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거래 성립
153. 거래 성립
#
빛의 신 누스가 거주하는 차원은 어둠이 존재하지 않은 곳이었다. 모든 만물이 빛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곳이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신전, 이질적인 둘이 나타났다.
데미안과 레이나였다.
“······섬뜩한 곳이네요.”
땅이며 건물이며 모든 것이 빛으로 이루어진 차원, 단순한 모습만 보면 아름다운 예술 작품처럼 보이겠지만, 레이나한테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에너지가 눈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빛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무시무시할 뿐이었다.
『······따라와라.』
데미안은 레이나를 잠시 쳐다보다 앞으로 걸었다.
“알았어요.”
레이나는 구경을 멈추고, 데미안을 곧장 따라서 움직였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걸을 수 있는 건가요? 분명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
빛의 신 누스님의 권능이라 말하려던 데미안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 대답했다가는 레이나는 쉬지 않고 질문을 할 게 분명했다.
“너무 무뚝뚝하시네요.”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레이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두려운 지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그녀만의 방법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라.』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던 데미안은 말을 했다.
옆에서 쫑알거리는 것이 상당히 거슬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일 생각 아니셨나요?”
레이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용기 내어 말했다.
『······』
데미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역시 죽는군요······.”
레이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긍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미안이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누스의 명이 있기에 데리고 온 것뿐이다.
그가 결정한 것은 없었다.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선택은 자신이 아닌, 누스가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그저 누스의 명을 따를 뿐이다.
“아······.”
씁쓸하게 터벅터벅 걷던 레이나가 멈칫하며 길게 탄식했다.
그녀가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그대가 가이아의 파편이구나.』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의념, 권좌에 앉은 빛의 신 누스가 보였기 때문이다.
누스의 힘은 예상대로 엄청났다.
‘하온 님과 비슷한 느낌이야······.’
마치 강하온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누가 강하다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그냥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있다는 것을 짐작만 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저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레이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죽음은 각오한 지 오래, 마지막은 당당하게 행동할 생각이었다.
『오호?』
누스는 당찬 레이나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 겁쟁이하고는 다르구나.』
레이나는 누스가 말하는 겁쟁이가 가이아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널 어떻게 할 거 같으냐?』
“······가이아님을 찾으시려는 거겠죠.”
누스의 물음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녀는 태초신의 파편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누스가 가이아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속에 있는 가이아의 파편이 숨어있는 가이아를 찾을 방법이라는 것도.
『그랬었지.』
“······그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요?”
예상과 다른 대답에 레이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그래, 더 안전한 방법을 찾았거든.』
“그게······.”
레이나는 그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정신을 잃으면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데미안은 쓰러지는 레이나를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이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는 누스를 보며 물었다.
『그냥 놓고 가라, 고생했다.』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레이나를 바닥에 조심히 두고는 누스의 신전 밖으로 나갔다.
『파편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군.』
누스는 처음에는 레이나를 그저 가이아를 찾을 의도로 데려왔다.
하지만 직접 보니, 그녀에게서도 조금이나마 태초신의 힘이 느껴졌다.
가이이가 가진 태초신의 파편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힘이 비록 아주 미약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누스는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고, 레이나의 몸도 두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그는 레이나를 데리고 빛과 함께 사라졌다.
#
데미안의 습격 이후, 강하온의 일상은 항상 같았다.
이른 아침 바오와의 특훈.
아이들을 아카데미에 보낸 후, 세주와 특훈.
모두가 자는 밤에는 드라쿨과 특훈.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한 일상이었다.
전부 힘들어했지만, 특훈은 효과가 있었다.
하루하루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들을 아카데미에 데려다주고 오자, 세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온.』
강하온의 예상대로 세주는 할 말이 있었다.
“준비는 끝났나?”
『오늘은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
요새 매일 맞으면서, 아니 특훈을 하면서 세주는 뭔가 깨달음 비슷한 것을 얻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서 그 깨달음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세주는 싸늘한 강하온의 눈빛에 멈칫했다.
오늘 하루 특훈을 쉬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혹시 특훈을 쉬겠다는 건 아니지?”
『······.』
세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강하온의 말이 맞았으니 말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끝낼 테니까 준비해라.”
강하온은 특훈을 뺄 생각이 없었다.
강해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꾸준함이었다.
무슨 핑계가 있어도 소용없었다.
『······.』
세주는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평소보다 강한 특훈 강도에 세주는 정신을 잃었다.
“오랜만에 시간이 비네.”
