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챕터 25.
중원에서처럼 의선이라는 명성도 없는데, 초를 치는 자가 없는 게 되레 이상한 일이다.
이 정도 반발. 충분히 예상했다.
그사이, 울란은 목소리를 더욱 키웠다.
“내가 꼭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만, 좀 그렇잖아? 홀스 파워? 그거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약이라고. 효과는커녕 먹고 뒈지면? 어이들, 다들 전에 약쟁이 로스 기억하지?”
야만인답지 않은 융통성에 혀도 길었다.
“커흠……. 그런가?”
“……로스 녀석이라. 그놈이 약에 환장해서 결국 뒈지긴 했지.”
“좋은 녀석이었는데…….”
제법 분위기도 잘 만들었다. 약을 받으러 왔던 용병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로스 새끼는 누구야? 최근에 약을 하다 죽은 건가. 씁. 시기가 영 안 좋네.’
테스가 알지도 못한 자를 들먹이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덩치가 연신 로스라는 말을 외칠 때마다 약을 받아 든 다섯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스스로 인체 실험을 당할 셈이냐? 그러다가 한 방에 훅 간다.”
“……으음.”
“저거 먹고 언데드라도 되면 어쩌려고들 그래?”
약 한 방에 언데드라니. 그런 비약이 있으면 네크로맨서에게 팔았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정보까지 섞어 가면서 외치는 덩치의 눈은 분명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분위기가 자기 쪽으로 기울고 있으니, 이제 테스 장사를 다 망쳤다고 우쭐거리고 있는 거다.
하지만 아니다.
테스에겐 마법사이기에 쓸 수 있는 가드 불가의 기술이 있었다.
“잠깐. 내가 보증한다니까?”
“뭐로?!”
“마나의 맹세를 해 주지.”
말을 들은 울란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가 뭘 하든 이제 외통수다.
* * *
마나의 맹세.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에게는 금기나 다름없는 행위.
지켜 내지 못하는 경우, 서클이 뒤엉키는 게 기본이다. 설사 서클은 지켜 내도 마나가 마법사에게 순응을 않는다.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테스는 제가 만든 약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하, 마나의 맹세? 말로는 누가 못 해?”
“나 마법사 테스는 이 약들이 내가 말한 효능이 있음을 마나를 두고 맹세한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마나의 맹세를 외쳤고.
고오오오-
용병 길드 내에 때아닌 바람이 불며, 마나가 마구 요동쳤다. 제대로 된 마나의 맹세를 했다는 증거.
“이 미친놈, 고작 이런 일에 마나의 맹세를 한다고?”
“자신이 있으니 하는 거지. 뭐 그게 어렵다고.”
“허어……. 이거 난 놈이었네.”
테스는 그런 덩치의 상태를 가만히 보다가 피식 웃어 줬다. 상대의 수를 단박에 깨뜨렸음을 알고 짓는 미소였다.
“꽤 괜찮은 수로 장사를 초 치려고 한 거 같긴 한데, 나를 상대하기엔 수가 너무 얕았어.”
“후우, 이번은 그렇다고 치자고. 거, 오랜만에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서로 한 대씩 말로 치고받는 전투.
울란은 야만인치고는 잘 덤벼들었지만, 테스에겐 아직 약했다.
그는 테스에게 아주 악감정이 생긴 건 아닌 듯했다. 금방 승복했다.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그런 거지. 덕분에 장사는 잘했다.”
“쯧. 네놈 나가면 또 위에서 소란 일어났다고 한 방 깨지겠군.”
“허 참,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어쩔 수 없나. 대출혈 서비스로 하나 준다. 뭐 해? 받으라고.”
승복했으니, 깔끔하게 물러난다라……. 고작 말싸움이라도 주위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자다.
이런 자에게 괜히 원한을 살 필요는 없었다.
테스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남은 약 중 하나를 건네줬다. 50개의 알약 중에서 특제로 좋은 알약이었다.
울란은 큰 손에 받아 든 작은 알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맹세까지 했으니……. 잘 받지.”
“오냐. 효능 보면 다들 소문 잘 내 주고!”
“푸핫, 걱정마라.”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다.
이쯤이면 홍보 효과도 충분할 터. 테스는 마지막으로 외치며, 길드 홀을 나섰다.
“다들 내 집 위치는 알지? 흉가의 마법사가 사는 곳이다. 참고로 남은 약은 딱 45알, 아니 44알이니 잘 생각하고.”
* * *
집으로 돌아온 테스는 에나가 준비한 특제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이야, 요리에 꽤 재능이 있었네?”
