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챕터 9.
흉가의 마법사!
그자가 하는 일처리 방식이 이와 비슷하였다.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자, 경비대장은 궁금증이 해결된 듯했다.
‘그런 거였나.’
잔혹하지만 한편으로 시원스레 일 처리를 한 주인공이 누군지를 깨달았으니까.
그러는 동시에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대체 누가 이랬을까요?”
“글쎄…….”
“안 그래도 이곳은……. 큼……. 위와 연관된 곳일지도 모르잖습니까? 미친 듯이 저희를 닦달할 건데요. 어서 범인을 찾으라고요.”
“그러겠지. 자기들의 돈줄이었을지도 모르니까.”
머리에 떠오른 흉가의 마법사를 불러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가 입을 수도 있었다. 잘하면 한직이나 다름없는 이 경비대장에서도 잘릴지 모를 일이겠지.
제 이득만 생각하면, 바로 윗선에 보고를 올리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직은 아닌 듯하다.’
그는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꼈고, 그 거부감대로 결정을 내렸다.
“적당히 시늉이나 하자고.”
“예? 뭔 말입니까. 평상시 대장답지 않게.”
“보다시피 우리로선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이런 썩어 빠진 것들도 길드랍시고 다니는데, 이리 처리해 주면 우리야 고맙지.”
“아아……. 그런 말씀이셨습니까?”
“적당히만 하자고. 적당히.”
“대장한테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뭐, 나도 그럴 때가 있는 거지.”
“흐흐, 이해했습니다.”
적당히 하고 묻으라는 의미.
그가 말한 의미를 부하들은 아주 잘 알아들었다.
“이참에 시선을 돌려야 하니 다른 길드도 몇 개 털어 보자고. 그럼 덮는 것도 쉬워지겠지?”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
그들도 차라리 편하였다.
백이 넘는 길드원들을 상대한 살인마보다도, 만만한 다른 도둑 길드를 처리하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도둑 길드를 처리하며 얻는 콩고물로 겸사겸사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수도 있겠지.
“모두 어서 치워. 완벽히!”
“명 받잡습니다!”
뜻이 통하니, 경비대원들의 행동은 재빨라졌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는 경비대장의 중후한 목소리가 아지트를 채워 갔다.
그 광경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숨어 지켜보고 있던 테스. 앞으로의 일을 위하여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던 그는 일이 수월하게 처리됐음을 깨달았다.
‘빚을 졌다고 해야 하나. 또 마주칠지도…….’
마지막으로 경비대장의 얼굴을 흘끗 쳐다본 후.
그는 유유히 사건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도시 지넬에는 한바탕 거센 폭풍우가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 * *
야만인 출신인 울란.
그가 용병 길드의 중추 역할을 맡게 된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녔다. 십몇 년을 의뢰로 뒹굴고서야 겨우 지넬 지부의 한 축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온갖 경험을 쌓은 덕에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 심지를 지니게 된 그.
그런 그가 보기에도 현 상황은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거대한 폭풍이 한바탕 지넬을 휩쓸고 지나가는 듯했다.
‘예상이 안 되는군.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나.’
시작은 일주일 전부터였다.
아멀프 도둑 길드가 괴한에 의해 완전히 괴멸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뒷배가 어딘지 몰라도, 아멀프의 패악질은 울란도 익히 알고 있던 터.
거주 지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큼은 아녔어도, 그 역시 내심 고소해하고 있었다.
그때 길드에 의뢰가 여럿 들어왔다.
도둑 토벌 의뢰였다.
의뢰주는 경비대.
모자란 손을 보태라는 식으로 토벌 의뢰를 해 왔다.
경비대가 의뢰를 하는 건 특이한 경우는 아니었다.
도시 경비대 수준에서 손대지 못하는 의뢰는 용병 길드로 간간이 넘어오곤 했으니까.
의뢰비는 짜지만 경비대와 좋은 연을 쌓을 기회이다 보니 지원자는 많았다.
의뢰가 어렵지도 않았다.
제아무리 도둑들이라도 공권력에 대항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 적당히 옆에서 도우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 일어났다.
‘도둑 길드랑 연루 된 놈들이 이리 많을 줄이야…….’
알고 보니 꽤 많은 하급 용병들이 도둑 길드와 연관돼 있었다. 얼마 전 현상 수배범으로 잡힌 랄프처럼 뒤에서 일을 벌인 자들이 많았단 소리다.
경비대는 그들을 쉬지 않고 잡아들였다.
적당히 사정을 봐주는 법도 없었다.
이참에 제대로 날뛰어 보겠다는 듯, 길드 본부 안까지 들어와서 잡아갔을 정도였다.
덕분에 바빠진 건 울란이었다.
그에게는 길드 내에 소란을 잠재울 의무가 있었으니까.
바로 삼 일 전까지도 길드 안에서 마구 날뛰는 경비대장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5일쯤 지나서야 용병이 잡혀 가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한바탕 소란이 일고 어수선해진 길드 내부는 이미 엉망진창이 돼 있었다.
