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챕터 1.
“이거 참……. 장자지몽도 유분수지. 차원을 넘어서 전생 각성하는 건 또 뭐냐?”
테스의 입에서 한숨이 푸욱 흘러나온다.
어이가 가출을 하다 못 해 드래곤의 입까지 기어들어 가는 감각.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용병 마법사로 구른 지 벌써 십 년. 알고 있는 주문이라곤 고작 여덟 개 정도.
그래도 용병 랭크 5단계 중 3단계에 속하는 실버 랭크로 지금까지 아등바등 살아왔다.
집 하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목숨 걸고 돈을 벌어먹고 살아가는 처지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나름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마음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에 금이 가고 있었다.
“무림이라…….”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알지 못하는 곳.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그런 세계에서 살던 전생의 자신을 꿈으로 꾸었다. 이른바 전생 각성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언뜻 기억나는 정도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일평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고. 머리에 새겼다.
엄청나게 좋은 일.
동시에 어이없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전생 각성을 한 걸까.
“나도 모르게 드래곤 하트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은 건가. 아닌데, 그런 일도 없었는데. 허 참……. 대체 뭐지?”
본능이 강하게 속삭인다.
어젯밤의 꿈은 진실이며, 전생의 자신이라고.
인격과 자아가 바뀌진 않았다.
전생의 모든 것이 전부 기억나지만. 머리 한구석에서는 정보로만 자리하고 있는 그런 감각이다.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테스의 인격을 전혀 침범하지는 않는다.
실로 기묘한 감각.
몹시 신기하고 기괴한 감각이기에 테스는 여전히 입을 쩝쩝거리며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대박이긴 한데, 왠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선물을 받은 셈이라 그런 것이다.
더불어 전생과 지금이 가져다주는 괴리감도 한몫하고 있었다.
“하…… 똑같은 나인데 뭐 이리 다르냐.”
전생.
그는 강호라는 다른 차원에서 의원이었다. 반푼이도 아니었다.
강호 제일 신의! 의선!
천하 10대 고수 중 한 명!
여러 수식어가 붙었고. 92세에 생을 마감할 정도로 장수했다.
전생의 그는 강인했으며, 열정이 넘쳤다.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초인이었다.
만약 그 기억과 함께 인격과 자아까지 넘어왔다면. 지금의 테스라는 인격은 지워져 버리고도 남았겠지.
그만큼 강렬하였다.
그리고 알고 있는 지식도 많았다.
“쩝. 전생이나 지금이나 고아 출신인 건 같은데. 어째 삶이 이리 천지 차인지. 전생에 초인이었어도 현생에서는 별 볼 일이 없을 수도 있나? 나, 전생에 사람을 꽤 구했는데.”
전생에 공덕을 쌓으면 극락이나 선계에 이른다는 말이 있었다. 꽤 공덕을 쌓은 듯한데, 현생은 어째 이 모양이다.
아니면 전생의 마지막 순간 우화등선을 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탓일 지도.
“공덕이고 뭐고. 다 개소리였네.”
테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서 숟가락을 들었다. 건더기가 없는 수프를 한입 떠먹었다.
강대했던 전생의 자신과 알맹이 없는 수프를 떠먹는 지금.
전생과 지금에서 느껴지는 격차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햐……. 전생 마렵네. 현생은 이렇게 고단한데.”
테스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큼지막한 칼자국이 난 험상궂은 놈.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놈. 귀 하나 없는 놈 등. 다양 다종의 인간들이 보였다.
공통점이라면 다들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거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이 여관은 용병들로 득실득실했으니까.
근방에 몬스터 무리가 자리를 잡았다. 그에 생긴 대규모 몬스터 토벌 의뢰가 있었다.
여기에 몇 년간 지지부진하게 질질 끌고 있는 영지전도 있으니 의뢰는 넘쳐났다.
그 의뢰 때문에 다수의 용병들이 이 마을을 비롯해서 다른 마을들까지 바글바글했다.
그나마 토벌은 무사히 종료됐다.
전쟁 의뢰에 끼는 게 아닌 용병들은 모두 빠져나갈 시간.
테스도 마찬가지다. 마법사 용병으로서 토벌에 참가했고, 짭짤하게 돈을 벌었다.
‘전쟁 용병으로 뛰는 거보다야 못하다만, 밥값은 충분히 했지.’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과 별개로, 지금의 아침 식사를 먹고서 바로 이 마을을 뜰 계획이었다.
“다들 아무 생각 없이 사는구먼…… 뭐. 나도 그랬다만…….”
전생을 생각하며 테스는 중얼거렸다.
하루살이 같은 용병들의 모습을 보니, 현생의 자신과 전생의 자신이 비교돼서 꽤 우울 했다.
분명 동일한 영혼일진데 왜 이 모양이 되어 버린 걸까.
“하, 참.”
개꿈으로 치부하기에는 지금도 생각만 하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각성해 버린 것이다.
테스는 먹던 것을 마저 전부 다 먹고 잠시 멍하니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계획 없이 살다가 스러지는 삶. 윤회전생이라는 개념을 전생에서 배웠기에, 이 모든 것이 잘 짜여진 하나의 연극처럼 보인다.
삶은 이토록이나 허망한 것일까.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전생의 기억에서부터 자아와 감정이 넘쳐서 현생의 자아를 넘본다.
이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자신이 아닌. 전생의 자신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게 더 나을 것이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악하고 적당히 요령 피우면서 살았던 자신이다.
전생에서는 하루 2시간만 잠을 자고 수련하고 의술을 공부했으며 문파를 이끌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잠을 자면 늘어지게 열 시간을 자고 마법 수련은 얼렁뚱땅 해대고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현생의 자신보다 전생의 자신이 더 낫다.
안다.
더 나은 사람이 누구인지.
“하지만…….”
하지만.
그래. 하지만 말이야.
“지금의 나도 만족스럽게 살고 있었다고…….”
울컥한다.
기분이 나쁘다. 과거의 자신에게 지금의 나를 내어주는 게 너무나도 꼬운 기분이 든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 어. X바. 잘난 건 아는데!
그렇다고 지금의 나를 개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전생의 기억에서 흘러나오던 것이 다시 되돌아간다.
그 기묘한 감각 속에서, 테스는 이것이 단순한 전생의 각성이 아님을 알았다.
‘무언가 비밀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중에 어떻게든 알아내야 하리라.
그렇게 전생의 기억이 본래대로 되돌아가고. 기묘한 고양감 속에서 테스는 입을 연다.
“좋아. 결정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용병들로 가득한 식당의 구석에서, 테스는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선언을 자기 스스로에게 한다.
그것은 맹세이자 선언. 그리고 전생의 비집어 옴을 제 스스로 틀어막은 오기의 결과.
“전생에 실패한 우화등선. 내가 해내고 만다. 전생의 나 새끼도 못했던 거를 내가 해내면, X바. 내가 더 대단한 거 아니냐. 그치?”
전생의 늙은 얼굴이 빙긋 웃으며 ‘정답이다, 애송아.’라고 답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테스 역시 홀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처럼 나태한 삶이 아닌, 제법 격렬한 삶이 테스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