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챕터 14.
저택을 나서자, 가장 먼저 게일이 달려왔다. 종소리를 듣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장원주님! 장원 주변에 일단의 무리가 출몰했습니다.”
“놀랄 거 없어, 게일. 잘 보면 상단 표시가 있잖아?”
“속이는 거 아닐까요? 저희 같은 작은 장원에 웬 상단이랍니까. 전에 옆 장원에도 저리 상단인 척하고 와서 털어 간 적이 있습니다!”
상단인 척 속이다니.
그런 식으로도 털어먹었다는 건가.
치안이 최악인 건 알았지만, 참으로 여러 방법으로 털어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 테스였다.
“걱정 마. 저들은 내가 부른 거니까.”
“오오, 어지간해선 상단이 움직일 리는 없을 텐데요?!”
내 설명에 게일의 눈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럴 만하긴 하지.’
이 작은 장원에 상단이 찾아올 일은 없다.
상단쯤 되는 자들이 이곳을 와서 거래해 봐야 남는 건 손해밖에 없으니까. 물류비가 더 든다.
잘해야 보부상 무리가 이곳을 찾아들 뿐이다.
그런 판국에 상단이니 게일이 놀라며 감탄할 만도 했다.
“다들 필요한 거 있으면 적어 놔. 이참에 거래해 줄 테니까.”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신이 나서 달려가는 게일을 뒤로하고, 테스는 그를 찾아온 상단을 맞이하기 위해 장원 끝자락을 찾았다.
* * *
끝자락에서 바라본 상단의 행렬은 꽤 길었다.
마차만 3대. 같이 따라오고 있는 용병들은 20명이나 됐다.
그의 기감으로, 실버 등급이 넷, 나머지는 브론즈 등급이었다.
특이한 건 상단주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자였다.
‘저자가 또 왔네. 저 정도 실력인데, 왜 저 녀석한테 붙어 있으려나?’
느껴지기로 그의 실력은 골드 정도. 오러를 뿜어내는 기사급은 못 돼도, 바로 아래의 급은 돼 보였다.
온몸 가득 남은 흉터로 봐선 수많은 실전을 겪은 듯 보였으니 실제 전투력은 더 높을지도 몰랐다.
그자는 전부터 테스가 불러온 상단주 그레놀을 따르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나 더 알아볼 필요는 없을 터.
궁금증을 접은 테스는 끝자락에서 몇 걸음 더 앞으로 나가 상단주 일행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우왓, 신수가 전보다 더 훤해지셨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가 맞이한 상단의 이름은 그레놀 상단. 상단주 그레놀의 이름을 딴 상단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젊은 자가 바로 상단주였다.
“그나저나 잔뜩 준비해 왔는데, 만족스러우십니까?”
“이거면 당장 장원에 문제가 생길 일이 없어 보이긴 하는데.”
“후후, 문제라니요. 문제는커녕 물자가 남아돌지도 모릅니다.”
“거 능청은.”
“그게 제 특기 아니겠습니까.”
경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와 다르게 그의 능력은 진짜배기다.
테스가 이곳 장원으로 온 지 일주일.
떠나며 장원에 필요할 자재들과 식료품들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다. 오늘까지 기한을 주었으나, 실패할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웬걸.
‘반쯤 시험 삼아 맡긴 건데, 잘 해냈네?’
그레놀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물품을 준비한 듯 보였다.
얼굴에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레놀 특유의 자신감 어린 저 표정. 테스도 저 표정을 보고 그를 거래처로 선정했었다.
‘저런 표정은 아무나 못 짓거든.’
그와의 인연은 별거 없었다.
도시 지넬에서 테스가 한창 홀스 파워로 주가를 올리던 중, 거래를 하자고 그를 찾아온 수많은 상인들 중 하나였다.
그들 중에서도 그레놀은 꽤나 젊은 편이었는데, 처음 보자마자 재밌는 제안을 해 왔다.
제안은 단순했다.
‘포장이었지.’
따로 겉포장도 없이 팔고 있는 홀스 파워를 포장해 팔자는 이야기. 잘만 포장해 팔면 귀족 가에 비싸게 넘길 수 있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단순하지만 간단한 건 아니었다.
‘현추자도 같은 소리를 했었으니까.’
그가 의선으로 있던 중원에서 상왕, 현추자.
