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챕터 13.
“후음…….”
새로운 장원주의 숨소리와 움직임이 크지 않음에도 게일은 저도 모르게 긴장되는 걸 느꼈다.
이 장원이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던 게일이었다.
‘대체 뭐지.’
이 장원이 처음 만들어질 때, 지금의 데프 백작은 영지 후계자 중 하나였다.
그는 공을 세우고자 이곳을 찾아왔고.
데려온 병사들을 부려 이곳을 개척했다. 동시에 이곳을 포함한 몇 곳의 장원을 더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게일도 그때 데프 백작을 따라온 병사들 중 하나였다.
원해서 따라온 게 아니었다.
기사가 아니고서야 제 주군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저 명을 받아 왔을 뿐이었다.
그때 운 좋게 고블린 두 마리를 잡는 쾌거를 달성했고, 장원 대리인이자 베일리프로 임명받았을 뿐이다.
그 뒤로 데프 백작이 이곳을 찾는 일은 없었지만, 게일의 머릿속에는 데프의 모습이 속속들이 박혀 있었다.
젊은 그는 소문대로였다.
사자 같았고 맹렬했다.
때로 게으른 듯 제 몸을 움츠리고 있었으나, 언제고 때가 주어지면 가장 먼저 달려 나가는 그였다.
‘장원주한테서 왜 그분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야?’
한데, 가만 서류를 바라보는 장원주의 모습에서 그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몸은 본능적으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잠깐 사이.
게일이 건네준 짧은 서류를 확인한 장원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최악이로군.”
“……죄,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보아하니 최선을 다한 흔적이 보이는데 말이야.”
그가 건네준 서류의 내용은 짧으나 단순치 않았다.
장원 생산량, 인구, 결혼 소식과 사고 소식, 곡물 소출량…….
장원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수익은 아슬아슬하고, 새로 결혼한 가족이 있는 건 3년 전이네. 2년 전에는 고블린이 쳐들어와서 여럿 다치고 죽었군?”
“저희로선 최선을 다했지만…….”
마을에 고블린 여럿이 쳐들어왔었다.
무리에서 이탈한 떠돌이들이었다.
떠돌이는 약한 개체라고 알려졌지만, 작은 장원의 입장에선 끔찍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여럿이 나서서 상대했지만 꽤 많은 자들이 다쳤다. 그중 게일의 아들 하나도 죽음을 당했을 정도였다. 그로서도 아픈 기억이었다.
“이해하네. 그게 최선이었겠지.”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뒤로 병력은?”
“애초부터 병력은 없었습니다. 자경대라고 해 봐야 이제 세 명밖에 안 남았습죠. 그나마도 겸직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모든 게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건가. 이거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나? 후음…….”
장원주 테스의 혼잣말. 질책하려는 의도가 없음에도 게일은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앉아 고심하고 있는 그의 결정.
그 결정이 앞으로 있을 자신의 삶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이 없는 그로선 마법사인 장원주에게 반항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장원주가 횡포를 부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제발 최악만 아니기를…….’
그런 그의 염원이 통했던 것일까.
“일단……. 장원에 있는 자들부터 챙겨야겠어. 자네 말고, 다른 아픈 자들도 있었지?”
“네?”
“아픈 자들 말이야. 골병이 든 자들. 그들부터 우선 데려와 봐.”
작은 장원에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대체 저게 무슨 마법이야!?’
베일리프 노릇을 하고 있는 게일.
그는 이 마을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자이기도 했다.
소싯적 전장의 병사이기도 했던지라 마법도 네 번이나 보았다.
불덩이가 훅 솟구치면,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달아나는 장관이라니!
아직까지도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최고의 장면이었다.
한데, 지금 다른 의미로 새로운 최고의 장면이 새겨지고 있었다.
“히야, 이건 완전 뼈까지 상했군. 어깨는 아예 나가 버렸고. 후음……. 무릎 연골이 거의 닳았네.”
“주, 죽을병입니까?”
“골병이야. 지속적으로 수명을 깎아 먹으니 그렇다고 해야 하나.”
