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챕터 11.
저택에서 극적인 변화를 이루어낸 건 테스가 아닌 에나였다.
그녀는 연구실을 향해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서 알려야지!’
에나는 기쁜 얼굴로 테스가 있는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음에도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드디어 성공했어요! 끝까지 펼쳐 내며 알아냈다고요!”
“오? 정말로?”
“넵!”
자신감 있게 대답하는 에나. 그녀의 표정을 보고 사실임을 깨달은 테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벌써 해내다니, 빠른데?’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어도 그녀의 치료를 빼먹지 않은 테스였다.
그는 한 달 전에야 비로소 그녀의 몸을 완벽히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단순히 걷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을 만들어 냈다는 의미다.
그 과정에서 온갖 노력을 더했다.
추궁과혈은 물론이고 선천진기를 이용해 몸을 활성화시켰다.
제 나이보다 작은 몸이 훌쩍 자랐고, 몸이 강건해지는 데는 단 몇 달이면 됐다.
얼굴의 치료까지는 아직 시간을 할애해야 하겠지만, 건강만 놓고 봐선 완벽한 치료라 봐도 좋았다.
완벽히 치료되고 다시 한 달째.
그녀는 그때도 이런 표정을 짓고 연구실을 찾아왔었다.
-성공했어요! 온갖 기운을 다 느꼈다고요?
그때, 그녀는 기감을 일깨우는 데 성공했다.
운기를 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기를 느끼는 데 성공한 거다.
몇 달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한 달이 걸렸을 뿐이었다.
‘육체 단련을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빠르군.’
그사이 단련도 꾸준히 한 그녀는 이미 육체가 준비되어 있었다.
체력은 물론이고, 십팔반병기를 기반으로 한 단련법도 기초를 쌓았을 정도다.
-그렇담 새로운 걸 배우자꾸나. 꽤 어려운 일이 될 텐데, 잘할 수 있겠나?
-당연하죠!
쓸데없이 마법을 가르치거나 하진 않았다.
처음 운기행공을 했던 그때의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직 약한 그녀에게 위험을 주기보다는 보다 안전한 방식을 택했다.
그는 운기행공부터 가르쳤다.
-지금부터 배울 건 연류신공이라고 한다.
-연류…… 뭐요? 발음이 너무 어려운데요. 대체 무슨 뜻이에요?
-네 삶처럼 흐름을 끝없이 잇는다는 의미지.
-흐름이라……. 모호하네요.
-그걸 이해할 때가 바로 네가 연류신공을 대성할 때겠지. 자아, 우선 구절부터 외우자.
연류신공.
오래전 그가 살려 냈고, 그 앞에서 죽었던 이화에게 전수해 주었던 심법.
그가 직접 창안한 몇 안 되는 무공 중 하나였으며, 동시에 그로부터 대법을 받아야만 쉬이 익힐 수 있도록 만든 무공이기도 했다.
가히 절정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고 대법을 받아들임으로써 효율성은 배로 증가하게 돼 있었다.
에나는 금세 심법을 외웠고 실행했다.
그는 고작해야 두어 시간을 가르쳐 줬을 뿐이다.
대법의 효과인지, 그녀가 본래 가진 재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히 익히는 속도가 상당하다는 건 알 만했다.
심법을 익히기 시작한 그날, 그녀는 제 몸에 내공의 씨앗을 심는 데 성공했다.
‘허……. 대법을 받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빠른 속도인데.’
그녀 바로 옆에서 내력의 씨앗을 심어 줄까 말까 고민하던 테스로선 생각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다시 두 달째.
그는 그녀에게 검을 쥐어 줬다. 지난번의 목검이 아닌 진검이었다.
-이번에 익힐 건 연류신공에 이은 연류검이다.
-그것도 끝없이 흐름을 잇는다는 데 의미가 있나요?
-매번, 매 순간 끊이지 않고 살아가라는 의미가 더 깊지.
-후음…….
-아직은 못 알아들을 거다.
-조금은 이해할 거 같은데요? 그 흐름이란 거요.
-뭣?
-에이, 뭐 제 착각이겠죠? 우선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그래. 착각이겠지. 우선 연류검은 흐름을 위하여 보법부터 배워야 한다. 자, 따라 해 보거라.
연류신공에 이어 연류검. 전생에 그가 이화에게 가르쳐 주었던 모든 무공이 에나에게로 다시 이어졌다.
계속해서 이화의 흔적을 에나에게 넘기고 있는 거지만 결과는 전과 정반대였다.
-하아압!
가녀린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검술 훈련에 매진했다.
매 순간, 매 시간을 의지로 불태웠다.
하루하루 성장해 나갔고 전생의 그보다 더 빠른 속도를 보일 때도 있었다.
테스는 그런 그녀에게 어려운 숙제를 내주었다.