그레놀처럼 젊은 나이에 찾아왔던 그도 건마환을 팔던 그에게 포장을 제안했었다.
처음엔 물건으로 장난질하지 말라고 쫓아냈었다.
그런데 웬걸, 매일처럼 찾아옴은 물론이고.
건마환을 파는 날이면 같이 줄을 서서 물건을 떼어 갔다. 그러곤 그 물건을 제 식대로 포장해서 고관대작들에게 팔아넘겼다.
금 한 냥을 하는 건마환을 세 냥에 팔아넘겨도 바로바로 매진됐다. 고작 포장지 하나의 차이였을 뿐인데, 가격은 세 배였다.
지독한 폭리!
그때의 의선은 그를 벌하기보다는 무릎을 탁 치며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같은 물건을 포장 하나로 가치를 높일 줄이야.
천생 의원인 그로선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제야 현추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때부터 거래를 시작했다.
의선으로선 전부가 아닌 일부를 거래해 줬을 뿐이지만, 현추자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를 기반으로 후에 거대한 상단주로 발돋움하였으니까.
눈앞의 그레놀을 보면서 그때의 현추자를 떠올린 테스였다.
‘딱 그의 환생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란 말이지…….’
그 단순하고 짧은 인연.
별거 아닐 수 있는 이유였지만, 테스는 그레놀에게 제안을 하고 왔다.
일정 기간 동안 독점 거래를 해 줄 터이니, 장원에 정기적으로 찾아와 물품을 거래하라고.
그 제안대로 그가 찾아온 거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둘이나 가져왔다.
“그나저나 여기 여관은 있습니까?”
“여관은 무슨.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나?”
“에이, 그럼 지금부터 필요하겠군요.”
“무슨 말이야?”
“오는 김에 몇 명 더 데려왔습니다. 보부상이죠. 그들도 머무를 곳이 필요치 않겠습니까?”
“보부상이라니. 그건 의외인데.”
그는 제 물건뿐만 아니라, 보부상도 끼고 데려왔다.
‘저 혼자 독점을 할 수 있을 텐데, 보부상을 데려왔다라.’
이는 테스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보부상을 데려와 봐야 그의 경쟁자밖에 더 되겠는가.
보부상이 가져올 물건이야 적겠다지만, 그로선 손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잘도 제 손으로 데려왔다.
“호오……. 잘도 껴 줬군? 자네가 거래할 거래 물품이 줄 수도 있으니 보부상이 낄수록 손해가 아닌가?”
“에이, 오히려 늘죠. 저로선 저들도 상품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저를 대신해서 더 많이 가져올 거 아닙니까? 덕분에 저는 흉가의 마법사, 아니 장원주님의 신용도 쌓고요.”
“보부상도 상품이라. 재밌는 발상이네.”
“후후, 제가 조금 독특하기는 하죠.”
그는 같은 상인조차 제 거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신박해. 창의적이기도 하고.’
보부상을 데려옴으로써 테스가 이득을 얻고. 이득을 얻은 그가 상단주인 자신에게 신용을 돌려줄 거라는 걸 알고 하는 행동.
그 행동의 밑바탕은 제 이득을 위한 이기심.
나쁘게 볼 필요는 없었다. 되레 좋게 볼 행동이었다.
그는 가져온 두 번째 선물도 곧바로 꾸러미를 풀었다.
“거기다 오면서 소문도 내놨습니다. 앞으로 이곳에 정기 시장이 열릴 거라고요.”
“허…….”
“그리되면 많이들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장원도 꽤 활성화될 겁니다. 어떻습니까? 제 선물이?”
“대단하군. 정말로 대단해.”
만족 그 이상의 방식으로, 전생의 현추자보다 더한 상왕이 장원에 찾아왔다.
미래가 기대되는 그를 보며 테스가 눈을 빛냈다.
‘그래, 이자라면……. 빠르게 구해 올 수 있을지도?’
* * *
그레놀이 가져온 자재들을 테스는 장원 공용 창고에 풀도록 명령했다.
일꾼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테스는 품에 담아 두고 있었던 거래 대금을 꺼내 들었다.
홀스 파워였다.
“여기 홀스 파워 딱 100알이네.”
“이런, 자재 값이야 20알이면 충분합니다마는……. 그래도 기대한 것보단 양이 작군요.”