“후후, 이건 자신 있는 요리였으니까요.”
“괜찮은데. 앞으로 종종 부탁하지.”
“예! 원하면 얼마든지!”
얇게 저민 고기 위에 그녀의 집에서 비전으로 전해진다는 소스를 들이부은 음식이었다.
육즙에 스며들어 간 소스의 풍미는 그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요리도 본격적으로 가르쳐야겠어. 약도 잘 넘겼고, 음식은 맛있고. 이거 좋은데.’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재능을 찾았다고 여기며, 테스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포만감을 느꼈다.
좋은 기분이다. 이대로 잠들기에 충분할 만큼 뿌듯한 기분.
배부름을 느끼며 나른해진 테스는 오랜만에 이른 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이제 막 얼굴을 들이미는 이른 아침. 때 아닌 소란이 벌어졌다.
쿠웅. 쿵. 쿵.
문이 부서질세라 마구 두들기며, 한바탕 소음이 들려왔다.
“흉가 마법사! 약 좀 어서 팔아!”
“내가 먼저 왔어!”
“열어 봐. 어서!”
* * *
“벌써 시작된 건가.”
아침의 소란스러움이 그에겐 축언으로 들렸다. 한 마디, 한 마디마도 돈이 쏟아지는 축언.
테스는 아름다운 운율을 듣는 듯, 콧노래까지 부르며 기지개를 켰다.
그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니 에나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잔뜩 겁을 먹고 놀란 얼굴이었다.
“큰일이에요! 갑자기 용병들이 몰려왔어요!”
“걱정하지 마.”
에나는 평소보다 더 움츠러들어 있었다.
‘용병과 관련된 안 좋은 기억이 있나 본데.’
평소 침착한 그녀치고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
“저걸 보고 어떻게 안 놀라요? 아침부터 난리라고요.”
“걱정 마. 다 손님이니까. 어제 이야기한 주머니 있지? 그거 우선 챙겨 와 줘.”
“정말, 별일 없는 거죠?”
“당연한지.”
테스는 필요 이상으로 몸을 떠는 에나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제야 그녀는 진정이 된 듯, 떨림이 잦아들었다.
“자자, 평소처럼 준비해 보자고.”
쿵. 쿠우웅.
“흉가 마법사! 어서!”
연신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테스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더 달아올라야 잘 팔리지.’
그는 소란이 더 커지길 원했다.
바깥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치는 용병들의 외침. 그 외침 자체가 그에겐 달콤한 축언이요, 행복한 소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소란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소문이 퍼지겠지.
괜한 소란을 만든다는 비난도 있겠지만, 그 정도야 괘념치 않았다.
결국 중요한 건 약에 대한 소문이다.
에나가 준비해 준 아침을 가볍게 들고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그것만으로도 십수 분이 흘렀다.
‘이제 슬슬 무르익었으려나.’
적당히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한 테스는 닫힌 문을 열었다.
“오오! 나왔다!”
“드디어!”
대문을 열자, 그의 눈에는 스물은 되어 보이는 용병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어제 공짜로 약을 받아 갔던 용병도 있었다. 넙데데한 얼굴이 벌게져 있는 게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저놈, 정력제는 영 필요 없다더니 또 왔네. 흠……. 보아하니, 힘이 완전히 고갈돼 있긴 하군.’
의선의 눈을 가진 테스가 보기에 저자는 정이 고갈돼 있었다.
흔히 정력을 가리키는 ‘정(精)’은 몸에 지닌 순수성이자 원기.
정이 고갈된 자치고 제대로 된 구실을 하는 자가 드물었다.
보아하니 눈가에 거뭇함이 상당히 사라져 있었다. 느껴지는 혈기도 왕성한 걸로 보아 어제 공짜로 먹은 약의 효과를 보고 이리 찾아올 만했다.
테스는 그를 딱 꼬집어 말을 걸었다.
“어제 제대로 맛을 봤나 보네. 어때, 죽이지?”
“커, 커흠……. 좀 좋던데…….”
“좀 좋으면 여길 왜 와? 그럼 가 봐. 차라리 다른 거 사.”
“헛! 이거 왜 이러시나! 좀이 아니라! 엄청 좋았네! 엄청! 아주 죽는 줄 알았다고! 거 내가 얼마나 좋았느냐 하면 말이지.”
넙데데한 자가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 있는 체험기를 널리 퍼트렸다.
‘잘하네.’
약 하나만 더 구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기세. 그걸 직접 들은 용병들의 눈은 더욱더 탐욕스러워졌다.
