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챕터 15.
“1클래스에서 물과 독, 금속 변환, 바람 조종. 2클래스에서는 활력 마법을, 가능하면 냉기 화살도 줘.”
“와, 꽤 많이 사시네요. 보자, 가격은 총 800골드네요? 가능하죠?”
“당연하지.”
800골드라. 순식간에 기사 하나 무장시키는 금액이 사라진다.
이건 시작이었다.
마법에 이어 무공까지 단련해야 할 테스다. 그를 위한 내력을 위해서 그가 갖춰야 할 건 많았다.
그는 미리 생각해 뒀던 물품들을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다른 물품들도. 테스너 허브나 마석, 그리고…….”
* * *
카운터의 마법사는 그가 물품들을 주문할 때마다 안을 뒤져 꺼내 왔다.
그리고 그가 모든 물건들을 받아 들었을 때,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총 1600골드입니다! 손님!”
“크흡……. 미친 금액이네.”
“왜요? 보니까 주머니 안에 마법 방어구가 있던데, 그거라도 두 개 파실래요? 잘 쳐드릴게.”
마법사의 눈에 탐욕이 스쳐 지나간다. 테스는 그 탐욕을 무시했다.
‘누굴 벗겨 먹으려고.’
그는 피눈물을 삼키며,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들었다.
“됐어. 여기 1600골드.”
차르르륵-!
대다수의 보석과 골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석 보증서까지 확인하고서야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제대로 된 것들이네요. 1600골드 확인했습니다. 그나저나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이 정도면 싼 거라고요?”
“……싸기는 무슨. 거덜 나겠구먼.”
인상을 확 찌푸리는 그. 그런 그를 보며 환하게 웃는 마법사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 왔다.
“에이, 아직 돈 많이 남아 보이는데요, 뭐. 아님, 이참에 마탑 퀘스트라도 하실래요? 듣자니 꽤 활약한 거 같은데?”
“내 여기 도착하자마자 바로 여길 왔는데, 뭘 들어서 안다고?”
“다 정보통이 있죠. 마탑 퀘스트라도 받으실래요? 의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고요.”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는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이것도 비전이겠지. 그나저나…….’
마탑의 퀘스트라.
돈을 썩어 넘치게 쌓아 둔 채 마치 물 쓰듯 쓰는 게 마법사다. 그들이 던져 주는 퀘스트는 어렵지만, 그만큼 많은 돈을 준다. 특혜도 있었다.
“신용도 쌓이면, 물품 할인도 있다고요. 어때요?”
“됐수다. 아직은 그런 거 받을 때가 아니니까.”
솔깃하긴 하지만 거절했다.
‘아쉽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당장은 퀘스트나 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이번 기회에 토대를 더 쌓아야 할 때니까.
다행히 아쉬워하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그녀도 일손이 부족했는지 여지를 남겨 주었다.
“후음. 아쉽네요. 꽤 괜찮은 퀘스트가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언제든 말만 하세요. 보증서만 있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뭐, 생각해 보지.”
마탑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테스.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 * *
‘뒷일을 생각하면 오래 머물 곳부터 구해야겠어. 이왕이면……. 그래, 여관보다는 제대로 된 집부터 구해야겠구먼. 집이라.’
한결 가벼워진 몸을 하고 나온 그는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도시 행정관들이 머무르는 관이었다. 관은 넓었고, 기다리는 자들로 넘쳤다.
테스는 요령을 발휘했다.
“큼, 뭘 이런 걸 다…….”
“수고하게.”
“허. 바로 통과하게나.”
돈이라는 요령이었다. 몇 십 실버를 건네주고 나서야 그는 순서를 무시하고 바로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의 품엔 이반이 준 패도 하나 있었지만, 그거까지는 당장 쓰지 않고 있었다.
혹시 모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어쨌든 몇 번의 관문을 거치는 데 성공했다.
슬슬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잘하면 내일 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꼬장꼬장하고 늙수그레한 행정관이 있었다. 피곤에 절은 얼굴이지만 눈은 살아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집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신분은?”
“여기 실버 용병패와 보증섭니다.”
용병패와 보증서를 이용해 신분을 증명했고, 임시 거주민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흐음……. 됐네. 이걸로 신분은 증명했고. 그래, 어떤 곳을 구하는가?”
“외곽 쪽에 적당한 곳이면 됩니다. 혼자 머무를 거니까요.”
“그런 곳이 흔하진 않은데…….”
