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길가메시의 최후.
186. 길가메시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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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에게서 시작된 황금빛 뇌전은 지구 전체를 눈부시게 만들었다.
비록 찰나이기는 했지만, 그 힘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지구에 있던 모든 존재는 경외심을 느꼈다.
세주가 보여준 힘은 대단했다.
대신 그만큼 부담도 있었다.
『후······, 뒤지겠군.』
거친 숨을 내쉬는 세주의 손끝이 떨렸다.
게다가 막대한 힘이 빠져나간 탓에 생겨난 탈력감은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냥 뭐가 됐듯 쉬고 싶네.』
전투 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 당장은 뭐든 하기 싫었다.
현자가 된 느낌이랄까?
그래도 그럴 수 없었기에 세주는 정신부여 잡은 채 정면을 쳐다봤다.
파지직-! 치이익-!
시선이 향한 곳에는 그의 뇌전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눈을 가릴 정도의 수증기와 스파크가 일어났다.
세주는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새끼, 더럽게 튼튼하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증기가 전부 바람에 날려 사라졌고, 그 자리에 있던 데미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하지만 데미안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몸 곳곳에는 뇌전으로 인한 화상으로 가득했고, 입에서는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 ······. 』
누스의 앞에서도 크게 감정 변화가 없는 데미안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주를 보는 데미안의 눈동자는 거칠게 흔들렸다.
『드디어 그 고고한 얼굴에도 변화가 생겼네.』
그런 데미안을 본 세주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얄미운 거 빼면 누스 그 새끼와 안 닮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만한 것도 닮았군. 설마 네놈이 언제까지 나보다 강할 거라고 생각했나?』
『 ······. 』
데미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세주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오만했군.’
그의 말이 맞았다.
데미안은 당연하게 세주를 약자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방심했고, 그 결과는 지금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군. 내 오만함이 방심을 불러왔어.』
『재수 없는 새끼 ······.』
순순히 인정하는 데미안의 모습에 세주의 미소가 팍 식었다.
‘빌어먹을 놈이군.’
데미안이 별다른 도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인 것이다.
잘못된 것이 아닌,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할 행동이지만 그 모습이 세주를 더 짜증 나게 했다.
『하지만 방심을 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다.』
검을 소환한 데미안은 진지한 얼굴로 세주를 주시했다.
그의 엄청난 회복력으로도 쉽게 회복하지 못하는 상처를 얻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강해진 건 저자만이 아니다.’
불과 며칠 전에 데미안이었다면 세주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초의 광인 중 하나인 대교주를 흡수한 그 역시 강해진 상태, 방심으로 인해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질 거란 생각은 않았다.
‘이거 상황이 피곤하게 흘러가네 ······.’
다시 달리진 데미안의 분위기에 세주는 속이 쓰렸다.
그도 그럴 게, 세주는 데미안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진심을 다한 공격을 한 것이고, 굳이 구름이 있는 환경으로 데리고 온 것도 거기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예상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로 통구이가 돼야 했었는데······.’
그의 예상대로였으면 일격에 데미안은 죽었어야 했다.
‘역시 시간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나?’
세주는 자신의 수준이 데미안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하온이라는 괴물의 도움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같은 경지에 올랐어도, 머문 시간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황은 유리하다.’
파지직-!
아직도 데미안의 몸에서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그의 뇌전이 점점 데미안을 파괴하고 있었다.
불사에 가까운 회복력을 가진 데미안이 회복을 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쪽도 잘해주는 거 같고.’
멀지만 그의 감각에 느껴졌다.
태초의 신수였지만 이제는 타락한 흉수를 상대하는 그의 동료들이 잘해주고 있었고, 아직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은순이가 있는 쪽은 걱정하지도 않았다.
‘최대한 놈을 잡아둔다.’
세주는 결단을 내렸다.
자존심이 상하는 행동일지 몰라도, 다시는 누군가 피해를 보는 것을 보기 싫었다.
그런 것이 자신의 자존심보다 훨씬 중요했다.
『어디 달라지는 게 있는지 끝까지 해보자고. 』
세주는 다시 한번 황금빛 뇌전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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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로드의 딸이며, 실버 일족, 아니 드래곤의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평가받은 은순이.
그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달랐다.
드래곤이 종의 정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시무시한 육체? 마나를 지배하는 지배력?
이런 힘을 가진 종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종의 정점으로 불리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드래곤이 남은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지능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다.
보통 하나를 보고 열을 깨닫는 자들은 천재라 부르고, 보통 하나를 보고 백을 깨닫는 자를 보고 괴물이라 부른다.
드래곤은 태생적으로 하나를 보면 백을 깨닫는 괴물 같은 자들이었다.
은순이는 그런 드래곤 중에서도 특출났다.
그녀는 하나를 보며 천, 아니 아예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은순이에게 태초신의 힘을 사용해서 하나의 차원을 창조한 것은 수많은 영감으로 다가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영감 중에서 하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가 지금 펼쳐졌다.