매번 끊어지는 연류검에 ‘흐름’을 담아내라는 숙제였다.
이제 막 검을 든 지 몇 달.
그런 그녀에게 주어진 숙제로는 난이도가 높았다.
해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검의 벽을 느끼는 가운데서 뭔가 얻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내준 수련이었다.
그런데, 에나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고. 이렇게 그를 찾아온 것이다.
“어때요? 이게 제가 담은 흐름이에요. 끊이되 끊이지 않고……. 그러며 연결되는 거죠.”
“허……. 새로운 해석이구나.”
“제 나름의 해석이죠.”
그녀가 물 흐르듯 휘두르는 검.
그 안에는 그녀의 깨달음이 녹아 있었다.
단순히 초식을 따라 만들어 낸 움직임 따위가 아니었다.
없던 격이 생겨나 있었다.
그녀는 제 힘을 뒤로 흘려낼 줄 알았다.
단지 혼자 하는 쇼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었다.
테스는 시험을 해 보고자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도록 시켰다.
“한번 내게도 휘둘러 보거라.”
“괜찮겠어요?”
“푸핫,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어서 해 봐.”
“그럼 갑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고, 허공에 휘두르던 검을 그에게 재차 휘둘렀다.
‘이거, 대단한데?’
그녀의 검. 때론 느리나 때론 빨랐고, 멈춰 있으나 흐름이 끊어지지 않았다.
2초식에서 3초식에서 이어지는 흐름에 힘을 실을 줄도 알았으며.
또 때로는 흐름에만 몰두해 들어가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재야.’
그녀는 검술에 재능이 흘러넘쳤다.
감정 표현에 서툴고 용병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겁을 잔뜩 먹던 단점들을 모조리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의 뛰어난 재능.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재밌네.’
간간이 부족한 점이 있어도 그조차도 매울 정도의 재능이 그녀에겐 있었다.
한쪽에 치우쳤으나 그래도 상관없는 재능이랄까.
“아주 잘하고 있어. 그러니 더 휘둘러 봐라. 망설이지 말고.”
“넵! 몇 번이든!”
테스의 칭찬을 들은 에나는 더 빠르게, 더 유려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앗!”
그녀의 검을 몇 번이고 받아 주는 그의 몸놀림.
그에게서 무언가 영감이라도 받은 듯 연이어 연류검을 펼쳐 냈다.
츠츠츠츠-!
그녀의 검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점차 무게를 지녀 갔다.
그녀의 삶의 의지를 대변하는 듯 더욱 사나워졌다.
때로 맹렬하고 때로 활기찼다.
“좋구나.”
“이 정도면 전처럼 숨어만 있을 필요는 없겠죠?”
테스가 감탄할 정도의 힘을 보여 준 에나는 여전히 작은 아이처럼, 그의 인정을 받고 싶은 듯 물어왔다.
그녀의 물음.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물론. 다음에는 한쪽을 맡기마.”
“와…….”
그의 인정.
잠시 붉어진 눈시울이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이내 가려졌다.
‘녀석, 여전히 부끄러워하기는.’
테스는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머리를 가벼이 쓸어내릴 뿐이었다.
* * *
그날 이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녀는 한결 여유로워졌고 전에 없이 표정 변화가 풍부해졌다.
“하아압!”
“적당히 해라. 그러다 몸 상할라.”
그러면서 수련엔 더욱 열의를 불태웠다.
수련광이라고 할 수 있는 테스의 눈에도 걱정이 될 수준.
“상하면 그때 가서 치료해 주실 거잖아요?”
“허, 참…….”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넉살 좋게 넘길 뿐이었다.
‘하기야 지금이 제일 재밌을 때지.’
테스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성장의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경지와 그에 따르는 거대한 힘에 한창 취해 있을 때였다.
휘두르는 족족 그녀에게 성장을 가져다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다만 그가 그녀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단 하나.
‘힘에 취해서…… 거만해지지만 않았으면 한다만. 뭐, 상태를 보아하니 그럴 일은 전혀 없어 보이네.’
검이 가져다주는 힘에 취하는 걸 경계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잠시 접어 둬도 될 듯싶었다.
매일매일 테스와 대련을 펼치는 그녀다.
대련 때마다 강한 손속을 보이는 테스의 검에 시달리는 그녀는 자만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했다.
다른 자는 몰라도, 그녀에게 테스는 거대한 벽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격려자였다.
막 몸을 푸는 데 성공한 그녀가 기쁜 낯을 하고는 물었다.
대련 요청이었다.
“오늘도 상대해 주실 거죠? 바로 준비할까요?”
“아니. 오늘은 아니야.”
“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우음……. 새로 얻은 마법 주문은 얼마 전에 다 익히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다 해냈지. 어느 정도 연습도 끝났고. 그러니 이제는 바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거 같거든.”