‘이제 어떻게 돌아갈는지.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인데 말이야…….’
길드의 든든한 토대가 되어 줄 하급 용병들이 꽤 많이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자들도 혹 횡액을 당할세라 몸을 바짝 웅크리고 있었다.
늘 시끌벅적하던 길드 안이 조용해졌다.
울란으로선 할 일이 줄어들었으나, 가만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바깥 상황도 영 수상쩍게 돌아갔다.
며칠 사이, 도시 지넬의 행정관 몇이 사라진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놈이지.’
그런데 날뛰는 경비대장이 문제였다.
그는 도둑 길드 몇 곳을 궤멸시키고도 계속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범죄자들을 다 잡아들일 분위기였다.
‘적당히 해야 할 텐데, 일거리가 줄겠어.’
울란도 범죄자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녀석들의 사정을 봐줘야 그에게도 좋을 건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의 밥벌이였다.
경비대가 날뛰는 만큼 용병 길드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 사건들이 적당히 벌어져야 용병들 일거리도 넘쳐나는 법이니까.
그러니 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한 길드가 사라지며 생기는 나비효과.
그 효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그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내심 누가 이런 일을 벌였나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굴까 생각하며, 울란은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렸다.
‘에이……. 뭐 머리를 굴린다고 답이 나오겠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당장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길드 본부를 지키고 있던 그의 앞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거, 조용히 물건들 좀 처리하려는데, 그걸 담당하는 자를 찾아보니 울란 당신이라고 가르쳐 주던데?”
“음? 조용히? 아아, 이해했어. 이리로 들어오라고.”
* * *
흉가의 마법사 테스.
그가 용병 길드의 은밀한 서비스를 이용하겠다고 찾아왔을 때만 해도 울란은 별생각이 없었다.
길드에서 제공하는 장물 처리야, 다른 용병들도 몰래몰래 이용하곤 했으니까.
길드가 수수료는 좀 떼어 가도 대금은 바로바로 처리해 주니 많은 자들이 이용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테스가 가져온 물건들이었다.
독 바른 비수, 암기, 단검, 허나브 독, 연막…….
“허……. 이, 이게 다 뭔가.”
“좀 많지? 어쩌다 보니 쌓였는데 말이야.”
“……그럴 만한 것들이 아니긴 한데.”
하나씩 놓고 보면 별거 없었지만, 다 모아 놓고 보면 어느 계열에 있는 녀석들이 쓸지 뻔한 물건들이었다.
그런 물건을 테스가 수백 종을 가져왔다.
지난 일주일간 지넬에 불어닥친 태풍. 도둑이 쓸 법한 물건들. 이러면 뻔하지 않은가.
‘이거 추측할 필요도 없었구먼. 바로 이놈이었어.’
울란은 슬쩍 떠보듯 물었다.
“보아하니 도둑을 한 백 명쯤은 벗겨 먹어야 나올 만한 양이로구먼. 저택 지하에 던전이라도 있었나?”
“장물의 출처까지 이야기할 의무는 없지 않나? 그쪽이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는 당연히 있고.”
“묵언 규칙. 알고는 있다고.”
나온 대답은 맹랑했다.
하기야 울란 자신이었어도 쉽게 답하지 않았을 거다.
규칙을 들먹이는 테스의 능글맞은 얼굴을 보며, 괜스레 열불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 감정을 추스르는 게 최선이었다.
자신은 길드원으로서 할 일을 해야 했다.
‘마침 일거리도 없는데, 이 정도 처리해서 나오는 수수료면……. 윗선에서도 조용하겠지.’
그는 테스가 가져온 장물들의 값을 치렀다.
그 가격만 하더라도 800골드나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정확히 804골드.
그는 바로 대금을 건네주었고, 테스는 804골드 정도로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받을 뿐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비밀을 지켜 줘야지. 그게 맞긴 하네만……. 나로선 소문의 주인공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으니 놀랐을 뿐이지.”
“소문이라니? 저택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대체 뭔 소린지 통 모르겠는데?”
“허어…….”
“자자, 조용히 일이나 끝내자.”
시치미를 딱 떼며, 한쪽 귀를 파는 테스.
‘아주 확실해. 이놈이야.’
그런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울란은 여기서 더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뭐, 됐네. 지금 상황을 미리 예상할 수 있다면야 그게 신이지 뭔가. 어쩌다 보니 일어난 일로 취조할 생각도 없고, 조사는 더더욱 안 할 걸세.”
“이야, 역시 내가 아는 어떤 야만인과 다르게 융통성이 있다니깐. 이건 융통성에 대한 값이야.”
“커흠……. 뭘 또 이런 걸. 고맙게 쓰지.”
시침을 뚝 떼던 테스는 골드 4개를 울란의 손에 쥐여 줬다.
더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달란 의미가 전해졌다.