적당히 분위기가 익었다 싶은 테스는 에나가 건네준 약 주머니를 열었다.
“어제 말했다시피, 남은 건 딱 44알이야.”
“그, 그렇게 적나?! 내 전 재산을 들고 왔는데.”
“걱정 마. 이게 끝이겠어? 다 때가 되면 만들어서 또 팔 거야.”
“언제쯤?”
“일주일에 한 번은 확실히 팔 거야. 수량은 더 늘릴 수도 있고.”
“오오!”
물건을 파는 사람보다도 산다는 사람이 더 눈빛을 빛냈다. 분위기가 끓어올랐다.
“자, 그러니 다들 줄 서. 온 순서대로 팔아 줄 테니까.”
이제 약을 팔 시간이다.
* * *
“자, 이게 마지막. 끝!”
뒤늦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용병들 수십이 추가된 가운데, 약은 금세 동이 났다.
“아아아!”
“내가 조금만 빨랐어도! 큽…….”
아쉬워하는 용병들 사이에 거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고 여인이고 할 거 없이 눈을 빛내며 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없는 거야?”
“어이들, 이 주머니 봐 봐. 비었잖아.”
아쉬워하던 자들은 테스가 빈 주머니를 보여 주고 나서야 저택을 떠났다.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면서도, 아쉬운 듯 연신 테스를 바라보는 자들도 꽤 됐다.
‘대성공이다.’
다음 판매는 일주일 뒤라고 했으니, 그때 살 사람들이 몰려들 건 당연해 보였다.
하루 장사를 아침 일찍부터 마무리한 테스는 그들 모두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줬다. 아주 행복하게.
모두가 떠나고, 그제야 완전히 안심한 에나가 물었다.
“와아, 이게 다 얼마예요?”
“하나에 10골드니까 총 440골드지.”
그녀가 감탄한다.
“하루……. 아니, 한 시간도 안 돼서 번 거죠?”
“약을 만든 시간까지 더하면 좀 걸리겠다만, 그래도 금방 벌긴 했지.”
감탄하던 그녀가 제안을 해 온다.
“그럼 차라리 가격을 올리는 게 더 낫지 않아요? 보아하니, 올려도 살 사람이 많아 보이는데요.”
“후후, 아니지. 그런 식으로 얍삽하게 장사를 해 봐야 금세 경쟁자만 치고 올라오는 법이야.”
“에이, 그럼 안 되죠. 아쉽네요.”
얼핏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었지만, 테스는 부정했다.
‘어설프게 올려 봐야 안 좋지. 후후. 이건 어차피 기본형이야. 나중에 슬슬 약효가 질릴 즈음이면 강화판이 또 있거든.’
그는 홀스 파워 하나로 일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 돈을 기본 자금으로 삼아, 더 강한 약을 언제고 만들 작정이었다. 필요에 따라 선천진기의 양도 조절하면 버전도 여러 가지 만들 수 있었다.
돈 벌 방안이 많은데, 쓸데없이 얄팍하게 굴 필요가 없다.
거기다 에나가 모르는 또 다른 비밀이 있었다.
‘제작비라고 해 봐야 전부 다 해서 고작 20골드 들었다고 하면 놀라 자빠지겠지.’
에나는 그가 연구실에서 사용한 모든 재료를 이 약의 재료로 여기는 듯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남아 있는 재료와 선천진기만 가지고 만든 게 홀스 파워다.
그로선 뭘 해도 남는 장사였다.
‘역시 의술이 최고야. 돈 벌어서 단약 장사만 해도 내공 늘리는 건 일도 아니겠어.’
그러니 흡족할 수밖에.
“이 돈이면 이제 수련 도구도 더 추가할 수 있겠다.”
“새로운 수련 도구요?!”
그녀가 눈을 빛냈다. 언제부턴가 수련을 즐기게 된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지금이면 몸이 성장하는 게 느껴질 테니 슬슬 재미가 붙을 때가 됐긴 하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테스는 구해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에나를 위한 수련 도구, 내공을 위한 약재, 실험을 위한 도구들까지 살 건 많았다.
다행인 건 이 모든 걸 해결할 방안을 찾았다는 거다.
‘하나씩 구해 보면 되겠지. 우선 오후에 마탑에 한번 들러야겠어.’
새로 벌인 일이 성공했음에 테스가 기뻐하며 저택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때, 예상치 못한 방문자가 찾아왔다.
“어이, 잠시 이야기 좀 하지?”
“하, 뭐야?”
테스도 알지 못하는 낯선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