“다음 단계라면……. 전에 말씀하신 그거요? 진행이 된 거예요?”
“그래. 그러니 슬슬 준비해 둬. 그때 가서 준비하면 힘들 테니까.”
그가 단호히 대답하자, 그녀는 테스 너머의 저택을 아련한 눈으로 살폈다.
그가 준비하라고 하는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여길 떠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쉽긴 하네요.”
“되레 예정보다 길어졌지. 자자,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녀오마.”
“……넵.”
아쉬워하는 에나. 그녀를 두고 테스는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때가 된 건가. 길었다. 그럼, 가 볼까.’
* * *
대로변을 걸어 행정관으로 향하고 있는 테스.
그의 상태는 현재 최상이었다.
‘3클래스도 슬슬 몸에 익어 가고 있긴 해.’
에나의 말대로 지난번 구한 13개의 3클래스 마법을 전부 익혀 내는 데 성공했고, 그에 대한 응용도 차분히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해독 마법의 경우는 성과가 두드러졌다.
‘침술에 응용 가능할 거 같단 말이지.’
그가 만들어 낸 해독 마법과 전혀 다른 방식의 해독 마법.
마법의 기반인 룬어가 무려 세 개나 달랐다.
그는 역류시키고 강화시켰는데.
마탑의 마법은 정화, 해제, 흐름을 이야기했다.
마법 형성의 과정은 달라도 결과는 같았다.
그 흐름을 이해하다 보니 얻은 성과가 상당했고, 이는 전생의 기억인 의술에까지 이어졌다.
“후음……. 의술에 조화시키고, 그걸 다시 내 몸에 적용하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지도.”
여기서 더 한 걸음.
무공에까지 적용이 된다면, 그때는 더 강해질 터.
이런 성과만으로도 최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슬슬 이 이상의 실험을 하려면……. 내 영역이 필요해.”
무공, 마법, 진법, 부적. 그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는 차고 넘쳤다.
안 그래도 여러 연구의 규모를 더욱 키워야 할 참이다.
게다가 에나도 문제였다.
다른 자의 눈을 피해 무공을 익히고 가르치는 것도 슬슬 한계가 왔다.
당장 몇 개월이야 잠잠하겠지만, 도둑 길드를 없앤 약발도 슬슬 죽어 가고 있었다.
저택 바깥에서 몇몇 시선들이 다시 느껴지는 걸 보면 언제 또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결국 전의 일의 반복이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건 사절이야. 무의미한 시간 낭비고.’
결국 영향력의 부재 때문이었다.
홀스 파워를 팔아 한 개인이 만지기에 큰돈을 벌고는 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금까지야 아슬아슬하게 소비와 수익의 균형을 맞춰 왔다지만 이제는 그 이상이 필요한 시점이 찾아왔다.
‘고작 저택 따위론 안 돼. 내가 완전히 통제할 곳이 필요한데……. 그러자면 역시 필요한 건 영지야.’
지금 그가 행정관을 향해서 걷는 이유는 바로 그런 영역을 얻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단순히 저택을 얻는 거와 달리, 영지를 얻는 건 본질적으로 난이도가 전혀 다르다는 거였다.
그의 현재 신분은 평민. 실버 용병이며 3클래스의 마법사.
한 개체로 봤을 땐 결코 약하다곤 말 못 하나, 그렇다고 강대한 힘을 지녔다곤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영지를 얻고자 하면 결국 새로운 신분이 필요했다.
“귀족이 돼야 한단 건데, 그러자면……. 결국 남은 건 입대잖아.”
입대.
3클래스에 이른 평민이 귀족 작위를 얻기 위해서 하는 최소한의 발악.
스스로 징발되어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우고 나서야 단승 귀족 작위라도 딸 수 있었다.
작위도 준남작. 전승도 되지 못하는 단승.
딱 그 정도.
그를 위해서 몇 번이나 목숨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그나마도 작위만 줄 뿐, 영지를 줄 거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주변 영지전이 격화되고 있어 빈 공지가 슬슬 생겨나고는 있다지만 이것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자들도 많았다.
이제 와서 영지전을 뛰어도 그에게 떡고물이 떨어질 거라곤 장담할 수 없는 지금.
‘결국 이 방법이 최고야.’
지난 몇 달간 머리를 굴리던 테스는 그만의 편법을 생각해 냈다.
입대도 하지 않고, 공을 세울 필요도 없이 작위가 없으면서도 영지를 얻을 방법이 있었다.
몇 번의 절차를 거친 테스는 행정관 중심에 다다를 수 있었다.
“허허, 오랜만에 보는군.”
“오랜만이군요. 그때보다 더 정정해지신 거 같습니다.”
도시 지넬의 행정관.
바로 이곳에서 그는 적당히 편법을 부려 볼 참이었다. 그만의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