“······설산?”
길가메시를 따르는 초월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도 그럴 게, 초월자의 감각을 속이고 공간을 이동시켰다.
은순이가 만들어낸 푸른 빛이 사라지고 눈을 뜨니 사방에서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보통 설산은 아니다.”
“무슨 눈보라가 블리자드라고 해도 되겠군, 마나를 그냥 뚫고 들어 온다.”
“이곳 차원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설마 환영 마법은 아니겠지?”
“여기 초월자가 몇인데 환영 마법을 눈치 못 챌까?”
“공간 분리?”
“아니다, 공간 분리보다는 영역에 가까워. 하지만 영역하고는 또 다르다.”
단순한 눈보라가 그들의 마나를 뚫고 있었다.
재단할 수 없는 상황에 초월자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들 앞으로 길가메시가 나왔다.
길가메시는 붉은 눈동자로 은순이를 주시했다.
“실로 놀랍군, 그대는 정녕 드래곤이 맞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눈에는 은연중 무시가 깔렸었다.
상대가 드래곤이라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영웅왕, 세상의 모든 신을 멸절시킬 존재인데 고작 드래곤이라고 무엇하겠는가.
종의 정점이라 불리는 드래곤이라 한들, 그에게는 그저 덩치 큰 생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혹시 그대가 창조주인가?”
길가메시는 현재 자신들이 있는 공간이 은순이가 만들어낸 차원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아까와 달리 태초신의 파편 없이, 새로운 차원을 창조해낸 은순이의 모습에 창조주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은순이는 굳이 길가메시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굳이 적에게까지 이해를 시킬 정도로 은순이는 너그럽지 않았다.
“오만한 인간, 그대가 말한 대가가 내게 물음을 구하는 것인가?”
“······.”
은순이의 말에 항상 여유 있던 표정을 짓던 길가메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짐이 잘못 생각했구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대를 벌한 후 듣도록 하지.”
흉악하게 일그러진 길가메시의 얼굴, 완전히 여유가 사라진 그는 진심으로 힘을 발산했다.
그의 몸에서는 살벌한 검붉을 기운과 따스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모순되는 힘은 뒤섞이며 사방으로 영향력을 펼쳐갔다.
이러한 기사에 은순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신기한 인간이군.”
은순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의 인간이 뿜어내는 기운은 천살의 기운과 용사의 기운이었다.
세상을 멸할 기운과 세상을 구할 기운, 모순되는 힘이 한 인간의 몸에 있었다.
원래라면 두 힘이 내부에서 격돌하며 몸이 터져 죽어야 정상이었다.
‘게다가 가엽군.’
타고난 별의 운명이란 단순히 힘만 주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저렇게 강력한 운명 두 가지를 타고 났다면 정상적인 삶은 힘들었을 것이다.
원래 드래곤이라면 느낄 감정은 아니었지만, 강하온과 유대가 생긴 은순이는 달랐다.
그에게 이제 인간은 벌레 같은 존재가 아닌, 하나의 개체로 인식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
은순이한테는 없애야 할 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적을 배려할 정도로 너그럽지 않았다.
“짐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드래곤이여.”
길가메시의 검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검에는 지독한 하늘의 살기와 황금빛 용사의 기운이 스며드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힘이 담긴 검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짐의 편에 서라, 짐과 함께 세상의 악이 되는 모든 신을 죽이지 않겠나?”
“내가 그 제안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쉽군, 짐을 원망하지 마라. 드래곤이여.”
길가메시는 아쉬움에 고개를 저으며 검에 담긴 힘을 은순이를 향해 쏘아냈다.
“무시무시한 힘이군.”
길가메시의 전력은 은순이도 인정할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 저 공격을 그대로 맞는다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얼어라.』
나지막한 은순이의 말이 떨어지자, 세계의 법칙이 정립됐다.
현재 이곳은 은순이가 직접 창조한 차원이었다.
이곳에 한에서는 은순이가 창조주나 다름없는 셈이다.
쩌쩌적-!
길가메시의 무시무시한 공격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길가메시, 뒤에서 공격을 준비하던 초월자들, 게다가 시간까지.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후······.”
시간마저 얼어붙은 차원 속에서 은순이가 움직였다.
그녀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녀에게도 태초신의 힘을 엿보고 사용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주르륵-.
그 증거로 그녀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대단하네.”
그녀의 시선은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멈추지 않은 존재에게 향했다.
“······.”
길가메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몸은 얼어붙었을지 몰라도, 그는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당황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구나.”
은순이는 태초신의 파편으로 얻은 깨달음이 없었다면, 길가메시와 자신의 위치가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길가메시의 힘은 강력했다.
“못 미더운 동료가 있어서 끝내야 할 거 같군, 이만 사라지거라 과거의 망령이여.”
은순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얼어붙었던 모든 것이 얼음 알갱이가 되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차원을 통틀어 최초의 제국을 세운 황제, 영웅왕이라 불렸던 길가메시는 자신의 제국을 멸망시킨 신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