홀스 파워를 보며 눈을 빛내는 그레놀. 그는 적은 수에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아직 장원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곧 2배까지도 생산할 수 있네. 자네가 잘 도와주면 세 배도 될걸?”
“오오오! 무려 세 배를 말입니까!?”
“그래. 대신에 자네가 몇 가지를 도와줘야 할 거 같은데 말이지.”
“당연히 도와드려야 하지요! 그래,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레놀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이 해낼 수 있음을 어필했다.
‘과연 해내려나. 해 주면 좋을 텐데.’
테스는 그의 자신감을 보며 피식 웃어 주고는.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읊기 시작했다. 테스가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기반을 쌓기 위한 재료였다.
“우선…….”
* * *
읊어 주는 목록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레놀의 표정은 울상으로 변해 갔다.
“우음, 너무 어려운 걸 말씀하시는군요.”
“그래도 필요한 것들이야. 기반이 돼야 뭘 만들어도 만들지 않겠나?”
“허…….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그 기반에 필요한 재료. 무기물들이 아니었다.
생물이었다.
소, 돼지, 닭. 각 가축들을 암수 20쌍씩을 데려와 달라고 요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레놀의 표정은 시원시원했다. 쉬운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뒤.
가축으로 기반을 쌓고, 그다음엔 그 기반을 이용해 줄 자들이 필요했다.
바로 사람이다.
대장장이, 요리사, 가축 사육사에 목수까지 원했다. 하나같이 이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필수 장인들.
‘이왕이면 알아서 정착해 주면 좋겠다만, 그건 힘들단 말이지.’
이런 장인들이 이 작은 장원에 제 발로 찾아올 리 없었다.
그럼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기술을 지녔으면서도 마음대로 데려올 수 있는 자들. 그런 자들이 하나 있었다.
바로 노예다.
테스는 기술을 지닌 노예를 원했다.
‘장원을 키우려면 필수적인 자들이야. 꼭 구해야 하는데 말이지.’
그 장인들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그레놀의 표정은 완전히 울상이 됐다.
“아시다시피……. 장인들은 데려오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게 설사 노예라고 해도요. 아시죠?”
“알지. 그래도 자네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
“후우…….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합니다마는…….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계산을 해야 했는지 시름 깊어진 그레놀은 제 손을 폈다 접었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인상이 찌푸려지다가도 펴지고, 울상이었다가도 웃었다.
‘거, 표정 한번 풍부하네.’
상인의 표정이 풍부한 경우는 드문 터. 테스는 귀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며, 그의 계산이 끝나길 기다렸다.
오 분쯤 지나자, 그레놀은 계산을 끝마쳤다.
“남은 대금 전부를 다 소모하고도……. 다음 거래에서 열 알은 그냥 주셔야겠습니다.”
“상관없네. 어쨌든 구하는 게 가능은 하단 소리군?”
“꽤 시일이 걸릴 테지만……. 네. 가능해 보입니다. 대신 최소 일 년은 독점 거래를 연장해 주시죠.”
“일 년이라…….”
그레놀을 이곳에 오게 하며 그가 내건 조건 중 하나는 독점.
앞으로 일 년간 그레놀 상단과 거래를 하는 게 조건이었다.
그걸 1년 더 연장해 달란 이야기.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물론, 테스는 그 제안을 선뜻 받지 않았다.
“3개월 추가해 주지. 어떤가?”
“허어……. 그건 힘듭니다. 10개월 어떻습니까?”
“4개월.”
“적어도 7개월은…….”
“반년. 딱 이게 내 마지막 선이야.”
“좋습니다! 반년! 어떻게든 해 오겠습니다!”
적당한 흥정을 끝내고 나서야, 그는 그레놀이 말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간단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서를 받아 든 후에야 그레놀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짜식, 반년 추가로도 만족하는 건가. 엄살을 부렸던 거구먼? 재밌네.’
그로선 테스의 예상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어 낸 듯했다.
테스로서는 그의 엄살에 한 방 먹은 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 작은 상단의 상단주가 바삐 움직이는 걸 보는 것도 꽤나 재밌는 터였으니까.
상단주가 찾아오고 5일 뒤.
자재들을 전부 나르고, 주변 장원과 마을의 사람들이 찾아와 필요한 물품들을 사며 원활하게 거래가 끝난 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레놀은 장원에 풍부한 물자를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