울란은 품에 4골드를 챙겨 넣으면서도 이전부터 갖고 있던 의문을 풀고자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아는 야만인은 또 누군가?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거 같은데?”
“있어. 거, 이름이 비욘이라고. 전에 몇 번 의뢰를 수행했던 녀석. 실버치고는 꽤 잘나간 녀석이긴 했는데 말이야. 무명이라 너는 모를 거다.”
그저 화제를 바꾸자고 슬쩍 이야기를 꺼낸 테스였다.
‘뭘 하고 살려나 그 녀석도.’
총 네 번의 의뢰를 같이 했던 야만인이었다. 파티를 이뤘던 시어린과는 달리 제대로 된 녀석이었다.
의뢰를 수행하던 시절, 그 녀석이 앞을 지키면 자신은 뒤에서 마법만 난사하면 될 정도였으니까.
제대로 된 전위를 둔 마법사의 위력을 보여줬던 몇 안 되는 기억이었다.
한데, 울란도 비욘을 아는 기색이었다.
“호오, 그 비욘?”
“혹시 아나? 여기까지 이름이 들려 올 정도로 유명한 녀석은 아닐텐데?”
테스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알다마다. 요즘 테스론의 표범을 모를 리가 있나. 자네도 그녀를 알다니, 거 신기하구먼. 하기야 자네도 보통 사람은 아니니 그쯤은 알 만한가.”
“뭐요? 표범? 곰이 아니고? 표범?? 허…….”
어느새 호기심은 놀람으로 바꾸어 있었다.
‘녀석도 뭔 일이 있었던 건가?’
도시 지넬로 온 지금. 다시는 보지 못할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보이지 않는 긴 선이 길게 이어진 느낌이다.
‘뭐지…….’
무언가가 감을 간질이고 있었다.
이유? 알 리가 없었다. 그가 여기서 비욘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니까.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나누자고 이야기를 꺼낸 게 꽤 길어져 버렸다.
놀란 테스의 얼굴을 몇 초 감상하던 울란. 그는 그간의 답답함도 풀 겸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맞네. 유명한 이야기인데 잘 몰랐나. 뭐, 값도 치른 게 있으니 이야기 좀 하자면…….”
* * *
야만인 울란의 입담은 그가 지닌 재능 중 가장 특출 났다.
생동감이 넘친다고 할까.
은퇴하면 이야기꾼으로 전업하는 게 어떨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
문제는 그 내용.
“허허……. 참……. 그녀석이 표범이라 불린다고? 그게 말이 되나. 허…….”
비욘의 소식을 들은 테스는 계속해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울란과 거래를 끝마치고 발걸음을 옮긴 지가 한참인데도,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만큼 그가 전해 준 비욘의 소식은 놀라웠다.
‘그 녀석, 대체 뭔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기실 그와 비욘의 인연은 그리 깊지는 않았다.
때가 맞아 몇 번의 의뢰를 같이 수행한 것뿐이었다.
의뢰 때마다 그녀의 활약이 빛이 나긴 했다. 실버 등급의 용병치고는 대단한 무위를 지녔으니까.
그래 봐야 딱 실버 수준이었다.
실버 중 특출 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골드가 되기엔 부족한 수준.
한데 지난 몇 달 사이에 테스론의 암사자로 소문이 났단다.
영지전에 끼어들어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나.
기사 몇을 베어 넘기는 데 성공했고, 병사들을 상대로 난동을 부리던 몬스터도 백 마리 넘게 황천길로 보냈단다.
용병들끼리 제 무력을 말할 때는 허풍이 넘치는 편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 듣는다고 해도 꽤 대단한 활약을 보인 모양이었다.
테스로서는 호기심이 생길 만했다.
“전에 던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는데……. 거기서 무슨 기연이라도 만난 건가?”
저 혼자만 발전하는가 싶었는데, 비욘도 그렇게 발전을 했을 줄이야. 그로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기는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었다.
자신이 전생 각성이란 특별한 기연을 얻었듯, 옛 인연인 비욘도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게 이 세상이었다.
‘그래도 신기하긴 하네.’
제 실력에 자부심이 꽤 대단한 녀석으로 기억하는 비욘이다. 언제고 기회가 생기면 그 높은 콧대를 한 번 꺾어 줄 생각이었던 그로선, 생각지도 못한 소식.
하기야 당장에 이전의 일들이 무슨 상관이랴.
‘옛날의 인연이 우연찮게 이어진 거지. 뭐, 설마 나중에라도 이어질 일이 있을라고?’
비욘과 당장 얼굴 볼 일은 없었다.
테스론과 지넬의 거리 차이는 상당했으니, 앞으로 서로 영영 연관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면, 테스론의 암사자인지 곰인지 하는 이야기는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을 듯싶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언제 이어질지도 모를 인연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테스는 길게 이어지는 상념(想念)들을 접었다. 미리 찾아 놓았던 목적지를 향해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