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레이나의 결단
146. 레이나의 결단
#
수상한 존재를 휘감고 있던 사슬이 풀렸다.
철그럭-!
고요한 차원의 틈새라 그런지, 유독 사슬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
강하온은 수상한 존재를 보며 경계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자신과 비슷, 혹은 그 이상이 되는 격을 가진 존재.
그가 자신을 적대하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수상한 존재였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수상한 존재는 강하온의 생각이 느껴졌는지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으음, 시간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약속대로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수상한 존재는 알 수 없는 말을 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강하온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이질적인 힘을 느껴졌다.
“이게 무슨······.”
『거부할 것 없다, 네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켜 줄테니.』
곧바로 반격하려 했던 강하온은 수상한 존재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당신 정체가 뭐지?”
『나는 나일 뿐이다, 나중에 또 보자꾸나.』
그렇게 강하온은 이질적인 힘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됐고, 수상한 존재와 헤어졌다.
『많이 달라졌구나.』
수상한 존재는 강하온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잠시 있다가 흔적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으음, 설마? 아니겠지.”
강하온은 순간적으로 수상한 존재의 정체로 의심되는 것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세주에게 들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드디어 찾았네.”
수상한 존재는 약속을 지켰다.
강하온의 앞에는 포탈이 하나 있었다.
틱-!
데카에게 받은 나침반은 정확히 포탈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하온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화악-!
포탈에 들어가는 순간,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야 살 거 같군.”
그뿐만이 아니라, 강하온을 옥죄던 강력한 압박도 전부 사라졌다. 지금 들어온 곳이 확실하게 안전한 차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숨어 있는 새끼들이 별 지랄을 다 하네.”
강하온 어이가 없었다.
이곳은 자신을 피하기 위한 은신처였다.
그런데 거대하고 의리의리한 신전까지 만들어서 지내고 있었다.
“안 그래?”
신전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강하온은 누구한테 묻듯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신전 안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신전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로브에 금박이 섞인 가면을 쓴 존재, 교단의 대교주였다.
과거, 교단 신도의 기억을 읽으면서 봤던 모습과 같았다.
“웃긴 놈들이 많네, 너도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보네?”
차원의 틈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수상한 존재도 그랬지만, 지금 대교주라는 녀석도 그랬다.
마치 자신이 올 거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
강하온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교주는 강하온이 올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데카가 이곳의 위치를 넘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도망가지 않았지? 여태까지는 쥐 새끼처럼 그렇게 도망 다니더니.”
강하온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차원의 틈새라 미지의 곳으로 이동까지 하며 도망 다녔다.
그런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이상했다.
혹시 함정이라도 팠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현재 이 공간에서는 대교주를 제외한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얻는 거를 위해서는 희생도 필요하니까.”
대교주, 그는 교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존재를 희생시킬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보다 교단, 너 나아가서는 자신을 창조한 누스가 최우선이었다.
번쩍-!
그렇게 말하고 대교주는 바로 아바타를 사용했다.
데미안이 가이아의 파편을 취할 때까지, 자신은 시간을 버틸 생각이었다.
그게 누스가 원하는 일이었다.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전투의 기본은 상대방을 파악하는 것이다.
강하온은 그런 쪽으로는 전문가였다.
상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대교주라고해도 다르지 않았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다.”
하지만 강하온은 대교주가 뭘 노리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순이와 세주, 드라쿨과 바오를 믿었다.
게다가 호이까지.
그들이 있다면 강한 적이 나타나도, 자신이 오기 전까지 버티는 것은 가능했다.
지잉-!
강하온은 곧바로 영역을 전개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황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
대교주도 질세라, 자신의 영역을 전개했다.
빛 덩어리가 허공 곳곳에 떠 있는 순백의 공간도 생겨났다.
하지만 영역만으로도 힘의 격차는 확연히 드러났다.
강하온의 영역에 비해서 절반도 되지 않은 대교주의 영역, 애초에 대교주라고 해서 광인 중 제일 강한 게 아니었다.
첫 번째 사도 데미안이 광인에게 무력적으로 의지가 되는 존재라면, 대교주는 가장 먼저 생겨난 광인이라는 상징성으로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물론, 그렇다고 대교주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상대가 강하온이라는 것일 뿐이었다.
쿠쿠쿵-.
그때, 강하온 주변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투트득-! 두두둥-!
그리고 죽음의 땅 곳곳에 꽂혀있던 수많은 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하온이 심상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영역이었지만, 그 무기는 실질적인 물리력을 가지고 있었다.
떠오른 수백 아니, 수천이 넘어가는 무기는 일제히 대교주를 향해 노려졌다
“빨리 끝내자.”
강하온은 처음부터 진심으로 전투에 임했다.
차라락-!
그 순간, 수많은 무기는 그대로 대교주를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
강하온이 대교주와 전투를 막 시작했을 시점, 강하온의 저택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치러지고 있었다.
파지직-! 쩌저적-! 쾅-! 쾅-!
번개가 번쩍이고, 폭풍이 몰아쳤으며, 순식간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깨지고를 반복했다.