그는 여기서도 요령을 부려 7골드를 건넸다. 피곤에 절었던 행정관의 표정이 꽃처럼 환하게 피었다.
“큼큼. 이거 귀한 분이 왔구먼. 그래, 자네가 원하는 곳을 내 바로 찾아보지. 오호, 운이 좋아. 흔치 않은 건데, 마침 있구먼.”
“그거 다행이군요.”
“뭐 거의 공지나 다름없는 곳이니. 싸게 넘기지. 400골드. 어떤가?”
“흠. 좋습니다.”
“거 행정 처리가 며칠은…….”
“아! 그리고 이건 좋은 물건을 소개해 주신 데 대한 일종의 성의입니다.”
추가로 1골드를 행정관에게 넘긴 테스.
‘새끼, 탐욕스러운 거 보소.’
행정관은 거의 날 듯 움직여서 일 처리를 신속하게 마무리했다.
“허허, 뭘 이런 걸 다. 잠시만 기다리게나. 자, 끝났으이. 어서 받아 가게. 안내는 내 보조가 해 줄 걸세.”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루 만에 그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다.
돈으로 금칠을 해 놨으니 뒤처리는 걱정할 것 없었다.
행정관이 건네 준 키와 증명서를 받아 든 그는 곧바로 행정관 보조의 안내를 받아 도시 외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넓적한 공터 위. 낡아빠진 폐가가 보였다.
“여깁니다. 하하. 많이 낡았죠?”
“뭐, 당장 쓰러지지는 않겠네.”
“그래도 안이 넓기는 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남쪽의 거주 지역. 그중에서도 가장 끝. 거의 폐허에 가까운 집이 그가 원하는 목적지인 셈이었다.
“좋네.”
낡아빠진 집터보다도 그 주변에 있는 잡초 더미들을 그는 더 흐뭇한 눈으로 바라봤다.
‘생명력이 넘쳐.’
미리 받은 키를 넣어 돌리자, 문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끼이이익-!
낡아빠진 문을 지나 들어선 안은 휑했다.
휑한 집 안, 버리고 남은 낡아빠진 테이블 위에 돈주머니를 올렸다. 삐거덕대는 테이블이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했다.
그는 상관하지 않고, 방구석에 턱하니 몸을 앉혔다.
“이제 시작인가.”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 또 다른 시작에 대한 기대감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 * *
바닥에 앉은 지 몇 시간.
고작 몇 시간의 휴식으로도 그는 몸에 활력이 차오름을 느꼈다.
“으차, 한 단계 더 나가려면 이럴 시간도 없지.”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머리로는 끊임없이 제 계획을 점검했다.
‘상위로 나가야 해. 심법도 더 상위로 끌어올려야 하고.’
하단전에 기반을 잡은 의생공. 이것 상위의 내공 심법이 존재했다.
선천여의생공.
생명이 타고난 선천진기를 직접 수련하는 괴이한 무공. 선천여의생공은 다른 내공 심법과는 궤를 달리했다.
‘중단전이 열려야 슬슬 진입할 수 있는 무공이란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원리 자체가 타 심법과는 달랐다.
여타 내공 심법은 주변의 자연지기를 끌어왔다. 끌어온 기운을 제 몸에 심는 게 기본이고, 의생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천여의생공은 달랐다.
끌어오기는커녕 제 몸에 선천진기를 직접 자극하면서 시작했다.
가진 생명력을 계속해서 자극하면 반응이 일어난다. 가장 처음 일어나는 반응은 하나.
‘고통……. 미친 듯이 힘들지.’
생공을 돌리는 매 순간, 고통으로 물든다.
쉬운 수준도 아니다. 침술에 대법까지 더하지 않고선 반각(15분)도 이겨 내기 힘든 큰 고통이다.
그 고통을 이겨 내며 가만있어서도 안 된다.
자극해서 뭉친 생명력이 풀린 사이, 그때를 노려 움직여야 했다.
고통 속에서 미리 준비한 단약과 음식을 섭취해야 했다.
그 단약과 음식에 섞인 진득한 생명력. 그 생명력을 제 몸의 선천진기와 합쳐야 했으니까.
선천진기를 자극하고 자극시킨 상태에서 외부의 것을 흡수하고 제 몸의 것으로 삼는다.
말이 쉽지, 매 순간이 고통이었다.
“전생도 하루 반 시진이 최고 기록이었던가.”
수련 자체가 고행.
어지간한 고통으론 꿈쩍도 않던 의선도 하루 반 시진이 최선이었다.
