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챕터 4.
“…….”
암전되었던 정신이 돌아온 레마넌.
그는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단 걸 테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묶였나. 길드장은 대체 왜 이런 의뢰를 받아 가지고는……. 후…….’
격렬했던 움직임으로 인해 욱신거리는 온몸. 마도구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명백히 무리를 했다. 받은 의뢰를 행한 거치고는 손해가 컸다.
그가 제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내려고 할 즈음에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렸으면 눈이나 떠. 쓸데없는 짓 말고.”
“하……. 이미 눈치챘나?”
“그렇게 기운을 움직여 대는데 눈치를 못 채면 눈이 삔 거지.”
“쯧.”
몰래 빠져나갈 수 있다고 여겼는데, 전혀 아닌 듯했다. 여기가 내 죽을 자리인가 생각하며 레마넌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굳건히 선 테스. 그 앞으로 엄청난 화력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화로가 보였다.
그 화로 안에 있는 것들을 보았을 때, 레마넌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다 죽인 거냐?”
“그럼 이쪽 목숨을 죽이자고 찾아온 놈들을 살려 줄까? 너라면 살려 줄 거냐?”
“…….”
그럴 리가. 자신도 아지트에 적이 찾아온다면 똑같은 일을 할 거다.
‘나도 죽겠군.’
불타오르는 화로 옆. 가지런히 놓여 있는 적들의 옷가지와 자신의 마도구가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리라…….
적이 쳐들어온 상황에서도 저 정도 여유를 부리다니. 가지런히 놓인 옷가지들이 그의 가슴에 서늘함을 더해 줬다.
“정보는 어차피 다 얻었는데, 딱 하나만 못 얻었거든.”
“도둑 길드? 아지트? 어떻게 의뢰를 받았는지 다 불어 주지. 길게 가지 말자. 고통스럽지 않게만 보내줘.”
공포에 젖은 듯 연기하는 레마넌. 죽기 직전, 모든 정보를 불겠다는 기세로 횡설수설하는 그는 누가 봐도 겁먹은 소였다.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테스는 속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게 하나 빠졌어.”
“뭣?”
“네가 어디서 왔는지가 빠졌잖아? 외부인이 끼어들었으면, 그에 따른 책임도 질 생각을 했어야지.”
“도둑 길드 따위라면 모를까. 우리까지 건들면 후회할 거다.”
“글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지.”
“…….”
레마넌은 연기를 그만뒀다.
겁먹은 연기를 더 해 봐야 실효성이 없었다. 대신 이를 악물고는 아무런 말도 않겠다는 듯 테스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를 향해 테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 짧아. 어서 끝내자.”
* * *
화르르륵-!
테스는 가만히 서서 연단로에 화력을 보탰다. 그보다 더 큰 크기를 자랑하는 연단로는 기어이 네 명의 침입자를 잡아먹었다.
“후음…….”
타 버린 침입자들의 재. 테스는 바람을 일으켜 한곳으로 치워 버렸다.
사라져 버린 그들이 남긴 건 총 셋.
하나는 테스에게 남았다. 그는 침입자들이 지닌 생명력을 망설임 없이 빨아들였고 제 내력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또 다른 하나는 저들이 남긴 장비였다.
가치는 적었다. 레마넌이라고 밝힌 암살자의 물건을 빼고는 다 쓰잘머리 없는 것들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정보.
“도둑 길드는 오늘 내로 바로 처리하면 되겠고. 문제는 녀석이 있던 암살 길드인데, 거기까지는 좀 멀겠어. 어쩐다?”
그에게 쳐들어온 도둑 길드.
그리고 암살자를 보낸 암살 길드다. 암살자야 의뢰를 받고 온 거지만, 의뢰를 받음으로써 그와 은원이 생겼다.
‘은원을 남겨둬 봐야 뒤만 불편해지니……. 어떻게든 처리는 해야 한다.’
저런 자들은 제대로 처리를 해 놓지 않으면, 몇 번이고 찾아올 터.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처리해야 함을 테스는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처리의 순서. 그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주 잘 알았다.
“결국 순리대로. 우선은 가장 급한 거부터 처리해 볼까.”
밤도둑부터 고이 보내 줄 시간이다.
* * *
연단로의 불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테스는 바깥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그의 시선에 에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하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가는 건 무리죠? 제 힘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한 후 행동하는 건 기본이니까요.”
“잘 기억하고 있네.”
“누구의 가르침인데요.”
다행인가. 그녀는 테스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같이 가겠다고 억지를 부린다면, 혈도를 짚으려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곤 미리 준비해 온 작은 짐을 꺼내 들어 테스에게 건네주었다.
“가져가세요. 미리 챙겨 놨어요.”
“잘했어.”
슬쩍 속을 들여다보니 테스가 평소 준비해 놓은 것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암기용 침, 간단한 마도구, 단도 몇 개…….
‘혼자 뭘 하나 했더니, 잘도 다듬어 놨네.’
