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챕터 6.
장원(莊園).
귀족이 지배하는 영지의 하위 개념. 보통은 귀족에게 봉사하는 준귀족이라고 부르는 계급이 이 장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장원을 내리고 장원의 주인들은 장원을 내린 귀족에게 세금을 바치고 유사 시 군대를 제공해야했다.
‘상부상조하는 거지.’
물론 귀족도 장원에 위험이 닥치면 군대를 보내어 보호를 해 주어야 했지만, 장원주보다는 귀족들이 우위에 있는 쌍무계약으로 볼 수 있었다.
봉건주의에 입각한 이 계약에 의거하여 이 세계는 굴러간다.
‘부족한 영지 영향력을 세분화해서 이리저리 뿌리는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 테스는 장원을 소유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장원 하나 사고, 적당히 돈이 나오게 만들어 둔 다음 나는 수련에 매진한다. 그러면 적어도 이십 년 안에는 전생에 죽기 전의 경지에 들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탁.
테스는 식사를 끝내고 나이프와 포크를 식탁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좋아. 다음 목표는 장원의 구입이다. 전생처럼 거창하게 문파까지야 만들 것은 없겠지?’
테스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전생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것을 자신의 천명으로 알았고 무공도 같이 익혔었다.
하지만 그건 전생.
지금의 테스는 그렇게까지 이타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자아가 현생의 것이니, 아무리 전생의 기억을 자각하고 영향을 받고 있다고는 해도 전생처럼 살수는 없었다.
테스는 확실히 결론을 내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여관의 계약은 내일까지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낮이 되면, 오래도록 지냈던 이 여관을 떠나게 될 것이다.
* * *
때는 이른 아침.
하루 일거리를 찾아 움직이는 자들이 가장 분주할 시간. 사람들 사이를 거침없이 이동하는 테스. 그는 제 갈 길을 찾아가는 데 여념이 없었다.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그나저나 용병 길드도 오랜만이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눈에 목적지가 보였다.
테스론 용병 길드.
이 영지에 있는 가장 거대한 길드들 중 하나인 곳. 멀리서부터 그곳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였다. 지난 몇 개월 전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주변에 영지전이 있어서 그런가. 활황이로군.”
용병. 중원에서는 소위 낭인이라고 하는 자들과 비슷한 족속이다.
하는 일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선악을 가릴 리도 없었다. 돈을 주는 고용주가 일을 맡기면 그저 할 뿐이다.
일의 종류도 다양했다. 잡일에서부터 몬스터 토벌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이 넘친다.
그런 그들의 수준을 나누는 건 등급.
브론즈, 아이언, 실버, 골드, 플래티넘.
총 다섯 단계의 등급이 있고 각각이 다시 삼 등위로 나뉘곤 한다. 브론즈 1, 2, 3. 이런 식이다.
등급을 올리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의뢰 수행의 성공과 힘을 통한 자격 증명.
사실 길거리에서 굴러먹는 용병이 대단한 실력을 갖출 방법이 얼마나 될까.
대다수가 의뢰 수행을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등급을 올리곤 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어서 용병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지랄 맞았다. 등급이 오를 때마다 성격 파탄이 한 단계씩 난다는 말은 우습지도 않은 진실이었다.
성격적 결함을 지닌 살인마 새끼들이 모인 곳.
그게 용병 길드였다.
‘그래도 길드라는 게 있긴 하니 낭인들보다는 훨씬 나은 거 같긴 한데…….’
그나마 이들이 제대로 돌아가는 건 용병왕인가 뭔지 하는 자가 통합을 이룬 덕분.
이전에는 워낙에 돌아가는 방식이 중구난방이었던지라, 성 단위로 돌아가는 중원의 낭인들보다도 못한 오합지졸이 바로 이들이었다.
달리 방법이 있었더라면 그도 오지 않았을 곳이 이곳 용병 길드였다.
‘쩝. 중원이었으면 의원 노릇을 해서 쉽게 돈을 벌었을 건데. 여긴 신관이 있으니 사도 소리 듣기 딱 좋으니, 당장 그 방법은 텄고……. 쯧.’