그러니 더 말을 해서 뭐 할까. 보통의 무인은 그 고통이 두려워 행하지 않는 수련법이 바로 선천여의생공이었다.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안 했겠지.’
전생의 의선도, 모종의 사건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수행이었다.
어쨌건 전생엔 해냈다. 그리고 효용을 얻어 천하 10대 고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사기적인 기운이야. 그러니 가능했지.”
선천진기가 많을수록 육체는 강건해진다.
내력에 선천진기를 더하면, 그 기운은 더욱 강대해진다. 쌓는 속도조차 전에 없이 상승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기이한 선천여의생공은 수련할 가치가 있었고.
그 가치를 이 세계에서도 증명할 생각인 테스였다.
* * *
증명의 방법은 이전과 달랐다.
“이번엔 여의신공 수련 방법을 한번 바꿔 보자. 마침 새로운 것도 있으니까.”
자신에겐 이전과 다른 무기가 있었다. 마법이다. 이 무기를 이용한다면 전보다 더 쉽게 나아갈 수 있을 듯싶었다.
증명? 근거? 그런 게 있을 리가. 하지만, 테스는 분명 확신하고 있었다.
흡수하는 손길을 얻음으로써 더 나은 방식을 찾아냈다고. 때문에 한참 뒤에 수련할 여의생공 수련을 지금 시작하는 거였다.
‘바로 하자.’
그는 수련의 순서를 바꿨다.
대법을 실행하고 제 몸에 지닌 선천진기를 자극하기 이전에 다른 생명력을 취하는 일부터 행했다.
음식? 단약? 그런 게 당장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지금의 그에겐 선천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단약도 신선한 음식도 필요 없었다.
그를 대신할 진득한 생명력들이 그 주변에 넘쳤다.
저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잡초들이다.
스스스스-!
선천여의생공에 빠져들기 전에 그는 마나부터 일으켰다.
마나. 변형. 흡수.
세 개의 룬어가 조합되며, 주문이 만들어진다.
“흡수하는 손길!”
진득한 마나가 그의 손길을 타고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마나가 잡초들에 깃든다. 미약한 힘을 가진 잡초가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진득한 기운이 담긴 그의 손길이 잡초를 타고 흘렀다.
손에 닿은 잡초가 메마르고 갈색으로 변색된다. 녹빛의 진득한 생명력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들어 온다.
흘러들어 온 거대한 생명력에 테스가 몸을 움찔한다.
‘생각보다 기운이 더 크다!’
예상 이상의 기운이 그의 몸을 타고 들어왔다.
하기야 꽃 몇 송이로도 상당한 기운을 느꼈었다.
지금 그가 빨아들이는 생명력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살아 있는 식물들. 그러니 생명력이 넘칠 수밖에!
잎에서부터 뿌리 끝, 뿌리 끝에서 머문 흙의 생명력까지 예상보다 많은 기운들이 흘러들어 와 그의 온몸을 가득 채운다.
그 주변 잡초의 생기가 다 빨려 들어가는 덴 고작 1분이면 충분했다.
진득한 생명력이 들어오자 몸에 활력이 넘친다.
평생토록 이대로 머무르고 싶은 편안하고 아득한 기운이 그의 온몸을 뒤덮는다. 아득하다. 그럼에도 그는 충만함을 더는 즐기지 않았다. 아니, 그리하지 못했다.
‘서둘러야 해.’
허락된 시간이 짧았으니까.
그대로 두면 이 기운은 자연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러기에 즐길 시간 따위는 없었다.
어서 흡수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원래대로 돌아와 생명력을 자극시켜야 했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가부좌를 틀었다.
-생명의 기틀은 존재로부터 시작되니. 그 존재의 시작은 다시 음과 양을…….
가부좌를 튼 그. 전생에 수만 번을 외웠을 구절을 이 세계에서 처음 시작했다.
의생공보다 심오하며 더 깊이 있는 묘리. 의술을 익힌 의원이며 동시에 그를 강대한 무인으로 만들었던 선천여의생공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기운이 움직였다.
선천진기가 자극을 받았다. 선천진기가 흔들리니, 주변에 있던 생명력이 그 자리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큽…….”
지독한 고통이 생겨난다.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했다.
‘여전히 지랄 맞은…….’
안 그래도 흡수하는 손길로 짙은 생명력을 내포하고 있는 그다. 더 거대한 고통이 그를 휘감는다. 처음 의생공을 익힐 때보다도 더 강력한 고통이 그의 몸을 감싼다.
까드득.
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그리해야만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