“히익!”
“거, 놀라기는.”
장원주는 가만 보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의 몸 상태를 알았다.
‘마법의 눈이라도 있는 건가.’
게일의 절친인 바울의 상태를 장원주는 게일보다 더 잘 알아챘다.
그러곤 신기한 도구들을 가져오도록 했다.
“괜히 놀라지 말고 있어. 에나, 미리 준비한 뜸부터 챙겨 와.”
“넵!”
알 수 없는 알싸한 향이 나는 뜸이라는 것과.
“히엑! 그게 뭡니까!”
“아아, 이건 침이라는 것이다.”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말로 알려 주는 황금빛의 거대한 침.
이 둘을 가지고 장원주는 신기한 묘기를 선보였다.
장원주는 황금빛 거대한 침을 바울의 몸에 망설임 없이 꽂았다.
알 수 없는 곳에 침을 푹푹 꽂을 때마다 지금껏 장원주의 눈엔 없었던 총기가 보였다.
‘마법인가?’
장원주의 손을 타고 성스러운 듯 보이는 빛이 침으로 스며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100여 개가 넘는 침이 바울의 몸에 박혔고 다시 그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20분 정도면 충분했다.
“오오, 오오오! 파, 팔이 어깨 위로 올라갑니다!”
“기적이다!”
고작 20분이다.
그 20분 만에 몇 년 전부터 어깨 위로 올라간 적이 없던 바울의 양팔이 번쩍 들렸다.
‘대, 대체……. 뭐야?’
대도시에 유명한 치료사를 데려와도 이리 쉽게 치료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니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기적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에나, 뜸은 다 준비됐어?”
“진작 됐지요. 연골 관련이니 분터 허브가 중심이 된 게 맞죠?”
“오, 잘 기억하네.”
“헤헷, 기본이죠!”
제자인지 시녀인지 모를 에나.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가 뜸이라는 물건을 가져왔고.
장원주는 바울의 무릎에 턱하니 일곱 개를 붙였다.
그러곤 게일도 아는 마법을 썼다.
“불이여!”
“어억! 주, 죽는…….”
“거, 오버 좀 하지 말라니까. 떨어지면 다신 안 해 주니 참고 버텨.”
무릎에 있던 뜸에 불이 붙었다.
평소 경망스럽던 바울은 잔뜩 과장된 태도를 취했는데, 그걸 보고 장원주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어때, 뜨뜻할 뿐이지?”
“단순히 뜨뜻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게 뭐라 해야 할지. 느낌이 신기합니다.”
“후후, 잘 먹히고 있단 증거다. 잘 붙이고 있어.”
불이 붙은 뜸이란 물건은 얼마 가지 않아 연기를 뿜었고, 10분가량 유지되다가 완전히 다 타들어 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때? 이번엔 뛰어 봐.”
“허어엇!”
몸을 일으킬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던 바울. 그가 뜀뛰기를 했다.
“기, 기적…….”
“아니, 이러면 기적이 몇 번째야? 이, 이거……. 마법사님이 아니라 신관님이 우리 장원에 오신 거 아냐?”
“허허…….”
신관이라니. 아니었다.
오래전 게일이 봤던 신관도 저런 기적은 행하지 못하였다.
창상과 외상을 입은 자들을 쉽게 치료하는 건 몇 번 보기는 했다. 다 떨어진 팔을 이어다 붙이던 주교의 기적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들도 저런 종류의 병은 잘 치유하지 못했다.
‘이건 종류가 달라…….’
온몸이 쇠락하는 골병이라든지 이미 망가져 버린 팔 같은 건 치유하지를 않았다.
불가능한 건 아닌 듯했다.
귀족들은 잘도 그런 치료를 받았으니까. 대신에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결국 저런 병을 치료하는 건 고위 신관이나 가능한 기적이라는 이야기다.
한데, 자신들의 장원주는 뭔가.
무언가 대가를 받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무언가를 제물로 바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후후, 다음! 어서 와 봐.”
“옙! 다음은 접니다!”
