을 위해서…… 만드는 게 소도시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할 스케일의 일이잖아요.”
“그게 내게는 맞는 거니까.”
에나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이 정도 계획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전생에 이르러 지금까지.
각성을 하자마자 인격이 뒤바뀌는 일 따위는 아직까지도 없다.
허나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선으로서의 기억과 테스로서의 정신이 혼재되어 있는 가운데, 테스는 한 가지 궁극적인 염원을 꿈꾸었다.
‘이제는 제대로 된 목적을 정하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강함!
옆에서 누가 무어라고 하든, 누가 내게 검을 들이밀든 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설사 방종에 가까운 선택일지라도 원한다면 능히 누릴 수 있는 힘을 원했다.
즉,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다.
그러자면 강자가 되어야 했고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경지에 이르러야 했다.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게 모순되게도 이러한 영역!
‘힘을 기르려면 더 큰 것들을 쏟아 부어야 얻은 법이니까.’
그러기에 목표를 정했을 뿐이다.
여기까지 와서 얻은 결과물이 바로 이 장원이고. 가까운 미래에 있을 거대한 소도시도 이 목적을 위한 작은 결과물에 불과할 따름이다.
결국 중요한 건, 지금까지 행한 일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란 것이며.
이전에도 지금도 답은 하나라는 거다.
그 답은 바로.
위를 향한 향상심이다.
“……말씀대로면 정말 황제라도 되셔야 할 거 같은데요?”
“그게 답이라면 그리되어야겠지.”
황제. 그조차 되어야 한다면 된다는 광오함.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테스의 말에 에나는 완전히 압도됨을 느꼈다.
제가 지니고 있던 작은 세계가 어딘가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너무 크잖아.’
작은 장원.
앞으로 커 가기는 하겠지만, 고작해야 장원.
그곳에 머무르며 그 장원을 지키고 살면서 기사는 아니더라도 테스의 옆을 지키는 게 그녀가 생각한 꿈이었다.
지금 보니 너무 작았다.
꿈의 크기를 잴 수는 없으나 그의 옆에 있을 꿈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부족하지 않은가.
적응을 해야 했다.
그 적응을 위해 설사 지금껏 자신이 가진 가치관 전부를 깨부숴야 하더라도 해내야 했다.
에나는 그를 선택했고 그 선택에 맞춰 자신의 세계를 부숴 내는 것쯤이야 너무도 당연했으니까.
그녀는 압도됐으나,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게 어디까지라도…….’
그저 각오를 다질 뿐이었다.
“꼭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그저 지켜보렴.”
“아뇨. 받아들여야죠. 저도 그 이상을 보여 드릴게요.”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각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테스는 그녀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줄 뿐이다.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테스에게는 하나의 각오이자 선언이었다.
제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완벽한 선언.
그러자면 그가 지금 이곳에서 가만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자아, 그러자면 나는 먼저 움직여야겠으니 너는 네 할 일을 하고 있으렴.”
“네! 준비해서 금방 따라가도록 할게요. 그때는 꼭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기대하지.”
각오를 다지는 에나를 두고, 테스는 오랜만에 장원을 나섰다.
* * *
‘마법사가 자신의 영역을 제대로 아는 건 기본이니…….’
지난 시간.
장원의 안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데 성공한 테스다.
그 안에 모종의 진법들의 기초를 쌓아 놓기까지 했다. 아직 작동을 하는 덴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참 뒤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줄 진법들이었다.
그를 제외한 장원의 다른 자들은 전혀 모르는 일!
누군가 알게 되면 놀라겠지만, 그뿐이다.
그로선 장원 내부를 완전히 제 영역화시키기 위한 밑거름일 따름.
‘씨앗은 심었으니 되었고.’
내부를 영역화했으니 이제 중요한 것은 외부.
“부유.”
스스스스스-!
장원을 나선 그는 땅에 딛고 있던 제 몸부터 공중으로 띄웠다.
높이 하늘로 올라선 그의 아래로 장원과 그 옆의 영역들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장원. 그 옆으로 난 세 개의 가도. 붙어 있는 산맥. 그 사이에 숨어 있는 녹빛의 생물들까지.
주변 영역을 파악하는 데 성공한 그는.
‘생각보다 많구나. 그렇다면……. 제일 처음 해야 할 일이 뭔지 확실히 알겠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언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