어쩌랴. 장원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결국 여기였다. 겸하여 실전도 할 수 있으니 좋고.
“큼…….”
얼마 전 뭔 일이라도 벌어졌었는지 금이 크게 가 있는 길드 문을 테스는 힘차게 열어젖혔다.
* * *
그가 들어서자 몇몇 용병들이 슬쩍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눈길을 돌렸다.
파티라도 하자고 들러붙는 자들은 없었다.
몇 달간 의뢰를 수행하지 않았던 그였으니까. 실버 랭크의 용병 따윈 그들의 기억 속에 금세 잊힌 거다.
‘뭐 당연한 거지.’
테스는 오랜만에 들어선 용병 길드에서 어색함을 느끼며 곧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에 게시판이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언 랭크까지 의뢰가 적혀 있는 게시판이었다.
전체 등급 중 3 단계에 위치한 실버인 그가 의뢰를 받으려면 그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리 마련된 몇 개의 카운터.
그곳에서 의뢰를 받아야 한다. 이때부터는 사람이 직접 의뢰 리스트를 넘겨줬다. 일종의 대우라고 할까.
카운터에 다가가자마자,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올리는 접객원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엇?! 너, 여기에 취업한 거냐?”
“엇?! 너, 너?!”
블론드색이 잘 어울리는 곧게 뻗은 긴 머리. 길게 자란 속눈썹 아래 큰 눈에 박힌 붉은빛 눈동자. 그 아래로 펑퍼짐한 로브를 입고 있는 여인.
다른 자라면 한 번쯤 돌아볼 법한 뛰어난 외모. 하지만 테스는 그녈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럴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고도 남았으니까.
“시어린, 파티 깨지고 여태 등급도 못 올린 거냐? 네가 왜 여기 있어?”
“헹.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어쩌겠어. 당장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시어린. 그가 아이언 랭크 시절, 잠시 정식 파티를 이뤘던 동료 중 하나.
총 다섯 명으로 이뤄진 파티원들 중 전원이 아이언 랭크였다.
마법사는 테스 하나. 시어린은 기도 주문 셋을 아는 수행자였고, 나머지는 전사였다.
모종의 일이 있어 깨졌던 파티는 그 이후 서로를 원수 보듯 했다.
“신관도 못 된 게 여전히 콧대는 높구먼.”
“신경 쓰지 말라니까! 이 수행만 끝나면 정식으로 서임 받을 수도 있다고.”
“오냐. 오냐. 2년 전에도 그 소리를 들었던 건 내 착각이겠지.”
“……시끄러.”
본래도 마법사와 신관이 될 수행자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한 터.
모종의 일이 있고 나서 둘의 사이는 더욱 최악이 되었다.
‘쯧. 왜 하필 여기서 보나.’
그 뒤로 정식 파티를 웬만하면 짜는 법이 없었던 테스로서는 딱히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랴.
시어린이 먹고살자고 카운터를 맡았듯, 그도 돈과 실전이 필요했다.
“짜식, 예전 같았으면 바로 일어나서 덤벼들었을 게 지금은 성격 많이 죽었네?”
“헹. 너만 할까. 비루한 몸을 가진 마법…… 아니, 이젠 비루하진 않네? 큼큼……. 뭐 됐고. 의뢰 받으러 온 거지?”
“오냐. 여기 용병패 받고, 리스트나 어서 쭉 뽑아 보라고.”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한 둘.
이 둘은 쓸데없는 소모전을 포기하고, 각자 제 할일들을 하기로 했다.
“어디 보자. 등급이…… 씁?! 벌써 실버 2라고?! 후, 대체 어떻게 올린 거지? 그에 어울리는 일을 찾아보도록 할게.”
“제발, 그런 말은 마음속으로 좀 해라. 여튼 돈이 좀 되는 걸로 찾아내라고.”
“……큼큼, 알았어.”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시어린은 실버 등급에 맞는 일거리를 몇 가지 추려서 꺼냈다.
“자, 네 성격대로 골랐어. 시간 잡아먹는 탐색은 빼고. 약한 거, 중간 거, 강한 거. 딱 맞지?”
“용케도 기억하네. 어디 보자.”