그 결과를 한 번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었다. 연이어 만들어 내고 있었다.
‘대체 뭐란 말인가.’
장원주는 장원의 주민들이 아프지 않아야 제 재산이 줄지 않는다고.
기적을 행했다.
누구보다 세속적인 핑계를 댔지만, 그 결과는 절대 세속적이지 않았다.
기적을 누가 세속적이라고 하랴.
옆에서 가만 장원주가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게일로서는.
‘왜 이런 곳에 온 것이지? 대체 왜?’
전에 없던 경외심이 절로 드는 걸 깨달았다.
단순한 경외심이 아니었다.
데프 백작처럼 사나운 힘으로 주변을 포악하게 지배하는 카리스마와는 결이 달랐다.
장원주가 주는 경외심은 그보다 훨씬 크고 강렬했다.
넓게 포용하고 동시에 기적을 일으키며 절로 따르게 만들었다.
그가 이곳에 온 지 고작해야 3일.
알게 모르게 앓던 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새로 힘을 얻어 장원의 발전을 위해 의욕을 불태우는 자들까지 생겨났다.
생각지도 못한 변화였다.
전 같았으면 제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줄까 싶어 욕심을 부렸을 게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제가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장원주님.”
“아직은. 그래도 나중엔 꽤 도울 게 있을 거야. 자네만큼이라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자가 너무 적으니까.”
“뭐든 시켜만 주십쇼!”
“당연한 소리를. 때가 되면 더 부리지 말아 달라고 해도 부려 줄 거니 걱정 말도록.”
제 스스로 장원주를 돕고자 나설 뿐이었다.
* * *
단 일주일.
테스가 작은 장원의 주민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목숨을 건 충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가 무엇을 할 때 모두 적극적으로 나설 건 분명해 보였다.
“먼저 가서 수련할게요.”
“오냐.”
그사이, 같이 따라온 에나도 금방 장원의 생활에 적응했다.
장원주를 위한 저택의 방 하나를 차지했고 남은 방엔 그가 가지고 온 연단로와 실험 도구 설치를 하루 만에 끝냈다.
‘생각 이상으로 유능하다니까.’
그 뒤엔 제 수련 도구들을 챙기더니.
바로 이틀째부터 바깥으로 나가 수련을 시작했다.
홀로 하는 수련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그 모습을 본 장원의 어린아이들 몇이 그녀를 향해 눈빛을 빛냈다.
아이들의 생각이야 훤히 보였다.
어린 나이에 기사를 꿈꾸는 건 당연한 권리 아닌가.
장원의 아이라도 예외일 리는 없었고, 그런 아이들이 보기에 그녀는 동경하는 기사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몇몇 아이들은 대놓고 에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하고자 하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현묘한 연류검이 고작 본다고 따라 할 수 있겠는가. 고작해야 형을 따라 하는 게 다일 뿐일 터.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자극이 되기 충분했다.
‘나중에 검을 배우고 싶다고 나서는 애들도 있겠군. 뭐……. 그거도 꽤 재밌는 변화가 되겠지.’
저 아이들의 눈들이 언제고 테스도 예상치 못한 변화의 징조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꿈을 꾸다 보면 뭐든 하게 되는 법이고, 그것은 곧 발전으로 이어질 터.
장원의 아이들이 발전해 나가면 그에게도 득이 될 건 분명하다.
후에 그에게 힘이 될 것이고, 영향력을 끼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자면, 저 아이들이 크기 전에 기반을 쌓아 놓는 게 좋은 일인 터.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후음…….’
그는 기반을 쌓기 위하여 도시 지넬에서 몇 가지 준비를 해 왔다.
그중 하나가 와야 할 때가 바로 약속된 오늘이었다.
수백 미터 넘게 기감을 세우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해가 저물어 갈 시간, 테스는 제 기감을 간질이는 자들을 느꼈다.
그가 장원을 재정비하며 기다리고 있던 준비 중 하나였다.
기감을 느낀 그가 벌떡 일어났다.
데에에엥- 데에에엥-!
동시에 중앙에서 변화를 알리는 종소리가 장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