최근부터 24시간을 쪼개서 살다 보니 오랜만에 비는 시간이 생겼다.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강하온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무려 50년이었다.
판게아에서 한빛나를 만나기 위해 보낸 시간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금방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언제 찾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잡아 온 대교주가 죽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각을 증폭하는 영혼의 플라스크 안에서 지독한 고통에도 묵묵히 버텼다.
“징글징글한 새끼······.”
대교주의 정신력은 강하온이 생각해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더 길어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가이아 덕분에 아직 한빛나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다는 법은 없었다.
『하온, 잠깐 여기로 와라.』
한창 한빛나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은순이의 의념이 들렸다.
강하온은 재빨리 그녀의 실험실로 향했다.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자, 은순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저기 저 미친놈이 대화하고 싶데.”
은순이는 그동안 질렸는지, 거대 플라스크 안에 있는 대교주를 보고 인상을 팍 썼다.
하긴 무슨 짓을 해도 반응을 하지 않으니, 드래곤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 있었다.
강하온은 그런 은순이를 보고 피식 웃고는 플라스크 앞으로 걸어갔다.
“이봐, 뭘 대화 하고 싶다는 거지?”
『거래를 제안한다.』
지금까지 잡혀 온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대교주의 의념을 듣는 순간이었다.
“거래? 지금 네 처지가 거래를 제안할 처지인가?”
『싫으면 거절해도 좋다, 허나 나한테 원하는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할 거다.』
대교주는 단호했다.
인질로 잡힌 불리한 상황이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했다.
“웃기는군.”
강하온은 오랜만에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트렸다.
“지금 네 처지가 어떤지는 알고 있기는 한 건가?”
대교주는 인질로 잡혀있는 처지였다.
정상적이라면 거래가 아닌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라는 거다.
『······.』
“대답하지 않은 걸 보니까 알고 있나 보네.”
광인의 상식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그래, 원하는 게 뭐지? 거래하면서 네가 원하는 게 있을 텐데?”
일단 원하는 것을 제시하라고 했다
『그 전에 거래하겠다고 확답을 듣고 싶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강하온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싸늘하게 굳었다.
아쉬운 것이 있어 한발 양보했더니, 대교주는 이제 보따리까지 뺏으려고 하고 있었다.
거래 내용도 말하지 않고 거래를 하자, 이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이봐,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왜 너를 잡아 왔는지?”
『······.』
대교주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암인이 강하온의 아내를 납치했고, 지금 그녀를 찾으려 한다는 것을.
“내가 빛나가 있는 곳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암인을 처리하게 될 텐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한가?”
강하온의 말이 맞았다.
사실상 대교주가 강하온의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득인 상황이었다.
애초에 누스와 테스, 광인과 암인은 대척점에 있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암인을 치워주겠다고 한 것이니 말이다.
『······.』
대교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정신 나간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거래 조건을 말해. 그렇지 않다면 나와 거래는 할 수 없을 거다, 괜한 협박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건 빛나를 찾는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단축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강하온은 강하게 나갔다.
이미 대화를 하자고 한 순간부터 대교주는 아쉬운 것이 있다는 거였다.
대교주가 뭘 원하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그는 자신의 거래 조건을 말할 것이다.
강하온은 확신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곧 강하온의 확신은 증명됐다.
『······만약 일이 해결된다면, 교단을 적으로 두지 않았으면 한다.』
대교주가 겪은 강하온의 강함은 추측이 안 됐다.
그의 뛰어난 직감은 강하온을 교단의 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미 적이 됐지만, 지금이라도 그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자신의 목숨 따위는 버린 지 오래, 어떻게든 교단, 아니 누스를 지키고 싶은 그의 마지막 충성이었다.
“그게 거래 조건이라고?”
강하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에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물은 건가? 뭐, 당연히 아니겠지.”
이제야 대교주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대신 거래 조건을 조금 바꾸도록 하지.”
『그건 무슨 말이지?』
암울한 교단의 미래를 생각하고 아쉬워하던 대교주는 솔깃한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빛나를 찾은 뒤에 너를 풀어주지.”
『나를 풀어준다고?』
대교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대신 네가 할 일이 있다. 레이나를 이곳에 다시 데려다 놓고, 다시는 지구를 노리지 않게 직접 설득해라.”
원래 강하온이었다면 자신을 건드린 누스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한빛나와 레이나를 찾은 것을 우선으로 하기로 했다.
이건 최초이자 마지막 양보였다.
“어때? 거래하겠나?”
『······고맙다.』
대교주는 진심으로 강하온에게 감사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누스를 설득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교단을, 누스를 위하는 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