그녀가 추려 놓은 의뢰지를 냉큼 받아 들었다.
“흐음…….”
그녀가 추려 놓은 의뢰는 총 셋이었다.
첫째, 고블린 부락 토벌 의뢰.
미리 만들어진 토벌대에 끼어서 부락 하나를 으깨는 일이었다. 고블린이 영악하다지만 하급 몬스터이기에 할 만한 축에 속했다.
‘이건 돈이 안 되니 패스.’
테스가 보기엔 하급의 의뢰였다. 그는 바로 의뢰서를 내려놓았다.
다음 의뢰.
주변 영지전의 전쟁 수행.
그가 머무르는 테스론 영지의 주변인 앙스와 휘슬 영지의 용병을 모으기 위한 의뢰였다.
마법사인 그가 선봉에 설 리는 없으니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됐다.
‘고기 방패로 쓰이는 건 하급 용병까지지. 뭐, 이 세계 영지전 자체가 애들 소꿉장난 수준 같긴 한데.’
영지전이란 거 자체가 무작정 최악으로 치닫지만은 않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좋은 의뢰는 아냐.’
의뢰금은 높지만 신용도가 없다.
그가 고른 영지가 전쟁에서 패배하면 돈도 떼인다.
승리에 취한 상대 영주가 적군이라고 사형시키는 미친 기행이 벌어지기도 하는 게 전쟁 의뢰였다.
크게 한탕 하는 놈들이야 마음에 들어 하지만, 지금의 테스가 보기엔 영 아니었다.
마지막 세 번째 의뢰를 본 테스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호오……. 이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어? 그런 의뢰는 네가 싫어하는 쪽이었을 텐데? 전 같았으면 중간 수준을 택했을 거 아냐?”
“계속 전이랑 똑같으면 발전이 있겠냐. 아이언 랭크 씨?”
“윽…….”
놀란 시어린을 말 한 방으로 무너트린 테스. 그는 마지막 의뢰서를 자세히 살폈다.
‘돈도 벌고 제대로 된 실전도 겪으려면 이게 가장 좋겠어.’
* * *
“살아서 돌아와.”
“여기 돌아올지는 모르겠다만, 살아는 있을 거다.”
“헹. 기도는 해 줄게. 수행자 기도이니 효험이 있을 거라고.”
“퍽이나. 잘 살아라.”
시어린의 애정 어린 인사와 함께 테스는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가 받아들인 의뢰는 선물을 위한 호위.
정확히는 이 영지의 주인인 테스론 자작이 남동쪽의 데프 백작에게 보내는 선물을 위한 호위였다.
상위 귀족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보니 자연 의뢰비는 비쌌다.
‘선급금만 17골드라. 차고 넘치네.’
통상 실버 2에게 주어지는 의뢰비는 10골드 선. 이 정도면 선금도, 보상금도 전부 높은 수준이다.
선물을 탈취하려는 습격자가 넘칠 테니 내린 조치인 게 분명했다.
‘당장 돈이 필요한 나로선 딱 좋네. 타이밍도 꽤 좋고.’
무려 일주일간이나 모집을 하고 있었던 상황. 딱 내일 오전이 되자마자 모집이 끝나고 곧바로 출발을 하게 돼 있었다.
돈이 떨어진 그로선 시작 시기도 딱 좋았다.
일단 좋은 점만 보자면 그러했다.
‘일반 의뢰는 확실히 아니긴 해. 본래라면 2클래스인 내가 끼어 봐야 크게 중하지는 않겠다만…….’
반대로 나쁜 점만 보자면 썩 좋은 의뢰는 아녔다.
의뢰금이 비싸다는 건 그만큼 위험이 높다는 의미니까.
적도 몬스터가 아닌 인간일 확률이 높았다.
마법사이기에 후위를 맡는다고 해도, 몬스터와 달리 보통 인간은 후위부터 노리곤 했다. 마법사의 장거리 포격은 그들에게도 위협적이니까.
때문에 후위는 결코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되레 위험할 뿐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피했을 의뢰였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였고, 곧바로 움직였다.
“여기쯤인가……. 오, 제대로 꾸려 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