그녀가 정성스레 다룬 듯했다. 날도 잘 서 있고, 먼지 하나 내려앉은 게 없었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그간 모아 놓은 것들이다. 이걸 그녀가 챙겨 줄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에나는 잔뜩 챙겨 놓고도 그가 움직이는 게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듯했다.
“뭐든 준비는 확실히 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잘 준비된 거죠?”
“걱정 마라. 잘 쓰마.”
“그렇담 됐어요.”
당장 쓸 일은 없어 보인다만.
테스는 그녀의 정성을 봐서 품에 장비들을 넣었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머문 불안이 조금은 씻긴 듯하다.
‘정이 든 걸지도.’
처음 볼 때, 제 의지로 죽음을 택하던 녀석이었다.
겁먹은 고양이처럼 표정 하나 바꾸는 것에도 신경을 쓰던 녀석이 이제는 테스를 신경 써 주고 있었다. 확실히 정이 든 거겠지.
한 번의 변덕으로 했던 일이다.
지금으로 봐선 그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테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나는 머리가 흐트러짐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가만 테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다녀오마. 누가 오든 문 열어 주지 말고.”
“걱정 마요. 아침까지 실험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니까요.”
“이따 보자.”
“네. 꼭이요!”
* * *
저택을 나선 테스는 내력을 움직였다.
그의 인기척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가 뿜어내던 강한 존재감과 생기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데 몇 초면 충분했다.
‘어디 보자. 주변에…… 누가 있나?’
스스-!
그는 사방으로 기감을 펼쳤다. 혹여나 남아 있는 침입자의 끄나풀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중단전의 서클과 하단전 내력이 뻗어 나가며 사방을 뒤덮는다.
거미줄처럼 내려앉은 그의 기감에 걸리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설픈 것들, 따로 대비를 안 했구나.’
실패든 성공이든 보고를 위해선 사람 하나는 남겨 놓는 게 상식.
그런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적들은 레마넌을 고용함으로써 무조건적인 성공을 자신했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이리 방심한 거겠지.
‘잘됐다.’
테스로서는 좋은 일이다.
적들이 방심하는 만큼 그가 하려는 일은 더욱 수월해질 테니까.
“가 볼까.”
그는 경공을 이용해 속도를 높였다. 빠른 속도로 걷는 그의 주변으로 거주 지구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 * *
거주 지구를 빠져나가자마자, 그가 도착한 곳은 상업 지구의 유흥가.
‘너무 시끄러운데.’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그곳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알싸한 술 냄새, 취해 비틀거리는 자, 거리를 지키는 덩치…….
하나하나가 그의 움직임을 읽는 자들이 될 수 있었다. 이대로 거리를 지나는 건 멍청한 짓.
테스는 마력을 움직여 몸을 으슥한 곳으로 들이밀었다.
“거미줄 생성.”
마나가 진득한 형상을 이루고.
그의 손과 발에서 마력적인 거미줄이 생성됐다.
거미줄 생성.
본래라면 적의 움직임을 묶는 데 사용하는 1클래스의 하찮은 공격 마법이다. 얼마 전 마탑에서 얻은 이 마법을 테스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처어억.
그의 손과 발이 구석진 건물 벽에 딱 붙는다.
‘움직이자!’
거미줄을 타는 거미처럼, 그는 재빠르게 건물 위를 올랐다.
거미줄을 생성한 그는 땅에 붙어 있어야만 한다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때로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고 지붕 위를 아무런 소음을 내지 않고 뛰었다.
어마어마하게 거리가 벌어진 건물 사이는 점프와 경공을 결합하면 넘기 쉬웠다.
후웅-!
마법을 이용해 제 무게를 낮추고 점프력을 상승시키는 순간, 그는 새처럼 날았다.
어려운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1클래스.
거미줄 생성. 점프. 느린 낙하. 활보.
속도를 올리고 무게를 줄이고 점프하고 거미줄을 이용한다.
마법사들끼리도 잡스런 마법이라고 칭하는 것들. 이들을 조합하여 사용하는 순간, 인간이 사용치 않는 지붕 위의 장소는 그의 영역이 됐다.
이도 모자라 그는 경공까지 사용했다.
마법과 경공의 조합.
그 결과, 그의 몸이 초절정의 고수보다도 더 빨라진다.
‘중원 무인들이 보면 웬 사술이냐고 했겠어.’
전생의 무인들. 경공을 익혀 초인처럼 움직이는 그들도 하지 못하는 묘기가 테스의 몸에서 펼쳐진다.
고작 1클래스를 활용했음에도 벌어진 일. 간단한 응용으로 그의 이동 능력을 몇 배나 키웠다.
이제 막 시작한 마법의 응용이 만들어 낸 결과물치곤 놀라웠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 그 자체를 즐겼다.
“시원하네.”
후우웅- 후웅.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못 하는 무공과 마법의 조화. 그 일을 해내며 남들이 걷지 않는 지붕 위를 달린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주는 쾌감이 컸다.
몇 개의 지붕 위를 내달렸을까.
‘저기다!’
연단로에서 타 버리기 전에 침입자가 털어놓은 적의 아지트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힘껏 뛰어 그들이 아지트로 삼고 있는 지붕 위에 새처럼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