세상의 종말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모습이었다.
무시무시한 모습과 달리,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휘리릭-!
피의 폭풍이 데미안을 덮쳤다.
서걱-!
하지만 데미안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서 드라쿨의 공격을 베어냈다.
투드득-!
피로 이루어져 있던 폭풍은 힘을 잃고, 그대로 핏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하지만 모든 공격을 막았던 데미안도 비처럼 떨어지는 핏방울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마음먹는다면 다 피하겠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노리는 적이 있는 상황, 핏방울은 그냥 무시했다.
쩌저적-!
그때 은순이가 나섰다.
은순이는 곧바로 앨솔루트 제로, 절대 영도까지 순식간에 내려가는 마법을 사용해서 대기마저 얼려버렸다.
당연히 드라쿨이 만들어낸 피도 얼었다.
데미안의 몸에는 붉은 얼음이 곳곳에 생겨나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스르륵-!
그때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나무줄기가 움직이더니 데미안의 발을 휘감았다.
파지직-!
그 후, 기다리고 있던 세주는 다시 ‘뇌신의 성창’을 준비했다.
이미 드라쿨의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준비하고 있던 ‘뇌신의 성창’은 기다렸다는 듯 완성됐고, 그대로 데미안을 향해서 던졌다.
넷이서 따로 합을 맞춰 본 것은 아니지만, 오래된 한 팀처럼 넷의 공격은 유기적으로 완벽한 합을 만들어냈다.
『······.』
넷은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번 공격은 데미안에게 타격을 줬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들의 생각을 짓밟았다.
데미안은 평온한 얼굴로 손에 들린 검을 휘둘렀고.
서걱-!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꿰뚫을 거 같았던 뇌창은 반으로 갈라졌다.
파지직-!
그 과정에서 물로 이루어진 데미안의 검신을 타고 번개가 흘렀지만, 이번에는 데미안에게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았다.
검신을 타고 내려가던 번개가 방전된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길······, 빌어먹을 검이군.』
세주는 데미안이 든 검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검신은 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손잡이 쪽이 달랐다.
손잡이는 돌과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까와 달리, 여러 권능을 사용해서 만든 검이었다.
『이미 그대들은 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그리 필사적인 거지?』
넷의 완벽한 합공을 막아낸 데미안은 바로 반격을 하지 않고, 넷을 쳐다보며 말했다.
『강하온이라 자, 그자가 오면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인가?』
데미안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 강하온이 오기 전까지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데미안이 지독하게 강했지만, 강하온은 더 강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금하군.』
데미안은 넷의 반응에 강하온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과연 어떤 자이길래, 지금까지 그가 만나온 강자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넷이 완전히 믿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만나보고 싶었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꼭 보고 싶군.』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가이아의 파편, 레이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욕심보다 누스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이만 끝내도록 하지.』
데미안은 진심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미 대교주를 미끼로 실행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대교주를 그대로 버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왕이면 곧바로 은선처로 돌아가서 대교주를 지키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
확 달라진 데미안의 분위기에 그를 상대하던 넷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까지도 고작 버티는 것이 한계였는데,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그런 생각조차 확실히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기껏해야 1분인가?
오랜 시간 더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잠깐만요.”
데미안이 손에 쥔 검을 뻗어버리려는 일촉즉발의 상황, 은순이가 있는 뒤쪽에서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나······.”
은순이는 자택에서 걸어 나온 레이나를 보면서 인상을 팍 썼다.
지금까지 힘겹게 지키고 있는 이유가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이아의 파편이군.』
데미안은 레이나를 처음 봤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한 힘 때문에 레이나가 본인이 찾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맞아요, 제가 당신이 찾은 가이아의 파편이랍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전부 상기된 분위기였지만, 레이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과 달리,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말과 달리,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고, 여기 있는 존재 중 그런 미세한 떨림을 느끼지 못할 존재는 없었다.
『이렇게 나를 멈추게 한 것은 이유가 있겠지?』
“네, 제가 당신을 따라갈 테니 더는 이분들을 다치게 하지 마세요.”
레이나는 자신을 담보로 전부의 안위를 요구했다.
『으음, 그러도록 하지. 어차피 나에게 필요했던 것 가이아의 파편, 그대 하나였으니 말이야.』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은순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언니,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에요.”
그동안 은순이와 친해졌던 레이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강하온과의 약속을 어기고 미래를 확인했다.
너무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미래에서 결국에는 자신이 끌려가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너무 무서웠고, 그 미래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레이나는 그러기는 싫었다.
“······.”
은순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전부 레이나가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언니,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해도 될까요?”
“······말해.”
“제방 서랍에 편지가 있어요, 하온님이 오시면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레이나의 말에, 현장에 있는 이들은 그녀가 애초에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런 선택을 하게 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꼈다.
“고마워요.”
레이나는 은순이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레이나는 천천히 데미안에게 다가갔고, 그렇게 둘은 차원을 가르고 사라졌다.
“······.”
넷은 그렇게 둘이 사라지는 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쩌억-!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앞에 차원이 열리면서 강하온이 걸어 나왔다.